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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이다. 이 사람의 재임 기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이 사람 또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사형당했다.

가족관계

아내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그 외에는 이전 프랑스 왕들과는 달리 첩을 두지 않았다. 아마도 아내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리 앙투아네트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영아사망률이 높던 시절이라 아들하나와 딸 하나는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아들 루이 샤를 또한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당의 조치에 의해 평민 가정에 강제 입양되었는데, 심한 학대를 받아 10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이 성년까지 성장하였다.

성격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어린시절

1754년 8월 23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왕세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위

아버지인 루이 왕세자가 일찍 사망했던 까닭에, 루이 15세가 사망한 1774년 5월 10일 만18세(한국식 나이로 20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혁명

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1789년 5월 삼부회를 소집하였으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였고, 이어 모든 권력을 잃었다.

죽음

프랑스 혁명으로 기존에 자신의 권한과 지위를 잃어버린 루이 16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하였다. 1791년 6월 21일 왕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 등 가족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도달하기 전에 프랑스의 국경지방인 바렌에서 시민군에 발각되어 파리로 압송되었다.

국민공회는 이 루이 16세내외의 국외 탈출 미수사건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 의원의 대다수는 그래도 지금까지 모시던 왕인데다 루이 16세는 특별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폭정을 휘두르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형으로 처리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때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국민공회 의사당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만약 루이 16세가 용서되거나, 만약 무죄라면 혁명은 어찌 되는 겁니까?

만약 루이 16세가 무죄라면 모든 자유의 수호자들은 중상모략꾼들이 되고 맙니다.

국가가 살기 위해선 왕(루이 16세)이 죽어야 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로 분위기가 급 반전되었지만 개표를 해보니 표결 결과는 막상막하였다. 사형반대표와 사형찬성표가 엇비슷한 가운데 결국 사형찬성표가 근소하게 많아 루이 16세의 사형이 가결되었다.

루이16세의 처형, 1794년 작

그리하여 루이 16세는 추운 겨울 파리 한복판의 콩도르셰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793년 1월 21일의 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6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샤를은 평민 가정에 강제 입양시켰는데, 각종 학대를 받은 루이 샤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