[좌익 운동권 출신들 '소시오패스'와 유사] ② 좌익 운동권, 엘리트 의식 갖게 된 배경

윤석열 대통령 탄핵 상황이 이어지면서 2030 청년들과 6070 노년층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좌익 운동권 출신의 정신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30년 이상 주변 좌익 운동권 출신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엘리트 의식과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다.
◇ 별 볼일 없었던 좌익 운동권들, 시대적 상황 덕분에 각계각층 고위층 차지
운동권 출신들이 가장 많이 포진한 직업은 언론계와 정치계, 출판, 문화·예술 분야다. 1962년부터 1971년 출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연령대가 모두 좌익 운동권은 아니다. 당시 대학 진학률은 30%대였고, 그 중에서도 소수만이 운동권 활동을 했다.
운동권 활동은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전대협)만 있는 게 아니다. 민족해방계(NL), 민중민주계(PD), 그전의 시민민주혁명파(CDR), 민족민주혁명파(NDR), 민중민주혁명파(PDR)부터 좌익 운동권의 계파는 마치 개신교계 이단 논쟁을 연상케 할 만큼 복잡하다.
이런 조직들은 대학 신입생을 운동권으로 끌어들이는 데 동아리, 방송국, 학보사, 학술연구모임 등을 이용했다. 이들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대학 학보사 출신, 대학 방송국 출신을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많이 채용했다. 그 결과 언론계가 전반적으로 좌익화됐다. 문학계와 역사학계, 사회과학 분야에도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흘러들어갔다. 우파 성향의 출판사가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대학 운동권 활동이 더 이상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자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각종 전문직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다. 경찰 간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도전하는 사람도 많았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노조 활동이 합법화되자 기업에 취직하는 운동권 출신도 많아졌다. 노조 운동에 투신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 사회를 이끌던 기성세대, ‘산업화 세대’에 기가 눌려 함부로 나대지 못했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방향을 본격적으로 잡게 된 것은 1997년 11월 외환위기와 이듬해 2월 김대중 정권의 등장이다.
앞서 김영삼 정권은 전두환 정부에 복수하는 데 집중하고, 운동권 가운데서도 일부만 구제했다. 반면 김대중 정권은 운동권 출신들 특히 전과자들 구제에 많은 노력을 했다. 심지어 재벌 회장들을 불러 "운동권 출신들을 좀 채용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운동권 출신을 챙겼다. 실제 당시 대우그룹과 SK그룹 등은 수백 명의 운동권 출신들을 특별채용 했다.
운동권 출신들에 대한 사회적·물적 보상을 해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5.18 사태를 ‘성역’으로 만들기 시작한 ‘5.18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를 만든 것도 김대중 정권 때다. 여기다 1970년대 초반부터 ‘페미니즘 운동’을 했던 고 이희호 여사 때문인지 김대중 정권은 여성부를 만들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운동권 출신은 우리 사회의 ‘특권층’으로 부상했다.
◇ 산업화 세대 퇴출하고 좌익 운동권 출신 철저히 챙겼던 김대중 정권
김대중 정권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며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 대표였던 윌버 로스를 초빙했다. 또한 공적자금 기금을 조성해 소위 ‘산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과거 LG 전자가 SK에게 사업 부문을 양도한 것도 이때였다.
외환위기 직후 30대 그룹 가운데 10개가 해체되고, 은행 14개 가운데 10개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정부의 ‘산업 구조조정’에 반대하기 어려웠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중반에 출생한 ‘산업화 세대’는 인건비 절감을 명목으로 강제로 퇴직하게 된다. 당시 퇴출당한 사람 대다수는 40~50대 후반까지였다.
소위 86세대는 이들이 나간 자리를 차지했다. 대다수 회사나 조직에서 임원부터 부장·차장급까지 구조조정을 당하거나 명예퇴직으로 물러나자 당시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이었던 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회사나 조직은 일단 조직 운영을 위해 이들을 승진시켰다. 졸업 평점 3.0이 넘는 사람이 소수에 달할 만큼 대학 시절 공부하지 않은 86세대들이었지만 대다수 기업이 매뉴얼이나 관례가 있어 일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반면 운동권 출신을 포함한 86세대는 자신들이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나 초고속 승진을 한 것처럼 위장했다. 여기에 웬만한 규모의 기업마다 노조가 생기면서 이들은 기업 측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우리나라에서 연봉 1억 원을 처음 돌파한 것도 이들 세대다.
김대중 정권이 정부 차원에서 키웠던 IT 기업들 또한 86세대를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우리나라 IT 벤처 기업 1세대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생겨났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은 이들을 외면했다. IT 벤처 1세대는 대기업에 아이템을 뺏기거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고사했다. 당시에는 M&A 개념도 제대로 없을 때라 제 값을 받고 회사를 넘기지도 못했다.
김대중 정권은 86세대들이 창업한 IT 기업을 본격적으로 밀어줬다. 네이버, 카카오 등과 같은 플랫폼 업체를 비롯해 사기에 가까운 아이템으로 주가를 끌어올린 기업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때 IT 벤처기업들이 즐비했던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는 "강아지도 1만 원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벤처업계에 돈이 넘쳐났다. 86세대의 연봉이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된 계기이기도 하다.
◇ 경력도 없는 좌익 운동권 출신들 출세시키고 자산가 만들어준 노무현 정권
김대중 정권에 이어 들어선 노무현 정권은 운동권 출신이 제도 정치권에 진입하고, 86세대들이 ‘자산가’로 변신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당시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소득 대비 높은 편이라고는 해도 급여소득자가 살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에서 금융권의 담보대출을 풀어주면서 집값이 폭등했다. 평균 2~3억 원대이던 서울 아파트 값은 노무현 정권 말 7~8억 원대로 뛰었다. 상승률이 94%에 달했다. 당시 일부 저축은행은 아파트 시가의 97%까지 대출을 해줬다. ‘갭 투자’가 시작된 시기다.
노무현 정권은 또한 대통령 탄핵과 헌법재판소 기각 판결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호남 위주 민주당을 86 운동권 세대 중심 열린우리당으로 대체했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86 운동권 지배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중진의원들 대부분이 이때 정치권에 들어갔다.
노무현 정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열린 채용’이라며 운동권 출신들을 고위 공직자로 만들어줬다. 운동권 활동을 하다 전과자가 돼 보통 기업에 입사하지 못하고 초·중교 학원 강사로 일하던 사람, 장사하던 사람 등을 경력직 공개채용을 통해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국가정보원, 청와대 등에도 이런 사람들이 채용됐다.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볼 때 86 운동권 세대는 무능력하고 무식한데도 ‘줄’을 잘 타서 출세한 세대로 보인다. 하지만 86 운동권 세대는 자기네가 매우 똑똑하고 현명하며 세상을 보다 좋게 바꾼 ‘도덕성이 최고인 세대’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애초 자기 최면이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리플리 증후군’처럼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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