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
최근 수정 : 2021년 4월 16일 (금) 18:41
김일성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가요? →
김일성 관련 표제어 보기
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김일성 관련 원천사료 목록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김일성의 소련 행적
소련군 88여단 김정일의 출생 김정일 생가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극동의 소련군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6.25 남침 민생단 사건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 (동명이인) 김일성 (6사장) 김형직 (부친)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과 관련된 해방전 또는 해방 직후의 1차 자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고, 대부분 인터넷 상에 원본 이미지가 올라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조작과 날조, 남한 학계의 종북화로 왜곡된 김일성의 정확한 행적과 실체 파악을 위해서는 한국, 일본, 중국, 소련 등에 산재해 있는 조작, 가공되기 이전의 각종 1차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굴하여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차

부친 김형직 및 외가 관련 자료

부친 김형직 관련 자료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 (1919년 02월 18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平安南道警務部長報告要旨)
今回在外不平鮮人ト通謀シ國權恢復ヲ企劃セル「朝鮮國民會」ナル秘密結社ヲ發見シ關係者ヲ檢擧シ刑事訴追ニ附シタリ其ノ顚末左ノ如シ
一. 會員氏名
本籍 平安南道平壤府黃金町 / 住所 同 櫻町 / 會長 張日煥 當三十二年
....

本籍 平安南道大同郡古平面南里 / 住所 平安南道江東郡古邑面東三里 / 書堂敎師 金亨稷 當三十四年
  • 1920년 3월에 손위 처남이자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단원인 강진석(康晋錫)이 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에 거주하는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5][6][7] 기록에는 없지만 김형직도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단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다.[8][9]
  • 1925년 5월 5일자 김형직의 신상 및 재산 기록 :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거주시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 p.24
第三 移住朝鮮人中 有力者 調査表 : 일본 외무성(日本 外務省)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기록
  • 김일성 회고록에 김형직이 만주에서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걸어두고 무면허 의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 김형직은 무면허 의사를 하면서 아편밀매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는 증언이 많다.
  • 김형직은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고 막내 아들 김영주가 증언했다.[10]
  • 만주 시절 김형직의 친구였던 이도일(李道日)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싫어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병원에 찾아오면 치료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아래 "후일 증언 또는 기록" 참고.

김형직은 정의부(正義府)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 1930년경 정의부는 국민부(國民府)로 개편된다. 아들 김성주(김일성)도 정의부나 국민부와 관련을 맺기는 하지만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반국민부 세력에 가담한다.

외조부 강돈욱 관련 자료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은 1927년 4월 동아일보사 낙성기념사업에서 교육분야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교원 : 대동 용산면 창덕학교 강돈욱 (康敦煜, 58세) 근무연한 16년

삼촌 김형권 관련 자료

국민부원(國民府員)이었던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국내로 잠입하여 함경남도 풍산에서 일본 경찰을 쏘아 죽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다 옥사한다. 사건 당시 신문 기사는 많이 있다.

보훈처가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과 외삼촌 강진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11]

출생과 유년기

  • 1912년 4월 15일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의 외가에서 출생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김일성 관련 최초 기록이나, 열람이 금지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 외가가 있던 칠골의 창덕학교(彰德學校) 재학
1923년 봄부터 칠골 외가에 와서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 1925년 1월 다시 만주로 감.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32, p.94
일제시대 기록 :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1944년 11월 18일) p.4

만주 시절 청소년기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회원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의 오기임.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성주(金成柱)가 선출됨.
1930년 6월 27일에 창립된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 제3분대장 김성주(金成周)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임.
체포된 이종락 : 동아일보 1931년 2월 3일 2면
  • 1931년 2월 12일 (음력 1930년 12월 25일)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 : 아래 참고.
이종락(李鍾洛) 등이 1931년 1월 28일 구속되자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는 와해된다. 3월말경 고할신(高豁信)도 체포되고, 잔존 세력이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했다는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1931년 3월 세화군(世火軍)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으로 김성주(金成柱)가 나온다.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

정모(鄭某)씨를 살해한 이 사건은 김일성이 1930년말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가서 머물던 시기에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은 최형우가 근무하던 삼성학교(三成學校)를 세운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과 한 방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선일이 1970년대 초 이명영(李命英, 1928~2000)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주범은 김일성이다.[13][14][15]

이선일이 공범이라고 증언한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천학진(千學振) 등 3명이 1932년 8월 8일 장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이 당시 여러 신문에 보도된 것이 근래 밝혀졌다[16][17][18][19][20][21][22]. 이에 의하면 사건은 음력 1930년 12월 25일 (양력 1931년 2월 12일)에 일어났으며, 피살자는 정원일(鄭元一)이고, 교살 당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들의 내용은 이선일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나 다만 신문 기사에는 김일성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달아난 공범으로 홍종환(洪鍾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선일이 증언할 당시는 이 사건은 현지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인데다, 증언내용이 당시 신문 기사와 거의 일치하므로 김일성이 주범이라는 그의 증언도 사실일 것이다. 극히 최근에 조선일보 DB가 공개되어 검색해본 결과 김일성이 이들에게 농민동맹 가입을 권유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과 살인죄(殺人罪)로 구형(求刑) 신의주 법원(新義州 法院)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의 삼명판결(三名判决) 조선일보 1933.02.08 석간2면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참살 관련 기록

김일성 일당이 1932년 2월 만주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10명을 참살한 사건.

만주 오가자(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하기 시작

김성주는 어릴 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 탓인지 1930년말 ~ 1931년 초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신이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1930년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 김일성을 알았던 최형우(崔衡宇)가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서울에서 펴낸 책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도 그가 김일성 이름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동지(同志)들은 그의 장래(將來)를 기대(期待)하는 마음으로 「一星」이라는 아호(雅號)의 선물을 주었다.

조선사회(朝鮮社會)의 효성(曉星)이 되여달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金은 「一星」 또는 「日成」으로 행명(行名)하였다.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p.31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어느날 삼성학교선생 최형우(崔衡宇, 당시33∼34세·정주사람)가 김성주에게 『만주에서는 중국사람식으로 당호(별호)란 게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당호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성주는 좋은 당호 하나를 지어 달라고 최형우에게 부탁했다.

최형우는 당호 몇개를 지어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김성주는 여러 개의 당호 가운데서 「일성(一星)」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최형우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하며 「일성(一星)」이란 당호를 써주었다.
위는 당시 오가자에서 김성주와 한 방에서 살았던 이선일씨(62세·서울영등포거주)의 1974년 증언이다.
  • 위에서 본 1931년 3월 및 5월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이종락부하 김일성 체포"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金一成」으로 나온다.

후일 증언 또는 기록

  • 1930년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 김일성을 알았던 최형우(崔衡宇)가 해방 직후 서울에서 펴낸 책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별 대단한 내용은 없고, 보천보사건도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과 관련된 부분은 북한의 실력자로 막 등장한 그에게 잘 보일 의도에서인지 상당히 미화하여 기술했다. (아래는 김일성 관련 부분 발췌)
p.7 (p.589)에 김일성의 육문중학 시기및 1932년 여름까지의 일에 대한 증언이 나옴.
[원문 텍스트] :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김학규의 백파 자서전 기록
  •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전 성균관대 교수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기록에 나오지 않는 유격대 투신 이전 북한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평양 또는 만주에서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처음으로 밝혔다.
  • 김형직(金亨稷)의 친구 이도일(李道日)의 증언
이도일(李道日)은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이었던 이도선(李道善)의 형으로, 동생이 체포해온 김영주가 친구 김형직의 아들인 것을 알고 한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돌봐주었다.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한때 金日成(김일성)과 한마을에서 살았던 李道日(이도일)씨(七八(칠팔) · 釜山市(부산시) 대청洞(동) 四街八六(사가팔육))의 증언.
지금부터 三十(삼십)여년전 내가 滿州(만주) 안도縣(현)에 살때 그때 金成柱(김성주)라고 불렀던 청년과 같은 부락에 산 일이 있었읍니다. 金成柱(김성주)는 그 아버지되는 金亨稷(김형직)이 共産黨(공산당) 측으로부터 암살을 당한 후 안도縣(현)으로 들어와 재산이 있었던 有志(유지)를 양아버지로 삼고 정착했읍니다. 그런데 얼마후 金成柱(김성주)는 조직을 만들어 재산이 있는 노인들을 잡아다 죽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죽일까도 마음 먹었지만 그 아버지인 亨稷(형직)이와 나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金成柱(김성주)가 양아버지 창고에서 무기 몇 자루를 훔쳐가지고 나가 안도縣(현)과 통화縣(현) 사이에 있던 日本軍(일본군) 진지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바람에 그 세력이 약간 커졌지요. 그후 滿州軍(만주군) 중좌로 있던 내 동생 李道先(이도선)을 金成柱(김성주)가 죽였기 때문에 원수를 갚기 위해 만주군 당국에 銃(총)을 달라고 청했더니, 내가 獨立軍(독립군)한 일이 있다고 무기를 주지 않다가 나중에 三十(삼십) 자루를 주었어요. 그때 關東軍(관동군)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는데 나도 그 작전에 참가해서 공비들을 제거했지요. 이리하여 金成柱(김성주) 일당과 그 부하들이 모두 섬멸되고 金(김)등 일곱 사람만이 살아서 연해주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이명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96~97] 第二章 金聖柱의 少年時節 / 第一節 家系와 生活環境

當時 撫松에 살았던 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亨稷이랑 같이 獨立運動團體인 白山武士團에 關係했었다. 團長은 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 獨立運動陣營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漢醫였던 金亨稷은 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治療도 해주었으나 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亨稷이를 殺害하고 말았다. 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딸 손인실(孫仁實, 1917-1999)의 증언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1972.01.20 동아일보 4면
▲손인실(孫仁實)씨(五四(오사)·이대부총장(梨大副總長) 문병기(文炳基) 박사 부인)
임정(臨政)에 관계하시던 아버님(손정도(孫貞道)목사,·상해임정임시의정원의장(上海臨政臨時議政院議長))이 만주(滿州) 길림(吉林)에 한인학교(韓人學校)와 교회(教會)를 세우고 우리 가족들이 거기에 살 때였읍니다. 열살도 못됐던 나는 무슨 소년단인가 하는 대원들을 따라서 길림(吉林) 북산(山)에 올라 병정놀이나 숨바꼭질등 게임을 했던것이 지금도 기억(記憶)에 남아있읍니다. 그때 이 소년단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읍니다. 열두살 되던 一九二八(일구이팔)년경 길림(吉林)을 떠났기 때문에 그후 이 소년단의 일은 차차 잊혀졌는데 해방 후 만포진의 병원을 팔고 평양(平壤)에 와서 얼마 안된 때입니다. 아마 四五(사오)년十(십)월 하순쯤 일까요. 아이를 업고 평양(平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무슨 공산당(共産黨) 사무실인가 어디에 김일성(金日成)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걸 보았읍니다. 그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가 진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개명(改名)을 해서 들어왔으며 만주(滿州) 길림(吉林)에서도 산 일이 있다는걸 들어왔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옛날 길림(吉林)의「그 소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들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어렸을적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듯 했으나, 그때도 살이 약간 찌기 시작해서 호리호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확실한 판단이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 보았던 김성주(金成柱)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초기 만주 빨치산 시절 - 2명의 김일성 : 1932년 7월 ~ 1936년 2월

이 시기에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많은데 누구인지 정확한 신원 확인이 어렵다.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였던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1935년 20월 20일자 보고서의 이 기록이 정확할 것임.
김일성이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에는 1931년 입당으로 나오고, 보증인이 이청산(李靑山)이라 했다.[23][24] 그러나 소련군 복무 당시의 다른 기록들에는 1932년 입당으로 나온다.[25]
  • 아래 두 기록에 나오는 김일선(金一善)과 김일선(金日善)은 진만산(陳萬山, 陳滿山)과 함께 나오므로 동일인물로 보인다.
  1. 1934년 3월 31일 왕청현(汪淸縣委) 반일유격대(反日遊擊隊) 참모겸정치위원(參謀兼 政治委員) 김일선(金一善, 金一成이라고도 함.)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51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I-4-5-2-1_22_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 11.東満特委ノ根拠地関係
    [p.4] 汪淸縣委 政治部責任 陳萬山(滿人)

    反日遊擊大隊長 趙芝遠 (滿人 趙永遠이라고도 함.)

