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가요? →
김일성 관련 표제어 보기
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김일성 관련 원천사료 목록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김일성 진짜론 반박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과 관련된 해방전 또는 해방 직후의 1차 자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고, 대부분 인터넷 상에 원본 이미지가 올라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조작과 날조, 남한 학계의 종북화로 왜곡된 김일성의 정확한 행적과 실체 파악을 위해서는 한국,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소련), 미국 등 각국에 산재해 있는 조작, 가공되기 이전의 각종 1차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굴, 수집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2000년 이후 각국이 옛기록 원문 들을 DB로 구축해 가고 있어 인터넷상에서 검색하여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고, DB화 진척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발굴될 것이다. 아래는 지금까지 알려졌거나 새로 발굴된 북한 김일성과 관련된 해방전 또는 해방 직후의 문헌들을 대체적으로 수집 정리한 목록이다. 원문 자료들을 링크하거나 이미지를 첨부하였다. 저작권 문제가 있을만한 자료는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였다.

이 목록에서 처음 공개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주요한 사안들의 진실도 명백히 드러난다.

링크된 국립중앙도서관(https://www.nl.go.kr/ )이나 국회도서관(https://www.nanet.go.kr/ )의 자료들은 뷰어를 설치하면 원문보기 를 선택해 대부분 온라인으로 원문을 볼 수 있다. 일부 도서는 협약을 맺은 전국 각지의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등의 지정 컴퓨터에서만 원문을 볼 수 있고, 극히 일부는 해당 도서관을 직접 방문해야만 열람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 링크된 도서의 URL이 변경되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때는 해당 도서관 사이트에서 도서 제목으로 검색하여 열람할 수 있다.

김일성 연구의 주안점

북한 김일성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해방 직후 그가 어떻게 하여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는가 이고, 그에 대한 연구의 주안점도 여기에 두어야 한다. 근자에 그가 마치 항일투쟁의 공로로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지도자가 된 것처럼 왜곡 선전되고 있으나, 그가 지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의 간택과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이라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가 가짜라는 말도 소련군이 무명이었던 그를 지도자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일 뿐이다. 그가 무슨 항일투쟁의 공적이 있는지는 그를 지도자로 만든 소련군도 잘 몰랐으며, 그들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소련은 자신들의 뜻을 가장 잘 이행할 지도자로 그들이 5년간 88여단 등에서 교육과 훈련을 시켰으며,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지지세력이 전무하여 전적으로 소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적임자로 보고 선택했다. 김일성은 북한 정권 출범 후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이다"라고 자처할 정도로 그의 충복이 되었다.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국내의 한국인들이 잘 알지도 못했던 그의 만주에서의 경력과 동북항일연군 조선인들의 역사가 엄청나게 부풀려 조작되어 북한의 역사책 「조선전사(朝鮮全史)」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1] 김일성88여단 조선인들은 혈통은 조선인이나 만주에서 성장하고 활동하며 중국에 거의 동화된 사람들로 소련군이 북한 점령 후 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핵심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지세력도 전무한 북한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반이 있는 만주로 갔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의 활동은 그냥 중국 조선족들의 역사로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해방 당시 북한 주민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고,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북한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못되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꼭두각시로 선택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되기는 했지만, 아무런 집권의 정당성이나 당위성도 없었다.

근래에 스탈린이 어떻게 그를 북한 지도자로 선택했는지와, 소련 군정이 그를 실제 지도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증언과 자료들이 많이 나와서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데에 어려움이 없다. 아래에 해방전과 해방 직후 그의 실제활동 및 북한 지도자로 선택되는 과정과 관련된 알려진 주요자료들과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거의 망라하여 누구나 쉽게 원문을 볼 수 있도록 제시하였다.

새로운 자료들에 근거한 주요 쟁점 정리

인터넷 DB구축으로 2000년 이후 새로 발굴된 자료들까지 포함하여 알려진 대다수 자료들을 종합 검토하면 논란이 되어왔던 몇 가지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서던 날부터 가짜 김일성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당시 33세에 불과한 그가 1920년 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한국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반공적인 한국의 과거 정부가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하여 그가 가짜라는 말이 퍼졌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가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니라,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북한 김일성과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퍼졌으며, 그들은 소련군이 데려온 33세의 진지첸(金日成) 대위가 자신들이 어릴 때 일찍부터 이야기를 들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소련군이 왜 그를 내세우는지 알지 못했다. 대중들은 그가 속했던 동북항일연군도 소련군 88여단도 알지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이전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썼는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의 전력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 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이후이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연구를 통해 나중에야 알게된 사안들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그 김일성이 맞고, 보천보 사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주장을 하고 이것이 학계의 정설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안의 본질을 교묘하게 왜곡한 잘못된 주장이며, 그는 여전히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으므로 가짜가 맞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해방 당시 그를 처음 본 다수 대중들의 자발적 반응이며, 그 시절 일에 대한 직접적 체험도 없는 후대의 연구자들이 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던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들을 근거로 그가 가짜가 아닌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역사왜곡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 종래의 김일성 가짜론이 밀려나고 진짜론이 대세로 자리잡은 것은 서대숙, 와다 하루키 및 일단의 한국 신진학자들이 실상을 교묘하게 왜곡한 잘못된 주장들을 내놓으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김일성에게 가짜 멍에를 벗겨주고,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며 욕은 이승만, 박정희 등 한국 대통령들과 이명영(李命英, 1928~2000) 등의 가짜 김일성 연구자들이 대신 먹는 오늘날의 기막힌 상황을 만들어 낸 책임자들이다.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한국의 새로운 세대들이 이들의 주장에 쉽게 속아넘어가 김일성 진짜론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이와 다른 주장은 내놓기도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 참고 : 김일성 진짜론 반박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을 겪은 당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널리 통용되던 상식이 한 세대 이상 지난 후대에 와서 정반대로 뒤집혀 있으니, 뒤집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이면에 불순한 목적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반드시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 미군정 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두고 엉뚱하게 이승만박정희 등 한국 대통령들과 이명영 등 가짜 김일성 연구자들을 탓하며 비방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해방 직후 평양에 나타난 "자칭 김일성 장군" 김성주가 잘 알려진 인물인지,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유명한 이름을 사칭하는 것인지는 당시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당시 일을 직접 알지도 못하는 후대의 연구자들이 김성주가 잘 알려진 김일성 장군이 맞는데 당시 사람들이 가짜로 잘못 알았다고 우기는 것은 넌센스이다.


  2. 가장 논란이 되었던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도 너무 많이 나와 더 이상 논란할 여지도 없게 된다. 그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隣面) 출신으로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하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주장은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 1974년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서 처음 제기한 것으로, 해방 직후부터 나온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과는 무관하다. 보천보 사건은 유사한 동흥사건이나 토성습격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내 잊혀졌고, 해방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잘 알지도 못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고 보아 가짜라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은 오보이며, 그가 북한 김일성이 맞으므로 가짜 아닌 진짜라는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반공적인 과거 한국정부가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하여 그가 가짜라는 말이 퍼진 것처럼 대중을 기만한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 학계 대다수가 엉터리 논리로 김일성 미화와 한국 정부 폄하에 열중해온 증거로 보인다.

  3. 그 후에 나오는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이명영의 주장과 달리 북한 김일성이 맞으며, 그는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다. 일본 기록에 나오는 노조에(野副) 토벌대가 토벌에 실패하고 놓친 동북항일연군 1로군 최고위 인물은 소련으로 도주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고,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 중국과 소련 기록에 나오는 1로군 최고위 생존자는 북한 김일성으로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다.

  4. 소련으로 도주한 김일성은 이후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대위 계급의 1대대 대대장이었으나 비밀 NKVD(KGB전신) 요원이 되어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련군 상관들에게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했다. 이 일로 그는 소련군 상관들의 신임을 얻었고, 그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해방 직후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다. 이후 북한의 소련군정은 자신들의 꼭두각시 김일성을 일찍부터 전면에 내세워 지도자 훈련을 시키며,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그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만들어주는 기간이었다.

부친 김형직과 친가 및 외가 관련 자료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증조부 김응우(金膺禹)가 주도한 것으로 조작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 1845~1878)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李平澤)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2]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3],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날조한 것으로, 백봉(白峰)이 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1968년)에 처음 나온다.[4][5] 김일성은 증조부 때부터 미국과 맞서 싸웠다고 강조하기 위해 이런 날조를 한 것으로 보이나, 해방 후 김일성이 귀국할 때 탄 소련 배 푸가초프호조차 미국이 건조하여 소련에 인도해준 배이다.

조부모 김보현(金輔鉉)과 이보익(李寶益)

김일성의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이보익(李寶益, 1876~1959)은 평범한 농부였다. 이들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탈옥한 김구가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의 승려가 되어 1899년경 평양 서편 교외의 대보산(大寶山) 영천사(靈泉寺)에 방주(房主)로 있을 때 신도로서 절에 출입하며 시주도 하곤 했다고 한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평양을 방문한 김구가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을 다시 찾았고, 만경대를 방문하여 김일성의 조부와도 만났는데, 전에 영천암에서 김구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 했다 한다.

부친 김형직 관련 자료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 (1918년 02월 18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7]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平安南道警務部長報告要旨)
    今回在外不平鮮人ト通謀シ國權恢復ヲ企劃セル「朝鮮國民會」ナル秘密結社ヲ發見シ關係者ヲ檢擧シ刑事訴追ニ附シタリ其ノ顚末左ノ如シ
    一. 會員氏名
    本籍 平安南道平壤府黃金町 / 住所 同 櫻町 / 會長 張日煥 當三十二年
    本籍平安北道義州郡枇峴面院洞 / 住所支那安東縣大和橋通 / 外國通信係 白世彬 當二十五年
    本籍忠淸北道淸州郡四州內面金川里 / 耶蘇崇実中學校生徒 / 通信員裵書記 裵敏洙 當二十二年

    本籍 平安南道大同郡古平面南里 / 住所 平安南道江東郡古邑面東三里[12] / 書堂敎師 金亨稷 當三十四年
  1. 북한은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25」[7]에 실린 위 자료를 변조하여 장일환, 백세빈, 배민수를 삭제하고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조직을 주도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아래 기사에 會員氏名에 김형직만 부각시킨 조작한 문건 사진이 나온다.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조선국민회와 김형직의 진실 RFA 2023.08.09
    김일성 회고록에도 같은 문건의 조작 사진이 나온다.[13]
  2. 당시 김형직이 강동군에 거주했던 관계로 후일 강동군 봉화리에 봉화혁명사적지가 조성되고[14] 김형직의 동상과[15] 조선국민회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4년 평양시 강동군에 봉화리 혁명박물관을 새로 개관했다.[16]
  • 1920년 3월에 손위 처남이자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단원인 강진석(康晋錫)이 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에 거주하는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17][18][19] 기록에는 없지만 김형직도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단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다.[20][21][22]
  • 1925년 5월 5일자 김형직의 신상 및 재산 기록 :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거주시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 p.24
第三 移住朝鮮人中 有力者 調査表 : 일본 외무성(日本 外務省)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기록
주소(住所) : 팔도구(八道溝)
직업(職業) : 의자(醫者)
이름 연령(氏名 年齡) : 김형직(金亨稷, 當三十三年)
친배일별(親排日別) : 배일(排日)
자산(資産) : 1,000엔(円)
적요(摘要) : 『平南 平壤 出身, 漢學의 素養이 있다. 大正 8년(1919년) 3월, 朝鮮獨立 騷擾事件의 주모자였다가 官憲의 체포가 두려워서 同年 5월, 對岸으로 도주하고 당시 不逞輩(불령배)의 牛耳를 잡고 있었으나, 改悛後 醫事에 종사함. 』
牛耳 : 우두머리 또는 수령.
―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 있어서의 在住鮮人戶口 其他의 調査 』 , 大正 14년 4월, 朝鮮軍司令部 調査)
김형직이 1919년 3월 조선독립운동의 주모자였다가 체포를 피해 5월에 대안(對岸)으로 도주했다고 하였다. 이는 김형직이 평안북도 중강진(中江鎭)[23]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를 피해 1919년 5월 압록강 맞은 편 만주 임강현(臨江縣, 帽兒山)으로 이주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4] 중강군(中江郡) 중강읍에 김형직을 기리는 '중강혁명사적관'(1977년), '김형직동상'(1968년) 등이 건립되어 있다.[25] 당시 김형직의 재산 1000엔(円)은 상당한 거액이라고 한다.
  • 김형직은 1925년 3월에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주하여 무림의원을 차렸다고 하며, 그곳에서 1926년 6월 사망했다. 무송현 거주 사실은 당시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 김일성 회고록에 김형직이 만주에서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걸어두고 무면허 의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 김형직은 무면허 의사를 하면서 아편(阿片, opium) 밀매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는 증언이 많다.
  • 김형직은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고 막내 아들 김영주가 증언했다.[26]
  • 만주 시절 김형직의 친구였던 이도일(李道日)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싫어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병원에 찾아오면 치료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아래 "후일 증언 또는 기록" 참고.
  • 1924~5년 무렵 장백현 8도구에 있었던 대한독립 광정단(大韓獨立光正団)[27] 제4서(第四署)의 총무 김형식(金亨植) 또는 김형주(金亨柱)가 김형직(金亨稷)일 가능성이 제기된다.[22]
아래 각 기록에 총무로 나오는 김형식(金亨植), 김향주(金享柱), 김형주(金亨柱) 등이 김형직(金亨稷)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출신지와 거주지는 같으나 연령이 다르고, 이름 글자가 차이가 난다. 광정단(光正團)은 정의부(正義府)에 흡수되는데, 김형직도 정의부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 臨時報 第71號(大韓獨立光正團 및 長白縣光復支團 組織表) : 1924년 02월 15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독립 광정단(大韓獨立光正団) 및 장백현 광복지단(長白縣 光復支団)조직표 : 1924년 2월 15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p.11에 대한독립 광정단(大韓獨立光正団) 제4서(第四署) 조직원 명단이 나온다.

    大韓獨立光正団 第四署
    (所在 八道溝 佳財水里)

    役名 氏名 年齡 原籍 住所
    署長 朴萬碩(박만석) 四一 咸興郡 八道溝
    總務 金亨植(김형식) 四二 平南道
    財務 金德萬(김덕만) 三八 北靑郡
    書記 金允七(김윤칠)    
    팔도구(八道溝) 지방의 광정단(匡正團) 제4서(第四署) 총무(總務)로 나오는 김형식(金亨植)은 김형직(金亨稷)과 이름이 유사하나 나이가 10년 이상 차이남.
  2. 『준동(蠢動)을 계속하고 있는 재외불령단(在外不逞團)과 책원지(策源地)』 《요동신보(遼東新報)》 1925년 3월 21일 ~ 4월 11일 연재기사 4번째[22]
    大韓獨立光正團 第四署 署長 朴萬碩, 總務 金亨植, 財務 金相萬, 書記 金德七
  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1 > 南北滿洲一帶에 있어서 不逞鮮人團 調査의 件 : 1925년 04월 15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p.19에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 제4서(第四署) 총무(總務) 김향주(金享柱)가 나온다. 출신 평남(平南), 연령 43세
    大韓獨立光正團 第四署 署長 孫鳳赫, 總務 金享柱, 書記 李奉奎, 財務 金仁洙 : 요동신보 기사와 인명이 상당히 다름.
  4. 대한정의부(大韓正義府) 간부 명단 및 조직상황 : 자료번호 3-005399-00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p.5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 제4서(第四署) 총무(總務) 김형주(金亨柱), 書記 李奉奎, 財務 金仁洙
    김형주(金亨柱) : 출신 평남(平南), 연령 당 43세, 소재지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가재수리(佳財水里)
    이 자료의 연대는 적혀있지 않으나 김형주(金亨柱)의 나이가 앞의 기록과 같으므로 같은 해인 1925년 작성으로 보임.
  5. 길림성 당안관(吉林省 檔案館) 자료 : 大韓光復團件 (자료번호 3-005692-00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p.23 在滿不逞鮮人團体一覽表 : 大正十四年(1925년) 九月末 現在 平安北道警察部
    p.55 大韓獨立光正團 第四署 署長 鄭鳳赫, 總務 金享柱, 書記 李奉奎, 財務 金仁洙

모친 강반석 관련 자료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康盤石, 1892~1932)강돈욱(康敦煜, 1871~1943)과 위돈신(魏敦信,1870년~?) 사이의 딸이며, 강진석(康晋錫, 1890~?)은 오빠이다. 강반석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외부활동이 별로 없었던 탓에 그녀에 대한 당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녀의 이름 한자도 盤石이 아니라 盤錫일 가능성이 있다.(錫은 康씨 집안 煜자 항렬 자녀들의 항렬 글자이며, 강반석의 남자형제들도 모두 錫자 항렬을 따르고 있다. 당시에 여자들도 같이 형제들의 항렬을 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盤石은 기독교에서 베드로를 가리키는 번역어라고 하는데, 베드로는 남자이므로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서구에서도 Peter를 여자 이름으로 쓰지는 않는다.)

미국인 선교사 Nelson Bell(1894~1973)이 그녀의 이름을 강신희에서 강반석으로 바꾸어 주었고, 김형직과의 결혼도 중매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설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불분명하나[28] 연변 조선족 출신 재미 작가 유순호가 자신의 책에 이런 주장을 수록하여 많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29][30] 그러나 이런 말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며, Bell은 평양 아닌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중국으로 처음 온 해도 1916년으로 김일성이 태어난 이후이다. 1930년대에 Bell은 딸들을 평양의 외국인 학교에 보냈는데, 그 중 둘째 딸이 나중에 Billy Graham목사의 부인이 된 Ruth Graham(1920~2007)이다. Billy Graham 목사가 평양도 방문하고, 김일성을 만난 것도 부인이 1930년대 초 평양에서 학교를 다녔던 연고 때문이며, 장인 Nelson Bell은 김일성 집안과 어떤 연고도 없다. Ruth Graham은 병 때문에 남편의 평양 방문에 동행하지 못하고, 김일성 사후에 자녀들과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강돈욱과 친분이 있던 미국인 선교사는 Nelson Bell(1894~1973)이 아닌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 1864~1939)이며, 그는 김성주도 다닌 적이 있는 창덕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31] 이사로도 재직했다. 1918-1928 기간에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32] 그러나 그가 김일성 부모의 결혼을 중매했다는 말도 없다.

강반석은 1926년 남편 김형직이 사망한 후 재혼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있어왔는데, 재혼 자체는 사실로 보이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고,[30] 기록으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북한에서는 강반석의 재혼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는 그녀의 대단한 활동들은 거의 모두 조작으로 보이며,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외조부 강돈욱 관련 자료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은 1927년 4월 동아일보사 낙성기념사업에서 교육분야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교원 : 대동 용산면 창덕학교 강돈욱 (康敦煜, 58세) 근무연한 16년
강돈욱의 약력이 나옴.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에 강돈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2건이 나온다.

비료 매매 면허 제403호를 취득한 사람으로 대동군 용산면 대타령리 742(大同郡 龍山面 大駞嶺里 七四二)[33][34] 강돈욱(康敦煜)이 나옴.
창덕학교 이사에 강돈욱.
財團法人紀白彰德學校(變更) 昭和拾貳年八月四日 理事馬布三悅[35][36]ハ辭任シ理事長趙翊俊, 理事康紀秀, 康紀櫶, 李龍化, 李龜化, 洪聖濬, 康敦煜, 趙禹俊ハ同日重任シタリ
右昭和拾貳年八月拾九日登記
平壤地方法院
조선총독부 관보 제4126호 : 昭和15年(1940년) 10月 23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財團法人紀白彰德學校 이사 康敬煜 李鳳喆 해임, 이사 趙翊俊 康紀穩 洪聖濬 康紀秀 李龍化 李龜化 趙禹俊 중임, 姜永學 吳政杓 이사 취임.
  • 창덕학교는 1909년 설립되었으며 대동군 용산면 대타령리(龍山面 大駞嶺里) 소재라는 기사도 있으나[31] 용산면 하리(下里)에 소재했음.[37][38]
설립자는 백선행(白善行, 1848~1933),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35][36], 강기수(康紀秀).
  1. 私立彰德校(사립창덕교) 財團法人申請(재단법인신청) 1931.05.23 동아일보 3면
  2. 紀白彰德校(기백창덕교) 校舍(교사)를 新築(신축) 1934.11.08 동아일보 5면
    기백(紀白)은 설립자 강기수(康紀秀)와 백선행(白善行)의 이름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강기수(康紀秀)는 강돈욱의 친척인 듯하다.
  3. 大同郡下에 二大私校幸運: 紀白彰德學校서 四萬餘圓財團完成 朝鮮中央日報(여운형) 1934.11.19 4면 4단
    창덕학교 교사(校舍)와 학생들 사진이 나옴.
  4. 紀白彰德校(기백창덕교) 普校(보교)로 昇格認可(승격인가) 1935.04.26 동아일보 7면
평양 대타령리에 대타령교회(1912년 설립)가 있었다. 담임목사는 백종세, 이신화 목사가 시무하였고 장로는 주도항, 강신욱, 최병선, 변경환, 강세범 등이 있었다. 대타령교회는 현재 보통강구역 붉은거리 2동이다.

하리교회(1899년 2월 15일 설립)는 대동군 용산면 하리191번지에 세워졌고, 지금은 평양 특별시 만경대구역 칠골동이다. 판동교회에서 분립되었다. 하리교회를 칠골교회라고 한다. 하리교회는 창덕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영인 전도인이 최초 목회하였고, 그 이후 김종섭(길선주 목사 친구), 정기창, 김경삼, 김창문, 이재풍, 심익현 목사가 목회 하였다. 장로는 홍성준, 강돈욱(김일성 외조부, 강반석의 부친), 최동석, 최익준, 강기수, 강관옥, 이구화 등이 시무했다.

외가 친척들

북한 김일성 정권 당시 요직을 맡았던 강양욱(康良煜, 1903~1983)은 강돈욱의 6촌 동생(2nd cousin)이며, 김일성에게는 외3종조부(外三從祖父, 8촌)가 된다. 김일성이 잠간 창덕학교를 다닐 때 선생이었다고 한다. 탈북자 강명도씨는 강양욱의 형 강선욱의 손자라고 한다. 강돈욱의 장남 강진석(康晋錫, 1890~?)은 김일성의 외삼촌이며 강반석의 오빠로,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가 해방전에 옥사했다.

삼촌 김형권 관련 자료

국민부원(國民府員)이었던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국내로 잠입하여 함경남도 풍산에서 일본 경찰을 쏘아 죽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다 옥사한다. 사건 당시 신문 기사는 많이 있다.

보훈처가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과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39]

출생과 유년기

  •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龍山面 下里) 칠골의 외가에서 출생.
오늘날 북한에서는 그가 만경대 본가에서 출생한 것처럼 말하나, 1962년 그의 50회 생일 때 평양방송에서도 칠골 외가에서 출생했다고 하였다.[40]
여자들이 힘든 출산을 할 때는 시가보다는 친가를 더 선호하므로 김성주가 본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병원에서 출산한다는 개념은 없던 시대였다.
그의 출생지는 출생 당시는 평양부(平壤府) 소속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양 외곽 지역을 분리해 신설된 대동군(大同郡)에 속하게 된다.

김일성의 친가나 외가가 있던 평양 외곽 지역은 조선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행정구역 개편이 잦아서 정확한 주소도 애매한 점이 있다. 정확한 주소는 아래와 같다.

구분 1912년 출생 당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후
친가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古順和面)[41] 남동(南洞) 만경대(萬景臺)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42] 남리(南里) 만경대
외가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龍山面)[43] 하동(下洞) 칠골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

만경대나 칠골은 마을의 이름이며 리(里)는 통상적으로 여러 개의 마을로 구성된다. 일제시대의 김일성 및 친외가 사람들 관련 기록에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후의 주소가 나온다.

어린 김성주가 3.1운동에 참가했나?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1919년 3월 1일 평양 시내의 시위에 참가했다고 주장하지만, 1967년부터 출판된 「김일성원수님의 어린시절」에는 김형직이 1918년에 국경지대인 중강진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고 어린 그도 부친을 따라 갔다고 나오므로 3.1운동 당시 그는 평양에 있지도 않았다.[44][45]

이처럼 김성주의 3.1운동 참가에 대한 북한의 주장 자체도 일정하지 않다.[46]

3.1운동이 일어나기 열흘 전 창덕학교 교사로 부임했던 현응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7살의 김성주는 부친이 있는 중강진이 아닌 칠골 외가에 있었다.

옛 「김일성장군」의 實在와 또 以北의 金聖柱가 어릴 때부터 옛 「김일성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는 것을 證言해 주는 사람으로 玄應洙(1892년생. 市內 금호동 거주)씨가 있다. 玄씨는 “1919년 2월 15일에 平南 大同郡 龍山面 下里 七谷에 있는 彰德學校에 敎員으로 부임했다. 當時 校長은 金聖柱의 外祖父인 康敦煜長老였으며 金聖柱는 아직 學校에도 가기 前이었는데 그 때는 外家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以北의 金聖柱傳에도 그때 外家에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걸음 걸이를 제대로 따라 가기도 힘든 어린애를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시위현장에 데리고 간다는 건 말이 안된다. 김일성은 "조선독립만세"가 무슨 말인지 알기도 힘든 때이고, 외가 어른들이 설사 시위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철모르는 어린애를 시위에 데려갈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증언을 한 현응수(玄應洙, 1892년생)씨는 1916년 평안남도 교원시험 합격자이다.

만경대, 김일성 관련 선전 중 심각한 오류

만경대 김일성생가 강사의 김일성에 대한 선전을 기사화한 노동신문 4월3일자 내용에서 아주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3·1운동’ 과 김일성과의 연계이다. 기사를 보면 강사는 다음과 같이 선전하는 것 같다. “만경대시절에 체험하신 3.1인민봉기도 우리 수령님의 혁명의식발전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어리신 나이에 어른들과 함께 시위대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시며 만경대에서 보통문 앞에까지 가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이 선전의 핵심은 바로 만경대에서의 3.1운동 경험이 김일성의 혁명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3·1운동시기 김일성은 8살이었는데 ‘김일성원수님의 어린시절’, 책을 보면 그 무렵 김일성은 만경대에 있지 않고 부친인 김형직과 함께 국경지대인 중강진에 있었다. 그 책 ‘밝은 앞날을 내다보시며’ 차례에서 김형직이 1916년 만경대를 떠나 봉화리[47]에 자리를 옮겼고, ‘조국을 멀리 떠나서’ 차례에는 김형직이 1918년에 국경지대인 중강진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고 나온다. 이때 김일성도 함께 고향을 떠나 김형직을 도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이 만경대에 다시 돌아온 것은 그가 12살 때였다. 바로 북한이 ‘김일성어린시절 따라배우기’ 중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배움의 천리길’이 바로 이 시기이다. 따라서 3.1운동과 김일성의 만경대어린시절을 연동시키는 것은 날조(捏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3.1운동을 통한 김일성의 혁명의식 고양(高揚)도 가짜가 되는 것이다.

소학교 시기

김형직은 1919년 3.1운동 당시에 평안북도 중강진에 있었고, 5월에 검거를 피해 압록강 대안(對岸) 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으로 이주했다. 위에서 본대로 1920년 봄에 김형직이 중강진 대안 임강현 모아산에 거주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金亨稷이 臨江에 1년 반이나 거주하고 있었더라면 就學 適齡期인 金日成이 就學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傳記는 이 문제에 대해 의외로 석연치 않다.
『1920년 봄,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서는 강안촌에 있는 림강소학교에 입학하였다.』 (《不滅》, 164面)

여기에 인용한 《불멸의 자욱을 따라》라는 책은 金日成의 「戰跡地」나 「史跡」을 詳述한 참고자료의 하나로, 1978년에 朝鮮勞動黨出版社에서 간행되었다. 金日成이 臨江小學校에 입학하였다는 말은 이러한 참고자료 이외에는 그렇게 없는 것이다.

............

(1) 臨江小學校를 당시의 호칭대로 하면 帽兒山小學校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金日成이 帽兒山縣立小學校에 들어갔다고 결론짓는 것은 아직 이르다. 그가 小學校에 입학하였다면 참고자료가 아니라 正式傳記에 당당하게 적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의 《朝鮮民族解放鬪争史》에서 그가 「帽兒山의 小學校」에 들어갔다고 기술되고, 또 《불멸의 자욱을 따라》에서 中國小學校에 입학 한 것으로 씌어져 있는 이외에는 수많은 傳記가 帽兒山에서 공부한 金日成을 묵살하고 있다.


김형직은 1921년 여름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로 이주했다.[48][49]

『1921년 여름...팔도구에 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일가는 압록강이 팔도구하(강 이름)와 합치는 마을의 맨끝에 있는 초가집을 수리 하시고 드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21년 여름 팔도구소학교 2학년에 편입하시여 공부하시였다.』(《不滅 1》, 149面)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김일성 관련 최초 기록이나, 열람이 금지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

  • 외가가 있던 칠골의 창덕학교(彰德學校) 재학
1923년 봄부터 칠골 외가에 와서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 1925년 1월 다시 만주로 감.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32, p.94
일제시대 기록 :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1944년 11월 18일)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은 창덕학교 교장, 이사 등으로 있었고, 외삼종조 강양욱(康良煜, 1903~1983)은 김일성을 가르친 교사였음.

북한에서는 만주 8도구에서 칠골까지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50]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51][52]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지어낸 것으로[53],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평양민보(平壤民報)에 1945년 10월 19일부터 연재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에 처음 나온다.[54][55]

최덕신의 부친 최동오(崔東旿, 1892 ~ 1963)가 제자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간다고 보도한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기사[56]

무송소학교(撫松小學校)

김일성은 1925년 봄 칠골 외가를 떠나 장백현으로 돌아왔다가 부친이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주하면서 무송소학교(撫松小學校)를 다니게 된다. 여기서 1926년 봄 소학교 과정을 마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57]

화성의숙(華成義塾)

김일성은 1926년 봄 정의부(正義府)에서 세운 만주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58][59]을 3개월여 다녔다. 당시 숙장(塾長)은 최덕신(崔德新, 1914 ~ 1989)의 부친 최동오(崔東旿, 1892~1963)였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자신이 화성의숙을 다닌 때가 1926년 가을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교육을 해서 중도에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26년 봄에 3개월 가량 다니다 6월에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06.05)이 사망하는 바람에 그만 둔 것이다.

최동오는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제자인 김일성을 만난다며 평양에 갔다 돌아왔으나, 6.25 때 월북했다. 최덕신은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부친이 납북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한다.[60]

화성의숙을 다닐 때 동급생들은 대부분 김일성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종락(李鍾洛, 1907~1940)이나 박차석(朴且石, 1909 ~ ?)도 화성의숙을 다녔다고 하므로 이들과도 이때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평단중학(平旦中學), 육문중학(毓文中學) 및 남만학원(南滿學園)

위의 학교들 외에도 김일성은 이종락(李鍾洛, 1907~1940)의 주선으로 평단중학(平旦中學)을 다녔다는 증언이 있다.[61]

그후 부친 지인들의 도움으로 육문중학(毓文中學)에 입학했으나 1929년 중퇴한 것이 김일성의 최종학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후 이종락(李鍾洛, 1907~1940)의 주선으로 정의부(국민부)에서 세운 간부양성기관 남만학원(南滿學園)을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62]

북한에서는 육문중학(毓文中學) 외의 평단중학(平旦中學)과 남만학원(南滿學園) 재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 김일성의 육문중학(毓文中學) 시절 스승 상월(尚钺, 尙鉞, 1902~1982)의 회상록
김일성주석재길림육문중학(金日成主席在吉林毓文中学)》 : 1984년 6월 《纵横 (縱橫)》 지와 《新華文摘 (新华文摘)》 지에 실림.

김일성과 손정도 목사 및 자녀들의 관계

김일성 회고록에 손정도(孫貞道, 1881~1931) 목사가 김형직의 친구로 청소년기의 김일성에게 많은 지원을 해 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의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다.[63] 김일성 회고록에는 손정도 목사 외에도 오동진(吳東振, 1889~1944)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자신의 집안이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쓴 경우가 많은데 자기 과시를 위한 조작과 과장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자신이나 집안과 별 인연이 없는 안창호(安昌浩, 1878~1938) 등에 대해서는 심하게 모독하고 있다.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孫元一, 1909~1980)은 한국의 초대 해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64] 차남 손원태(孫元泰, 1914~2004)는 어린 시절 김일성의 절친한 친구로,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는데 만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각별하게 지낸 듯 하다.[65] 세 딸들 중 막내 손인실(孫仁實, 1917-1999)은 아주 어릴 때 오빠를 따라 김성주와 더러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66] 손정도 목사와 장남 손원일의 묘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차남 손원태의 묘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다.

손원일(孫元一), "나의 이력서⒀" 내가 다닌 중학에 김성주(金聖柱)도 籍 둬 : 1976년 10월 16일자 한국일보 4면
손원일은 김일성 보다 연상으로 김일성보다 먼저 길림의 육문(毓文)중학교를 1년 가량 다녔다. 어린 시절 김일성과 직접 어울린 일은 별로 없고, 동생들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정도인 것같다.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가 각별히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준 것처럼 주장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장남이 그런 일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1972.01.20 동아일보 4면
    ▲손인실(孫仁實)씨(五四(오사)·이대부총장(梨大副總長) 문병기(文炳基) 박사 부인)
    임정(臨政)에 관계하시던 아버님(손정도(孫貞道)목사,·상해임정임시의정원의장(上海臨政臨時議政院議長))이 만주(滿州) 길림(吉林)에 한인학교(韓人學校)와 교회(教會)를 세우고 우리 가족들이 거기에 살 때였읍니다. 열살도 못됐던 나는 무슨 소년단인가 하는 대원들을 따라서 길림(吉林) 북산(山)에 올라 병정놀이나 숨바꼭질등 게임을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記憶)에 남아있읍니다. 그때 이 소년단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읍니다. 열두살 되던 1928(一九二八)년경 길림(吉林)을 떠났기 때문에 그후 이 소년단의 일은 차차 잊혀졌는데 해방 후 만포진의 병원을 팔고 평양(平壤)에 와서 얼마 안된 때입니다. 아마 45(四五)년 10(十)월 하순쯤 일까요. 아이를 업고 평양(平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무슨 공산당(共産黨) 사무실인가 어디에 김일성(金日成)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보았읍니다. 그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가 진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개명(改名)을 해서 들어왔으며 만주(滿州) 길림(吉林)에서도 산 일이 있다는 걸 들어왔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옛날 길림(吉林)의 「그 소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들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어렸을적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듯 했으나, 그때도 살이 약간 찌기 시작해서 호리호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확실한 판단이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 보았던 김성주(金成柱)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증언에서 해방 직후 손인실이 북한에서 살 때에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가짜라는 말은 남한에서 지어낸 것이 아닌 것이다.
  • 손인실의 1993년 10월 2일 <토요신문> 인터뷰[67]
손정도의 딸 손인실은 1993년 10월 2일 <토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손정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것에 대해 "김일성 자신이 만주에서 활동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일제 하 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아버지를 내세운 것으로 추측된다."며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손정도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이 손정도와 친밀하게 지냈다는 것 역시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김일성이 자신과 오빠 손원태를 들먹이면서 친동생으로 보살펴줬다고 밝힌 것에 대해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단지 그때 어린 소녀, 소년들은 우르르 몰려 다니면서 전쟁놀이를 즐겼는데, 무리 중에서 가끔 얼굴을 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을 과장, 선전하려고 아버지를 이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 (출처 : 나무위키 손정도)
손원태는 만년에 평양을 방문해 60여년만에 김일성을 다시 만났고, 이후 그에 대한 찬양을 하고 다녔으며, 그를 찬양하며 김일성 가짜론을 반박하는 책도 내었다.
두집안 신분차이로 거리감있어 / 「金日成(김일성) 옥바라지」 가족들도 否認(부인)

김성주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들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2021)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 형제는 어릴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그 외에도 김성주가 소시적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다른 증언들이 다수 있다.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도 나오듯이 해방 직후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은 김형직이 아들들에게 가르쳤다는 그 김일성 장군인데, 해방 후 평양에 온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 즉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자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만주 시절 청소년기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회원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의 오기임.
이 조직이 적발되면서 김성주는 육문중학을 퇴학 당하고, 국민부(國民府)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찾아가 그 부하가 된다.[68]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성주(金成柱)가 선출됨.
1930년 6월 27일에 창립된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 제3분대장 김성주(金成周)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임.
체포된 이종락 : 동아일보 1931년 2월 3일 2면
  • 1931년 2월 12일 (음력 1930년 12월 25일)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 : 아래 참고.
이종락(李鍾洛) 등이 1931년 1월 28일 구속되자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는 와해된다. 3월말경 고할신(高豁信)도 체포되고, 잔존 세력이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했다는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1931년 3월 세화군(世火軍)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으로 김성주(金成柱)가 나온다.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

정모(鄭某)씨를 살해한 이 사건은 김일성이 1930년말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가서 머물던 시기에 일어났다.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는 오늘날 公主岭市 八屋镇 五家子村이며, 회덕현(懷德縣)은 公主岭市 怀德镇으로 축소되었다.[70]

당시 김일성은 최형우가 근무하던 삼성학교(三成學校)를 세운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과 한 방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선일이 1970년대 초 이명영(李命英, 1928~2000)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주범은 김일성이다.[71][72][73]

이선일이 공범이라고 증언한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천학진(千學振) 등 3명이 1932년 8월 8일 장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이 당시 여러 신문에 보도된 것이 근래 밝혀졌다[74][75][76][77][78][79][80]. 이에 의하면 사건은 음력 1930년 12월 25일 (양력 1931년 2월 12일)에 일어났으며, 피살자는 정원일(鄭元一)이고, 교살 당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들의 내용은 이선일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나 다만 신문 기사에는 김일성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달아난 공범으로 홍종환(洪鍾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선일이 증언할 당시는 이 사건은 현지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인데다, 증언내용이 당시 신문 기사와 거의 일치하므로 김일성이 주범이라는 그의 증언도 사실일 것이다. 극히 최근에 조선일보 DB가 공개되어 검색해본 결과 김일성이 이들에게 농민동맹 가입을 권유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과 살인죄(殺人罪)로 구형(求刑) 신의주 법원(新義州 法院)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의 삼명판결(三名判决) 조선일보 1933.02.08 석간2면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는 김일성 아닌 이종락이 조직

김일성이 1926년 화성의숙을 다닐 때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한 것이 아니라 육문중학 중퇴 후 이종락의 부하로 있을 때 이통현(伊通縣) 등지에서 타도제국주의 선전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될 자료도 있다.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참살 관련 기록

김일성 일당이 1932년 2월 만주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10명을 참살한 사건.

만주 오가자(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하기 시작

김성주는 어릴 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 탓인지 1930년말 ~ 1931년 초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신이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명이었던 시절에야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든 말든 별 문제될 것이 없었다.]

  • 1930년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 김일성을 알았던 최형우(崔衡宇)가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서울에서 펴낸 책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도 그가 김일성 이름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동지(同志)들은 그의 장래(將來)를 기대(期待)하는 마음으로 「一星」이라는 아호(雅號)의 선물을 주었다.

조선사회(朝鮮社會)의 효성(曉星)이 되여달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金은 「一星」 또는 「日成」으로 행명(行名)하였다.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p.31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어느날 삼성학교선생 최형우(崔衡宇, 당시33∼34세·정주사람)가 김성주에게 『만주에서는 중국사람식으로 당호(별호)란 게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당호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성주는 좋은 당호 하나를 지어 달라고 최형우에게 부탁했다.

최형우는 당호 몇개를 지어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김성주는 여러 개의 당호 가운데서 「일성(一星)」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최형우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하며 「일성(一星)」이란 당호를 써주었다.
위는 당시 오가자에서 김성주와 한 방에서 살았던 이선일씨(62세·서울영등포거주)의 1974년 증언이다.
  • 위에서 본 1931년 3월 및 5월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이종락부하 김일성 체포"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金一成」으로 나온다.

