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金弘燾
출생
1938년 2월 6일
출생지
평안남도 양덕군
사망
2020년 9월 2일 (82세)
교파
감리교(기감)
경력
가평군 상천교회 담임 전도사

광희문교회 부담임
금란교회 담임목사(1971년~200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1996년~199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회장(1996년~1998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사장(1997년~2005년)
세계기독교 파워목회 대표회장
한미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서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세계평화상 수상
한국미래포럼 총재
한국일보 대한민국 종교그랑프리 수상
금란교회 동사목사(2008년~2020년)

자유민주국민연합 총재
학력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 학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학 석사
풀러신학대학교 목회학 박사
서울기독대학교 철학 명예박사

인디애나웨슬리대학교 신학 명예박사
배우자
배영자
자녀
1남 3녀(차녀 김정윤, 장남 김정민)
웹사이트

개요

대한민국의 목사로, 금란교회의 담임목사, 동사목사를 맡았다.

생애

1938년 평안남도 양덕에서 태어났으며, 38선 이북이 공산화되자 기독교를 믿던 김홍도의 가족 일가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38선 이북에 자리잡은 공산세력은 기독교를 없애기 위해 일요일마다 노동동원 명령을 내렸는데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일요일에도 학교에 출석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선생에게 폭력과 협박을 받아야 했다. 김홍도는 이것을 지키지 않고 교회를 갔다고 해서 학교 선생에게 뺨을 맞고 자아비판을 시키고 예수를 믿지 말라는 강요까지 받았지만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6.25 전쟁으로 월남해 군산으로 피난생활을 한 후, 서울에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신문팔이 등을 하면서 학비를 마련해야할 정도로 가난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모친은 고등학교 졸업 후 생계문제로 취직할 것을 권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신앙에 관한 집념이 강해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과 군복무를 마친 후인 1963년 가평군의 상천교회 담임전도사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목회자가 되었고, 1967년 광희문교회 부담임을 거쳐 1968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71년 금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2008년까지 금란교회 담임목사 자리에 있었다. 이후 은퇴하였으나 동사목사 자리에 있었으며, 202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주요 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홍정수 교수 축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를 1991년 이단 시비와 관련하여 축출한 것으로 이것을 "변선환·홍정수 교수 사건"이라고 부른다.

1988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변선환 교수는 1990년 '불타와 그리스도'를, 1991년 홍정수 교수는 '부활의 메시지를 다시 조명한다'는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이단 시비가 있었다. 변선환 교수는 "타 종교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 있다. 이에 김홍도 목사가 조직한 교리수호대책위원회의 부흥사들은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의 사상은 "이단 사상", "기독교 신앙과 감리회 교리에 배치되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감리교신학대학교 총회차원에서 받아들여져 출교되었다.

감리회의 복음주의, 정통주의 진영에서는 복음주의적, 정통주의적 기풍이 살아났다고 평가하였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생들은 정치싸움이라는 비판을 했다.

애국 활동

교회 설교

  • 1980년대 후반 사상의 오염 관련 설교
  •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설교

강연

"흔히 나보고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목회만 하면 되지, 무슨 정치운동에 참가를 하고 반공에 앞장서서 싸우느냐'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목사로 하나님 말씀만 잘 전하고 목회만 하고 싶은데, 여러분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사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여러분, 공산주의와의 싸움는 것은 정치싸움이 아니에요.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 2011년 8월 30일 왕재산 간첩단 사건 철저수사 촉구 애국대회 강연 중

방송

  • 2013년 4월 16일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