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사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으로 광주민중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명칭

광주사태는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일본에서는 광주사건이라고 부른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사태를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판단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일단 신군부라는 말은 북한에서 만든 말이니 지양해야 할 용어고, 게다가 518 때는 5공이 아니라 최규하 정부 때다) 광주사태가 도리어 중립적인 표현에 가깝다. 일본에서는 광주사건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명칭인 정부의 공식 명칭인'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로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이것도 사실 웃기는 소리다. 518 때는 최규하 정부 때기 때문에 신군부도 아니었다. (신군부라는 말은 북한에서 만든 말이니 가급적 쓰지 않도록 하자) 여기에는 12.12 이후 전두환등이 다 장악했다는 근거없는 음모론적인 이야기가 저변에 깔려 있는 소리다. 이것자체가 잘못된 이야기인데 위키백과나 이걸 인용하는 유튜브에서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518을 이야기 하려면 5.17 조치도 알아야 하는데, 불법부당한 건 당시 정부가 아니라, 언제까지 최규하 신현학 내각이 퇴진 안하면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정부상대로 최후통첩을 한 김대중이야 말로 불법부당한 행동을 한 것이다. 518은 정상 국가라면 응당 진압해야 소요사태다. 폭력은 국가가 독점한다. 미국이었어도 저정도 가기 전에 주방위군을 동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흑인이 저정도도 아닌 소요사태를 일으켰을 때 주방위군을 동원했고, 사후조사에서 국가로서 정당한 조치였다고 정의하였다.)

문제점

화려한 휴가? 화려한 사기

북한 공작원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전남 광주의 동네 양아치들을 꼬드겨서 무기를 쥐여주고, 4시간 만에 전남 지방의 38개소의 무기고를 털고, 자동차 공장을 턴 사건. 나무위키에서는 광주 시내의 군필자들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하나, 계엄군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군대를 면제받거나, 방위 출신이거나, 미성년인 경우가 상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도 무직자, 날품팔이, 학생, 구두닦이, 철공, 목공 등등이 대부분이다.

  • 첫째, 시민군이라는 것도 서로 일면식도 없었던 점.
  • 둘째, 강경파니 온건파니 나뉘어서 말싸움만 한 점.
  • 셋째,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1,2 명 정도만 있었고 모두가 오합지졸이었던 점.

등을 보면 상기했 듯 4시간만에 전남지방 38개소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점이 설명되기 어렵다.

한편, 도청 지하실에 깔려있던 TNT를 전남대생 김창길(22)이 계엄군에 제보하여 도청을 사수했다.

  1. 1995년 8월 17일짜, 검찰, 국방부가 공동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증5) 92-93쪽에 있는 내용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 차량 인솔대는 광주 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주:레토나)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병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 차량(주: 레토나)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300여 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 시내로 진출하였음"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승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확보, 무장하였는데, 13:00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 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35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여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고,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 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카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백여정, M1소총 2백여정, 실탄 4만 6천여발을 탈취하였고, 15:35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하였고,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약, 강진성전파출소, 등을 급습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십여발을 탈취하였다"
  1.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 사태 상황 일지 및 피해 현황”(증6)의 제40-41쪽에 있는 내용
“5월 18일 14:25, 학생 유동3거리에 학생 300명, 광주공원의 학생 300명이 출현, 15:50, 학생 600여명 도청 방향으로 이동하며 시위, 학생 300명은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 인사 석방하라“는 구호 외치며 동산 파출소에 투석 파괴, 또 다른 300명은 16:40에 지산파출소 파괴하며 시위”

사태 기간 내내 광주의 운동권은 체포돼 있었거나 깊이 숨어있었고, 대학생들과 지각 있는 시민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단지 판단력 없는 10대와 사회에 불만을 가진 20대의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석공, 목공 등이 이들 600명의 눈부신 도시게릴라 작전에 부화뇌동했을 뿐이다. 이것이 5.18의 실체다.

