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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金英柱
2015-07-19 김영주.jpg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95)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2015년 7월 19일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투표에 참가했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
1960년 9월 9일~1973년 9월 9일
주석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겸 상임위원
1967년 11월 8일~1969년 12월 8일
주석
기본 정보
국적
출생일
1920년 9월 21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대동
사망
2021년 12월 13일 (향년 101세)
사망지
병역
무종교
정당
경력
학력
모스크바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학사
모스크바정치대학 법학 석사
부모
김형직(1894 ~ 1926),
강반석(1892 ~ 1932)
형제
첫째형 김일성,
둘째형 김철주
자녀
딸 김영성, 아들 김정현
친인척
김정일(조카)
리명산(사위)

김영주(金英柱, 1920년 9월 21일 ~ 2021년 12월 13일)는 북한의 정치인으로 김일성의 동생이다. 일제시대에 일본군의 통역을 하다 해방 후 형 김일성이 북한의 지배자가 되자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으나, 후계 경쟁에서 조카 김정일에 밀려 실권하고 18년 동안 자강도에 유폐되었다.[2] 김일성이 사망 직전인 1993년에 그를 평양으로 불러올려 다시 공식 석상에 나왔으나[3], 형식적인 직책을 맡는데 그치고 있다.

2021년 12월 13일 101세에 사망하였다.[4][5]

생애 초기

김영주(金英柱)는 1920년 만주에서 김형직강반석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는 김형직 부부가 임강현(臨江縣)에 살 때이다.[6][7] 형으로 성주(聖柱,김일성), 철주(哲柱)가 있다. 부모를 따라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무송현(撫松縣) 등지로 옮겨가며 살다가[8][9] 6세(1926년) 때 부친을, 12세(1932년) 때 모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채 만주 각지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만주에서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34년 둘째형 철주(哲柱)가 죽고, 맏형 성주가 있는 동북항일연군 부대를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머물다가 1937년 초 공비토벌에 나선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 이도선(李道善, 警佐)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이도선의 형 이도일(李道日)은 잡혀온 김영주가 친구인 김형직의 아들인 것을 알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집에서 몇년간 같이 살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김영주는 도시에서 일하고 싶다며 신경(新京, 장춘)으로 가서 일본인 상점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이도일의 아들 이벽오(李碧梧)가 신경(新京)에 볼 일이 있어 갔을때 그는 김영주와 어울려 같이 놀기도 했다. 그때 김영주는 술도 잘 먹고 노래도 잘 부르며 싸움도 잘하는 건달패 같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10][11][12]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일본말을 아주 잘 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어느 때인가부터 일본군 통역이 되어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김성주(김일성)는 일본군 토벌대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도주하기 직전에 동생 김영주를 자기가 있는 밀영으로 찾아오게하여 잠시 만나본 적이 있다고 한다.[13] 김영주는 이때 자기 형이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행세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해방 직후

김영주의 일본군에서 이름은 김일선(金日鮮)이었다.[14] 그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15 이후에도 통역으로 모택동의 고향인 중국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일본군 부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중국말도 잘 했으므로 국민당 군이 9월 15일 그가 속한 일본군 부대의 항복을 받을 때 통역을 맡았는데, 중국군 부대장이 그의 언어능력을 높이사서 중국군으로 받아들여 통역일을 맡겼다. 이후 중국군에서 복무하다 그 부대에서 사귄 친구 이용상(李容相,1924∼2005)과 함께 1946년 5월 1일 상해(上海)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온다. 5월 4일 밤 서울역에 도착하여[15] 서울의 이용상의 집에서 머물다 5월 6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까지 가서 북한으로 넘어갔다.[16]

그는 중국에 있을 때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김일성이 바로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또 평양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일본군 통역을 한 사실을 알면 형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친구 이용상은 김영주에 대해[17]

그(김영주)의 대인관계는 지극히 명랑했고 신의가 있었다. 춤 잘 추고(특히 왈츠 곡), 총 잘 쏘고, 건달기질·깡패기질도 충분했지만 안광만은 항상 또렷하게 바로 박혀 있었다.