후일 증언 또는 기록

  •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7 (p.589) :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p.7 (p.589)에 김일성의 육문중학 시기및 1932년 여름까지의 일에 대한 증언이 나옴.
    [원문 텍스트] :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김학규의 백파 자서전 기록
  •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전 성균관대 교수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기록에 나오지 않는 유격대 투신 이전 북한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평양 또는 만주에서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처음으로 밝혔다.
  • 김형직(金亨稷)의 친구 이도일(李道日)의 증언
    이도일(李道日)은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이었던 이도선(李道善)의 형으로, 동생이 체포해온 김영주가 친구 김형직의 아들인 것을 알고 한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돌봐주었다.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한때 金日成(김일성)과 한마을에서 살았던 李道日(이도일)씨(七八(칠팔) · 釜山市(부산시) 대청洞(동) 四街八六(사가팔육))의 증언.
    지금부터 三十(삼십)여년전 내가 滿州(만주) 안도縣(현)에 살때 그때 金成柱(김성주)라고 불렀던 청년과 같은 부락에 산 일이 있었읍니다. 金成柱(김성주)는 그 아버지되는 金亨稷(김형직)이 共産黨(공산당) 측으로부터 암살을 당한 후 안도縣(현)으로 들어와 재산이 있었던 有志(유지)를 양아버지로 삼고 정착했읍니다. 그런데 얼마후 金成柱(김성주)는 조직을 만들어 재산이 있는 노인들을 잡아다 죽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죽일까도 마음 먹었지만 그 아버지인 亨稷(형직)이와 나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金成柱(김성주)가 양아버지 창고에서 무기 몇 자루를 훔쳐가지고 나가 안도縣(현)과 통화縣(현) 사이에 있던 日本軍(일본군) 진지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바람에 그 세력이 약간 커졌지요. 그후 滿州軍(만주군) 중좌로 있던 내 동생 李道先(이도선)을 金成柱(김성주)가 죽였기 때문에 원수를 갚기 위해 만주군 당국에 銃(총)을 달라고 청했더니, 내가 獨立軍(독립군)한 일이 있다고 무기를 주지 않다가 나중에 三十(삼십) 자루를 주었어요. 그때 關東軍(관동군)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는데 나도 그 작전에 참가해서 공비들을 제거했지요. 이리하여 金成柱(김성주) 일당과 그 부하들이 모두 섬멸되고 金(김)등 일곱 사람만이 살아서 연해주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이명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96~97] 第二章 金聖柱의 少年時節 / 第一節 家系와 生活環境

    當時 撫松에 살았던 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亨稷이랑 같이 獨立運動團體인 白山武士團에 關係했었다. 團長은 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 獨立運動陣營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漢醫였던 金亨稷은 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治療도 해주었으나 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亨稷이를 殺害하고 말았다. 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는 인물들의 실제

    북한은 김일성이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만주에서 알았던 인물들의 일을 터무니 없이 조작하여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김근혁(金根赫, 1907~1930), 최창걸(崔昌傑, 1902~1931), 차광수(車光洙, 1905~1932) 등은 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내의 공산주의자들로 1930년 여름 이종락(李鐘洛)을 따라 탈퇴하고 나와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했다. 이들은 김일성이 추종하던 연상의 선배들이었으나 일찍 죽어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북한은 그들을 모두 김일성에 충직했던 부하로 만들어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 그들의 체포와 관련한 몇건의 당시 기록이 발견되어 실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은 김혁이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과 그를 찬양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료들에게 보급했고, 한별을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 다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없는 이야기들이다. 김혁은 일제 기록에 김근혁(金根赫)으로 나오며, 만주의 하얼빈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해 1930년 11월 2일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조선인 여종업원 2명을 사살하고 다른 2명을 부상시킨 후 체포되었다.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이 하얼빈에 머물 당시 근거지를 습격해온 적들을 피해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부상 당해 체포되어 1930년 8월 25일 죽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이 하얼빈을 떠난 후인 1930년 11월 2일 체포되었으며 그후 여순(旅順)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복덕루 습격 당시 도주하려다 문이 잠겨있자 탈출을 위해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뜨리다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 최창걸(崔昌傑, 1902~1931)
    최창걸은 이종락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가담하여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에 적대하다 1931년 11월 중순 양서봉(梁瑞鳳, 1896~1934)의 부하에게 살해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81] 1931년 7~8월에도 국민부에서 그를 살해하려다 실패했다.[82] 북한은 그가 1932년 2월 20일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83]
    • 차광수(車光洙, 1905~1932)
    北 신문, 김일성 혁명동지 차광수 조명…주민들에 '충성' 독려 / 노동신문 "충성 발걸음,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어" 뉴스1 2019-12-19
    北 항일투사 차광수 생일 100돌 보고회 통일뉴스 2005. 4. 6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회고록 속 차광수의 실제인물 RFA 2023.09.27
    김일성의 첫 애인이라는 한영애는 1930년 여름 체포를 피해 김일성과 함께 하얼빈으로 도피했다가, 김일성이 하얼빈을 떠난 직후 가을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변절하지 않고 혁명의 신념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실제는 1932년 5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로 이송되었으나 며칠 조사받은 후 풀려났다. 이후 서울 등 조선내에 머물렀으며 별다른 활동을 한 것이 없다. 신의주에서 쉽게 풀려난 것으로 보아 전향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옛애인이었던 김일성이 일으킨 6.25 남침전쟁으로 한영애 본인과 남편,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초기 만주 빨치산 시절 - 2명의 김일성 : 1932년 7월 ~ 1936년 2월

    이 시기에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많다. 김일성과 김일선은 우리말로는 발음이 틀리지만 일본인이 우리말 발음을 들으면 다 같이 ‘ソン’(선·성·섬)으로 들을 수 있다고 하므로 이 과정에서 이름 표기의 혼돈이 발생할 수 있다.[84]

    대표적 김일성 진짜론자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북한 김일성과 다른 김일성이 또 있었다면 곤란한 문제가 생기므로 이 김일선이 일찍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 근거는 없다.[87] 그냥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희망성 주장일 뿐이다. 반면에 6사장 김일성은 전사했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와다는 같은 책에서 그가 전사하지 않았으며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한다. 기록과 관계없이 자신의 희망에 따라 김일성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은 학자가 할 일이 못된다.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였던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1935년 12월 20일자 보고서의 이 기록이 정확할 것임.
    김일성이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에는 1931년 입당으로 나오고, 보증인이 이청산(李靑山)이라 했다.[88][89] 그러나 소련군 복무 당시의 다른 기록들에는 1932년 입당으로 나온다.[90]
    • 아래 두 기록에 나오는 김일선(金一善)과 김일선(金日善)은 진만산(陳萬山, 陳滿山)과 함께 나오므로 동일인물로 보인다.
      1. 1934년 3월 31일 왕청현(汪淸縣委) 반일유격대(反日遊擊隊) 참모겸정치위원(參謀兼 政治委員) 김일선(金一善, 金一成이라고도 함.)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51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I-4-5-2-1_22_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 11.東満特委ノ根拠地関係
        [p.4] 汪淸縣委 政治部責任 陳萬山(滿人)

        反日遊擊大隊長 趙芝遠 (滿人 趙永遠이라고도 함.)

        「反日遊擊隊參謀兼 政治委員 金一善(鮮人, 金一成이라고도 함)」
        고이허(高而虛, 1902~1937)파 대표로 김일성(金一成)이 나오는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8월 17일자 기사. 이청시(李靑矢)는 이청천(李靑天, 1888~1957)의 오기로 보이며, 양서봉(梁瑞鳳)은 양세봉(梁世奉)인데, 이로부터 한 달 뒤인 9월 20일 피살 당했다.

        이보다 앞서 3월 27일자에는 金一善(鮮人, 金一成이라고도 함)이 全一善(鮮人, 全一成이라고도 함)으로 되어 있었는데,[91] 성을 전(全)으로 했다가 김(金)으로 고쳤다.

        북한 김일성이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에[88][89] 왕청반일유격대(汪淸反日游擊隊) 대대정치위원(大隊政治委員)을 지냈다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의 김일선(金一善, 金一成이라고도 함)은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있을 것같다. 하지만 허동찬(許東粲, 1932~ )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 6사장 김일성이라 하였다.[92]
      2. 1934년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 제2독립사(第2獨立師) 제2단 단장(團長)은 중국인 진만산(陳滿山), 정치위원은 한인 김일선(金日善)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167.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약력 기록에 나오는 김일성과 주변 인물들의 약력.
    中共東滿特委書記馮康的報告(之一) -- 關于東滿特委書黨團幹部和人民革命軍幹部簡歷 (一九三五年 十二月二十日) : 中共東滿特委成立 70周年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pp.175~18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동향/연구보고서,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pp.318~321 에 수록.
    풍강(馮康)은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다른 이름이다.
    金日成, 高丽人, 1932年入党, 学生, 23岁, 勇敢 积极, 会说中国话, 游击队员提升的, 有民生团的口供很多次, 爱在队员中说话, 在队员中有信仰, 在救国军中亦有信仰, 政治问题知道的不多。
    『김일성, 고려인, 1932년 입당, 학생, 23세, 용감 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에서 승진한 사람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救國軍) 사이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정치문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이 보고서는 1935년 12월 20일에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부에 제출된 것이나, 위증민은 1935년 6월 만주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서[96] 7월~8월 기간에 열린 코민테른 7차 회의에 참석하고 이듬해 1936년 1월 초순에 돌아오므로[97][98], 문서 작성 시점은 출발전인 1935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북한 김일성 부대 출몰 기록

    간도 영사관 정보철 1934년 8~9월 기록에 북한 김일성으로 보이는 김일선(金一善) 부대가 나온다.

    昭和九年(1934년) 八月中 間島及接壤地方治安情況[99]
    匪首名 金一善, 匪賊團名 反日遊擊隊, 部下數 20, 根據地 汪淸, 系統 共匪, 摘要 最近 人民革命軍 傍系에 編入되었음

    昭和九年(1934년) 九月의 記錄[100]

    金一善, 人民革命軍 第二軍獨立師 所屬, 部下數 20, 根據地 汪淸, 橫行地區 汪淸 延吉, 系統 合流匪

    이 김일선(金一善)은 북한 김일성으로 보이며, 다른 곳에 있다가 이때 처음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합류(合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에 안도현(安圖縣)에서 유격대를 창설했다고 주장하나 기록적인 근거는 없으며, 중국측 기록에는 안도현 유격대 창설자가 이영배(李英培)로 나온다. 남한에서는 그가 처음에 구국군(救國軍) 오의성(吳義成)의 당번병이었다는 주장이 많이 있으나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오의성(吳義成)은 왕덕림(王德林)의 부하인데, 북한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인 1941년 1월에 쓴 자필 이력서에 왕덕림(王德林)의 부대에 들어갔다는 말이 나온다. 위에서 본 위증민의 1935년 12월 20일자 코민테른 보고서에도 김일성이 구국군(救國軍)에 있었다는 말이 나오므로, 북한 김일성은 처음에 구국군(救國軍) 왕덕림의 부하로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 간도영사관의 기록은 김일성이 이때 구국군을 떠나 부하 20명을 데리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합류(合流)한 것을 의미하는 것같다.[84]

    간도 영사관 정보철에 1934년 ~ 1935년 기간에 북한 김일성으로 보이는 김일선(金一善) 부대가 몇 차례 출몰한 기록이 있다. 대부분 양민을 약탈한 사례이다.

    간도(間島) 일본 영사관 정보 기록에 나오는 2명의 김일성

    간도(間島) 일본 영사관의 정보 기록에는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상당히 많다. 대강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상당수는 허동찬(許東粲, 1932~ )의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에도 나오는 기록들이다.[101] 스칼라피노[102]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도 간도 영사관 기록에 나오는 김일선과 김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03][104]

    아래는 김일성 또는 김일선이 2명 나오는 간도 일본 영사관의 1935년(昭和十年) 5월 ~ 12월과 1936년((昭和十一年) 1, 2월 기록들이다. 방진성(方振聲)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국인이다.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은 백초구(百草溝), 훈춘(琿春) 등 간도 지역 여러 곳에 분관(分館)을 두고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산하 부대 단위들의 명칭은 크기 순으로 "배(排, 분대급) - 연(連, 소대급) - 단(團, 중대급) - 사(師, 대대급) - 군(軍, 연대급)"과 같으며, 대개 1개 사(師)는 3개의 단(團)으로 구성되는 등 1개의 단위부대는 하위 단위부대 3개 정도로 구성되는 방식이었다.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은 연장(連長, 소대장급), 단장(團長, 중대장급), 사장(師長, 대대장급), 군장(軍長, 연대장급) 등 단위부대 명칭에 장(長) 자를 붙였다.

    月別 分館 匪首名 匪賊團名 部下數 根據地 橫行地區 系統
    5월 百草溝 金一星 人民革命第二軍 第二獨師 第一団 第三連

    100

    汪淸 大荒溝 奧 汪淸 共匪
    方振聲 〃 第一團

    80

    汪淸 唐水河子 汪淸 延吉 東寗
    6월 百草溝 金一星 革命軍二軍 二師 第一團 第三連

    100

    延吉縣 大荒溝 延吉 汪淸 共匪
    7월 百草溝 金一星 革命二軍 二獨 第三連

    100

    延吉縣 大荒崴 延吉 汪淸 共匪
    方振聲 革命二軍 二師 一團

    30

    汪淸 春和鄕 唐水河子 汪·延·寧安
    金日善 〃 〃 三連

    40

    8월 百草溝 金一星 革命軍第二軍 第二獨立師 第三連長

    100

    延吉縣 大荒溝 延吉縣 共匪
    方振聲 人民革命軍 二軍 二師 一団長

    30

    汪淸縣 春和鄕 唐水河子 汪淸縣 延吉縣 寧安縣
    9월 琿春 金一善 東北人民革命軍 第二軍 第三団

    32

    琿春縣 德惠鄕 楊木村 琿春縣 共匪
    百草溝 金一星 東北人民革命軍 第二獨立師 第三連

    100

    延吉縣 大荒溝 延吉縣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 第二軍 第二師 第一団

    40

    汪淸縣 春和鄕 唐水河子 汪淸縣 延吉縣 東寧縣
    10월 琿春 金日善 東北人民革命軍 第二獨立師 第三団 第三連

    20

    琿春縣 德惠保 後房子 琿春縣 共匪
    百草溝 方振聲 革命軍 第一師 第三團

    40

    汪淸縣 春明鄕 唐水河子 奧地 汪淸縣 延吉縣 寧安縣
    11월 琿春 金日善 革命軍 第二獨立師 第三團 第三連

    20

    琿春縣 德惠保 後房子 琿春縣 共匪
    12월 百草溝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 二軍 第一師 第三團

    30

    汪淸縣 春明鄕 唐水河子 附近 延吉 汪淸 兩縣 共匪
    金日善 東北人民革命軍 二軍二師 三團 第三連

    30

    汪淸縣 春和鄕 托盤溝 附近 延吉 汪淸 兩縣
    익1월 百草溝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 第二軍 第三團

    40

    汪淸縣 春和鄕 唐水河子 奧 汪淸 延吉 共匪
    金日善 〃 〃 〃 第三連

    30

    延吉 汪淸
    익2월 百草溝 方振聲 東北人民革命軍第 三団

    35

    汪淸縣 延吉 汪淸 共匪
    摘要

    맨 마지막 항목 "摘要"는 모두 공란이나 아래 한 건에만 내용이 있다
    10월 金日善 : 最近二ㆍ三連合体 .....如ソ

    출처
    1. 昭和十年五月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3) 匪賊情勢調査表 / 5. 百草溝 分館
    2. 昭和十年六月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10. 匪賊情勢調査表 / 6. 百草溝 分館
    3. 昭和十年七月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十 匪賊情勢調査表 / 6. 百草溝 分館
    1. 昭和十年八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六) 百草溝 分館 管內
    2. 昭和十年九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五) 琿春 分館 區內 : (六) 百草溝 分館 區內
    3. 昭和十年十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六) 百草溝 分館 管內
    1. 昭和十年十一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匪賊情勢調査表 / 琿春 分館 區內
    2. 昭和十年十二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匪賊情勢調査表 / 百草溝 分館 區內
    3. 昭和十一年一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8 匪賊情勢調査表 / 百草溝 分館 區內
    4. 昭和十年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 附表第七 月別匪賊勢力消長表
    1. 昭和十一年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ノ件 / 附表第七 月別匪賊勢力消長表

    허동찬(許東粲, 1932~ )이 처음 밝힌대로 김일성(金一成, 金一星, 金日成)에 해당하는 이름을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으로 적는 경우가 기록에 나오므로 두 이름은 같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101] 위에 나오는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부하수나 근거지, 횡행지구가 모두 다르므로 당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김일성 이름을 쓰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허동찬은 김일성(金一星)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북한 김일성으로, 이 둘은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101] 그러나 당시는 이런 판단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미약하여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후 발굴된 새로운 자료들까지 감안해서 검토하면 그의 결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동찬보다 앞서 스칼라피노[102]이정식(李庭植)도 1972년 저서에서 위와 같은 간도영사관 문서를 참고하여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나 직책이 같아서 동일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면서[103][104] 둘다 북한 김일성으로 보고 있다. 서대숙(徐大肅)도 1967년 저서에서 1935년 5월 기록에 북한 김일성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중대 제3지대장(支隊長)으로 나온다고 하면서,[105] 스칼라피노-이정식과 같은 참고문헌을 들고 있다.[106] 그러나 서대숙은 김일성(金一星)을 북한 김일성으로 간주하고, 다른 이름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않아 관계없는 사람으로 본 듯하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이름 외에는 이 사람들을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다른 근거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서대숙이나 스칼라피노-이정식은 많은 문헌을 발굴하여 북한 김일성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은 사실이나, 동북인민혁명군 또는 동북항일연군 관련 기록에 나오는 김일성은 모두 북한 김일성으로 단정하여, 여러명의 김일성이 있었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후일의 연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록 선도한 문제가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면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 두 사람이 동일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2년 3월 만주국 수립 직후부터 간도 지역 각지에 중공당 산하 유격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이 연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된다. 2군에는 1934년 3월 창설된 제1독립사(獨立師)와 1934년 5월 30일 창설된 제2독립사가 있었다. 이어 1935년 5월 30일 이 두 독립사(獨立師)를 총괄 지휘하는 2군의 군부(軍部)가 출범하면서 제1, 2 독립사는 제1, 2사(師)로 되며, 왕덕태(王德泰)가 2군 군장(軍長)과 1사 사장(師長)을 겸임한다. 2사의 사장은 박춘산(朴春山)이었다. 2사 산하에 1단(團)과 2단(團)이 있었는데, 이를 1사 산하의 1, 2단과 구분하기 위해 3단, 4단이라 부르기도 했다. 위에 나오는 방진성(方振聲)은 제2(독립)사 1단 (3단으로도 칭하나 실제로는 같은 단임)의 단장(團長)이고,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그 휘하의 제3련(第三連) 연장(連長)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은 이름 표기와 부하 수, 근거지, 횡행지, 출현 시기가 모두 다르므로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제3련의 연장이 2명일 수는 없으므로, 뭔가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혼선은 두 사람의 이름이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연(連)은 소대 규모로 병력이 20~40명 정도이다 따라서 실제의 제3연장은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이 맞으며, 부하가 100명인 김일성(金一星)은 제3연장이 될 수 없고, 부하수로 보아 단장인 방진성보다도 더 상급자일 것이다. 그의 실제 직위는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래에 북한 김일성이 3단 단장 방진성 아래에서 참모장과 정치위원을 지냈다는 김일성 자필 기록이 발굴되었으므로,[88] 방진성 휘하의 제3연장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바로 그가 맞을 것이다. 방진성보다 상급자인 김일성(金一星)이 바로 후에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되는 사람이다. 북한 김일성은 아직 연장(連長, 소대장급) 또는 3단(團, 중대급)의 참모에 불과하여, 1936년 봄에는 사장(師長)이 될만한 직급에 미치지 못했다. 사장(師長, 대대장급)으로 승진하려면 최소한 단장(團長, 중대장급)이나 사(師, 대대급)의 참모 정도는 되어야 한다. 어떤 군대도 소대장이나 중대참모급을 중대장 또는 대대참모들을 제치고 대대장으로 곧장 임명하는 경우는 없다.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김일성(金一星)은 1935년 5월부터 9월까지 나오다 사라지고,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은 1935년 7월과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만 나오며, 2사 1단장(3단장) 방진성(方振聲)은 1935년에는 계속 나오다 이듬해는 2월까지 나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기록에서 사라지는 시기에 간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2명의 김일성의 다른 행적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나오는 두 사람의 김일성, 즉 김일성(金一星)과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중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는 일찍부터 알려진 것이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나 간부 명부는 여기서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인데, 북한 김일성보다 상급자로 다른 김일성이 있었으며, 이 사람이 후의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느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오랜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이다.

    아래에서 위의 자료들의 주요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해 본다.

    1934년 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 1, 2 독립사(獨立師)의 출범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 수립되자 중공당 만주성위는 산하 조직에 지시하여 만주 각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 간도 지역의 유격대는 동만특위(東滿特委) 산하에 만들어지는데 1934년 초 이들이 연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第2軍)의 제1(第1) 및 제2(第2) 독립사(獨立師)가 성립된다.[109] 제2군(第2軍)의 간부 구성은 아래와 같다.[110]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 第1獨立師 東北人民革命軍 第2軍 第2獨立師
    1934년 3월 출범 1934년 5월 30일 (5·30 간도폭동기념일) 출범
    師長(元游擊隊總隊長) 朱鎭 (鮮人)

    政治指導員 王德泰 (滿人)
    參謀處 別名 副官 (鮮人)
    經理處 金某 (鮮人)
    第一團長 別名 風呂敷 (鮮人)
    第二團長 別名 木匪 (鮮人)
    第三團長 孟昭祥 (滿人)

    師長 某 (滿人)

    政治委 李某 (鮮人)
    第一團長 某 (滿人)

    政治委 南昌一 (鮮人)

    第二團長 陳滿山 (滿人)

    政治委 金日善 (鮮人)

    第三團長 侯國春 (滿人)

    위의 기록과 달리 제2독립사 사장(師長)은 출범 당시부터 조선인 박춘산(朴春山)이 맡았으며, 1, 2 독립사 모두 사장은 조선인 이었다. 제1 및 제2독립사를 총괄지휘하는 제2군의 군부(軍部)는 1935년 5월 30일에 정식으로 출범하지만, 그 전에도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이 제2군의 군사부장(軍事部長)을 겸했다는 기록이 있어,[111] 아마도 그가 제1, 2 독립사를 총괄 지휘하고 있었던 듯하다.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은 민생단 혐의를 받아 처형 위기에 몰리자 1935년 1월말 탈주했다가 2월 14일 연길현 의란구 분서(延吉縣 依蘭溝 分署)에 검거되어 귀순해버린다.[112][113] 그 후임 사장은 정치위원이었던 중국인 왕덕태(王德泰)가 맡게 된다. 제2독립사 제2단의 정치위원 김일선(金日善)을 두고 북한 김일성이 맞는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서대숙(徐大肅)은 제2독립사장이 중국인 방진성(方振聲)이었다고 주장하나[114]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아래에 나오는대로 조선인 박춘산(朴春山)이었고, 방진성은 그 아래 제1단의 단장(團長)이었다.

    1935년 9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

    1935년 5월 30일 제1 및 제2 독립사를 총괄 지휘하는 제2군의 군부(軍部)가 출범하면서 두 독립사는 각각 제1사(師) 및 제2사(師)로 된다. 제2군의 군장(軍長)은 왕덕태(王德泰)가 되어 제1사장을 겸임한다. 1935년 9월의 제2군 조직표는 아래와 같다. 여기는 단(團)까지만 표시하였고, 그 아래 연(連) 단위는 pdf 파일에 나와 있다. 2군 2사의 사장으로 나오는 조선인 박춘산(朴春山)은 중요한 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동북항일연군 역사에서 단 한번도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다. 박춘산이 2사 사장이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므로 현재까지 연구된 동북항일연군 역사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군 1사의 사장도 원래는 조선인 주진(朱鎭)이었으나 그는 민생단으로 지목되어 처형 위기에 몰리자 1935년 1월말 부대를 탈출했다 일본측에 체포되어 투항하고, 후임으로 왕덕태(王德泰)가 사장이 된다.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昭和十年(1935年) 五月 三十日 汪淸 腰營溝 成立
    管轄地区[區] 間島省 各縣及敦化縣地方
    根據地 汪淸 羅子溝

    軍長 王德泰 四二 滿人

    政治委 魏極[拯]民 三六 〃
    參謀處 刘[劉]漢興 三○ 〃

    作战科 朴春深 三○ 鮮人
    牒報科 吳某 〃
    交通科 金善九
    管理科 王中山 四○ 滿人

    經理處 李某 三五 鮮人

    軍需股 李五福 二七 〃
    第二軍 第一師

    師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同志 三○ 鮮人
    參謀處 趙某 三二 滿人

    第一師 第一団

    団長 安鳳斈[學] 二五 鮮人[115]
    政治委 朱寿[壽]東 二四 滿人 - 周樹東(周树东)
    參謀處 林昇奎 鮮人
    經理處 石德竜[龍]

    第一師 第二團

    団長 張春泰 三○ 滿人
    政治委 楚哥
    參謀處 李哥

    作战[戰]科 劉蘭漢 (柳兰[蘭]煥)[115]
    第一師 第三團

    團長 李xx 三二才 鮮人
    政治委 金光浩 鮮人
    參謀處 李靑山 鮮人[89]

    第二軍 第二師

    師長 朴春山 鮮人
    政治委 金一成 鮮人
    參謀處 王大腦袋 滿人 (= 王潤成)[116][117][118]

    第二師 第一團

    団長 方振声[聲] 四○ 滿人
    政治委 石奎 三○ 鮮人
    參謀處 金日成 三二 鮮人

    作戰科 金一
    第二師 第二団

    団長 候國忠 滿人
    政治委 金鉉 鮮人

    제2사의 정치위원(政治委員)이 김일성(金一成)인데, 그 산하 제1단(제3단)의 참모장에 김일성(金日成)이 또 나온다. 2군 2사에 두 사람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첫 증거이다. 북한 김일성의 1941년 1월 이력서에 3단(2사 1단)의 참모장 경력이 적혀 있으므로[88][89] 그 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나오는 부하가 100명인 김일성(金一星)으로 보이며, 그의 실제 직책은 2사 1단(3단)의 제3연장(連長)이 아니라 훨씬 높은 2사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볼만한 것이 하나 더 있다.

    1934년 12월 만주국군(滿洲國軍) 제2군관구월보(第2軍管區月報)의 제2군관구내 비적조사표(第二軍管區內 匪賊調査表).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滿洲國軍) 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68 (滿洲國軍) 第2軍管區月報 강덕원년(康德元年) 12월분 (1934년 12월분)
    [p.113] 第二軍管區內匪賊調査表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독립사장 박춘산(朴春山) / 匪數 100 / 근거지 延吉縣界沙河掌 / 횡행지역 大荒崴 奧地 能家地方 一帶 / 備考 : 政治部長 金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에 제2사 정치위원이 金一成인 것으로 보아 여기의 정치부장(政治部長) 金一(?)은 金一成(또는 金一星)일 가능성이 크다.

    직급이 높은 이 김일성이 1936년 봄 제3사 사장(師長)이 된 사람이며 (후에 6사장), 제3단(=제2사 제1단)의 단장 방진성(方振聲) 아래 참모장 또는 제3연장(連長)인 북한 김일성은 아직 사장으로 승진할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위의 표에 제1사 제1단의 단장으로 나오는 안봉학(安鳳學)은 1936년 3월 김일성이 3사장이 될 때 같이 1사장으로 승진했다. 안봉학이 1936년 9월 30일 돌연 일본군에 투항해버리자 1사의 정치위원 주수동(周樹東, 1918~1937)이 후임 사장이 된다.[119]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사장(師長)이 되려면 최소한 단장(團長)이나, 사(師)의 정치위원 또는 참모의 경력을 필요로 하며, 연장(連長)이나 단(團)의 참모가 곧바로 사장으로 승진할 수는 없다. 북한 김일성이 사장 승진에 필요한 단장(團長)이나 사(師)의 참모를 지냈다면 이력서나 항련 제1로군 약사에 그보다 낮은 직급은 쓰면서 이를 적지 않았을 리도 없다.

    2군의 1사 1단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이 1사장으로 승진할 때에 북한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3단장(2사 1단장이라고도 함) 방진성(方振聲, 중국인)은 사장으로 승진하지도 못했다. 북한 김일성이 직속 상관 방진성을 제치고 3사장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당시 3사장이 된 김일성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어느 군대든 소대장이나 중대 참모 정도가 중대장과 대대참모들을 제치고 곧바로 대대장으로 승진할 수 없다. 수많은 부하의 생명을 책임진 지휘관을 경력이 미비한 자로 임명하는 것은 금기이다. 당시로서는 아직 단(團)의 참모 또는 연장(連長, 소대장급) 지위에 머물러 있던 북한 김일성이 승진한다면 사장(師長, 대대장급)이 아니라 그 아래 단장(團長, 중대장급) 정도나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더구나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김일성은 아직 민생단(民生團) 혐의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으므로 낮은 직급에 있던 그가 갑자기 사장으로 승진했을 리는 만무하다.

    제2군 제2사장 박춘산(朴春山)의 부하로 동명이인인 제2사 제3단 제2련 제1배장(第三團 第二連 第一排長) 박춘산(朴春山)이 또 보이므로[120] 상관과 부하가 같거나 유사한 이름을 쓰는 사례는 김일성(김일선)의 경우 외에도 더러 있었다. 흑룡강성장을 지낸 진뢰(陳雷)의 부인 이민(李敏, 1924~2018)도[121] 빨치산 당시의 이름은 이명순(李明順)이었는데, 1940년 소련으로 도피할 당시 16세에 불과하였으며, 일본의 토벌자료에 등장하는 이명순(李明順)과는 동명이인이다.[122][123]

    1936년 2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간부 명부

    1936년 2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간부 명부에서 북한 김일성과 관련있는 주요 부분만 보면 아래와 같다.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所屬幹部 連名簿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根據地 安圖縣 奶頭山]

    第二軍

    軍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宗學 〃
    參謀長 刘[劉]漢興 〃[124]
    作戰科 朴春深 鮮人
    牒報科 吳某 〃
    交通科 金善九〃
    管理科 王中山 滿人
    經理處 李五福 鮮人

    第二軍 第一師

    師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宗學 〃
    參謀長 刘[劉]漢興 〃

    第一師 第一團

    團長 安鳳學[115]
    政治委 未詳

    第一團 第1 ~ 4連
    第一師 第二團

    團長 張傳述 三二才 滿人
    政治委 朱寿[壽]東 二六才 〃

    第二團 第1 ~ 5連
    第二軍 第三團 [根據地 夾皮溝]

    (寧安 南湖頭 移動 準備中)
    團長 方振聲 四一才 滿人

    政治委 林寿[壽]山 三一才 鮮人[115]

    第三團 第1 ~ 6連

    第三團 第三連 [根據地 上盤溝]

    連長 金日成 三○才 鮮人
    政治委 崔万石 二二才 〃
    隊員 三三名
    第一師 第四團

    團長 候國忠 三○才 滿人
    政治委 王潤成 三○才 〃

    第四團 第1 ~ 5連

    이 명부에는 제2사(第二師)는 없는 것처럼 되어 있다. 2사(師)의 사부(師部) 즉 지도부는 빠져 있고, 산하의 1, 2단(團)은 1사의 3, 4단인 것처럼 나와 있다. 제3단의 제3연장(連長)은 金日成으로 적혀있어 간도 영사관 기록의 제3연장(連長) 김일선(金日善, 金一善)과 동일인물인 것이 증명되며, 바로 이 인물이 북한 김일성이다.

    당시 2군은 일본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왕청, 연길 지역에서 밀려나 1935년 가을부터 1사는 서쪽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고, 2사의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 참모장 왕윤성(王潤成) 등 사부(師部)는 북만(北滿)으로 이동해서 주보중(周保中)의 5군과 연합하여 2군-5군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아래 참고) 아마도 이것이 2사의 사부(師部)가 위의 명부에 빠진 원인이 아닌가 한다. 간도 영사관 기록에 부하 100명의 김일성(金一星) 부대는 1935년 9월까지만 나오고 10월부터 보이지 않는데, 이 사람이 당시 북만으로 이동한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과 동일인물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3단장 방진성(方振聲)과 제3연장 김일성(金日成)은 1936년 2월까지도 아직 2사의 사부(師部)를 따라가지 않고 간도 왕청현(汪淸縣 夾皮溝) 지역에 남아 있다. 하지만 위의 명부에 영안현(寧安縣)의 남호두(南湖頭)[125]로 이동 준비중이라하여 곧 북만(北滿)으로 가서 2사 본진에 합류할 예정인 것을 보여준다. 간도 영사관 기록에 단장 방진성(方振聲)과 제3연장 김일선(金日善)은 1936년 1~2월까지 왕청현 지역에 있다가 그 후로 나오지 않는데, 이들이 이무렵 2사 사부(師部)가 있는 북만으로 이동해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와다 하루키(和田 春樹)는 당시 북한 김일성이 3단의 방진성 단장 아래에서 제3련이 아닌 제5련(제4련?) 지도원이었다고 주장한다.[126]

    서대숙(徐大肅)에 의하면 당시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처음에는 제2군 제2독립사 제1단(第2軍 第2獨立帥 第1團)의 제3지대 전사(戰士)였는데 계속 진급하여 나중에는 제6사장(第6師長)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105][127][128] 하지만 제2독립사 제1단 제3지대(제3련)에 속했던 것은 맞으나나, 6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으로 봐야할 것이다.

    북만(北滿)의 2군과 5군 혼성부대 지휘관 김일성(金日成)

    간도(間島) 지역에 있던 동북인민혁명군 2군 2사는 일본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1935년 가을부터 북만(北滿)으로 이동해서 주보중(周保中)의 5군과 연합하여 2군 - 5군 혼성부대(混成部隊)를 편성한다.[129]

    아래 첫번째 표는 1935년말에 신년도를 위해 작성한 혼성부대 편성 계획표인데 총지휘부의 정치위원 겸 서부대(西部隊)의 위하부대(葦河部隊) 책임 김일성(金日成)은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과 동일 인물이다. 총지휘부는 영안현(寧安縣)에 위치해 있다. 위에서 본대로 2사 1단(3단)의 참모장 또는 제3연장인 북한 김일성은 1935년말에는 아직 간도 왕청현 지역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5군 군장 주보중과 나란히 혼성부대 최고지휘부에 이름을 올릴만한 계제가 되지도 못한다. 혼성부대 지휘부에 나오는 김일성(金日成)이 1936년 3월 3사 사장(師長)에 임명되는데,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으로 명칭이 바뀌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두번째 표는 1936년 4월 인근 여러부대의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거쳐 확대 편성한 혼성부대 지휘부이다. 김일성(金日成)은 중선지휘부(中線指揮部) 정치위원으로 나오며, 그의 부대는 액목현(額穆縣)에 위치한다. 부하가 100명으로 나오는데, 이는 간도 영사관 기록에 1935년 5월 ~ 9월 기간에 나오다가 10월부터 사라진 김일성(金一星)의 부하 100명과 일치하므로 그의 부대가 이동해 온 것임이 분명하며, 혼성부대의 김일성(金日成)과 간도 영사관 기록의 김일성(金一星)은 동일인이다.

    이때는 간도 왕청현 지역에 남아있던 2사 1단(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과 그 부하들도 북만으로 이동해온 후이며, 방진성도 편성표에 들어 있는데, 그의 부대는 영안현(寧安縣) 남호두(南湖頭)에 있다.[125] 제3연장 김일성도 상관 방진성을 따라 북만으로 왔을 것이나, 그는 아직 지휘부에 이름을 올릴 계제가 아니다.

    동선지휘부(東線指揮部)에 나오는 사충항(史忠恒)의 부대는 이 무렵 2군으로 편입된다.

    1936년 2월 21일에 방진성과 3단(三團)이 북만으로 와 있는 것은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이 날자로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132]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36년 2월 21일자로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서신.[132] 위민생(魏民生)은 위증민의 다른 이름이다. 방단장(方團長)은 2군 2사 1단(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이다.
    나는 액목(額穆)에 무사히 도착하여 방단장(方團長) 등을 만나보았습니다. 3단(三團)의 내부에 상당한 변동이 있었으며,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 두 동지는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게 되었고, 3단 정위(三團 政委)는 왕자균(王紫鈞) 동지가 맡았으며, 각 연장(連長)과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도 역시 변경되었습니다. .......

    我安全到额穆和方团长等见了面, 对于三团的内部有相当的变动, 金义[日]成、林水山[115] 二同志调西部另有工作担负, 三团政委由王紫钧同志担任, 各连长政治指导员亦有变更。 .......

    원래 편지에는 연도가 적혀있지 않았으나 자료집 편집시 1935년으로 추정하여 기재했는데, 위증민이나 방진성이 북만의 액목(額穆)에서 만날 수 있는 시기는 그 해가 아닌 1936년이다. 2군 2사가 북만으로 이동하여 5군과 혼성군을 편성하던 시기임. 1935년 2월에는 2군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이 민생단 문제로 탈주하여 일본측에 투항하고, 2월 24일~3월 3일 기간에는 위증민이 연길현(延吉縣)에서 민생단 문제 논의를 위해 대황외(大荒崴)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액목에 가 있을 수가 없음.

    위증민은 1935년 7월~8월간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96] 이듬해 봄 돌아오는 길에 북만에(額穆) 와 있는 3단장 방진성을 만나 3단 내부의 변동 사항에 대해 알게 되는데, 3단의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115]은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았다고 하였다. 편지에 북한 김일성을 왜 김의성(金義[义]成)이라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혼성부대 지휘부의 金日成과 구분하기 위해 다르게 적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까지도 북한 김일성은 3단장 방진성의 부하였으며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게 되었다고 했으므로, 곧 이어 3사장(師長)이 되는 혼성부대 지휘부의 金日成과는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두 김일성의 서로 다른 행적 요약

    위에서 본대로 두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으로 혼란스럽게 나오지만, 그들의 직책과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 뚜렷이 구분되는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상급자인 김일성은 간도 영사관 기록에 부하 100명인 김일성(金一星), 1935년 9월 2군 편성표에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 1935년말~1936년 봄 2군-5군 혼성부대 지휘관 김일성(金日成)이며, 이 사람이 1936년 4월 3사장(師長)으로 임명되는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으로 명칭이 바뀐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하급자인 김일성(북한 김일성)은 간도 영사관 기록에는 2군 2사 1단(3단) 제3연장(連長) 김일선(金日善, 金一善)으로, 1935년 9월 2군 조직표에는 2사 1단 (3단) 단장 방진성 아래 참모장 김일성(金日成)으로, 1936년 2월 2군 간부 명부에는 2사 1단(3단) 제3연장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오며, 그는 아직 직급이 너무 낮아 1936년 봄에는 사장(師長)이 될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이처럼 처음에 두 김일성의 이름은 한자로 혼란스럽게 표기되다가 상급자인 김일성은 북만에서의 혼성부대 편성표에서 부터 이후 6사장 시기를 거쳐 1937년 11월 13일 전사할 때까지 일관되게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온다.

    그 부하였던 하급자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金日成) 활동기간에는 무엇을 했는지 알려진 기록이 없다. 그는 6사장 김일성 전사후 활동이 나타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이 되면서 6사장 김일성의 한자 이름을 그대로 따라서 김일성(金日成)으로 쓰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똑같은 한자 이름을 쓰면서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당시부터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이는 그가 소련으로 넘아가서 1941년 1월 작성한 이력서나, 1942년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으로 적어놓은 데서 밝혀진다.[88][133]

    그는 해방 직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날조한 경력으로 인민들을 속여왔다. 남한의 얼치기 좌파학자들도 그의 날조한 경력을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여 선전하며 사기행각을 돕고,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며 남한의 과거 지도자들 흠집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민생단 사건 관련 자료

    • 민생단 사건
    • 대황외(大荒崴, 다홍왜) 회의 : 1935년 2월 24일 ~ 3월 3일
    簿冊標題:外事警察報 第156号 昭和10年(1935년) 07月 : 외사경찰보 제 156호
    p.25 (第156号 43면) : 中共東滿黨特委聯席大會の開催と其の決議
    참석자 중 왕다노대(王大腦袋)는 왕윤성(王潤成)이다.[116][117][118]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민생단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정작 이런 중요한 회의에 참석도 못 했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13081260200、第六十八議会用調書 別冊(最近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概況)(議TA-10)(外務省外交史料館)」
    p.13 : 1935년 2월 7일경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만특위(東滿特委) 간부 이상묵(李相默), 혁명군 수령 주진(朱鎭) 탈주 체포
    p.14 : 1935년 2월24일~3월 3일 대황외 오지 신거지 위극민 사령 동만특위연석회의 - 위증민 동만특위 책임자 선출, 3월 11일 왕청현 요영구로 이동.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
    김일성은 대황외(다홍왜) 회의에 참석도 못했으나, 회고록에는 자신이 회의를 주도한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 : 1936년 3월 ~ 1937년 12월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쪽이 절대 다수이다.

    하지만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1936년 ~ 1937년 기록에 자주나오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당시 전사한 것이 맞으며, 출신지도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이고, 당시 나이도 30대 중반이었다. 뿐만아니라 동북항일연군 2군에는 북한 김일성 외에 그보다 상급자인 다른 김일성이 있었고, 그가 6사장이 되었으며, 북한 김일성은 당시 직급이 낮아 사장으로 승진할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6사장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 아닌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다. 그가 전사한 직후부터 북한 김일성은 한자가 같은 金日成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세하고 남의 행적까지 훔쳐 사람들을 속여왔다.

    김일성(金日成)의 사장(師長) 임명

    1936년 3월 종전의 동북인민혁명군은 보다 많은 다양한 성격의 무장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명칭를 보다 중립적인 동북항일연군으로 바꾸는데, 이때 2군은 종전 2개사에서 3개사 체제로 바뀌게 된다.[134][133][135]

    제1사의 제1단을 기간으로 일부 산림대(山林队, 사실상 마적단)를 받아들여 제1사를 재편성하고, 안봉학(安鳳學)이 사장, 주수동(周樹東)이 정치위원, 여백기(呂伯岐)가 정치부주임이 된다. 제1단장(第一团长)은 최현(崔贤), 정위(政委)는 임수산(林水山); 제2단장(第二团长)은 필서문(毕书文, 畢書文), 정위(政委)는 여백기(呂伯岐)이다.

    제1사의 제2단을 기간으로 6개중대를 받아들여 제3사를 신설하고, 김일성(金日成)이 사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이 정치위원이 된다. 제7단장(第七团长)은 유연산(刘连山), 정위(政委)는 홍범(洪范); 제8단장(第八团长) 전영림(钱永林), 정위(政委)는 마덕전(马德全)이다. 2군 2사의 정치위원이었던 김일성이 간도와 북만 등지에서 거느렸던 부하 100명은 당연히 그를 따라 제3사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2군 2사 1단(또는 2군 3단)의 제3연장이었던 부하 20~40명의 북한 김일성은 당시 사장이 될만한 직급에 있지도 못 했고, 3사장이 된 김일성은 당연히 다른 인물이다.

    제2사의 제3, 4단과, 새로 받아들인 사충항(史忠恒, 1906~1936)의 부대로 제2사를 재편성하는데, 4단의 명칭은 불변이고, 3단은 명칭을 5단으로 바꾸고, 사충항의 부대를 제6단으로 한다. 제2사의 사장은 사충항(史忠恒), 정치위원은 왕윤성(王潤成)이 된다. 4단 단장은 후국충, 정위는 왕윤성이고, 5단(종전 3단) 단장(团长)은 방진성(方振声), 정위(政委) 왕자균(王紫钧), 정치주임(政治主任)은 왕송백(王松柏); 6단 단장은 2사 사장 사충항(史忠恒)이 겸임했다.

