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독도 (고유 영토설의 신화화 과정)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9일 (월) 10:29

이 문서를 보기 전에: 동북아역사재단, “독도 침탈의 첫 신호탄”, 2015년 2월 15일 유튜브 공개,

1분 7초부터 시작하는, ‘러일전쟁 직후부터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강제 편입한 것이....’ 등의 설명을 이 문서 내용과 비교해 보기를 권한다.


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이승만 TV,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강연.


함께 보기 2: 정규재 TV, “떠도는 섬” 강연.

(1) 이 문서는 이영훈,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51~174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한일 어업 협정, 이승만 라인, 평화선, 친일파 청산론, 한일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

  • 다음 표제어의 내용을 참고하고, 내용이 없는 표제어에는 이 문서와 내용상 일관성을 갖추어 설명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독도, 안용복, 안용복 사건, 러일전쟁, 청일전쟁,


우산국, 울릉도, 우산무릉... 혼동의 시작

사료(史料)를 검토해 보면, 독도가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서 우리 고유의 영토라는 인식이 강해진 것은 아무리 멀리 잡아도 대한민국의 성립 이후다. 특히 지난 20년간 독도는 한일 분쟁의 핵심에 자리 잡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런 결과에는 역사적 기록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또는 기록의 일부만을 확대 과장한 측면이 크다.

울릉도에서 성립한 나라가 독도라고 보는 해석은 비약(飛躍)

이른바 ‘독도 고유 영토설’에 역사적 무게를 싣는 객관적인 사료로 《삼국사기》가 대표적이다. 즉 이 책을 근거로 삼는 입장에서는, 독도가 ‘우산(于山)’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시대 이래 계속해서 지배를 받아 왔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지증 마립간) 13년 6월(서기 512년), 우산국(于山國)이 귀의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부근) 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의 크기는 사방 100리인데, 험준함을 믿고 신라를 따르지 않았다.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장군이 되어 (...중략...) 그들을 항복시켰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번역 및 일부 재구성 - 편집자)


여기서 오해를 사고 있는 부분이 바로 ‘우산’ 또는 ‘우산국’이다. ‘우산’이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고는 하지만, 기사를 잘 읽어보면 ‘우산국’은 울릉도에서 성립한 나라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독도는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섬이고, 울릉도와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측량 기술이라든가 항해술이 독도를 탐사할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부터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짧은 기사만으로는 울릉도에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독도가 포함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5세기 초까지도 우산도는 곧 울릉도였고, 다른 섬은 없었다

1402년에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 지도에서 붉게 표시한 부분이 강원도 동쪽의 울릉도다. 울릉도 이외에는 다른 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 때에 이 섬에 살던 주민을 모두 육지로 옮겼다.

1402년 권근(權近, 1352~1409)과 같은 조선 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엘리트 학자들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라는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에 나타난 울진현 동쪽 바다에는 울릉도 하나밖에는 없다. 이는 그 이후 만들어진 지도와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인데,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는 울릉도에 또 다른 섬이 있다는 인식이 없었다는 증거다.

이 섬은 오직 하나로, 그 이름은 울릉도이고 ‘우산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1417년 김인우라는 사람이 이 ‘우산도’를 탐사하고 돌아와 이 곳에 8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는 보고를 올린다. 우산국이 사라지자, 울릉도를 우산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태종실록》32년과 33년 즉 1415년(태종 16년)과 그 이듬해 기사는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태종은 이 보고를 듣고 섬을 비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우산도의 주민들이 육지로 옮겨졌는데, 이는 조선시대 내내 실시되었던 공도(空島) 즉 섬을 비우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바로 이 때의 기사를 보면 이 곳을 ‘우산무릉등처(于山武陵等處)’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무릉(武陵)’은 ‘울릉’의 별칭이다. 그런데 전통시대에는 동일한 관직명 기관명, 지명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고, 특별한 맥락 설명 없이 이를 뒤섞어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현재 남아 있는 사료라든가 각종 개인 문집 들을 번역할 때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산무릉등처’는 사실상 같은 말을 반복해서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기가 반복되면서 이름이 다른 섬이 두 개 있다는 오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해의 시작 - “독도는 우리 땅” 4절 2번째 구절,《세종실록지리지》‘오십 페이지 셋째 줄’

가장 널리 알려진 독도 고유 영토설의 근거는 바로 1451년 나온 《세종실록지리지》의 강원도 울진현(蔚珍縣) 기사다.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고 하였는데, 지증왕 때에 .... (재번역 - 편집자)

이 기사에 뒤이어지는 내용은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서 짐작되듯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는 울릉도에 대한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과 실제 사료들을 살펴보면 이런 과정으로 재구성된다.

