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정치자금 또는 비자금에 대해서는 의혹은 많아도 실상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2013년 진로 회장이었던 장진호(張震浩, 1952 ~ 2015)[1]씨의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로 일부가 드러났다.[2]

또 월간조선은 2019년 3월호, 4월호와 2020년 3월호 등 총 3회에 걸쳐 김대중 비자금 1억 달러에 대한 추적 기사를 내보냈는데, 김대중의 3남 김홍걸의 계좌에서 발행된 1억 달러짜리 수표 사본도 확인되었다.

월간조선 2020년 5월호는 김대중 비자금이 ‘13억5000만 달러 (약 1조 6500억원)’ 규모라는 미국의 첩보도 공개하고 있다. 조단위의 비자금은 막강한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자 그룹에서나 볼 수 있는 천문학적 규모이나, 중국에 앞서 한국에서 먼저 그런 규모의 비리가 발생했다는 단서가 드러났다. 아무 근거도 없이 툭하면 박정희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수조원 또는 수십조원 규모의 비자금을 숨겨두었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 세력들의 우두머리가 그런 짓을 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이 키워놓은 잔당이 집권한 세월에 수사는 완전히 막혀 있고, 야당은 모기만한 목소리도 못낸채 조용하기만 하고, 모든 언론도 모르는 척 외면하며 침묵하고 있다.

김대중의 3남 김홍걸의 계좌에서 발행된 1억 달러짜리 수표 사본.[3]

월간조선, 김대중 비자금 실체 확인

김대중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3남 김홍걸의 계좌에서 발행된 1억 달러짜리 수표 사본이 입수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수사를 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국정원 직원들은 문재인 정권에서 모두 감옥으로 보냈다. 김대중은 이 나라의 절대 성역이다.

이것이 ‘DJ비자금’ 조사 착수의 결정적 단서였다!
⊙ 김홍걸 측에서 제보자에게 팩스로 보낸 수표 사본이 국정원에 넘어갔다

⊙ 비자금 관련 1억 달러 수표는 가장 확실한 物證이고, 전례 없는 액수
⊙ “자금 탈바꿈이 여러 번 되어 추적 불가능”(내용증명)
⊙ 1억 달러를 중국 사업에 투자하여 수익금을 북한으로 보내는 구조
⊙ 검찰과 법원, 비자금 실체 확인 없이 추적한 국정원 간부들을 감옥에 보냈다

⊙ 최종흡 전 차장 최후진술 “국정원은 利敵행위에 대응한 것… 손바닥으로 진실 가릴 수 없다”

월간조선은 2019년 3월호, 4월호와 2020년 3월호 등 총 3회에 걸쳐 김대중 비자금 1억 달러에 대한 추적 기사를 내보냈다.