    2사의 3단장이었던 방진성이나 4단장이었던 후국충도 사장 승진을 못했는데, 방진성의 부하였던 북한 김일성이 사장이 된다는 것은 이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사장 아닌 단장 승진 정도나 바라볼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단장도 되지 못했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편성표 : 1936년 3월
    군부(軍部) 사부(師部) 단부(團部)
    제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
    정치위원 위증민(魏拯民)
    참모장 유한흥(劉漢興)
    제2군 제1사
    사장 안봉학(安鳳學)
    정치위원 주수동(周樹東)
    정치부 주임 여백기(呂伯岐)
    제1사 제1단
    단장 최현(崔賢)
    정위 임수산(林水山)
    제1사 제2단
    단장 필서문(畢書文)
    정위 여백기(呂伯岐)
    제2군 제2사
    사장 사충항(史忠恒)
    정치위원 왕윤성(王潤成)
    제2사 제4단
    단장 후국충(侯国忠)
    정위 왕윤성(王潤成)
    제2사 제5단
    단장 방진성(方振聲)
    정위 왕자균(王紫鈞)
    정치주임 왕송백(王松柏)
    제2사 제6단
    단장 사충항(史忠恒)
    정위
    제2군 제3사
    사장 김일성(金日成)
    정치위원 조아범(曹亞範)
    제3사 제7단
    단장 유연산(劉連山)
    정위 홍범(洪範)
    제3사 제8단
    단장 전영림(錢永林)
    정위 마덕전(馬德全)

    위와같은 2군의 개편에 대한 당시 기록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위민생(魏民生)은 위증민(魏拯民)의 다른 이름이다.
    魏民生、王德泰 给工委及润成同志的信

    关于二军的组织编制 及党的组织问题

    (一九三六年三月八日)
    工委及润成同志:
    二军内部的问题, 在原则方面的决定:
    “二军的名义改为东北抗日联军第二军,正式编制三个师。” 延吉第一团和一部分山林队共同编制第二军第一师。 师长安风学, 政委周树东, 政治部主任吕柏棋。 第一团长崔贤, 政委林水山; 第二团毕书文, 政委呂柏棋。组织远征队, 全师出发, 向XX 方面出动, 决定即时出发。
    安图第二团和区收编的六个中队正式编制第二军第三师。师长金日成, 政委曹亚范。第七团长刘连山, 政委洪范; 第八团长 钱永林, 政委马德全。组织远征队业已出发。
    在安图方面, 现在由南满过去一部分山林队万顺, 要求让我们改编(据二团长来说), 现在编制问题未确定。
    第二军部, 组织少年营、教导团, 随军部活动。

    原有的第三、四团, 四团名义不动, 三团改称第二师第五团。 史忠恒若愿参加第二军, 可把他的残部改编为第六团, 师长史忠恒, 政委王润成。 史忠恒若不参加, 我们仍然组织第二师。 师部的组织, 因为我们最近对你们东部详细情况不很清楚, 希望你们提出意见。 五团(三团)团部, 团长方振声, 政委王紫钧, 政治主任松柏。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16] : 1936년 4월 3일자 일기중 김일성 관련 부분

    同日西南區軍部副官周x, 奉高政委之派遣, 帶交通兵二名 于昨日到東南區。帶來高政委鳳儀的額穆派遣工作經過報告一件; 又, 第二軍第五團團部 負責幹部同志報告二件, 第二軍 軍部 王德泰 同志, 魏民生 同志 工作通知和 討論信三件, 金日成 同志 報告信 一件。 綜上各信內容, 要旨如下:

    1. 魏同志 西去 到達 敦化附近, 已與王德泰 同志等 會合一處。
    2. 第二軍 拟建立三个師, 第一團爲基幹, 合以遊擊大隊六个中隊 編爲第一師, 以安鳳學爲師長, 周樹東爲政委; 以第二團爲基幹, 改編新參加之各山林反日隊, 編成第二師, 以金日成爲師長, 曹亞範爲政委; 東部隊以第四, 五團爲基幹, 合以史部編爲第三師, 史是否參加師長人選及師部負責幹部, 由東方面決定之。

    ..........

    史는 사충항(史忠恒)을 가리키며, 史部는 사충항의 부대를 말함. 위와는 달리 실제로는 제2단을 기간으로 제2사가 아니라 제3사가 만들어지고, 김일성은 3사장이 됨. 제2사는 제4, 5단을 기간으로 사충항의 부대까지 포함하여 편성하고, 사충항이 사장이 됨.

    당시 북한 김일성은 2사 1단 (3단)의 참모장 또는 제3연장(連長)으로 사장으로 승진할만한 직급에 있지도 않았다. 사장으로 승진하려면 최소한 단장이나 사(師)의 참모장 또는 정치위원 급은 되어야 한다. 1사 1단의 단장이었던 안봉학(安鳳學)이 1사장으로 승진한 것이 좋은 예이다. 아직 단장 급도 되지 못한 북한 김일성의 사장 승진은 불가능하며, 3사장이 된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다.

    그가 속해있던 방진성이 단장인 2사 1단 (3단)은 개편 후 2사 5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는 아마도 2사의 5단장으로 타이틀이 바뀐 방진성 휘하에 그대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장이었던 방진성도 사장으로 승진하지 못했는데 그 아래 제3연장에 불과했던 북한 김일성이 2군 1사의 2단을 기반으로 다른 병력들을 추가 영입하여 신설되어 별 연고도 없는 3사의 사장으로 벼락승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936년 7월 1군과 2군을 묶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一路軍)이 편성되면서 2군의 1, 2, 3사는 1군의 1, 2, 3사와 구분하기 위해 4, 5, 6사로 명칭을 바꾼다. 2군 제3사장이었던 김일성은 1로군 제6사장(師長)이 된다.[136]

    이후 1937년말까지 대부분 기록에는 3사장(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활동만 나오며, 하위 직급의 북한 김일성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3사장(6사장)을 바로 북한 김일성으로 조작해 놓았기 때문에, 이 기간에 그의 실제 행적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서대숙(徐大肅)은 제5사장이 중국인 방진성(方振聲)이었다고 했으나[137]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사충항(史忠恒)이었고, 방진성은 그 아래 제5단의 단장(團長)이었다.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에 대한 신문 보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장 김일성 부대의 활동에 대한 국내 신문들의 보도는 1936년 8월부터 그가 전사하는 1937년말까지 이어진다.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 상당히 자주 보도되었다. 최초 보도 몇 가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김일성의 출신지가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라고 하여 북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르다. 석양리(石陽里)는 석우리(石隅里)의 착오로 보인다.
    현상금 양정우(楊靖宇) 20만원, 김일성(金日成) 2천원
    납치되었다 귀환한 사람의 보고에 의하면 김일성의 근거지에 밀정(密偵) 또는 부호(富豪) 인질 17명, 약탈한 소 340두, 말 8두 보유
    金日成の 根據地 用意周到な 冬籠り支度

    【惠山鎭】 十七道溝泉水屯地 移住 朝鮮人金寶泰(三六)は去月二十九日 金日成一味から日本官憲の密偵の 嫌疑で拉致され、十九道溝奧黒瞎子の根據地に一週間拘禁訊問を受け、五日放還されたが八日その筋に左の如く賊狀を報告した
    黑瞎子奥の丸太小屋は相當大きく三ヶ所に別れてゐるが何れも 百名以上の匪賊がをりその建物の周圍は塹壕を繞らし又拘禁所は目下官憲の密偵或は富豪の人質として十七名が監禁され、目下畜牛三百四十頭、馬八頭を所有し牛は撫松方面へ移してゐる

    김일성의 근거지 용의주도한 겨울 준비
    【혜산진】17도구 천수둔지(泉水屯地) 이주 조선인 김보태(金寶泰, 36)는 지난달 29일 김일성 일당으로부터 일본 관헌의 밀정 혐의로 납치되어 19도구 오지(奧地) 흑할자(黒瞎子)의 근거지에서 일주일간 구금신문을 받고 5일 석방되었는데 8일 그 줄거리에 다음과 같이 적상(賊狀)을 보고했다.
    흑할자(黒瞎子) 안쪽의 통나무집은 상당히 크게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백 명 이상의 비적을 수용하고 있고, 그 건물의 주위는 참호(塹壕)로 둘러싸고 있다. 구금소는 현재 관헌의 밀정(密偵) 또는 부호(富豪)의 인질로 17명이 감금되어 있고, 현재 축우(소) 340 마리, 말 8 마리를 소유하고, 소는 무송(撫松) 방면으로 옮기고 있다.

    흑할자(黒瞎子) : "검은 곰"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흑할자구(黑瞎子沟)의 밀영(密营)을 말함.[138] 이 밀영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6사장 김일성부대의 것이다. 1983년에 나온 북한의 백과전서에서는 백두산 밀영지는 곰의 골(회샤즈거우, 黑瞎子沟)일대에 꾸려졌다고 했다. 그랬던 그 백두산 밀영이 1994년에 나온 김일성 회고록 제5권에 이르러 ‘곰의 골’(黑瞎子溝)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국내의 ‘소백수 골’에 위치했다고 바뀌었다. 북한은 이 백두산 소백수골에 가짜 밀영을 세우고 김정일의 출생지로 조작했다.[139]

    북한 김일성은 이 6사장 김일성이 자신과는 명백히 다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인 것처럼 역사조작을 해 왔다.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피살지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 인근 지도. 왼쪽 하단은 근래에 찍은 피살지 인근의 위성사진 지도이다.
    만주국 봉천(奉天, 瀋陽)에서 간행되던 신문 성경시보(盛京時報) 1937년 11월 18일자 2면의 6사장 김일성 피살 기사.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만주군 제1군관구 보병 제7단(步兵 第七團)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6사장 김일성 관련 사건

    아래 사건들도 북한 주장과 달리 북한 김일성이 아닌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하였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기자회견에서 엉뚱하게도 이홍광이 주도한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이것은 그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백한 것으로 그가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그는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사건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자신이 그 사건의 주역인양 행세하며 그것을 자신의 가장 빛나는 항일전공으로 날조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은 간삼봉 전투의 일본군 지휘관이 김석원(金錫源, 1893~1978) 소좌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김석원의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 하와이 대학 교수였던 서대숙도 북한의 주장을 따라 김석원이 일제시대에 김일성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다.[140] 브루스 커밍스는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심지어 이승만이 당시 김일성과 맞서 싸운 김석원3.8선을 지키는 장군으로 임명하자 김일성이 분개하여 그를 잡겠다고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이 역사를 왜곡한다.[141][142] 그러나 간삼봉 전투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일뿐만 아니라, 김석원은 일제시대에 6사장이든 제2방면군장이든 김일성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그는 1948년 12월 말 국군장교가 되었지만 10개월도 못된 1949년 10월 초에 예편하여 6.25 개전 당시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김일성의 남침 전쟁 때문에 1950년 7월 초에 다시 군에 복귀하게 되지만 일본식 전술교리에 익숙한 그는 미군과의 마찰 때문에 그다지 중용되지 못했다.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출신지도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隣面)으로 북한 김일성과 다르다.

    그가 갑산군 출신으로 갑산군 일대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 때 인근 지역 사람들을 상당수 포섭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조선말조차 서툴고 국내에 지인도 없으며 나이도 젊은 북한 김일성이라면 아무 연고도 없는 갑산 일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혜산사건 연루자 상당수는 북한 김일성보다 나이가 연상이며, 천도교 도정 박인진(朴寅鎭, 1887~1939) 같은 사람은 심지어 그의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1926)보다 연장자이다.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의 부하였다?

    이명영은 일찌기 1974년에 만주서 김형직의 친구로 그 아들 김성주, 김영주 형제도 알았던 이도일의 증언을 통해 북한 김일성이 동생 김영주와 함께 6사장 김일성의 부대에 부하로 있었다고 밝힌바 있지만, 그의 주장은 대부분 배척당해 왔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라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 293-294.
    그런데 이들 [김일성 부대] 대원중에 북한의 김성주(金聖柱, 김일성)와 그의 동생 김영주(金英柱)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서 확인된다. 안도현(安圖縣) 치안대장에 이도선(李道善, 경좌)이란 한인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이른바 공비(共匪)토벌에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이다. 1937년 초에 이도선은 공비토벌에 나갔다가 김영주(金英柱)란 한 소년을 체포했다. 부모와 사별한 데다가 가운데형 김철주(金哲柱)도 일찍 죽고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만주 땅에서 의지할 데는 없고 해서 김일성(金日成, 6사장) 부대에 있는 큰형 김성주(金聖柱)를 따라 소년대원으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이도선(李道善)의 형 이도일(李道日, 부산 거주)씨는 안도현(安圖縣)의 조선인회 회장으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전에 무송(撫松)에서 살 때 김성주(金聖柱)·영주(英柱)의 아버지와 친구사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인회에서는 체포 또는 투항한 한인들을 인수하여 안전정착을 도모해 주는 일을 맡고 있을 때라 이도일씨는 친구의 나이 어린 아들 김영주를 불쌍타하여 자기 집에 두었었다. 이도일씨의 아들 이벽오(李碧梧, 51·용산 거주)씨도 김영주(金英柱)와 같이 몇 해를 한 집에서 살았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제2군이 2개사에서 3개사로 늘어나고 김일성이 3사 사장으로 임명될 당시 북한 김일성이 속했던 방진성(方振聲)이 단장인 2군의 3단(또는 2사 1단)은 2사의 5단으로 명칭이 바뀐다. 따라서 방진성의 부하였던 북한 김일성은 3사가 아닌 2사 5단 소속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1936년 7월 1군과 2군을 합해 항일연군 제1로군이 편성될 때 2군의 1, 2, 3사가 4, 5, 6사로 명칭이 바뀌므로 북한 김일성은 6사 아닌 5사 소속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방진성은 1937년 4월 항일연군(抗聯) 제2군(第二軍) 독립려(獨立旅) 여장(旅長)을 맡게 되므로 북한 김일성도 이 독립려에 속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에 북한 김일성의 정확한 소속과 활동을 알려주는 당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나?

    1937년 6월 4일 밤에 일어난 보천보 사건은 북한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전공으로 오늘날 남북한 모두에서 선전되고 있으며, 그 사건 때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간행하여[145]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146] 그러나 실제로는 보천보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곧 잊혀졌고,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일도 없으며,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1930년대에 만주에서 무장단이 조선 국경을 침범한 사건은 부지기수로 많았으며, 그 중 보천보 사건과 비슷한 규모의 큰 사건으로 당시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크게 보도한 사건도 아래와 같이 여럿 있었지만 곧 잊혀졌다. 일제시대에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는 일은 흔히 있던 일로 대단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당시는 대다수 인구가 농어촌에 살 때라 교통도 불편하여 신문배달도 며칠씩 걸렸으며,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147] 구독자 수도 제한적이라 호외에 난 사건이 일시에 전국적으로 알려지던 시절도 아니다.

    • 독산사건 : 1933년 6월 5일 혜산진(惠山鎭) 경찰서 독산(獨山) 주재소 경관과 만주 장백현(長白縣) 마적(馬賊)과의 교전
    • 토성습격사건 : 1934년 1월 22일 평북 자성군 장토면 토성동(慈城郡 長土面 土城洞)을 습격
    • 동흥사건 : 1935년 2월 13일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을 습격

    이런 유사한 사건 때도 각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곧 잊혀졌으며 이를 아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전무하다. 마찬가지로 보천보 사건도 곧 잊혀졌지만,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바람에 새롭게 알려지게된 것이다. 중국의 항일연군 문헌에도 보천보 사건은 나오지도 않으며, 북한 김일성 본인이 1942년에 쓴 항련제1로군 약사나[133] 소련군 복무시절에 쓴 각종 이력서에도[89] 보천보 사건은 언급조차 되지 않아 김일성 본인이나 항일연군 측에서도 이 사건을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해방 직후 간행된 김일성 관련 북한 문헌에 보천보 사건이 처음 나오는 때는 1946년 5.1절 이다.[148]

    심지어는 해방 후 평양에 온 북한 김일성 본인도 보천보 사건은 알지도 못하고, 기자회견에서 엉뚱하게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는 이런 거짓말을 하여 자신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고 실토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몰랐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그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해방 직후 남한 좌익지나 북한 문헌의 김일성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 기사에도 보천보 사건을 거론하는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149] 이는 해방 당시에 보천보 사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실증적 증거이다. 남한에서는 이 사건이 잊혀진 후 해방 직후는 물론이고 1960년대까지도 거의 거론되는 일이 없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북한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처음 시작되면서 학자들 사이에 이 사건이 거론되기 시작했고, 대중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1990년대에 와서의 일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공으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영향을 받은 탓도 있을 것이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거론하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

    북한에 김일성이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보천보 사건도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잊혀졌을 것이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소련군이 데려온 33세의 진지첸(김일성) 대위가 1920년대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자 가짜라 했을 뿐, 그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고 봐서 가짜라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다수 연구자들은 김일성이 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6사장 김일성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는 쟁점을 슬쩍 옮겨 대중을 속이는 사기 논법이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1970년대에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중에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아직도 시비가 선명히 가려지지 않고 있으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은 그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은 당연하다. 이제 밝혀진 바로는 그는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것은 맞지만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동명의 다른 사람이며, 그는 남의 전공을 가로챘다.

    보천보 사건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말은[146]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한 거짓 신화에 불과하다. 1990년대에 동아일보의 호외 실물이 발굴되어 알려지기 전에는 그런 호외가 간행된 줄도 몰랐으며, 그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해방전에도 유명했다고 주장할 핑계거리를 찾다보니 사건 직후부터 잊혀져 알지도 못했던 호외를 갑자기 끌어와 내세우며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속여온 것이다. 사건 당시 조선일보도 호외를 간행했지만 완전히 잊혀져 있는 것처럼 동아일보 호외도 실상은 마찬가지였는데, 단지 동아일보 호외만 나중에 실물이 발굴되자 북한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조작하는 핑계로 이용되고 있다.

    소련잡지 《태평양 (1937년 2호)》의 김일성 관련 논문

    소련잡지 《태평양 (1937년 2호, 4월~6월)》의 아래 기사에 ‘김니첸(Ким-Ни-чен)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북한 김일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일 소련군 관계자들이 이 기사를 보았는지도 의문이지만, 88여단 시절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으로 표기되었으므로 봤더라도 동일인에 대한 정보로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V. Rappoport, “Partisan movement in the regions of North Korea”, Pacific Ocean, No. 2 (M., 1937), p. 161-174.
    В. Раппопорт, “Партизанское движение в районах Северной Кореи”, Тихий океан, № 2 (М., 1937), с. 161-174.[150]
    Там же(ibid), с. 171-172. 이 논문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김니첸(Ким-Ни-чен)으로 표기되었다.

    브루스 커밍스도 소련잡지 《태평양 (1937년 4월~6월)》의 김일성 관련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름이 Kim-Ni-Chen으로 표기되어 있다니 김일성을 지칭하는 것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맞더라도 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6사장 김일성이다. 6사장 김일성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거나 소련의 적군사관학교를 나왔다는 등의 말이 있을 정도로 소련에 상당한 연고가 있던 사람이므로[151] 이런 기사가 나왔을 것같다.

    • Bruce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브루스 커밍스 저, 김주환 역, 《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단정의 수립 1945-1947. 上, 下》 (서울 : 靑史, 1986) pp.85~86
    [번역본 pp.85~86] 한국 내에서 김일성의 공훈에 대한 보도는 1938년 11월호 '삼천리'라는 잡지에 나타났는데 스칼라피노와 이정식 교수의 책에는 '김일성은 게릴라 전투의 경험을 갖고 있는 27세의 건장한 청년'이라고 씌어 있다.128) 서대숙 교수는 1941년 이전에 김일성은 소련인들에게 알려진 바 없었다고 주장했다.129) 그러나 소련 잡지 '태평양' (Tikhii Okean)에는 김일성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논문에서 라파폿(V. Rappaport)은 김일성을 아주 호의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온 일본담당국의 죠지 맥큔(George McCune)[152]의 요청에 따라,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중반에 미국무성 내에서 이 논문이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번역된 논문에서 김일성은 영어로 'Kim-Ni-Chen'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김일성의 일본식 발음이 Kim-Nichi-Sei인데 이것을 러시아말로 옮겨 적은 것을 다시 영어로 옮기면 'Kim-Ni-Chen'이다)130)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일성 (Kim-Ni-Chen) 부대는 특히 뛰어났다. 김일성부대 사람들은 모두 매우 용감했다. 이 부대가 거의 모든 위험한 작전들을 수행하였다. 이 부대의 행동은 항상 계획적이고 재빨랐으며 정확했다. 이 부대는 두대의 중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과의 격렬한 전투에도 버틸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김일성부대를 잡기 위해 1년이나 쫓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이 논문은 또한 1935년 전투에서 사망한 '이홍광' (李紅光)이라는 한국인 여성게릴라 지도자의 훌륭한 업적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131) 이리하여 김일성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항일투사였다.

    128) Scalapino and Lee, Communism in Korea, p.220n [n은 각주(note)를 의미],
    129)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 p.292.
    130) V. Rappaport, "Guerrilla Movement in the Northern Korean Regions," Tikhii Okean [Pacific Ocean] (April-June 1937), translation in RG 353, Records of 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and the State-Army-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101," 1945, box no, 21,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에는 이 논문이 각주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밝혀져 있지 않다. 나는 종전 바로 직전의 미국무성 외교문서에서 김일성에 관한 내용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조지 맥큔(George McCune)은 항복접수계획에 관여했으며 국무성 일본국 직원 중에서 유일한 한국문제 전문가였다. 1945~1950년까지의 미국무성 문서 및 CIA 문서는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없다. 그 문서를 볼 수 있다면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김일성에 대한 정보가 당국에 의해 이용되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Tikhii Okean (태평양)이란 잡지는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모스크바에 있는 '세계정치경제연구소 태평양분과'에서 발행되었다. Thomas T. Hammond에 따르면 “그 잡지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극동에 관한 마지막 소련잡지"였다 (Hammond, ed, Soviet Foreign Relations and World Commun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5] p.751).

    131)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 p.284n를 보시오.[153]

    이홍광(李紅光)은 1935년 동흥사건 당시 여자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헛소문이며, 실제로는 남자이다. 그를 여자라 한 것은 서대숙의 착오이며, 태평양 잡지 필자도 착오를 범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실확인을 거치지 않은 브루스 커밍스도 잘못이 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같은 소련 잡지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
    이렇게 보면 보천보작전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중 연합군의 힘으로 행해진 일련의 작전의 하나였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 작전의 보 도는 김일성의 이름을 조선 국내에 분명히 각인시켰던 것이었다.

    김일성의 이름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리게 된 것은 전년인 36년 9월부터였다. ‘공산군 김일성 일대(一隊)’라든가, '동북인민혁명군 김일성 일대'라든가, '김일성 일파 공비’라고 씌어 왔다.112) 그래서 이 사건이 일어 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의 이름은 어렴풋이나마 소련에까지도 알려져 「북조선구역에서의 빨치산 운동」이라는 논문을 쓴 소련의 연구자는 이홍광과 함께 김일성의 부대가 특기할 만하다고 쓰고 있다. “이 부대의 전사는 극히 용감하다. 모든 가장 위험한 작전은 바로 이 부대가 하고 있다. 이 부대는 행동을 언제나 신중하고 신속하게, 또 정확하게 하고 있다. ... 이미 1년 이상 일본군의 김일성부대 사냥이 성과없이 계속되고 있다."113) 이런 식으로 이름이 알려져오다가 조선 내부에서 이루어진 작전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이 강렬했던 것이다.

    112) 이청원, 「김일성장군 빨찌산투쟁의 력사적 의의」, (『력사제문제』 제2집, 1948), 7면, 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5권, 61~64면
    113) 라뽀뽈뜨 (V. Rappoport), 「북조선구역에서의 빨찌산운동」, 『태평양(Тихий океан)』, 1937년 2호, 모스끄바, 171~72면

    와다 하루키가 말하는 보천보 사건 무렵 소련에까지 알려진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와다는 시종일관 6사장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항일연군의 김일성 이름이 『조선일보』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36년 9월부터가 맞지만, 『동아일보』는 36년 8월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정간 당해 이듬해 37년 6월 3일에야 복간했는데[154] 이튿날 보천보 사건이 일어났다. 와다의 주장과 달리 『동아일보』에 김일성 이름이 난 것은 이 사건 보도가 처음이다. 이 외에도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에도 6사장 김일성에 대한 기사가 1936년 9월부터 실리기 시작했다.

    와다 하루키는 김일성 이름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 그가 소련에까지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는 듯하나, 소련 사람이 이런 신문을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만주의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모스크바 공산대학 등에 유학하거나 소련 극동군 측과 접촉하던 항일연군 인사들을 통해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관련 기사

    《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 및 1938년 11월호

    6사장 김일성 전사 후 다시 나타난 김일성에 의한 혼란

    1937년 11월 13일 6사장 김일성 전사 후에 다시 김일성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이 사람은 1938년 11월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이 된 북한 김일성이다. 이때문에 당시 만주군 관계자나 조선총독부 산하 경찰들은 6사장 김일성이 과연 죽었는지, 죽지 않고 두 김일성이 동일인인지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교통 통신 환경이 열악하고 어디에 어떤 기록이 있는지 알기도 어려워 여러 곳에서 생산된 정보 기록들을 모두 모아서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인 것이 분명한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사정이 당시 기록이나 후일 관계자들의 증언에도 반영되어 두 사람의 신원이 바뀌어 적힌 경우도 나타난다.

    일본이나 만주 군경의 입장에서는 다시 나타난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김일성과 동일인인지 확인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동일인 여부를 면밀히 조사했다는 흔적도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토벌하는 측 입장에서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동일인 여부를 정확히 확인해봐야 그다지 실익도 없고, 다시 나타난 김일성을 또 토벌해야하는 사정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사실확인보다는 토벌에 더 치중하여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던 것같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DB 덕택에 당시 생산된 수많은 정보 기록이 발굴되어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활동 시기인 1937년 말까지의 기록만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6사장을 북한 김일성처럼 기록해 놓은 문건 2 ~ 3건은 모두 6사장 김일성 전사 이후의 것인데, 이런 기록들은 새로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을 이름이 같은 이전의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하여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믿기 힘든 것들이므로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결정적인 근거자료가 될 수는 없다.

    만주군이나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 일본인들이 후일 증언에서 6사장 김일성 전사 후 다시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 때문에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한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1938년 이후 생산된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당시 일본측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6사장 김일성의 전사기록이나 1937년말 이전에 생산된 6사장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수많은 기록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제2방면군장 김일성 출현 후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 잘못 판단한 1939년의 사상휘보 20호의 기록과 1941년의 혜산사건 판결서만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속히 바로 잡혀야 한다.

    1937년 11월 18일자 신경일일신문(新京日日新聞)의 김일성 전사 기사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長春)에서 간행되던 신경일일신문(新京日日新聞) 1937년 11월 18일자의 6사장 김일성 전사 보도기사에는 특이하게 전사한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인 것처럼 나와 있다. 같은 날 조선내의 신문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김일성 전사 기사에 나오는 "36세의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는 신원과는 전혀 다르다.

    북한 김일성의 청소년 시절 이력을 이처럼 자세하고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1940) 정도일 것으로 보이며, 그가 제공한 신원 정보로 추정된다. 6년 징역형을 살다 1936년 7월 가출옥한 이종락은 이후 만주국 협화회(協和會)[155]에도 가입하는 등 변절하게 되는데, 동북항일연군에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김일성이 전사했다고 하자 자신이 잘 아는 북한 김일성인 줄 알고 동명이인의 신원을 잘못 알려준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이종락은 만주국 경찰이 제2방면군장이 된 북한 김일성을 상대로 귀순 공작을 벌일 때, 귀순 협상의 중재인이 되어 1940년 1월 협상차 김일성 부대에 들어갔다가 정보를 알고 들이닥친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에게 붙잡혀 총살 당한다.

    1938년 1월의 김일성 부대 관련 기록

    1937년 11월 13일에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보도가 나간 이듬해 초에도 김일성 부대에 대한 기록과 신문 보도가 있다.

    함남경찰부의 1938년 1월 15일자 기록과 경성일보 1월 18일자 기사에 무송현(撫松縣) 김일성 부대 150명, 장백현(長白縣)에 조국안(曹國安) 부대 150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로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도 1937년 9월경에 전사했고, 6사장 김일성도 11월 13일 전사했으므로, 누군가가 대리 지휘하는 2사와 6사의 잔존부대일 것이다. 중국 문헌과 김일성 회고록에는 2사장 조국안(曹國安)이 1936년말 전사했다고 나오나[156] 이는 고증 오류이고, 신문에는 1937년 8월말까지도 조국안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다 그 이후 보도가 끊어진다.[157]

    1938년 3월 함경북도 경찰부의 김일성 관련 기록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의 1938년 경비관계철에 김일성에 관한 기록이 더러 나온다.

    『警備關係綴(國境ノ部) : 경비관계철(국경의 부)』 昭和十三年(1938년) 警務局 警務課 (관리번호: CJA0002477 / 문서번호: 94) - 국가기록원
    기록물 해제 보기
    p.4 (원본 p.919) : 안도현(安圖縣)에 김일성 잔비(殘匪) 170여명이 있다고 하였다. (잔비(殘匪)는 흔히 두목이 죽고 남은 부하들의 집단을 가리키므로 여기서는 6사장 김일성이 죽고 남은 부하들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1938년 4월의 김일성 부대 출몰 기사

    4월에 다시 김일성 비단(金日成 匪團)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나오므로 그가 전사했다는 것은 오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에서 지휘관이 전사한 후에도 남은 부하들의 부대를 전사한 지휘관의 이름을 따라 그대로 불렀던 경우는 흔하므로 이런 것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1938년 4월 10일 김일성 부대 출현 보도의 경우는 김일성 비(金日成 匪) 150명을 임(林)참모(임수산)가 인솔한 것이라 하였다.

    1936년~1940년 기간 중에 김일성 부대에 관한 신문 보도는 자주 나오는 편이지만 유독 1938년에는 아래 4월 기사 외에는 전혀 없다는 것은 오히려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될 수 있다. 1939년 이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은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으로 북한 김일성이 맞다.

    匪賊이 襲來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년 04월 10일 3면 7단
    八(팔)일 오전 二(이)시 五十(오십)분 김일성 비(金日成 匪) 임(林)참모가 거나린 150명의 비적이...
    東興對岸(동흥대안)에 來襲(내습) 金日成 匪團(김일성 비단), 高地(고지)에서 發砲(발포) 署長引率隊 急出動(서장인솔대 급출동) 1938.04.10 동아일보 2면
    八(팔)일 오전 二(이)시 五十(오십)분 김일성 비(金日成 匪) 임(林)참모의 인솔한 150명의 비적이...
    金日成派來襲으로 六道溝被害莫大 사자가 三명 행방불명도 수명 拉致된 者四十餘名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년 04월 29일 2면 4단
    六道溝の匪禍, 我が卽死三名,行方不明多數, 近來稀有の大被害 경성일보(京城日報) 1938년 04월 29일 2면 4단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02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一巻(A-6-2-0-2_8_1_001)(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7 昭和12年12月20日から昭和13年6月17日
    p. 35 : 1938년 4월 26일 오후 10시 비수 김일성 비단 300명 임강현 6도구 습격 : 위 4월 29일자 신문보도와 같은 사안임.

    1938년 6월 함경남도 경찰부의 김일성 관련 기록

    1938년 『警備關係綴(國境ノ部) : 경비관계철(국경의 부)』에는[158] 혜산사건 이후 국경지역에 침투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막아내고자 함경남도 경찰부에서 실시한 좌담회, 대중강연 등 사상공작 관련 문건들이 나온다. 일부에는 김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생존해 있는 인물이며 신원은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지만 직책은 나오지 않는다. 그를 유명한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은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을 모르고 동일 인물로 여긴 때문일 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 제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 아래 참모 또는 제3연장으로 있었던 북한 김일성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인 1936년 봄 ~ 1937년 말 기간에 행적이 불분명하나, 그의 동향이 1938년 6월 무렵부터 다시 일본측에 포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의 내용은 변은진의 논문에 인용되어 있다.[159]
    p.5 (p.961) : [조선의 독립 문제에 대하여]
    5) 또한 빈핍은 조선만이 아니다. 김일성 일파가 가장 숭상하고 존경하는 러시아 및 중국에서의 빈핍 상황을 설명할 것.

    p.7 (p.963) : [공산주의의 문제에 대해]

    9) 함북의 살부회(殺父會), 살모(殺母)사건

    p.8 (p.964) : [金日成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1) 겨우 27세의 젊은이로서 겨우 보통학교 정도의 교육.
    2) 그는 오랫동안 만주의 僻地를 巡廻하여 時勢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
    3) 그는 조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조선내에 침입하여 무모한 백성의 곡식과 저축한 금품을 강탈하여 私腹을 채우고 있다는 것.
    4) 그의 실력이랬자 겨우 4,5백 남짓의 雜匪로서 日本 軍警에 비교하면 문제가 없어 도저히 일을 이룰 전망이 없다는 것.
    5) 감히 살인·강도의 참학 행위를 하고 그 행위가 국부적(局部的)이라는 것.
    6) 조선의 독립, 공산주의 실현과 같이 荒唐無稽한 言辭를 지껄이며 도저히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것을 기도하고 있음은 畢意·誠見·力量의 결핍을 폭로하는 것으로서 큰 인물은 고사하고 보통 인물도 못되는 과대망상가라는 것.
    국경지방(國境地方) 방공반(防共班) 도경시(道警視) 한동석(韓東錫, 1909~1956)의 강연요지(講演要旨)
    pp.6~7 (원본 pp.989~990)에 김일성에 대해 나옴
    김일성은 27세, 평남 대동군(大同郡) 출신, 서당(書堂) 정도 학력. 영웅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양민을 약탈하는 비적(匪賊)에 지나지 않음.
    (김일성의 출신지가 평남 대동군으로 군단위까지 나오는 첫 기록이며, 북한 김일성의 출신지와 일치한다.)

    1938년 12월 말에 비수(匪首) 김일성이 2명 존재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이 1938년(昭和 13年) 발간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의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임강현(臨江縣, 부하 200 명)과, 무송현(撫松縣, 부하 300 명) 두 곳에 나온다.[160]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1명은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고 (전사후 남은 잔존 부대), 다른 1명은 이후 그와 같은 이름을 쓰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된 것은 1938년 11월의 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1937년 9월말의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장백현(長白縣)에 김일성(金日成)과 최현(崔賢)을 두목으로하는 300명의 비단(匪團), 조국안(曹國安)을 수령으로 하는 150명의 비단이 나와있다.[161] 여기에는 김일성이 한 곳에만 나오며, 조국안과 함께 활동하던 6사장 김일성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동시에 2명 나오는 1938년 12월말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는 1937년 11월 전사한 6사장 김일성에서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넘어가는 과도적 단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상휘보 1939년 9월호의 6사장 김일성 신원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북한 김일성과 유사해 보인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pp.8~9)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여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對岸)에 반거(蟠踞)하는 소위 김일성(金日成) 일파라 칭하는 무장단(武裝團)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제2군(第2軍) 제6사(第6師)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師長), 위민생(魏民生)을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하는 한인(韓人) 중국인(中國人) 혼합의 무장단이다.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

    이 기록을 1977년에 처음 찾아낸 사람은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인데,[162] 그는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종전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이 기록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였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평양에 나타난 그가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아 나온 것으로, 그가 동북항일연군 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이 맞는지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김일성이 가짜라고 한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보천보 사건도, 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소련군 88여단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고 보아서 가짜라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그가 6사장이 맞으니 가짜가 아닌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163][164]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이 사상휘보 기록을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라는 주요 근거로 택하고 있다.[165]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혜산사건(惠山事件) 설명에는[166]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에 실린 혜산사건 보고 부문에는 김일성에 관한 본명, 나이, 출생지, 항일무장투쟁 투신과정 등의 경력이 거의 완전히 파악되어 있어, 과거 일각의 ‘가짜 김일성’ 논란에 대한 명확한 반론의 증거가 되고 있다.

    라고하여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을 뿐만 아니라 진짜가 맞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진짜가 맞다는 근거는 될 수 없으므로 이런 주장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허위 논리이다. 나아가 이 기록이 나온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그가 6사장이 맞다는 근거가 될 수도 없는 잘못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1937년 11월 13일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년여 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이 활동할 시기의 것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독부 검사국 사람들이 서울에 앉아서 더 이상 활동이 없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시기이므로, 이는 당시 알려진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 착각하여 쓴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했으니, 전사했다는 설, 제2방면군장과 같은 사람이라는 설 등 여러가지가 있었을테고, 정확히 어느 것이 맞는지 서울에서 확인하기도 어려우니 동일인이라는 설을 채택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의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기록이라는 것은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는 말에서 드러난다. 간단한 신원기록에 부친도 아닌 모친의 생존여부가 언급된 것은 특이하며, 북한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은 이미 7년전인 1932년 7월에 사망하여, 실제와 맞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말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1939년 당시 일제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귀순공작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래 참고),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을 만주로 데려가서 귀순을 설득하도록 시도했다. 이런 특별한 일이 있었으니, 조모를 모친으로 착각했다면 위와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다. 김일성의 신원정보는 귀순공작에 중재자로 나섰던 김일성의 청소년 시절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1940)과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의 동료 박차석(朴且石, 1909 ~ ?)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이런 일까지 감안하면 위의 기록은 당시 파악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을 동일인으로 잘못 알고 6사장 김일성의 신원으로 적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글자 그대로 2년전 활동이 끊어진 6사장이 아니라 1939년 9월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군장이 북한 김일성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의 활동기간에 작성된 문헌에 나오는 신원기록들과 전혀 다른 신원정보를 그의 활동이 끊어진 2년 뒤에 새로이 알아낸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수많은 증거 기록들은 별 근거도 없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고, 일제 관헌의 기록이라 믿을 수 없다며 무시한다. 하지만 똑같은 일제 관헌의 기록인 이 사상휘보의 기록만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며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북한 김일성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인 확실한 증거라고 한다.

    위의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1939.09.01)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보다 2개월여 전인 1939년 6월 23일자 조선일보 기사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에는 당시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삼장면(三長面) 일대와 두만강 대안 만주 화룡현(和龍縣) 등지에 출몰하던 제2방면군장의 김일성의 신원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신원으로 잘못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당시 무산의 삼장면 경찰들이 알던 정보로 보인다.

    비적들 자신에 그 이름을 뭇는다면 그들은 말하기를 동북항일인민××군(東北抗日人民××軍)이요 그중 김일성 일파는 제육사에 소속되고 김일성 자신이 제육사장(第六師長)이란 직함을 가지고 잇다.

    『그러면』 김일성이란 대개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금년 서른 한 살 전후의 청년으로 일찌기 소연(蘇聯)에 가 『막사과(莫斯科)』 공산대학[167]에 배운 일이 잇다하나 그 진부는 가려낼 방도가 아즉 업다. 그리고 그 성과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말도 미들만한 자료가 업다. 다만 그가 오늘과가치 비단(匪團)의 수령으로 투신하게 된 동기가 그 아버지가 일찌기 기미년(1919년)에 간도에서 총알에 마저 너머진데 잇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보고 잇다.

    1937년 11월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출신이나, 1939년 6월의 위 기사에는 평남 대동군(大同郡) 출신으로 당시 제2방면군장인 북한 김일성의 정보가 약간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일보 오쾌일 기자와 동행했던 경성일보 기자가 쓴 연재기사도 위와 유사한 기술을 하고 있다.

    1년 뒤의 경성일보 기사에도 당시 함북 무산군 삼장면과 대안(對岸) 일대에 출몰하던 제2방면군장인 북한 김일성이 함남 갑산 출신이라 했다.

    이러한 일은 다른 기간에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6사장(함남 갑산군 회린면 출신)과 제2방면군장(평남 대동군 고평면 출신)이 이름이 같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혼동하여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는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하여 조선과 만주에 산재해있는 유관부서들 간에 정보 공유가 어렵던 시절이고, 다양한 기관들이 생산한 정보들을 한 곳에 모아서 비교 검토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므로 동명이인을 동일인으로 착각하는 혼선이 빚어진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이 출현한 1939년 이후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볼만한 기록들은 이처럼 혼동해서 작성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그다지 신뢰성이 없다. 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인 1937년말 이전의 신원기록과 전사(戰死) 기록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런 기록만으로도 그는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임이 충분히 확인된다.

    위의 사상휘보 기록을 근거로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은 모두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한다면 똑같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함남 갑산 출신이라고 한 조선일보나 경성일보 기사를 근거로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은 모두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여러 기록들과 비교해볼 때 이런 기록들은 모두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혼동하여 나온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41년 8월 혜산사건 판결서와 1944년 11월 일본의회 질의응답 자료

    1941년 8월 28일자 함흥지방법원의 혜산사건판결서6사장 김일성의 본명을 김성주(金成柱)로 적은 것이나, 1944년 11월 18일자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질의응답 자료의 김일성 기록도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혼동하여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고, 위의 사상휘보 20호 기록을 참고했을 수도 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혜산사건판결서는 이 사상휘보 기록을 참고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165] 6사장 김일성 아닌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활동할 당시의 이런 기록들은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오인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만주군 출신 일본인들이 펴낸 『만주국군(滿洲國軍)』의 김일성 기록

    만주군 출신 일본인들의 모임인 난성회(蘭星會)가 1970년 간행한 『만주국군(滿洲國軍)』[169][170]에는 만주군의 6사장 김일성 사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난성회(蘭星會)가 1970년 간행한 『만주국군(滿洲國軍)』의 김일성 사살 기록. 6사장 전사 후 다시 김일성이 나타나 전사한 김사령이 김일성인지, 카게무샤(대역)인지, 두 김씨가 별개 인물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6사장을 제2방면군장이라 칭하는 것은 오류이다.
    만주국군 관계자들이 펴낸 『滿洲國軍』이란 책에는 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撫松縣 楊木頂子 (撫松과 安圖의 중간지점)라고 하는 1천미터의 高地 산중에서 부하 약 1백명과 같이 식사를 위해 휴식을 하다가 滿軍步兵 제七團 제一營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八명과 함께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4]. 이 책에는 또 『당시의 전투 상황과 모든 정보로 보아 金日成이 사살된 것은 틀림없었으며 따라서 그후 몇 개월 동안 金日成 부대의 동정은 전혀 감감 무소식이었는데 1938년 봄에 들어서 또 다시 金日成 部隊의 출몰이 현저해진 점으로 보아 사살된 金日成이 진짜 金日成인지 그후 나타난 金日成이 정말 金日成인지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54] 蘭星會編, 『滿洲國軍』 (東京, 滿洲國軍刊行會, 1970) p. 350 및 371

    1937년 11월 13일 전투에서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출신 일본인들도 그 후 다시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 때문에 6사장이 정말로 죽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자들의 김일성 관련 후일 증언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들의 조선 통치 시절에 대한 녹음 증언은 1958년부터 1962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녹음테이프가 2000년 가큐슈인(學習院)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 기탁되어 그해부터 책자로 정리되어 간행된다.[171] 현재 18권까지 간행 완료되었다. 국내에는 국사편찬위원회,[172] 낙성대경제연구소[173] 등이 소장하고 있다.