라고 말했다. 또 김영주는 해방된 한국이 살길은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길 밖에 없다고도 하였다.[18] 이는 박헌영이 한 발언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소련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고질적인 저열한 특성을 김영주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후 그는 한동안 김일성의 관저에서 같이 살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집에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 등 2명의 일본인 여성을 식모로 두었다.[19] 고바야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1970년에 쓴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20][12]라는 글에서 1946년 5월초 김일성 집에 온 김영주(金英柱)가 어떻게도 일본말을 잘 하는지 일본 사람인줄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하루는 고바야시의 언니가 평양의 불량청년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발생했는데, 김영주는 권총과 몽둥이를 들고 보안대원 수명을 데리고 나가 청년들을 붙잡아 실컷 두들겨 패주고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김영주(金英柱)의 사촌인 영주(永柱), 원주(元柱) 등도 평양에 나가 보안대 간부가 되어 권총을 차고 다니며 으시대었다고 한다.[21][11]


그는 만주에서는 학교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중국어, 일본어 등을 잘 했다는 것으로 보아 언어 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형 덕택에 특혜를 받아 모스크바 종합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된다.[22]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88여단 김일성 대대에서 근무하다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은 김일성의 형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23][24]

성주에게는 또 두 동생이 있었다. 철주는 형을 따라 유격대에서 일제와 투쟁하다가 일본의 포위에 걸려 투항하고 말았다. 그는 1936년에 죽었다. 성주는 이 사건으로 하며 《민생단》에 결려 한동안 정신적 타격을 많이 받았었다.

마지막 동생 영주는 일본에 복무하여 하와이까지 갔다가 해방을 하와이에서 맞이하고, 상해를 거쳐 평양에 돌아왔으나 내막은 좀 미미하다고 본다.

그가 돌아온 후 김일성은 그를 소련 유학을 보냈다. 6.25 동란때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당중앙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정일이 출세하는 바람에 매장되고 말았다.

김영주가 하와이에 갔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북한 정권에서의 경력

17년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한 김영주 : MBC 1993-07-27[25]. 1993년의 사진이 아니라 실각하기 전의 모습으로 보인다.

소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주는 형 덕택에 북한 정권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다 조카 김정일과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쌍둥이인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하여 부모들을 따라 자강도로 내려갔고[26],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25][2]

그는 1972년에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측 위원장을 맡았으나, 신병을 핑계로 직접 나서지는 않고, 박성철(朴成哲)이 대행했다.[27][28][29]

북한 정권에서 그의 이력은 아래와 같다.[30][31]

모스크바종합대학 (정경학부) 졸업[2][31]
1954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195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
195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과장
1960.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
1972.12.01 동아일보 남북조절위위원회 위원 사진 : 북측위원장 김영주[32]. 남한 측의 최규하 위원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961.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4차 당대회)
1962.10 최고인민회의 제 3기 대의원
1966.10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6.10 비서국 비서
1967.11 최고인민회의 제 4기 대의원
1967.11 상임위원회 위원
1969.12 비서국 비서
1969.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70.11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0.11 비서국 비서
1970.11 정치국 위원
1972.07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회 위원장
1972.12 최고인민회의 제 5기 대의원
1972.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73.09 조직지도부 부장(해임) *후임 : 김정일
1974.02 정무원 부총리
1993.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3.12 최고인민회의 제 9기 대의원(보선)
1993.12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
1993.12 국가 부주석
1993.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94.07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5.02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3.09 최고인민회의 제 11기 대의원
2003.0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8.10 박성철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2009.0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9.04 최고인민회의 제 12기 대의원
2010.09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해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해임)
2012.02 김정일훈장 수훈
2014.03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2014.0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김영주(95)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2015년 7월 19일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에서 투표하는 모습.[1]

연안파 김두봉(金枓奉) 등의 숙청을 주도

김영주는 당조직부장으로 있을 때인 1957년 형인 김일성과 모의하여 연안파 김두봉(金枓奉) 등의 숙청을 주도했다고 여정(呂政, 강수봉, 1925~ ? )이 증언했다.[33]

