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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어진.jpg
태조
太祖
직책 고려 1대 국왕
(양력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
후임→
묘호 태조(太祖)
시호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왕(王)
건(建)
생몰기간 (양력)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
재위기간 (양력)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

출생과 가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877년 정월 병술일[1](양력 1월 31일, 음력 1월 14일[2]) 송악(松嶽)의 남쪽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왕륭(王隆, ?-897), 모친은 한씨(韓氏)[3], 조부는 작제건(作帝建)이고, 증조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개국 이듬해 919년 3월에 증조부까지 3대의 시호를 추존하였다.[4]

919년 3월 13일(음) 신사(辛巳)
3대(三代)의 시호(諡號)를 추존(追尊)하여 증조부를 시조 원덕대왕(始祖 元德大王)이라 하고 비(妃)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고 하였으며, 조부를 의조 경강대왕(懿祖 景康大王)이라 하고 비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고 하였으며, 부친을 세조 위무대왕(世祖 威武大王)이라 하고 비를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서문(序文) > 고려 왕실의 세계(高麗世系)[5][6]에 태조의 조상에 대한 기술이 나오는데,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용한 것으로 설화에 가까우며, 태조의 증조부는 당나라 숙종(唐 肅宗, 711년 ~ 762, : 재위 756년 ~ 762년)이라 하는데, 연대도 맞지 않고 믿기 어렵다. 작제건의 모친 진의(辰義), 외조부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 보육(寶育), 외증조 강충(康忠), 외고조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

세조(世祖, 왕륭)는 그 때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이 되었는데, 건녕(乾寧) 3년(896) 병진에 송악군을 가지고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의 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그 성주로 삼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라고 하자, 궁예는 이를 따라 태조(太祖, 왕건)에게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성주로 임명하였다. 이 때 태조의 나이가 20세였다.

훈요 10조

사망하기 전에 후대 왕들을 위해 훈요 10조를 남겼다.

참고 자료

아래 논란이 되는 고려 태조 친필은 오래 전부터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었지만, 학계에는 뒤늦게 알려져 진위 여부를 검토하는데, 부정적으로 보는 것같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