    未公開資料 朝鮮総督府関係者 録音記録 1-18
    東洋文化研究 第2-19号抜刷 学習院大学東洋文化研究所所蔵 友邦協会・中央日韓協会文庫
    著者 : 監修・宮田節子 / 出版社 : 学習院大学東洋文化研究所 / 刊行年 : 2000-2017

    아래 김일성 관련 증언은 2004년 간행된 5권에 실려있다.

    보천보전투 지휘 `김일성' 진위 여부 진술 엇갈려
    ▲ 무수한 '김일성' 출현
    • (간도총영사관 경찰부장 쓰보에 센지<坪江汕二>의 진술)[174]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이야기는 고하 송진우를 살해한 한현우(韓賢宇)가 쓴 `그의 죄악을 보라'(1953년 萌文社 刊)라는 책 의 `김일성은 가짜다'라는 항목에서 비롯됐다. 이를 본 가마다(鎌田澤一郞)가 `조선 신서ㆍ조선신화'에 쓰면서 진짜처럼 돼 버렸지만 전부 거짓말이다. 나는 김일성이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현지에 있을 당시 만주국 관헌들도 김일성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왜냐하면 옌지(延吉)이나 룽징(龍井)에 있는 부락을 습격했다 후퇴할 때 게릴라 들이 책과 신문을 모두 가져갔다. 그들이 책과 신문을 가져가는 것은 김일성이 읽기 위해서였다. 물론 값나가는 물건과 식량, 무기도 약탈해 갔다. 김일성은 제1선에는 나오지 않은 채 언제나 뒤에서 자료를 읽으면서 공부를 한다는 정보가 만주국 관헌에 들어왔다.
    김일성은 만주사변 전에는 지린(吉林)성 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만주사변 당시에는 옌볜(延邊) 공청 책임자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공산당에 입당해 빨치산을 조 직했다. 처음에는 5-6명이었던 것이 2-3년 후 50-60명으로 늘었고 최전성기에는 150 명 정도 됐다. 이른바 보천보 습격 때는 80명 정도가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산에서 총을 쏘면서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했다.
    보천보 주재소에는 순사가 6명, 그중 3명은 조선인이었고, 빨치산은 맨 먼저 주재소에 총을 쏘았기 때문에 순사들은 일찌감치 도망가 전투고 나발이고 없었다. 모두 털어 달아난 후 오카와(大川) 게이부 이하 37명이 추격했다 십사도구(十四道溝)에서 7명이 중상을 입고 후퇴한 것이 전부다. 대전투가 벌어졌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후 1937년 혜산진에서 중국공산당계의 조국광복회 독립동맹 조선 내 조직사건이 발각된 1차검거에 이어 다음해 5월 2차검거로 장백(長白)현에 있던 근거지가 없어진 데다 만주국의 치안체제가 강화돼 더는 있을 수 없게 되자 김일성은 부하 2-3 명을 끌고 1941년 3월께 소련으로 도망갔다. `김일성전'은 1941년부터 해방 때까지 5년 간을 세 줄 정도로 언급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고만 썼을 뿐 소련으로 도망간 사실은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
    • (함경남도 경찰부장 단케 유타로<丹下郁太郞>의 진술) 김일성은 당시 조선 민족 운동의 영웅이었다. 고등소학교 학생들은 모두 김일성의 이름으로 모였다. 김일성은 민족운동을 하는 이에게 하나님이자 우상이었다. 고등소학교에서는 조선의 신으로 불렸다.
    • (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의 진술) 몇 번이나 김일성을 죽였는지 모른다. 체포한 비적에게 김일성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김일성을 죽인 병사에게 훈장을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 옆 마을에서 또 김일성이 나타났다.
    • (함경북도 경찰부장 쓰쓰이 다케오<筒井竹雄>) 김일성이라는 확증은 없었지만 당시 24-25 세의 청년이 두목인 부대로부터 보천보 습격을 받았다. 추격했지만 작전에 말렸다. 그 부대는 상당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상당한 훈련을 한 부대였다. 그 부대는 능선에서 유인작전을 펼쳤는데 거기에 말려 함경남도에서 큰 피해를 본 적이 있다.
    • (함경북도 경찰부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진술) 보천보사건에서 활약한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조선 민족 운동에서 제1인자일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 보병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조선총독부 측은 그의 전사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정확한 내막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다시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 때문에 혼란을 일으킨 것같다. 조선총독부 산하 경찰 출신 인사들의 김일성에 대한 증언도 혼란스럽고, 정확하지도 않다.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을 동일인으로 보고 있기도 하고, 두 사람의 행적을 뒤섞어서 북한 김일성의 행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쓰보에 센지(坪江汕二)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1953년 간행된 한현우(韓賢宇)의 책에 나오는 것을 가마다 사와이치로(鎌田澤一郞, 1894-1979)가 `조선 신서ㆍ조선신화'에서 이를 받아 쓴 것이 잘못 퍼진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가마다의 『조선신화(朝鮮新話)』는[175] 한현우의 책보다 먼저 1950년에 간행되었으므로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에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이런 책들이 출판되기도 전인 1945년말부터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176] 또 김일성이 책과 신문을 약탈해가서 열심히 읽었다는 말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는 인텔리 6사장 김일성에 해당하는 말로 보이며, 중학 중퇴의 북한 김일성이 학구적이어서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열심히 독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함남 갑산군과 평남 대동군 출신의 두 김일성이 존재

    김일성의 출신지 기록 중에 군(郡) 단위까지 나오는 것들은 "함경남도 갑산군"과 "평안남도 대동군" 2가지로 대별된다. 전국에는 수많은 군(郡)이 있는데도 이 두 가지 외의 다른 군이 거론된 사례는 없다.

    그 중에서도 1937년 11월 13일 6사장 김일성의 전사가 보도되기 이전의 그의 출신지 기록은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혜산진)"으로 나오는 것 4가지 밖에는 없다. 그의 전사 보도가 있은 뒤인 1938년 이후에 출현하는 김일성의 출신지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함경남도 갑산군"으로 기록한 조선일보 또는 경성일보 기사 4건이 있고, 아래와 같은 "평안남도 대동군"으로 기록한 3건이 있다.

    이런 상황은 6사장 김일성은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이고, 그 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김일성(제2방면군장으로 북한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일 때만 설명이 된다. 6사장 김일성 전사 후에는 새로 나타난 김일성을 같은 사람으로 오인한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제2방면군장인 북한 김일성의 출신지를 종전대로 "함경남도 갑산군"으로 적기도 하고(조선일보 또는 경성일보 기사 4건),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를 새로 나타난 김일성의 출신지 정보를 따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으로 혼동해서 적기도 한 것이다(사상휘보, 귀족원 질의응답 자료).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대로 사상휘보만 보고 6사장 김일성이 대동군 고평면 출신의 북한 김일성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함남 갑산군 출신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누구인가?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이후의 기록들에 6사장 김일성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출신지가 거의 모두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은 출신지가 다른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혼동했을 경우에나 나올 수 있으며, 두 사람이 실제로 동일인이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김일성의 출신지가 이처럼 전국의 수많은 군(郡)과 면(面) 중에서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두 가지로 특정되는 기록들만 다수 있고, 다른 군면은 전혀 없다는 것은 이 두 지역 출신의 두 김일성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이라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출신으로 기록한 모든 문헌은 모두 오류라야 하는데, 전국의 수많은 군면들 중에서 하필 이런 특정한 군과 면을 택하여 동일한 오류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 1938년 11월 ~ 1940년 10월

    동북항일연군 1로군은 1936년 가을 2군 군장 왕덕태가 전사하고, 1937년말까지 5개사의 사장들이 전사하거나 일본측에 투항한다. 1938년 6월말 유일하게 남았던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최측근인 제1사장 정빈(程斌)[178]마저 일본에 투항해버리자, 기밀 유출 우려와 그 동안의 대규모 병력과 지휘관 손실 때문에 1938년 7월에 편제를 축소 개편하게 된다. 종전의 1, 2군과 6개사 구분을 없애고, 제1, 2, 3 방면군(方面軍)을 두게되는데, 사실상 6개사 체제가 3개사 체제로 축소된 것이다.[179]

    1938년 7월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에 방진성(方振聲, 1907~1940.01)이 임명되고, 이어 8월에 제1방면군장(第一方面軍長) 조아범(曹亞範, 1911~1940),[180] 11월 25일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181][182] 이듬해 1939년 7월에 제3방면군장(第三方面軍長) 진한장(陳翰章, 1913~1940)이 임명되었다.[183][184]

    여기서 조아범(曹亞範)은 위에서 본대로 1936년 봄 2군의 3사(나중에 6사)가 출범할 때 사장(師長) 김일성 아래 정치위원이었는데,[185] 제2방면군장 김일성보다 먼저 제1방면군장에 임명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아범은 6사장 김일성보다는 서열이 아래지만 제2방면군장 김일성보다 서열이 앞서므로 6사장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동일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당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하지 않고 생존해 있었다면 그보다 앞서 조아범이 제1방면군장으로 임명될 수는 없다.

    방진성(方振聲)도 2군의 3사가 출범할 때는 3단의 단장에서 2사의 5단장(명칭만 바뀜)으로 3사(6사) 사장이 된 김일성보다는 서열이 아래였으나 위와 같이 1로군 편제가 개편될 때는 1938년 7월 1로군 총사령부를 호위하는 경위려장(警衛旅長)이 되어 11월에 제2방면군장이 된 김일성보다 서열이 높다는 것도 두 김일성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제2방면군장이 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앞에서 나온 2사 1단장(3단장) 방진성 아래에서 참모 또는 제3연장(連長)으로 있었던 북한 김일성이다.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41년 3월 27일자에는 1로군이 제1, 2, 3방면군으로 개편된 것은 1939년 봄과 여름 사이라 하였다.[186]

    一九三九年春夏决定:
    四、五师编成三方面军。
    六师编成二方面军。
    一军一、二、三师编成一方面军③。

    ③ 指东北抗日联军第一路军。

    즉 제1로군(第一路军)의 2군 4사(師)와 5사로 제3방면군, 6사(師)로 제2방면군을 편성하고 1군 1, 2, 3사로 제1방면군을 편성했다고 하였다. 북한 김일성이 군장이 된 제2방면군은 보천보 사건 주역으로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부대 제6사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전사 후에 다시 나타나는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1939년 ~ 1940년 기록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에서 본대로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金一成, 金一星, 金一善, 金日善, 金日成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다가 제2방면군장이 되면서 비교적 일관되게 전사한 6사장 김일성(金日成)과 같은 金日成으로 나온다. 이는 항일연군 지도부에서도 6사장 김일성이 죽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같은 이름을 쓰도록 허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대다수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투항하여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들 사기진작을 위해서나 일본측을 속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계속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위장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한 후에 쓴 각종 이력서나 자필 문건들에 마치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거짓으로 써 놓았다. 그는 해방 후 북한으로 오기 전에도 이미 가짜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에 임명된 것은 1938년 11월 25일임.
    霍燎原等 編著, 『東北抗日聯軍軍史叢書: 東北抗日聯軍 第二軍』, 黑龍江人民出版社, 2005 pp.174~175[187]
    霍燎原, 于文藻, 吕永华 著, 《东北抗日联军第二军》, 黑龙江人民出版社, 1987年

    장백현(長白縣) 출몰 : 1938년 말 ~ 1939년 초

    1938년 말 ~ 1939년 초 기간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는 함경남도 신갈파(新乫坡), 호인(好仁), 혜산진(惠山鎭)과 압록강 대안(對岸) 만주 장백현(長白縣) 일대에서 출몰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측은 김일성이란 이름 때문에 제2방면군을 아직도 제6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갈파진(新乫坡鎭) 대안 장백현(長白縣) 가류포(嘉柳浦)에서 만군(滿軍)과 교전
    1938년말부터 1939년 초까지 제2방면군 김일성 부대의 활동에 대해 2회, 3회, 6회에 약간 언급이 있고, 9회에 다수의 약탈 및 교전 기록이 있다. 아쉽게도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지만, 당시의 김일성은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이며, 북한 김일성이 맞다.

    반절구(半截溝) 전투 : 1939년 5월 3일

    김일성 부대는 1939년 5월 초 함경남도의 압록강 맞은 편인 장백현(長白縣)에 머물며 5월 3일 밤에는 반절구(半截溝)를 습격하여 식량 등을 약탈하고 주민 40여명을 살상, 20명을 납치하였다. 북한은 이를 반절구전투라 부르며 대단한 것처럼 선전한다. 반절구는 오늘날 장백 조선족 자치현(長白朝鲜族自治縣)의 금화향(金華鄕)인데[188], 1987년 7월에 이름이 바뀌었다.[189]

    4시간 교화(四時間 交火), 사십여명 살상(四十餘名 殺傷), 식량등(食糧等)을 약탈도주(掠奪逃走)
    총탄(銃彈)은 조선(朝鮮)까지 비래(飛來), 김일성비(金日成匪), 함남대안(咸南對岸) 내습후보(來襲後報)
    咸南對岸の匪襲被害 1939년 05월 06일 (5월 5일 석간) 2면 5단

    반절구를 습격하던 이 때에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이 부상을 당한다. 김일성은 김혜순 간호를 위해 박정숙과 호위병을 붙여 밀림속 산채에 숨어 요양하게 하고, 자신은 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의 대안(對岸) 안도현(安圖縣) 쪽으로 이동한다. 김혜순(金惠順)은 요양 중에 이듬해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귀순한다.

    무산(茂山)지구 전투 : 1939년 5 ~ 6월

    반절구 전투 직후 김일성 부대는 간도(間島)의 화룡현(和龍縣) 홍기하(紅旗河)[190] 인근으로 옮겨와 머물며 두만강의 맞은 편 조선쪽의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삼장면(三長面) 지역에도 자주 침입하여 산골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김일성 부대는 5월 중순까지 함경남도 대안 장백현(長白縣) 쪽에 있다가 5월 20일 경에는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 대안 화룡현(和龍縣) 쪽으로 이동함.

    1939년 6월 조선일보, 경성일보 등의 기자단이 무산군 삼장면 일대의 국경 경비 상황을 답사, 취재하고 연재기사를 썼는데, 김일성 부대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경성일보는 1년 후인 1940년 6월에도 같은 지역을 답사한 연재기사를 실었다.

    김일성, 최현 등의 부대가 만주와 조선 국경 두만강을 넘나들며 양민을 약탈하는 내용이 다수 나온다. 김일성이 승리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1939년 5월 22~23일의 소위 "무산지구전투"의 내막이다.

    위 기사들에는 1937년 11월 전사가 보도된 6사장 김일성과 1939 ~ 40년 당시 함경북도 무산 및 두만강 대안 만주 화룡현 일대에 출몰하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히 식별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4가지 기사 모두 김일성의 출신지로 함경남도 갑산(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을 거론하지만 평안도(북한 김일성의 출신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본대로 같은 시기의 사상휘보 1939년 9월호는 6사장 김일성의 출생지를 당시 제2방면군장으로 활동 중인 북한 김일성의 출생지인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로 적어놓았다.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생존해서 활동 중인 북한 김일성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 빚어진 혼선이지만,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가 함남 갑산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카사마 보고서(笠間 報告書) -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함경북도 나남(羅南)의 19사단(師團)[191] 예하 73연대 소속 카사마 테츠유키(笠間哲行)[192][193] 중위(中尉)가 1939년 6월 24일부터 7월 3일까지 총 131명의 중대 병력을 이끌고 김일성 부대가 출몰하는 무산군 삼장면(茂山郡 三長面) 일대를 경비행군(警備行軍)하면서 일자별 부대 이동 상황과 수집한 정보들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카사마(笠間)는 소위(少尉) 시절인 1937년 7월부터 10월 초까지 무산군 삼장면의 농사동(農事洞)에서 근무한 전력이 있어 삼장면 일대 상황을 일찍부터 잘 아는 사람이다.[194][195] 보고서에는 당시 김일성의 직책이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이라고 정확히 밝히고 있으나, 그의 신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카사마 중대는 나남서 무산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고 무산(茂山) 역에서부터 삼장면(三長面) 일대까지 행군으로 왕복했다.

    (이 보고서는 뒷부분이 누락되어 있고, 마지막 2 page는 중복되어 있다. JACAR에 문의하니 현존 원본의 상태가 그렇다고 한다.)
    카사마(笠間) 보고서 전체 내용을 text로 입력한 pdf 파일

    6개로 분할되어 올라있는 이 보고서의 아래 마지막 파일에는 김일성 부대가 5월말부터 7월 초까지 무산 삼장면 일대와 두만강 맞은 편 만주 안도현(安圖縣), 화룡현(和龍縣) 지역에 출몰하면서 양민을 약탈하고 납치한 상세한 내역이 일자별로 나온다. 당시 김일성이 지휘하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조직표, 김일성 부대가 보낸 주민들에게 물품을 요구하는 협박장도 나와 있다. 만주쪽 피해자도 대부분 이주한 조선인들이었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1441100、笠間史料 昭和14年度第一次警備行軍部隊行動詳報(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3 行軍地方一般の状況
    p.3 :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편성표
    p.4 ~ p.11: 5월 22일부터 7월 1일까지 일자별 비적 침습(侵襲) 상황 : 김일성 부대의 약탈 일지.
    p.12~13 : 김일성 부대가 마을 둔장(屯長)에게 보낸 협박장
    p.15 : 관민(官民) 경비상황 : 마을이 깊은 산골에 흩어져 있어 경찰이 일일이 지켜주지 못하므로 비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마을별로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경찰과 협력하고 있다. 양민 약탈과 납치를 일삼는 김일성은 과연 위대한 항일영웅이고, 이에 대비해 자위수단을 강구하는 주민들은 일제의 주구(走狗)인가?

    아래는 카사마(笠間)가 소위 시절인 1937년 7월 ~ 10월 초까지 무산군 삼장면 농사동(茂山郡 三長面 農事洞)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나남(羅南)의 사단본부로 귀환하면서 올린 보고서이다. 김일성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농사동 일대 사정을 아는데는 도움이 된다.

    標題:附表・附図 : 농사동을 중심으로한 방위 시설 배치도가 있음

    중위로 승진한 후에 1938년 4월 성진 정차장 급양위원(城津停車場給養委員)을 맡아 올린 보고서도 있다.

    김일성 귀순 공작 관련 기록

    만주국 치안부에서 관할한 김일성 귀순공작에는 김일성의 조모 리보익(李寶益, 1876~1959),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 삼촌 김형권의 동료였던 박차석(朴且石, 1909 ~ ?) 등이 동원되었다. 만주국 치안부 이사관(독찰관)이었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은 당시 귀순공작을 주도했던 인물로 1949년 4월 반민특위에서 당시 일에 대해 진술했다.

    귀순공작은 1939년~1940년 1월 간에 진행되었으며, 노조에(野副) 토벌대에 쫓겨 존망의 위기에 몰리던 김일성도 귀순할 결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귀순 후의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상관인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에게 보고가 들어가게 된다. 1940년 1월 귀순 설득을 위해 김일성 부대에 들어갔던 이종락이 갑자기 들이닥친 양정우에게 붙잡혀 총살 당하면서 귀순공작은 실패로 돌아간다. 한달 뒤인 2월 23일 양정우(楊靖宇) 본인도 전사한다.[196]

    김일성 회고록에도 귀순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 (1937년 11월 ~ 1938년 11월) / 7. 리보익 할머니

    홍기하전투 (紅旗河戰鬪) - 1940년 3월 25일

    중국 화룡현(和龍縣) 홍기하(紅旗河)에서[190]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부대와 교전한 쪽은 흔히 주장하는 일본군이 아니라 마에다 다케시(前田武市)가 이끌던 만주국 경찰대였다. 일본측 기록에 경찰 58명과 인부 17명이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전사한 부대원들은 거의 대다수가 만주로 이주한 간도(間島) 지역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197][198] 간도지역은 전인구의 70~80%가 조선인이었으므로 전투에 참여한 의용자위단(義勇自衛團) 성격의 신선대(神選隊)도 대부분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

    • 홍기하 전투에서의 전사자 대부분은 조선인
    홍기하 전투에서의 만주경찰 측 전사자 수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와다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 pp.231~232
    관계자의 말로는 마에다 부대에서 살아남은 자는 20여 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20명이 전사한 셈이다.25)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 경찰 대 145명 중 “일본계가 9명이고 일부 만주계도 있었으나 나머지는 거의가 조선계였다."26)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생존자가 말한 바에 의하면 김일성 부대 쪽에서는 “총을 버리고 손을 들어라. 명령에 따르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라는 소리를 목이 쉬도록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마에다 부대의 조선인 경찰관은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

    25) 같은 책(『警友」 康德 8年 5月號), 88면, 간도경찰대 본부장의 보고에서는 유격대측의 전사자는 31명인데 비해 토벌대측의 전사자는 59명, 행방불명 9명, 전상자 27명으로 되어 있다. 『現代史資料』 30, 422면, 여기에서는 50명이 무사한 것으로 되어 있어 '중대 전멸’이라는 인상과는 너무 어긋난다.
    26) 『警友」 康德 8年 5月號, 100면

    간도 지역은 원래 김일성 등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근거지였으며, 이들이 식량과 군수품 조달을 위해 행했던 수많은 양민 약탈의 피해자도 간도지역의 조선인들이었다. 간도의 일본 영사관은 이들 세칭 공비(共匪)들에 의한 조선인 피해와 보호대책에 대한 보고서를 매달 상순, 중순, 하순 세 차례씩 작성하여 올리고 있다.[199] 간도의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박해하기로는 일본인들보다 공비들이 오히려 더 심했던 것이다. 공비들에 의해 상습적으로 피해를 당하던 조선인들이 자구책으로 의용자위단(義勇自衛團)을 만들었고, 명칭을 신선대(神選隊)로 바꾸었다. 이들을 일제의 주구라고 비판하지만, 공비들에 의한 피해를 방어하기 위한 자구책인 면이 크다. 홍기하 전투란 따지고 보면 중국공산당에 붙은 동북항일연군김일성 등 조선인들과 이들에 맞서 만주국에 협력하는 조선인들 간의 전투였던 셈이다.

    김일성이 속했던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조선인들이 인구의 70~80%를 차지했던 간도에 기반을 둔 부대였고, 소속원들도 조선인이 다수였다. 이들 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들은 일제시대에는 간도의 조선인들을 약탈해서 생존하다가, 해방 후에는 소련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실권을 장악해서 북한주민들을 약탈해 생존하고 있다. 민생단 사건 등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에게는 꼼짝없이 당하면서 같은 조선인들에 대해서만 일제보다 수백배 더한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간도의 조선인들은 거의 대부분 만주국에 협력하며 자신들을 약탈하는 항일연군 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인 오늘날의 조선족들은 항일연군을 영웅으로 떠받들고, 항일연군을 적대하던 자신들의 선조를 일제의 주구(走狗)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중공당 산하의 항일연군은 역사적으로 항일군 아닌 비적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 마에다 다케시(前田武市)의 경력 : 마에다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군인 아닌 만주국 경찰이었다.[200]
    警察隊巡官으로 新京遊動警察隊勤務로써 入滿하얏다가 首都警察廳大典警備司令部記錄係長, 圖們國境警察隊特務股長, 汪淸大家營森林警察隊首席指揮官, 圖們警察署警務股長, 和龍縣南坪警察署長을 歷任하고 康德六年(1939년) 一月에 三道溝警察署長에 榮轉되여 今日에 이르렀다.
    신경(新京)은 당시 만주국 수도였던 장춘(長春)이다.
    和龍鎮舊名「三道溝」或「忠信場」 (和龙镇旧名「三道沟」或「忠信场」)[201]

    서대숙은 마에다(前田)를 일본 토벌군 대장이라 하고, 김일성이 일본 경찰 58명을 죽였다고 했으나,[202] 실제로는 마에다는 만주국 경찰 신분이었고, 당시 죽은 사람들 대다수는 조선인 신선대원(자위단원)이었다. 전과면에서는 보천보 사건보다 훨씬 더 큰 전투라고 할 수 있지만 북한에서 그만큼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은 상대가 일본 아닌 만주국 경찰인데다 전사자도 대부분 조선인인 탓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내 신문에 전혀 보도 되지도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점도 있고, 장소도 국내가 아닌 만주라서 유적지를 강제 답사시키며 우상화 교육자료로 이용하기가 힘든 이유도 있을 것이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2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2 昭和15年3月23日から昭和15年3月30日
    p.50 간도성내비적토벌상황에 관한건(間島省内匪賊討伐状況ニ関スル件) : 1940년 3월 28일 - 홍기하전투 조금 나옴.
    在琿春 領事 다키야마 야스시지로(瀧山靖次郞)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3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3 昭和15年4月5日から昭和15年4月19日
    間島省内匪賊討伐状況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p.42부터 홍기하 전투 - 마에다 부대장 및 58명이 전사하고, 인부 18명 사망.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4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4 昭和15年4月20日から昭和15年4月23日 : 가장 상세한 일본측 기록임.
    p.3 [琿領情機密 第一一四號] 昭和15年4月 20日 "匪賊情報々告ニ関スル件"에 홍기하전투에 관한 상세 정보 나옴.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위 문건에는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가 다수 있으며, 아래 도서에 수록된 것이 읽기에 편하다.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419~424
    보고서에 전위(前衛)로 나오는 박신선대(朴神選隊)는 화룡현 삼도구(和龍縣 三道溝)에 주둔했던 박승벽(朴承璧, 1890~1946)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화룡현 삼도구(和龍縣 三道溝)에 주둔중인 박승벽(朴承璧)이 지휘하는 부대인 신선대 박부대(神仙隊朴部隊).
    신선대는 항일연군 부대의 잦은 약탈행위에 대응하여 각지 주민들이 자구책으로 조직한 의용자위단(義勇自衛團) 성격의 부대이다. 이들을 과연 일제의 주구(走狗)라며 욕만 할 수 있겠는가?
    • 김일성 부대는 홍기하 전투 며칠 전인 3월 12일에도 양민 140명을 납치한 전력이 있다.
    三千里 緊急 揭示板, 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拉致된 二十五名 無事히 돌아오다 삼천리 제12권 제4호 1940년 04월 01일
    三千里 緊急 揭示板, 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拉致된 二十五名 無事히 돌아오다
    12일 末明 咸北 對岸인 大馬鹿溝에서 匪首 金日成의 인솔인 匪團에 납치되었던 140명 중 25명(내지인 1명, 朝鮮人 13명, 滿人 9명, 白系 露人 2명)은 大馬鹿溝 본부에서 서북방 5리의 133 고지에서 노영하고 13일 오전 6시에 석방되어 동 11시경 귀환하였다.
    석방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匪團은 150명으로 되고 그 중 무장한 부녀자 7, 8명도 섞기여 있다는 사실인데 이 국경 치안이 긴박되여 부락민은 피난하고 경계 중이다.
    김일성 부대는 이런 식으로 간도지역에서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를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용자위단(신선대)같은 부대가 생겨난 것도 이상하지 않다.

    홍기하의 두만강 대안 조선 쪽은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삼장면(三長面)인데, 김일성 부대는 이 지역에도 수시로 침입하여 산골마을 주민들을 약탈하고, 납치도 하며, 죽이기도 했다. 경찰이 산골에 흩어져 있는 마을을 일일이 다 지켜주지 못하므로 이곳에도 주민 자위단이 조직되어 있었고,[203][204] 자연히 일제경찰과 협력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자구책을 강구한 이들을 일제의 주구(走狗)라며 비판할 수 있겠는가?

    주민들을 상대로 비적질 하는 집단이 문제인가, 이를 막으려는 쪽이 문제인가? 상습적으로 조선인 주민들을 약탈, 납치, 살해하고 다니는 김일성 부대와 같은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이 과연 조선독립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김일성 비단 내부상황(金日成匪團內部狀況)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이 1939년 8월 초 김일성 부대에 들여보낸 첩자 지순옥(池順玉)이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김일성 부대의 내부 상황 : 1940년 7월 26일자 훈춘 영사의 보고서로 별 대단한 내용은 없다.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는 당시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대사(関東軍司令官兼駐満洲国大使)였다.
    강덕상(姜徳相) 編, 『現代史資料.30, 朝鮮 (6) : 共産主義運動 (2) 抗日パルチザン』 (東京 : みすず書房, 1976) pp.443~451 에도 수록.

    지순옥은 위에 나온대로 김일성 부대원 강흥석(姜興錫)의 처였는데, 남편을 찾아 들어간 것으로 꾸몄다. 남편 강흥석은 마에다(前田)부대와 교전 중에 흉부에 중상을 입고 모 산중의 병원에서 치료중이라 했다. 김일성 부대와 마에다 중대의 교전(홍기하 전투)은 1940년 3월 25일에 있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밀영으로 남편을 찾아온 지순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부대에 들어온 그녀의 행동이 수상해서 금방 첩자인 것이 드러났지만, 사실을 말하고 특별히 나쁜 행위를 하지않은데다 부하의 처였으므로 당분간 머물다 가게했다고 했다. 회고록에는 지순옥의 일을 김일성이 포용력 있고 인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로 포장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위 훈춘 영사의 보고서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지순옥이 해방 후인 1956년 김일성을 찾아왔다고 하므로 단순한 일제 첩자였다기 보다는 이중 스파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 제21장 대부대 선회 작전의 총성 (1939년 7월 ~ 1940년 3월) / 1. 밀영에 찾아온 녀인

    훈춘 영사의 보고에는 김일성 회고록과 달리 지순옥이 김일성 부대에서 첩자 신원이 탄로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 회고록의 관련 내용은 작가들이 이 보고서를 참고한 후 쓴 것이므로 실제가 아닌 창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김일성 회고록 8권에도 위 문서의 일부(pp.39~40 [pp.7~8])가 인용되어 있다.

    주체 28(1939)년 말에 국제당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연락원들을 보낸 사실을 두고 일제의 관헌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강덕6년(1939년) 10월 11일 김일성비가 화룡현 삼도구 서북쪽 침봉 밀림속에 있을 때 공비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권총을 휴대한 러시아인 8명이 조선인 통역 두 사람과 함께 김일성을 찾아와서 중요담화를 했다. 그때 중요간부이외에는 누구도 곁에 접근시키지 않고 약 10일간 머물러 있은 다음 김일성비단 가운데서 허약자 12 명을 데리고 떠나간 사실이 있다. 그 러시아인은 쏘련에서 연락원으로 온 사람들이라 하며...상세한 것은 명확치 않으나 직접 쏘련에서 중요한 사명을 띠고 연락을 온 것이 아닌가고 보아진다.≫≪훈춘영사 기우찌의 보고, 소화15년(1940년) 7월 26 일≫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 p.29

    국제당은 코민테른을 말하며, 김일성 부대에 러시아인 연락원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인들이 김일성 부대의 허약자 12명을 데리고 떠났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들은 오케안스카야(Okeanskaya)의 군용 요양원(military sanatorium)에 입원하였을 것 같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궤멸

    아래 링크 참고 :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아래 링크 참고 :

    김일성 부대등 만주의 빨치산들이 양민을 상대로 수많은 약탈을 자행하고 다닌 신문기사와 기록들이 남아있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이 해방 후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북한의 핵심 권력을 장악하여 지금까지 통치해온 과정은 주민을 약탈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빨치산 시절의 행태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소련군 시절

    만주에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은 1939년 ~ 1941년 초 기간에 모두 소련으로 도피한다. 북한 김일성은 훈춘(琿春) 일대에서 토벌에 쫓기다[205] 직속상관인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갓 결혼한 아내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206][207][208].

    김일성과 소련 월경을 동행하였던 서순옥은 월경 전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209]

    “1940년 8월에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은 소련으로 향하여 떠났다. 소련 땅에 들어서기 전에 훈춘의 어느 산꼭대기에서 김일성김정숙의 혼례를 하였는데 혁명가를 부르며 오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 유격대 전사들은 소련땅에 들어선 다음 김일성 동지가 강위룡과 다른 한 동무를 파견하여 소련 변방 전사들에게 체포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체포된 다음에 정황을 소련 당조직에 알리자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체포되어 땅굴 감옥에 감금되었다.”341
    341 박창욱 교수 및 권립 교수 인터뷰;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 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현실 제12권 (한국역사연구회, 1994.06) p. 183.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야영, Север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А»)과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 하마탄(蛤蟆塘,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야영, юж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В») 두 곳에 분산 수용된다. 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210]이, 남야영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에 사령부를 둔 연해주군단[211]이 각각 관할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하마탄(蛤蟆塘,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에 들어가는데,[212] 그곳에서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213][214][215][216]


    《주보중전(周保中傳)》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217]

    항일연군(抗日聯軍) 대원들은 임시로 설치된 남북야영(南北野營)에 갈라져 주둔하고 있었다. 북야영(北野營, A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북방(北方) 75㎞ 떨어진 흑룡강변(黑龍江邊, 아무르강변) 비야츠크(中國名 費雅斯克)란 마을에 설치했으며 한인(韓人)으로서는 강신태(姜信太, 강건)·이경호(李京鎬) 등이 여기에 배치되어 임시당부(臨時黨部)의 서기(書記)와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맡고 있었다.[註 022] 한편 남야영(南野營, B야영)은 울라지오스토크(블라디보스토크)와 울라스노프(보로실로프, 지금의 우스리스크, 中國名 雙城子) 사이의 작은 기차역 부근 하마탄(蛤螞塘)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안길(安吉)·박덕산(朴德山, 김일[金一])·김윤호(金潤浩)·최현(崔賢) 등 한인(韓人)들도 군(軍) 및 당부(黨部)의 요직을 내정(內定)받고 있었다.[註 023]

    [註 022] 劉文新·李毓卿, 《周保中傳》 (哈爾濱: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p.266
    [註 023] 위와 같음.
    • 남야영(南野營, B 야영) 위치 및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대한 자세한 고증은 아래를 참고하라.
    남야영은 보로실로프 (오늘날 우수리스크) 근교의 하마탄(현재의 라즈돌노예) 마을 철로와 기차역의 서편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218] 블라디보스톡 인근에 있었다는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야영학교가 남야영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케안스카야 기차역의 서편은 바다이므로 거기에 남야영이 있었을 수는 없다. 오케안스카야에는 항일연군 부상자와 환자들을 수용하는 요양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219][220] 김일성은 부상자도 환자도 아니었으므로 이곳과는 무관하다.

    블라디보스톡 근교 오케안스카야에는 1933년에 처음 설립된 군용 요양소(military sanatorium)가 있고 온천(spa)도 있다고 한다. 병원시설도 같이 있으므로 이곳에 항일연군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Okeanskaya Sanatorium에서 1974년 11월 23일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군축 정상회담이 열렸다.

    오케안스카야 일대는 해안가를 따라 좁은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철로와 대로가 지나고 있어 비밀을 요하는 항일연군을 수용한 부대가 있기 어렵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어서 부대 정보도 유출되기 쉬운 곳이다.

    다만 남야영이 있었던 하마탄(라즈돌노예)과 부상병을 수용한 요양소가 있는 오케안스카야 사이의 거리는(60 km 가량) 북야영까지의 거리(700km 가량)에 비해 얼마되지 않으므로 두 곳을 모두 통칭해서 남야영이라 불렀을 가능성은 있을 것같다.

    Tsar's mansions: Primorye residents are discussing the "palace" in the suburbs of Vladivostok
    Санаторий «Океанский»
    Okeanskaya Sanatorium은 오케안스카야 역보다는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한 정거장 더 간 Sanatornaya (Санаторная) 역에서 더 가깝다.
    Background on the Okeanskaya Sanatorium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소련과 중국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증언도 있다.

    《김일성, 안길, 서철이 왕신림에게 올린 보고서 - 항일연군 제1로군 정황과 문제에 관하여 (金日成, 安吉, 徐哲 給王新林的報告 - 關于抗聯第一路軍情況和對問題的答複)》: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60 pp.95~105。및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pp.789~795.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동향/연구보고서,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pp.314~317 에 수록.
    여기에는 제1방면군장은 누구인지 불상(不詳)이라 하여 조아범(曹亞範, 1911~1940)인 줄 모르고 있다. 이 문서의 작성자 김일성(金日成)이 과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이 맞는지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1로군의 핵심 지휘관 중 한 명인 제2방면군장이 제1방면군장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러시아어 번역본
    Доклад Цзин Жичэна и других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Наньманьского партийного комитета КПК, Хабаровск, 1.01.1941 // РГАСПИ. Ф. 514. Оп.1. Д.1041. Л.2-8 ЭЛЕКТРОННАЯ БИБЛИОТЕКА ИСТОРИЧЕСКИХ ДОКУМЕНТОВ (ELECTRONIC LIBRARY OF HISTORICAL DOCUMENTS)
    이것은 김일성(Цзин Жичэна), 안길, 서철이 중공당 남만성위(南滿省委) 대표로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伯力会议)에 참석하면서 작성한 보고서라 한다.[221][222]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대해서는 일본측 정보기록에도 나온다 [哈府匪首會議].[223]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는 1941년 1월~3월 기간에 열렸고, 회의 끝무렵인 3월에 왕신림(王新林)이란 이름의 소련군측 대표자가 바뀌었다.[224]

    왕신림(王新林)동북항일연군의 소련 수용 문제를 다루던 소련 극동전선군 요인의 중국식 암호명으로 두 사람이 있었다. 위 보고서를 받은 첫번째 왕신림은 극동전선군 내무부장(內務部長) 바실리 류쉔코(Василия Люшенко, Vasily Lyushenko, 瓦西里 留森科) 소장이다. 왕신림(王新林)은 와실리(Vasily, 瓦西里)의 음을 차용한 이름이다.[225][226] 김일성 회고록에는 극동전선군 정보부장 류쉔코 장령이라 나온다.[227] 바실리 류쉔코에 이어 두번째 왕신림은 동북항일연군의 소련망명 문제를 타결짓고, 88여단의 창설과 운영을 관장한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Naum Sorkin, 索尔金, 1899~1980) 소장으로 1941년 3월 극동전선군에 부임했다.[228]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발굴] 김일성 보증인 이청산 찾았다 주간조선 2558호 2019.05.20
    김일성이 상관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소련으로 월경해 넘어왔다는 것은 1941년 3월12일 저우바오중(周保中, 항일연군 2로군 총지휘)이 웨이정민(魏拯民. 항일연군 1로군 정치위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 편지는 김일성이 소만(蘇滿) 국경을 사전 승인없이 넘은 것에 대해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위증민을 찾으러 만주로 파견나가는 김일성에게 들려 보낸 것이다.[207]
    『그 어떤 곤란과 원인이 있든 김일성.이준산(伊俊山) 두 동지 소속 부대원들이 소련 국경을 넘은 것은 오류다. 이 오류가 비록 전반적 혁명 입장이 동요되었거나 총적 방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제1로군 총부대를 이탈하고 유격대가 투쟁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을 포기한 것이다. 또 전반 환경을 이해하지 않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곤란을 극복할 방법을 더 많이 생각지 않고 기회주의적 성격인 월경 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과 그 부하들 및 당간부들이 각성하고 그 오류를 비록 승인하기는 했지만 기율상에서 김일성 동지 등에게 적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적당한 처분을 주기 바란다.』

    《周保中、金策給魏拯民的信》(1941年3月12日),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61卷』, (吉林人民出版社, 1988) p.107.
    《周保中, 金策关于来X城商讨东北党和游击运动等问题给魏拯民的信》(1941 年 3月 12 日), 『周保中抗日救国文集』,吉林大学出版社,1996年10月
    하지만 김일성에 대한 처벌 권한을 가진 1로군 총사령대행 위증민은 김일성이 만주로 출발하기 1달여전인 1941년 3월 8일에 사망하여, 김일성은 처벌을 모면한다.
    •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이 체결되어 소련으로 넘어간 항일연군 세력의 반일활동은 불가능해짐.[229][230][231]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와 조선 침공으로 이 조약은 파기됨.
    • 김일성이 1941년 9월 30일자로 주보중(周保中)과 김책(金策)에게 올린 만주 정찰활동 결과 보고서
    주보중, 김책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서한 (1941년 9월 30일, 번역문) : 동북지역조선인항일력사사료집 /김우종 주필; 원인산, 림영만 부주필; (모단강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5), 제10권 pp.266~274.
    정주진, <김일성의 소련군 편입 직후 만주 정찰활동 결과 보고서> 국가관리브리프 16호,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2017년 1월 26일
    중국어 원문 : 『金日成給周保中, 金策的信』 (1941.9.30.),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編,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1999, p.819
    • 1942년 김일성 자필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주보중의 지시로 김일성이 직접 쓴 이 기록에는 조선독립이란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으므로 김일성이 당시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했다고 볼 아무 근거가 없다.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투쟁 전과라는 보천보 사건조차 나오지 않는다.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주보중은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사령으로,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부하였던 김일성의 직속 상관은 아니었으나, 소련으로 넘어가서는 88여단장으로 직속상관이었다. 이 책은 소련에 넘어간 후 김일성의 행적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기(后记)에 적힌 말로 보아 김일성 관련 민감한 부분은 간행시 상당히 손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p.843 후기(后记) "考虑日记是 公开出版、故某些内容 进行了审愼的技术处理。(일기가 공개 간행되는 점을 고려하여 일부 내용은 기술적 처리를 했다.)"
    스탈린과 김일성. 1/ 가브릴 코로트코프 지음 서울 : 동아일보사, 1992 - 국립중앙도서관
    스탈린과 김일성. 2/ 가브릴 코로트코프 지음 서울 : 동아일보사, 1993 - 국립중앙도서관
    88여단 시절 김일성과 관련한 문서와 해설이 많음.
    (第. 88. 国. 际. 特. 别. 旅. 중국어 번역도 같이 있음.)
    Gennady Konstantinov, Special International 88th Separate Rifle Brigade of the Far Eastern Front
    - Khabarovsk: Priamurskiye Vedomosti, 2015. - 239 p. : illustration, portrait, fax; 25 cm; ISBN 978-5-8003-0350-6
    Dedicated to the 70th anniversary of the victory of the Soviet and Chinese people in World War II
    Посвящается:70-летию победы советского и китайского народов во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е
    谨以此书献给苏联和中国人民在第二次世界大战中取得胜利70周年

    김일성이 소련 시절 농사를 지었다는 증언

    초대 김일성대 부총장 박일(朴一)의 증언[232]
    金의 행적과 관련, 朴씨는 "金은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일제(日帝)와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金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도망쳐 빨치산에 가담했으나 싸울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朴씨에 따르면 金은 42년 겨울 일제의 공격기간동안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소비에트 수비대에 의해 다른 30여명과 함께 브야트카 마을에서 억류됐었다.

