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에서, 롤백은 주로 정권 교체를 통해 그 나라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려는 전략을 말한다. 반면, 봉쇄 정책은 그 나라의 팽창을 막는 정책을 말하고, 데탕트는 그 나라와의 긴장을 완화하는 정책을 말한다.

롤백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대부분 냉전 시대에 미국의 대소련 정책으로서의 롤백 정책을 다룬다. 1950년의 한국 전쟁과 1961년의 쿠바 사태 때도 롤백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1953년 동독의 반정부 폭동과 1956년의 헝거리 혁명 때도 롤백 전략의 사용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소련과의 전면전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지 않기로 하였다.

1943년 이탈리아, 1945년 독일, 1945년 일본, 200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제거, 2003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제거가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정부에 대한 '롤백'의 예이다. 롤백이 정권을 교체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때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정권 교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의 전략적 언어로서의 롤백이라는 말은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서와 같이 적을 완전히 전멸시키고 그 나라를 정복하는 정책을 의미했다.

냉전

1940년대 후반에도 소련에 대항해 군사적 롤백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 같은 전략가들이 있었다. 1950년의 한국 전쟁에서는 트루만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이 전략을 취했다. 1953~1956년에도 동유럽 지역에서 롤백 전략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미국은 군사적인 롤백 전략보다는 주로 공산주의 정권의 합법성을 부정하는 심리전을 펼치면서, 반군을 지원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러한 시도는 1945년에 발틱 3국과 우크라이나의 독립군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940년대 후반에는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그리스 내전에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다. 또, 1949년, 영국과 미국은 알바니아 공산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특수 요원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전쟁 없이 비군사적 방법을 통해 어떻게 동구권에서 소련을 몰아낼 것인지 논의하기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롤백 전략이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예는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철수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에는 구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친소 정부가 무너진다.

한국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U.N.은 공식적으로 롤백 전략을 승인하였고, UN군은 이에 근거하여 38선을 넘어 북한군의 괴멸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전략으로 결국 중국의 한국전에 개입하게 되고, 그들에게 밀린 UN군은 다시 38선까지 밀려내려온다. 이에 미국은 다시 봉쇄 전략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국전을 전후해서 봉쇄 전략에서 롤백 전략으로, 롤백 전략에서 다시 봉쇄 전략으로 두 번이나 전략을 바꾸었다.

1954년에 미 국방성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아시아 지역에서의 소련의 전진을 막기 위해 롤백 전략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 대통령(1953~1961년에 재임)이 취임한 후, 롤백 정책의 대표적인 옹호론자였던 덜러스(John Foster Dulles)를 국무 장관에 임명하는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심리전을 본격화하여 Radio Free Europe을 통해 동유럽의 공산주의를 집중 공격했다. 1953년 11월에는 NSC 문서 162/2를 통해 봉쇄 정책을 채택했다.

아이젠하워는 CIA를 통해 적대 국가의 정부를 교란하는가 하면, 친미 정부에게는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아이젠하워의 성공적인 롤백의 예로는 1953년에 영국과 함께 이란 군사 쿠데타를 도와 모사데크(Mosaddegh) 수상을 몰아내고 팔레비(Pahlavi) 왕을 복귀시킨 사건을 들 수 있다.

레이건

1984년, 니콜라스 레먼이라는 언론인이 캐스퍼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 국방장관을 인터뷰한 뒤에,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 전략을 요약하였다:

그 사회는 경제적으로 허약하고, 정보화 사회로 가기에는 부와 교육 그리고 기술이 부족하다. 모든 자원을 군비에 쏟아붓다 보니, 그 결과, 사회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과 같은 방식의 군비 생산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그들을 파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안전한 세상이 올 것이고, 그 속에 단 하나의 초강대국만이 남을 것이다. 단, 우리가 지금의 지출을 유지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2016년에 레먼은 "'1984년에는 레이건주의자들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뒤에 '이 꿈이 고스란히 현실히 되었다'"고 말했다.

레이건 집권기인 1980년대에는 "롤백" 전략이 다시 힘을 얻었다. 레이건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 반군,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과 앙골라, 캄보디아 등의 반공 무장 단체에게 무기를 지원했고, 1983년에는 내분에 휩싸인 그라나다를 공격하여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민주 정부를 세웠다. 레이건의 이와 같은 제3 세계에 대한 개입은 레이건 독트린이라 알려져 있다.

레이건 독트린이 제3 세계의 갈등을 불필요하게 증폭시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의 붕괴에 의해 그 긍정적인 의미가 증명되었다. 여기에 더해 소위 Start Wars라고 불리는 미국의 '전략 방어 계획'도 소련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주었다.

조지 H. W. 부시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몇 달에 걸친 서방 국가들의 외교 노력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무력으로 이라크 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 이 기회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부시(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냉전 이후

조지 W. 부시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al-Qaida)의 소행에 의해 뉴욕 World Trade Center의 건물 중 두 개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의 국방성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 테러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였고, 6,0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이에, 부시 행정부는 나토군과 함께 알카에다를 제거하기 위해 이 테러 집단을 지원하고 있던 탈레반 정권의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부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탈레반은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만약 테러리스트들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할 것입니다.

2003년에는 부시 대통령이 이란, 북한과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불렀던 이라크에 공격하여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