    「反日遊擊隊參謀兼 政治委員 金一善(鮮人, 金一成이라고도 함)」
    고이허(高而虛, 1902~1937)파 대표로 김일성(金一成)이 나오는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8월 17일자 기사. 이청시(李靑矢)는 이청천(李靑天, 1888~1957)의 오기로 보이며, 양서봉(梁瑞鳳)은 양세봉(梁世奉)인데, 이로부터 한 달 뒤인 9월 20일 피살 당했다.

    이보다 앞서 3월 27일자에는 金一善(鮮人, 金一成이라고도 함)이 全一善(鮮人, 全一成이라고도 함)으로 되어 있었는데,[26] 성을 전(全)으로 했다가 김(金)으로 고쳤다.

    북한 김일성이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에[23][24] 왕청반일유격대(汪淸反日游擊隊) 대대정치위원(大隊政治委員)을 지냈다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의 김일선(金一善, 金一成이라고도 함)은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있을 것같다. 하지만 허동찬(許東粲, 1932~ )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 6사장 김일성이라 하였다.[27]
  2. 1934년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 제2독립사(第2獨立師) 제2단 단장(團長)은 중국인 진만산(陳滿山), 정치위원은 한인 김일선(金日善)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167.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약력 기록에 나오는 김일성과 주변 인물들의 약력.
中共東滿特委書記馮康的報告(之一) -- 關于東滿特委書黨團幹部和人民革命軍幹部簡歷 (一九三五年 十二月二十日) : 中共東滿特委成立 70周年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pp.175~18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동향/연구보고서,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pp.318~321 에 수록.
풍강(馮康)은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다른 이름이다.
金日成, 高丽人, 1932年入党, 学生, 23岁, 勇敢 积极, 会说中国话, 游击队员提升的, 有民生团的口供很多次, 爱在队员中说话, 在队员中有信仰, 在救国军中亦有信仰, 政治问题知道的不多。
『김일성, 고려인, 1932년 입당, 학생, 23세, 용감 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에서 승진한 사람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救國軍) 사이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정치문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이 보고서는 1935년 12월 20일에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부에 제출된 것이나, 위증민은 1935년 6월 만주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서 7월~8월 기간에 열린 코민테른 7차 회의에 참석하고 이듬해 1936년 2월에 돌아오므로, 문서 작성 시점은 출발전인 1935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

간도(間島) 일본 영사관 정보 기록에 나오는 2명의 김일성

간도(間島) 일본 영사관의 정보 기록에는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상당히 많다. 대강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상당수는 허동찬(許東粲, 1932~ )의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에도 나오는 기록들이다.[31]

아래는 김일성 또는 김일선이 2명 나오는 간도 일본 영사관의 1935년(昭和十年) 5월 ~ 12월과 1936년((昭和十一年) 1, 2월 기록들이다. 방진성(方振聲)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국인이다.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은 백초구(百草溝), 훈춘(琿春) 등 간도 지역 여러 곳에 분관(分館)을 두고 있었다.

月別 分館 匪首名 匪賊團名 部下數 根據地 橫行地區
5월 百草溝 金一星 人民革命第二軍 第二獨師 第一団 第三連

100

汪淸 大荒溝 奧 汪淸
方振聲 〃 第一團

80

汪淸 唐水河子 汪淸 延吉 東寗
6월 百草溝 金一星 革命軍二軍 二師 第一團 第三連

100

延吉縣 大荒溝 延吉 汪淸
7월 百草溝 金一星 革命二軍 二獨 第三連

100

延吉縣 大荒崴 延吉 汪淸
方振聲 革命二軍 二師 一團

30

汪淸 春和鄕 唐水河子 汪·延·寧安
金日善 〃 〃 三連

40

8월 百草溝 金一星 革命軍第二軍 第二獨立師 第三連長

100

延吉縣 大荒溝 延吉縣
方振聲 人民革命軍 二軍 二師 一団長

30

汪淸縣 春和鄕 唐水河子 汪淸縣 延吉縣 寧安縣
9월 琿春 金一善 東北人民革命軍 第二軍 第三団

32

琿春縣 德惠鄕 楊木村 琿春縣
百草溝 金一星 東北人民革命軍 第二獨立師 第三連

100

延吉縣 大荒溝 延吉縣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 第二軍 第二師 第一団

40

汪淸縣 春和鄕 唐水河子 汪淸縣 延吉縣 東寧縣
10월 琿春 金日善 東北人民革命軍 第二獨立師 第三団 第三連

20

琿春縣 德惠保 後房子 琿春縣
百草溝 方振聲 革命軍 第一師 第三團

40

汪淸縣 春明鄕 唐水河子 奧地 汪淸縣 延吉縣 寧安縣
11월 琿春 金日善 革命軍 第二獨立師 第三團 第三連

20

琿春縣 德惠保 後房子 琿春縣
12월 百草溝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 二軍 第一師 第三團

30

汪淸縣 春明鄕 唐水河子 附近 延吉 汪淸 兩縣
金日善 東北人民革命軍 二軍二師 三團 第三連

30

汪淸縣 春和鄕 托盤溝 附近 延吉 汪淸 兩縣
익1월 百草溝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 第二軍 第三團

40

汪淸縣 春和鄕 唐水河子 奧 汪淸 延吉
金日善 〃 〃 〃 第三連

30

延吉 汪淸
익2월 百草溝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第 三団

35

汪淸縣 延吉 汪淸
출처
  1. 昭和十年五月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3) 匪賊情勢調査表 / 5. 百草溝 分館
  2. 昭和十年六月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10. 匪賊情勢調査表 / 6. 百草溝 分館
  3. 昭和十年七月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十 匪賊情勢調査表 / 6. 百草溝 分館
  1. 昭和十年八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六) 百草溝 分館 管內
  2. 昭和十年九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五) 琿春 分館 區內 : (六) 百草溝 分館 區內
  3. 昭和十年十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六) 百草溝 分館 管內
  1. 昭和十年十一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匪賊情勢調査表 / 琿春 分館 區內
  2. 昭和十年十二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匪賊情勢調査表 / 百草溝 分館 區內
  3. 昭和十一年一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匪賊情勢調査表 / 百草溝 分館 區內
  4. 昭和十年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七 月別匪賊勢力消長表
  1. 昭和十一年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ノ件 / 附表第七 月別匪賊勢力消長表

허동찬(許東粲, 1932~ )이 처음 밝힌대로 김일성(金一成, 金一星, 金日成)에 해당하는 이름을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으로 적는 경우가 기록에 나오므로 두 이름은 같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31] 위에 나오는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부하수나 근거지, 횡행지구가 모두 다르므로 당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김일성 이름을 쓰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허동찬은 김일성(金一星)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북한 김일성으로, 이 둘은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31] 그러나 당시는 이런 판단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미약하여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후 발굴된 새로운 자료들까지 감안해서 검토하면 그의 결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좀 더 검토해 보자. 1932년 3월 만주국 수립 직후부터 간도 지역 각지에 중공당 산하 유격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이 연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된다. 2군에는 1934년 3월 창설된 제1독립사(獨立師)와 1934년 5월 30일 창설된 제2독립사가 있었다. 이어 1935년 5월 30일 이 두 독립사(獨立師)를 총괄 지휘하는 2군의 군부(軍部)가 출범하면서 제1, 2 독립사는 제1, 2사(師)로 되며, 왕덕태(王德泰)가 2군 군장(軍長)과 1사 사장(師長)을 겸임한다. 2사의 사장은 박춘산(朴春山)이었다. 2사 산하에 1단(團)과 2단(團)이 있었는데, 이를 1사 산하의 1, 2단과 구분하기 위해 3단, 4단이라 부르기도 했다. 위에 나오는 방진성(方振聲)은 2(독립)사 1단 (3단으로도 칭하나 실제로는 같은 단임)의 단장(團長)이고,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그 휘하의 제3련(第三連) 연장(連長)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제3련의 연장이 2명일 수는 없으므로, 뭔가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혼선은 두 사람의 이름이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연(連)은 소대 규모로 병력이 20~40명 정도이다 따라서 실제의 제3연장은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이 맞으며, 부하가 100명인 김일성(金一星)은 제3연장이 될 수 없고, 부하수로 보아 단장인 방진성보다도 더 상급자일 것이다. 그의 실제 직위는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은 3단 단장 방진성 아래에서 참모장과 정치위원을 지냈다는 김일성 자필 기록이 있으므로,[23] 방진성 휘하의 제3연장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바로 그가 맞을 것이다. 방진성보다 상급자인 김일성(金一星)이 바로 후에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되는 사람이다. 북한 김일성은 아직 연장(連長) 또는 3단(團)의 참모에 불과하여 1936년 봄에는 사장(師長)이 될만한 직급에 미치지 못했다. 소대장이나 중대 참모 정도가 중대장과 대대참모들을 제치고 곧바로 대대장으로 승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수많은 부하의 생명을 책임진 지휘관을 경력이 미비한 자로 임명하는 것은 금기이다. 그가 승진한다면 사장(師長, 대대장급)이 아니라 그 아래 단장(團長, 중대장급) 정도나 바랄 수 있었다.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김일성(金一星)은 1935년 5월부터 9월까지 나오다 사라지고,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1935년 7월과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만 나오며, 2사 1단장(3단장) 방진성(方振聲)은 1935년에는 계속 나오다 이듬해는 2월까지 나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기록에서 사라지는 시기에 간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2명의 김일성의 다른 행적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나오는 두 사람의 김일성, 즉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중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는 일찍부터 알려진 것이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나 간부 명부는 여기서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인데, 북한 김일성보다 상급자로 다른 김일성이 있었으며, 이 사람이 후의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느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오랜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이다.

아래에서 위의 자료들의 주요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해 본다.

1934년 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 1, 2 독립사(獨立師)의 출범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 수립되자 중공당 만주성위는 산하 조직에 지시하여 만주 각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 간도 지역의 유격대는 동만특위(東滿特委) 산하에 만들어지는데 1934년 초 이들이 연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第2軍)의 제1(第1) 및 제2(第2) 독립사(獨立師)가 성립된다. 제2군(第2軍)의 간부 구성은 아래와 같다.[34]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 第1獨立師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 第2獨立師
1934년 3월 출범 1934년 5월 30일 (5·30 간도폭동기념일) 출범
師長(元游擊隊總隊長) 朱鎭 (鮮人)

政治指導員 王德泰 (滿人)
參謀處 別名 副官 (鮮人)
經理處 金某 (鮮人)
第一團長 別名 風呂敷 (鮮人)
第二團長 別名 木匪 (鮮人)
第三團長 孟昭祥 (滿人)

師長 某 (滿人)

政治委 李某 (鮮人)
第一團長 某 (滿人)

政治委 南昌一 (鮮人)

第二團長 陳滿山 (滿人)

政治委 金日善 (鮮人)

第三團長 侯國春 (滿人)

위의 기록과 달리 제2독립사 사장(師長)은 출범 당시부터 조선인 박춘산(朴春山)이 맡았으며, 1, 2 독립사 모두 사장은 조선인 이었다.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은 민생단 혐의를 받아 처형 위기에 몰리자 1935년 1월말 탈주했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귀순해버린다. 그 후임 사장은 정치위원이었던 중국인 왕덕태(王德泰)가 맡게 된다. 제2독립사 제2단의 정치위원 김일선(金日善)을 두고 북한 김일성이 맞는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1935년 9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

1935년 5월 30일 제1 및 제2 독립사를 총괄 지휘하는 제2군의 군부(軍部)가 출범하면서 두 독립사는 각각 제1사(師) 및 제2사(師)로 된다. 제2군의 군장(軍長)은 왕덕태(王德泰)가 되어 제1사장을 겸임한다. 1935년 9월의 제2군 조직표는 아래와 같다. 여기는 단(團)까지만 표시하였고, 그 아래 연(連) 단위는 pdf 파일에 나와 있다.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昭和十年(1935年) 五月 三十日 汪淸 腰營溝 成立
管轄地区[區] 間島省 各縣及敦化縣地方
根據地 汪淸 羅子溝

軍長 王德泰 四二 滿人

政治委 魏極[拯]民 三六 〃
參謀處 刘[劉]漢興 三○ 〃

作战科 朴春深 三○ 鮮人
牒報科 吳某 〃
交通科 金善九
管理科 王中山 四○ 滿人

經理處 李某 三五 鮮人

軍需股 李五福 二七 〃
第二軍 第一師

師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同志 三○ 鮮人
參謀處 趙某 三二 滿人

第一師 第一団

団長 安鳳斈[學] 二五 鮮人[35]
政治委 朱寿[壽]東 二四 滿人 - 周樹東(周树东)
參謀處 林昇奎 鮮人
經理處 石德竜[龍]