    朴은 이어 "金은 軍계급도 없었으며 농부였다.그가 단순한 농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자 모든 것이 거짓말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소련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는 박일의 말은 좀 과장되었다.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남야영 또는 88여단에서 부대에 필요한 주부식 조달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88여단 출신자들이나 인근 주민들도 증언하지만, 그러나 신분은 소련 군인이지 농부라고 부를 수는 없다.

    [p.5] 김일성 부대는 처음 국경을 월경하다가 국경수비대에게 몽땅 체포되어 블라지보스또크에 수용소에 감금되여 있다가 중공당이하 주보중 여단장이 보증을 서고 석방식혔으며, 자기 부대에 편입 식혔다. 1940년도에 아직 주보중 부대에 편입되기 전에 김일성 부대는 블라지보쓰또크 주변 오께안쓰크에서 채소 농사를 짛었다고 주보중 부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김창국은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88여단에서 근무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정찰부국장을 지냈고, 6.25 때 부상을 당해 소련으로 돌아갔다. 당시 정찰국장은 최원이었는데, 1958년 무렵 숙청 당했다.
    본사취재팀, 하바로프스크 현지 확인 / "41년출생 유라 로 불려" 주민들 기억 / 당시건물 식당뿐 내년 철거설
    주민 쉬미코프 바벨씨(88)는 "당시 줄 하나와 별 4개가 있는 견장(대위계급)을 단 까비딴 김일성이 가족및 조선-중국인-러시아인등으로 편성된 군인 2백여명과 함께 마을에 들어와 관사를 지은뒤 돼지를 키우고 채소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북한 김일성의 소련군 시절 자필 문건에 나오는 경력

    아래 두 문건은 위에서 언급했던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자필로 쓴 것인데, 자신의 경력이 나온다. ×××로 된 곳은 원래 金日成 이름이 있던 곳이나, 중국측에서 자료집을 간행할 때에 이름을 삭제하고 남긴 표식이다. 두 문건 모두에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6사장이었던 것처럼 써 놓아 이때부터 경력 조작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도 된다.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89] 1942년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133]
    [問]: 何時, 何地和在何軍隊中 負过[過]務 擔任什麽職務和在誰的指揮之下

    [答]: 在未參加游擊隊 前1932年春 曾由中共黨東滿特委 童昌榮指示之下加入救國軍(王德林部隊) 在該隊任宣傳員之職

    [問]: 何時在何地入在什麽情形下加入中共 加入那個組織和誰的証人
    [答]: 1931年在東北奉天省安圖縣加入中共組織 由中共靑工作 [当軍] 加入中共東滿黨安圖區 保証人李靑山

    [問]: 是否遭受过[過] 日本滿洲國及國民黨的逮捕和追尋 何時在何地及怎樣得到的自由
    [答]: 1929年曾被國民黨的逮捕在吉林 但經五个月工夫無任何 [口供] 及証據及後援人保証及請願結果釋放

    [問]: 是誰派到滿洲作黨和游擊隊的工作 何時 已作了 多少時候在那一聯軍內和 擔任过[過]什麽職務
    [答]: 中共黨東滿特委派到游擊隊工作 至現在在第二軍 曾任过[過] 汪淸反日游擊隊 大隊政治委員 第三團參謀長政治委員 第六師師長 第一路軍 第二方面軍指揮之職務.

    一九三五年春季,我軍爲擴大新的遊擊區,首先由三團四、五連,四團二連組成遠征隊,×××同志負責向寧安、穆棱等區活動。

    當年秋冬季,日匪軍大規模的"討伐"我遊擊區時,我軍爲要順利地沖破敵人之包圍,並擴展我實力起見,我軍全部放棄了舊遊擊區,三、四兩團向寧安、穆棱、額穆、依蘭、方正等方向前進活動,....

    第二獨立師創立時組織狀況:
    獨立師師長朱鎮,政治部主任王德泰。
    第三團團長方振聲,政委×××。人員共百六十餘名,共分五個連。武裝步槍一百五十支,手槍十餘支。

    第二軍創立時組織狀況:
    第二軍軍長王德泰,政委魏民生(即魏拯民),政治部主任李學忠,參謀長劉漢興。
    第三團團長方振聲,政委×××。人員共二百名。武裝槍一百八十支。

    第一路軍成立以前,抗日聯軍第二軍成立時(一九三六年三月)組織狀況及活動區:
    軍長王德泰,政委魏民生,主任李學忠。
    第三師師長×××,政委曹亞範。

    抗日聯軍第一路軍時期(一九三六--一九三八)
    第二軍軍長王德泰,政委魏民生,政治主任全光。
    第六師師長×××,參謀長林水山。人員共五百餘名。活動區:朝鮮、長白、臨江、安圖、和龍。

    왕청반일유격대대 정치위원, 제3단 참모장과 정치위원, 제6사장, 제2방면군장을 역임했다고 했으나 제6사장 경력은 남의 것을 도용한 것이다. 1935년 가을과 겨울 기간에 북만에서 5군과 혼성부대 편성을 주도한 사람이 북한 김일성 자신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6사장 김일성이다. 또 그는 제3단 단장 방진성 아래에서 정치위원, 제3사장(제6사장), 제2방면군장을 역임했다고 했다고 하나, 제3사장(제6사장) 경력은 남의 것을 도용한 것이다.

    제2군 제2사의 제1, 2단을 제1사의 제1, 2단과 구분하기 쉽게 3, 4단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따라서 "2군의 3단 = 2군 2사 1단"임.) 김일성은 자신이 제6사장이 되기 직전 경력이 방진성(方振聲)이 단장(團長)인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단의 참모장과 정치위원을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단장도 못된 그 아래 하위 직책에서 곧 바로 사장(師長)의 자리로 승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대참모 정도의 지위에서 중대장이나 대대참모를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대대장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가 단장(중대장급)이나 사(師, 대대급)의 참모장 또는 정치위원을 지냈다면 그보다 하위 직책을 쓰면서 이를 기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같은 때 제1사장(후일 4사장)이 된 안봉학은 제1사 제1단장에서 승진하였지만, 북한 김일성은 단장급이 되지 못했으로므 사장이 될 수 없는 위치였다. 그의 상관 방진성 3단장도 사장이 되지 못했는데 그 부하가 사장이 될 수는 없다. 제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이며, 1937년말 전사했다. 이후 그는 전사한 선배 지휘관의 경력을 도용하고 있다.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NKVD 비밀 요원이 되어 북한 지도자로 발탁

    88여단에서 진지첸(김일성) 대위는 표면적으로는 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NKVD (KGB의 전신) 비밀요원으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상관인 극동군 정찰국장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이러한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유출된 그루시코의 전문이 북한 김일성의 KGB 요원 전력 입증
    KGB 제1국의 제3과장 빅토르 그루시코가 1978년 4월 20일 KGB 홍콩지부로 발송한 전문에 김일성88여단 시절 대위로 복무하면서 동시에 KGB 전신 NKVD 요원이었다고 나온다. 그루시코는 1991년 초 KGB의 2인자인 제1부의장까지 올랐으나, 8월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대하여 KGB 수뇌부가 주도한 보수파 쿠데타에 가담했다 옐친에 의해 쿠데타가 진압되면서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KGB도 된서리를 맞고, 기구가 대폭 축소되며, 명칭도 바뀌게 된다.

    지도자 김일성에 대한 심사와 스탈린의 낙점

    • 극동군 사령부의 김일성에 대한 면접 심사
    심사위원 : 제2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와 극동군 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
    1.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1, 2권)≫ (동아일보사, 1993) 1권 pp.175~176.
    2.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3.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⑤ 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닷컴 2004-09-12

    극동군 사령부에서 올린 김일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 스탈린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다.

    1. 1945년 9월 초 스탈린의 김일성 지도자 발탁에 대한 증언
    2.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사, 1992년, 1993년) 하권 pp.202 ~ 212.
    3.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71 ~ 76.

    지도자 김일성에 대한 박헌영의 이의 제기로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 김일성박헌영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준다.

    적기훈장 수여 관련 문서

    • 1945년 8월 29일 적기훈장 수여 관련 문서[233]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서던 날 가슴에 달고 나온 적기 훈장의 수여 관련 기록이다.

    상습적인 거짓말로 자신의 경력을 조작해서 선전

    김일성은 자신이 적기훈장을 받게된 경위에 대해 한재덕(韓載德, 1911~1970)에게 엄청나게 부풀려서 거짓말을 했고, 그것을 사실로 믿은 한재덕이 이를 신문기사로도 내고 서울의 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퍼뜨려 1945년 12월 남한의 신문에까지 실렸다.

    (민족문학사연구소 권호별 보기에서 열람가)
    [각주 25] 한재덕의 구술을 취재한 형식으로 작성된 기사 「讚揚할 國家업다고 스元帥가 勳章을 受與」(조선인민보, 1945.12.15)에서는“赤旗勳章은 日本帝國主義打倒를 目標로 누구보다도 長時間鬪爭을 繼續해온 金日成 將軍의 功績을 스타-린 元帥가 알고 金將軍을 모스코바에다 친히 불러 「金同志의 功은 比할 수 없이 큰 것인데 그에 對하야 感謝한다는 말 한마디 주는 國家조차 없으니 내가 그 代身 이 赤旗勳章으로 功績을 찬양한다」고 盛大한 授與式 席上에서 스타-린 元帥로부터 表彰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후 남한에 귀순하게 된 한재덕은 1960년대 초반 동아일보에 연재한 회고담에서 이에 대해 정반대의 태도로 서술한다. 즉 북에서 자신의 기사에도 쓰고 기자들에게도 유포한 이 적기훈장에 대한 내용은 평양시민중대회 당시 김일성에게 문의해 그에게 직접 들었던 대답이었고 그것을 그대로 믿고 보도한 것이었는데 “그 후 알고 보니 이것은 보통 ‘赤旗훈장’이라는 것이었다. ‘赤旗’훈장이란 ‘소련’에서 제二차대전 ‘대독 대일전쟁’에 참전한 장병에게는 거의 누구나 준(대수롭지 않은) 수준 낮은 훈장의 한가지였다”라는 것이다.
    한재덕, 「김일성을 고발한다」(10회), 『동아일보』, 1962.5.13.

    위의 조선인민보와 유사한 내용의 기사가 서울신문 1945년 12월 28일자 2면에도 실렸다.

    한재덕이 김일성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의 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북한 대표로 와서 헛소문을 퍼뜨리게 된 경위는 아래에 나온다.

    적기훈장 수여경위에 대한 거짓말 외에도 북한 김일성은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인 1941년 1월에 작성한 이력서에도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인 것처럼 거짓말을 적어 놓았다. 하지만 그는 6사장 김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1945년 12월의 기자회견에서도 보천보 사건을 몰라서 자신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을 주도했다고 가당치 않은 거짓말을 했다.[234] 자신이 뱉어놓은 이 거짓말이 그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처럼 그가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하는 것은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과대망상증의 발로일 것이다. 평소 이런 사람이니 해방 후 평양에 와서 거짓으로 김일성 장군 행세한 것도 그다지 놀랄 일은 못 된다.

    김일성이 조선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들

    김일성은 만주에서 비적질과 구분하기 힘든 항일투쟁을 하다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무려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해방될 때까지 목숨걸고 투쟁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는 항일투사의 말석에도 끼워주기 힘든 사람이다. 그의 소련군 시기에 국내의 조선인들은 전쟁통에 전체 일본 통치 기간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만주 항일연군 시절에는 일본이 패망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라도 되기를 원해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족 여영준(呂英俊)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일본이 패망하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라도 시켜주기를 원했다.[235][236]

    “한번은 김일성(김성주)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 정위,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왜놈들과 싸우느라 산속에서 고생하는데, 왜놈들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은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러자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안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했으니 최소한 안도현장쯤은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 주변에 모여앉아, ‘그럼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 위수사령관을 하마.’라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는 김일성도 북조선(북한)에 돌아가 이렇게 나라를 세울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66]

    [66] 취재, 여영준(呂英俊) : 조선인, 항일연군 생존자, 취재지 연길, 1986, 1988~1989, 1993, 1996.

    이런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의식 구조는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만주의 안도현장 자리 정도나 하나 하고싶어 일본군이나 만주군과 싸운 것이지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다. 해방되면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항일연군 내의 다른 조선인들도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237]

    소련서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

    만주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은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강연을 직접 들었던 탈북자의 증언이다.[238]

    김일성이 1941년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의 연해주 지방으로 도주해 소련군 혼성부대 88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습니다. 소련군에서 곽에 든 담배를 공급받게 되면서부터 김일성은 곰방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리을설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의 전우들이라고 하는 김책이나 최현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곰방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방 후 김일성이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리을설의 이야기였습니다.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리을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 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김일성이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조국이 분단되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오늘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봉건 통치는 없었으리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행들을 다시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련 국방성 전사(戰史) 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던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239]

    진지첸이 자신의 생애 중 15년을 투자했던 ‘빨치산 전(戰)’은 지금 상태에서는 스탈린에게도 모택동에게도 필요치 않았다. 소련 극동전선으로 된 제88국제여단은 그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막 군사적기 훈장을 받은 육군대위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군대의 집단 동원 해제가 시작되면서 매우 많은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계속하느냐 ‘시민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육군대위 진치첸은 실망했다. 제88여단은 재편성돼야 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채소밭에서 야채가꾸기를 계속하거나 보잘것없는 공무원이 되고싶지 않았다. 물론 당의 직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것이 ‘상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같이 소련군에서 출세할만한 자격 요건도 갖추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그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북한 전문가 란코프(Andrei Lankov)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240][241]

    많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매우 명백히 다음과 같이 내다보고 있었다.
    즉 군대나 군사 아카데미에서 복무 후, 연대 또는 사단 지휘관이 되는 것 등으로, 역사가 조금만 다른데로 흘렀어도 후일 모스크바의 어디선가에 소련군 퇴역 대령 혹은 소장 출신인 김일성이 존재했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 유라(김정일)는 지금쯤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민주주의 러시아'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조직이 주도하는 많은 군중이 모인 가두행진에 열성적으로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자필 문건들에 조선독립에 대한 말은 나오지도 않아

    김일성 1942년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133]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중공당원으로 만주 적화를 위해 투쟁한 것이다.

    이외의 서신이나 보고서 등 다른 자필 문건들에도 조선독립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나 조선말은 서툴러

    소련의 고려인 출신 박일(朴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김두봉(金枓奉)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는데, 김일성은 중국말엔 능하나 우리 말이 서투르고, 지적 수준도 낮아 가르치는데 애로가 많았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과 증언들로 보아 해방 전 김일성의 상용어는 조선어 아닌 중국어(만주어)였으며, 해방 직후 평양에 온 그가 조선말에 서툴렀다는 것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40~41.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 대중앞에 나서던 날의 상황에 대한 증언]

    앞에서 말한 유성철(兪成哲)씨도 이때 회장에 있었다. 그는 평양에 온 뒤 헌병사령부에 배속되었다. 당일에는 회장의 경비를 겸하여 세론(世論)수집이라고 부르는 인심의 파악 일을 명 받았었다.

    "나는 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민중의 반응을 탐색했습니다만,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가짜다' '러스키의 앞잡이다' '저건 애송이가 아니냐. 뭐가 김일성 장군이란 말이냐'라고 저마다 중얼거렸다. 곧바로 회장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너무나 젊고 그의 조선말이 서툴렀기 때문이었죠.”

    김일성 장군으로 탈 바꿈한 김성주 청년은 소련군 사령부가 마련한 짧은 연설 원고를 더듬더듬 조선말로 읽어 내려갔다.
    그는 일곱살 때 한방의를 하고 있던 부친의 사업 사정으로 고향인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를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학교에 다녔고 33세에 귀국할 때까지 거의 중국말로 생활해 왔다. 그 때문에 그의 조선말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형편 없었다고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은 적지않다.

    저자 하기와라 료(萩原遼)는 1991년 11월 타시켄트로 유성철을 방문하여 위의 증언을 직접 들었다.


    그후 金은 우리 소조에 자주 찾아왔으며 우리의 주요임무는 제1차 조선공산당대회를 앞두고 그의 연설문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조선인 출신 소련군 장교들은 金의 조선어 지식이 매우 부족한 반면 중국어는 꽤 알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문에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

    김일성은 북한에 와서는 특별 교습 등을 통해 우리말을 빨리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해방전에는 오랜 외국 생활로 조선말을 더듬거렸으나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조선말을 따라잡는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그가 조선이나 조선독립에는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고, 중국인들 틈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에 동화되어 해방전 그의 의식은 조선인이라기 보다는 중국인에 가까웠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선독립운동으로 보기 힘들어

    위에서 본대로 김일성은 만주 항일연군 시절에는 일제가 패망하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기를 원했고, 소련군 88여단 시절에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이었을 뿐 조선으로 돌아오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런 증언들은 그의 만주에서의 투쟁이 조선독립을 간절히 원한 때문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는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며 중국학교에서 교육받아 조선에 대해 배운 바도 없었고, 중국어는 능하나 조선말도 서툴며 국내 사정에도 어두워 조선에 대해 애착을 가질만한 이유도 없었다. 당시 그의 정신세계는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인 만주의 조선족에 가까웠다.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金日成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고, 다른 조선인들도 자신들 이름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이름을 썼다. 이에 비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245],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245][246][247]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해방전의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희미했고, 어디에서도 그가 간절히 조선독립을 원해서 투쟁했다는 증거가 없다. 다만 소련군 상관들에게 잘 보여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을 뿐이다.

    만주 빨치산 출신 88여단 조선인들의 성격

    만주 빨치산 출신 88여단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만주서 태어났거나 김일성처럼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중국에 거의 동화되어 중국말을 상용하며 조선말에는 서툴렀다. 이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그들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으며 소련으로 도피해서는 소련의 필요에 따른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국내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거의 알지도 못했으므로 그들은 북한의 핵심권력층이 되어야할 아무런 정당성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이 이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세력도 전무하고 낯선 북한이 아니라 인적(人的) 네트워크와 활동 기반이 있는 만주로 가서 중공당원이나 중공군으로 활동하며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원하던 안도현장(安圖縣長) 자리라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력으로는 북한 정계에 얼굴을 내밀 형편조차 안 되던 이 사람들이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을 받아 북한의 핵심권력을 장악하는 바람에 해방 당시 대다수 국내 사람들이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동북항일연군 조선인들, 특히 김일성의 투쟁사가 북한의 핵심 역사가 되어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독차지하게 된다.

    8.15 해방과 입북

    88여단 조선인 빨치산들은 평균학력 초등 3년 정도의 무식한 집단

    소련군이 북한으로 데려와 핵심 권력을 쥐어준 김일성 등 만주 빨치산과 88여단 출신 조선인들의 평균학력은 초등 3학년 정도로 국정에 대한 식견도 있을리 없는 무식한 집단이었다. 이들 무식한 집단이 오늘날의 북한과 같이 대를이어 인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었다.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을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

    이후 진지첸 대위(김일성)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소련 군용 화물선 푸가초프호(Pugachev 號, 정식명칭 Emelyan Pugachev, Емелья́н Пугачёв)를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였다.[248][249][250][251] 이 배는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오리건 조선회사에서 Louis Agassiz 라는 이름으로 1943년 3월 23일 건조를 시작하여 20여일 후인 4월 13일에 건조 완료되어 소련에 인도되었다. 미국은 2차대전 중 1941년 3월 11일 발효된 무기대여법(Lend-Lease)에 따라 유럽의 연합국과 소련에 막대한 전쟁 물자를 지원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인도해준 배이다.

    김일성은 해방 후 귀국할 때조차 『원쑤 미제』가 만든 배를 타고 들어왔다.

    푸가초프호(Pugachev 號). 해방 직후 소련군 88여단진지첸 대위(김일성) 일행이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 타고 온 배이다.

    정상진(鄭尙鎭, 1918~2013) 등 원산항에 출영나온 인사들에게 김일성은 자신을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소개했다.[252]

    김일성과 함께 푸가초프호로 원산에 입항했던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당시 김일성을 마중하러 평양에서 원산까지 직접 왔다고 하였다.[253] 그러나 치스차코프의 원산 마중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반대 증언도 있어 논란이 있다.[254][255] 가브릴 코로트코프는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 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김일성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한다.[256]

    아래는 김일성의 원산항 입항 당시를 증언하는 기록들이다.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 김일성의 정확한 입북 경로와 일자는 구 소련 붕괴 후에 알려졌다. 하지만 미군의 1952년 7월 기록에 소련서 훈련받은 김일성 등 조선인 그룹이 1945년 9월 25일 원산항으로 들어왔다고 비교적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General Staff, 31 July 1952) 원문 p.9, (pdf p.22)
    (2) Arrival of Soviet-trained "Yashki" Group: On 25 September 1945, KIM Il Sung and a group of Soviet-trained Koreans were landed at Wonsan. These people, formerly guerrillas against the Japanese along the Manchuria-Korea borders, were assigned to various advisory capacities in the several provincial governments. Although they had received considerable training under the Soviets, their educational level was generally not high end their main mission in Korea was supervision of the police forces of the Provincial Police Bureaus.
    North Korea Today, for American Eyes Only (G-2,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August, 1947) : pp.9~10에 김일성 등 한국인들이 해방전 소련의 Yashkino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마을 뱌츠코예(Vyatskoye)의 부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Yashki" Group이란 말은 Yashkino에서 유래한 말로 보이며, Vyatskoye Group 정도의 의미로 88여단에서 훈련받은 조선인들을 말하는 것같다.

    첫 직책은 평양지구 위수사령부 부사령관

    김일성이 해방 후 입북하면서 소련군으로부터 받은 첫 직책은 평양지구 위수사령부(平壤地區衛戍司令部) 부사령관(副司令官)이었다. 사령관은 바실리 코롤료프(Василий Королёв) 대좌(대령)이었다.

    김일성대위는 도시 경무 사령관 코롤료프대령의 차석자로의 임명에 관한 명령서를 지니고 평양에 도착했다.10) 젊은 소련 장교에게 이것은 대단한 승진이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좀더 중요한 권좌가 다른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북한공산당 조직국이라고 불린 곳에 있었다.
    10) 국방부 중앙문서국, F 3, 목록 21144, D 7, L 54.
    이 문서는 또 대대장 김일성대위에 대해 1932년 중국 공산당 가입,중졸, 소련군 평양위수사령부 부책임자로 기재하고 있다.
    88여단 북한 정치지도자 양성 주력/문건으로 밝혀진 김일성의 행적 중앙일보 1992년 06월 15일 종합 3면
    소련군 극동 총사령부는 제88정찰여단에 있는 조선인 88명과 소련 국적 조선인 15명 등 전체 조선인 103명 중 47명을 북조선의 시·도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으로, 15명을 군정 사령부와 위수사령부 통역관으로, 37명을 지방 자위대와 기타 기관에 이용하라고 지령하고 있다.
    특히, 제1 빨치산부대장 대위 김일성을 평양시 부사령관, 제2정치부대장 김책 대위를 함흥시 부사령관, 제2빨치산부대장 강건을 청진시 부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 참모부 정찰부대장 소장 치브린(Chivrin), 제2극동전선 참모부 정찰부대 부부대장 대좌 안쿠지노프[257], 「소련원수 바실레프스키 앞」(1945.7.6.), 소련 국방성 중앙고문서 보관소(문서번호: F.2. OP.19121, D.2, L.L.3-4).

    한달간 김영환이란 가명 쓰며 숨어다녀

    김일성은 귀국 직후 처음에는 김영환(金永煥, 金英煥) 또는 김동환[258]이란 가명으로 비공개 활동을 하는데, 가장 급선무가 공산당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 일환으로 원산으로 가서 공산당원을 모집하다 그 지역 터줏대감 이주하(李舟河, 1905~1950)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다 한다. 박갑동(朴甲東, 1919~ )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259][260]

    해방 후 이주하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원산시당과 강원도당을 조직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김동환(金東煥)이란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공산당을 조직합네 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라 웃어 넘기려 했으나 그의 측근들이 김동환이란 자가 너무 설친다고 하기에 하루는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잡아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 소련군부대에서 그 청년을 풀어주라는 지시가 왔고 그대로 한 뒤 알고 보니 그 김동환이란 자가 김일성이었다고 했다. 이 얘기는 실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이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정말로 일찍부터 국내에서 이름이 떠돌던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해 곧바로 공개활동에 들어가야 정상이다. 그가 아무도 몰래 귀국하여 한달간 가명을 쓰며 잠행한 것은 자신이 국내에서 무명인사인데다 지지세력도 전무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국내 사정을 살펴보며 어떤 이름과 어떠한 방식으로 대중앞에 나설지 탐색하는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입북 직후의 비밀 활동

    김일성이 입북하기 직전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으로부터 북한 지도자로 낙점 받았다는 이반 코발렌코의 증언은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한 직후부터 김일성이 비밀리에 여러가지 일을 주도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지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를 지도자로 선정할 수 있는 사람은 스탈린 뿐이며, 소련 극동군 사령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원산에 들어온 김일성은 소련의 전폭적인 후원속에 지방조직에 착수하면서 소련과 직접연결되는 빨찌산의 하부조직을 뻗어간다.

    김일성은 원산에 도착한 직후 함께 온 빨찌산들을 각 지방에 파견한다. 김일(金一)을 평북으로, 박성철·최충국 등을 함북으로 파견, 지역사정을 소상히 파악토록 지시한다.

    서용규씨의 증언­.[261]

    『김의 이러한 조치는 소련군과의 약속이나 묵인하에 했든 지시를 받아서 했든지간에 김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입니다. 소련군이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직접 이같은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요는 소련측의 지원하에 나름대로 「집권구상」을 가졌던 김일성이 이의 일환으로 자신의 심복들을 지방에 파견했다는 얘기다.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82·소 레닌그라드거주)[262]씨의 증언은 보다 실감이 난다.

    『46년초쯤인가 김일성이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더군요. 그 자리에는 문일부관이 있었지요. 김은 「빨찌산이 해방전에 참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서 「원산에 도착 즉시 북한전지역의 정세파악에 들어갔었다」고 하더군요.』

    강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김일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래서 김책을 함흥으로,오진우를 회령으로,최현을 혜산으로 급파해 지방사정을 파악토록 지시했지…」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김일성은 원산에서의 체류일정을 끝내고 고향땅 평양으로 입성한다. 김은 이곳에서 소련군의 지원아래 김책·최용건·안길 등 빨찌산 핵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집권구상을 펼쳐나갔다. 이 당시 김일성이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공산당 창건준비와 이에 대비한 인재발굴이었다.

    ○기술자 확보에 치중

    김일성은 이를 위해 원산에서 했듯이 빨찌산 핵심들을 북한 전역으로 파견했다. 김일성 자신도 「김동환」등의 가명을 써가며 「민정시찰」을 했다. 전 소25군 정치담당관 메크레르중좌는[263]

    『9월중순께 상부로부터 김일센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데리고 각 지방에 다니며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더군요』[264]

    라고 증언하고 있다.

    김은 지방에 내려가는 「빨찌산들」에게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자,기독교인사,국내파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섞여있는 당시 북한 상황에서 김이 내린 지시는 「의미」가 있다고 파악된다.

    서용규씨는

    『김일성이 내린 임무는 ▲지방의 당조직 착수 ▲노동계급속에서의 새로운 인재발굴 ▲기술자·전문가 발굴 및 추천 ▲지방의 실태파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고 말한다. 서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노동계급속에서 새 인재를 발굴하는 과제는 평양학원[265] 입학추천으로 추진됐죠. 이 학원은 45년 10월 18일 개교, 11월중순에 1기생을 배출합니다. 바로 이들이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이 추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거죠.』
    평양학원 1기생은 정치반 84명,군사반 1백여명등 모두 2백여명 정도가 배출돼 북한사회의 핵심간부로 등장한다. 이 학원의 군사반은 46년 2월 보안간부훈련소로, 그 뒤 정치반은 중앙당학교로 각각 개편된다.

    소련군 문서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진지첸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어


    10월 13일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대회에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참가

    1945년 10월 13일에 《서북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西北五道黨 責任者熱誠者大會)》가 평양에서 열려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北部朝鮮分局) 설치(設置)를 결의한다. 김일성은 이 대회에서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를 한다.[266] 이 대회에서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는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선출되었다.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로 존재감이 없어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국 책임자로 선출되지도 못했다. 그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도 아닐 뿐더러 처음에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다.

    김일성은 같은 해 말 12월 17일에야 김용범을 사퇴시키고 분국 책임비서로 되었다.[267]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이라 주장하고 있으나[268] 이날은 실제로는 당창건과 아무 관계없는 날이다. 조선노동당의 모체라고 주장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건일을 이날로 간주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 분국 창건일은 10월 13일이다. 북조선 분국을 북조선 공산당으로 바꾸었다가 1946년 8월 연안파들의 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이 된다. 다시 북한 정권 수립후 남로당과 합당하여 비로소 조선 노동당이 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일어난 중국의 신해혁명 기념일 쌍십절(雙十節)에 착안하여 10이 두개 겹친 날을 일부러 택한 듯하다.

    김일성은 분국 창설 때도 책임비서가 되지도 못했고, 북조선 노동당의 대표도 김두봉이었지만 북한은 이런 사실도 감추고 있다.

    10월 13일 저녁의 김일성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들의 간담회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공산측 위원 중 한명이었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에 의하면 1945년 10월 13일 저녁 평양 평화회관에서 김일성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들과의 환영 간담회가 있었다.[269]

    그러나 같은 한재덕이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직후에 쓴 글에는 이 모임이 10월 12일 또는 하루 전날 저녁 일본 요정 「다마야」에서 있었다고 하여 약간 다른데, 시간과 장소는 당시 평양에서 쓴 기사가 맞을 것이다.

    아래는 한재덕이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직후 동아일보에 연재한 수기에 나오는 그날 저녁 모임 현장의 모습이다.[270]

    [6회] 술잔이 돌기 시작하고 주로 공산당측 위원들이 일어서서 벌써부터 아첨에 가득찬 환영사를 경연(競演)하였다. 민족진영 위원들도 몇 사람 일어서서「테불·스피취」를 하였는데 그것은 은연중 비꼬는 말 꼬집는 말이 섞여있는 것이었다. 예를들면 李宗鉉(이종현)[271]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벌써 십여년 전에 金日成(김일성) 장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몇몇 동지끼리 몰래 모여서 추도제사까지 지냈는데 이제 살아 돌아온 金(김)장군을 눈앞에 보게되니 그때 올렸던 제주(祭酒)는 이 자리에서 도로 찾아야겠소."
    이것은 분명히 해방 전까지 싸우다 왔다는 金日成(김일성)에게는 가슴이 찔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어서 술잔과 함께 金日成(김일성)에게 질문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이 당시는 본시 좀 촌뜨기같은데가 있던 그는 더욱 어리둥절해 쩔쩔매는 꼴이었다.

    진지첸 대위가 아직 대중 앞에 나서기 전인데도 이처럼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가짜 김일성 장군으로 의심하고 있다.

    조만식의 아들 조연명(曺然明, 1914 ~ 1989)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보다 앞서 9월 하순경부터 조만식을 몇 번인가 찾아왔다고 하므로[272] 이 모임이 두 사람의 첫만남은 아니다. 김일성이 처음 왔다간 후 조만식은 아들 조연명에게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서 적어도 내 나이쯤은 된 줄 알았는데 연령이 네 나이 또래밖에 안 되더구나. 그렇다고 당신은 가짜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난처했다.」라고 했다 한다.[273] 해방 당시 조만식의 측근이었던 김해 진영의 한얼여자고등학교장을 지낸 김두혁(金斗赫)도 당시 조만식이 자칭 김일성 장군이라는 자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더라고 유사한 증언을 했다.[274] 조만식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텐데도 자칭 김일성 장군이라는 자의 정체를 정확히 모른체 가짜로 의심하고 있었다면 정보가 거의 없는 일반인들이 그를 가짜로 본 것은 당연하다.

    • 진지첸 대위는 귀국 직후 대중앞에 나서기 전에 원산에서 공산당원을 모집하다 이주하 부하들에게 체포될 때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대회에서는 김영환(김동환)이란 가명을 쓰고, 조만식등 우파, 민족진영 인사들을 만날 때는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우파 민족진영에 대해서는 자신이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고, 당시 국내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그의 존재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명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국내의 우파 민족진영 인사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지 못했고, 그를 유명한 김일성 장군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자력으로는 북한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못 되었지만, 스탈린의 간택을 받은 탓에 소련군이 기획한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에[275] 평양의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다. 그는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대회에도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참석했지만[266] 바로 다음날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다. 가슴에는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나왔다.

    그는 해방 전 만주 빨치산이나 소련군 88여단 어디에서도 장군이라 불린 적 없었음에도 무명의 일개 소련군 대위가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한 것은 자신이 마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여 대중들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아래의 당시 사진에서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 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은 맨 오른 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다. 뒤에는 태극기가 내걸려 있다.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이 내세운 어디서 뭘하다 왔는지도 모르는 자칭 "김일성 장군"에게 주권을 강탈 당하는 현장 사진이다. 이후로 북한의 주권은 김일성 일족에게 세습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은 한국 국민들과 달리 유사이래 단 한번도 주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레베데프 소장은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한국인 기자들에게 당시 한국인들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의 귀환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진지첸 대위가 그 이름을 사칭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다음 해인 1992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한국의 김일성 연구자들은 30년 전에 나온 이 증언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서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뒤집어 놓았는데 다시 가짜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소련군이 진지첸 대위와 88여단의 조선인들을 국내로 데려오지 않고 자유롭게 가고싶은 데로 가라고 했으면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아무 지지기반도 없는 그들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로 가서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소련군 배경이 없었다면 국내 사람들이 어디서 뭘 하다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 진지첸 대위가 평양에 와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앞에 데뷔하는 10월 14일의 무대도 소련군이 자신들의 앞잡이로 선택한 그를 위해 연출해낸 것이고, 북한 지역에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강압을 동원해 막아준 것도 소련군이다.

    레베데프는 이날의 김일성의 연설문은 소련군 장교가 소련어로 작성한 것을 고려인이 번역한 것이라고 말했다.99) 그러나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을 …”이라는 구절은 중국공산당이 1935년 8월 1일에 발표한 이른바 「8·1선언」, 곧 「항일구국을 위하여 전 동포에게 고하는 글」가운데 유명한 “돈 있는 자는 돈을 내고, 총 있는 자는 총을 내고, 식량 있는 자는 식량을 내고, 힘 있는 자는 힘을 내고, 전문기술 있는 자는 전문기술을 바쳐 우리 전 동포를 총동원하여 …”100)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었다.

    99) 레베데프 證言, 『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88.
    100) 西順藏 編, 『原典中國近代思想史(第六冊) ─ 國共分裂から解放戰爭まで』, 岩波書店, 1977, p. 165.

    돈 있는 자는 돈을 내고, 총 있는 자는 총을 내고, 식량 있는 자는 식량을 내고, 힘 있는 자는 힘을 내고, 전문기술 있는 자는 전문기술을 바쳐 우리 전 동포를 총동원하여 … : 有錢的出錢,有槍的出槍,有糧的出糧,有力的出力,有專門技能的供獻專門技能,以便我全體同胞總動員, …

    10월 18일 밤의 김일성 장군 환영 및 가족 위안회

    1945년 10월 18일 : 오후 6시 평양시내 「대동관」에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주최 김일성 장군 환영회 및 가족 위안회가 열림. 김일성 조모, 숙부 김형록 내외 등 친척과 친지 참석[276][277][278][279]

    이 모임에 참석했던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이 1947년 11월 월남 후에 쓴 책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하나의 증언(證言)』 (복간본 p.96부터)에는 이날 모임의 참석자, 모임 진행과정, 분위기 등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장소는 전 일본요정 「가선(歌扇)」이라고 했다.[280][281]

    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서는 무명인사

    북한 김일성에 대해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의 좌파들도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라며 찬양했으나, 실제 그의 경력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는 국내 사람들이 거의 잘 모르는 낯선 인물에 불과했으나, "김일성 장군" 이름을 사칭하며 유명인 행세를 하고 다녔을 뿐이다. 당시 국내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282], 거기에 진지첸(김일성)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오늘날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보천보 사건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한 때문에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하루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146] 이는 사실이 아니며, 해방 당시에 그와 관련하여 보천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김일성 본인도 1945년 12월까지도 보천보 사건을 몰라 인터뷰에서 자신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을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보천보 사건의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고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나중에야 그 사건을 6사장 김일성이 한 것을 알고는 자신의 항일 공적인양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동흥사건 등 그보다 더 큰 사건은 잊혀졌는데도 불구하고 보천보 사건만 뒤늦게 유명해진 것이다.

    미군정 당국이나 이후의 한국 정부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는 막연히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했다는 정도 외에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었고, 소련군이 어떻게 해서 그를 데려와 북한 지도자로 내세웠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그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는데도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라고 자칭하니 가짜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의 전력에 대해서는 1990년 무렵이나 되어서야 어느 정도 밝혀지지만, 수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그가 정말 6사장 김일성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시비가 선명히 가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1990년 무렵에 와서야 그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도 마치 해방 당시 사람들이나 한국정부가 그에 대해 잘 알면서 일부러 가짜로 몰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1935년의 동흥사건이나 1934년의 토성습격사건 등은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었고, 그 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해방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보천보 사건 역시 곧 잊혀질 사건에 지나지 않았고, 해방 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북한 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항일 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만 나중에 유명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그 사건의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도 아니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에 대해 거의 몰랐다. 동북항일연군은 1970년대에 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88여단은 1990년 한소수교(韓蘇修交) 이후에나 그 내막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이 오늘날 자신들이 아는만큼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에 대해 잘 알았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큰 착오이다.

    평양 소련 군정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총지휘한 레베데프 소장도 후일 당시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대위(김일성)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증언했다.[283] 그가 국내에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것은 소련군 인사들이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Stalin was offered five groups of candidates for the role of leader of North Korea. There were agents of the Comintern sent to Korea back in 1920-1930, and Korean communists who had received special training in Yan'an, the headquarters of the Chinese communists, and local nationalist leaders, and Koreans - Soviet citizens, well checked by the NKVD, the main like the communists. Kim Il Sung was one of the fifth group - the leaders of the Korean guerrilla movement.
    He was known as a military commander. Of all the candidates, Stalin (namely, he had the last word) chose an officer of the Soviet Army not known to the public - the battalion commander, Captain Jing Zhi Chen (an ethnic Korean who bore a Chinese name) - Kim Il Sung (Korean transcription of the name). The specified battalion was part of the 88th separate rifle brigade, which was then stationed near Khabarovsk.

    1948년 7월 2일자 미국무부 문서에는 한국인들에게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해외거주자가 전설적인 게릴라 김일성의 이름을 자칭하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창설을 발표했다고 하였다. 1948년 당시 미군정은 북한 김일성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들이 누군지 잘 알지 못하는 해외 귀국자로 판단했다.

    • Structure of North Korean Government - July 2, 1948 : 미국무부 문서
    Structure of North Korean Government and the new Government of South Korea/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1948, RG 226 NARA / 국회도서관) p.4
    Structure of North Korean Government : July 2, 1948 (Department of State / Division of Research for far East /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The announcement on December 31, 1945 of the Moscow Decision with its provision for Korean trusteeship, provided the Soviet authorities with the political tool needed to create a Communist-dominated central government. Because of his refusal to support the trusteeship clause of the Moscow Decision, CHO Man Sik was ousted from his position as adviser to the Soviet Commander in Pyongyang and a vigorous press, radio, and pamphlet campaign denounced him as a "reactionary." On February 8, 1946, a young, formerly unknown expatriate who, with great publicity had returned to Korea bearing the name of a legendary Korean guerilla, KIM Il Sung, called a meeting of representatives of popular organizations and local people's committees in Pyongyang. On February 9, 1946, this body announced the formation of the Interim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This committee became the executive agency, and, with the power of decree immediately launched a program of sweeping economic and social reform aimed at capturing public support and solidifying its own position. By November 1946 the Communists in the central government were sufficiently strong to call for an election to provincial, county, and city people’s committees. This election, combined with an intense propaganda campaign against reactionaries, in effect purged dissident elements from those levels of local government. Three months later the process was repeated in township and village poople's communities, thus securing Communist control throughout all echelons of the regime.

    해방 직후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던 박일(朴一, 1911~2001)도 해방 당시 김일성은 무명인물이었다고 했다.

    前(전) 金日成大(김일성대)부총장 朴一(박일)씨가 밝히는「祕史(비사)」
    對談(대담)=高大(고대) 申一澈(신일철)교수
    하바로프스크서 農事(농사)짓던 無名人物(무명인물)
    「재주보다 忠直(충직)」스탈린原則(원칙)따라 발탁
    申(신일철) : 그렇다면 소련군은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金日成(김일성)을 북조선의 지도자로 선택했습니까?

    朴(박일) : 해방직후 소련군이 북조선의 새지도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金枓奉(김두봉) 朴憲英(박헌영) 등 5명 정도가 후보로 보고됐을뿐 金日成(김일성)은 거론조차 안됐습니다. 소련은 항일투쟁 경력이 어느 정도 있으면서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문일의 얘기에 의하면 金日成(김일성)은 성격이 순하고 일하기를 좋아해서 무슨 일이든지 근면하게 처리했답니다. 또 金日成(김일성)은 참을성이 있고 지식도 별로 많지않을 뿐아니라 스탈린을 존경해서 소련에 대해 협조적이었습니다.

    부하를 선택하는 스탈린의 조건은 「너무 재주가 있는 사람보다는 충직한 사람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명이지만 金日成(김일성)이 선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해(任海) 동지, 김일성 동지는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들은 그가 해방 전에 반일 빨치산 투쟁을 한 것 이외는 모르고, 특히 인간적인 면에 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우리들은 남조선에서 박헌영 일파에 의해서 배제되어 있는 관계로, '물에 빠진 자 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기분으로 김일성 동지를 지지하게 되었지만, 박헌영 일파에 대한 대항 의식만으로 언제까지나 김일성 동지를 지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김일성 동지는 현재의 북조선 간부들 중에서는 뛰어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 수준도 높고, 특히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나는 당 중앙 농민부장 때에 때때로 회의에서 내가 쓴 원고를 읽어나가곤 했습니다만, 김일성 동지는 나의 잘못된 곳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쓴 것이 다른 동지들로부터 잘못된 곳을 지적당한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그만큼 김일성 동지는 이론적 수준도 높고 판단력도 뛰어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일제말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기자를 하다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하고, 『우리 신문』 주필 겸 정치부장이었던 고준석(高峻石, 1910~1994)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가, 일본에서부터 친했던 친구 북로당 농민부장 임해(任海, 본명 任吉鳳)를 찾아가서 북한의 지도자들에 관해 문답한 내용이다. 고준석 본인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잘 몰라 임해에게 물었으나, 임해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식의 말 밖에 하지 못한다. 고준석이나 임해 모두 김일성이 해방 전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련이 지도자로 내세우니 그냥 맹종하고 있는 수준이다.
    • 조기천(趙基天, 1913 ~ 1951)의 1947년작 서사시 《백두산(白頭山)》이 해방 직후 누구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도진(刀盡)'이라는 필명의 북한 사람이 한국에서 출판된 '반디'라는 필명의 북한 반체제 작가가 쓴 소설 《고발》을 읽고[284] 남한으로 보내온 독후감에는 조기천서사시 《백두산(白頭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는데[285], 그 전까지는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으나 이 시가 발표된 후부터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어릴 때의 기억이 한 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 땅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 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詩가 2000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賣文(매문) 문필가로써 민족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 선생의 분노의 작품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 김길선은[286]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관련 연구와 군 현대화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제2자연과학원[287] 산하 제2자연과학출판사 정책편집부 기자로 17년간 근무했는데 자신이 북한에서 기자생활하면서 취득한 정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개가 금지된 문건에서 봤거나 해방 당시 일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보인다.