신라 때에 우산국이 복종한 이후, 《고려사》에서는 우산국이 11세기 초까지는 존속되었던 것으로 짐작될 만한 기사들이 보인다. 비록 나라는 사라졌더라도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이 아니다. 땅도 물도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멀리 떨어진 독도까지 갈 수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과학 수준으로도 사람이 정착해서 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바위섬이 ‘우산국’이라는 이름을 계승하여 존재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서 어딘가 오해하거나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바로 신라 때에 ‘우산국 = 울릉도’로 보았던 관계가, ‘우산과 무릉’이라는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기록되었다. 언젠가부터 이를 두 개의 섬으로 오해하기 시작했고, 이 오해가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은 것이 바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특히 이 때는 이미 태종 때에 인구를 비운 채 한 세대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니 그 섬의 주민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듣거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따라서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좋으면 바라볼 수 있다’는 서술 자체가 환상의 소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않으면 바라보이는 게 당연한데, 여기에 굳이 ‘날씨가 좋으면’이라는 단서를 붙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외교부독도’[1] 페이지에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보인다’는 구절이 강조된 채로 게시되었다.

환상의 섬이 되어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의 '우산도'

동서남북 구분도 안 된 채 떨어진 환상의 두 섬

1530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울릉도와 우산도. 오늘날 '독도'라고 주장되는 우산도가, 실제 위치와는 다르게 울릉도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크기도 매우 크다. 이 지도를 시작으로, 이후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지도들에서 우산도의 위치가 떠돌아 다닌다.


독도가 울릉도 동남쪽 87킬로미터상, “독도는 우리 땅” 4절에 따르면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과연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주장하고 중고등학교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역대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느냐의 문제는 다르다.

또한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지금 남겨져 있는 전통시대의 지도가 실측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리지’ 즉 초점을 맞추는 지역의 크기나 산물, 풍습 등을 설명하면서 대강의 위치를 이미지화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서부터 시작된 오늘날 우리가 독도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울릉도(무릉도)’와는 다른 ‘우산도’에 대한 오해와 환상의 단초가 분명하게 나타난 지도가 있다. 바로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팔도총도(八道總圖)〉가 그것이다.

이 책 자체도 지도책이 아닌 ‘지리지’이기 때문에,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멀다. 즉 한반도의 동서(가로)는 지나치게 넓고, 남북(세로)는 너무 좁은 형태이다. 바로 이 지도에 우산도가 울릉도의 절반 크기로 ‘울릉도에서 가까운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실측 지도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지도 자체가 동서남북을 혼동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경상도가 강원도 위에 자리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난히 울릉도 쪽만 실수를 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이 지도를 근거로 독도 고유영토설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돌리고... 이리저리 떠도는 섬, 우산도

그 이후 19세기까지 그려진 지도를 살펴보면, 어느 날 따로 떨어져 등장한 ‘우산도’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위치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예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이후 19세기까지 만들어진 지도를 일람하면서 발견한, '떠도는 섬' 독도. (《반일 종족주의》159쪽.)오늘날 독도라고 주장되는 '우산도'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다. 크기도 제각각이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87km)에 위치해 있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바위섬이다.

이 예시의 첫 그림에서 우산도는 울릉도에서 꽤 떨어진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러다가 둘째 그림에서 우산도는 어쩐 일인지 울릉도에 ‘안겨’ 있는 꼴을 취한다. 셋째 그림에서는 울릉도 남쪽으로 우산도가 옮겨간다. 넷째 그림에서는 울릉도 서남쪽 저 멀리로, 다섯째에서는 울릉도 동쪽으로, 여섯째 그림에서는 울릉도 동북쪽으로 옮겨간다. 게다가 울릉도와의 상대적인 크기도 제각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독도라고 인정해도 되겠다 싶은 정도에서 비슷한 방향과 위치로 우산도를 그린 지도는 단 한 장도 없다.