金日成(김일성)은 모스크바방송을 통해서 복수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金日成(김일성)은 귀국하는 길로 동생 金英柱(김영주)와 崔庸健(최용건), 金一(김일)을 불러 자기의 결심을 알려 주었으며 朴正愛(박정애) 朴金喆(박금철) 金昌滿(김창만)에게 반종파투쟁을 끝까지 밀고나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金日成(김일성)은 金英柱 (김영주)와 둘이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짰다. 金英柱(김영주)가 당조직부장이었던만큼 조직부는 대숙청 계획의 사령부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먼저 누구에게 손을 댈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두 형제는 金枓奉(김두봉)을 대상으로 해야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金枓奉(김두봉)은 57년 8월 25일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자리에서 밀려났는데 그것은 당중앙에서 꾸민 것이었다. 그때 金(김)은 병상에 누워있느라 선거에 참석하지 못했다. 金日成(김일성)은 金枓奉(김두봉)을 투쟁하고 매장시켜버리는 임무를 金昌滿(김창만)에게 주었다. 金昌滿(김창만)은 몇 차례 결정적인 시기에 金日成(김일성)을 옹호하고 나선 덕분에 당중앙 부위원장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다. 金日成(김일성)은 본래 金枓奉(김두봉)과 중국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金昌滿(김창만)을 내세워 연안파가 연안파를 치는 듯한 인상을 주고자 했다.
1957년 12월 金昌滿( 김창만)과 金英柱(김영주)가 참가한 가운데 평양시 당열성자회의가 소집됐다. 앓고있던 金枓奉(김두봉)은 회의에 갈 수 없었다. 金枓奉(김두봉)을 몰아내려는 회의인데 그가 오지 않으면 파토가된다. 金英柱(김영주)가 "끌고 옵시다. 모가지를 옭아매어 끌어서라도 오게만듭시다"하고 말했다. 몇몇 젊은 당원들이 金枓奉(김두봉)의 집으로 가 앓고 있는 노혁명가를 강제로 실어가지고 왔다. 金日成(김일성)이 꾸민대로 대회장은 "반당종파분자 金枓奉(김두봉) 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에 파묻혔다. 金枓奉(김두봉)을 출당시키자는 결의가 채택됐다. 열성자회의는 조직문제를 결정할 기능이 없기때문에 결의 내용이 市(시) 당조직부에 보고되고 중앙당에 제출되어 비준을 받았는데 이 과정이 불과 반나절 사이에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된 것임이 분명했다. 1910년대부터 반일투쟁을 해왔고 20년대에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은 공산주의자, 해방직후부터 국가최고위직에 있었던 정치활동가, 역사적 언어학의 권위자였던 金枓奉(김두봉)은 이렇게해서 매장되고 말았다.

같은 편 시켜 모략하게
金枓奉(김두봉)에 대한 투쟁은 대숙청의 전주곡이었다. 金(김)을 숙청한지 1백 일후인 1958년 3월 전당대표자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崔昌益 朴義琓(최창익 박의완)을 유죄로 만들고 「반종파투쟁」을 전당적으로 벌인 동원대회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중앙정치위원회 위원이며 내각 부수상인 崔昌益(최창익)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죄상을 날조해 중상 비방했다. 金日成(김일성)은 이번에도 같은 편으로 같은 편을 치는 수법을 써서 함북도당위원장 金(김)태근을 시켜 함북 출신인 崔昌益(최창익)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金(김)태근은 숱한 거짓 말을 늘어놓았다.

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중국군에서 김영주와 숙식을 같이하며 붙어 살다시피 한 이용상(李容相,1924∼2005)[34]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1994년에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이라는 책으로 간행하였다.[35]

이 연재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용상 자신도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김형직도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해주며,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김영주가 말했다는 것이다. 김성주(북한 김일성)는 이 때문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종국에는 본인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였고, 이로인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그의 동생 김영주가 형이 가짜가 맞다고 해방 직후에 증언한 셈이다. 중국군에 있을 당시 김영주는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일성이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백발장군이 어떻게 33세인가" 꼬리문 의문 : 노장군이 물려준 이름이라는 김영주의 변명[14][36]

김일성의 친동생인 그가 자기 큰 형 이름이 원래는 김성주였는데 지금은 김일성, 즉 오늘(1945년10월14일)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 시민환영을 받은 김일성이라고 분명히 필자에게 말했다. 김성주가 지금은 김일성으로 됐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필자가 10세 전후일 때 우리 아버님은 약주를 드시면 언제나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면」하는 『봄 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끝나면 반드시 『이제 곧 김일성 장군이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김일성 장군은 백발노인으로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백발장군이 지금은 몇살쯤 되셨을까. 나는 김영주에게 물었다.
『김 동지, 형님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길래 김일성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33세라고 대답했다. 33세라면 내 계산과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김영주는
『네, 알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김일성 장군 나이가 왜 33세냐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얘기하셨으니까요.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요.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은 내가 6세때 돌아가시고 모친도 내가 12세때인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성주형을 따라다니며 유격대 노릇을 했습니다. 그 위험한 나날로 보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참 용한 거지요. 철주(哲柱)라는 작은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19세때 남만주 동녕현(東寧縣) 노흑산(老黑山)에서 전사했지요(노흑산은 산명이 아니라 간도성에 있는 지명이라고 했다).
성주 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 사단장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겁니다.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준 김일성 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답니다.』

『네, 그것을 양명(讓名)이라고 하지요. 이름을 물려 받은 김 동지의 형님은 승명(承名)한 것이고. 김 동지, 그런 연유로 형님이 젊은 나이에 김일성 장군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김 동지의 「김일선(金日鮮)」이란 이름은 누구에게서 승명한 겁니까.』
『이것은 내가 적당히 지은 겁네다. 왜「일선」 인지 아십니까.』
『…….』
『아주 간단합네다. 일본 놈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속임수로 떠들던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과 같다고 기만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표어)를 본떠 나는 일선(일본과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내 속셈은 급할 때 일본군경에게 「자 보시오. 나는 내 이름까지도 일선 일체라는 뜻에서 일선이라고 지었지 않느냐」고 둘러대기 좋게 만든 이름입니다. 실제로 일선이라는 이름의 효과도 봤디요.