      [동영상 1분 50초부터]
      [김길선] 북한 주민들도 그때는 나름 공업지대가 많다보니 수준이 좀 높았던 것 같아요. 그때 8.15 해방을 전후해서 김일성은 몰라도 이승만 박사는 다 알고 있었대요. 난 이걸 북한에서 기자생활하면서 취득한 거에요.
      [이영주] <건국전쟁> 보니까 김일성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더라고요.

    찬탁, 반탁 논란을 틈타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 전면에 부상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김일성 등 이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명의의 1946년 1월 2일자 성명서를 보도한 1월 14일자 민성일보(民聲日報) 1면 기사. 이 성명서는 1월 2일 특별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냈으며 조만식은 이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임하고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288] 소련의 지시를 따른 이 성명이 남한 좌익들이 이튿날부터 찬탁으로 돌변하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방안이 결정되자 남한에서는 격렬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반면에 소련은 김일성, 김두봉 등 북한의 정당, 단체 대표들이 1946년 1월 2일에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이 성명에 불참하고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1월 5일에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이후 북한 내에서는 기독교 세력, 우파 민족주의 세력등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의 정치활동은 일체 금지되며,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정치활동만 허용된다. 김일성 등의 1월 2일 성명서는 평양 방송을 통해서도 발표되었다고 하며, 남한의 좌익들이 1월 2일에 종전의 반탁 입장에서 돌연 찬탁으로 일제히 선회한 것도 이 성명으로 소련의 의사를 확인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어 2월 8일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 북한 단독의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다. 이는 소련군정의 최고 지휘자인 스티코프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 관련 논의차 1월 15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여 머물다 2월 7일에 평양으로 귀환한 바로 다음 날이다. 스티코프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들이 결정되었을 수는 없으므로, 스티코프가 서울로 출발하기 이전인 1월 초에 소련은 3상회의의 결정과 무관하게 북한 단독의 임시정부 수립계획을 세워놓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소련의 본심이며, 남북한 단일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에게는 미군정과 남한의 반탁세력을 겨냥한 정치 선전장에 불과했다.

    • 스티코프와 수행원 13명이 1월 15일 0시 45분에 평양으로부터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
    美(미)·蘇共同委員會(소공동위원회) : 蘇聯代表昨日入京(소련대표작일입경) 軍政廳第一會議室(군정청제일회의실)에서 南北統一問題(남북통일문제)를 먼저審議(심의) 동아일보 1946-01-16, 1면
    • 스티코프 등 소련대표 일행이 2월 7일 오전 2시 15분 특별열차로 서울을 출발, 평양으로 귀환
    國內 諸團體와 協議, 臨時政府 樹立 援助, 一朔 內에 美蘇共同委員會 設置. 중앙신문, 1946.02.08

    스탈린 지령문이나 쉬킨 보고서 등에서 보듯이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 단독의 정권 수립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남한의 우파 세력을 배제한 남북단일의 좌파 정부 수립 가능성을 탐색해보면서, 미군정과 남한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탈린김일성박헌영에 대한 지도자 면접 시험

    지도자 김일성에 대한 박헌영 측의 이의 제기로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 김일성박헌영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재차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본 후 다시 김일성을 선택한다.

    소련이 국내에 상당한 지지세력을 가진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아닌 김일성을 지도자로 택한 것은 그가 88여단에서 소련군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국내에 독자적 정치 기반이 전혀 없어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은 소련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우려도 있는 사람이지만 김일성은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스탈린과 소련군이 만들어낸 꼭두각시 지도자

    북한 소련 군정의 최대 목표는 자신들이 88여단에서 5년간 훈련시켜 데려온 김일성을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북한의 지도자로 만들고, 그의 권력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스탈린88여단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 것은 1945년 9월초이다.[289] 그러나 사실상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련군정은 모든 기관과 인력을 동원하고 수많은 정치 공작을 통해 김일성을 거의 ‘무(無)’에서 시작해 지도자로 만들어 갔고, 소련군 철수 후에도 권력을 잃지 않도록 그의 권력 기반을 다져주었다. 이에 대해 당시 일에 직접 참여했던 여러 소련군정 인사들이 후일 증언했다.

    김일성과 그의 88여단 조선인 동료들은 국내 사정에 어둡고, 국내에 아무 지지 세력도 없어 자력으로는 해방 정국의 정치 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이 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핵심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의 인적 기반이 있는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이처럼 김일성 집단이 북한 권력을 장악한데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을 받은 것이 절대적이었다.

    김일성 집권의 정당성 결여가 경력 조작과 역사 날조로 이어져

    해방 당시 진지첸(김일성) 대위 등 만주 빨치산과 소련군 88여단 출신 조선인들이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야할 정당성은 전무했다. 이들은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국내에 기반도 전무하며 지지세력도 전혀 없었다. 북한 주민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과 거기의 조선인들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고, 대부분 그런 집단이 있는 줄도 몰랐다.

    북한 주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조만식 선생을 연금하고, 이들에게 북한의 핵심권력을 쥐어준 것은 소련군의 강제에 의해서이다. 소련군은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불과했던 진지첸 대위를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조작하여 그에게 정권을 쥐어주는 것을 합리화 시키려 했다. 이런 소련군의 강압에 의해 북한 주민들이 거의 알지도 못했던 진지첸 대위와 만주 빨치산들의 활동이 북한의 역사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살인, 납치로 얼룩진 이들의 역사를 그대로 가르칠 수는 없으니 터무니 없는 역사 조작과 날조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북한 김일성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선전되는 소위 보천보 사건도 일과성 사건으로 해방 당시에는 유사한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 독산사건처럼 잊혀져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엄청난 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한 후부터이다. 남한에서는 1970년대에나 학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처음 연구하기 시작했고 일반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되는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보천보 사건도 보잘것 없는 일을 과대포장한 것이지만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다른 사람이다.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했지만 이후 그 사건이 자신과 이름이 같은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것인줄 알게되어 자신의 공적으로 둔갑시켰다. 북한에서조차 보천보 사건이 김일성의 업적이라며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47년경부터로 보인다.

    김일성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소련이 무력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압적으로 만들어낸 꼭두각시 지도자라는 것이고, 무명인물이 억지로 지도자가 되려다 보니 일찍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다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당시 김일성 장군은 국내에서 이름은 유명하나 실제로는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을 악용하였다.

    김일성 대학 창설이 김일성 신격화의 시작

    소련 군정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애국미 헌납운동을 벌여[290][291] 북한 농민들로부터 쌀을 쥐어짜내 1946년 10월 평양에 북한 최초의 대학을 창설하면서 김일성의 이름을 교명에 붙였다. 최고교육기관을 국가가 아닌 김일성 개인을 위한 일꾼 양성소로 만든 것이다. 이는 히틀러스탈린, 모택동과 같은 극악한 독재자들도 하지 않았던 전례없는 일이다. 아직 집권 기반도 제대로 마련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나라가 어떤 체제로 갈지도 불분명한 시점에서 대학 명칭에 김일성 이름을 붙여 우상화를 시작했다는 것은 북한의 앞날을 이미 예고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대학의 초대 총장은 김두봉이 맡았으나 그는 정치에 바쁜 사람이라 실제의 학교업무는 초대 부총장 박일이 관장했다. 박일은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김일성김두봉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치는 일도 맡았다고 하는데,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일에 거부감을 표시하다 소련군정의 눈밖에 나서 소련으로 소환되었다.

    김일성 대학 창설은 북한이 이미 타협 불가능한 김일성 개인의 나라로 만들어져 간다는 표면에 드러난 명백한 징표인데도 김구김규식은 이를 제대로 간파하지도 못하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한다면서 평양에 가서 소련과 김일성의 계략에 놀아나 이용만 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는 반대하다 결국 암살과 납북이라는 비극적 종말을 자초했다.

    만주국이 일본이 세운 괴뢰국이었던 것처럼 북한은 소련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를 데려와 황제로 내세운 괴뢰국이었던 것처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이 1945년 8월 북한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한 후, 주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을 연금하고 자신들이 5년간 교육과 훈련을 시켜 데려온 진지첸(Цзин Жи-чэн)[292] 대위를 최고지도자로 내세워 만든 소련의 괴뢰국이다. 부의(溥儀)진지첸 대위는 일본이나 소련군 무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력으로는 나라를 세우고 집권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점도 같다.

    차이점은 부의(溥儀)는 실제로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였기 때문에 그 권위로 만주국 황제로 내세워도 가짜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지만, 해방 당시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는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해야 했고 그 때문에 가짜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또 만주국은 일본제국의 패전과 함께 패망했지만, 북한 김일성 정권은 스탈린이 죽은 후 중소(中蘇) 이념분쟁을 틈타 등거리 외교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소련 붕괴 후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의 김일성 관련 기록

    해방 직후의 남북한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보면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은 보천보 사건이 유명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보천보 사건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항일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나중에 유명해졌지만,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해방 당시 남북한의 대부분 사람들은 북한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일제시대 신문에서 동북항일연군(동북인민혁명군)이란 명칭을 더러 본 사람이라도 그게 어떤 성격의 무장조직인지는 알 수 없었고, 비적단(匪賊團) 쯤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 또는 민간의 김일성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당시 그의 전력에 대해 제대로 정확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의 기록을 보아도 그의 해방전 경력은 별 대단한 것이 없고, 소련군 경력은 철저히 감추었다.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국내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나서기 이전에 주요 각료 후보로 거론되던 김일성은 1920년대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거의 전설화된 김일성 장군이다. 이처럼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는 미지의 인물이었고, 한국 정부가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폄하하기 위해 가짜로 만들었다는 따위의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인물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뿐이다.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수십년간 진행된 오늘날에도 무엇이 진실인지 선명히 가려지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소련군이 데려온 "자칭 김일성 장군"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었겠는가? 33세에 불과한 젊은이가 1920년경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온 "김일성 장군"과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니 가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북한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것은 1970년대부터이며, 동북항일연군이나 보천보 사건, 소련군 88여단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는 시기는 1980~90년대 이후이다. 위에 나온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과 관련된 자료들은 거의 모두 1970년대 이후 발굴된 것이다. 오늘날 좌파가 장악한 한국 학계에서는 김일성 미화를 위해 마치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과거 한국 정부가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군이 어떻게 해서 이런 인물을 북한으로 데려와 지도자로 만들었는지 내막이 알려지는 것은 공산권이 붕괴하는 1990년 무렵부터이다.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기록에 나오는 김일성

    해방 직전 1940년대 전반에 반일적 언행으로 검거된 사람들의 재판기록에 김일성 장군 부대를 찾아 독립운동을 하려했다는 등의 사례들이 다수 보인다. 이런 재판 기록이 유독 1940년 이후에 많이 나오는 것은 전쟁시기에 단속을 심하게 한 탓으로 볼 수 있다. 이 김일성은 일찍부터 유명했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가까우며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근거는 없다. 이런 사례들은 일제시대에도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증거가 될 수 있으며, 해방 직전의 이런 상황이 해방 이튿날부터 나돈 출처불명의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도 김일성 이름이 들어가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해방 이튿날 8월 16일부터 거론되는 여기의 김일성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과 함께 해방정국의 "Big 4" 중의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김일성은 적어도 다른 3인과 비슷한 정도로 오랜 기간 대중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던 사람이라야 하며, 당시 88여단에 있던 북한 김일성으로는 볼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고, 거기에 김일성이란 인물이 있었다는 것도 더더욱 몰랐다.
    1945년 9月 6日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에 김일성(金一成)이 나온다. 당시 조선인민공화국을 주도한 여운형이나 박헌영88여단의 북한 김일성을 알고 있었다고 볼만한 정황은 전혀 없으므로 이 사람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나오는 김일성과 유사한 경우로 보인다.
    중도파 단체인 선구회(先驅會)가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한 지도자 여론조사로, 이 기간중인 10월 14일 평양에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남한에서는 언론에 거의 보도가 되지도 않아 그런 일을 잘 모르고 있을 때이므로 이 조사 결과는 북한 김일성이 아닌 동진공화국 군무부장 김일성과 같은 사람에 대한 여론으로 보아야 한다.,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이 평양에 출현하기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실존인물 누구라고 특정하기는 어렵고 전설화된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보도로 볼 수 있다.

    •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東京版)』 1945년 10월 3일자[293]는 해외 각지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 金日成 씨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에서 ‘김일성 軍’을 조직하여 만주사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약 조선 반도민의 인기를 획득하였고 이동휘 (李東輝, 1873-1935) 씨의 세력 실추 후 친소파의 제일인이 되었다. 중공은 그를 이용하여 만주 방면의 지반 획득을 위해 그에게 북만성위원, 東北抗日聯 제3路軍 제10 지대장 및 정치위원의 지위를 주었고 이번 소련의 북조선 진주와 함께 평양에 들어온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김일성이 일본 육사를 나오고 만주사변(1931년) 때부터 유명해졌다고 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후대에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김일성 장군의 부하가 압록강을 배타고 내려가던 조선총독을 저격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배타고 압록강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조선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고, 당시에 김일성 장군의 거사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 거사 당사자는 김일성 장군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밝혀져 있지만, 당시 국경 부근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사건은 모두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곤 했다는 증언이 있다.[294] 위 기사는 이러한 증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고, 보천보 사건 때문에 비로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북한이 조작한 해방 당시 "김일성 장군 만세" 플래카드 사진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지도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작한 사진까지 내놓았다.

    해방 당시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를 알던 사람은 국내에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를 김일성 장군으로 알던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얻어타고 9월 19일 원산항으로 몰래 귀국하여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쓰며 숨어다니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조작 사진이다. 이런 조작 사진까지 내놓은 것은 역설적으로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이 국내에서 유명했다는 마땅한 다른 증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퍼져 있는 것에 대처하기 위해 후일에 조작한 것같다.

    북한 김일성 출현 직후 남한 언론의 관련 보도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완전한 무명인사로, 만주나 소련 어디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10월 14일 평양 집회에서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서 대중들이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했다.

    남한 언론도 그의 실제 행적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익숙한 이름의 "김일성 장군"이 귀국한 것처럼 착각하여 보도하고 있다. 무명인사를 유명인물로 둔갑시킨 소련군정과 진지첸 대위의 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처음으로 평양의 대중 앞에 등장한 직후 10월 중으로 이를 보도한 남한 신문 기사는 아래 3건이 확인되어 있는데 모두 2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신문들이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의 최초 기자회견 기사는 1면 톱으로 크게 취급한 것과 대조적이다.[295][296] 11월 초순에도 김일성에 관한 기사들이 더러 나오기는 하나 11월 중순 이후부터 자주 나오기 시작한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로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 당연히 이승만처럼 공개적으로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기자회견을 가졌어야 하며, 몰래 귀국하여 한달동안이나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쓰며 숨어 다니다 대중집회를 조작하여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는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무명인사였기 때문에 한달여 민심을 살피며 고심하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앞에 나서기로 일을 꾸민 것이다. 남한의 신문들도 그의 이름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그의 평양 출현도 며칠 후 단신으로 짤막하게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런 기사들에서도 확인이 된다.

    • 《金日成將軍 平壤滯在中》,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5. 10. 18. 2면[295][297]
    金日成將軍 平壤滯在中

    北鮮 南滿 一帶에 勇名을 덜치든 革命의 鬪士 金日成 將軍은 수일 前 部下小部隊를 거느리고 歸國하야 現在 平壤에 滯在 猛活躍中이며 平壤서는 同將軍歡迎會가 성대히 열리었다 하는데 同將軍은 그間 麾下百俆名울 莫斯科에서 訓練中이였는데 저 영광의 날 八月十五日을 맞이하자 急遽 歸國의 길을 떠났다 하며 同將軍은 名譽스러운 赤軍最高勳章을 받었다한다.

    莫斯科 : 모스크바
    《金日成將軍, 歸朝入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 10. 19. 2면 2단
    북한 김일성의 평양출현에 대한 보도이나, 김일성이 부하 100명을 데리고 모스크바에서 훈련중에 8.15 해방을 맞아 급거 귀국했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며, 위의 자유신문(自由新聞) 10월 17일자 기사와 유사하다.
    金日成將軍, 歸朝入壤

    確實한 報道에 依하면 쏘베트 異域에서 朝鮮獨立을 爲하야 끈임없시 싸워가는 金日成將軍은 日前 平壤에 歸國하였다하며 이앞 더욱 活躍할 것이라고 注目된다.

    歸朝入壤 : 조선에 귀국하여 평양에 들어오다.
    社說, 金日成將軍의 獅子吼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11월 01일 1면 1단
    평양에 온 김일성 장군이 집회 연설에서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주장했고, 이승만 박사도 대동단결을 주장했으며, 임시정부의 김구도 귀국하면 대동단결을 주장할 것이라는 요지이며, 김일성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 《남북만(南北滿)에서 용명(勇名) 떨친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귀국》, 『민주중보(民主衆報)』 1945년 10월 23일 2면[298]
    기사 내용 미확인
    《인민전선정부 목표, 金日成將軍支持同盟 결성》 『자유신문』 1945년 11월 02일 1면 1단 (국립중앙도서관)

    북한 김일성은 해방전 만주나 소련 어디에서도 장군이라 불린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남한 신문들이 평양에 출현한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 칭하며 보도한 것은 그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김일성 장군인 줄로 착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무명인사에 불과한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나타난 것도 바로 이런 것을 노린 것이다. 또 기사 내용이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된 것은 기사 작성자가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소련군 진지첸 대위)이나 유명한 이름의 주인공 김일성 장군에 대해 구체적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칭 김일성 장군의 귀국이 다른 저명 인물 이승만 박사나 김구 주석의 귀국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실체가 모호하고, 그 이름을 자칭한 인물 진지첸 대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들은 당시 북한 김일성이 아닌 김일성 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또 무명인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사기극을 벌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 해방 직후 김일성 관련 기사 검색
    1.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검색
    2.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창간호부터 기사 검색 열람 (무료)
    3. 조선뉴스라이브러리100 조선일보 창간호부터 과거기사 검색
    해방 후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23일[299], 동아일보는 12월 1일[300] 복간하여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고 좀 지난 후부터 기사가 있음.

    해방 직후 북한의 김일성 약력 기록

    김일성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이 넘쳐나며, 구체적인 해방전 행적에 대한 언급은 소략하다. 그가 소련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발탁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인 소련군 경력은 철저히 감추었다.

    p.80 : 한재덕(韓載德, 1911~1970) 著,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1945년 10월 19일부터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연재.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기관지 『정로(正路)』에 나오는 김일성 관련 최초 기사들
    (『정로(正路)』는 1945년 11월 1일 창간되고, 1946년 9월 1일 현재의 이름인 『로동신문』으로 개칭)
    北韓關係史料集 31 :正路(1945.11.1~1946.5.19) /국사편찬위원회 편 (과천: 국사편찬위원회,1999)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1945년 11월 7일자 김일성 관련 기사.

      정로에는 이와 관련 다양한 공산당 간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면, 창간호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박헌영 공산당 총비서를 찬양하는 “朝鮮無産階級(조선무산계급)의 指導者(지도자) 朴憲泳(박헌영)동무 萬歲(만세)”라는 표현이 나온다.

      김일성에 대해 북한 신문이 처음 언급하는 날은 1945년 11월 7일이다. 이 날은 소련 사회주의 혁명의 기념일인데, 38선 이북(以北)에 붉은 군대와 스탈린을 찬양하는 데모가 있었고, 데모의 리더중에 한명이 바로 김일성이었다. 정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끝으로 國歌合唱(국가합창)에 뒤니어(뒤이어) 金日成將軍(김일성장군)의 先道(선도)로 全世界被壓迫人民(전세계피압박인민)들의 解放軍(해방군)인 붉은 軍隊(군대) 萬歲(만세)! 偉大(위대)한 소聯(련) 人民의 名節(명절)인 十月(10월) 革命(혁명) 紀念(기념) 萬歲(만세)! 全世界弱小民族(전세계약소민족)의 最高(최고) 指導者(지도자)인 大元帥(대원수) 스딸린 동무 萬歲(만세)!”

      보다시피, 김일성을 장군으로 소개했지만, 분명히 나라의 유일한 지도자로 선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김일성에 대한 표현도 격상되기 시작한다.

      전환점은 1945년 12월 17일이었다. 그날 김일성이 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 되었다. 그 날부터 소련도, 정로도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보고 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12월 21일 ‘金日成(김일성) 동무의 빗나는 鬪爭史(투쟁사)’라는 기사가 나왔다.[301][302] 다만 당시 정로에 찬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고 스탈린이었고 김일성을 그의 제자로 소개했다.
    [『정로(正路)』에 김일성 이름이 처음 나온 날이 위의 DailyNK 기사에는 11월 7일자라 했으나, 김광운(金光雲)은 11월 1일자라 한다.]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 : "김일성장군 부대(金日成將軍部隊)"에 대하여 해방 후 최초로 언급한 출판물[303] (미확보)
    • 《金日成 同志의 빗나는 鬪爭史》, 『정로(正路)』 1945년 12월 21일 1면
    [出席人] 義勇軍側 : 崔鳳綠, 趙容徹, 張振光, 柳新, 河振東 / 金日成將軍部隊 : 林春秋, 金成國, 安吉 / 崔昌益 副主席
    서울신문사 기자들이 평양에 가서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김일성 부대) 출신 인사들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개최한 기사이다. 안길 (安吉, 1907∼1947) 등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담에는 이미 허풍과 과장이 잔뜩 들어가 있다.
    p.1 : 《김일성 동지의 약력(畧歷)》 : 조국광복회 총회장, 1936년 봄 반일연군 제6사장, 1938년 제2군장 역임.[304] 보천보 사건은 나오지 않고, 압록강 연안을 원정했다는 말이 있다.
    p.3 한설야(韓雪野), 《김일성장군 인상기(金日成將軍 印象記)》
    갑산보전사건(甲山保田事件) : 함흥법원판결문초(咸興法院判決文抄) - 혜산사건 판결문 발췌 번역.
    여기에 보천보 사건이 나오는데 현재 알려진 이 사건이 나오는 최초의 북한 기록으로 보임. 이 무렵부터 보천보 사건을 북한 김일성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거론하기 시작.
    p.1 (p.4) :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약력(畧歷)
    (2페이지 짜리 약력 중 1페이지는 해방 후의 경력이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사장(師長)과 제2군장을 지냈다고 했으나,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p.6 : 한재덕(韓載德) :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유격대 전사(遊擊隊 戰史) : 1946년 6월 『민주조선(民主朝鮮)』에 연재
    pp.9~10 : 조국광복회 총회장, 1936년 봄 반일연군 제6사장, 1938년 제2군장 (5.1절 준비위원회 발행책자 『김일성 장군』 서문을 인용)
    [평양민보가 1946년 6월 4일 『민주조선(民主朝鮮)』으로 제호를 바꾸고,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유격대 전사(遊擊隊 戰史) 연재]
    p.16 : 이찬(李燦) 작사,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노래》
    pp.20~21 : 이찬(李燦), 시 《찬 김일성 장군(讚金日成將軍)》
    pp.40~58 : 한설야(韓雪野)의 혈로(血路) : [문예창작물] 보천보 사건이 나오지 않음.
    pp.59~127 김사량(金士亮)의 뇌성(雷聲) : [문예창작물] 보천보 사건이 나옴.
    1946년 10월 노동신문 연재 후 단행본 출간.
    1947년 부산 신생사 출간. (釜山: 新生社, 1947). 이 책의 인쇄소는 서울에 있는 ‘高麗文化社’였다.
    • 한설야(韓雪野, 1900~1976), 《北朝鮮特輯 : 作家가 본 金日成將軍》 : 북한의 한설야가 1947년 2월 남한 잡지에 기고한 글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1-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2.01 (국립중앙도서관) pp.30~31.
    p.31 에 북한 김일성이 1936년 5월 5일 조직했다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나오지만,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p.21 《金日成將軍遊擊隊戰史(抄)》 : 1946년 6월 『민주조선(民主朝鮮)』에 연재
    p.41 《金日成將軍遊擊隊의 鬪爭과 生活》 : 1947년 8월 15일 『민주조선(民主朝鮮)』에 게재 - pp.46~47에 보천보 전투 나옴.
    p.63 《金日成將軍凱旋記》 (최초본[305]에 수정이 가해졌음)
    부록 : 조국광복회 10대강령,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과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번역이 나옴.
    조선중앙년감(朝鮮中央年鑑) 1950년판 (1 of 3) : 조선중앙통신사(朝鮮中央通信社), 1950년 2월 15일 - 국립중앙도서관
    pp.187~189 : 3. 朝鮮民族의 領導者 金日成 將軍의 歸國 (朝鮮最高人民會議 代議員 選擧를 爲한 立候補者 略歷 紹介文에서)
    [초대 最高人民會議 代議員 選擧는 1948년 8월 25일에 있었고, 김일성은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선거구 (제23선거구)에서 100% 득표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
    [조소 경제 문화 협회 사진첩] 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날, 1948년 8월 25일. (上左) 강동군 입후보자 환영 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 장군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초대 내각#레베데프의 평정서
    소련 군정 민정국장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작성한 북한 초대 내각 요인들에 대한 평정서 : 1948년 12월 25일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연구사업] 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 :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가 한 페이지 가량 있음.
    '북조선' 편에 '위대한 소련군의 진주'와 '조선인민의 민족적 영웅 金日成 장군의 입성'
    pp.380~401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p.392 에 보천보 전투 나옴.
    p.1 : 리나영[306], 김일성 장군의 영웅적 빨찌산 투쟁
    p.32 : 리나영, 김일성 장군의 영웅적 빨찌산 투쟁 (1호에서 계속) -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간략한 언급 뿐임.
    p.45 : 전창철, 김일성 장군이 직접 지도하신 동녕현(東寧縣) 시가전투 / 김일성 장군의 영웅적 빨찌산 부대 성원들의 회상기
    발행연도가 나와 있지 않으나, 뒷부분 내용으로 보아 1950년 6.25 전쟁 중에 배포된 것으로 보임.
    북한 최초의 공식적 김일성 전기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해방 당시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 군중들 사이에 그가 가짜라는 소동이 있은지 불과 한 달도 채 못된 1945년 11월 중순부터 남한의 각종 기록에는 그가 가짜라는 말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는 아직 김일성이 북한지도자가 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든 시점이라 고의로 그를 폄훼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없다. 그를 가짜라고 기록한 미군정의 문헌도 상당히 많으며,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0년대에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기록한 문헌이 수없이 많다. 이런 기록들은 과거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이 돼서 또는 반공정책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김일성 장군은 1920년경부터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름이 어떤 계기로 유명해졌는지는 알기 어렵고, 실존했던 인물로부터 유래하는 이름인지도 불명확하다. 이런 애매함 때문에 김성주가 자신이 김일성 장군인양 행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함부로 그 이름을 사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양 소련 군정 당시 김일성 수령 만들기 정치공작을 총지휘했던 레베데프소장도 1990년 한소수교 직후 찾아간 한국인 기자들에게 무명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조작해서 대중앞에 소개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307] 이 사안에 대해 레베데프만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는데도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며 그의 증언은 고의로 외면하고 있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북한 김일성이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서 금방 잊혀져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성주가 이전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대중들은 그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항일투쟁을 한 적이 없다거나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적이 없는 것으로 잘못 안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나이로 보아 절대로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항일연군에서 투쟁한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라거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으니 진짜라는 주장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Straw Man Fallacy)"이며, 대중을 속이는 허위이다. 동북항일연군이나 보천보 사건, 소련군 88여단 등에 대해서는 공산권 붕괴 이후 1990년대에야 대강의 전체 윤곽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논란 중인 사안이 많은데 해방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나아가 남한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스러워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는 식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에게 서울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있었으나 한번도 서울에 오지 않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남한사람들에게 자신이 1920년대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아닌 가짜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남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던 여운형이나 박헌영은 수시로 평양을 들락거리고 있었으므로 그도 서울에 못 올 이유는 없었다. 김일성이 서울에 온 것은 6.25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일시 점령한 때가 유일하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다는 것은 소련군정의 기록에도 나오며, 소련군정 인사들이나 망명한 북한 고위 인사들 및 수많은 월남민들의 증언으로도 확인이 된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함부로 하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은밀하게 나돌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남한에 온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다, 남한 학계와 언론계를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그가 가짜라는 말을 들어도 잘 믿으려 하지 않고, 남한정부가 조작해낸 거짓말이라 여기는 듯하다.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아래 기사는 평양에 사는 한일우(韓一宇)가 1945년 12월 김일성을 회견한 후 서울의 월간잡지 『민성(民聲)』[308]에 기고한 글인데, 남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도는데 대한 해명과 함께 그를 선전할 목적의 기고로 보인다. 당시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필자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고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이 지시하고, 기고문 내용까지 검토를 거쳤을 것이다. 소련제25군사령부 특별정치선전공작대 부책임자였던 레오니트 바신(1915~2006)은 후일 남한에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공작을 했다고 증언했는데[309], 남한 잡지에 이런 회견문을 싣게 한 것도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도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과거 경력은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현재와 장래의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낭설이 나왔다고 변명하였다. 또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이 맞다는 근거를 댈 필요를 느껴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1935년 2월의 동흥사건(東興事件)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며, 동흥사건의 주역은 사건 당시부터 이홍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 맞다면 불과 8년전 자신이 주도한 사건은 제쳐두고 10년전 남이 주도한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6사장 김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을 몰라서 동흥사건을 끌어와 자신이 주도했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모르고 있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이 아니고, 본인도 모르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해방 당시의 북한 김일성 관련 기사나 문건들에 보천보 사건이 나오는 경우도 거의 없다.

    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1946.01.20)에 실린 평양 거주 한일우(韓一宇)의 기고문 《개선(凱旋)한 우리 팔티산 명장(名將) 김일성장군회견기(金日成將軍會見記)》. 이런 기고문을 남한 잡지에 보낸 것은 김일성을 선전하기 위한 공작 차원으로 보인다.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6.01.20 (국립중앙도서관) p.4
    (잡지 표지에 적기훈장을 단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옴.)
    (전략)...

    그러면서도 自己의 過去, 또는 體驗談은 極히 避하고, 다만 現在와 將來의 「일」에만 關心을 가지었기 때문에, 한때 「가짜 金日成」이라는 流說까지 낳았었다。
    이것은 最近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하여 確實히 「같은」 金日成將軍임이 分明하여졌다。

    一九三x年 겨울 어떤날 새벽, 平北 鴨綠江 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岸 滿洲로부터 反滿軍 一隊가 警察署를 襲擊하여 警察官 多數를 죽이고 武器多數를 빼앗아가지고 凱旋의 나팔을 불며 悠悠히 돌아갔다。 日本軍警은 이 反滿軍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돌아온 人質이 다음같은 事實을 말하였다----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큰 共産村落이 있어 男女老若이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 每日같이 工夫를 하고 軍隊訓鍊을 한다는 것、 人質에게 씩錢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 그밖에 軍人中에는 十八九歲의 美少女가 있어서 白馬를 타고 部下를 指揮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等。

    그리고 頭目은 中國人이 아니라 實로 朝鮮人이요、 그 나이도 二十臺의 靑年 「金日成」이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이란 이름을 筆者가 알기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각종 보고서나 이력서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당시 그 자신이 사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그가 6사장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필자 한일우는 자신이 동흥사건 때부터 김일성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이 대부분 보천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지만,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이것이 유일한 것같다.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것이다. 보천보 사건도 유사한 여타 사건처럼 곧 잊혀지고 북한 김일성 본인조차 알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재발견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날조 조작한 것이다. 이후의 수많은 역사 날조도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으로 집권하여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데 대한 컴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어느 김일성 전기에도 그가 원주(元柱)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 것은 없는 것 같고, 이런 내용의 평양법원 판결문도 알려진 것이 없다. 어차피 남한 사람들이 확인할 수도 없는 평양법원 판결문을 핑계대어 남한에서도 확산되는 그가 가짜라는 소문에 급히 대응하느라 지어낸 말로 보인다. 1945년 12월28일자 서울신문 2면 기사에도 김일성의 본명이 元柱라 했으나 오류일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아닌 동흥사건을 주도했다는 말은 월간잡지 『이북통신(以北通信)』(1948.07.01)에도 나오는데 위 기사의 인용으로 보인다.[310]

    一九三X年 겨울 어떤 날 새벽、平北鴨綠江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洋滿洲로부터 匪賊一隊가 民家를 襲擊하여와서 住民을 多數 殺害하고 多量의 糧食과 金品을 强奪한 다음 住民들을 拉致하여갔다。 그때 被襲 當한 住民들은 이 匪賊무리의 正體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때에 그들 匪賊 무리에게 붓들려갔다가 逃亡하여온 住民의 다음과같은 事實의 말을 듣고 서야 비로소 그 正體를 알게 되었다。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가는데 거기에는 큰 匪賊部落이 있어 軍事訓練 같은 것도 하고 있었고 頭目은 二十代의 靑年 金成柱(現 北朝鮮의 金日成)라는 것이었다。

    북한 소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잡지에서조차 당시 보천보 사건도, 그 사건을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것도 모르고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이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증한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보천보 사건도, 그 사건을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해방 직후 김일성에 대한 남한 기록

    해방 직후 남한 문헌에 나타나는 김일성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해방전 행적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는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해방 직후 북한 문헌에도 나오지 않으니 남한 문헌에도 당연히 없다. 그 사건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래 조선연감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인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서는 6.25 남침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를 거친 후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政界要人錄 p.362 (366/410)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十六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今次 蘇獨戰에 參加
    陸軍少佐로 昇格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 責任者 被任
    北朝鮮共産黨 中央責任秘書 就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臨時人民委員長
    政界人名錄 金日成 : p.459 (465/503)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七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後 蘇獨戰 參加
    陸軍少佐 昇進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共北朝鮮分局 責任者 等 歷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人民委員會 委員長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남한 기록

    해방 직후 남한에서 출판된 아래 책에 나오는 김일성에 대한 글들은 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다. 하지만 만주 시절 대단한 항일투쟁을 했다고만 하고,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직전 5년간 소련군에 있다가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에 왔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2집(第二輯)》, 서울(漢城) : 동방문화사(東方文化社), 1946년 2월 23일
    최형우는 1930년말 만주 오가자 시절의 김일성을 알았던 사람으로, 해방 후 서울로 왔으나 김일성이 북한의 실력자로 부상하자 위 책들에 김일성의 만주시절 전력에 대한 우호적인 글을 남겼다. 위 링크는 김일성 관련 부분만 추출한 것인데, 내용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고, 보천보 사건 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反滿抗日軍
    滿洲建國의 後에 滿洲에 있는 中國側의 不服軍人이 地方으로 分散하야 께릴라的 抗戰을 시작하고 朝鮮在來의 獨立軍이 새로 氣勢를 어더서 反滿抗日戰線에 合流하니 그 衆이 三十萬에 넘고 廣大한 地域에 東閃西忽하야 니른바 治安이 언제나 確立될는지 압히 캄캄하얏다. 특히 朝鮮系의 反滿軍은 多年을 두고 山岳險岨의 地에서 耐乏忍苦의 作戰에 百練한 남아지요 長白山彙의 地理를 燭照的으로 精通하야 그險夷遠近을 自由롭게 利用함으로써 日本軍이 아모리 가서 攻擊올 더하되 百戰百敗를 되풀이하고 다만 擒縱自在하는 그네의 神機妙算을 感歎하고 도라옴이 唯一한 結果라 할 지경이얏다. 그뒤 建國十年의 間에 中國系의 抗日軍은 거의 消散하야 남은 者가 얼마되지 아니하되 東邊道로부터 東部國境에 걸치는 山岳密林地帶에 出沒하는 朝鮮系의 義兵은 오히려 累千名의 勢力을 保持하야서 巧妙하게 蘇聯과밋 中國共產軍으로 더부러 聯絡을 取하면서 滿洲國을 必倒한 뒤에 말것울 豪語하고잇섯다. 滿洲國에서는 이것이 잇슴으로써 百가지 對外宣戰이 죄다 無意味하야짐으로써 討伐, 懷柔의 硬軟兩策을 다쓰고 마조막에는 數千萬圓의 巨費로써 長白山中에 掃蕩大路를 만드러서 徹底한 迫逐으로 自滅에 드라가기를 期하얏스나 이또한 부지럽시 되얏다. 滿洲國이 朝鮮義兵을 爲하야 犧牲한 것이 金錢만 億을 算하되 國은 亡할지언정 朝鮮義兵은 掃滅할날이 업스리라고 닐럿다. 처음 朝鮮義兵의 數ㅣ 만흘적에는 各個의 行動을 取하야 그 두드러진 것만 하야도 金日成, 崔賢, 朴得範, 金先等 名帥를 볼러니 뒤에 차차 求心的으로 集約하야 나종에는 金日成이 統一體의 代表로 들려서 金日成의 名은 드듸여 滿洲政權抗爭史上에 나타나는 許多한 人物中 가장 큰 英雄的 表象이 돠얏다.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김일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1941년 1월 김일성의 귀순을 권유하기 위해 살포한 비라에도 대표자로 그와 매제 박석윤(朴錫胤·1899~1950)의 이름이 들어 있다.[311] 물론 김일성은 그 전해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했으므로 그 비라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매제 박석윤(朴錫胤)은 민생단 사건(民生團 事件)으로 악명 높은 민생단을 만들었던 사람이기도 하다.[312] 해방 후 그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자 최남선은 이러한 과거의 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을 높이 평가하는 글도 쓰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五 金日成軍의 活躍。
    抗日戰에 있어 빼지못할 한 巨大한 存在는 白頭山과 鴨綠江 流域을 中心으로 한 金日成軍의 活躍이다. 滿洲國으로 하여금 一億圓의 經費를 쓰게하고 總督府로 하여금 朝鮮統治의 癌이라 하여 國境江岸이 全部 堡壘化를 하여도 安心할수 없이 頭痛한 것은 抗日戰上 特筆大書할 일이다. 白頭山의 綠林豪傑 靑年將軍 金日成將軍은 平安道出生으로 今年 三十四歲의 靑年이다. 鴨綠江 沿岸一帶의 警察署 駐在所 等 襲擊 放火를 當한 곳이 많아 언제나 그 때마다 憲兵隊 警官隊를 는 多數動員하여 掃蕩이라는 어름으로 報復戰을 開始하였으나 늘 可憐한 慘敗를 當하고 말았다. 이는 金日成部隊가 山林中의 地理에 能熟한 것과 게릴라戰의 奇襲戰法을 取하여 敵으로 하여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늘 五里霧中에 彷徨케 한 것이다. 古語에 勇將아래에 弱卒이 없다는 말과 같이 그 部下 亦是 모두 勇敢하여 普天堡를 襲擊한 때는 民衆을 모아 놓고 一場의 愛國演說을 하여 一般에게 큰 感激을 주었다. 그 行動이 膽大하고 疾風迅雷같으면서도 또 悠悠한 點은 目睹한 者들이 늘 傳하여 오는 말이다. 日滿軍警과의 交戰은 百餘回가 넘으며 特히 그 中에도 明月溝로부터 日兵 大部隊를 誘引하여 安圖가는 途中에서 擊滅한 것과 三道溝로부터 靑山里로 向하는 日本軍 大部隊를 最後의 一人까지 全滅시킨 것은 가장 큰 勝戰이었다.
    저자 강흥수는 어떤 사람인지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해방 직후 남한 문헌 중에 거의 유일하게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당시 신문 기사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사건당시 보도를 찾아보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이 일반에 유명했다는 증거로 쓰기는 어렵다.
    《지도자 군상(指導者群像)》, (大成出版社, 1946년 9월 15일) pp.29~40.
    金南植, 李庭植, 韓洪九 엮음, 《韓國現代史資料叢書 : 1945-1948》 제13권 (제3부 단행본편)에 수록
    실체를 잘 모른는 인물에 대해 찬사와 미사여구만으로 얼마나 긴 소설을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pp.32~35] 二

    金日成將軍은 平安道 出生으로 本名을 金成柱라한다. 少年時節부터 事物에 對한 銳利한 判斷과 臨事에 있어의 果斷性과 그리고 남달은 正義感과 多情한 人間味갖고 있었다한다. 十四, 五歲부터 學生運動 靑年運動에 投身하야 항상 리-더의 資格으로서 前面에서 活躍하였다. 남달은 壯志를 품은 그는 日帝의 監視와 彈壓이 酷甚한 國內에서는 到底히 백여날수없어 少年의 몸으로서 國內를 등지고 滿洲를 찾었다. 滿洲서 그는 地下工作으로 靑年運動을 指導하다가 八個月과 그후 三年間 監獄生活을하였다. 그는 그후 滿洲에서 武裝團을 모아 太極旗를 앞에 세우고 自身이 太極旗手로서 抗日戰線을 펴기 시작하였다. 關東軍이라면 日本의 陸軍가운데서도 精銳를 자랑하건만 少年 金日成의 武裝隊에게는 한없는 飜弄을 當하게되었다. 그 超人的인 武勇과, 天才的인 戰略은 殘虐無比한 日兵들의 心膽을 놀내게 하였다. 이리하야 金日成은 二十世紀의 한낱 神秘的 存在가 된 것이다.
    一九三一年 日本이 滿洲를 侵犯하자 金日成將軍은 滿洲의 中國人民에게 侵略者 日本을 共同으로 擊退할 것을 强調하여 中國의 愛國靑年들에게 깊은 感銘을 주었다. 將軍은 精銳 三十餘名과함께 赤手空拳으로 火繩銃 槍 몇 자루를 들고 山中으로 드러가서 日本軍隊와의 戰鬪를 始作하였다. 接戰때마다 勝利品으로 武裝을 完備한 金日成部隊는 關東軍 最大恐怖의 的이였다. 그뒤 金將軍 은 「中韓反日游隊」의 勇士들과 協力하게되었고 一九三五年에는 金日成將은 第二 東北人民革命軍 司令官이 되었다. 國內와 滿洲 中國各地에서 모여드는 金日成部隊는 極히 短時日內에 師團을 形成하게되었다. 그리하야 金將軍은 師團을 指揮하야 그 鐵筩같이 森嚴한 警戒를 쳐부시고 日兵을 뭇지르면서 鴨綠江, 豆滿江을 넘어 朝鮮을 掩襲해온 일이 屢次 있었다. 金日成部隊의 根據地는 白頭山 附近이였으니 그 神出鬼沒한 빨치산 戰法는 마치 옛날 洪吉童의 傳說을 聯想케하야 日本關東軍을 餘地없이 蹂躪 弄絡하였다. 日本軍隊는 오랜 戲月에 많은 犧牲을 敢行하면서 數많은 軍隊가 出動하여 그 討伐에 努力하였건만 그들은 金日成을 붙잡을 수도 그 部隊를 討滅할 수도 없었다. 討伐하면 할쑤록 느러가고 커가는 金日成部隊--- 한 사람의 金日成을 죽였다고하면 열 사람의 金日成이 出現하는 實로 二十世紀의 이 수수께끼 앞에서 日本軍隊가 戰慄할 뿐아니라, 世界의 軍略家들이 그얼마나 놀내였든가!

