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흥사건(東興事件) 또는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은 1935년 2월 13일 새벽 0시 30분에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장(師長)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이끄는 200 여명의 부대가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퇴각한 사건을 말한다.[1][2][3]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간행하며 보도하였다[4][5].

동흥사건은 보천보사건 보다 2년 먼저 일어난 더 큰 규모의 사건임에도 오늘날 학계에서조차 거론하는 사람이 드물고,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있다. 동흥사건보다 1년 먼저 1934년 1월에 일어난 토성습격사건, 1933년 6월의 독산사건도 완전히 잊혀져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남한 학계에서 중요한 항일 전투라며 교과서에까지 실은 보천보사건도 실제로는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공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더라면 잊혀졌을 국경지방에 흔히 있던 일과성 사건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동북인민혁명군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침입을 보도한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平北(평북)에 反滿軍侵入(반만군침입) /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射擊(사격) / 警察隊(경찰대)와 交戰(교전), 守備隊出動(수비대출동) / 今曉(금효), 東興地方 大混亂(동흥지방 대혼란)[4]
좌표 : N 41.46817019713314, E 127.49586316929964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 개요 - 북한지역정보넷

사건의 경과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은 약 500여호에 주민 2500 여명이 살던 경찰서와 학교, 우체국 등이 있는 평북 최북단의 국경도시이다. 1935년 2월 13일 새벽 0시 30분 이홍광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의 전신) 대원 약 200여명을 이끌고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측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2시간여 후에 퇴각하였다. 동흥 경찰서는 47명의 경관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홍광 부대의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받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동흥을 습격한 부대는 남만(南滿)의 반석현(磐石縣)에서 중공당 남만특위 아래에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군장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1905~1940))의 제1사(師)로 이홍광이 사장(師長)이었다.

장세윤(張世胤)은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에서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6]

1937년 6월의 보천보 습격을 제2동흥사건이라고 보도한 1937년 6월 6일자 매일신보 기사.[7] 동흥은 소도시로 산골마을 보천보보다 경찰도 훨씬 더 많고 공격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지만 일본측 피해규모는 더 컸고, 따라서 파장도 더 컸다. 하지만 김일성 집권 후로 동흥 사건은 은폐되고 보천보 사건만 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항일공적으로 엄청나게 부풀려져 선전되고 있다.
이홍광은 2월 13일 새벽 1시경 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넜다. 동·서·남 세방면으로 분산된 1사(師)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동흥 시가로 진입했다. 이 때 대원들은 장총과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되었다. 이홍광은 47명의 경찰이 방어하고 있는 경찰서를 향해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부대로 하여금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두 방면의 대원들에게는 미리 지목한 대상에 따라 동흥 제일의 재산가이며 재목상(材木商)인 장영록(張永綠)의 집을 습격케 하고 기타 친일 주구배로 알려진 한인, 일본인 등을 습격케 했다.

약 세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 때 1사(師)는 만주국측의 전신전화 기관은 파괴했지만, 동흥읍에 있는 일제측 전신전화 기관을 파괴하지 못한 까닭에 적의 응원대가 올 것을 우려해서 조기에 철수했던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이홍광 부대는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으며, 친일 주구배 집 한채를 불살라 버렸고,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한 16호(戶)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일인(日人)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韓人) 10명을 납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때 이홍광 부대도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명을 냈고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 교전 와중에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도 있었다.

이홍광 부대의 동흥 습격전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며칠간 대서특필되었고, 중국동북에서 발간되는『대동보(大同報)』 등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일제 당국은 물론 대중에게도 이 전투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8][9][10], 매일신보[11][12][13][14], 경성일보[15][16][17][18], 조선중앙일보[19], 조선신문(朝鮮新聞)[20] 및 조선일보[21] 등이 며칠간 연속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특히 동아일보조선일보는 호외도 간행하였다[4][5].

당시 신문들은 이홍광이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을 싣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10][13][22][23] 이런 소문은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것이라 한다. 이 사건 보다 2년여 후인 1937년 6월 보천보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등 대다수 신문이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하였을 정도로 동흥 사건의 여파가 컸다[7][24][25]. 이홍광은 사건 3개월여 후인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26].

