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熙帝

개요

만주족이자 청나라의 황제. 청나라에 4대째 황제로 이름은 아이신기오르 히오완예이, 한자로는 애신각라 현엽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며 가장 긴 기간동안 재위(실질적인 재위기간(63년 정도)은 그의 손자인 건륭제가 더 길다. 다만 건륭제는 할아버지를 존경했고, 할아버지의 재위기록(61년 정도)을 넘기기전에 양위했다. 하지만 상황이 된 이후로도 실질적인 권력은 건륭제가 쥐고 있었기에 실질 재위기간은 건륭제가 더 길다. 게다가 강희제는 매우 어린 나이에 직위해서 어렸을 때 는 친정을 하지 못하고 섭정을 했기에 그것까지 치면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더 차이난다. )

했다. (두 황제는 기본적으로 수명이 짧았던 전근대 시대 사람임에도 굉장히 오래 살았다.

게다가 황제라는 자리는 나라에 온갖 골치 아픈일을 결정해야 하는 자리이며 전제황권이기에 거의 나라의 대소사 모든 결정을 황제 개인이 결정해야 한다. 제대로 일을 한다면 격무가 강제 되는 자리인데,

이래서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옹정제는 격무로 짧은 제위기간만에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다(옹정제의 죽음은 여러가지 의문점이 있어서 미쓰테리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옹정제는 강희제 말기에 느슨해진 관리들의 기강이나 부패를 척결하는데 힘썼다. 근데 이런 기조가 건륭제 때 또 무너졌다.

옹정제는 워커홀릭으로 본인의 몸을 혹사하면서 까지 관리들을 조이면서 관리했다면(본인 한몸을 위해 천하를 희생하지 않겠다 뭐 그런 식이었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강남에 유람을 떠나기도 하는등

옹정제 만큼 격무를 하지 않았기에 황제 개인으로서는 오래 살았던 것도 있는 것 같다.

또한 중국 황제들은 불로장생과 정력을 위해 방중술과 춘약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건 지금 기준으로는 마약이나 독극물에 가까워서 수명을 더 재촉했다.)

강희제는 68세 까지 살았고, 건륭제는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장수해서 무려 87세까지 살았다.)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부터 영특했던 것도 있었지만, 청나라의 궁중에서 전염병인 천연두가 돌아서 그 형제들이 대부분 몰살 당했음에도 거의 유일하게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천연두를 피해 궁에서 나와 사저로 피신 했는데 그도 결국 천연두에 걸렸지만 살아남았다. 한번 천연두에 걸렸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내성이 생기기 마련, 대신 얼굴에 영구적인 곰보 자국이 남았다. )



그는 재위기간 초 보정대신(아버지인 순치제가 죽기 직전에 아들인 어린 황제 강희제를 보필하고 대신 정무를 맡기게 한 신하들) 중 오배의 난을 진압해서 친정을 했고(오배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는 나이가 어려서 보정대신들이 섭정을 했다), 이후 내부의 잠재적 적인 독립세력인 삼번의 난을 평정했으며, 청나라의 해안지역의 골칫덩이였던 대만의 정씨 왕조를 정벌해서 대만까지 점령했고(대만을 일부지역을 점령했다. 동쪽산악 원주민들까지 정벌해서 대만을 완전히 지배한건 일본이 처음이다.) , 외몽골로 친정을 가서 준가르를 무찌르기도 했다.

(준가르는 청나라 최대 적이었는데 그의 손자 건륭제 때도 청나라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 하자 건륭제는 인종청소를 해버린다. 준가르를 제노사이드하고 점령한 곳이 신장이다.) 1689년 러시아 제국네르친스크 조약을 맺는다.

강희제는 순치제 때 만주족이 중원을 평정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난제들을 해결하고 만주족의 중국 지배가 공고해지는 시기였다. 그의 치세를 강건성세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옹정제, 건륭제와 함께 (건륭제는 최근 평가가 좀 박해졌다) 성군으로 빨리는 황제지만, 사실 이후 청나라가 아편전쟁 등으로 서구의 반식민지 되는 씨앗은 강건성세 때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동시대의 러시아의 표르트 대제가 체찍을 때려가며 근대화를 했다면, 강희제는 서양의 기하학 등에 흥미를 있었지만 취미 수준이었고, 유교에 감화한 황제였다. 중국 통치에는 유교가 적합할지 모르나 결국 강희제때도 동시대 서양에서 무섭게 과학혁명 등이 일어날 때 여전히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뒤쳐지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강희제를 빠는 쪽에서도 후계자문제는 실패했다고 보는데, 확실히 그랬다.