    討伐에 成功할 수 없음을 깨다른 日本놈들은 朝鮮民族으로서의 叛逆者들을 通해서 買收와 懷菜의 政策을 썼다. 그리하야 一九三九年代에는 所謂 「東北治安工作」이라 하여가지고 金日成將軍에게 武器를 바치고 歸順하면 朝鮮總司令官을 준다고까지 提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野卑한 政策에 넘어갈 人間이였다면 本來 그는 抗日鬪爭을 始作하지도 않었을 것이다. 將軍은 그들의 提案을 코우슴으로 一蹴하고 더욱 果敢한 戰鬪를 繼續한 것이다. 그 無比의 軍隊的 規律과 訓練은 能히 壓倒的인 日兵을 물니치면서 陣勢를 擴大해온 것이다. 日本帝國主義者들은 金日成將軍의 部隊를 强盜團 혹은 匪賊團이라고 불넜다. 이제 日帝의 後裔들인 南部朝鮮의 親日派, 民族叛逆者, 그리고 그들에게 無意識하게 追從하는 一部 反動輩들은 日帝에게서 배운 慣習으로서 우리의 民族的 英雄을 匪賊頭目이라고 또는 假字 金日成이라고 侮辱的 言辭를 함부로 使用하였다. 그러나 金日成將軍의 部隊는 秋毫도 匪賊行爲를 한 일은 없다. 日帝에게 阿諂하야 蓄積한 者나 勤勞大衆의 搾取로서 蓄財한 者의 財物은 빼앗어다가 貧困에 쪼들니는 사람들에게 分配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지도자 군상(指導者群像)》은 해방 당시의 지도급 좌익 인물들을 평하는 책이다. 여운형, 박헌영에 이어 3번째로 나오는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무려 12페이지나 되는 장황한 글에서 그에 대한 찬사와 미사여구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 일제시대 행적은 위와 같이 상상으로 지어낸 것들 뿐이라 실제와도 동떨어진 것이다. 일본군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한 것은 알지도 못한다.
    김일성의 실제 전력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가짜라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낙인찍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이렇게 김일성에 아부하던 필자는 월북했다가 남로당 숙청 때 처형 당했다고 한다. 겉멋만 잔뜩 든 사이비 지식인이 자초한 일이다.
    p.14 : 《北朝鮮踏査期(完)》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1946년 10월 29일 ~ 12월 6일 기간 북한 방문기)
    잡지 『민성(民聲)』[308]의 특파기자 박찬식(朴燦植)이 평양을 방문 중인 1946년 12월 3일 중앙예술공작단(中央藝術工作團)에 갔다가 나웅(羅雄, 1909~ ?)을 만나 김일성의 진위에 대해 물었는데 나웅은 아래와 같이 잘 준비된 듯한 답변을 내 놓았다.
    [p.18]
    金日成은 가짠가?
    十二月三日(火)

    李夕津氏 『蘇聯의 演劇』 재촉하러 中央藝術工作團에 갔다가 羅雄氏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얘기 끝에 슬그먼히 金將軍의 眞僞論을 끄집여 내 보았다。 南朝鮮서는 아직도 一部에 그런 論議가 行하여지기 때문이다。 이건 또 내가 即接 會見하지 못한 一種 責任感에서도。 羅雄氏는 苦笑를 한번 하더니、

    『眞짜가 따로 있다면 이제 까지 안 나왔겠소? 아니、 設令 假짜래도 좋아요 이젠。 벌써 一年以上을 檢證해 보았으니까。』
    『만나보신 일 있으십니까?』
    『그러믄요。 工作團 일 때문에 가끔 만나지요。 뭐라고 할까. 부드러우면서 剛하고 굉장히 緻密한데 包容力이 絶大하시고 거기다가 무섭게 精力家이시어 어쨌든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분을 가졌다는 것은 역시 朝鮮의 앞날이 多幸하다는 徵兆이겠기 정말 든든합니다。 모두들 나이가 젊은 데서 疑訝를 품게 되는데、 그것은 金將軍을 너무도 터무니 없이 擴大하여 나이는 한 五十、 八字 수염이 쭉 뻗은 山賊같은 그런 분으로들 想像하기 때문이겠지요。 무엇보다도 가짜가 아니란 證據는 將軍 때문에 滿洲까지 人質로 끌려갔던 할머니가 시방도 故鄕인 萬景臺에 살아 계시고、 그 叔父님이 거기서 農事를 짓고 있는 事實입니다。 어쨌든 같은 二十年이라도 平凡하게 市井에서 生活한 普通사람 二十年하고、 山비탈로 遊擊戰을 하고 돌아다닌 二十年하고、 거기 內容이 꽤 다를것 아닙니까? 人格의 重量은 歲月의 長短과 無關하니까요?』

    羅雄氏가 아무리 名演技者라하여도、 내가 본 얼굴에 『演劇』이라고 느껴지는 구석은 없었다。 그것은 臺辭가 아닌 羅雄氏 『人間의 소리』로 액쎈트와 抑揚이 틀림 없이 發音되었었기 때문에。

    夕津氏는 오늘도 違約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유명했으므로 진짜가 맞다면 해방 당시 나이 50은 넘어야하는 것이 당연하나, 나웅은 핵심은 피한채 북한 김일성이 훌륭한 사람이라거나, 조부모와 숙부가 고향 만경대에 산다거나 하는 말로 그가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 북한 당국에서 내놓은 그럴듯한 해명을 그대로 따라서 전해준 것인지, 아니면 나웅 본인이 정말로 그렇게 맏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자도 미심쩍어하면서도 나웅의 진지해 보이는 설명에 설득당한 것으로 보인다. 나웅은 남한의 잡지사 기자에게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고 답했다가 혹시 그렇게 기사라도 나가는 경우에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당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북한에도 상당히 퍼져 있어 이런 소문의 확산을 막기위해 해명성 변명을 유통시키고 있는 사정을 보여준다.
    民聲 제3권 제1-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2.01 (국립중앙도서관)
    p.21 : 《北朝鮮踏査期(1)》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民聲 제3권 제3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3.01 (국립중앙도서관)
    p.14 : 《北朝鮮踏査期(2)》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 한설야(韓雪野, 1900~1976), 《北朝鮮特輯 : 作家가 본 金日成將軍》 : 북한의 한설야가 1947년 2월 남한 잡지 『민성(民聲)』[308]에 기고한 글
    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1-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2.01 (국립중앙도서관) pp.19~20.
    김일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 일변도의 글. (이렇게까지 김일성에 아부해야 하는지 불쌍한 느낌이 드는 글임.)
    동북항일연군은 이름만 나오며, 북한 김일성이 1936년 5월 5일 조직했다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나옴.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신문 기사

    남한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와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김일성에 대한 글이 자주 실렸으나 대부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미사여구만 늘어놓을 뿐, 그의 전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별로 없다. 해방전 5년간 소련군에 있다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에 왔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쓰기는 하지만 실제로 어디서 뭘 하다 온 인물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으므로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진다.

    해방직후 김일성 기사에 대한 조사 연구 결과

    최강미는 해방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실린 김일성 관련 기사들을 귀국한 다른 항일투사들에 대한 기사와 비교하며 조사 연구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313]

    [pp.45~46] 세 명의 약력 중 분량이나 내용이 가장 풍부한 인물은 무정(武亭)인데 특히 다른 인물에 비해 개인적인 비범성을 부각시키는 내용이 많다. 대신 다른 두 인물과 달리 학력 사항이나 현재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생략된 두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내용을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김두봉(金枓奉)은 개인적 비범함에 해당되는 내용이 없어서 영웅적 투사보다 학자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김일성의 경우, 비범함을 나타내는 일화는 있으나 무정에 비해 빈약하고, 다른 항목들도 정보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이렇듯 약력의 내용상으로는 가장 생생한 영웅성을 지닌 인물이 단연 무정이지만 시종일관 현격히 부각되는 인물은 김일성이다. 따라서 김일성에게 속한 찬양의 수식들은 이런 실제적 내용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나 균형감이 떨어져 다소 공허하고 과도한 인상을 준다. 이는 김일성의 형상이 텍스트상에서는 영웅으로서 상대적으로 불균형해지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

    논문 여러 곳에서 저자는 김일성에 대한 찬양의 수사는 과도한데 비해 그가 무얼하다 온 사람인지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이유를 파악하지는 못한 것같다. 좌익지들은 소련이 내세운 북한 지도자 김일성에 대해 맹목적인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북한 김일성은 실제로는 국내의 어느 누구도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모르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같은 논문에서 저자는 이런 기사들에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지적하지만[313] [p.46 각주 35)], 그에 대한 설명은 내놓지 못한채 의아해 하기만 한다. 보천보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그보다 더 크거나 비슷한 규모의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과 마찬가지로 곧 잊혀졌고, 해방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은 여전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유독 보천보 사건만 유명해진 것은 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그 사건의 주역이 아니며,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공적을 가로챘다.

    이 속편 논문에서 검토한 김일성 관련 기사들에 대해서도 최강미는 찬양은 과도한 반면에 구체적인 공적 내역은 없고, 심지어 보천보 사건도 거론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전편과 동일하다. 아래는 좌익지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6년 4월 12일자에 실린 서중석(徐重錫)의 『지도자 군상(指導者 群像) ③ 김일성론(金日成論)』에 대한 평가이다.

    [pp.316-317] “김일성론”은 서두부터 이미 최상으로 규정된 인물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적인 첫 문장은 이후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투쟁 이력이 아닌, 광범위한 수준의 찬양으로 이어짐으로써그 선언이 모호한 이력을 통해 지지되어 버렸다. 당시 좌파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과 박헌영에 이어 세 번째로 소개된 만큼 기획자인 좌파 지식인들에게 인식된 그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데, 그 위상에 비해 구체적인 이력으로서 내세워지는 정보량은 많지 않고 대체로 수사적이며 모호한 가운데 과도하게 추앙되고 있다. 한설야의 작품들에도 언급되고, 동년 8월에 발표되는 김사량의 희곡 뇌성(雷聲)에서도[314][315] 대대적으로 다루어지는 보천보 전투에 대한 언급조차없다.24

    24 해방기 김일성에 대한 소개 기사들에서 그의 투쟁 이력에 대한 정보는 대체로 구체적이지 않은데, 보천보 전투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하다. 특히 ‘지도자군상’의 기사들은 해당 인물을 소개하고 지지도를 높이는 데있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구체적인 미담이나 일화 등도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김일성의 대중 인지도를 높이는 데 대표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온이 사건이 이러한 성향의 기획기사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맥락에 대해 좀더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인 것 같다. 해방 후 남북한의 언론을 통해 김일성의 이력으로 소개된 단편적 정보들은 1937년 6월6일 조선일보에서 보천보 사건에 대한 기사와 함께 김일성을 “저기 공산계 병비의 두목 김일성은 평양출생의 금년 이십칠세라고 하는 아직 년소한 자인데 김일성의 일흠이 전하기는 작년 일은봄부터로 그세력은 확실치 안흐나 장백현을 근거지로 지금까지 수시출몰하엿는데 종래에도 무기를가지고잇슨것은 알리워 잇든바이나 이번에 경기관총 네대를 가젓든 것등으로 보아 무기도 상당히 가지고잇는 것으로 관측되고 잇다 또 김일성은 그의 아버지 때부터 만주에 건너가 그 방면에 참가하여 잇는 것이라고 전한다”고 소개한 기사인 金日成의 來歷 과도 유사한데, 언론과 밀접했을 당시 좌익지식인 필자들이 해방 후 김일성과 관련해 적극활용 가능했을 만한 이 사건을 김일성 본인도, 기자들도, 1946년 8월에 발표된 혈로에까지[314] 대중매체에서 대체로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은 주의할 만한 맥락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문 저자 최강미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전국적인 유명인물이 되었다는 주장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해방 직후 남한 좌익지들에 실린 북한 김일성 관련 기사에 김일성에 대한 과도한 찬사만 늘어놓을 뿐, 보천보 사건이나 동북항일연군에서의 그의 투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기사들은 해방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보천보 사건도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동북항일연군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는 실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국내 좌익들은 소련을 맹종할 때이므로, 소련이 내세우는 김일성의 내력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조건적인 찬양만 하고 있었다.

    해방직후 김일성 관련 저작에 대한 조사 연구

    소련 군정 인물들의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1.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소련군 정치장교 G.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3.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The Moscow Times Jul. 22, 2004
      위 기사를 번역, 요약한 기사: 그리고리 메클레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구소(舊蘇) 군정 치밀한 작전” 동아일보 2004-07-23
    4. "Крестный отец" Ким Чен Ира «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05/12/2002
      "Godfather" Kim Jong Il : «Argumenty i Fakty (Arguments and Facts)» № 11 05/12/2002
    5. 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 SoftMixer
      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 Waback Machine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6. 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Андрей Почтарев, Независимое военное обозрение. 2005-01-14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 : Andrey Pochtarev, Independent Military Review. 2005-01-14
      여기에는 김일성 본인이 전사한 선배 지휘관의 이름을 따다 썼다고 했다는 메클레르의 증언이 나온다.
    (러시아어를 구글로 영역하여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
    1930년대 중반부터 그(북한 김일성)는 김일성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인들 사이에 대단한 권위를 가졌던 전사한 대장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Since the mid-30s, he began to use the pseudonym Kim Il Sung, taking the name of his deceased squad leader, who enjoyed great authority among Koreans.
    [С середины 30-х гг. стал пользоваться псевдонимом Ким Ир Сен, взяв фамилию своего погибшего командира отряда, пользовавшегося большим авторитетом у корейцев.]
    ............
    다른 동지들의 경우처럼 그(북한 김일성)도 존경받던 전사한 게릴라 부대 지휘관을 기념하여 그 이름을 따라 썼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The fact that, following the example of his other comrades-in-arms, he took this name in memory of his deceased beloved and respected guerrilla unit commander, he himself told me.
    [То что, он по примеру других своих боевых товарищей взял себе эту фамилию в память о своем погибшем любимом и уважаемом командире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он сам мне говорил.]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겸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성 평정서 : 레베데프 작성
    레베데프 비망록.pdf (김영중 전 제주경찰서장)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기초학문자료센터 (KRM)
    첨부된 pdf 파일 중 "2. 레베제프 일기 러시아어 원문" / "18. 레베제프 일기 번역문" (온라인 열람 가능)
    쉬띄꼬프 일기.pdf
    테렌티 스티코프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1945년 10월 20일 경 본국에 올린 보고문
    김일성은 언제 북한의 지도자로 지명되었나 NK News 2015년 11월 04일
    우드로윌슨센터: 김일성, 1945년까지 북한 지도자로 미확정 사료 공개
    Soviet Report on Communists in Korea, 1945 Wilson Center
    전(前)소련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비서 말렌코프 동지,

    소비에트 연방 국방 인민워원회 부위원장 불가닌 대장 동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 시킨 상장 동지께
    원래 보고해 드렸던 내용에 추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북조선에서는 10월 20일 현재 공산주의자 3000명 이상이 있습니다. 모든 이북 5도에 당 도위원회는 설립되었으며, 군대 내에 군 위원회도 다수 형성되었습니다. (중략)

    헤이조(평양)시에는 10년 동안 만주 조선인 빨치산 부대 사령관을 지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하바롭스크 지역 88특수여단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이 있습니다.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인민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 그리고 조선 인민의 항일 영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인민 사이에는 이 사람에 대한 수많은 일화가 있고, 그는 참으로 조선 인민에게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김일성을 잡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의 체포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모든 민주 계층, 특히 농민 속에 인기가 높습니다. 김일성은 향후 조선 정부를 위한 적합한 후보자입니다. 인민민주전선이 설립되면 김일성은 이를 지도할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김일성에 대립하여, 미국인들은 하와이 열도에서 유명한 조선인 망명자인 이승만을 조선에 데리고 왔습니다. 10월 20일에 리승만을 찬양하는 데모가 서울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결론과 제안

    박헌영이 영도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 봐야한다는 유일하게 올바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 박헌영이 영도하는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조선의 전체 공산주의 조직들을 영도하는 중앙 기관으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박헌영은 가장 준비된 간부로서 자기 기관을 강화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중략)

    ● 공산당, 민주당, 민주청년동맹, 여성민주조직, 직업동맹 등등을 통합하여 반일민주조직으로 통일된 민주연합을 설립하여야 합니다. 이 연합 지도자로 제일 인가가 높고 인민이 사랑하는 민족적 영웅, 김일성을 임명하여야 합니다.
    1. 레오니트 바신(Леонид Васин), 《대위 동무 (Товарищ Капитан)》, 소련의 잡지 「극비(極秘),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1991년 7월호;
      기사 내용 요약 :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 46년3월 蘇軍장교 방어로 연합뉴스 1991-08-14
    2. 「날조된 英雄」金日成 / 바신, 레오니트 新東亞 398호 (1992.11) pp.486-501

    소련 문헌의 김일성 관련 기록

    해방 직후의 소련 문헌에 나타나는 김일성 전기들은 조작과 과장을 통해 그를 대단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북한 뿐만 아니라 소련이 내세운 다른 위성국가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영웅으로 조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 1945년 10월 10일자 북한 신문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 기사[316]
    당시 북한에서 간행되던 신문은 소련군 기관지 ‘조선신문(朝鮮新聞)’ 하나 뿐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317] 아래 기사는 ‘평북신문(平北新聞)’에 실렸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0월 10일자 북한 신문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 기사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동아일보사, 1992) pp.223~224.

      1945년 10월 10일 통제받던 북한의 신문에는 '전설적 영웅 김일성' 의 북한 도착 사실과 가까운 장래에 대한 그의 생각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한 선전 자료의 밑바탕에는 모스크바에서 창작된 전설이 깔려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은 1912년 평양 남부지역 농촌의 조선인 선생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의 아버지는 지하 민족해방 활동과 1919년의 3월 봉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두 번 체포되었고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일본 보안원들이 가한 고문과 기아 때문에 생긴 중병으로 죽었다. 슬픔과 가난 때문에 김일성의 어머니도 일찍 죽었다. 고아가 된 13세의 김일성은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서 1929년 길림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1930년 김일성은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해 그는 조선인 애국자들로 소규모의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부대를 이끌면서 김일성은 조직가 및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일본군 독립 부대를 과감하게 기습하면서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원들과 그의 군사적 명성이 증가하였다. 1933년 김일성의 부대는 빨치산 연대로 탈바꿈하였다. 그의 일본 침략자들과의 전투 횟수는 1000회 이상이었다. 곧 김일성은 빨치산 병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37년에는 나중에 빨치산군으로 통합되는 수많은 빨치산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 해부터 김일성은 일본 침략자와의 전투에서 헌신적 용맹성과 강철 같은 군대 규율 그리고 자신의 인민들에 대한 충성심을 갖춘 빨치산군의 전사 및 지휘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김일성의 빨치산군은 북한 및 만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효과적인 활동을 펼쳤다. 30년대에 김일성의 이름은 한국 및 중국 애국자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해졌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빨치산 부대를 궤멸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김일성의 머리에 그들은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인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일성은 일본 침략자들에게 잡히지 않았고 빨치산군을 지휘하여 일본 강도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당시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김일성에게 빨치산 전쟁을 그만두는 대가로 만주지방의 현 지사 직위 또는 일본군 장군직을 약속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러한 선동에 대한 대답으로 공산주의자인 김일성은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투쟁을 강화시켰다. 일본군 사령부는 중국 전선에 있던 자신들의 군대를 되돌려 김일성이 지휘하는 한국 및 중국 애국자들의 군대와 대항 하게 했다.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이 궤멸한 후 김일성은 자신의 군사적 동지의 커다란 그룹과 함께 북한으로 되돌아와서 한국인의 통일, 독립 그리고 국가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투쟁을 지휘하였다.”

      이 장에서는 수많은 이설, 억측, 거짓주장, 사실의 왜곡 그리고 사건의 고의적 침묵들을 모두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런 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련으로부터 '김일성 부대'의 평양 도착 후에 소비에트 전문선전요원들에 의해 고안되고 이용된 것들이다. 단지 그런 북한의 '민족적 영웅' 창조를 위한 대규모 선전 캠페인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만은 강조 되어야 겠다.

      김일성대위는 도시 경무 사령관 코롤료프대령의 차석자로의 임명에 관한 명령서를 지니고 평양에 도착했다.10) 젊은 소련 장교에게 이것은 대단한 승진이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좀더 중요한 권좌가 다른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북한공산당 조직국이라고 불린 곳에 있었다.

      10) 국방부 중앙문서국, F 3, 목록 21144, D 7, L 54.
      ― 1945년 10월 10일자 북한 신문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 기사
    코로트코프는 위와 같은 북한신문의 기사가 수록된 소련문서가 어떠한 것인지 명기하지 않았으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러시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АМО) 소장 한국 관련 자료 목록"에 나오는 아래 문서로 보인다.[318]
        3. 1) 문서번호(폰드, 오피시, 젤로): ЦАМО Ф. 2 Оп. 17582 Д. 2
           2) 젤로 명칭: Выписка из газеты Пинбук Синмун (평북신문 발췌)
           3) 페이지: 4-5
           4) 문서(도쿠멘트) 이름 및 설명: 김일성 장군의 영광스러운 투쟁의 길에 대하여
           5) 생산 날짜: 1945.10.10
           6) 국편 소장 유무: 없음
    《우리는 조선을 보았다 (мы видели Корею, We saw Korea)》 (1948) 초판의 김일성 사진.


    Molodaya Gvardiya(Young Guard), Leningrad (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Ленинград), 1948.
    러시아어 txt 파일을 번역기로 영역하여 보면 내용을 알 수 있고, 러시아어 원문 pdf 파일도 볼 수 있음.
    해방 1주년인 1946년 8월 15일을 전후한 북한 여행기이다.
    pp.23~35 : 김일성 장군(General Kim Ir-Sen, Генерал Ким Ир-Сен)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그리고 있으나, 실제와는 거리가 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러시아어 초판(1948)의 일부 이미지 : 2판과 달리 "김일성 장군" 부분에는 사진도 들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
    A. 기토비차, B. 볼소프 공저 / 최학송 역, 『1946년 북조선의 가을 : 우리는 조선을 다녀왔다 [소련작가들의 해방직후 북조선 방문기] 』 서울, 글누림, 2006년 04월 18일
    [A. 기토비차, B. 볼소프는 A. 기토비치, B. 부르소프의 오기이다. 1949년의 중국어 번역본에서의 중역(重譯)임.]
    [어제와 오늘] 1946년 북한과 2006년 워싱톤 주간한국 2006년 5월 31일
    책 내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
    • 미국 정보기관의 소련 대백과사전 김일성 전기 번역문 : 1955년 2월 9일
    IB-13.15 Translations from the Soviet Encyclopedia, Biographies: Kim Il-Sung U.S. Information Agency (1955년 2월 9일)
    (김일성 전기의 전문은 위 링크에서 볼 수 있고, 아래는 이 전기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 서문 부분임.)
    TRANSLATIONS FROM THE SOVINT ENCYCLOPEDIA

    BIOGRAPHIES
    KIM II-SUNG
    Introduction
    Soviet propaganda often makes former heroes into un-persons, It is also capable of making un-persons into heroes. This official Soviet biography of Kim Il-Sung is a case in point.

    When the Soviet armies occupied North Korea in 1945 they brought with them an unknown former guerrilla against the Japanese, named Kim Sungchu, who had been schooled in Moscow during World War II. At a liberation celebration in Pyongyang on October 3, 1945 this minor figure was introduced to the Korean public under the name of Kim Il-Sung, a renowned resistance fighter of earlier times. Now he commands the party, government and army in the North Korean puppet state. As a Soviet creature his biography actually begins in 1945, but he has been retroactively granted stature as an organizer and leader of the Korean guerrillas against the Japanese.
    소련은 영웅을 인격말살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김일성도 그런 경우라고 했다. 또 소련은 북한 점령후 무명의 전직 항일 게릴라 김성주를 데려와 이전 시기에 유명했던 항일 투사 김일성의 이름으로 소개했다고 하였다.
    Great Soviet Encyclopedia (GSE; Russian: Больша́я 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БСЭ는 초판 65권(65,000 항목)이 1926–1947 기간에, 2판 50권(100,000 항목)이 1950–1958 기간에 간행되었다.

    북한 방문 외국인의 김일성 관련 기록

    Anna Louise Strong (1885~1970), 《In North Korea: First Eye-Witness Report》, 『Soviet Russia Today』, New York: 1949 : Text version
    pp.21~24 "Some Leading Personalities"에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상당히 길게 나오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먼 조작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남한의 여운형 암살 사건에 대해 비난하지만, 북한의 현준혁 암살이나, 조만식의 연금과, 우파 인물들의 정치활동 억압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번역 : 안나 루이스 스트롱, 《기행 : 북한, 1947년 여름》
    김남식 외 저, 『해방전후사의 인식(解放前後史의 認識) 5』 (서울 : 한길사, 1989; 개정판 2006) pp.497~538.
    Anna Louise Strong은 지독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소련과 중국의 공산당을 찬양하는 저술 활동을 했다. 주로 중국에서 활동했고, 거기서 죽었다. 스트롱은 1947년 8월 5일부터 19일까지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도 만나본 후 쓴 위 기행문도 북한에 대한 찬양 일색이고,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도 터무니없이 미화하고 있다.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북조선 체류에 대한 보고
    발신자 제25군 사령관 코로트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민정국 대표 서리 이그나티예프 / 수신자 말리크, 비류조프, 시티코프
    발신일: 1947.08.22. / 수신일: 1947.08.25.

    해방후 남북한의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에 대한 검토

    해방 전 보천보 사건과 관련한 언론 보도는 사건 당시에 집중되어 있고, 6사장 김일성의 전사 보도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은 점점 잊혀져 간다. 비슷한 규모의 독산사건, 토성습격사건, 동흥사건 등이 완전히 잊혀져 오늘날에는 물론이고 해방 당시에도 거론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보천보 사건도 잊혀진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에 김일성이 집권한 후 이 사건을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조작 가공하여 선전하는 바람에 보천보 사건만 후일에 유명한 사건으로 만들어졌다.

    해방 후 남북한의 기록에 보천보 사건이 거론된 경우를 찾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해방후 남한의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

    8.15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말까지 남한의 기록에 보천보 사건이 나오는 것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강흥수(姜興秀), 『朝鮮獨立血鬪史』 (서울: 高麗文化社, 1946.05.05) pp.142~143.
      五 金日成軍의 活躍。 :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남한 기록 참고

      미군정기에 보천보 사건을 언급한 기록은 이것 하나만 알려져 있다. 이를 근거로 보천보 사건이 해방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알던 유명한 사건이라 하기는 어렵다. 당시는 좌파신문들이 북한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기사도 많이 내보냈지만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이 사건을 몰랐다는 방증이다.
    • 이북(李北) 저(著), 『소련의 괴뢰(蘇聯의 傀儡)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
      서울: 삼팔사(三八社), 1950년 11월 20일 (비매품) / 1952년 서울: 삼팔사(三八社)에서 재간행
      pp.45~46 : 북한의 『김일성장군투쟁사(金日成將軍鬪爭史)』를 인용하여 보천보 사건에 대해 언급함.
    •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북한 15년사(北韓 15年史) : 1945年8月 - 1961年1月』 지문각((知文閣), 1961
      [p.60] 金策과 金一은 金日成과 함께 실지로 抗日유격전을 했던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람들을 가리켜 「甲山派」라고 한다. 甲山派라는 것은 甲山에 비밀근거지를 두고 抗日투쟁을 했던 系列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데 특히 普天堡습격사건을 제일 큰 공훈으로 내세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金日成部隊」가 甲山에서 抗日투쟁을 했다는 말이 아니고 甲山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지하조직을 가지고 金日成部隊의 지령하에 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작년에 病死한 朴達 같은 자는 甲山의 地下責으로 金日成部隊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했다는 것이다.

      결국 日帝下에서 고생하는 동포들과 완전히 遊離해서 海外에 도망친 것이 아니라 국내지반을 가지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을 내 세우려는 것이지마는 오늘날 甲山에는 金日成部隊의 항일 투쟁을 말하여 주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1세대 북한학자 김창순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거의 모르고 있다. 1961년 당시는 북한이나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진 것이 없어 전문학자들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는 해방 직후 북한에 살다가 6.25 때 월남했는데, 당시 북한에서는 일부 책자에 보천보 사건을 거론하고 있었지만 그는 보지 못했던 듯하고, 아직 북한의 일반인들에게까지 그 사건이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순의 1956년 저서 『역사의 증인 (歷史의 證人)』 (서울 : 韓國亞細亞反共聯盟, 1956)은 가짜 김일성에 대해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보천보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 한재덕(韓載德, 1911~197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4)』 1962.05.28 동아일보 2면
      그런대로 김일성(金日成)의 가장 활발한 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37(一九三七)년 「보천보」 사건 당시의 그의 직책은 이른바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제六사 사장(師長)이었다. 「항일연군」이란 앞서도 잠간 말한 바와 같이 중국공산당이 만주(滿洲)에서 반일세력이라 하여 중국계통의 마적과 비적까지를 규합하여 꾸민 연합적인 무장부대였는데 그것을 지도하고 움직인 것은 주보중(周保中) 등 중국공산당 간부들이었다. 김일성(金日成)은 그 밑의 한국인 중심의 제六사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 「사(師)」란 사단이 아니라 백(百)명 내지 二백명의 대원을 거느리는 정도의 부대이었다.
    • 北韓(북한)은 어떻게變(변)했나?(1)解放(해방)18년 1963.08.15 경향신문 3면
      그러기에 김일성(金日成)이가 가장 굉장히 내세우는 소위(所謂) 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 때에도 김일성(金日成)은 전기(前記) 주보중(周保中)이 영솔(領率)하는 부대(部隊)의 한 수장(帥長)(한 「수(帥)」란 백명정도(百名程度)로 구성(構成))에 불과(不過)하였다.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말하면 김일성(金日成)은 제6수장(第6帥長)이었다. 이것이 그의 황금시대(黃金時代)였다
      『단천군지(端川郡誌) (단천군지 증보편찬위원회, 1971)』의 《단천 출신 김일성설(金一成說)》. 여기에 포함된 『민족의 별들 (柳麟 著) 중』이란 글이 『신사조(新思潮)』 1963년 9월호에 실린 유석인(劉錫仁)의 글을 전재한 것이다.
      수(帥)라 한 것은 사(師)의 착오이며, 수장(帥長)도 사장(師長)의 오기이다. 당시는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어 중공유격대(中共遊擊隊)나 동만유격대(東滿遊擊隊)라 칭하고 있고, 김일성은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부하였는데도 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의 부하라고 했다. 주보중(周保中)이 김일성의 직속 상관이 되는 것은 소련으로 넘어가서의 일이다.
    • 유석인(劉錫仁, 1894- ?), 《김일성의 정체에 대한 고증 (金日成의 正體에 對한 考證) : 이북(以北)의 金日成은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이 아니다》 『신사조(新思潮)』 제2권 제7호 통권18호 (1963년 9월) pp.165-169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본명 金昌希, 1888 ~ 1926) 장군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라 주장한다. 유석인은 단천 출신으로 김일성(金一成) 장군을 직접 알던 사람이라 단천 지역에 떠돌던 소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最近(최근)의 北傀文壇(북괴문단) 1968.07.23 조선일보 4면
      「보천보전투승리의 기념탑앞에서」 (김병두) : 북한 문단에서 발표된 시의 제목만 보도한 기사.
    • 『북한총감(北韓總鑑) : 1945-68』 공산권문제연구소(共産圈問題研究所), 1968
      [부록(附錄) : 北傀人名錄 p.1026 김일성 약력] ▲1937年 함남 보천보(咸南 保天堡) 일경 습격(日警 襲擊)을 감행(敢行)함.
    • 홍태식(洪泰植) 저, 韓國 共産主義 運動 硏究와 批判: 解放前篇 (서울 : 三省出版社, 1969)
      만주의 동북항일유격대(東北抗日遊擊隊)에 대해서도 간략히나마 다루고 있다.
      p.495부터 북한 김일성의 항일연군 활동을 다룸. 그가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이라고 함. 처음으로 보천보 사건에 대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주도자는 북한 김일성이 아닌 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시참모장(施參謀長, 중국인)이라고 함.

    위의 사례 외에도 추가로 더 나올 가능성은 있지만, 이로부터 남한 사회의 보천보 사건에 대한 인지도가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극히 예외적인 1946년 강흥수의 기록 하나를 제외하면, 1950년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의 것은 북한 문헌을 보고 언급한 것이고, 1960년대에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의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기록한 사례가 몇 건 보일 뿐이다. 모두 사건의 이름만 언급한 정도이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언급이 없다.

    즉 남한 사람들은 해방 직후는 물론이고 1960년대말까지도 보천보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보천보 사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한국이 가난할 때라 1960년대 말까지는 북한 김일성에 대한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부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인 정도외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없었다. 1960년대에는 보천보 사건 당시의 신문 기사나 기록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1974년에 이명영이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을 간행하면서 최초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해방직후부터 불거진 종래의 김일성 가짜설과는 무관한 새로운 문제제기였다. 6사장 김일성의 전사는 당시 주요 언론들이 모두 보도했지만 완전히 잊혀져서 이명영이 재발굴하여 새롭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대숙, 와다 하루키 및 일단의 신진학자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고, 오늘날 이명영은 당시 정권의 입맛에 맞는 연구를 한 어용학자로 몰리고 있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인정하고 있고,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매장 당할 지경이 되어있다. 나아가 동아일보 등이 보천보 사건을 호외로 크게 보도하여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므로[146] 그가 가짜 아닌 진짜가 맞다면서 해방직후부터 퍼졌던 그가 가짜라는 주장까지 잘못된 것으로 판정을 내리고 있다. 그들은 친일파 박정희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스러워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시킨 탓에 김일성 가짜설이 퍼졌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위에 보이는대로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기에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의 항일경력에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 중에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희망섞인 추측을 역사적 사실인양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서 검토해보면 북한 김일성은 처음 알려졌던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가짜가 맞을 뿐만 아니라,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당시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해방당시 사람들은 보천보 사건동북항일연군도 잘 몰랐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명백하므로 가짜라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거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고 하면 매장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는 수두룩하게 나왔는데도 학계에서는 이런 수많은 증거들을 쉬쉬하며 외면하고 있다.

    해방후 북한의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과 김일성 우상화 세뇌 교육

    남한과 달리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는 해방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든 간행물이 정권의 선전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김일성에 관한 글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보천보와 그 인근 지역 사람들을 제외하면 북한 사람들도 해방 당시 남한 사람들처럼 보천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는 김일성 본인도 보천보 사건을 몰라 1945년 12월의 기자회견에서 엉뚱한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남한 잡지에 기고한 이 글은 북한 김일성 본인이 보천보 사건 주역인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고 스스로 실토한 보기드문 획기적인 자료이다. 이때만 해도 김일성 본인도 보천보 사건은 모르고 동흥사건만 알았는데, 지금은 동흥사건은 완전히 잊혀지고 보천보 사건이 북한 김일성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둔갑해 있는 것이 과연 인위적인 조작없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현재 알려진 바로는 해방직후부터 1946년 초까지도 보천보 사건이 나오는 북한 문건은 발견된 것이 없다. 당시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처럼 보천보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1946년 5월부터 보천보 사건이 나오는 문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북한의 모든 간행물은 정권의 선전물이므로, 이는 정권차원에서 보천보 사건을 모르는 일반 주민들에게 그 사건을 김일성의 대단한 항일전공이라며 선전하는 용도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보천보 사건에 대해 모르던 북한 김일성이 이 무렵부터 이 사건을 자신과 이름이 같은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것을 알고는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내세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일성은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내세울 만한 항일전공을 간절히 필요로 하여 자신과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의 전공을 훔쳤을 것이다.

    p.1 : 《김일성 동지의 약력(畧歷)》 : 조국광복회 총회장, 1936년 봄 반일연군 제6사장, 1938년 제2군장 역임.[319] 보천보 사건은 나오지 않고, 압록강 연안을 원정했다는 말이 있다.
    p.3 한설야(韓雪野), 《김일성장군 인상기(金日成將軍 印象記)》
    갑산보전사건(甲山保田事件) : 함흥법원판결문초(咸興法院判決文抄) - 혜산사건 판결문 발췌 번역.
    여기에 보천보 사건이 나오는데 해방 후 북한 최초의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이처럼 북한은 1946년 5월경부터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의 항일전공으로 언급하기 시작하는데, 주요 근거문헌은 혜산사건 판결문으로 보인다. 이 판결문의 발췌 번역은 아래 책에도 나온다.

    부록 : 조국광복회 10대강령,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과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번역이 나옴.
    [附錄] 日帝公文書에 나타난 金日成部隊戰鬪記錄(惠山事件判決書에서)

    일제시대에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북한 지역의 신문도 있을 것이나,[320] 지방 신문사들이 영세하여 지난 신문의 지면을 제대로 보존했을 가능성도 크지 않고,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한의 경우도 일제시대 지방 군소 신문사들의 지면 보존 상태는 열악하다.

    북한이 보천보 사건을 1946년부터 일부 출판물에서 김일성의 전공으로 소개했지만 발행 부수도 제한적이라 그런 책자를 접하고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고 당시 문맹률도 높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교과서에는 언제부터 보천보 사건이 포함되어 가르치기 시작했는지 알려진 자료가 없어 파악하기 어렵다.
    책자로 소개하던 수준을 넘어 그 사건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선전하며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주민들 세뇌교육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8월 종파사건으로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한 후 김일성이 보천보를 직접 방문한 1958년 무렵부터로 보인다.[321]

      1955년 8월 7일 혁명박물관이 세워지면서 '혁명 전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보천보전투'의 현장에는 30주년인 67년 6월 4일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혜산시 소재)'이 만수대창작사에 의해 건립되기도 했다. 혁명전적지 조성사업은 1977년 6월 김 주석이 전투명령을 내렸다는 '곤장덕 사령부' 자리에 헌시비(獻詩碑)와 정찰 기념비 등을 세우면서 마무리됐다.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문화와 체육 분야에 '보천보'라는 이름을 딴 단체와 체육대회 등도 만들어졌다.
      보천보전투 승리기념일을 맞아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찾는 답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노동신문이 4일 보도했다.

      신문은 종합된 자료를 인용해 "지난 60여년동안 2,206만 2,000여 명의 근로자들과 인민군장병, 청소년학생들이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답사했다"고 전했다.

      .........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국내 뿐 아니라 주변 국가까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북한 주민들이 보천보 전적지를 답사하게 강제하는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에 대한 이런 장기간에 걸친 세뇌교육을 통해 오늘날 북한에서는 보천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위 기사에서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국내외에 유명해졌다고 한 것은[146] 위에서 본대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더 대담하고 규모도 컸던 동흥사건 때문에 이홍광 이름이 유명해진 일도 없다. 발생 직후 곧 잊혀졌던 보천보 사건이 다시 유명해진 것은 김일성 집권 후의 대대적인 선전 때문이며, 남한의 학계 다수를 점한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북한의 이런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마치 사건 당시부터 줄곧 유명하여 해방 당시 사람들도 잘 알았던 것처럼 대중을 속이고, 이 사건을 빌미로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뒤집는데까지 나아갔다. 김일성이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동흥사건보다 더 작은 규모의 보천보 사건은 당연히 잊혀져 오늘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사생활 관련 증언

    김일성 관저의 하녀였던 일본인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

    •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 旧姓:萩尾, 1929~ ?)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 pp.119~122 에 수록.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고바야시는 해방 직후 1년 가량 김일성의 관저에서 가사일을 돕는 하녀로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한 수기임.
    日本人女性が見た金日成

    当時の朝鮮半島には、まだ多くの日本人が残留しており、避難民はソ連軍や朝鮮人から使役と称して強制労働を強いられていた。このころ金日成宅では2人の日本人女性が女中として働いていた。日本人の元女中の回想[16]によると、金日成は、接収した日本人の邸宅に住んでおり、夫人とユーラ(長男。後の正日)・シューラ(次男。万一ともいう)という名の息子と一緒に住んでいた。食事方式はロシア式を採用し、朝食10時、昼食3時、夜食が9時~10時だったという。金正淑夫人も日本人女中2人に、当時の日本人避難民の平均的な食事からすれば豪華な白米や鶏肉等を食べさせていた。ただし食事以外では金家の生活程度は高くは無く、トイレはチリ紙ではなく新聞紙で用を足し、時にはボール紙で用を足してトイレを故障させてしまうこともあったという。

    ある日、金日成は2人に『アカハタ』を見せ、野坂参三を立派な男だという手つきをしてみせた。2人は「ついに日本も共産党の国になってしまったのか」と悲しい表情をしてみせた。金日成は「共産党は嫌いですか?」と問うと2人がうなずいたため、驚いた表情をしたあと笑って黙っていた。それから数日後に金日成は二人にマルクスやクロポトキンの本を渡したという。このような金日成であったが、身辺は不安だったらしく自宅へ至る道の要所に警備兵がおり、門前には番兵が立っていた。また枕の下には常に護身用のピストルを潜ませていた。

    このころ、金日成の弟である金英柱が自宅に出入りするようになった。ある時、2人のうちの1人の姉が朝鮮人の集団にリンチされ重傷を負った。以前、仲間が姉の訴えで共産党本部によって厳罰に処せられたとことの報復だった。このことを知った英柱は共産党本部から兵を連れ、リンチを行った朝鮮人を捕まえて痛めつけ、牢に入れた。そして、被害者に「朝鮮人民が迷惑をかけた」と謝ったという。翌日、英柱は2人に「共産党は日本の帝国主義、軍国主義に排撃するのであって日本人を憎むのではない。」と語った。その場にいた金日成は2人に共産党が好きになったかと問うと、2人は少しうなずくと「でも、天皇陛下の方が好き」と答えた。すると金兄弟は笑い出し、それ以後は2人の日本人に再教育するとは言わなくなった。その後、2人が南から日本へと帰国したいと申し出たため、金日成は南への通行証を渡し、今までの礼を述べた。最後は一家で2人を見送ったという。

    [16] 小林和子(旧姓:萩尾)著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奥村芳太郎編『在外邦人引揚の記録』 1970年 毎日新聞社)
    金日成 フリー百科事典

    6.25 때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

    • 6.25 전쟁 중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1.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 국제신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김정숙의 사인은 출산 중 전치태반(前置胎盤)으로 인한 과다 출혈, 김일성의 자녀는 김유라(11세)김경자(5세).
    2.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김일성김정숙 사망 후 홍명희의 딸과 재혼.