이는 단지 과학 기술의 발달 수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 초기 울릉도의 인구를 모두 육지로 옮긴 뒤, 조선시대 내내 이 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전 기간을 거쳐 섬을 비우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사람이 살 수 없는 저 먼 바다 바위섬에 관심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안용복, 최초의 독도 고유영토설 주장: 그러나 조선은 관심 없는 일

1417년 이래 섬을 울릉도를 빈 섬으로 만든 뒤 17세기가 되면 일본의 어민들이 이 섬을 ‘죽도(竹島)’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고기도 잡고 나무도 벌채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693년 동래부(東萊府, 오늘의 부산 근방)에 사는 안용복(安龍福, ?~?, 17세기 중엽~말엽 활동)이라는 이가 사람들을 이끌고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일본 어부들과 갈등을 빚는다.

이에 대해서는 각종 기록들이 조금씩 다르게 서술해 놓았는데, 어쨌든 안용복은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여기서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 뒤 대마도(對馬島)를 경유해서 다시 동래부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조선과 일본은 외교적 교섭을 통해,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일본은 자국의 어민이 울릉도로 건너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안용복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1696년에 다시 울릉도를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 이 때 안용복이 주장한 것이 바로 일본인이 ‘송도(松島)’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독도’도 조선의 영토라는 것이었다.

안용복은 그 근거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원도 지역의 지도를 제시한다.

그런데 지금껏 살펴보았듯 조선시대의 지도에서 울릉도는 우산도와 별개의 섬으로 그려졌고, 그 위치도 실제 독도와는 다르다. 게다가 당시 독도는 ‘독도’라는 이름도 없는 상태였다.

안용복은 일본인이 ‘송도’라고 부르는 섬을 보고는, 자신이 가지고 간 지도에 그려진 ‘우산도’라고 간주한 것이다.

일본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으로 추방했다.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갔다. 사헌부에서는 제멋대로 국경을 넘은 죄가 크다며 주장했지만, 3년 전에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한 공로가 인정되어 유배형 정도에 멈추었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즉 안용복은 두 번째로 일본에 가서, 비록 지도 속의 환상의 섬인 우산도라고 착각을 했을지언정, 일본인들이 이미 그 실체를 알고 ‘송도’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독도’를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안용복의 주장이 일본에서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정부는 안용복의 주장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더구나 그를 월경(越境)한 죄로 유배까지 보내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건이 벌어진 뒤인 1699년 이후로 조선은 3년마다 한 번씩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해서, 1694년도에 최초로 일본과 서로 확인했던 바대로 울릉도에 일본 어민들이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를 감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지도에서 자연스럽게 우산도라는 섬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가서 보니 강원도와 울릉도 사이에 섬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산도라는 섬에 대한 환상은 이어져, 18세기 이후로도 울릉도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우산도라는 섬을 그린 지도 그림도 남아 있게 되었다.


1882년, 재개방된 울릉도와 깨지는 환상

울릉도 탐사 이후 우산도는 지도에서 사라지기 시작

1881년에 일본인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 200년 전 맺은 약속을 깨고, 울릉도를 불법 침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종은 이규원(李奎遠, 1833~?)을 감찰사로 파견, 울릉도 탐사를 지시하고, 1883년부터 섬을 재개방하여 사람들을 옮겨살게 하였다. 섬이 비워진 지 466년 만이었다.

이 때 고종이 내린 지시는 다소 혼란하다. “울릉도 근방에 송도, 죽도, 우산도가 있다는데 서로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라.”고 하는 동시에 “송도, 죽도, 우산도를 합쳐서 울릉도라고도 하니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고종 자신의 무지함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그 정도로 조선 정부가 탐사에 관심이 없었기에 혼란스러운 정보를 정리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이규원은 탐사 뒤에 돌아와 우산도를 찾지 못했음을 보고했다. 이 때 그가 그린 울릉도 지도에는 죽도라는 부속 섬은 있어도 우산도는 없었다. 이 탐사에서도 그는 울릉도 동남쪽 87킬로미터 아래에 있는 작은 섬을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산도에 대한 환상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규원이 발견한 죽도라는 섬이 우산도로 불리게 되면서 그 정확한 위치와 크게 정도는 사실에 근접하게 되었다.

