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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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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金日成, 1901년 ? ~ 1937년 11월 13일)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師長)으로,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을 주도하고, 그 직후인 6월 30일 장백현 13도구(長白縣 十三道溝)에서 1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 ~ 1937), 2군 4사 1단장 최현과 함께 간삼봉 전투(間三峰 戰鬪)를 지휘했다. 그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북한 김일성이 그의 이름과 전공을 모두 가로챘기 때문에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김일성(金日成)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으로 나이 28세라고 한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9월 11일 조간 5면 기사. 석양리(石陽里)는 회린면의 면소재지였던 석우리(石隅里)의 오기로 보인다. 陽과 隅는 모양이 비슷하여 얼핏보면 혼동할 수 있다.

출신 배경

함경남도 행정구역 개정안 부도의 갑산군(甲山郡) 지도[1] : 갑산(甲山) 바로 북쪽에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 회린면(會麟面)이 있다. 그 북쪽으로 압록강에 면해서 혜산진(惠山鎭)이 있고, 또 그 북쪽으로 보천보(普天堡)가 보인다.

출신지

그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우리(甲山郡 會麟面 石隅里)로[2][3][4][5], 북한 김일성의 출신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大同郡 古平面 南里)와는 전혀 다르다.

생년

6사장 김일성의 나이는 기록에 따라 들쑥날쑥하여 생년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대부분 기록에 1912년생인 북한 김일성보다 적게는 2~4세, 많게는 11~14세 연상으로 나온다. 그의 전사를 보도한 1937년 경성일보 기사에 36세라 하였고, 혜산사건 수사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도 체포된 사람들이 김일성의 나이가 36세라 했다고 증언하므로, 1937년에 36세라 한 것이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생년은 1901년 전후일 것이다.

소련 유학

다수 기록에 그는 소련에 10여년 체류하며, 모스크바 공산대학(共産大學)을 나오고, 군사교육 과정도 이수했다고 한다. 만주사변(1931년) 무렵 동변도(東邊道)로 왔다고 하였다. 그의 전사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에 녹림(綠林) 유일의 인텔리라 했으므로 상당한 학력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가계

그의 가계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신문 기사에 김일성이 부친과 함께 무장활동을 했으며, 부친이 수령, 아들은 부하가 되었다고 하였다. 북한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일찍 죽었을 뿐만 아니라 부자가 함께 무장활동을 한 적도 없다.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장이 김일성(金日成) 아닌 본명 김성주(金成柱)로 나온다. 이것은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증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아닌 김성주(金聖柱)라는 기록과 증언도 있어 논란이 된다. 김일성의 사촌형 김성보(金成甫)를 검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6] 성(成)자가 항렬자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은 사촌형이 없으며, 그의 형제와 사촌들의 항렬자는 주(柱)이다.

동북항일연군 시기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활동을 처음으로 보도한 조선중앙일보(鮮中央日報) 1936년 8월 19일 기사.

국내 신문에 항일연군 김일성과 관련한 기사가 자주 나오던 시기는 1936년 9월 ~ 1937년말 기간과, 1939년초~1940년 여름 기간이다. 앞의 기간에는 6사장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이고, 뒤의 기간에는 제2방면 군장 김일성에 대한 보도이다. 1937년 11월 6사장 김일성 전사에 대한 보도가 있은 후 1938년 1년간은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다. 다시 나타난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다.

신문에 보도된 김일성 부대의 활동은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등의 사건이 대다수이다.

항일 유격대 투신 시기

1932년 7월 18일자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7]에 의하면 연길현 의란구(延吉縣 依蘭溝) 유격대의 대원으로 주소가 왕청현(汪淸縣)이고 나이 30세인 김일선(金一善)이 나온다. 연길현 노두구(老頭溝) 유격대원으로는 왕덕태(王德泰)가 보인다.

의란구 유격대와 노두구 유격대는 통합해서 연길현 유격대로 되었다가 동북항일연군 2군에 소속되며, 노두구 유격대원 왕덕태(王德泰)는 2군 군장이 된다. 한편 1936년 12월 12일자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8]에 2군 제3사장(師長) 김일성(金日成)이 김일선(金一善)이라는 이름으로도 표기되어 있으므로, 이 사람은 의란구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과 동일인물일 것이다. 1932년에 나이 30세이면 북한 김일성은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의란구 유격대원이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현상금