US Bank가 발행한 수표 사본은 존재! 김홍걸 등 당사자들은 부인
국정원과 FBI, 1억 달러가 북한 流入 위험성 있다고 판단해 합동공작
⊙ 국정원이 파악한 1억 달러 루트: 美 서부 회사 → 韓 회사 → 中 WTC 프로젝트 → 평양과기대
⊙ 문제의 1억 달러 수표는 US Bank가 김홍걸 회사로 추정되는 ‘LHL’에 발행한 것
⊙ 김홍걸과 ‘WTC 사업’ 동업자인 스즈키, 사업 진행 과정서 금전적 손실 입자 국정원에 ‘DJ 비자금’ 의혹 제보
⊙ DJ 비자금 조사했던 국정원 간부들 수감 中… 수표는 증거로 제출되지 않아
⊙ DJ 일가와 친한 전성식 “사업 자금 조달은 김홍걸이 전적으로 책임짐”
⊙ ‘DJ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한 한스 루이는 누구?
⊙ 김진경, 도중에 사업 포기 “DJ 비자금으로 표면화되면 국회 청문회까지…”
⊙ DJ 비자금이 ‘돈 세탁’ 됐음을 암시하는 표현도 문건에 담겨
⊙ 문건에 담긴 미국 법인, 한국 법인 상당수 實在… 신빙성 뒷받침
⊙ 김홍걸 측의 반론 “스즈키의 일방적 주장이자 허위”
⊙ 전성식의 반론 “테리 스즈키에게 속았다”
⊙ ‘기억에 없다’는 식으로 진술해온 원세훈 “1억 불 수표, 기억난다”
⊙ ‘1억 달러 수표’ 김홍걸씨 측이 평양과기대로 송금하려 했다는 돈의 액수와 일치
⊙ 국정원이 김홍걸씨와 그 주변 인물 ‘해킹’ 시도하기도
⊙ ‘데이비드슨 공작’ 要圖에 등장하는 한 현역 국회의원
⊙ 재판 기록엔 ‘DJ 一家’(이희호·김홍업·김홍걸) 거의 등장
⊙ ‘데이비드슨 공작’의 시작은 한국계 미국인 T씨의 극비 첩보
⊙ “(DJ 추정 비자금) 동부 7억 달러, 서부 6억 달러… 그중 1억 달러 北 유입 정황”
⊙ 최종흡 당시 국정원 차장 ‘1억 달러 첩보, 신뢰도 가장 높았다’, 김승연(국정원 국장)도 ‘1억 달러 北 유입설 근거 있다’고 주장
⊙ DJ 일가와 친분 깊은 J씨, 이희호 여사에게 평양과기대에 ‘기부 건의’ 했다는 기록
⊙ 김홍걸 측 ‘반론 거부’, 평양과기대 관계자 “김홍걸로부터 단돈 10원도 안 받아”

월간조선 2020년 5월호의 새로운 보도

국정원의 최종 판단 “증거 자료로 볼 때 실존 가능성 多大”
⊙ 이번에 새롭게 드러난 사실 중 핵심은 美 국세청(IRS)이 파악해 국정원에 보고한 DJ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1억1300만 달러’
⊙ “(DJ 비자금 중 일부) 클린턴 美 국무장관 정치후원금으로… 대형사건으로 認知”(IRS의 국정원 보고 내용 중)
⊙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이 증언한 비자금 관리자 A씨의 수상한 1억1300만 달러 조성 방식
⊙ 美 연방검찰 불려가 ‘錢主 밝히겠다’고 한 A씨 ‘내가 다 안고 가겠다’며 돌연 말 바꿔
⊙ 비자금 관련 페이퍼컴퍼니로 의심받은 中 동방가리화상무의 監事는 ‘김홍걸’
⊙ 국정원 자료엔 “北 ◦◦◦ 간부가 DJ 비자금 제보했다”는 뜻밖의 내용도 담겨
⊙ DJ 부부와 친분 있던 어느 부부의 고백 “(DJ) 부실기업 정리 및 해외 헐값 매각으로 리베이트 받아 비자금 약 10억 달러 조성”
⊙ 이희호씨의 빈번한 訪中이 ‘비자금과 관련 있다’는 국정원의 판단
⊙ 국정원 “美 당국이 은닉 비자금 조사할 움직임 보이자 (DJ 측) 중국으로의 자금 도피 작업 착수”
⊙ 국정원·국세청의 ‘DJ 비자금’ 추적이 정치적 목적이 없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
"美 국세청이 'DJ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금액 파악해 국정원에 보고"
"미국 당국은 '대형사건'이라며 이 사안을 중대하게 받아들여"

김대중, 노태우로부터 비자금 수금


전두환과 김대중의 비밀거래

개요

1982년 주식회사 진로(眞露)의 창업주 장학엽(張學燁) 회장의 차남 장진호(張震浩)는 상무이사로 진로에 입사했다. 이때 장진호의 공식 지분율은 8%였다. 당시 사장은 장학엽 회장의 조카 장익용이었다. 창업주 장학엽은 건강이 나빠지자 두 아들 장봉용과 장진호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1975년 조카인 장익용에게 사장 직을 주어 회사를 경영하게 했다.