第一師 第二團

団長 張春泰 三○ 滿人
政治委 楚哥
參謀處 李哥

作战[戰]科 劉蘭漢 (柳兰[蘭]煥)[35]
第一師 第三團

團長 李xx 三二才 鮮人
政治委 金光浩 鮮人
參謀處 李靑山 鮮人[24]

第二軍 第二師

師長 朴春山 鮮人
政治委 金一成 鮮人
參謀處 王大腦袋 滿人 (= 王潤成)[36]

第二師 第一團

団長 方振声[聲] 四○ 滿人
政治委 石奎 三○ 鮮人
參謀處 金日成 三二 鮮人

作戰科 金一
第二師 第二団

団長 候國忠 滿人
政治委 金鉉 鮮人

제2사의 정치위원(政治委員)이 김일성(金一成)인데, 그 산하 제3단의 참모장에 김일성(金日成)이 또 나온다. 2군 2사에 두 사람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첫 증거이다. 북한 김일성의 1941년 1월 이력서에 3단(2사 1단)의 참모장 경력이 적혀 있으므로[23][24] 그 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나오는 부하가 100명인 김일성(金一星)으로 보이며, 그의 실제 직책은 2사 1단(3단)의 제3연장(連長)이 아니라 훨씬 높은 2사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볼 수 있다. 직급이 높은 이 김일성이 1936년 봄 제2사 사장(師長)이 된 사람이며 (후에 6사장), 제3단(=제2사 제1단)의 단장 방진성(方振聲) 아래 참모장 또는 제3연장(連長)인 북한 김일성은 아직 사장으로 승진할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당시로서는 그가 승진을 바라본다면 사장(師長)이 아니라 단장(團長)이라도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위의 표에 제1사 제1단의 단장으로 나오는 안봉학(安鳳學)은 김일성이 2사장이 될 때 같이 1사장으로 승진했다. 후에 사충항(史忠恒)의 부대가 2군으로 편입되면서 2사의 명칭을 가져가고, 원래의 2사는 3사로 된다. 또 제2군이 제1군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2군의 1, 2, 3사는 1군의 1, 2, 3사와 혼동을 피해 4, 5, 6사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1936년 2월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명부

1936년 2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간부 명부에서 북한 김일성과 관련있는 주요 부분만 보면 아래와 같다.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所屬幹部 連名簿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根據地 安圖縣 奶頭山]

第二軍

軍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宗學 〃
參謀長 刘[劉]漢興 〃[37]
作戰科 朴春深 鮮人
牒報科 吳某 〃
交通科 金善九〃
管理科 王中山 滿人
經理處 李五福 鮮人

第二軍 第一師

師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宗學 〃
參謀長 刘[劉]漢興 〃

第一師 第一團

團長 安鳳學[35]
政治委 未詳

第一團 第1 ~ 4連
第一師 第二團

團長 張傳述 三二才 滿人
政治委 朱寿[壽]東 二六才 〃

第二團 第1 ~ 5連
第二軍 第三團 [根據地 夾皮溝]

(寧安 南湖頭 移動 準備中)
團長 方振聲 四一才 滿人

政治委 林寿[壽]山 三一才 鮮人[35]

第三團 第1 ~ 6連

第三團 第三連 [根據地 上盤溝]

連長 金日成 三○才 鮮人
政治委 崔万石 二二才 〃
隊員 三三名
第一師 第四團

團長 候國忠 三○才 滿人
政治委 王潤成 三○才 〃

第四團 第1 ~ 5連

이 명부에는 제2사(第二師)는 없는 것처럼 되어 있다. 2사(師)의 사부(師部) 즉 지도부는 빠져 있고, 산하의 1, 2단(團)은 1사의 3, 4단인 것처럼 나와 있다. 제3단의 제3연장(連長)은 金日成으로 적혀있어 간도 영사관 기록의 제3연장(連長) 김일선(金日善, 金一善)과 동일인물인 것이 증명되며, 바로 이 인물이 북한 김일성이다.

당시 2군은 일본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왕청, 연길 지역에서 밀려나 1935년 가을부터 1사는 서쪽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고, 2사의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 참모장 왕윤성(王潤成) 등 사부(師部)는 북만(北滿)으로 이동해서 주보중(周保中)의 5군과 연합하여 2군-5군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아래 참고) 아마도 이것이 2사의 사부(師部)가 위의 명부에 빠진 원인이 아닌가 한다. 간도 영사관 기록에 부하 100명의 김일성(金一星) 부대는 1935년 9월까지만 나오고 10월부터 보이지 않는데, 이 사람이 당시 북만으로 이동한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과 동일인물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3단장 방진성(方振聲)과 제3연장 김일성(金日成)은 1936년 2월까지도 아직 2사의 사부(師部)를 따라가지 않고 간도 왕청현 지역에 남아 있다. 하지만 위의 명부에 영안현(寧安縣)의 남호두(南湖頭)[38]로 이동 준비중이라하여 곧 북만(北滿)으로 가서 2사 본진에 합류할 예정인 것을 보여준다. 간도 영사관 기록에 단장 방진성(方振聲)과 제3연장 김일선(金日善)은 1936년 1~2월까지 왕청현 지역에 있다가 그 후로 나오지 않는데, 이들이 이무렵 2사 사부(師部)가 있는 북만으로 이동해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북만(北滿)의 2군과 5군 혼성부대 지휘관 김일성(金日成)

간도(間島) 지역에 있던 동북인민혁명군 2군 2사는 일본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1935년 가을부터 북만(北滿)으로 이동해서 주보중(周保中)의 5군과 연합하여 2군 - 5군 혼성부대(混成部隊)를 편성한다.[39]

아래 첫번째 표에 나오는 1935년말 편성된 혼성부대 총지휘부의 정치위원 김일성(金日成)은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과 동일 인물이다. 총지휘부는 영안현(寧安縣)에 위치해 있다. 위에서 본대로 2사 1단(3단)의 참모장 또는 제3연장인 북한 김일성은 1935년말에는 아직 간도 왕청현 지역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5군 군장 주보중과 나란히 최고지휘부에 이름을 올릴만한 계제가 되지도 못한다. 혼성부대 지휘부에 나오는 김일성(金日成)이 1936년 3월 3사 사장(師長)에 임명되는데,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으로 명칭이 바뀌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두번째 표는 1936년 4월 인근 여러부대의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거쳐 확대 편성한 혼성부대 지휘부이다. 김일성(金日成)은 중선지휘부(中線指揮部) 정치위원으로 나오며, 그의 부대는 액목현(額穆縣)에 위치한다. 부하가 100명으로 나오는데, 이는 간도 영사관 기록에 1935년 5월 ~ 9월 기간에 나오다가 10월부터 사라진 김일성(金一星)의 부하 100명과 일치하므로 그의 부대가 이동해 온 것임이 분명하며, 혼성부대의 김일성(金日成)과 간도 영사관 기록의 김일성(金一星)은 동일인이다.

이때는 간도 왕청현 지역에 남아있던 2사 1단(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과 그 부하들도 북만으로 이동해온 후이며, 방진성도 편성표에 들어 있는데, 그의 부대는 영안현(寧安縣) 남호두(南湖頭)에 있다.[38] 제3연장 김일성도 방진성을 따라 북만으로 왔을 것이나, 그는 아직 지휘부에 이름을 올릴 계제가 아니다.

동선지휘부(東線指揮部)에 나오는 사충항(史忠恒)의 부대는 이 무렵 2군으로 편입된다.

1936년 2월 21일에 방진성과 3단(三團)이 북만으로 와 있는 것은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이 날자로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42]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36년 2월 21일자로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서신.[42] 위민생(魏民生)은 위증민의 다른 이름이다. 방단장(方團長)은 2군 2사 1단(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이다.
나는 액목(額穆)에 무사히 도착하여 방단장(方團長) 등을 만나보았습니다. 3단(三團)의 내부에 상당한 변동이 있었으며,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 두 동지는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게 되었고, 3단 정위(三團 政委)는 왕자균(王紫鈞) 동지가 맡았으며, 각 연장(連長)과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도 역시 변경되었습니다. .......

我安全到额穆和方团长等见了面, 对于三团的内部有相当的变动, 金义[日]成、林水山[35] 二同志调西部另有工作担负, 三团政委由王紫钧同志担任, 各连长政治指导员亦有变更。 .......

원래 편지에는 연도가 적혀있지 않았으나 자료집 편집시 1935년으로 추정하여 기재했는데, 위증민이나 방진성이 북만의 액목(額穆)에서 만날 수 있는 시기는 그 해가 아닌 1936년이다. 2군 2사가 북만으로 이동하여 5군과 혼성군을 편성하던 시기임. 1935년 2월에는 2군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이 민생단 문제로 탈주하여 일본측에 투항하고, 2월 24일~3월 3일 기간에는 위증민이 연길현(延吉縣)에서 민생단 문제 논의를 위해 대황외(大荒崴)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액목에 가 있을 수가 없음.

위증민은 1935년 7월~8월간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이듬해 봄 돌아오는 길에 북만에(額穆) 와 있는 3단장 방진성을 만나 3단 내부의 변동 사항에 대해 알게 되는데, 3단의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35]은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았다고 하였다. 편지에 북한 김일성을 왜 김의성(金義[义]成)이라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혼성부대 지휘부의 金日成과 구분하기 위해 다르게 적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까지도 북한 김일성은 3단장 방진성의 부하였으며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게 되었다고 했으므로, 곧 이어 3사장(師長)이 되는 혼성부대 지휘부의 金日成과는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두 김일성의 서로 다른 행적 요약

위에서 본대로 두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으로 혼란스럽게 나오지만, 그들의 직책과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 뚜렷이 구분되는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상급자인 김일성은 간도 영사관 기록에 부하 100명인 김일성(金一星), 1935년 9월 2군 편성표에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 1935년말~1936년 봄 2군-5군 혼성부대 지휘관 김일성(金日成)이며, 이 사람이 1936년 4월 2사장(師長)으로 임명되는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으로 명칭이 바뀐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하급자인 김일성(북한 김일성)은 간도 영사관 기록에는 2군 2사 1단(3단) 제3연장(連長)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으로, 1935년 9월 2군 조직표에는 2사 1단 (3단) 단장 방진성 아래 참모장 김일성(金日成)으로, 1936년 2월 2군 간부 명부에는 2사 1단(3단) 제3연장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오며, 그는 아직 직급이 너무 낮아 1936년 봄에는 사장(師長)이 될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이처럼 처음에 두 김일성의 이름은 한자로 혼란스럽게 표기되다가 상급자인 김일성은 북만에서의 혼성부대 편성표에서 부터 이후 6사장 시기를 거쳐 1937년 11월 13일 전사할 때까지 일관되게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온다.

그 부하였던 하급자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金日成) 활동기간에는 무엇을 했는지 알려진 기록이 없다. 그는 6사장 김일성 전사후 활동이 나타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이 되면서 6사장 김일성의 한자 이름을 그대로 따라서 김일성(金日成)으로 쓰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똑같은 한자 이름을 쓰면서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당시부터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이는 그가 소련으로 넘아가서 1941년 1월 작성한 이력서나, 1942년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으로 적어놓은 데서 밝혀진다.[23][43]

그는 해방 직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날조한 경력으로 인민들을 속여왔다. 남한의 얼치기 좌파학자들도 그의 날조한 경력을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여 선전하며 사기행각을 돕고, 남한의 과거 지도자들 흠집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초기의 북한 김일성 부대 출몰 기록

간도 영사관 정보철에 1934년 ~ 1935년 기간에 북한 김일성 부대가 몇 차례 출몰한 기록이 있다. 대부분 양민을 약탈한 사례이다.

민생단 사건 관련 자료

  • 대황외(大荒崴, 다홍왜) 회의 : 1935년 2월 24일 ~ 3월 3일
簿冊標題:外事警察報 第156号 昭和10年(1935년) 07月 : 외사경찰보 제 156호
p.25 (第156号 43면) : 中共東滿黨特委聯席大會の開催と其の決議
참석자 중 왕다노대(王大腦袋)는 왕윤성(王潤成)이다.[36]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민생단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정작 이런 중요한 회의에 참석도 못 했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13081260200、第六十八議会用調書 別冊(最近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概況)(議TA-10)(外務省外交史料館)」
p.13 : 1935년 2월 7일경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만특위(東滿特委) 간부 이상묵(李相默), 혁명군 수령 주진(朱鎭) 탈주 체포
p.14 : 1935년 2월24일~3월 3일 대황외 오지 신거지 위극민 사령 동만특위연석회의 - 위증민 동만특위 책임자 선출, 3월 11일 왕청현 요영구로 이동.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 : 1936년 3월 ~ 1937년 12월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쪽이 다수이다.