현상금 양정우(楊靖宇) 20만원, 김일성(金日成) 2천원
현상금 양정우(楊靖宇) 20만원, 김일성(金日成) 2만원

지주 김정부(金鼎富) 등 납치 사건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 ~ 1958)이 간행하던 잡지 《삼천리(三千里)》에는 6사장 김일성과 관련된 기사가 2건 나온다.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귀순한 여당원과 김일성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운명(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이 기사의 김정부(金鼎富)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3장 6절 "애국지주 김정부"에 나오는 사람으로, 빨치산들에 협조적이었다며 칭찬하는 사람이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삼천리의 이 기사도 거론하지만 1936년 가을에 김정부를 납치한 사람은 6사장 김일성으로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김정부는 만인(滿人) 유력자 천성보(千成寶) 등과 함께 1936년 8월 31일 십구도상관방자(十九道上官房子)에서 김일성 부대에 납치 당했는데, 이듬해 3월 3일 일만(日滿) 혼성 토벌대가 이십도(二十道) 오지(奧地)의 김일성 부대 산채를 급습할 때 구출 되었다.[9] 김일성 회고록의 김정부 이야기는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나오는 정도익(鄭道益)은 1936년 11월 6일 (음력 9월 23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다가[10], 이듬해 3월 김정부와 같이 구출되었다.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자는 김일성이 납치해간 김정부의 인질대금으로 1만원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보천보 습격사건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100여명을 이끌고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간삼봉 전투

1937년 6월 30일 함남 신갈파 대안 장백현 13도구에서 벌인 전투이다. 북한과 중국 측은 항일연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주장하나, 당시 신문 보도와 일본측 기록에는 일본군 피해는 5명 전사, 5명 중상, 7명 경상인 반면에 항일연군 측 전사자는 50 ~ 60여명으로 일본군이 대승한 것으로 나온다.

혜산사건

혜산사건은 보천보사건 이후 연루되었던 지하조직이 적발되어 갑산군, 장백현 일대에서 수백명이 체포,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건이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수백명이나 되는 것은 6사장 김일성이 갑산군 회린면 출신이라 일대에 많은 사람들을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남 대동군 출신인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말도 서툴고, 나이도 어려 무연고지인 갑산일대에서 수백명을 포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사

1937년 11월 13일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만주군 보병 제7단(步兵 第七團)과의 전투중에 사살 당하였다.


  • 6사장 김일성 피살지 인근 지도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피살지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 인근 지도. 왼쪽 하단은 근래에 찍은 피살지 인근의 위성사진 지도이다. 만주국군월보(満洲国軍月報) 1937년 11월분에 의하면 송수진(松樹鎭, 松树镇)에 만주군 보병 제7단 (步兵第七團, 단장 楊春煜) 본부가 있었고, 휘하 제1영(第一營, 영장 孫端中)의 본부와 그 산하 제1련, 제3련이 서남차(西南岔)에, 제2련이 소영자(小營子, 小营子)에 주둔했다. 6사장 김일성 부대는 양목정자(楊木頂子, 杨木顶子)에 있었고, 그곳에서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 당했다. 일부 기록에는 사살지점이 소서남차(小西南岔, Xiao Xinancha)로도 나온다.
이 지역은 당시는 무송현(撫松縣, 抚松县, 푸쑹현)에 속했으나, 지금은 임강시(临江市, 臨江縣, 린장시) 소속으로 바뀌었다.
위성사진 지도에 나오는 화수진(樺樹鎭, 桦树镇, Huashuzhen)은 인구 1만 5천 가량의 큰 촌락이나, 1960년대에 생겨났으며, 1937년 당시에는 이곳은 자작나무(樺樹)가 울창한 밀림지대였다고 한다. 오늘날보다 숲이 훨씬 무성하여 무장단체들이 밀영을 만들어 잠복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 화수진(樺樹鎭, 桦树镇, Huashuzhen) 바이두(Baidu, 百度)