이 부화뇌동한 10대와 20대가 5.18의 영웅이 되어 있고, 국가 유공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5.18 유공자 명단은 보훈처에서 공개하지 않는다. 2010년 평양에서 찍힌 사진(5.18 기념식)과 1980년 광주에서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1]

나무위키에서는 한사코 북한과 관련이 없다, 사망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라고 주장을 한다. 5.18을 뭐라 평가하든 그건 표현의 자유고, 양심의 자유다. 집단적 표시에 대한 명예훼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조항과 판례가 있다. 5.18을 폭동이라고 칭한다고 해서 그 사망자에게 고소 당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국가 안보, 개인의 권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박해 받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불러라? 그렇게 해본들 공식 행사, 공문서에만 해당하지 일상 용어까지 강제할 수는 없다.


사실 북한 개입설은 통일이 되거나 해서 북한의 기밀문서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완전한 긍정도 완전한 부정도 하기 힘들다.

6.25도 남침유도설 북침설 별별의 수정주의가 판을 쳤지만, 소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 싹 들어갔다.

5.18도 북한의 기밀문서가 해제되어야 알 수 있다.

좌파에서는 자국민을 학살했다고 이야기 한다.

근데 생각을 해보자

무기고무단탈취(총기, 탄약, 군용차량, 장갑차,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 , 도청무단점거, 도청지하에 다이너마이트 설치, 간첩 사상범이 있는 교도소를 수차례 공격, 방송국 방화, 경상도 넘버 차량 경상도 오너 상점 무차별 파괴

이걸 하나라도 허용해야 하나 그것도 계엄하에 계엄아니라 평시라도 위에 열거한 행위를 하나도 허용되서는 안됀다. 시민이면 뭐든 허용해야 하는가

폭력은 국가가 독점한다. 시민이라도 뭐든 해도 되는 게 아니다. 필 받아서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 서울시청을 점거했다면 그걸 허용하고 방치해야 되나

예를 들어 군인이 수하를 불응하고 탄약고에 진입하려는 거수자를 발포해도 무죄다.

강화도에서 해병대를 공격하고 총과 탄약을 티팔한 사건이 나서 이 범인을 체포하고 처벌했는데 이것도 무고한 자국민을 처벌한건가? 근데 518 때도 계엄군이 중과부적으로 소위 시민군에게 포위되어 총기를 피탈당한 일이 있었다.

미국이었으면 이런 경우에는 주방위군을 동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흑인 관련 소요사태로 주방위권을 동원해서 진압한 적이 있다.

계엄군이 문제였다? 계엄군이 문제였으면 광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났어야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을까?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도 소위 시민군이다.

전국 주요대학에 모두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등.

근데 유독 전국 대학 중 전남대에만 단체로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정문에 떼거지로 몰려 와 정문에 배치된 계엄군에게 도서관에 가겠다 하니 여기에 배치된 계엄군이 휴교령이 내려 졌으니 돌아가라 라고 통보, 이들이 준비해온 짱돌을 계엄군에게 투척했다.

계엄군은 정웅 사단장이 현장을 무조건 사수하라 하니 짱돌을 맞고 피도 나고 다치고 했는데, 계엄군도 사람이니 짱돌을 맞고 다치니 열받지 않는가 던지고 도망가는 자들을 쫓아가서 팼다.

이걸 옥상에서 찍어서 이게 유명한 사진인데 계엄군이 사람을 패는 사진이 있는데, 이 상황이다. 앞뒤 상황을 짜르고 보면 이게 선동인데 계엄군이 무고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패는 걸로 보이는 사진이다.

첫 발포라는 것도 장갑차 안에 불쏘시개를 넣으려고 하자 자위권차원에서 공포탄을 쏜 게 첫 발포다.

화려한 휴가 등의 영화에서는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 부르는 사람들을 앉아 조준쏴 하는 걸로 나오는 데 전혀 이런 사실 없고,

도리어 완전 상황을 반대로 묘사한 것이다. 실제는 버스로 계엄군을 깔아 뭉개 죽이자 계엄군이 자위권 차원에서 버스에 대고 발포한 것을 이런 좌익 선동영화에서는 전후상황을 반대로 묘사해서

애국가 부르는데 조준사격을 하자 시민군이 계엄군을 버스로 공격하는 걸로 나온다.