하지만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1936년 ~ 1937년 기록에 자주나오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당시 전사한 것이 맞으며, 출신지도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이고, 당시 나이도 30대 중반이었다. 뿐만아니라 동북항일연군 2군에는 북한 김일성 외에 그보다 상급자인 다른 김일성이 있었고, 그가 6사장이 되었으며, 북한 김일성은 당시 직급이 낮아 사장으로 승진할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6사장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 아닌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다. 그가 전사한 직후부터 북한 김일성은 한자가 같은 金日成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세하고 남의 행적까지 훔쳐 사람들을 속여왔다.

김일성(金日成)의 사장(師長) 임명

1936년 3월 종전의 동북인민혁명군은 보다 많은 다양한 성격의 무장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명칭를 보다 중립적인 동북항일연군으로 바꾸는데, 이때 2군은 종전 2개사에서 3개사 체제로 바뀌게 된다. 제1단을 기간으로 일부 산림대(山林队, 사실상 마적단)를 받아들여 제1사를 편성하고, 안봉학(安鳳學)이 사장, 주수동(周樹東)이 정치위원, 여백기(呂伯岐)가 정치부주임이 된다. 제1단장(第一团长)은 최현(崔贤), 정위(政委)는 임수산(林水山); 제2단장(第二团长)은 필서문(毕书文, 畢書文), 정위(政委)는 여백기(呂伯岐)이다.

제2단을 기간으로 6개중대를 받아들여 제3사를 편성하고, 김일성(金日成)이 사장, 조아범(曹亞範)이 정치위원이 된다. 제7단장(第七团长)은 유연산(刘连山), 정위(政委)는 홍범(洪范); 제8단장(第八团长) 전영림(钱永林), 정위(政委)는 마덕전(马德全)이다.

제3, 4단과 받아들인 사충항(史忠恒)의 부대로 제2사가 편성되는데, 4단의 명칭은 불변이고, 3단은 명칭을 5단으로 바꾸고, 사충항의 부대를 제6단으로한다. 제2사의 사장은 사충항(史忠恒), 정치위원은 왕윤성이 된다. 4단 단장은 후국충, 정위는 왕윤성이고, 5단(종전 3단) 단장(团长)은 방진성(方振声), 정위(政委) 왕자균(王紫钧), 정치주임(政治主任)은 송백(松柏); 6단 단장은 사충항이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편성표 : 1936년 3월[44][43]
군부(軍部) 사부(師部) 단부(團部)
제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
정치위원 위증민(魏拯民)
참모장 유한흥(劉漢興)
제2군 제1사
사장 안봉학(安鳳學)
정치위원 주수동(周樹東)
정치부 주임 여백기(呂伯岐)
제1사 제1단
단장 최현(崔賢)
정위 임수산(林水山)
제1사 제2단
단장 필서문(畢書文)
정위 여백기(呂伯岐)
제2군 제2사
사장 사충항(史忠恒)
정치위원 왕윤성(王潤成)
제2사 제4단
단장 후국충(侯国忠)
정위 왕윤성(王潤成)
제2사 제5단
단장 방진성(方振聲)
정위 왕자균(王紫鈞)
정치주임 왕송백(王松柏)
제2사 제6단
단장 사충항(史忠恒)
정위
제2군 제3사
사장 김일성(金日成)
정치위원 조아범(曹亞範)
제3사 제7단
단장 유연산(劉連山)
정위 홍범(洪範)
제3사 제8단
단장 전영림(錢永林)
정위 마덕전(馬德全)

위와같은 2군의 개편에 대한 당시 기록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魏民生、王德泰 给工委及润成同志的信

关于二军的组织编制 及党的组织问题

(一九三六年三月八日)
工委及润成同志:
二军内部的问题, 在原则方面的决定:
“二军的名义改为东北抗日联军第二军,正式编制三个师。” 延吉第一团和一部分山林队共同编制第二军第一师。 师长安风学, 政委周树东, 政治部主任吕柏棋。 第一团长崔贤, 政委林水山; 第二团毕书文, 政委呂柏棋。组织远征队, 全师出发, 向XX 方面出动, 决定即时出发。
安图第二团和区收编的六个中队正式编制第二军第三师。师长金日成, 政委曹亚范。第七团长刘连山, 政委洪范; 第八团长 钱永林, 政委马德全。组织远征队业已出发。
在安图方面, 现在由南满过去一部分山林队万顺, 要求让我们改编(据二团长来说), 现在编制问题未确定。
第二军部, 组织少年营、教导团, 随军部活动。

原有的第三、四团, 四团名义不动, 三团改称第二师第五团。 史忠恒若愿参加第二军, 可把他的残部改编为第六团, 师长史忠恒, 政委王润成。 史忠恒若不参加, 我们仍然组织第二师。 师部的组织, 因为我们最近对你们东部详细情况不很清楚, 希望你们提出意见。 五团(三团)团部, 团长方振声, 政委王紫钧, 政治主任松柏。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16] : 1936년 4월 3일자 일기중 김일성 관련 부분

同日西南區軍部副官周x, 奉高政委之派遣, 帶交通兵二名 于昨日到東南區。帶來高政委鳳儀的額穆派遣工作經過報告一件; 又, 第二軍第五團團部 負責幹部同志報告二件, 第二軍 軍部 王德泰 同志, 魏民生 同志 工作通知和 討論信三件, 金日成 同志 報告信 一件。 綜上各信內容, 要旨如下:

  1. 魏同志 西去 到達 敦化附近, 已與王德泰 同志等 會合一處。
  2. 第二軍 拟建立三个師, 第一團爲基幹, 合以遊擊大隊六个中隊 編爲第一師, 以安鳳學爲師長, 周樹東爲政委; 以第二團爲基幹, 改編新參加之各山林反日隊, 編成第二師, 以金日成爲師長, 曹亞範爲政委; 東部隊以第四, 五團爲基幹, 合以更部編爲第三師, 更是否參加師長人選及師部負責幹部, 由東方面決定之。

..........

제2단을 기간으로 제2사가 아니라 제3사가 만들어지고, 김일성은 3사장이 됨. 제2사는 제4, 5단을 기간으로 하였음.

당시 북한 김일성은 2사 1단 (3단)의 참모장 또는 제3연장(連長)으로 사장으로 승진할만한 직급에 있지도 않았다. 그가 속해있던 방진성이 단장인 2사 1단 (3단)은 개편 후 2사 5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가 5단장이 된 방진성 휘하에 그대로 있었는지, 아니면 개편된 다른 사(師) 소속으로 변경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1936년 7월 1군과 2군을 묶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一路軍)이 편성되면서 2군의 1, 2, 3사는 1군의 1, 2, 3사와 구분하기 위해 4, 5, 6사로 명칭을 바꾼다. 2군 제3사장이었던 김일성은 1로군 제6사장(師長)이 된다.[45]

이후 1937년말까지 대부분 기록에는 3사장(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활동만 나오며, 하위 직급의 북한 김일성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3사장(6사장)을 바로 북한 김일성으로 조작해 놓았기 때문에, 이 기간에 그의 실제 행적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아래 사건들도 북한 주장과 달리 북한 김일성이 아닌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하였다.

사상휘보 1939년 9월호의 6사장 김일성 신원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pp.8~9 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여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pp.8~9)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여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對岸)에 반거(蟠踞)하는 소위 김일성(金日成) 일파라 칭하는 무장단(武裝團)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제2군(第2軍) 제6사(第6師)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師長), 위민생(魏民生)을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하는 한인(韓人) 중국인(中國人) 혼합의 무장단이다.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

그러나 이 기록은 1937년 11월 13일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년여 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이 활동할 시기의 것이다. 총독부 검사국 사람들이 서울에 앉아서 더 이상 활동이 없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시기이므로, 이는 당시 알려진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 착각하여 쓴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했으니, 전사했다는 설, 제2방면군장과 같은 사람이라는 설 등 여러가지가 있었을테고, 정확히 어느 것이 맞는지 서울에서 확인하기도 어려우니 동일인이라는 설을 채택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의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기록이라는 것은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는 말에서 드러난다. 간단한 신원기록에 부친도 아닌 모친의 생존여부가 언급된 것은 특이하며, 북한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은 이미 7년전인 1932년 7월에 사망하여, 실제와 맞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말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1939년 당시 일제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귀순공작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래 참고),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을 만주로 데려가서 귀순을 설득하도록 시도했다. 이런 특별한 일이 있었으니, 조모를 모친으로 착각했다면 위와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조모를 데려갈 정도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은 상당히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까지 감안하면 위의 기록은 당시 파악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을 동일인으로 잘못 알고 6사장 김일성의 신원으로 적은 것에 불과하다.

6사장 김일성의 활동기간에 작성된 문헌에 나오는 신원기록들과 전혀 다른 신원정보를 그의 활동이 끊어진 2년 뒤에 새로이 알아낸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의 부하였다.

이명영은 일찌기 1974년에 만주서 김형직의 친구로 그 아들 김성주, 김영주 형제도 알았던 이도일의 증언을 통해 북한 김일성이 동생 김영주와 함께 6사장 김일성의 부대에 부하로 있었다고 밝힌바 있지만, 그의 주장은 대부분 배척당해 왔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당시 문헌들에서 그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 293-294.
그런데 이들 [김일성 부대] 대원중에 북한의 김성주(金聖柱, 김일성)와 그의 동생 김영주(金英柱)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서 확인된다. 안도현(安圖縣) 치안대장에 이도선(李道善, 경좌)이란 한인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이른바 공비(共匪)토벌에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이다. 1937년 초에 이도선은 공비토벌에 나갔다가 김영주(金英柱)란 한 소년을 체포했다. 부모와 사별한 데다가 가운데형 김철주(金哲柱)도 일찍 죽고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만주 땅에서 의지할 데는 없고 해서 김일성(金日成, 6사장) 부대에 있는 큰형 김성주(金聖柱)를 따라 소년대원으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이도선(李道善)의 형 이도일(李道日, 부산 거주)씨는 안도현(安圖縣)의 조선인회 회장으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전에 무송(撫松)에서 살 때 김성주(金聖柱)·영주(英柱)의 아버지와 친구사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인회에서는 체포 또는 투항한 한인들을 인수하여 안전정착을 도모해 주는 일을 맡고 있을 때라 이도일씨는 친구의 나이 어린 아들 김영주를 불쌍타하여 자기 집에 두었었다. 이도일씨의 아들 이벽오(李碧梧, 51·용산 거주)씨도 김영주(金英柱)와 같이 몇 해를 한 집에서 살았음을 증언했다.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관련 기사

《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 및 1938년 11월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 1938년 11월 ~ 1940년 10월

동북항일연군 1로군은 1936년 가을 2군 군장 왕덕태가 전사하고, 1937년말까지 5개사의 사장들이 전사하거나 투항한데다, 1938년 6월말 유일하게 남았던 제1사장 정빈마저 일본에 투항해버린데다, 그 동안 병력 손실도 커서 편제를 축소 개편하게 된다. 종전의 1, 2군과 6개사 구분을 없애고, 제1, 2, 3 방면군(方面軍)을 두게되는데, 사실상 6개사 체제가 3개사 체제로 축소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1938년 11월 제2방면군장이 된다.[45]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전사 후에 다시 나타나는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1939년 ~ 1940년 기록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에 임명된 것은 1938년 11월 25일임.
霍燎原等 編著, 『東北抗日聯軍軍史叢書: 東北抗日聯軍 第二軍』, 黑龍江人民出版社, 2005 pp.174~175[48]
霍燎原, 于文藻, 吕永华 著, 《东北抗日联军第二军》, 黑龙江人民出版社, 1987年
  •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이 1938년(昭和 13年) 발간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의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임강현(臨江縣, 부하 200 명)과, 무송현(撫松縣, 부하 300 명) 두 곳에 나온다.[49]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1명은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고 (전사후 남은 잔존 부대), 다른 1명은 이후 그와 같은 이름을 쓰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된 것은 1938년 11월의 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 귀순 공작 관련 기록

김일성 귀순공작에는 김일성의 조모 리보익(李寶益, 1876~1959),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 삼촌 김형권의 동료였던 박차석(朴且石) 등이 동원되었다.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은 당시 귀순공작을 주도했던 인물로 1949년 4월 반민특위에서 그 일에 대해 진술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귀순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 (1937년 11월 ~ 1938년 11월) / 7. 리보익 할머니

김일성 비단 내부상황(金日成匪團內部狀況)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이 1939년 8월 초 김일성 부대에 들여보낸 첩자 지순옥(池順玉)이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김일성 부대의 내부 상황 : 1940년 7월 26일자 훈춘 영사의 보고서로 별 대단한 내용은 없다.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는 당시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대사(関東軍司令官兼駐満洲国大使)였다.