그러나 일선의 참뜻은 김일성 형의 「일(日)」과 조선의 「선(鮮)」을 딴겁네다.』

김영주는 자신이 형과 같은 부대에 있을 때인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습격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하나, 그는 보천보 사건 발생 이전인 1937년 초에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 이도선(李道善, 警佐)에게 붙잡혔으므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도선은 1937년 4월 24일 사망하므로 그 이전에 붙잡혔음.[10][37]] 일본군 통역으로 있은 것을 부끄럽게여겨 자신이 항일투쟁을 한 경력도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이 아닌가 한다.

이용상 시인의 저서 『용금옥 시대(湧金屋 時代)』에도 김영주의 이야기가 조금 나온다.[16]

지금은 절판된 <다큐멘터리 용금옥 시대> (1993)라는 책이 있다. 해방 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김일선(金日鮮)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귀국해, 서울에서 추어탕 한 그릇 먹고 서울역에서 기차로 평양 간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박갑동(朴甲東)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박갑동(朴甲東, 1919~ )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남로당이 불법화 되자 지하 총책이 되어 활동하다 6.25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외무성 구라파 부장을 지냈다.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박헌영 일당으로 연루되어 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사형집행 대기 중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 여파로 석방되었고, 1957년 중국 베이징-홍콩- 일본 도쿄로 통해 탈출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김영주와 가까이 지냈고, 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397
김영주 일제때 일본인 행세/소군 친일파 숙청하자 겁먹고 서울로 도망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는 자주 만났다. 그와는 술도,밥도 같이 많이 먹었고 이발소도 같이 가곤 했다. 그는 식당에 가나 이발소에 가나 반드시 허리에 찬 권총을 빼내 닦는 것이었다.

나를 보면 『박동지는 남조선 지하공작의 귀신인데 왜 문화선전성에서 헛밥만 먹고 있느냐?』며 자기와 같이 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왜 김동지는 나를 죽이려 하오. 우리나라 속담에 「나무재주 잘하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물재주 잘하는 놈은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는데 다시 내가 남조선 지하로 들어가면 죽어요. 지하운동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소.

그러나 6ㆍ25때 북에서 내려온 동지들이 권력을 독점해 버리고 나를 완전히 허수아비같이 만들어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하나도 도와주지 못하고 배신하고 말았으니 내가 무슨 얼굴로 이남땅으로 가서 또 도와달라 하겠소?』라고 말하면서 농담조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나도 남조선 정세는 잘 알고 있소. 나도 서울에 있은 적이 있어요. 남대문시장도 잘 알고 있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영주가 언제 서울에 와 남대문시장에 돌아다녔는가 의심스러웠다. 남대문시장이 이북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 그러면 그가 해방후에 서울에 왔다는 것이 된다. 나는 김영주의 경력을 조사하면 김일성의 경력도 해명될 것이라 생각했다.

1946년 여름부터 겨울동안 김일성집에서 식모를 하고 있던 소림화자(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1970년 발표한 『나는 김일성수상 집에서 남의 집살이를 했다』는 글에서도 김영주가 비로소 평양의 형 김일성집으로 찾아간 것이 1946년 10월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김영주는 1937년 봄에 만주의 안도에서 그의 형 김일성과 같이 있다가 체포되어 그후 신경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8ㆍ15때까지 있었다.

그동안 창씨개명해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던 김영주는 소련군이 진주해 친일파를 숙청하자 겁이 나 북조선으로는 가지 못하고 미군이 진주한 서울로 왔던 것이었다.

그는 46년 10월에야 평양의 김일성이 자기형 김성주임을 확인하고 뒤늦게 평양으로 찾아갔던 것이었다. 소림화자는 『김영주가 일본말을 잘 하더라』고 쓰고 있다.

소림화자(小林和子)는 만주에서 살고 있던 일본 처녀로서 일본에 돌아가는 도중 평양에서 다른 한 일본여자와 붙잡혀 김일성 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위 내용으로 보면 김영주는 박갑동(朴甲東, 1919~ )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은 것 같다.

