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 량치차오 지음 | 최형욱 (엮음)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08월 15일 출간[1]

개요

이 책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쓴 조선의 멸망 원인에 대한 여러 글을 모아서 번역한 책이다.[2] 그의 주장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나, 당시 조선왕과 신하, 식자층, 일반 국민들의 문제점들을 상당히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이 망한 것은 일본이 강해서라기보다 스스로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고, 이것이 사실에 가깝다.

오늘날 반일 히스테리가 만연하는 것도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부끄러운 모습은 감추고 망국의 원인을 일본에게만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아니었으면 러시아에 잡아먹혔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해도 부패하고 무능해서 망국의 단계에까지 이르게한 조선왕과 대신들이 스스로 개혁에 나섰을 리도 만무하고, 조선말과 같은 상황이 끝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지도층들의 무능과 오만에 따른 안이한 정세판단이 초래한 난국도 조선말 당시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원저자인 량치차오는 조선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려 망했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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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대규모 토목공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의 전횡, 일본당과 중국당으로 나뉘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서로 죽고 죽인 싸움 등이 조선을 어떻게 멸망으로 이끌었는지 쓰라리게 지적한다.

저자는 당시 지도층이었던 궁정과 양반들의 무능과 탐욕을 현미경 처럼 보여준다. 양반들을 대해서는 "개인만 알고 국가의식이 전혀 없었다"며 “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고 질타한다.

대표적 예로 일본 정부가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순종 황제 즉위 기념일을 맞아 축하연을 연 뒤에 발표하기를 요청해 한일병합조약 공포가 며칠 미뤄진 일을 들었다. 그는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 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저자는 궁정과 양반 등 지도층의 이러한 성향이 결국 친일파를 만들어 내 망국의 직접적인 주역이 됐다고 주장한다. 량치차오는 친일파들이 조선을 실질적으로 장악해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가 한일강제병합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송병준과 이완용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아부한 점, 일본이 이들 친일파에게 대대손손 유복하게 먹고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점 등을 여실히 적었다.

지도층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 사람에 대해 남에게 기대기 좋아하는 천성을 갖고 있고 당장 배부르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심지어 조선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지만 금방 식어버린다고 조롱했다.

조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어가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들은 독립운동가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에 대해서는 긍정을 넘어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무릇 조선 사람 1000만명 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의 사람은 본래 1억명 중에서 한둘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한다.

량치차오는 순종이 합병조약 공포를 며칠 늦추고 자신의 즉위 기념일 축하연을 열었다고 했다. 순종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날은 1907년 7월 19일이나[3], 공식적으로 즉위식을 거행한 날은 같은 해 8월 27일이다.[4] 합병조약 조인은 1910년 8월 22일이고[5], 공포는 8월 29일이므로[6] 즉위 기념일 축하연을 위해 공포를 며칠 늦추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보인다. 황제라는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도 즉위 기념일 축하연회는 꼭 해야하겠다는 정신상태였으니 조선이 망국에 이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량치차오가 찬양한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월북하여 북한 부수상을 지낸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부친이다. 홍범식의 부친 홍승목(洪承穆, 1847~1925)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이다. 홍명희는 1950년 1월에 딸을 김일성과 결혼시켰지만 일찍 죽었는데[7], 김일성의 한 때 장인이었던 덕에 숙청을 모면하고, 김일성 독재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 죽었다.

조약의 공포가 1주일 늦어진 이유

일본외교문서 43권1책 582, 583 한일병합조약 관련 문서. 조약은 8월 26일 공포하는 것으로 예정되었으나, 조선 측의 요청으로 27일 황제의 즉위 기념일을 지난 후인 29일 공포하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량치차오(梁啓超, 1873 ~ 1929)가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지만 곧바로 공포하지 않고 1주일 늦추어진 이유는 8월 27일 순종의 황제 즉위 4주년 기념일 연회를 베풀고 난 후 공포하도록 조선측이 일본에 요청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외교문서에서도 확인된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지 않았고, 조선 국왕과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은 매국의 댓가로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과 지위를 받았다.


참고 자료

양계초 – ‘조선 멸망의 원인'(中) 사)헌법이론실무학회 2016년 3월 1일
양계초 - '조선 멸망의 원인'(下) 사)헌법이론실무학회 2016년 3월 1일
조선 멸망의 원인 -4 : 양계초 (1910년 9월 14일) 사)헌법이론실무학회 2015년 12월 11일
“일본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만이 문제이겠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도 어쩌겠는가?”(양계초, <조선의 망국을 논함> 중에서)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