    조옥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특무부대장의 구술 회고록

    당시 조옥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1916~1956) 대령의 口述 회고록에는 조옥희의 진술 내용이 더 자세히 나오지만, 김정숙의 사망 원인은 위 신문 기사와는 다르다. 김일성의 문란하고 난잡한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이로 인한 본처 김정숙과의 불화가 그녀의 사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Ⅳ.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 조옥희
    1.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이 되기까지 … 371
    2. 김성주와 김일성 … 380
    3. 장군 부인의 질투 … 388
    4. 관저 내의 죄악상 … 392
    5. 한국동란 발발의 진상 … 397
    6. 자유로운 질서의 위력 … 400
    하이라루는 한자로 海拉甫가 아닌 海拉爾(海拉尔)이며, 오늘날 중국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 시(呼倫貝爾市, 呼伦贝尔市)의 행정 중심지인 하이라얼 구(海拉爾區, 海拉尔区)이다. 소련 국경과 가깝다.
    김일성과 홍명희 딸의 부적절한 관계

    홍명희(洪命喜)는 임꺽정(林巨正)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월북하였다. 홍명희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딸들은 쌍둥이로 모두 숙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을 나왔다.[322]

    김창룡의 원고에는 해방 이후부터 김일성의 전속(專屬) 간호원을 지낸 조옥희(趙玉姬)가 6·25전쟁 이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김창룡의 특무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 중 홍명희의 딸과 김일성의 관계가 구술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조옥희는 홍명희 딸 중 한 명과 김일성은 깊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부수상이 된 홍명희는 미모의 딸을 데리고 김일성이 있는 수상관저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 당시 홍명희 딸은 처녀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관저 내의 고용인들은 그녀를 ‘미스 홍’으로 김일성은 ‘홍 동무’로 호칭했다고 한다. 홍명희의 딸은 빨간 튤립처럼 요염하게 생겼으며 김일성 앞에서는 갖은 아양을 떨었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이 관저에 없을 때에는 혼자 찾아와 김일성과 단둘이 방 안에서 교성(嬌聲)을 지르며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김정숙에게 들키게 되자 그 후 홍명희 딸의 수상관저 출입이 금지되었다.


    김일성 아내 김정숙의 死因은?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김일성의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49년 봄에 김일성의 일곱 살 난 어린 아들이 수상관저의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溺死)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임신 5~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산 도중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아들의 익사사고와 김정숙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는데 이 두 사건에 홍명희 딸의 보이지 않은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조옥희의 증언은 시사하고 있다. 특히 김정숙의 갑작스런 사망 사건에 대해 조옥희는 죽기 전날 김정숙은 권총사격을 하고 자기와 같이 쾌활하게 정원에 앉아서 잡담까지 나누었는데 잠자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북한의 공식 발표내용이 출산 중 사망이라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간호원인 조옥희가 볼 때 당시 김정숙은 임신 5~6개월로 낙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산사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김정숙의 장례식 날 김일성은 상여 앞에 섰고 그 뒤에 각료들과 각계 대표들이 뒤따랐는데, 부인의 장례임에도 김일성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홍명희의 딸이 수상관저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홍명희 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호칭이 ‘수상 부인’ 또는 ‘장군 부인’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조옥희는 해방 이후 김일성에 관한 비화들을 진술하고 있다.

    김일성의 난잡한 여성편력에 대한 유성철의 증언

    유성철에 의하면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소련군 덕에 최고 권력자가 된 김일성은 난잡한 여성편력에 탐닉하는데, 채홍사(採紅使)격의 여자 조달책은 88여단에서 김일성보다 높은 소좌 계급의 군의관으로 있었던 이동화가 맡았다고 한다.

    •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2~63, pp.67~70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연세대 최평길 교수와 공동집필) 한국일보 1990.11.0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김일성의 사생활 관련 미국 CIA 문서

    CIA “김일성 추정 인물, 학창시절 살인 저질러”...과거 행적 담은 기밀문서 확인 VOA 2017.11.8
    기사 후반부가 위 1951년 CIA 문서 내용 소개이다.
    1951년 작성된 ‘김일성 배경 정보’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47년부터 1950년 5월까지 평양 남산동의 한 주택을 공식 거처로 삼았습니다.

    이곳은 과거 일본인 히로타가 거주했던 곳으로 김일성 주석은 5명의 요리사를 비롯해 20명을 하인으로 뒀다고 CIA는 덧붙였습니다. 다만 요리사 등과의 관계가 좋았고, 종종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사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주로 육류를 선호했고, 생선류와 채소는 거의 먹지 않았다고 이 문서는 명시했습니다. 또 닭고기와 함께 요리된 개고기를 가장 좋아했으며 매일 아침과 저녁 식사로 이 메뉴를 요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체중이 이 요리 때문에 불어났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CIA에 따르면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김일성 주석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았고, 이 기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흡연은 적당히 했고, 와인을 선호했지만 음주량은 많지 않았습니다. 취침은 밤 10시, 기상은 새벽 4시였다는 자세한 일상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이 문서는 김일성 주석의 취미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테니스를 열정적으로 했고 종종 승마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또 운동 삼아 나무를 격파했고 사격도 능한 인물로 묘사됐습니다. 다만 운전은 할 줄 몰랐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또 러시아 포크댄스를 선호했지만 종종 아내와 서양식 사교 댄스 행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아울러 1년에 2~3번 정도는 평양 만경대 인근 지역 식당에서 기생들과 파티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CIA는 김일성 주석이 대사관에 파견된 소련 고위급 인사와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과 어울리곤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문서는 한국 전 발발 이후의 상황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가족과 정부 관계자들을 평양에서 탈출시켰으며, 거주지와 사무실 내의 모든 문서를 불로 태웠다고 전했습니다.

    1950년 6월 남한을 침공한 북한 군이 약 4개월 만인 10월을 전후해 미-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을 내주던 때로 추정됩니다.

    한편 ‘VOA’가 확인한 또 다른 CIA 문서는 김일성 주석이 1951년 6월6일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북한군 장교에게 암살을 당할 뻔한 사실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주석은 오른쪽 폐에 부상을 입었으며, 평양의 중앙인민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습니다.

    김일성스탈린에 보인 충성심 관련 자료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스탈린의 초상이 걸려 있다.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이 그를 발탁하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제압하고 일방적으로 그를 지원하며 권력기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탈린의 명령은 내게는 곧 법(法)이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여, 자신이 스탈린의 지시를 따르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다.

    북한 도처와 주요 행사에 내걸린 스탈린의 초상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기간까지 북한 전지역에는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의 초상이 도처에 나붙어 있었고, 각종 행사장에도 반드시 스탈린의 사진이나 초상이 등장했다. 이는 북한이 소련의 괴뢰국가이며, 김일성스탈린의 충실한 주구(走狗)에 지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북한 정권 감시기구 특경부(特警部)

    소련군 철수 후 평양의 소련 대사관이 북한 정권을 통제하게 되지만, 북한 정권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소련은 코민포름(Cominform) 산하에 특경부를 설치하였다. 본부는 평양에 두었으며, 각 지역에 지부를 두었고, 김일성 본인도 감시 대상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바친 막대한 양의 선물

    김일성은 1949년 2월 22일부터 소련을 방문하여 약 한 달 가까이 모스크바에 머물며 스탈린 등과 회담을 하고, 대북지원과 남침전쟁 승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스탈린에게 막대한 양의 선물을 가져가서 바쳤다는 것이 북한이 제작해 소련측에 제공한 선물 도해집의 발굴로 밝혀졌다.

    전쟁 중인 1952년 11월에도 김일성은 스탈린의 건강을 위해 인삼 뿌리 15 상자 등 다량의 선물을 보냈다.

    They were going to treat the leader with alternative medicine methods, but they did not have time by the spring of 1953.
    On November 1, 1952, Deputy Foreign Minister Yakov Malik informed the head of Stalin's secretariat, Alexander Poskrebyshev, about the arrival of Korean gifts, in the isothermal car there were "five tons of rice, five tons of apples and pears, two tons of chestnuts and fifteen boxes of ginseng root."14
    14. См. публикацию этих документов 2008 г.: Вождь и культура. Переписка И. Сталина с деятелями литературы и искусства, 1924-1952, 1953-1956 / сост. В.Т. Кабанов. М., 2008.
    (14. See the 2008 publication of these documents: Leadership and Culture. Correspondence of I. Stalin with figures of literature and art, 1924-1952, 1953-1956 / comp. V.T. Kabanov. M., 2008.)
    김일성은 귀중한 문화재 고려청자까지 스탈린에게 가져다 바쳤다.
    김일성이 1949년 선물한 비단 두루마기도 전시됐다.

    김일성의 스탈린에 대한 이러한 막대한 물량의 선물 공세는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준데 대한 감사표시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을 계속 지원해 달라는 바램도 있어서 였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조선왕이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던 일과 다를바 없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일제가 북한 지역에 건설한 공업시설들을 상당수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해 갔는데도 김일성은 이에 대해 항의 한 마디 못했을 뿐더러 북한 주민들의 고혈을 짜서 이렇게 막대한 선물까지 가져다 바쳤던 것이다.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法)이다.

    한용원 한국교원대 교수는 “1949년 9월 스탈린스티코프 상장에게 ‘아직은 무력 공격의 시기가 아니다. 전력도 압도를 못하고 있고 미군도 철수한 직후여서 돌아올 수 있다’고 지시했다”며 “이를 전해들은 김일성은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이다’고 했다는 구 소련 관계자의 증언이 공개된 적이 있다”고 했다.[323][324]

    이 말의 원출처는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Andrey Vyshinsky(1883~1954)에게 보낸 1950년 1월 19일자 전문으로, 1월 17일에 외무상 박헌영이 초대 주중대사로 가는 이주연(李周淵)을 위한 오찬에 초청한 인사들간의 대화에서 김일성이 한 말이다. (중공 정권 수립 직후임.[325])

    Further Kim stated that when he was in Moscow, Comrade Stalin said to him that it was not necessary to attack the south, in case of an attack on the north of the country by the army of Rhee Syngmann, then it is possible to go on the counteroffensive to the south of Korea. But since Rhee Syngmann is still not instigating an attack, it means that the liberation of the people of the southern part of the country and the unification of the country are being drawn out, that he (Kim Il Sung) thinks that he needs again to visit Comrade Stalin and receive an order and permission for offensive action by the Peoples' Army for the purpose of the liberation of the people of Southern Korea. Further Kim said that he himself cannot begin an attack, because he is a communist, a disciplined person and for him the order of Comrade Stalin is law. Then he stated that if it is now possible to meet with Comrade Stalin, then he will try to meet with Mao Zedong, after his return from Moscow. Kim underscored that Mao Zedong promised to render him assistance after the conclusion of the war in China. (Apparently Kim Il Sung has in mind the conversation of his representative Kim Il with Mao Zedong in June 1949, about which I reported by ciphered telegram.) Kim said that he also has other questions for Mao Zedong, in particular the question of the possibility of the creation of an eastern bureau of the Cominform. He further stated that on all these questions he will try to meet with Comrade Shtykov and to secure through him a meeting with Comrade Stalin.

    한국전 특수로 패전국 일본의 경제를 단숨에 부흥시켜

    김일성은 절대 권력 확립을 위해 자신의 직계 빨치산 아닌 항일투쟁한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숙청, 처형하였다.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좌파 계열 항일투사들이 해방전 5년간 소련군에서 아무 항일투쟁도 않고 편히 살던 김일성의 손에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아마 일제에 의해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김일성이 1950년 남침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2차대전 패전의 늪에서 허덕이던 일본은 한국전 특수로 경제를 단시일에 부흥시킨다. 일본은 이런 기세를 몰아 한국전 휴전 후 불과 10년만인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까지 개최하며 전세계에 일본의 부활을 알리게 된다.

    일본군 노조에(野副) 토벌대는 1941년 초까지 거의 모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주요 지휘관들을 사살하거나 체포 또는 투항시키는데에 성공하지만 유일하게 제2방면 군장 김일성만 토벌에 실패하는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나중에 패전한 일본의 경제를 살리는 일이 될 것을 예상하고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토벌대 사령관이 김일성을 일부러 살려준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이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고 유일체제 구축에 성공하는데 내세운 유일한 구실은 대부분 날조된 항일투쟁 경력이지만, 실제로 그가 한 일은 자신의 직계아닌 항일투사를 대부분 처형하고, 일본의 경제를 단시일에 부흥시키는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다. 그의 실제 정체는 항일투사를 가장한 최악의 친일 부역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사이래 일본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외국인 은인이고, 항일투사를 가장 많이 죽인 조선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김일성의 정신세계 분석

    정신과 전문의 백상창(白尙昌)은 김일성의 정신분석에 관한 여러 권의 저서를 냈는데, 김일성은 "큰 인물"과 "살아남기"의 두가지 컴플렉스를 갖고있어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증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김성주가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326] 일찍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자칭한 것이나, 적기훈장 받은 내력에 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나, 경력 조작과 남의 전공 훔치기로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미화하고, 소련의 꼭두각시로 집권한 것은 감추고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다른 독재자들에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을 우상화, 신격화 하여 북한 주민들이 자신과 자기 일족을 위해 노예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도록 만든 것 등은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증의 반영으로 보인다.

    만주 빨치산 시절에 형성된 토벌에 쫓기면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집권 후 자신에게 무조건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차별 숙청, 처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각종 김일성 전기(傳記)

    가족과 친인척 관계

    김일성의 처와 자녀들

    가족과 친인척

    기타 참고 자료

    김일성 관련 우남위키 표제어

    관련 인물

    만주국 지도

    이것은 가장 자세한 만주국 당시의 지도이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10123000、満洲全図 大連市街図 大正11年6月~昭和8年6月(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満洲国地図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4030467800、関東軍自動車隊行動経路図 (満洲国地図) 昭7~9(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満洲国地図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58500、昭和18年以降の関東軍関係統帥概史 第2巻(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第4章/第3節 作戦計画及作戦準備(2)

    기타

    이책은 해방 직후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이며,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음. : 총 82회
    金日成(김일성)을告発(고발)한다 (1)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04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81)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8.12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82)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8.13 동아일보 2면
    한재덕은 해방 직후 평양민보 편집국장으로 김일성 수행기자를 했고, 김일성을 미화, 찬양하는 글을 많이 썼으나, 일본에 공작원으로 파견된 후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하여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북한 김일성 사망 당시 그의 일제시대 전력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의 견해를 요약, 소개하고 있다.

    각주

    1. 조선전사(朝鮮全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제너럴셔먼호사건(─號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6-20
    4. 鄭錫弘, 《北韓 의 近代史 認識 , - 金日成 과 그 家系 를 中心 으로》 『統一論叢』 2권 1호(서울 : 國土統一院, 1982.6) pp.74-76
    5. 백봉(白峰),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1권 (평양: 인문과학사, 1968년); [2권 1969년, 3권 1971년 : 해방 후의 행적]
    6.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 (1918년 02월 18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7. 7.0 7.1 7.2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25, 조선(朝鮮) (一) 3.1運動 (一) (みすず書房, 1967)
    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送付에 관한 건 (1919년 03월 26일) p.6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第二 壹部 參考 送付 (1919년 03월 26일) p.6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9.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연합뉴스 2005년 3월 23일
    10. 金日成의 父 金亨稷 조선국민회활동 사실로 확인돼 연합뉴스 1998년 3월 25일
    11. [內報] 국미회와 련락이 잇다고 신한민보 (新韓民報) 1918년 09월 12일 2면 1단 : 국민회와 련락이 잇다고...평양 공쥬 지사를 포박 : 「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에 게재하얏스제 소위 총독부 왜놈들은 우리 내지인사들이 북미주에 잇난 국민회와 련락하야 광복을 꾀하난 음모가 잇다는 - 증거업난 말을 만들어 가지고 三月부터 평양, 경셩, 공쥬 등 각처에서 다슈한 인사를 포박하얏난데 잡한이 듕에 예슈교를 밋는 신쟈가 만타더라.
    12. 한국근대지리정보 (국사편찬위)에 나옴. - 좌표: (126.03006580389102, 39.17762615632604)
    13.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p.27
    14. 봉화혁명사적지 북한지역정보넷
    15. [란코프] 우상화되지 않은 진짜 김형직을 생각하며 RFA 2022.07.14
    16. [주성하의 서울살이] 북한의 황당한 6.25전쟁 진실 조작 RFA 2010.07.23
    17. 17.0 17.1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18.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19.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서울신문
    20. 이명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96~97.
    21.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22. 22.0 22.1 22.2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pp.63, 84~90
    23. 중강진(中江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 만경대 방문 北주민이 듣는 김일성 관련 거짓 선전들 DailyNK 2018.04.13
    25. 중강군(中江郡) NK조선 2013-10-04
    26.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 이름을 접한 시기
    27. 광정단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28. 김진섭 교수, "역대하 7:14, 남북통일 운동 성경적 출발점" 기독일보 2014. 05. 30
    29.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년) pp.30~31; 김일성 1912~1945 (상), (서울셀렉션, 2020년)
    30. 30.0 30.1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지 않는 강반석의 재혼 RFA 2023-08-16
    31. 31.0 31.1 私立彰德校(사립창덕교) 財團法人申請(재단법인신청) 1931.05.23 동아일보 3면
    32. [내한선교사] Moffett, Samuel A. 평양대부흥
    33. 용산면 대타령리는 하리(下里)의 동쪽 평양부(平壤府)에 거의 인접해 있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대지리정보
    34. 대동군 용산면 대타령리 - 북한지역정보넷
    35. 35.0 35.1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36. 36.0 36.1 Samuel Austin Moffett(1864-1939) Wikipedia
    37. 大同 彰德普校(대동 창덕보교)에 二千餘圓 寄附(이천여원 기부) 1936.06.27 동아일보 5면
    38. 六年制의 普校로 彰德學校昇格 廿六年의 오랜 歷史를 가지고 初等敎育 貢獻莫大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5년 04월 28일
    39. 북한 김일성 일가 우상화에 ‘동조’한 박승춘 보훈처 월간조선 2016년 8월호 / 김일성 친척·좌익 인사에겐 ‘건국훈장’… 독립운동한 임정 고문·고승은 서훈 불가 / ⊙ 박승춘 보훈처장, “김일성 부모 서훈 검토해 보겠다”/ ⊙ 북한, 김일성 숙부 김형권 동상 ‘혁명열사릉’ 등 곳곳에 설치·우상화 / ⊙ 김일성, 외숙 강진석이 항일무장단체 백산무사단 만들었다고 날조 / ⊙ 보훈처, ‘상훈법’ 개정해 서훈 취소하겠다지만… 야당 동의 여부는 미지수
    40. 한재덕(韓載德, 1911~197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0) 1962.05.23 동아일보 2면
    41. 고순화면 - 북한지역정보넷
    42. 고순화면(古順和面)과 평천면(平川面)이 합해져 고평면이 됨. 고평면 - 북한지역정보넷
    43. 용산면 - 북한지역정보넷
    44. 만경대 방문 北주민이 듣는 김일성 관련 거짓 선전들 DailyNK 2018.04.13
    45. 북한의 ‘갓끈 전술’과 파탄 직전 한·일 관계 [주간조선 2540호] 2019.01.07
    46. 鄭錫弘, 《北韓 의 近代史 認識 , - 金日成 과 그 家系 를 中心 으로》 『統一論叢』 2권 1호(서울 : 國土統一院, 1982.6) pp.76-79
    47.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 북한지역 정보넷
    48. 第三 移住朝鮮人中 有力者 調査表 : 일본 외무성(日本 外務省)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기록
    49.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p.42
    50.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5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 제1장 5. 《압록강의노래》
    52. 김일성저작집1 p.361
    53.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
    54.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55.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p.109~110.
    56.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57.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pp.62~72 : 북한에서 보낸 답사단이 찍어온 당시 김일성이 살던 집의 사진도 있다.
    58. 화전현 화성의숙 세계한민족문화대전
    59. 화성의숙(華成義塾) 터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60. 월북한 최덕신의 '이념 곡예' 40년 공개 시사저널 2000.08.31
    6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98
    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107
    63. "金日成과 손정도 목사의 일화, 완전 날조돼" :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 주장 월간조선 NewsRoom 2021.11.24
    64. 홍은혜 [1917-2017] 엮음,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 손원일 제독 회고록 서울 : 가인기획, 1990
    65.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손원태 박사 RFA 2019.01.15
    66. 안혜령 지음, 손인실 : 사랑과 겸허의 향기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1
    67. <토요신문> 국립중앙도서관
    68. 손원일, "나의 이력서⒀" 한국일보, 1991.10.16 : "김성주(김일성)는 1929년 5월까지 길림에 있다가 전부터 연고가 있는 극렬 좌익의 군소 독립군 부대이던 이종락 부대 휘하로 도망쳐갔다."
    69. 국민부(國民府)내 공산주의자들의 1930년 8월 19일자 탈퇴 선언문(脫退宣言文) :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 대리(日本 總領事 代理)가 1930년 8월 27일자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70. 怀德镇(公主岭市) - 维基百科
    71.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7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7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74. 長春領事館에 逮捕된 ○○단重要人物 신의주검사국에 인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08월 11일 7면 4단
    75. 朝農同盟事件 卄一日에 公判 新義州地方法院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12월 14일 7면 3단
    76. 治維違反及殺人事件最高七年을 求刑 공범二명은 五년과 三년을 구형 判決言渡는 來六日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02.02
    77. ○○團員 三名(단원 삼명) 長春領警(장춘령경)에 被逮(피체) 1932.08.15. 동아일보 2면
    78. 農民同盟事件(농민동맹사건) 廿一日 公判(입일일 공판) 1932.12.14. 동아일보 2면
    79. 79.0 79.1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80. 密偵殺害(밀정살해)한 農盟員 判决(농맹원 판결) 1933.02.08. 동아일보 3면
    81. 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 世火軍 - 東方革命軍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 p.83 (pdf 파일 pp.44~45)의 기사. : 조선혁명당 결단봉(決端鳳)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나, 이는 양서봉(梁瑞鳳, 즉 梁世鳳)의 오기로 보인다.
    82. 殺人과 治維違反罪로 最高十年을 求刑 국민부원 등 오명에 대한 공판 新義州裁判所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년 01월 26일 7면 4단
    83. 北, 김일성 친구이자 공산주의자 '최창걸' 조명…"충성 독려·내부 결속" 뉴스1 2019-12-26
    84. 84.0 84.1 허동찬(許東粲),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5. 朝鮮人民革命軍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85.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41900、各国共産党関係雑件/中国ノ部 /満洲/間島 第三巻(I-4-5-2-1_1_7_003)(外務省外交史料館)」 :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中国ノ部 /満洲/間島 第三巻 1.昭和七年 分割3 pp.57~ 62
    86.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北韓硏究所, 1988년 4월)
    87.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p.87
    88. 88.0 88.1 88.2 88.3 88.4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북한 김일성의 소련군 시절 자필 문건에 나오는 경력 : 우남위키
    89. 89.0 89.1 89.2 89.3 89.4 89.5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발굴] 김일성 보증인 이청산 찾았다 주간조선 2558호 2019.05.20
    90. 김일성 적기훈장 추천서 : 88여단장 주보중이 1945년 8월말 작성한 것.
    9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4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I-4-5-2-1_22_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 4.大会、会議及決議関係 (1934년 3월 27일) : p.13 汪淸縣委 「反日遊擊隊參謀兼 政治委員 全一善(鮮人, 全一成이라고도 함.)」
    92.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390, pp.415~416.
    93. 100-003. 간도영사관 정보 -3 :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 昭和九年 六月 十五日 p.572 (0569) 二. 共匪檢擧狀況 (一○) 明月溝 分署.....共黨遊擊隊員 朱南洙 金日成 兩名...
    94. 間島領事館情報 100-003 (1933-1934) p.493 (0569) : 1934년 6월 15일자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서 《20.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 昭和九年 六月 十五日》의 二. 共匪檢擧狀況 (一○) 明月溝 分署.....共黨遊擊隊員 朱南洙 金日成 兩名...
    95.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96. 96.0 96.1 資料 最近滿洲に於ける共産運動槪況(續) 사상휘보 제8호 1936-09-01 p.80 (pdf p.20)
    97. 《昭和十一年中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ノ件》 一. 間島及接壤地方共匪ノ行動情況 : 100-009 『間島領事館情報綴 』(1936-1937) p.228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컬렉션 - 고려대학교 도서관
    98. 間島領事館情報綴 (1936-1937), 100-009, p. 228 (pdf p.180)
    99. 間島及滿鮮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雜簒 第13卷 (1) : 昭和9年8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 - 附表7. 匪賊狀勢調査表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100. 間島及滿鮮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雜簒 第13卷 (1) : 昭和9年9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 - 附表10. 匪賊狀勢調査表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101. 101.0 101.1 101.2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364~399
    102. 102.0 102.1 [삶과 추억] 스칼라피노 UC버클리 교수 별세 - 중앙일보 2011. 11. 4
    103. 103.0 103.1 Scalapino, Robert A. and Lee, Chong-Sik, 『Communism in Korea. Part I-Part II』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lifornia, 1972) Vol.1 p.213 Footnotes 117, 119.
    104. 104.0 104.1 이들이 참고한 문헌은 AJMFM(Archives of the Japanes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일본외무성사료관 문서 micro- films) SP205-5 : 外務省警察史 間島ノ部 : 間島琿春地方外務省警察ノ沿革, 第七ノ三 : 滿州事變及其ノ以降 (1935-1938) SP205-5에 나오는 昭和十年(1935년) 및 十一年(1936년)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의 附表에 있는 月別匪賊勢力消長表이다. 김일성, 김일선 관련 내용은 아래 (위) 표와 같음.
    105. 105.0 105.1 Suh, Dae-Sook,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출판사 1985) pp.256~257
    106. 번역본 p.256 주54) 金의 초기의 활동과 중국측의 상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滿州共產匪賊》 pp.125~178를 참조. 일본경찰의 보고에 대해서는 JFMA, SP104~106, 특히 SP 105권 (sp. 205~5), 9390, 9396, 9402~9420에 보고되어 있는 소규모적인 빨치산활동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07. 107.0 107.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440、密大日記 第8冊 共8冊 昭和11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朝鮮国境守備隊の件(分割5) 朝鮮軍参謀部 国境守備隊月報(九月) - 昭和10年9月~10月(1935/09 - 1935/10) : 歩兵第七十五連隊月報 (1935년 9월) pp.112~113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系統圖 (昭和10年 9月 現在)
    108. 108.0 108.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368500、密大日記 第10冊 昭和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国境守備隊月報一括 朝鮮軍 (1936년 1월 ~ 9월) 步兵 第77聯隊 国境守備隊月報 (1936.01.21 ~ 02.20) pp..441~451 :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所屬幹部 連名簿
    109. 滿洲に於ける共産主義運動の推移と最近の情勢槪況 사상휘보 제14호 1938-03-01 : p.42 (pdf p.36)
    110.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66~168.
    11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410、昭和11年「密大日記」第8冊(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朝鮮国境守備隊の件(分割2) p.358 제19사단 제2수비대 월보 (소화 10년 1월 30일~2월 28일), p.375 : 6.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사부장겸 제1독립사장 주진, 최근 의란구영사관 경찰서에서 체포.
    112. 간도(훈춘현 포함) 및 접경지방 치안 정황 보고(1935년 1월중) / 昭和十年一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情況報告 100-006. 간도영사관 상보철(間島領事館狀報綴) p.253 : 중공당 동만특위 책임 이상묵(李相黙), 연길현위 책임 학철(學哲), 혁명군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 등 간부급 민생단 혐의를 받고 탈주
    113.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 其他送附ノ件 : 1935.2.中旬 100-006. 간도영사관 상보철(間島領事館狀報綴) p.304 / 間島總領事館管內治安狀況(自二月十一日至二月二十日) 100-006. 간도영사관 상보철(間島領事館狀報綴) p.308 / 管內ニ於ケル共匪檢擧狀況 (自昭和十年二月十一日至二月二十日) 100-006. 간도영사관 상보철(間島領事館狀報綴) p.314
    114. 서대숙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p.15.
    115. 115.0 115.1 115.2 115.3 115.4 115.5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의 인민혁명군 2군 간부 약력
    116. 116.0 116.1 王大腦袋(왕다노대, Wáng dà nǎodai)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항일 혁명 3편) 제7장 1. 보금자리 : 우리가 소왕청에 도착하였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왕윤성과 그밖의 다른 두 사람이였다. 왕윤성을 일명 마영이라고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본명보다도 그를 《왕다노대》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렀다. 《왕다노대》란 머리가 유별나게 크다는 뜻이다. [腦袋는 중국어로 "머리, 두뇌"를 뜻함.]
    117. 117.0 117.1 와다 하루끼(和田 春樹)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p.116, p.117 주석 163).
    118. 118.0 118.1 왕윤성(王潤成, 1910~1965) 中共吉林省委党史研究室 吉林党史网 党史故事(人物)
    119. 抗战时牺牲的最年轻将领,19岁的东北抗联四师政委、师长周树东 每日头条(每日頭條) 2018-01-20
    120. 박춘산#동명이인 박춘산(朴春山) 기록 : 우남위키
    121. [타산지석] 최근 타계한 항일 여성빨치산 리민과 그의 공로 자주시보 2018/07/24
    122.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抗日 빨치산》 (서울: 동아일보사, 1992) p.79
    123. 匪賊情報月報の件 : 昭和16年6月~7月 p.5 : 李明順匪入満ス 昨 15年 12月 入「ソ」セル李明順匪ハ4月入満
    124. 원본에는 參謀長 刘春深, 作戰科 朴漢興으로 적혀 있는데, 두 사람의 성과 이름을 혼동하여 뒤섞어 놓았다.
    125. 125.0 125.1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지도 : 지도의 좌측 상단에 경박호(鏡泊湖)가 보이며, 그 남쪽 가에 남호두(南湖頭)가 나와 있다.
    126. 와다 하루끼(和田 春樹)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pp.111~112.
    127. 서대숙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p.20.
    128. 빨치산서 수령변신 「세계最長(최장) 독재자」 金日成(김일성)의 일대기 : 45년 蘇(소)군정 꼭두각시로 지도권 장악 1994.07.10 조선일보 10면
    129.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73~182.
    130.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74~175.
    131.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177.
    132. 132.0 132.1 「魏民生關于三, 四團情況給王潤成信 (1935年 2月 21日)」,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p.336
    133. 133.0 133.1 133.2 133.3 133.4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134. 134.0 134.1 「魏民生、王德泰 给工委及润成同志的信 - 关于二军的组织编制 及党的组织问题 (一九三六年三月八日)」,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p.483.
    135.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28) 동북 항일 연군 6사단장 중앙일보 1974.06.10
    136. 동북항일연군#항일연군 1로군의 편성 : 우남위키
    137. 서대숙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p.18.
    138. 黑瞎子沟密营址 구글지도
    139.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민족사에 대한 모독 The New Paradigm 2021.07.18
    140. 김석원#서대숙 : 우남위키
    141. 김석원#브루스 커밍스 : 우남위키
    142. 브루스 커밍스#김석원에 대한 원수갚기가 김일성의 남침 목표?
    143. 진위 김일성 열전 (40) 6사장 김일성의 부하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13 종합 3면
    144.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60) 중앙일보 1990.11.12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397
    145.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1 /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2
    146. 146.0 146.1 146.2 146.3 146.4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보천보 전투 RFA 2010.09.21
      서대숙: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47. 노영택,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
    148. 『김일성 장군 (金日成 將軍)』 - 北朝鮮 五一節 紀念事業準備委員會 (平壤 紀新社, 1946년 5월 1일) : 팜플릿 (소책자)
    149. #해방직후 김일성 기사에 대한 조사 연구 결과 : 우남위키
    150. 기광서, 해방 전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 구상과 조선 정치세력에 대한 입장, 슬라브硏究 제30권 4호 (2014년 12월), p.48
    151. 김일성 가짜설#6사장 김일성의 소련 연고 우남위키
    152. 죠지 맥큔(George McCune, 1908~1948)
    153.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출판사 1985) p.259 본문 및 주석 62)
    154. 今日(금일),本報解停(본보해정) 今日夕刊(금일석간)부터 發行(발행) 동아일보 1면 1937-06-02
    155. 만주제국협화회 (滿洲帝國協和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4장 "4. 남만의 전우들과 함께"
    157. 김일성 가짜설#김일성 회고록 속의 가짜 증거 : 우남위키
    158. 『警備關係綴(國境ノ部) : 경비관계철(국경의 부)』 昭和十三年(1938년) 警務局 警務課 (관리번호: CJA0002477 / 문서번호: 94) - 국가기록원
      기록물 해제 보기
    159.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변은진) > Ⅱ. 戰時下 日帝 사상통제정책의 강화 > 2. 國境 등 ‘특수지대’의 사상·선전 정책 國史館論叢 第94輯 (국사편찬위원회, 2000-12-23)
    160.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161. 1937년 9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조선총독부 기록물 昭和12年 第73回 帝國議會 說明資料(警務)
    162.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북한학보 제1집 (북한연구소 1977년) p.79
    163.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446~447.
    164.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64.
    165. 165.0 165.1 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pp.166~167, 주석 127)./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
    166. 혜산사건(惠山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67.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위키백과 : 『막사과(莫斯科)』는 모스크바
    168.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 일본 내무성 경보국 특별고등경찰(日本 内務省 警保局 特別高等警察) : 국립중앙도서관
      「특고월보(特高月報)」 :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
    169. 蘭星會編, 『滿洲國軍』 (東京, 滿洲國軍刊行會, 1970) 국사편찬위원회
    170. 蘭星會編, 『滿洲國軍』 (東京, 滿洲國軍刊行會, 1970) 국회도서관
    171. <단독입수> ⑦ 일제 식민통치 구술 녹음자료 어떻게 나왔나 연합뉴스 2004.08.12.
    172. 未公開資料 朝鮮総督府関係者 録音記録 국사편찬위원회
    173. 未公開資料 朝鮮總督府關係者 錄音記錄(1)~(16) 낙성대경제연구소
    174. 쓰보에 센지(坪江汕二)의 본명은 츠보이 토요키치(坪井豊吉)이다 : 60年前(연전)의 오늘 「新幹会(신간회)」창립대회 日(일)총독"대변지 朝鮮日報(조선일보) 가만안두겠다 1987.02.15 조선일보 5면
    175. 鎌田澤一郞, 『朝鮮新話』, (創元社, 1950) : 국회도서관 소장
    176.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 우남위키
    177. 23. 소화13년 6월 1일 사상정화공작자료 제1집, 함경남도 경찰부 1938년 6월 1일
    178. 程斌(原东北抗日联军第一军第一师师长) 百度百科
    179. 동북항일연군#제1로군의 편제 개편 우남위키
    180. 孙继英, 『东北抗日联军第一军』 (黑龙江人民出版社, 1986) pp.186~187
    181. 霍燎原等 編著, 『東北抗日聯軍第二軍』,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년) pp.174~175
    182.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08-01) pp.170~171
    183. 霍燎原等 編著, 『東北抗日聯軍 第二軍』,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년) pp.184~186
    184.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08-01) p.178
    185. #김일성(金日成)의 사장(師長) 임명 : 우남위키
    186.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576
    187.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62.
    188. 金华乡(吉林省 白山市 长白朝鲜族自治县)
    189. 金华乡 (吉林省白山市长白朝鲜族自治县下辖乡) baike.baidu
    190. 190.0 190.1 Hongqi River (红旗河) : 延边朝鲜族自治州和龙市
    191.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9%EC%82%AC%EB%8B%A8_(%EC%9D%BC%EB%B3%B8%EA%B5%B0) [제19사단 (일본군)] 위키백과
    192.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2120911300、陸軍異動通報 3/6 昭19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第110号 昭和19年6月10日 陸軍異動通報 : p.1 昭和十九年(1944년) 六月十日 陸軍異動通報 - 前橋陸軍予備士官学校副官陸軍大尉 笠間哲行 補第十四軍司令部附
    193. 1945년 일본 패전 당시 소좌(少佐) 계급으로 第105師団 (日本軍) 歩兵第82旅団(浜田) 独立歩兵第358大隊 대대장이었다.
    194. 「笠間史料 農事洞守備隊状況報告」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5. 농사동에 있어서 경찰관의 폭행사건에 관한 건-함경북도 1937년 10월 6일 : 경비관계 서류철(국경) 소화12년 ~ 소화13년(1937년 ~ 1938년) 경무국 경무과 - 관리번호: CJA0002478 (조선총독부 기록물)
    196. 反滿抗日 共産匪 總司令楊靖宇射殺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2.25 2면
    197. 홍기하전투 - 문화콘텐츠닷컴 (사이트 폐쇄) : ==> 카피본 사이트 : 마에다 중대의 군인 대부분은 조선인들이고 또한 신선대 역시 조선인들이었으므로.....
    198. Bruce Cumings, A Murderous History of Korea London Review of Books Vol. 39 No. 10 · 18 May 2017 : Maeda Takashi headed another Japanese Special Police unit, with many Koreans in it; in March 1940 his forces came under attack from Kim’s guerrillas, with both sides suffering heavy casualties.
    199. 간도 일본 영사관은 "관내 조선인의 비적 피해 및 보호에 관한 상황 기타 송부의 건(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매달 3회씩 올리고 있다 : 예를들면 100-008 間島情報綴 (1937), 100-004 間島情報綴 (1935) 등 참고.
    200. 前田警防隊武勇談 / 壯烈한 最後의 前田隊 天皇陛下 萬歲 三唱 / (完) 間島支社 崔武 : 만선일보 1940.08.13 / 5면
    201. 和龙市- 维基百科
    202. 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44
    203. 國境警備隊慰問行① 警民一致의 산標本 自衛團의 功勞는 至大 매일신보[每日新報] 1940년 06월 15일 : 당시 삼장(三長) 경찰서장도 마에다(前田美穗)이다.
    204.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⑥ - 눈물겨운 自衛團 - 不眠不休 · 勞心焦慮 - 窟속에서 防諜活躍 매일신보[每日新報] 1940년 02월 05일 2면 1단
    205. 標題:8 昭和15年8月1日から昭和15年8月31日 p.16 : 間島省内匪賊状況週報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木内忠雄 1940년 8월 31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8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206.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207. 207.0 207.1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208.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209. 서재진 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총서 06-11 (통일연구원, 2006) pp.206~207
    210. Far Eastern Front Wikipedia
    211. Приморская группа войск (Primorsky Group of Forces) : Википедия / Maritime Group of Forces Wikipedia
    212.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러시아어 wikipedia)
    213. 김정일 생년 : 우남위키
    214. 김정일 생가 : 우남위키
    215.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216. “김일성 축지법·김정은 3살에 사격을 했다니…” KBS News 2015.10.14
    217.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
    218. 218.0 218.1 218.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 p.88 :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219.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5
    220. Вечный президент Северной Кореи (Eternal President of North Korea) - Рамблер/новости (Rambler/news) 2020. 4. 14.
    221.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222. 巾帼志愿者讲党史 | 中共东北委员会和抗联教导旅的成立,抗联小部队的顽强斗争 搜狐新闻 2021-08-25
    223. 「5 昭和16年4月18日から昭和16年6月1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5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 p.17 (5월 28일자) 3월말에 종료된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옴 (哈府匪首會議)
    224. 왕신림#류쉔코가 소르킨으로 교체되는 배경 우남위키
    225.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460 각주
    226. Геннадий Константинов, "Особая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ая.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第 88 国际特别旅. 중국어 번역도 같이 있음.)" (- Khabarovsk: Priamurskiye Vedomosti, 2015; ISBN 978-5-8003-0350-6) pp.73~74
    227. 《세기와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3. 국제당의 련락을 받고
    228. 《세기와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 1. 하바롭스크 회의
    229.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 위키백과
    230. 日ソ中立条約 ja.wikipedia
    231. Soviet–Japanese Neutrality Pact - Wikipedia
    232. "金日成(김일성)은 日帝(일제)때 평범한농부" : 在蘇韓人(재소한인) 朴(박)일씨 주장 1992.03.11. 동아일보 6면
    233. 김일성 1942년7월∼45년10월 소련군 특수부대원으로 활동 중앙일보 1992.03.13 종합 1면
    234.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235. 유순호, <김일성 1912~1945> (서울셀렉션, 2020) 상권 pp.262~263.
    236. 해방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주성하의 서울살이] 노예정신과 혁명정신 자유아시아 방송 2023.02.24
    237. 여영준, 《준엄한 시련 속에서 : 만주항일 유격전사의 이야기》 서울 : 天池, 1988; 《严峻的考验: 抗日老战士吕英俊回忆录》 / 吕英俊 口述 / 韩兑岳 整理 / 紫荆 译, 延边大学出版社, 1995年 12月
    238.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239.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40. A. N. Lankov, 《From Stalin to Kim Il Sung :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2002.) p.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