소련 KGB 문서의 김영주

문건에는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과 동생 김영주 등 친족 10명과 그 배우자 등 총 21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문건의 흥미로운 점은 김일성의 남동생 김영주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훗날 권력을 승계하는 김정일이 김영주 뒤에 위치하는 점이다. 김영주는 이 문건에 “1920년생 김일성의 남동생, 1958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966년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다”라고 소개돼 있다.
이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직후 김영주가 당 조직지도부장을 맡으며 실세로 등장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KGB가 당시 김영주를 김일성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박정희 정부 역시 북한의 2인자를 김영주로 파악하고 그와 접선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김영주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하게 된다.

박정희는 김영주의 친구였던 시인 이용상(李容相,1924∼2005)을 군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통해 김영주의 전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주는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을 맡았으면서도 박성철을 대리로 내세우고 서울에는 오지 않아 만날 기회는 없었다. 김영주가 후계구도에서 김정일에게 밀린 것은 건강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고, 김일성의 뜻이 동생보다는 아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고 나서 김영주는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 가족들까지 모두 자강도 산골로 쫓겨났다.

참고 자료

"김영주, '일본군 통역을 했다는 걸 알면 형에게 맞아 죽을 것'이라고 걱정"(故 이용상 시인)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북한 김일성 동생 김영주 95살 고령에도 지방의회 투표 연합뉴스 2015년 7월 19일
  2. 2.0 2.1 2.2 [김정은 특집] 김정은과 그 형제들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3. 북한 최고인민회의 결과 김영주 복귀 MBC 1993-12-12
  4. 북한, 김일성 동생 김영주 사망 확인 송고시간 연합뉴스 2021-12-15
  5. 김일성 동생 김영주, 101세로 사망… 한때 北 2인자 활약 동아일보 2021-12-15
  6.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7.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 서울신문
  8.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1925-05-05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작성 : p.24
  9.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구글맵
  10. 10.0 10.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 293-294
  11. 11.0 11.1 진위 김일성 열전 (40) 6사장 김일성의 부하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13 종합 3면
  12. 12.0 12.1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60) 중앙일보 1990.11.12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397
  13. 이용상, 나의 친구 김영주(37) <형과 아우> [중앙일보] 1991.05.30 종합 9면
    이용상, 나의 친구 김영주 (38) 일군 통역 노릇 [중앙일보] 1991.06.03 종합 10면
  14. 14.0 14.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1)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6) -「김일성」으로 둔갑 중앙일보 1991.05.27 종합 9면
  15.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16)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 중앙일보 1991.03.09 종합 9면
  16. 16.0 16.1 이용상(李容相), 『용금옥 시대(湧金屋 時代)』, (서울신문사, 1993년 11월 18일) pp. 48, 56~59, 323~330.
  17.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16)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 - 이야기를 마치며 중앙일보 1991.03.09 종합 9면
  18.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8)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431) - 김영주의 첫 「사상」 고백 중앙일보 1991.06.21 종합 21면
  19. 나의 친구 김영주(49) - 김영주와 마지막 작별 중앙일보 1991.06.29 종합 9면
  20.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2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 344
  22. 6 25 남침을 말한다 : 전 북한 고위관료 kbs tv 증언 조선일보 1992.06.24 / 4 면
  23.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미의회도서관) p.25 :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24.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25. 25.0 25.1 북한, 김일성 동생 김영주 17년만에 공식석상 등장 MBC 1993-07-27
  26.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김영주 RFA 2016-12-06
  27. 南北調節委員會(남북조절위원회) 발족 1972.12.01 동아일보 1면
  28. 한적대표단, 박성철과 참석 | 김영주대리, 3시간 내일 하오6시 서울 귀환 중앙일보 1972.09.01 종합 1면
  29. [월간조선] "박정희 때는 비서보다 높은 정치위원(김영주, 박성철)이 나왔다" 2013.06.21
  30. 김영주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
  31. 31.0 31.1 김영주(金英柱) NK 조선 2013-11-06
  32. 南北調節委員會(남북조절위원회) 발족 1972.12.01 동아일보 1면
  33.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0> 金枓奉(김두봉)제거 신호로 대숙청 폭풍 1990.06.24 동아일보 7면 /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1> 충성경쟁…새벽1시부터 投票(투표) 1990.07.01 동아일보 7면
  34.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
  35. 이용상(李容相, 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36. 이용상(李容相, 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pp.251~253
  37. 討匪 安圖縣李道善部隊戰鬪詳報 / 間島地區警備司令部 『철심(鉄心)』 1937年 7月 15日號 pp.140~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