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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김일성 관련 서적이다.

저자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한국의 정치학자로, 미국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 및 정치와 관련한 많은 저서가 있다.
-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을유문화사, 2000.04.15.)
김용삼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 (김정은의 할아버지)김일성 진실을 말하다 (미래사, 2018)
- 『김일성 진실을 말하다』(북앤피플)

서대숙, 김용삼의 저서에 나오는 김일성

김일성 연구가인 하와이대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교수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여러 명의 공산주의 활동가를 소개하고 있다.[1] 김용삼도 이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11명의 동명이인 김일성이 있다고 하였다.[2][3] 일부는 위에 나온 사람이며, 잘 알려진 사람은 없다.

  1. “전설상의 김일성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용감히 싸운 사나이와 동일인이며, 이 김은 1922년 만주에서 동사(凍死)했다.” (이북, 『김일성위조사』) - 내용상 위의 3과 동일인으로 볼 수 있으나,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 말은 김경천(金擎天, 1888 ~ 1942)에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김일성은 전설의 김양녕(金陽寧)이라는 한인인데 1932년 일군과의 전투 시에 전사했다.” (김창순, 『역사의 증인 (1956)』[4])
  3. “김일성은 1920년대 만주 환인(桓仁)에 있던 민족주의 전투조직 정의부(正議府)에 가담하여 있다가 1931년 병사(病死)했다. 그를 계승한 두번째 김일성이 김양녕(金陽寧)이다.” (김창순, 『북한 15년사 (1961)』[5])
    후일 김창순은 김양녕(金陽寧)의 이름 한자를 김양녕(金楊寧)으로 바꾸어 쓰고, 이는 본명이 김훈(金勛)이며 양녕(楊寧)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던 양림(楊林, 1901~1936)이라고 하였다. 본래의 성 김(金)과 양녕(楊寧)이라는 변명을 합해 김양녕(金楊寧)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4. “제1차당(고려공산청년회)으로부터 동방공산대학에 파견된 21명의 학생들 속에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나이는 경상북도 김천 출신의 김종수(金琮洙·라스토킨)와 동일인이다. 김은 1928년에 동방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에 돌아와 제4차당의 공산주의 활동에 참가했다.”- 위의 7과 동일인
  5. “1930년대 <혜성>, <제일선> 기타 주도적인 조선잡지들에 김일성(金一成)이라는 필명으로 몇 편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들은 당시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인데 공산주의 활동을 회상한 것도 있다. 이 사람은 김경재(金璟載, 1901~ )이며 제2차 당 사건에 연좌되어 검거된 일이 있다. 그는 한때 <조선지광(朝鮮之光)>의 편집자였으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기사를 썼다.”[6]
  6. “M·L당 문서철에는 제4차당 북경지부에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지부장이었고, 김석린의 지도하에서 일했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 중에는 이영식, 최환, 원흥, 김용찬 등이 있었다. 후에 북경에서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고려공산청년회를 위하여 <혁명>이라는 잡지를 편집 발간했다.”[7]
  7.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 후에 몰수된 문서에는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사람이 연길현의 한 작은 공산주의 일선조직인 수양회의 교육 부위원장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조직의 책임자는 이인수였다.”[8]
  8.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 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북만국 조직부장 김은한(金殷漢, 1892~?)은 재판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는 1926년 처음으로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위원장 강화인의 명령으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일원인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사람과 함께 아성지구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그는 김일성과 함께 1927년 1월부터 3월까지 2개월간 공산주의를 선전했다.”[9][10][11]
  9. “1920년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에는 김일성(金一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30세이고, 중국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1920년 12월 27일 원산을 거쳐 입선(入鮮)했다. 이 김일성(金一成)은 1920년 12월 10일부터 20일까지 이만에서 진행되었던 소규모의 한인 공산주의자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김과 함께 파견된 사람들은 김창원과 이릉이었다.”[12][13][14]
  10. “만주의 한 공산주의 기관지인 <적기(赤旗)> 1930년 3월호에는 김일성(金一星)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위의 6과 동일인
  11. “제4차 간도 공산당 사건 또는 ‘5·30 사건’ 때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자가 공산주의자 일단을 인솔하여 용정 시가지를 파괴했다.”- 위의 8과 동일인


각주

  1.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pp.235~239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
  2. 김용삼, 『거대한 사기 김일성』 이승만학당 제4기 제6강의 자료(2018.02.10)
  3. 김용삼, 『김일성 신화의 진실 - 김성주, 진지첸, 김일센, 김일성으로 살았던 한 인간의 생애』 (북앤피플, 2016)
  4. 김창순 (金昌順, 1919~2007), 『역사의 증인 (歷史의 證人)』 (韓國亞細亞反共聯盟/1956년) pp. 75~77
  5. 김창순 (金昌順, 1919~2007), 『北韓十五年史: 1945年8月 - 1961年1月』 (지문각(知文閣), 1961) pp.55 ~ 56
  6. 위키백과에 두 사람의 김경재(金璟載)가 올라 있으나 동일인인 듯하다. : 김경재(金璟載, 1899년 ~ ?) / 김경재(金璟載, 1901년 ~ ?)
  7. 大獨立黨組織 北京促成會 創立 및 宣言書(1926. 10. 28) 金一成 · 元興
  8. 間島 및 琿春地方 朝鮮人의 結社團體 調査報告에 關한 件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3 / 外務省文書課受 第627號 1926년 06월 16일 : 李仁秀(東一少年會 會長), 金日星(東一少年會 智育部長)
  9. 김은한(金殷漢) 판결문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31.07.27
  10. 김은한(金殷漢)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 1931.09.22
  11. 김은한(金殷漢) 판결문 대구복심법원형사제1부 1931.09.22
  12. 「中露聯合宣傳部의 행동 및 不逞鮮人의 활동에 관한 건」 堺與三吉(間島總領事代理領事) 1921년 01월 13일 : 金昌元, 李淩, 金一聲
  13. 大正十年 間島地方 정황 1921년 02월 05일 : 金昌元, 李綾, 金一聲
  14. 中露聯合宣傳部의 活動 1921년 01월 17일 : 金昌元, 李綾, 金一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