계엄군이 문제 였으면 전국에서 다 일어나야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겠나 광주에서만 일어난 건 김대중이 최규하정권 언제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정부상대 지멋대로 불법부당한 최후통첩을 했는데 이걸 준비한 게 광주에서 터진 게 5.18이다

518과 시기적으로 불과 몇개월 전인 부마사태 때도 공수부대 투입되자 마자 사태가 종료 됐다(사실 이 경험도 있어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는데, 사실 공수부대를 투입한 건 실수였다)

군인들은 고도로 통제된 집단이다. 명령이 없으면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그것도 최정예병력인 특수부대 공수부대라면 더 그렇다 시위는 거의 예외없이 소요사태가 나고 흥분한 시위대가 먼저 진압부대를 공격하거나 한다. 공수부대가 아무 이유없이 먼저 시위대를 공격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런 부대라면 그건 군기가 빠지거나 당나라 군대거나 약탈에 눈이 먼 그런 군대일 것이다. 당시 공수부대는 그렇지 않았다

(5월 단체가 학수고대한 미국의 기밀문서에도 한국의 공수부대에 대해 서술하길 한국의 공수부대는 당시 놀라울 정도로 자제력을 발휘해서, 광수시민들의 희생을 최소화 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빨리 미국 기밀문서를 해제되기를 학수고대하던 5월 단체들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서 그런 게 있었나 식으로 이 내용에 대해 무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언론들도 마찬가지. 만약 5월 단체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한국의 공수부대가 잔인하게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다 식으로 기술 되어 있다면 언론도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이 내용을 제대로 다루지도 않고 있다.)

지금도 시위 진압하는 것을 보라. 군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먼저 시민들을 패고 공격하는지. 만약 그랬다면 광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소요사태가 났어야 한다. 왜 광주에서만 났을까? 생각해 보라

이게 만약 북한의 공작이었다면 북한이 개입했다면, 북한역사에서 역대급으로 가장 성공한 공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정부 의식과 반정부 국민을 양산시키고 국군을 중상모략하고, 한국민을 극대로 분열시키고 소모전을 하게 만들었으니,

북한은 광주사태를 남조선 파쇼패당에 맞서서 일어난 인민봉기라며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518은 성역화 되고 민주화유공자 거의 귀족처럼 되어서 대한민국 위에 518이 군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탈북자들 설문에서도 광주인민봉기를 한국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 만든 518 영화인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는 마약을 한 한국의 계엄군이 시민군들을 학살하는 듯이 묘사한다.

근본적으로 이게 민주화 운동인가라는 용어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중국의 천안문사태나 홍콩시위 미안마시위등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호칭해서 도매급으로 518이 독재에 항거한 시위인냥 취급받는 게 있는데,

위키백과 등에서 신군부에 항거했다고 정의하는데, 완전 근거없는 음모론에 기반한 거짓된 이야기다. 신군부라는 말은 북한에서 만든 말이니 지양해야 할 용어고,

12.12이후 전두환등이 다 장악했다는 건 근거없는 음모론이다. 518은 최규하 정부 때 일어난 일이고, 최규하는 핫바지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최규하는 1년 과도기 정부로 1년이후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정부였다.

이걸 물러가라고 한 게 518이니 중국공산당이나 미얀마 군부를 상대로 한 시위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직선제 개헌하겠다고 한적 있나?

물론 살인마 전두환 찢어죽이자 라는 피켓도 있었지만, 이 당시 시위대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

당신은 현 기무사령관이 누군줄 아는가?

피켓이나 요구사항은 최규하 최돼지 물러나라, 신현학 물러나라 살인마 전두환 찢어죽이자 계엄 해지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이런 식이었다.

이런 데도 좌익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김03 때 역사 거꾸로 세우기 때는 시민군이 최규하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준헌법기관(?)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정작 시민군은 최규하 신현학 내각 물러나라 했는데,

내 생각에는 518로 민주화를 촉진시킨 게 아니라, 도리어 518로 무력감을 느낀 최규하가 전두환에게 네가 하라고 하게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 민주화를 늦춘 폭거다. 최규하를 이렇게 극한으로 몰지 않았다면 1년 과도기 갖고 직선제 개헌해서 3김 중 하나가 대통령 되고 전두환은 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좌익들이 말하는 서울의 봄(정부입장에서는 국가위기사태)를 물거품으로 만든 건 군인들이 아니라 3김이나 좌익운동권 세력들이다.