지순옥은 위에 나온대로 김일성 부대원 강흥석(姜興錫)의 처였는데, 남편을 찾아 들어간 것으로 꾸몄다. 남편 강흥석은 마에다(前田)부대와 교전 중에 흉부에 중상을 입고 모 산중의 병원에서 치료중이라 했다. 김일성 부대와 마에다 중대의 교전은 1940년 3월 25일에 있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밀영으로 남편을 찾아온 지순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부대에 들어온 그녀의 행동이 수상해서 금방 첩자인 것이 드러났지만, 사실을 말하고 특별히 나쁜 행위를 하지않은데다 부하의 처였으므로 당분간 머물다 가게했다고 했다. 회고록에는 지순옥의 일을 김일성이 포용력 있고 인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로 포장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위 훈춘 영사의 보고서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지순옥이 1956년 김일성을 찾아왔다고 하므로 단순한 일제 첩자였다기 보다는 이중 스파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 제21장 대부대 선회 작전의 총성 (1939년 7월 ~ 1940년 3월) / 1. 밀영에 찾아온 녀인

훈춘 영사의 보고에는 김일성 회고록과 달리 지순옥이 김일성 부대에서 첩자 신원이 탄로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 회고록의 관련 내용은 작가들이 이 보고서를 참고한 후 쓴 것이므로 실제가 아닌 창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궤멸

1941년 3월에 노조에 토벌대가 작성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50]. 이름에 X 표시가 된 사람은 이미 전사 또는 투항(귀순)했다는 표시이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김일성 이름에는 X 표시가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했다.

1941년 3월초까지 1로군 요인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귀순 또는 소련으로 도주하여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18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소련군 시절

북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상관의 허락도 없이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54][55][56]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소련과 중국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증언도 있다.

제88독립보병여단
《김일성, 안길, 서철이 왕신림에게 올린 보고서 - 항일연군 제1로군 정황과 문제에 관하여 (金日成, 安吉, 徐哲 給王新林的報告 - 關于抗聯第一路軍情況和對問題的答複)》: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60 pp.95~105。및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pp.789~795.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동향/연구보고서,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pp.314~317 에 수록.
왕신림(王新林)은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의 중국식 암호명이다. 나움 소르킨(Naum Sorkin, 1899~1980)은 1941년 3월 부임한 두번째 왕신림이고, 이 보고서를 받은 첫번째 왕신림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류쉔코 장령이라 나온다.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발굴] 김일성 보증인 이청산 찾았다 주간조선 2558호 2019.05.20
  • 1941년 2월 16일 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서 장남 김정일 출생
김정일 생가
김정일 생년
김일성이 상관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소련으로 월경해 넘어왔다는 것은 1941년 3월12일 저우바오중(周保中, 항일연군 2로군 총지휘)이 웨이정민(魏拯民. 항일연군 1로군 정치위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 편지는 김일성이 소만(蘇滿) 국경을 사전 승인없이 넘은 것에 대해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위증민을 찾으러 만주로 파견나가는 김일성에게 들려 보낸 것이다.[58]
『그 어떤 곤란과 원인이 있든 김일성.이준산(伊俊山) 두 동지 소속 부대원들이 소련 국경을 넘은 것은 오류다. 이 오류가 비록 전반적 혁명 입장이 동요되었거나 총적 방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제1로군 총부대를 이탈하고 유격대가 투쟁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을 포기한 것이다. 또 전반 환경을 이해하지 않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곤란을 극복할 방법을 더 많이 생각지 않고 기회주의적 성격인 월경 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과 그 부하들 및 당간부들이 각성하고 그 오류를 비록 승인하기는 했지만 기율상에서 김일성 동지 등에게 적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적당한 처분을 주기 바란다.』

《周保中、金策给魏拯民的信》(1941年3月12日),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61券』, (吉林人民出版社, 1988) 107쪽)
《周保中, 金策关于来X城商讨东北党和游击运动等问题给魏拯民的信》(1941 年 3月 12 日), 『周保中抗日救国文集』,吉林大学出版社,1996年10月
하지만 김일성에 대한 처벌 권한을 가진 1로군 총사령대행 위증민은 김일성이 만주로 출발하기 1달여전인 1941년 3월 8일에 사망하여, 김일성은 처벌을 모면한다.
  • 김일성이 1941년 9월 30일자로 주보중(周保中)과 김책(金策)에게 올린 만주 정찰활동 결과 보고서
주보중, 김책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서한 (1941년 9월 30일, 번역문) : 동북지역조선인항일력사사료집 /김우종 주필; 원인산, 림영만 부주필; (모단강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5), 제10권 pp.266~274.
정주진, <김일성의 소련군 편입 직후 만주 정찰활동 결과 보고서> 국가관리브리프 16호,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2017년 1월 26일
중국어 원문 : 『金日成給周保中, 金策的信』 (1941.9.30.),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編,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1999, p.819
  • 1942년 김일성 자필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주보중의 지시로 김일성이 직접 쓴 이 기록에는 조선독립이란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으므로 김일성이 당시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했다고 볼 아무 근거가 없다.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투쟁 전과라는 보천보 사건조차 나오지 않는다.
  • 1945년 8월 29일 적기훈장 수여 관련 문서[59]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서던 날 가슴에 달고 나온 적기 훈장의 수여 관련 기록이다.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주보중은 만주에서는 김일성의 직속 상관은 아니었으나, 소련으로 넘어가서는 88여단장으로 직속상관이었다. 소련에 넘어간 후 김일성의 행적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기(后记)에 적힌 말로 보아 김일성 관련 민감한 부분은 간행시 상당히 손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p.843 후기(后记) "考虑日记是 公开出版、故某些内容 进行了审愼的技术处理。(일기가 공개 간행되는 점을 고려하여 일부 내용은 기술적 처리를 했다.)"
스탈린과 김일성. 1/ 가브릴 코로트코프 지음 서울 : 동아일보사, 1992 - 국립중앙도서관
스탈린과 김일성. 2/ 가브릴 코로트코프 지음 서울 : 동아일보사, 1993 - 국립중앙도서관
88여단 시절 김일성과 관련한 문서와 해설이 많음.

북한 김일성의 소련군 시절 자필 문건에 나오는 경력

아래 두 문건은 위에서 언급했던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자필로 쓴 것인데, 자신의 경력이 나온다. ×××로 된 곳은 원래 金日成 이름이 있던 곳이나, 중국측에서 자료집을 간행할 때에 이름을 삭제하고 남긴 표식이다. 두 문건 모두에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6사장이었던 것처럼 써 놓아 이때부터 경력 조작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도 된다.

1941년 1월 작성 이력서[24] 1942년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43]
[問]: 何時, 何地和在何軍隊中 負过[過]務 擔任什麽職務和在誰的指揮之下

[答]: 在未參加游擊隊 前1932年春 曾由中共黨東滿特委 童昌榮指示之下加入救國軍(王德林部隊) 在該隊任宣傳員之職

[問]: 何時在何地入在什麽情形下加入中共 加入那個組織和誰的証人
[答]: 1931年在東北奉天省安圖縣加入中共組織 由中共靑工作 [当軍] 加入中共東滿黨安圖區 保証人李靑山

[問]: 是否遭受过[過] 日本滿洲國及國民黨的逮捕和追尋 何時在何地及怎樣得到的自由
[答]: 1929年曾被國民黨的逮捕在吉林 但經五个月工夫無任何 [口供] 及証據及後援人保証及請願結果釋放

[問]: 是誰派到滿洲作黨和游擊隊的工作 何時 已作了 多少時候在那一聯軍內和 擔任过[過]什麽職務
[答]: 中共黨東滿特委派到游擊隊工作 至現在在第二軍 曾任过[過] 汪淸反日游擊隊 大隊政治委員 第三團參謀長政治委員 第六師師長 第一路軍 第二方面軍指揮之職務.

一九三五年春季,我軍爲擴大新的遊擊區,首先由三團四、五連,四團二連組成遠征隊,×××同志負責向寧安、穆棱等區活動。

當年秋冬季,日匪軍大規模的"討伐"我遊擊區時,我軍爲要順利地沖破敵人之包圍,並擴展我實力起見,我軍全部放棄了舊遊擊區,三、四兩團向寧安、穆棱、額穆、依蘭、方正等方向前進活動,....

第二獨立師創立時組織狀況:
獨立師師長朱鎮,政治部主任王德泰。
第三團團長方振聲,政委×××。人員共百六十餘名,共分五個連。武裝步槍一百五十支,手槍十餘支。

第二軍創立時組織狀況:
第二軍軍長王德泰,政委魏民生(即魏拯民),政治部主任李學忠,參謀長劉漢興。
第三團團長方振聲,政委×××。人員共二百名。武裝槍一百八十支。

第一路軍成立以前,抗日聯軍第二軍成立時(一九三六年三月)組織狀況及活動區:
軍長王德泰,政委魏民生,主任李學忠。
第三師師長×××,政委曹亞範。

抗日聯軍第一路軍時期(一九三六--一九三八)
第二軍軍長王德泰,政委魏民生,政治主任全光。
第六師師長×××,參謀長林水山。人員共五百餘名。活動區:朝鮮、長白、臨江、安圖、和龍。

왕청반일유격대대 정치위원, 제3단 참모장과 정치위원, 제6사장, 제2방면군장을 역임했다고 했으나 제6사장 경력은 남의 것을 도용한 것이다. 1935년 가을과 겨울 기간에 북만에서 5군과 혼성부대 편성을 주도한 사람이 북한 김일성 자신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6사장 김일성이다. 또 그는 제3단 단장 방진성 아래에서 정치위원, 제3사장(제6사장), 제2방면군장을 역임했다고 했다고 하나, 제3사장(제6사장) 경력은 남의 것을 도용한 것이다.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NKVD 비밀 요원

88여단에서 진지첸(김일성) 대위는 표면적으로는 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NKVD 비밀요원으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상관인 극동군 정찰국장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이러한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유출된 그루시코의 전문이 북한 김일성의 KGB 요원 전력 입증
KGB 제1국의 제3과장 빅토르 그루시코가 1978년 4월 20일 KGB 홍콩지부로 발송한 전문에 김일성88여단 시절 대위로 복무하면서 동시에 KGB 전신 NKVD 요원이었다고 나온다. 그루시코는 1991년 초 KGB의 2인자인 제1부의장까지 올랐으나, 8월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대하여 KGB 수뇌부가 주도한 보수파 쿠데타에 가담했다 옐친에 의해 쿠데타가 진압되면서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KGB도 된서리를 맞고, 기구가 대폭 축소되며, 명칭도 바뀌게 된다.

김일성이 조선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들

만주 항일연군 시절에는 일본이 패망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라도 되기를 원해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족 여영준(呂英俊)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일본이 패망하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라도 시켜주기를 원했다.[60]

“한번은 김일성(김성주)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 정위,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왜놈들과 싸우느라 산속에서 고생하는데, 왜놈들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은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러자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안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했으니 최소한 안도현장쯤은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 주변에 모여앉아, ‘그럼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 위수사령관을 하마.’라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는 김일성도 북조선(북한)에 돌아가 이렇게 나라를 세울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66]

[66] 취재, 여영준(呂英俊) : 조선인, 항일연군 생존자, 취재지 연길, 1986, 1988~1989, 1993, 1996.