6사장 김일성의 신원 및 전사 관련 기록

현재까지 발굴된 보천보사건 주역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에 대한 1938년 이전의 신원 기록이나 피살 기록은 아래와 같다. 20여건이 넘는 기록 중에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것은 한 건도 없다. 수록처를 클릭하면 자료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수록처 (원문 링크) 기사 제목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기록 내용
1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2년 7月 18日 中国共産党延吉縣委及所屬機關ノ組織狀況ニ關スル件 연길현 의란구(依蘭溝)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 30세, 주소 왕청현(汪淸縣); 노두구(老頭溝) 유격대원 왕덕태(王德泰).
2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 조간 5면 同胞六名を拉致 巨額の身代金その他要求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으로 나이 28세라고 함. [石陽里는 석우리(石隅里)의 착오로 보임.]
3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11월 26일 석간) 3면 공비 김일성파 내막(共匪金日成派內幕) 김일성은 함남 혜산진(惠山鎭) 출신. 키 5척 8촌(176 cm). 카이젤 수염. 37~8세.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 지령을 받아 북만주로 옴.
4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6년 12월 12일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동북항일연군 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 - 노두구 유격대원.
2군 제3사장(師長) 金日成(金一善) - 의란구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
5 월간 『철심(鉄心)』 1937年 5月 15日號 pp.98~114 동변도토비행(東邊道討匪行)[11]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며, 나이는 30세 미만이라 함.[11][12]
6 오카모토 고이치(岡本吾市), 「満洲に於ける中国共産党と共産匪」, 1937년 5월 "現在 活動中の 主要匪首及 其身元" 김일성은 농부 출신으로 “농업을 경영하다가 공비의 선전에 의해 비화(匪化)된 인물"로 가족관계는 “불상(不詳)"이고 나이는 30세라 함.
7 경성일보 1937年 6月 6日 (6月 5日 夕刊) 2面 김일성은 27세의 청년(金は廿七歲の靑年) 김일성은 평양 출신, 27세 청년. 15세에 모스크바 군사훈련 전문학교 수학. 22세(1932년)에 동변도(東邊道)로 돌아옴. 부친이 한일병합 후 만주로 가서 마적 두목이 됨.
8 조선일보 1937년 6월 6일 석간2의 2면 김일성의 내력(金日成 來歷) 평양 출신, 나이 27세. 부친 때부터 만주로 가서 그 방면(共産系 兵匪)에 참여하고 있는 자. [위의 경성일보 기사와 같은 내용에서 일부 누락]
9 조선일보 1937년 6월 8일 석간2의 2면 김일성 일당 중에는 여당원(女黨員)도 10여명. 보천보 습격사건 후보 6사장 김일성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 나이 34~35세.
10 경성일보 1937년 07월 09일 (8일 석간) 3면 1단 함흥연대토비행(咸興聯隊討匪行) 상보(詳報) 6사장 김일성을 金龍水(金日成)라 썼는데, 김용수(金龍水)는 본명이거나 또다른 가명일 수 있지만, 북한 김일성과는 무관한 이름이다.
11 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 『極東の計劃と民族』, 1937년 10월 초순 만주(滿洲)의 비적적화공작(匪賊赤化工作)과 조선인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金日成)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出身)이며, 그 지방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하였다.
12 월간 『철심(鉄心)』 1937年 11月 15日號 pp.70~75 「김일성비 토벌 상보(金日成匪討伐詳報)」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측의 토벌상보[13]
13 경성일보 1937年 11月 18日 (17日 夕刊) 2面 金日成殺さる 김일성비(金日成匪)가 13일 만주군의 토벌에 격전 5시간 끝에 섬멸됨. 수급(首級)을 취해 옴.
14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김일성피살(金日成被殺)?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보도.
15 조선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김일성 피착 참수(金日成被捉斬首) 김일성이 사살되어 참수(斬首)되었다는 보도
16 매일신보 1937년 11월 18일 3면 共匪 金日成 被殺 - 十三日 滿洲國 討伐軍에 김일성 피살보도.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후 적위군(赤衛軍) 입대. 만주사변 때 돌아옴. 부자(父子) 2대가 비적이됨 (아버지는 수령, 아들은 부하).
17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7면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 共産匪 金日成の 死 김일성 피살보도. 함남 출신.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만주사변 때 돌아옴. 녹림 유일의 인텔리. 부자(父子) 2대가 비적이됨 (아버지는 수령, 아들은 부하).[13]
18 조선신문(朝鮮新聞) 1937년 11월 18일 7면 5단 反滿抗日の匪頭金日成遂に年貢を納む 김일성이 사살되어 참수(斬首)되었다는 보도
19 治安狀況(昭和 12年) 제38보 1937년 11월 19일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김일성을 사살하고 목을 베어와 신원 확인중.
20 조선일보 1937년 11월 19일 조간 4면 기회(機會) 엿보든 공비단(共匪團) 동기(冬期)들며 대발호(大跋扈). 金周賢, 曺國鉉, 金日成 일파 암중 활약. 어제 김일성이 총살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21 제1헌병대월보(第一憲兵隊月報) 및 제1군관구월보(第一軍管區月報) 1937년 11월 만주국군월보(満洲国軍月報) 1937년 11월분 11월 13일 1로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을 사살(擊斃)했다는 만주군(満洲軍)의 기록.
22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서 1937년 12월 1일 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 p.49 김일성을 사살.
23 매일신보 1937년 12월 19일 2면 국경 경비진을 강화(國境警備陣을 强化) 왕봉각(王鳳閣, 1897-1937)에 이어 김일성(金日成)도 사망(死亡)
24 경성일보 1937年 12月 19日 조간(朝刊) 7面 國境 冬の陣 强化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차례로 죽음(斃).
25 조선신문(朝鮮新聞) 1937년 12월 19일 3면 2단 匪賊の蠢動に備へ國境冬の陣を强化, 對岸のバチルスは凡そ三千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차례로 죽음(斃).
26 조선일보 1937년 12월 19일 2면 1단 三千匪賊(삼천비적) 殲滅次(섬멸차) 國境警備陣(국경경비진) 强化(강화)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一成) 일파 등이 차례로 섬멸당함.
27 매일신보 1938年 2月 23日 (22日 夕刊) 2면 공비 최현 일당 궤멸(共匪 崔賢一黨 潰滅) 최현이 사살 되었다는 기사. 김일성도 작년 가을 총살됨.
28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匪賊九千に激減 / 満洲国治安完成へ 일만군(日満軍)이 작년 전투에서 비수를 죽인 것은 김일성 등 59명(匪首を仆すこと金日成以下五十九), 체포한 비수는 왕봉각 등 28명.
29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서 1938년 6월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김일성을 사살. (1937년 12월 1일자 동아국 업무보고서와 같은 내용)
30 국민신보(國民新報) 1939년 11월 12일 7면 アリナレ河畔, 世紀の轉換 : 警備彌增す平安北道. 김일성(金日成)은 효수(梟首)되었음.