그는 자식도 많았는데 유교에 강화된 황제인지라 적장자를 황태자로 임명했다. 이건 청나라에서 전무후무했던 것으로. 적장자 윤잉은 처음에는 강희제가 기대에 부흥하기도 했지만, 강희제의 치세가 길어지면서 흑화했다.

황태자라는 게 황제에게 평가를 받고 또 다른 형제들에 견제를 받는 자리이니 윤잉은 몇십년간 이런 황태자 자리에 있었다.

또 만주족은 한족과 다르게 적장자가 가계를 잇는 전통이 아니라 능력있는 자라면 적장자가 상관없이 경쟁해서 가계를 있는 전통을 갖고 있었기에 적장자 외에는 다른 황자들이 잘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전 왕조였던 한족의 명나라와 달리 적장자 계승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명나라에서는 정장자가 아닌 황제가 총애하는 첩의 서자들을 황태자로 하려고 하면 대신들까지 엄청 일어났다.

적장자가 아무 견제없이 황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무능한 적장자가 경쟁없이 황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게 명나라가 망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고 꼽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강희제 아들들은 1황자 2황자 4황자 8황자 14황자 등이 서로 신하들끼리 가세해서 파벌을 만들어 치열한 왕위 계승 쟁탈전을 벌였다. (아홉명의 황자들이 재위를 놓고 경쟁했다고 구자탈적이라고 부른다.)

윤잉은 황태자 자리에서 폐황태자 됐다가 다시 복원 되었다가 색니 등과 모반을 꾀했다가 다시 폐황태자 되서 유패 되었고,

(윤잉은 전술 했듯이 청나라 역사에서 유일무일하게 황태자로 임명된 경우로 윤잉 이후에는 황제의 생전에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적은 종이를 특정 장소에 숨겨 놓고 공개하지 않았고 황태자를 임명하지도 않았다. 물론 건륭제 홍력 같은 경우는 너무 유력해서 굳이 말하고 임명하지 않아도 사실상 지휘가 황태자나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황태자였던 윤잉은 그를 미는 신하들 등 파당이 만들어 졌고 본인도 오만방자해 졌다. 게다가 부황인 강희제를 감시해서 윤잉에게 보고하는 자들 또한 있었던 것으로 보다. 강희제는 그런 윤잉으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낀듯. 원래 권력은 부모 자식간에도 나눌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김일성 말년에 딤일성 김정일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

많은 아들들의 갈등 때문에 강희제 말년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수많은 황자들이 존재하고 재위를 놓고 경쟁을 했기에 이는 다음 황제인 옹정제에게도 부담이 되서 옹정제는 황제가 되고 다른 형제들을 엄청 탄압했다.

후계자 문제 외에도 강희제 때의 비판으로 문자의 옥(글자에 감옥이라는 뜻)이 있었는데, 한족 지식인들의 저작에 특히 반청적인 면에서 탄압을 많이 했다. 문자의 옥 같은 경우는 명백하게 반청적인 글이나 저작(이건 청나라 아니라 그 어떤 왕조라도 처벌당하는 게 마땅한 경우다.) 도 있는 반면에.

한자를 파자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 트집을 잡아서 잔인하게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면 아무래도 자유로운 저작활동은 엄청나게 위축 당한다.

사실 문자의 옥 같은 왕조의 필화사건은 청나라 외에 다른 한족 왕조에서도 있었다. 근데 청나라 같은 경우는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구조였기에 한족은 만주족을 오랑캐로 여기고 반청복명 의식이 강했기에 문자의 옥으로 조이고 통제하는 게 어느정도 지배에 필요한 측면도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이런 한족들의 반청 의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청나라는 끊임없는 한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청나라 말기에 멸청흥한적인 기조로 결국 청나라가 멸망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