이런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의식 구조는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만주의 안도현장 자리 정도나 하나 하고싶어 일본군이나 만주군과 싸운 것이지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다. 해방되면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항일연군 내의 다른 조선인들도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소련서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

만주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은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강연을 직접 들었던 탈북자의 증언이다.[61]

김일성이 1941년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의 연해주 지방으로 도주해 소련군 혼성부대 88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습니다. 소련군에서 곽에 든 담배를 공급받게 되면서부터 김일성은 곰방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리을설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의 전우들이라고 하는 김책이나 최현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곰방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방 후 김일성이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리을설의 이야기였습니다.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리을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 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김일성이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조국이 분단되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오늘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봉건 통치는 없었으리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행들을 다시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련 국방성 전사(戰史) 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던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62]

진지첸이 자신의 생애 중 15년을 투자했던 ‘빨치산 전(戰)’은 지금 상태에서는 스탈린에게도 모택동에게도 필요치 않았다. 소련 극동전선으로 된 제88국제여단은 그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막 군사적기 훈장을 받은 육군대위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군대의 집단 동원 해제가 시작되면서 매우 많은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계속하느냐 ‘시민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육군대위 진치첸은 실망했다. 제88여단은 재편성돼야 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채소밭에서 야채가꾸기를 계속하거나 보잘것없는 공무원이 되고싶지 않았다. 물론 당의 직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것이 ‘상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같이 소련군에서 출세할만한 자격 요건도 갖추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그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북한 전문가 란코프(Andrei Lankov)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63][64]

많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매우 명백히 다음과 같이 내다보고 있었다.
즉 군대나 군사 아카데미에서 복무 후, 연대 또는 사단 지휘관이 되는 것 등으로, 역사가 조금만 다른데로 흘렀어도 후일 모스크바의 어디선가에 소련군 퇴역 대령 혹은 소장 출신인 김일성이 존재했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 유라(김정일)는 지금쯤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민주주의 러시아'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조직이 주도하는 많은 군중이 모인 가두행진에 열성적으로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자필 문건들에 조선독립에 대한 말은 나오지도 않아

김일성 1942년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43]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중공당원으로 만주 적화를 위해 투쟁한 것이다.

이외의 서신이나 보고서 등 다른 자필 문건들에도 조선독립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나 조선말은 서툴러

소련의 고려인으로 88여단 출신인 유성철도 당시 조선인들끼리도 중국말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였다.[65]

김일성은 북한에 와서는 특별 교습 등을 통해 우리말을 빨리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해방전에는 오랜 외국 생활로 조선말을 더듬거렸으나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조선말을 따라잡는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그가 조선이나 조선독립에는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선독립운동으로 보기 힘들어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金日成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고, 다른 조선인들도 자신들 이름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이름을 썼다. 이에 비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66],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66][67][68]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해방전의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희미했고, 어디에서도 그가 간절히 조선독립을 원해서 투쟁했다는 증거가 없다. 다만 소련군 상관들에게 잘 보여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을 뿐이다.

8.15 해방과 입북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을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

이후 진지첸 대위(김일성)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소련 군용 화물선 푸가초프호(Pugachev 號, 정식명칭 Emelyan Pugachev, Емелья́н Пугачёв)를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였다.[69][70][71][72]

푸가초프호(Pugachev 號). 해방 직후 소련군 88여단진지첸 대위(김일성) 일행이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 타고 온 배이다.

한달간 김영환이란 가명 쓰며 숨어다녀

소련군 문서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진지첸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어

해방 직후의 김일성 관련 기록

해방 직후의 남북한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보면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은 보천보 사건이 유명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보천보 사건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항일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나중에 유명해졌지만,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국내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나서기 이전에 주요 각료 후보로 거론되던 김일성은 1920년대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거의 전설화된 김일성 장군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 또는 민간의 김일성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당시 그의 전력에 대해 제대로 정확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의 기록을 보아도 그의 해방전 경력은 별 대단한 것이 없고, 소련군 경력은 철저히 감추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는 미지의 인물이었고, 한국 정부가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폄하하기 위해 가짜로 만들었다는 따위의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인물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뿐이다. 소련군이 어떻게 해서 이런 인물을 북한으로 데려와 지도자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려지는 것은 공산권이 붕괴하는 1990년 무렵부터이다.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수십년간 진행된 오늘날에도 무엇이 진실인지 선명히 가려지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소련군이 데려온 "자칭 김일성 장군"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었겠는가? 일찍부터 이름을 들어온 "김일성 장군"과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니 가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북한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것은 1970년대부터이며, 동북항일연군이나 보천보 사건, 소련군 88여단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는 시기는 1980~90년대 이후이다. 오늘날 좌파가 장악한 한국 학계에서는 김일성 미화를 위해 마치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과거 한국 정부가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기록에 나오는 김일성

1945년 9月 6日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에 김일성(金一成)이 나온다.
중도파 단체인 선구회(先驅會)가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한 지도자 여론조사에 나오는 김일성(金日成)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

  •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東京版)』 1945년 10월 3일자[73]는 해외 각지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 金日成 씨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에서 ‘김일성 軍’을 조직하여 만주사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약 조선 반도민의 인기를 획득하였고 이동휘 (李東輝, 1873-1935) 씨의 세력 실추 후 친소파의 제일인이 되었다. 중공은 그를 이용하여 만주 방면의 지반 획득을 위해 그에게 북만성위원, 東北抗日聯 제3路軍 제10 지대장 및 정치위원의 지위를 주었고 이번 소련의 북조선 진주와 함께 평양에 들어온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김일성이 일본 육사를 나오고 만주사변(1931년) 때부터 유명해졌다고 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후대에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알고 있는 듯하다.

북한 김일성 출현 직후 남한 언론의 관련 보도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완전한 무명인사로, 만주나 소련 어디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10월 14일 평양 집회에서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서 대중들이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했다. 남한 언론도 그의 실제 행적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익숙한 이름의 "김일성 장군"이 귀국한 것처럼 착각하여 보도하고 있다. 무명인사를 유명인물로 둔갑시킨 소련군정과 진지첸 대위의 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처음으로 평양의 대중 앞에 등장한 직후 10월 중으로 이를 보도한 남한 신문 기사는 아래 3건이 확인되어 있는데 모두 2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신문들이 귀국한 이승만의 최초 기자회견 기사는 같은 날 1면 톱으로 크게 취급한 것과 대조적이다.[74][75] 11월 초순에도 김일성에 관한 기사들이 더러 나오기는 하나 11월 중순 이후부터 자주 나오기 시작한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로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 당연히 이승만처럼 공개적으로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기자회견을 가졌어야 하며, 몰래 귀국하여 한달동안이나 숨어 다니다 대중집회를 조작하여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는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무명인사였기 때문에 한달여 민심을 살피며 고심하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앞에 나서기로 일을 꾸민 것이다. 남한의 신문들도 그의 이름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그의 평양 출현도 며칠 후 단신으로 짤막하게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金日成將軍, 歸朝入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 10. 19. 2면 2단
  • 《金日成將軍 平壤滯在中》,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5. 10. 18. 2면[74][76]
金日成將軍 平壤滯在中
北鮮 南滿 一帶에 勇名을 덜치든 革命의 鬪士 金日成 將軍은 수일 前 部下小部隊를 거느리고 歸國하야 現在 平壤에 滯在 猛活躍中이며 平壤서는 同將軍歡迎會가 성대히 열리었다 하는데 同將軍은 그間 麾下百俆名울 莫斯科에서 訓練中이였는데 저 영광의 날 八月十五日을 맞이하자 急遽 歸國의 길을 떠났다 하며 同將軍은 名譽스러운 赤軍最高勳章을 받었다한다.
莫斯科 : 모스크바
金日成將軍, 歸朝入壤
確實한 報道에 依하면 쏘베트 異域에서 朝鮮獨立을 爲하야 끈임없시 싸워가는 金日成將軍은 日前 平壤에 歸國하였다하며 이앞 더욱 活躍할 것이라고 注目된다.
歸朝入壤 : 조선에 귀국하여 평양에 들어오다.
  • 《남북만(南北滿)에서 용명(勇名) 떨친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귀국》, 『민주중보(民主衆報)』 1945년 10월 23일 2면[77]
기사 내용 미확인

북한 김일성은 해방전 만주나 소련 어디에서도 장군이라 불린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남한 신문들이 평양에 출현한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 칭하며 보도한 것은 그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김일성 장군인 줄로 착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무명인사에 불과한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나타난 것도 바로 이런 것을 노린 것이다. 또 기사 내용이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된 것은 기사 작성자가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소련군 진지첸 대위)이나 유명한 이름의 주인공 김일성 장군에 대해 구체적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칭 김일성 장군의 귀국이 다른 저명 인물 이승만 박사나 김구 주석의 귀국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실체가 모호하고, 그 이름을 자칭한 인물 진지첸 대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들은 당시 북한 김일성이 아닌 김일성 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또 무명인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사기극을 벌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 해방 직후 김일성 관련 기사 검색
  1.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검색
  2.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창간호부터 기사 검색 열람 (무료)
  3. 조선뉴스라이브러리100 조선일보 창간호부터 과거기사 검색
해방 후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23일[78], 동아일보는 12월 1일[79] 복간하여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고 좀 지난 후부터 기사가 있음.

해방 직후 북한의 김일성 약력 기록

김일성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이 넘쳐나며, 구체적인 해방전 행적에 대한 언급은 소략하다. 그가 소련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발탁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인 소련군 경력은 철저히 감추었다.

p.83 : 韓載德 著, 金日成將軍 凱旋記 빗나는 革命家의 집
출처 :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 p.1 (p.4)
(2페이지 짜리 약력 중 1페이지는 해방 후의 경력이다.)
조선중앙년감(朝鮮中央年鑑) 1950년판 (1 of 3) : 조선중앙통신사(朝鮮中央通信社), 1950년 2월 15일 - 국립중앙도서관
pp.187~189 : 3. 朝鮮民族의 領導者 金日成 將軍의 歸國 (朝鮮最高人民會議 代議員 選擧를 爲한 立候補者 略歷 紹介文에서)
[초대 最高人民會議 代議員 選擧는 1948년 8월 25일에 있었고, 김일성은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선거구 (제23선거구)에서 100% 득표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
[조소 경제 문화 협회 사진첩] 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날, 1948년 8월 25일. (上左) 강동군 입후보자 환영 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 장군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초대 내각#레베데프의 평정서
소련 군정 민정국장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작성한 북한 초대 내각 요인들에 대한 평정서 : 1948년 12월 25일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연구사업] 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 :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pp.380~401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북한 최초의 공식적 김일성 전기
[出席人] 義勇軍側 : 崔鳳綠, 趙容徹, 張振光, 柳新, 河振東 / 金日成將軍部隊 : 林春秋, 金成國, 安吉 / 崔昌益 副主席
안길 (安吉, 1907∼1947) 등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담에는 이미 허풍과 과장이 잔뜩 들어가 있다.