만주국군월보의 6사장 김일성 사살 기록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회견기

참고 자료

거주지 : 만주국 통화성 장백현 우구자
1936년 음력 9월 김일성의 공산비 항일연합군의 습격 받아 납치되어 총을 휴대하고 치안대를 살해하고 부락민을 습격하여 금품, 재산을 강탈하였다.

일본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소장 문헌

아래는 6사장 김일성이 활동할 당시의 기록으로 일본 국회도서관(日本 國會圖書館) 소장 문헌이다. 국내 소장처가 없어 그동안 내용의 전모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월간 『철심(鉄心)』은 만주국군 기관지로 만주국 치안부 참모사(満州国 治安部 参謀司) 간행이다.

6사장 김일성이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며, 나이는 30세 미만이라 함.
만주군 측의 6사장 김일성 사살 당시 전투에 관한 기록.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알만한 내용은 없다.

함께 보기

각주

  1. 함경남도 행정구역 개정안 부도 : 내고향 옛지도 기록 보기 국가기록원 - 대정(大正) 2년 (1913년) 4월 지도
  2. 김일성 가짜설#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3. 갑산군 회린면 석우리(甲山郡 會獜面 石隅里)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12-19일자 (18일 석간) 5면 5단 기사
  4. 갑산군 회린면 석우리(甲山郡 會麟面 石隅里)
  5.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越智唯七 編 京城 : 中央市場, 大正6[1917] : p.1033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6.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의 김일성(金日成)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 체포 기사.
  7. 中国共産党延吉縣委及所屬機關ノ組織狀況ニ關スル件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2년 7月 18日
  8.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6년 12월 12일
  9.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348.
  10. 長白荒しの 不敵な强盜 共匪金日成一味の 廻し者の嫌疑濃厚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11월 27일 (26일 석간) 4면 기사
  11. 11.0 11.1 [[:파일:1937-05 철심(鉄心) 동변도토비행(東邊道討匪行).pdf|東邊道討匪行 / 從軍記者團]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철심(鐵心)』1937년 5월호 (満州国治安部,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pp.98~114 : 기사 묶음 중의 《東邊道の匪情と滿軍の健全なる發達》 (東京日日新聞社 廣瀨 特派員) p.106 하단 : 제6사장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30세 미만의 청년이란 풍문이었다하며 동변도에서는 제일 큰 세력이라고도 적혀 있다. [金日成といふのは純然 たる共産匪である、三十歳にならぬ 若者だが、モスクワの共產大學の訓練を受けて 臨江, 撫松、濛江、長白等所謂未討伐地區に蟠踞して現在 約五百の部下を持つてのるらしい、 現在では東邊道隨一の集結勢力である。]
  1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16장 2절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에는 『철심(鐵心)』1937년 5월호 기사를 인용하며 김일성이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한 것을 허위라며 비방하고 있다.
  13. 13.0 13.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7권(1996년) : "제20장 3. 소금 사건"에서 『철심(鉄心)』과 경성일보의 김일성 전사 기사의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