가령 1899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라는 지도에는 이규원이 죽도라고 명시한 그 섬을 ‘우산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섬은 지금도 그 이름이 ‘죽도’다.


‘석도=독도’설의 시작과 그 모순

환상은 깨졌지만 독도의 존재는 몰랐다

1899년 제작된 <대한전도>에 나타난 울릉도와 우산. 1882년 고종의 지시를 받은 이규원의 탐사 결과에 따라 우산도에 대한 환상은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환상의 잔상은 남아 있었다. 이 지도는 이규원의 탐사 결과를 그런대로 잘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우산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고종의 지시로 1883년부터 재개방된 울릉도의 인구는 이후 1900년까지 1,000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인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제국은 칙령 41호를 내려 울릉도를 군(郡)으로 승격하고 군수를 파견하는 듯 행정 관리를 실시한다. 이 때칙령의 내용에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군의 영역을 정하며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한다”고 했다. 여기서 죽도는 앞서 설명한 이규원이 보고하고 지금껏 확실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그 죽도다.

문제는 ‘석도’다. 오늘날 한국 정부와 학자들은 바로 이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선 칙령 자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칙령에서 우산도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1899년에 만들어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우산도가 작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제 1900년 내려진 칙령에서는 그 조차도 없어졌다. 우산도라는 섬이 없다는 것을 탐사뿐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1,000명의 주민들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울릉도가 ‘군’으로 승격되고 새로운 행정구역으로서 선포되면서 죽도와 석도가 그 군역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죽도 이외에 울릉도에 부속한 섬은 ‘관음도(觀音島)’다. 그 밖에는 사람이 사는 섬이 없다. 이런 점에서 칙령 41호의 ‘석도’란 오늘날의 관음도였다고 할 수 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멀리 떨어진 독도를 발견하고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 ‘독도’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이 섬을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보는 공통 인식도 생겨났을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이를 탐사하거나 기록으로 남긴 적은 없었고, 그럴 만한 실제 기술이나 역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울릉도의 행정구역을 새롭게 선포하면서 포함된 부속섬은 죽도와 석도(관음도) 뿐이었다.

석도는 돌섬, 독도는 바위섬

석도가 곧 독도라는 주장의 근거는 먼저 국어학적 지식에서 연유한다.

‘석도(石島)’를 우리말로 풀면 ‘돌섬’이다.

그런데 충청, 경상, 전라도의 방언에서 ‘돌’은 ‘독’이라고도 한다. ‘독일을 하러 다닌다’는 문장은 ‘석공 일을 하러 다닌다’는 뜻과도 같다. 여기서 ‘독’이 ‘돌’ 즉 ‘石’이다. 여기까지는 정확한 사실이며, 소설 등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논리를 보자. 방금 설명한 사실을 감안해서 ‘석도’를 방언으로 읽어본다면 ‘독섬’이 될 것이다. 그 ‘독섬’을 그대로 한자로 옮기면 ‘독도(獨島)’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자어의 주요 구성 원리 중 하나인 ‘가차(假借)’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에서는 고유어나 외래어를 글로 옮길 때 특정 한자의 음이나 모양만을 따서 원 발음과 비슷하게 문자를 만든다. ‘Italy’를 ‘이태리(伊太利)’라고 하거나(음차), ‘밤나무골’이라는 마을 이름을 ‘율곡(栗谷)’이라고 부르는 경우(훈차)가 대표적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고유어와 한자어의 의미가 정확히 대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훈차는 대부분 정확히 지켜진다.

이런 점에서 ‘석도’를 ‘돌섬’으로 바꾼 뒤에 이걸 또 방언인 ‘독섬’으로 변화시켜 한자어로 바꾸는 복잡한 과정을 굳이 고려해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돌’과 ‘바위’라는 단어는 이에 상응하는 한자어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


1911년, 교민들의 뜻을 모아 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조선지도>. 이 지도의 울릉도 부분을 자세히 보면, 그 부속섬으로 '석도'를 '돌도'로 정확하게 옮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원본과 함께 이영훈 교수가 확대한 부분을 합성, 조정하여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명백한 증거가 있다. 바로 1911년에 로스앤젤레스 교민 사회에서 뜻을 모아 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죠션디도(조선지도)〉다. 이 지도에서 울릉도 바로 남쪽에 ‘돌도’가 붙어 있다. 이 ‘돌도’가 바로 석도다. 원래의 위치인 울릉도 동북에서 벗어난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이 섬이 독도가 아닌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독립정신》에 실린 이 지도의 ‘돌도’는 이영훈 교수가 최초로 제기한, ‘석도=독도’설의 반박 근거다.