1984년에 들어 진로의 장진호 상무는 전체 진로 주식 900만주의 약 23%에 해당하는 211만 주를 27명의 이름으로 매입해 실질지분율이 30% 정도가 되었다. 주식을 매입하는 데 쓴 돈은 28억 2000만원이었는데, 진로 그룹 소속의 여러 회사의 가지급금 형식으로 마련했다. 가지급금이란 기업이 대주주, 임원 등 특수 관계자에게 용도 지정 없이 지급하는 지출금으로 주로 기업자금을 유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1984년 11월 주식회사 진로의 정기주주총회가 열렸다. 장진호 상무는 이 정기주주총회에서 부사장이 되어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했다. 장진호는 입사하면서부터 경영권을 노렸는데, 1984년 11월의 정기주주총회에서 성공한 것이다. 정치인 임춘원(林春元), 1938 ~ 2011)이 막후에서 계획을 하고 실행했다.

임춘원은 누구?

임춘원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68년부터 서울 종로구 화신백화점 앞에 대한민국 입시학원의 효시격이라 할 수 있는 상아탑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당시 학생 수 8,000여명, 강사 수 250여명으로 웬만한 종합대학보다도 그 규모가 클 정도였다. 그 당시 매월 순익이 8,000만원 이상으로 그 당시 재벌들을 제치고 은행예금 순위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권의 탄압 속에 시사교양지 『思想界』를 힘들게 출판하고 있던 장준하가 당장 종이값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장준하는 상아탑 학원을 찾아가 자신이 받은 어음을 할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응한 것이 임춘원이 정치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선생님 때문이다. 당시 나는 상아탑학원을 종로에서 잘 운영하고 있었다. 학생수가 8,000명이 넘었고, 강사수가 250명이 넘는 대학교와 같은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그때 많은 돈을 벌었다. 그때 당시 매월 순 이익이 8,000만원 이상이었으니, 그때 은행예금 순위가 전국 1위를 할 정오로 학원이 잘 운영될 때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이 당시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의 역할을 하겠노라고 하시며 『思想界』에 심취되어 어려운 시절 돈을 빌려준 것이 보증수표를 드려서 그것이 그만 내가 박정희 정권에 당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선생이 종이 값을 주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그 종이 장사에게 준 수표가 나를 정치마당에 끌어낸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나는 도망 다녀야 했고, 결국에는 감옥에 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집사람은 그때부터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이 시작되었다. 그 서슬퍼런 유신시절에 나는 9번을 감옥에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처절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장준하 기념사업회, 『내 속에 살아 숨 쉬는 등불』, '아, 장준하' 추모의 글 모음에서.

1971년 임춘원은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하여 정무위원이 되었다.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비례대표 4번이 되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1974년에는 윤보선, 장준하, 김대중 등과 함께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

각계에 포진한 인사들이 장준하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중 임춘원은 감시의 표적으로 운신이 어려운 장준하의 비밀연락책으로 김대중과 인연을 맺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등산 도중 추락사를 당한 날에도 거사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장준하의 집에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 후 장준하의 실족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남대문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80-85 임춘원은 부산 동아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고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참가하여 상임운영위원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운영위원이 되었다.

전두환의 기획거래

장진호는 보유 지분을 늘린 후 1984년 11월 정기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자신이 실제 보유한 진로 주식의 절반을 김대중에게 양도했다. 그러니까 김대중은 진로 주식의 15% 정도를 얻은 것이다. 양도한 주식은 동교 기업, 한림장학회, 세광병원 등 김대중 관련 재단이 보유했다(이는 주식회사 진로의 주주명부에도 나와 있다). 이들 재단은 겉으로는 임춘원 소유로 되어 있었다.

한림장학회는 1984년 4월 설립되었는데, 장진호는 발기인으로 참여해 임기 4년의 이사가 되었다. 설립 당시 한림장학회의 자산은 예탁금 5499만원이 전부였다.