동흥 사건은 경찰관 5명이 상주하는 주재소 밖에 없는 국경의 면단위 마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규모도 더 컸고, 2년 먼저 일어났는데도 일반에는 보천보사건만 알려져 있을 뿐 거의 잊혀져 있다.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보천보 사건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이 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한 탓이다. 심지어는 남한 학계에서도 보천보사건이 독립군 최초의 국내진공 사건이라며 근거없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학계도 북한을 닮아가서 김일성 관련 여부가 사안의 중요성에 대한 판단기준이 되는 것같다. 북한에서는 이홍광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선전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보천보 사건을 가릴 우려 때문에 동흥(東興)이란 지명까지 없애버렸다. 당시의 지명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은 오늘날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金亨稷郡 古邑勞動者區)가 되어 있다.[27][28] 원래 후창읍(厚昌邑)이었던 김형직군 김형직읍(金亨稷邑)의 압록강 맞은 편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무면허 한의사를 하며 살았던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이다.[29]

당시 신문 기사

3월 15일 공산군이 동흥을 재습

東北人民○○軍의 幹部들이 總指導, 東北人民○○軍의 幹部들이 總指導 昨年의 沈滯는 凶作의 關係 今後도 樂觀은 不許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5년 03월 16일 조간 2면

해방 직후 김일성보천보 사건은 모르고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

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1946.01.20)에 실린 평양 거주 한일우(韓一宇)의 기고문 《개선(凱旋)한 우리 팔티산 명장(名將) 김일성장군회견기(金日成將軍會見記)》

북한 김일성은 해방 후 평양에 온 2~3개월 뒤인 1945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보천보 사건 아닌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한 것처럼 말했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아래 기사는 김일성과 회견한 후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이런 엉뚱한 말이 나온다. 필자 자신은 동흥사건 때부터 김일성의 이름을 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거짓말이다.

p.4 : 《凱旋한 우리 팔티산 名將 金日成將軍會見記》 / 平壤 韓一宇 (1945년 12월 작성한 기고문)
一九三x年 겨을 어떤날 새벽, 平北 綠綠江 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岸 滿洲로부터 反滿軍 一隊가 警察署를 襲擊하여 警察官 多數를 죽이고 武器多數를 빼앗아가지고 凱旋의 나팔을 불며 悠悠히 돌아갔다。 日本軍警은 이 反滿軍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돌아온 人質이 다음같은 事實을 말하였다----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큰 共産村落이 있어 男女老若이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 每日같이 工夫를 하고 軍隊訓鍊을 한다는 것、 人質에게 씩錢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 그밖에 軍人中에는 十八九歲의 美少女가 있어서 白馬를 타고 部下를 指揮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等。

그리고 頭目은 中國人이 아니라 實로 朝鮮人이요、 그 나이도 二十臺의 靑年 「金日成」이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이란 이름을 筆者가 알기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김일성은 당시 자신이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기 시작하자 자신이 항일투쟁한 김일성 장군이 맞다는 근거를 내놓기 위해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한 것으로 거짓말을 한 것같다. 이때까지도 그는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사건은 모르고 있었기에 동흥사건을 끌어와 이런 생뚱맞은 허위 주장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회견기사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북한 김일성이 해방 직후에 오늘날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보천보 사건은 정작 모르면서 동흥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실제로는 동흥사건이 보천보 사건보다 더 비중이 있는 사건이었다는 증거도 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집권 후 보천보 사건만 자신의 전공인양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그 사건만 유명해지고 다른 유사한 사건들은 잊혀졌다.

참고 자료

  • 미즈노 타쿠산로(水野宅三郞)[30], 『동흥사건 후의 월경 토벌(東興事件後の越境討伐)』
《國境警備》 : 平安北道警察部 編 (平北警鐘編輯部, 昭和11[1936]년 3월 20일) pp.8~24. - 국립중앙도서관 온라인 열람가능.