일본과 한국의 독도 편입과 갈등의 역사

일본의 독도 편입

이렇듯 1900년 울릉의 군역을 획정하면서 독도는 제외되었고, 더 이상의 탐사 또는 영역권 주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4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다. 이 때 일본은 독도의 내력을 조사하고, 그것이 조선왕조에 속한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편입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울릉군수가 1906년 상부에 보고하지만, 조선의 중앙정부 자체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조선은 제3국과 외교할 권리를 빼앗겼던 것이지, 국토 및 인민에 대한 지배권은 살아 있는 국가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껏 독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조선 정부가 이 때쯤에 새로운 관심을 보여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없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한국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로 독도 문제를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속사정이다. 대한제국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될 때 그것을 인지했더라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도 편입

해방 이후인 1951년 9월, 연합국과 일본 간의 강화조약 즉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맺어질 때 일본의 영토 경계가 결정되었다. 이 조약은 우리나라의 국제법적 위치와 한일 청구권 협정 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때 한국 정부는 회담을 주관한 미국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서 분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고, 1905년 이래로 일본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한 권리를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냈다. 한국 정부는 이 회신을 받기 전에도 독도의 위치와 내력에 대해 합당한 근거를 제대로 대지 못했고, 미국 역시 이를 분명하게 재확인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입장에 반발하여, ‘이승만 라인’으로 알려진 ‘평화선’을 발표하여 독도를 한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후 한국와 일본 사이의 독도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미국은 사실에 입각한 입장 표명 이후 이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어떤 점에서 보면, 한국은 이 분쟁을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긴장 정도로 잘 다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대로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주장을 펴왔지만, 정부 차원에서 대놓고 공격하는 자세는 자제해왔다.

이런 자세에서 1965년에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었고, 우호적인 관계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티격태격(?)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김대중 정부까지도 지켜진, 양국의 국익을 위한 최소한의 암묵적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이후에 급변한 독도 분쟁의 방향

외교부에서 운영하는, '외교부독도' 홈페이지의 첫 화면. 이 홈페이지의 자료실에는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이라는 분류 페이지가 마련되어 있다.

김대중 정부까지도 그런대로 잘 지켜지던 독도를 둘러싼 양국의 금도(襟度)가 노무현 정부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독도에 여러 시설을 설치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에 주민을 입주시키고, 민간 관광을 권장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가 강력히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이 항의를 받은 노무현 정부는 더 강경하게 대응하여 악순환을 키우며 오늘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2005년 이래로 문화계 인사들이, 그전과는 다르게 새삼스럽게 독도에 정신적, 이념적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독도에 대한 신화화는 더욱 깊어졌다.

예를 들어 2005년 한국시인협회의 시인들은 독도까지 가서 시 낭송회를 개최하고, 이를 묶어 《내 사랑 독도》라는 시집으로 출간한 바 있다. 시인 고은은 그 전까지 우리 국토를 유기적 생명체에 비유하면서 독도를 언급한 적이 없다가, 이 시낭송회에서 갑자기 독도를 ‘내 조상의 담낭(膽囊)’으로 노래한다. 독도가 민족주의 그 중에서도 반일 감정을 저변에 깐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식의 문화 운동은 김영삼 정부 때에 전국을 혼란에 빠뜨린 쇠말뚝 소동이나 구 조선 총독부 청사 해체에 동원된 주술적인 세계관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독도가 신화화될수록 냉정하고 합리적인 대화는 멀어지고,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참고자료

  • 이영훈,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51~174쪽
  • 《삼국사기》
  • 《태종실록》
  • 《세종실록》
  • 이승만, 《독립정신》(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소 영인본), 1911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 외교부 독도 홈페이지 [3]
  •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4]
  • 독도박물관 홈페이지 [5]
  • 동북아 역사넷, ‘지도로 보는 동해, 독도’ [6]

각주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