임춘원을 매개로 한 장진호- 김대중의 거래는 전두환의 기획이었다. 전두환김대중을 석방하면서 김대중의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다. 돈이 필요한 김대중도 이에 응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과의 거래에 나설 중계인으로 임춘원을 지목했다. 그는 정치경력이나 성향을 보아 김대중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치 활동을 재개하고 싶던 임춘원으로서도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정치 규제자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임춘원은 전두환 정권의 인사와 논의하여 경영권 분쟁이 있는 진로를 지목하여 전 – 김 거래의 매개로 삼자고 했다. 전두환 정권이 동의하여 임춘원은 장진호를 만나 자신이 장준하 계열에 있으면서 정치를 했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전통과 DJ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했다.

장진호김대중의 거래는 전두환 – 김대중 거래의 일부였다. 장진호가 김대중에게 준 주식은 전 – 김 거래에서 일종의 담보물이었다. 장진호는 이후 1992년까지 매년 40 ~50억 정도의 정치자금을 김대중에게 주었다. 임춘원은 장진호가 제공한 주식을 관리하고 정치자금 전달을 맡았다.

장진호임춘원은 아침에 만날 경우에는 조선호텔(웨스틴 조선)에서 조찬을 했고, 오후에 만날 때는 하얏트호텔 사우나에서 만났다. 주말일 경우에는 힐튼호텔 이발소에서 만났다. 보통 일주일에 2~3번 회동했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회동할 때는 수표를 주었고 차 안에서 수표를 전달하기도 했다. 임춘원은 수표를 받아 동교상호신용금고와 명동 서울증권 매장을 이용해 현금으로 바꾸었다.

현금으로 줄 경우 초기에는 장진호가 임춘원의 아파트로 찾아갔고 나중에는 임춘원이 부암동의 장진호 자택을 찾아가 받았다. ‘임 기사’라는 임춘원의 친척도 심부름을 했다. 현금일 경우 한 번에 3억 원을 넘지 않았다(당시 사과박스 하나에 1억5000만원이 들어갔다). 현금으로 주는 액수는 1년에 10억을 넘지 않았다. 임춘원은 장진호에게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춘원은 1985년 무렵 장진호에게 ‘자꾸 비용이 추가돼 미안하다’며 ‘DJ에게 인사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방안을 논의한 끝에 ‘조우’하는 형식으로 하자고 결정다. 힐튼호텔에서 김대중과 임춘원이 점심을 먹고 나올 때 우연히 마주치는 형식으로 장진호는 김대중을 만났다. 김대중은 ‘반갑다’, ‘고맙다’라고 말했다.

장진호는 돈세탁을 하거나 비자금을 마련하지도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김대중에게 주는 돈을 마련했는데, 이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비자금으로 처리하거나 돈세탁을 했다면 문제가 됐을 때 서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가지급금 방식으로는 돈을 가져간 것은 공식 기록으로 남아도 어디에 썼는지는 증명할 수는 없다.

1992년 4 ~5 월 경 임춘원은 장진호를 찾아가 ‘DJ 때문에 힘들다. 주식을 정리하자’고 말했다. 장진호는 약 150억을 주고 김대중에게 준 주식을 인수했다. 장진호는 인수한 주식을 차명으로 보유했다. 진로 주식을 일부 보유한 세광 병원은 주식 인수 이전에 진로 그룹이 아예 사들였다.

장진호가 김대중에게 준 주식을 인수한 직후 임춘원은 ‘사당화(私黨化)’를 비판하며 김대중의 민주당을 탈당했다.

1993년 ‘공직자 재산 공개’로 인해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등이 재산을 공개했다. 당시 임춘원은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이었다. 이로 인해 동교기업, 한림장학회가 진로 지분을 보유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임춘원 의원은 재산을 신고하면서 진로 주식 매각대금 126억원을 신고하지 않았다. 다음은 1993년 3월 26일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내용이다.

임 의원은 지난해 3월 말 현재 동교기업, 한림장학회 이름으로 당시 시가 126억 원 상당의 (주)진로 주식 59만2762주(14%)를 갖고 있었으나, 주식명부 확인 결과 지난해 9월 말 이전에 모두 매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주식명부에서 일시에 사라져버린 주식과 매각대금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참고 자료

[특종] 金大中 前 대통령, “崔淳永으로부터 대한생명 뺏으라고 내가 결정”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