함께 보기

각주

  1.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26) 이홍광과 동흥사건」 중앙일보 1974.06.05 종합 3면
  3. 軍歴史関係事項調査の件報告 朝平憲秘庶第140号/昭和10年度 1939/11/09 일자로 평양헌병대장(平壌憲兵隊長) 祖父江義一이 작성한 보고서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0872700、歴史資料 昭和9~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4. 4.0 4.1 4.2 平北(평북)에 反滿軍侵入(반만군침입)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5. 5.0 5.1 본보 호외 발행(本報號外發行) 조선일보 1935.02.14 조간 1면 : 본사(本社)에서는 십삼일 후창군내(十三日 厚昌郡內)에 공군(共軍)이 출현(出現)한 사건(事件)에 관(關)하야 호외(號外)를 발행(發行)하엿습니다
  6.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62~363.
  7. 7.0 7.1 함남국경(咸南國境)에 제2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6월 06일 02면 01단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동아일보 1937-06-08 조간 2면 3단
  8.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인민혁명군) 侵入(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1935.02.14 동아일보 석간 2면 (13일 석간)
    死者七名(사자칠명) 負傷者八名(부상자팔명) 拉去者(납거자)는 十一名(십일명) 1935.02.14 동아일보 조간 2면
    喇叭(나팔)불며 越境(월경) 長白縣(장백현)으로 向(향)해 1935.02.14 동아일보 조간 2면
    警察門前(경찰문전)서市街戰(시가전) 機關銃(기관총)으로 頑强抵抗(완강저항) 1935.02.14 동아일보 석간 2면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
    點點(점점)의 血痕(혈흔)따라 討伐隊(토벌대) 越境追擊(월경추격) 人民革命軍事件(인민혁명군사건) 續報(속보) 1935.02.15 동아일보 2면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1935.02.16 동아일보 2면
    五百紅軍(오백홍군) 二隊(이대)로 갈려 東興厚昌(동흥후창) 再襲擊 劃策(재습격 획책) 1935.02.16 동아일보 2면
  9. 紅軍再襲計劃(홍군재습계획)에 軍警聯合(군경연합) 大討伐(대토벌) 1935.02.17 동아일보 2면
    拉去(납거)된 東興住民(동흥주민) 生還者 十名(생환자 십명) 1935.02.19 동아일보 2면
    東興襲擊紅軍(동흥습격홍군) 死者判明十名(사자판명십명) 集結總數(집결총수)는 約六百名(약육백명) 討伐開始(토벌개시)로 退却開始(퇴각개시) 1935.02.20 동아일보 2면
    追擊中(추격중)의 討伐隊(토벌대) 紅軍(홍군)과 三次交戰(삼차교전) 東興事件人質 三名(동흥사건인질 삼명)은 奪還(탈환) 1935.02.27 동아일보 2면
    東興事件人質(동흥사건인질) 一名(일명)은 歸還(귀환) 1935.03.07 동아일보 2면
    수수겨끼의 인민군사령(人民軍司令) 이홍광(李紅光)은 26세(廿六歲) 청년(靑年) ? 1935.07.18 동아일보 2면
    東興被襲時(동흥피습시)의 最後人質脫出(최후인질탈출) 1935.07.22 동아일보 2면
    東興襲擊犯(동흥습격범) 檢事(검사)가 控訴(공소) 1935.10.06 동아일보 2면
  10. 10.0 10.1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11. 今曉頭厚昌에 賊禍 東興邑襲來市街戰 放火, 掠奪警官隊應戰擊退 住民側死傷者不少 매일신보 1935-02-14 (13일 석간) 02면 01단
    東興邑襲來賊團은 人民革命軍一派 극히 조직적으로 사면포위 總司令은 李江光 매일신보 1935-02-14 조간 05면 02단
    國境警備有史以來 初有의 戰慄할 賊禍 喇叭吹奏하며 對岸에 退却 三千住民罔知所措 / 賊團을 越境追擊하야 徹底的 殲滅企圖 出發後消息姑未着 매일신보 1935-02-15 02면 01단
  12. 重輕傷者治療 爲해 醫療班員도 急行 상상 이상으로 피해가 심한 東興襲擊事件續報 매일신보 1935-02-15 05면 01단
    輕視치 못할 對岸賊勢 積極的防備에 注力 수효도 만코 활동도 광범위 험준한 산곡을 근거로함이 이은 곤난 長白, 臨江, 寬甸 各縣 매일신보 1935-02-17 02면 09단
  13. 13.0 13.1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14. 虎視耽耽의 對岸紅軍 東興襲擊再次企圖 매일신보 1935-02-26 02면 01단
    東興襲擊한 賊徒는 食糧 처 窮莫甚 무송현 대성창 방면으로 도주 茂山署員이 嚴戒中 매일신보 1935-02-27 05면 05단
    東興襲擊賊은 精銳한 分子 질서가 정연하야 실력 상당 平北 警務課長歸來談 매일신보 1935-03-03 02면 01단
  15. 約二百名の匪賊團平北東興を襲擊す, 直ちに警官隊奮戰し遂に擊退, 被害相當に上る見込み 경성일보 1935년 02월 14일 2면 1단