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서는 무명인사

북한 김일성에 대해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의 좌파들도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라며 찬양했으나, 실제 그의 경력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는 국내 사람들이 거의 잘 모르는 낯선 인물에 불과했으나, "김일성 장군" 이름을 사칭하며 유명인 행세를 하고 다녔을 뿐이다. 당시 국내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거기에 김일성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해방 당시 평양에 김일성이 출현한 직후부터 남한의 각종 기록에는 그가 가짜라는 말이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특히 그를 가짜라고 기록한 미군정도 문헌도 상당히 많다. 과거 한국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이 돼서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해방 직후 김일성에 대한 남한 기록

해방 직후 남한 문헌에 나타나는 김일성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해방전 행적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는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해방 직후 북한 문헌에도 나오지 않으니 남한 문헌에도 당연히 없다. 그 사건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래 조선연감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인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서는 6.25 남침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를 거친 후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政界要人錄 p.362 (366/410)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十六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今次 蘇獨戰에 參加
陸軍少佐로 昇格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 責任者 被任
北朝鮮共産黨 中央責任秘書 就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臨時人民委員長
政界人名錄 金日成 : p.459 (465/503)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七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後 蘇獨戰 參加
陸軍少佐 昇進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共北朝鮮分局 責任者 等 歷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人民委員會 委員長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남한 기록

해방 직후 남한에서 출판된 아래 책에 나오는 김일성에 대한 글들은 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다. 하지만 만주 시절 대단한 항일투쟁을 했다고만 하고,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직전 5년간 소련군에 있다가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에 왔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反滿抗日軍
滿洲建國의 後에 滿洲에 있는 中國側의 不服軍人이 地方으로 分散하야 께릴라的 抗戰을 시작하고 朝鮮在來의 獨立軍이 새로 氣勢를 어더서 反滿抗日戰線에 合流하니 그 衆이 三十萬에 넘고 廣大한 地域에 東閃西忽하야 니른바 治安이 언제나 確立될는지 압히 캄캄하얏다. 특히 朝鮮系의 反滿軍은 多年을 두고 山岳險岨의 地에서 耐乏忍苦의 作戰에 百練한 남아지요 長白山彙의 地理를 燭照的으로 精通하야 그險夷遠近을 自由롭게 利用함으로써 日本軍이 아모리 가서 攻擊올 더하되 百戰百敗를 되풀이하고 다만 擒縱自在하는 그네의 神機妙算을 感歎하고 도라옴이 唯一한 結果라 할 지경이얏다. 그뒤 建國十年의 間에 中國系의 抗日軍은 거의 消散하야 남은 者가 얼마되지 아니하되 東邊道로부터 東部國境에 걸치는 山岳密林地帶에 出沒하는 朝鮮系의 義兵은 오히려 累千名의 勢力을 保持하야서 巧妙하게 蘇聯과밋 中國共產軍으로 더부러 聯絡을 取하면서 滿洲國을 必倒한 뒤에 말것울 豪語하고잇섯다. 滿洲國에서는 이것이 잇슴으로써 百가지 對外宣戰이 죄다 無意味하야짐으로써 討伐, 懷柔의 硬軟兩策을 다쓰고 마조막에는 數千萬圓의 巨費로써 長白山中에 掃蕩大路를 만드러서 徹底한 迫逐으로 自滅에 드라가기를 期하얏스나 이또한 부지럽시 되얏다. 滿洲國이 朝鮮義兵을 爲하야 犧牲한 것이 金錢만 億을 算하되 國은 亡할지언정 朝鮮義兵은 掃滅할날이 업스리라고 닐럿다. 처음 朝鮮義兵의 數ㅣ 만흘적에는 各個의 行動을 取하야 그 두드러진 것만 하야도 金日成, 崔賢, 朴得範, 金先等 名帥를 볼러니 뒤에 차차 求心的으로 集約하야 나종에는 金日成이 統一體의 代表로 들려서 金日成의 名은 드듸여 滿洲政權抗爭史上에 나타나는 許多한 人物中 가장 큰 英雄的 表象이 돠얏다.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김일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1941년 1월 김일성의 귀순을 권유하기 위해 살포한 비라에도 대표자로 그와 매제 박석윤(朴錫胤·1899~1950)의 이름이 들어 있다.[80] 물론 김일성은 그 전해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했으므로 그 비라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매제 박석윤(朴錫胤)은 민생단 사건(民生團 事件)으로 악명 높은 민생단을 만들었던 사람이기도 하다.[81] 해방 후 그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자 최남선은 이러한 과거의 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을 높이 평가하는 글도 쓰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五 金日成軍의 活躍。
抗日戰에 있어 빼지못할 한 巨大한 存在는 白頭山과 鴨綠江 流域을 中心으로 한 金日成軍의 活躍이다. 滿洲國으로 하여금 一億圓의 經費를 쓰게하고 總督府로 하여금 朝鮮統治의 癌이라 하여 國境江岸이 全部 堡壘化를 하여도 安心할수 없이 頭痛한 것은 抗日戰上 特筆大書할 일이다. 白頭山의 綠林豪傑 靑年將軍 金日成將軍은 平安道出生으로 今年 三十四歲의 靑年이다. 鴨綠江 沿岸一帶의 警察署 駐在所 等 襲擊 放火를 當한 곳이 많아 언제나 그 때마다 憲兵隊 警官隊를 는 多數動員하여 掃蕩이라는 어름으로 報復戰을 開始하였으나 늘 可憐한 慘敗를 當하고 말았다. 이는 金日成部隊가 山林中의 地理에 能熟한 것과 게릴라戰의 奇襲戰法을 取하여 敵으로 하여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늘 五里霧中에 彷徨케 한 것이다. 古語에 勇將아래에 弱卒이 없다는 말과 같이 그 部下 亦是 모두 勇敢하여 普天堡를 襲擊한 때는 民衆을 모아 놓고 一場의 愛國演說을 하여 一般에게 큰 感激을 주었다. 그 行動이 膽大하고 疾風迅雷같으면서도 또 悠悠한 點은 目睹한 者들이 늘 傳하여 오는 말이다. 日滿軍警과의 交戰은 百餘回가 넘으며 特히 그 中에도 明月溝로부터 日兵 大部隊를 誘引하여 安圖가는 途中에서 擊滅한 것과 三道溝로부터 靑山里로 向하는 日本軍 大部隊를 最後의 一人까지 全滅시킨 것은 가장 큰 勝戰이었다.
저자 강흥수는 어떤 사람인지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해방 직후 남한 문헌 중에 거의 유일하게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당시 신문 기사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사건당시 보도를 찾아보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이 일반에 유명했다는 증거로 쓰기는 어렵다.
《지도자 군상(指導者群像)》, (大成出版社, 1946년 9월 15일) pp.29~40.
金南植, 李庭植, 韓洪九 엮음, 《韓國現代史資料叢書 : 1945-1948》 제13권 (제3부 단행본편)에 수록
실체를 잘 모른는 인물에 대해 찬사와 미사여구만으로 얼마나 긴 소설을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pp.32~35] 二

金日成將軍은 平安道 出生으로 本名을 金成柱라한다. 少年時節부터 事物에 對한 銳利한 判斷과 臨事에 있어의 果斷性과 그리고 남달은 正義感과 多情한 人間味갖고 있었다한다. 十四, 五歲부터 學生運動 靑年運動에 投身하야 항상 리-더의 資格으로서 前面에서 活躍하였다. 남달은 壯志를 품은 그는 日帝의 監視와 彈壓이 酷甚한 國內에서는 到底히 백여날수없어 少年의 몸으로서 國內를 등지고 滿洲를 찾었다. 滿洲서 그는 地下工作으로 靑年運動을 指導하다가 八個月과 그후 三年間 監獄生活을하였다. 그는 그후 滿洲에서 武裝團을 모아 太極旗를 앞에 세우고 自身이 太極旗手로서 抗日戰線을 펴기 시작하였다. 關東軍이라면 日本의 陸軍가운데서도 精銳를 자랑하건만 少年 金日成의 武裝隊에게는 한없는 飜弄을 當하게되었다. 그 超人的인 武勇과, 天才的인 戰略은 殘虐無比한 日兵들의 心膽을 놀내게 하였다. 이리하야 金日成은 二十世紀의 한낱 神秘的 存在가 된 것이다.
一九三一年 日本이 滿洲를 侵犯하자 金日成將軍은 滿洲의 中國人民에게 侵略者 日本을 共同으로 擊退할 것을 强調하여 中國의 愛國靑年들에게 깊은 感銘을 주었다. 將軍은 精銳 三十餘名과함께 赤手空拳으로 火繩銃 槍 몇 자루를 들고 山中으로 드러가서 日本軍隊와의 戰鬪를 始作하였다. 接戰때마다 勝利品으로 武裝을 完備한 金日成部隊는 關東軍 最大恐怖의 的이였다. 그뒤 金將軍 은 「中韓反日游隊」의 勇士들과 協力하게되었고 一九三五年에는 金日成將은 第二 東北人民革命軍 司令官이 되었다. 國內와 滿洲 中國各地에서 모여드는 金日成部隊는 極히 短時日內에 師團을 形成하게되었다. 그리하야 金將軍은 師團을 指揮하야 그 鐵筩같이 森嚴한 警戒를 쳐부시고 日兵을 뭇지르면서 鴨綠江, 豆滿江을 넘어 朝鮮을 掩襲해온 일이 屢次 있었다. 金日成部隊의 根據地는 白頭山 附近이였으니 그 神出鬼沒한 빨치산 戰法는 마치 옛날 洪吉童의 傳說을 聯想케하야 日本關東軍을 餘地없이 蹂躪 弄絡하였다. 日本軍隊는 오랜 戲月에 많은 犧牲을 敢行하면서 數많은 軍隊가 出動하여 그 討伐에 努力하였건만 그들은 金日成을 붙잡을 수도 그 部隊를 討滅할 수도 없었다. 討伐하면 할쑤록 느러가고 커가는 金日成部隊--- 한 사람의 金日成을 죽였다고하면 열 사람의 金日成이 出現하는 實로 二十世紀의 이 수수께끼 앞에서 日本軍隊가 戰慄할 뿐아니라, 世界의 軍略家들이 그얼마나 놀내였든가!

討伐에 成功할 수 없음을 깨다른 日本놈들은 朝鮮民族으로서의 叛逆者들을 通해서 買收와 懷菜의 政策을 썼다. 그리하야 一九三九年代에는 所謂 「東北治安工作」이라 하여가지고 金日成將軍에게 武器를 바치고 歸順하면 朝鮮總司令官을 준다고까지 提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野卑한 政策에 넘어갈 人間이였다면 本來 그는 抗日鬪爭을 始作하지도 않었을 것이다. 將軍은 그들의 提案을 코우슴으로 一蹴하고 더욱 果敢한 戰鬪를 繼續한 것이다. 그 無比의 軍隊的 規律과 訓練은 能히 壓倒的인 日兵을 물니치면서 陣勢를 擴大해온 것이다. 日本帝國主義者들은 金日成將軍의 部隊를 强盜團 혹은 匪賊團이라고 불넜다. 이제 日帝의 後裔들인 南部朝鮮의 親日派, 民族叛逆者, 그리고 그들에게 無意識하게 追從하는 一部 反動輩들은 日帝에게서 배운 慣習으로서 우리의 民族的 英雄을 匪賊頭目이라고 또는 假字 金日成이라고 侮辱的 言辭를 함부로 使用하였다. 그러나 金日成將軍의 部隊는 秋毫도 匪賊行爲를 한 일은 없다. 日帝에게 阿諂하야 蓄積한 者나 勤勞大衆의 搾取로서 蓄財한 者의 財物은 빼앗어다가 貧困에 쪼들니는 사람들에게 分配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지도자 군상(指導者群像)》은 해방 당시의 지도급 좌익 인물들을 평하는 책이다. 여운형, 박헌영에 이어 3번째로 나오는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무려 12페이지나 되는 장황한 글에서 그에 대한 찬사와 미사여구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 일제시대 행적은 위와 같이 상상으로 지어낸 것들 뿐이라 실제와도 동떨어진 것이다. 일본군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한 것은 알지도 못한다.
김일성의 실제 전력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가짜라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낙인찍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이렇게 김일성에 아부하던 필자는 월북했다가 남로당 숙청 때 처형 당했다고 한다. 겉멋만 잔뜩 든 사이비 지식인이 자초한 일이다.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신문 기사

남한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와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김일성에 대한 글이 자주 실렸으나 대부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미사여구만 늘어놓을 뿐, 그의 전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별로 없다. 해방전 5년간 소련군에 있다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에 왔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으므로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진다.

해방직후 김일성 기사에 대한 조사 연구 결과

최강미는 해방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실린 김일성 관련 기사들을 귀국한 다른 항일투사들에 대한 기사와 비교하며 조사 연구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82]

[pp.45~46] 세 명의 약력 중 분량이나 내용이 가장 풍부한 인물은 무정(武亭)인데 특히 다른 인물에 비해 개인적인 비범성을 부각시키는 내용이 많다. 대신 다른 두 인물과 달리 학력 사항이나 현재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생략된 두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내용을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김두봉(金枓奉)은 개인적 비범함에 해당되는 내용이 없어서 영웅적 투사보다 학자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김일성의 경우, 비범함을 나타내는 일화는 있으나 무정에 비해 빈약하고, 다른 항목들도 정보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이렇듯 약력의 내용상으로는 가장 생생한 영웅성을 지닌 인물이 단연 무정이지만 시종일관 현격히 부각되는 인물은 김일성이다. 따라서 김일성에게 속한 찬양의 수식들은 이런 실제적 내용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나 균형감이 떨어져 다소 공허하고 과도한 인상을 준다. 이는 김일성의 형상이 텍스트상에서는 영웅으로서 상대적으로 불균형해지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

논문 여러 곳에서 저자는 김일성에 대한 찬양의 수사는 과도한데 비해 그가 무얼하다 온 사람인지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이유를 파악하지는 못한 것같다. 좌익지들은 소련이 내세운 북한 지도자 김일성에 대해 맹목적인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북한 김일성은 실제로는 국내의 어느 누구도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모르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같은 논문에서 저자는 이런 기사들에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지적하지만[82] [p.46 각주 35)], 그에 대한 설명은 내놓지 못한채 의아해 하기만 한다. 보천보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그보다 더 크거나 비슷한 규모의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과 마찬가지로 곧 잊혀졌고, 해방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은 여전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유독 보천보 사건만 유명해진 것은 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그 사건의 주역이 아니며,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공적을 가로챘다.