물론 좌파들이 이후 518을 엄청 팔아 먹고 운동권이 518 학살 운운하며 대학교 서클동아리에서 광주비디오를 돌려 보면서 운동권이 성장한 건 사실이다. 광주비디오를 보며 충격을 받고 국가가 어떻게 자국민을 학살하나? 이러면서 좌익이 된 사람도 많다고 한다.(위에서 열거했지만 시민이고 자국민이라도 아무거나 다 허용해선 안됀다. 폭력은 국가가 독점한다.)

그네들 입장에서는 518을 빼고 80년대를 말할 수 없다라는 식의 인식을 공유하기도 하니 말이다.

제주 4.3 때와 비슷한 수위가 높은 거의 북한 용어 비슷한 유언비어 엄청 돌았다. 젖가슴을 도려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려려고 왔다 라든지,

당시 실제 그러한 시체를 도청 지하에 시체전시를 했다는 말도 있고, 북한에서는 여자 젖가슴 도리는 영상을 봤다는 사람도 있다.

이 때 소위 시민군은 미국 항모모함등이 입항하는 것을 보고 민주주의 수호자인 미국이 자기네를 도와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었다.

근데 만약 미국이 개입했다면 내정간섭이다. 이후로 미국이 여기에 개입하지 않았다면서 운동권내에 반미 정서가 더 강해졌다.

미 문화원에 방화를 시도하거나

서울 올림픽 때는 우방이자 동맹인 미국대신 소련팀을 응원하는 일까지 벌어 졌을 정도.

단계

  • 북한 공작원(괴한)의 작전기간(5.18-21)
각종 시가전, 방화, 파괴, 약탈이 자행되었다.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십여발을 탈취하였다. 전남 도청을 폭도들이 무단 점령했다.
  • 무기 반납 및 협상 기간, 강온 대립(5.22-25)
강경파와 온건파들이 서로 설전을 벌이다가 온건파가 퇴출되었고, 전남 도청 지하실에 TNT 8t 분량이 조립이 된다. 그것을 전남대생 김창길이 제보하여 해체한다.
  • 소수의 20대 노동자들이 벌인 객기의 기간(5.26-27)
윤상원, 박남선 이런 뜨내기들이 객기를 부리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계엄군이 전남 도청을 탈환하고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유혈 사태는 막을 내린다.


518에 대한 미화 성역화가 심각하다.

특별법까지 만들어서 다른 이야기를 원천 봉쇄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이다. 518은 그 위에 있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에 반대되는 게 아닌가?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면서 좌익들이 내놓은 논리가 역사해석을 정부가 독점해서는 안됀다는 말이었다. 교과서라는 것은 학술서가 아니고 지침에 따라 서술하는 거라서 이것도 웃기는 말이지만, 518 역사왜곡 특별법인가 정부가 독점을 넘어서 불리한 다른 소리 하면 처벌하겠다는 법이다.

역사라는 게 새로운 연구결과가 계속 나오면서 해석도 여러가지고 새로 나오는 것이지 518 그것을 법으로 막고 있다. 이쯤 되면 518단체들이 자기네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실제로 518은 여러가지로 의심쩍은 부분이 많다.

518의 지휘부도 불분명하고, 사단장 지휘차량을 탈취한 자나 연고생 600명도 행방이 묘연하다. 내가 그걸 했다 그러면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을 받으며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위안부, 518, 세월호를 절대 성역화로 만드는 것 같다. 근데 좌파들은 518에 대해 미화 피상적으로 독재자가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도로 알고 있지 자세히 모른다. 최규하 정부에서 일어났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었을 때 일어난 일로 안다든지 기본적인 사실관계나 전후사정도 모르고 있다.

민간인이라고 아무거나 다 용인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기고 탈취, 도청무단점거, 도청지하 다이너마이트 설치, 교도소 수차례 공격. 광주를 치안부재 해방구로 이쯤되면 이건 민간인이 아니라 공권력에 도전하는 폭도들이다. 그것도 계엄하에서라도 더더욱. 사실 이건 제대로 된 국가라면 계엄이 아니라도 응당 진압해야 될 일이다. 폭력은 국가가 독점한다.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점거하고 지하에 탈취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사상범이 있는 교도소를 공격하고. 이것 그 자체로 범죄이며 국가에 대한 도전이다. 이건 미국이나 서구의 선진국도 당연히 이쯤되는 무장폭력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진압을 한다.