    越境して賊を包圍, 賊團の殲滅を期して追擊, 大部隊の越江は近來ないこと 경성일보 [京城日報] 1935년 02월 14일 7면 1단
  16. 賊團の血を辿る, 馬ソリ等を强奪死傷者を運ぶ匪賊を越境討伐隊の追擊更に急 경성일보 [京城日報] 1935년 02월 15일 2면 1단
  17. 東興を襲った『紅軍』の正體, 驚くべき組織內容をもつ執拗な反日滿團體 경성일보 [京城日報] 1935년 02월 17일 4면 6단
    隣接地の官民ら續續慰問來る, 北海道,內地から安否を尋ねて, 東興にて直島特派員 경성일보(京城日報) 1935년 02월 17일 7면 1단
  18. 東興襲擊匪賊の根據地に向ふ, 兩部隊が討伐を開始, 東興にて直島特派員 경성일보(京城日報) 1935년 02월 18일 2면 5단
  19. 東興市襲擊部隊는 人民革命軍으로 判明, 七十餘 警官隊 目下 猛追擊 總司令은 李江光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14일 2면 5단
    共産軍·大集結 新房子八道溝襲擊劃策中 : 卽死·重輕傷·拉去等 被害者二十三名 死者八, 重輕傷五, 拉去十名 東興襲擊事件後報 朝鮮中央日報 1935년 02월 16일 2면 3단
    동흥읍을 습격한 공산군의 군세 판명, 수령 이홍광은 6백 부하 솔선, 과반 전투에 死者 10명/ 공산군의 신호를 발견하고 추격 중 행동개시한 水野 부대의 동정, 각 부대 오지로 진격/ 각 署에서 다시 응원부대 파견, 토벌대의 제2진으로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20일 석간 2면 1단
  20. 紅匪三百東興に襲來猛烈なる市街戰展開, 交戰二時間半之を擊退す死傷者各方面にある見込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14일 2면 1단
    强盜を働きながら死傷者收容,退却, 奧地新房子に向ったこと判明, 東興襲擊匪(後報)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15일 2면 1단
    民間負傷者五名卽死者は五名, 東興襲擊匪事件の跡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15일 7면 5단
    賊團の損害莫大, 歸還者の口から判る, 負傷者輸送中に續續死亡, 東興事件その後の彼ら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20일 2면 5단
    平安北道, 警戒に遺憾なし, 東興事件の眞相につき安田高等課長語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02월 23일 4면 1단
  21. 厚昌郡(후창군)에 二百共軍(이백공군) 民家(민가)에 放火掠奪(방화약탈) 1935.02.14 조선일보 2면
    東興襲擊(동흥습격)한 共軍追擊 大部隊討伐軍 出動(공군추격 대부대토벌군 출동) 1935.02.15 조선일보 2면
    掠奪被害(약탈피해)가 六十餘人 多數(육십여인 다수) 1935.02.15 조선일보 2면
    東興襲擊共產軍(동흥습격공산군) 六百餘名再結陣(육백여명재결진) 1935.02.16 조선일보2 면
    東興事件 頭目(동흥사건 두목) 李紅光 負傷(이홍광 부상) 1935.02.20 조선일보 2면
    警察討伐隊(경찰토벌대) 杜芝(두지)에 歸還(귀환) 1935.02.22 조선일보 조간 2면
    東興襲擊共軍(동흥습격공군) 僻地(벽지)로 全部隱跡(전부은적) 1935.02.22 조선일보 석간 2면
  22. "동흥사건 餘聞(여문) : 共軍頭目 李紅光(공군두목 이홍광)은 十八歲 男裝美人(십팔세 남장미인) 조선 소녀로 부하가 6백여명. 습격 당시도 진두에서 직접 지휘" 조선일보 1935.02.23 / 석간2 : 2 면
  23. 平安北道, 東興を襲擊した東北人民革命軍第一司令官李紅光とは全く妙齡の女性, 丹下部長歸任談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5년 02월 27일 4면 1단
  24. 김일성 일당 중(金日成 一黨 中)에는 여당원(女黨員)도 십여명(十餘名). 보천보 습격사건 후보 : 조선일보 1937.06.08 석간2 2 면
    금후 일층 긴장(今後一層緊張) 적극적 대책강구(積極的對策講究) 대천부대(大川部隊)는 비장(悲壯)한 바 잇섯다 조선일보 1937.06.13 석간 2면
  25. 東興事件同樣に殘虐ならん /思ひ出の一 昨年の襲擊 경성일보 1937년 06월 06일 / 共産匪二百名越境し郵便所,學校等を襲ふ, 雜貨商を銃殺の上放火, 惠山鎭上流普天堡を全滅 경성일보(京城日報) 1937년 06월 06일
  26.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65~366.
  27.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金亨稷郡 古邑勞動者區) : 북한지역정보넷
  28.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흥면 고읍동이 동흥읍이다.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 북한지역정보넷
    양강도 김형직군 옛이름 동흥면 조선향토대백과 행정구역정보관 : 양강도
  29.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구글맵
  30. 당시 의주 서장(義州 署長)임 : 미즈노 타쿠산로(水野宅三郞) -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