소련 군정 인물들의 기록과 증언

  1.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소련군 정치장교 G.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3.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The Moscow Times Jul. 22, 2004
    위 기사를 번역, 요약한 기사: 그리고리 메클레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구소(舊蘇) 군정 치밀한 작전” 동아일보 2004-07-23
  4. "Крестный отец" Ким Чен Ира «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05/12/2002
    "Godfather" Kim Jong Il : «Argumenty i Fakty (Arguments and Facts)» № 11 05/12/2002
  5. 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 SoftMixer
    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 Waback Machine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6. 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Андрей Почтарев, Независимое военное обозрение. 2005-01-14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 : Andrey Pochtarev, Independent Military Review. 2005-01-14
    여기에는 김일성 본인이 전사한 선배 지휘관의 이름을 따다 썼다고 했다는 메클레르의 증언이 나온다.
(러시아어를 구글로 영역하여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
1930년대 중반부터 그(북한 김일성)는 김일성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인들 사이에 대단한 권위를 가졌던 전사한 대장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Since the mid-30s, he began to use the pseudonym Kim Il Sung, taking the name of his deceased squad leader, who enjoyed great authority among Koreans.
[С середины 30-х гг. стал пользоваться псевдонимом Ким Ир Сен, взяв фамилию своего погибшего командира отряда, пользовавшегося большим авторитетом у корейцев.]
............
다른 동지들의 경우처럼 그(북한 김일성)도 존경받던 전사한 게릴라 부대 지휘관을 기념하여 그 이름을 따라 썼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The fact that, following the example of his other comrades-in-arms, he took this name in memory of his deceased beloved and respected guerrilla unit commander, he himself told me.
[То что, он по примеру других своих боевых товарищей взял себе эту фамилию в память о своем погибшем любимом и уважаемом командире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он сам мне говорил.]
레베데프 비망록.pdf
쉬띄꼬프 일기.pdf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의 제주 4.3 자료집 - 비망록 번역문 전문을 볼 수 있다.
  1. 레오니트 바신(Леонид Васин), 《대위 동무 (Товарищ Капитан)》, 소련의 잡지 「극비(極秘),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1991년 7월호;
    기사 내용 요약 :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 46년3월 蘇軍장교 방어로 연합뉴스 1991-08-14
  2. 「날조된 英雄」金日成 / 바신, 레오니트 新東亞 398호 (1992.11) pp.486-501

기타 참고 자료

이책은 해방 직후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이며,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음. : 총 82회
金日成(김일성)을告発(고발)한다 (1)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04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81)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8.12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82)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8.13 동아일보 2면
한재덕은 해방 직후 평양민보 편집국장으로 김일성 수행기자를 했고, 김일성을 미화, 찬양하는 글을 많이 썼으나, 일본에 공작원으로 파견된 후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하여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 旧姓:萩尾, 1929~ ?)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 pp.119~122.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고바야시는 해방 직후 1년 가량 김일성의 관저에서 가사일을 돕는 하녀로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한 수기임.

김일성 관련 우남위키 표제어

가족과 친인척

관련 인물

각주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送付에 관한 건 (1919년 03월 26일) p.6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第二 壹部 參考 送付 (1919년 03월 26일) p.6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2.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25, 조선(朝鮮) 1 (みすず書房, 1967)
  3.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연합뉴스 2005년 3월 23일
  4. 金日成의 父 金亨稷 조선국민회활동 사실로 확인돼 연합뉴스 1998년 3월 25일
  5.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6.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7.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서울신문
  8. 이명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96~97.
  9.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10.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 이름을 접한 시기
  11. 북한 김일성 일가 우상화에 ‘동조’한 박승춘 보훈처 월간조선 2016년 8월호 / 김일성 친척·좌익 인사에겐 ‘건국훈장’… 독립운동한 임정 고문·고승은 서훈 불가 / ⊙ 박승춘 보훈처장, “김일성 부모 서훈 검토해 보겠다”/ ⊙ 북한, 김일성 숙부 김형권 동상 ‘혁명열사릉’ 등 곳곳에 설치·우상화 / ⊙ 김일성, 외숙 강진석이 항일무장단체 백산무사단 만들었다고 날조 / ⊙ 보훈처, ‘상훈법’ 개정해 서훈 취소하겠다지만… 야당 동의 여부는 미지수
  12. 국민부(國民府)내 공산주의자들의 1930년 8월 19일자 탈퇴 선언문(脫退宣言文) :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 대리(日本 總領事 代理)가 1930년 8월 27일자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13.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1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15.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16. 長春領事館에 逮捕된 ○○단重要人物 신의주검사국에 인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08월 11일 7면 4단
  17. 朝農同盟事件 卄一日에 公判 新義州地方法院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12월 14일 7면 3단
  18. 治維違反及殺人事件最高七年을 求刑 공범二명은 五년과 三년을 구형 判決言渡는 來六日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02.02
  19. ○○團員 三名(단원 삼명) 長春領警(장춘령경)에 被逮(피체) 1932.08.15. 동아일보 2면
  20. 農民同盟事件(농민동맹사건) 廿一日 公判(입일일 공판) 1932.12.14. 동아일보 2면
  21. 21.0 21.1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22. 密偵殺害(밀정살해)한 農盟員 判决(농맹원 판결) 1933.02.08. 동아일보 3면
  23. 23.0 23.1 23.2 23.3 23.4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북한 김일성의 소련군 시절 자필 문건에 나오는 경력 : 우남위키
  24. 24.0 24.1 24.2 24.3 24.4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발굴] 김일성 보증인 이청산 찾았다 주간조선 2558호 2019.05.20
  25. 김일성 적기훈장 추천서 : 88여단장 주보중이 1945년 8월말 작성한 것.
  26.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4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I-4-5-2-1_22_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 4.大会、会議及決議関係 (1934년 3월 27일) : p.13 汪淸縣委 「反日遊擊隊參謀兼 政治委員 全一善(鮮人, 全一成이라고도 함.)」
  27.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390, pp.415~416.
  28. 間島領事館情報 100-003 (1933-1934) pp.492~494 : 1934년 6월 15일자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서 《관할구역내 조선인의 비적 피해 및 보호에 관한 상황 기타 송부의 건(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의 二. 共匪檢擧狀況 (一○) 明月溝 分署.....共黨遊擊隊員 朱南洙 金日成 兩名...
  29. 공비(共匪) 김일성(金日成) 검거 - 1934년 5월 8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30.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31. 31.0 31.1 31.2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364~399
  32. 32.0 32.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440、密大日記 第8冊 共8冊 昭和11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朝鮮国境守備隊の件(分割5) 朝鮮軍参謀部 国境守備隊月報(九月) - 昭和10年9月~10月(1935/09 - 1935/10) : 歩兵第七十五連隊月報 (1935년 9월) pp.112~113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系統圖 (昭和10年 9月 現在)
  33. 33.0 33.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368500、密大日記 第10冊 昭和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国境守備隊月報一括 朝鮮軍 (1936년 1월 ~ 9월) 步兵 第77聯隊 国境守備隊月報 (1936.01.21 ~ 02.20) pp..441~451 :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所屬幹部 連名簿
  34.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66~168.
  35. 35.0 35.1 35.2 35.3 35.4 35.5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의 인민혁명군 2군 간부 약력
  36. 36.0 36.1 王大腦袋(왕다노대, Wáng dà nǎodai)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항일 혁명 3편) 제7장 1. 보금자리 : 우리가 소왕청에 도착하였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왕윤성과 그밖의 다른 두 사람이였다. 왕윤성을 일명 마영이라고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본명보다도 그를 《왕다노대》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렀다. 《왕다노대》란 머리가 유별나게 크다는 뜻이다.
  37. 원본에는 參謀長 刘春深, 作戰科 朴漢興으로 적혀 있는데, 두 사람의 성과 이름을 혼동하여 뒤섞어 놓았다.
  38. 38.0 38.1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지도 : 지도의 좌측 상단에 경박호(鏡泊湖)가 보이며, 그 남쪽 가에 남호두(南湖頭)가 나와 있다.
  39.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73~182.
  40.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74~175.
  41.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177.
  42. 42.0 42.1 「魏民生關于三, 四團情況給王潤成信 (1935年 2月 21日)」,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p.336
  43. 43.0 43.1 43.2 43.3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44. 44.0 44.1 「魏民生、王德泰 给工委及润成同志的信 - 关于二军的组织编制 及党的组织问题 (一九三六年三月八日)」,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p.483.
  45. 45.0 45.1 동북항일연군#항일연군 1로군의 편성 : 우남위키
  46. 진위 김일성 열전 (40) 6사장 김일성의 부하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13 종합 3면
  47.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60) 중앙일보 1990.11.12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397
  48.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62.
  49.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50.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件名標題:第5 討伐成果 (C13071220200)
  51. 항일연군 인물들의 전사와 귀순 : 우남위키
  52. 비수(匪首) 김일성 부대(金日成部隊)의 임참모장(林參謀長) 수귀순(遂歸順)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5/07 3면 1단
  53. [자료소개]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민족문제연구소 - 2018년 5월 28일 : 항일연군 1로군 조직표에 의하면 귀순한 박득범은 경위려장(警衛旅長), 김재범은 사령부 남만성위원(南滿省委員), 김백산은 경위려(警衛旅) 제2단장이다.
  54. 54.0 54.1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55. 55.0 55.1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56. 56.0 56.1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57. 件名標題 : 野討冬作命第19号 野副討伐隊命令 3月9日 資料作成年月日 昭和16年3月9日 (1941년 3월 9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50338200、野副討伐隊冬作命綴4/5 昭和16年1月6日~16年3月1日(防衛省防衛研究所)」
  58. <다시쓰는한국현대사>38. 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59. 김일성 1942년7월∼45년10월 소련군 특수부대원으로 활동 중앙일보 1992.03.13 종합 1면
  60. 유순호, <김일성 1912~1945> (서울셀렉션, 2020) 상권 pp.262~263.
    해방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61.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62.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63. A. N. Lankov, 《From Stalin to Kim Il Sung :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2002.) p.57
  64. <화제> "金日成 집권 우연한 일" 연합뉴스 1995-08-19
  65.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한국일보 1990.11.03 : 88여단에는 중국인이 많고 만주에 침투,첩보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교육과 훈련은 중국어로 실시됐고 조선인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66. 66.0 66.1 [747]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
  67. [746]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
  68. [750]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
  69. 김일성 대일 해방전 참가 못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 중앙일보 1991. 8. 26 종합5면
  70. [Why]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 조선닷컴 2009/06/19
  71.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pp.18~19 :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도서관
  72. "「蘇軍(소군)대위 金日成(김일성)」元山(원산)까지 수송" 45년 당시 蘇(소)해군중위 니주니코프 證言(증언) 1992.08.30 동아일보 4면
  7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 『朝日新聞』(東京版), 1945년 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06월
  74. 74.0 74.1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8일자 특보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75. 三千萬同胞는 오직 一致團結하야 建國하라, 歸國李承晩博士의 第一聲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10월 19일 1면 1단
  76. 최강미, 《해방기 좌익 신문 『朝鮮人民報』의 항일투사와 김일성 형상: ‘수령형상’의 기원과 형성 탐색을 위한 시론 (1)》, 국방연구 2020년 3월 제63권 제1호, pp. 27-60 : p.49
  77. 명칭 : 민주중보 1945년 10월 23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78.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22] 1945년 11월 23일, 복간
  79. KBS미디어포커스 동아일보 복간과정 왜곡 동아일보 2003-12-23
  80. 김일성 등 반국가자에게 권고문, 재만동포 백오십만의 총의로(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三千里) 제13권 제1호》 (1941년 01월 01일)
  81. 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 8·15에 찾아보는 건국준비위원회 관련 자취들 월간조선 2017년 8월호
  82. 82.0 82.1 최강미 (Choi Gangmi), 해방기 좌익 신문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의 항일투사와 김일성 형상: ‘수령형상’의 기원과 형성 탐색을 위한 시론 (1), 국방연구 제63권 1호 2020년 3월, pp. 27-60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