최규하는 과도기 정부 1년 정도 이후 헌법을 직선제로 개헌해서 이양하기로 한 상태였다. 이걸 길거리 정치로 무너뜨리려고 했고, 그들이 내건 민주주의 구호는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민중민주주의'다.

자기네들도 교도소를 공격한 건 쉴드를 칠 수 없었는지 .뉴스파타인가 이런 좌익 언론에서는 아예 교도소를 공격한 사실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영삼이 518 소위 시민군을 헌법을 수호하는 준헌법기관(?)으로 정의한 희대의 정치재판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조차, 교도소를 공격한 건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고 판결을 내릴 정도 였는데 말이다.

교도소를 공격할 때 많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특수부대가 참호까지 파서 방어방을 구축 교도소를 결사로 막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교도소를 지켜 낼 수 있었다.

교도소를 공격한 건 간첩 사건등에 연류된 사상법들을 구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죽은 사람 중 상당수는 계엄군이 가진 m16이 아니라 탈취한 카빈 소총에 죽었다. m16은 탄이 인체에서 부서지기에 총상이 크게 나기에 구분이 가능하다. 중학생 힌테도 마구잡이로 총기를 줬기 때문에 시민군끼리 오인사격 그리고 장갑차와 탈취한 차량을 운전하다 교통사고 이런 것 까지 전부 계엄군이 죽였다고 뒤집어 씌우고 시체를 전시해서 격양을 시켰다. 계엄군을 중상모략하는 허위 유언비어가 난무했던 게 광주사태다.

미국 보고서에서 조차 당시 한국의 계엄군이 극도로 자제하고 희생을 최소화했다고 칭찬할 정도. 518단체와 언론들은 미국 보고서를 학수고대하다가 내용이 자기 네들 입맛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니 마치 그런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느냥 쉬쉬하고 있다. 만약 자기 입맛에 맞았다면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인용했을 것이다.

전두환 책임론의 문제점

1980년 5.18 당시 전두환의 직책은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계엄사 지휘라인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소문에 전두환이 실세라는 말이 파다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5.18 진압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 무성할 뿐 이를 입증하는 어떠한 증거도 나온바 없다. 지휘계통상으로 당시 총책임자였던 계엄사령관 이희성도 전두환은 5.18과는 무관하며, 자신을 뛰어넘어 월권행위를 할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전두환은 그후 대통령을 지낸 탓으로 마녀사냥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좌익이나 일반사람들이 이때 전두환이 대통령 이었는 줄아는 사람도 많다. 얼마나 잘못된 신하나 음모론이 통설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희성은 전두환과 광주진압과는 상관이 없고, 전적으로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본인의 계엄업무였으며, 지휘권 이원화는 말도 안돼는 소리라 일축했다. 전두환이 진압이후 몇달만에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광주진압건으로 전두환 이름이 거론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내가 전권을 쥐고 통괄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 내게 '형님' 하며 어려워 해
날 뛰어넘어 월권했다?… 내 성격 알면 이런 말 안 나와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국가 위기 상황을 군은 걱정

참고 자료

戒嚴司(계엄사) 발표 「光州事態(광주사태)」 1980-05-31 동아일보 3면
光州(광주)사태 死亡者(사망자)명단 동아일보 1980-06-05 6면
수배자명단 동아일보 1980-06-05 6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참고 자료

월간조선 뉴스룸(2019년 7월 1일) [문갑식의 진짜 TV] : 13분 30초 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이야기가 나옴.
金大中(김대중)등 37명 軍裁(군재) 회부키로 — 戒嚴司(계엄사) 발표 1980.07.04 동아일보 1면
戒嚴司(계엄사) 발표 金大中(김대중) 內亂陰謀事件(내란음모사건) 수사결과 全文(전문) 1980.07.04 동아일보 3면
金大中(김대중)등 24명 内亂陰謀(내란음모)등 事件(사건) 公訴事實(공소사실) 1980-08-14 동아일보 2면
公判(공판)과정서 드러난「出生(출생)서 親北傀(친북괴)활동까지」 解放(해방)후 左翼(좌익)에 加入(가입) 共産(공산)활동 벌여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下) "미국 교포들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 거부" pennmike 2018.11.29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