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
Milton friedman.jpg
기본 정보
국적
성별
남성
출생
1912년 7월 31일
출생지
사망
2006년 11월 16일
생존기간
1912년 ~ 2006년 (94세)
직업
경제학자
소속
후버연구소 (1977–2006)

컬럼비아 대학교 (1964–1965)
시카고 대학교 (1946–1977)
케임브리지 대학교 (1954–1955)
컬럼비아 대학교 (1937–1941; 1943–1945)

전미경제연구소 (1937–1940)
학력
라웨이 고등학교 졸업

럿거스 대학교 학사
시카고 대학교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상훈
미국 과학 훈장 (1988)

대통령 자유 훈장 (1988)
노벨 경제학상 (1976)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 (1951)

소개

밀턴 프리드먼은 소비 분석, 화폐의 역사와 분석,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관한 연구 성과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경제학자이다.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 등과 함께 1940년대 이후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 로스쿨, 경영전문대학원에서 진행된 방법론 운동인 시카고 가격 이론의 2세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프리드먼이 채용했거나 지도한 학생들과 젊은 교수들 중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된 사람들로는 게리 베커(Gary Becker), 로버트 포겔(Robert Fogel), 토머스 소웰(Thomas Sowell), 로버트 루카스 주니어(Robert Lucas Jr)등이 있다.

"순진한 케인즈주의" 이론에 대한 프리드먼의 도전은 1950년대에 소비 기능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는, '케인즈주의적인 정부 정책에는 반대하는' '주요한 케인즈주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케인즈주의 언어와 도구를 이용하지만 그것의 최초의 결론은 거부한다"고 자신의 접근법을 설명했다. 그는 "자연적인" 실업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론화하였고, 실업률이 이 비율보다 낮은 경우에는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필립스 곡선'이 자연적인 비율에서는 결국 수직의 기울기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예측했다. 프리드먼은 "통화주의(monetarism)"라는 대안적 거시경제 관점을 지지하면서, 통화 공급의 지속적인 소규모 확대가 좋은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통화 정책, 조세, 민영화, 규제 철폐에 관한 그의 사상은 특히 1980년대에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화폐 이론은 2007~2008년 세계적인 금융 위기에 대한 연방준비제도의 대응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리드만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보수당마가렛 대처 수상에게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최소화된 개입 환경 속에서의 자유시장 경제 제도의 장점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징병제를 폐지하는 데 역할을 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2년에 출판된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프리드먼은 모병제, 변동환율제, 의료 면허증 폐지, 마이너스 소득세, 학교 바우처 등의 정책을 지지했다. 또, 학교 선택의 자유에 대한 지지는 '교육 선택을 위한 프리드먼 재단'(Friedman Foundation for Educational Choice; 나중에 EdChoice로 개명)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의 저작 및 활동에는 monograph(단행본 형태의 단일 주제의 논문), 책, scholarly articles(저널에 실리는 논문), papers(일반 논문), 잡지 칼럼, TV 프로그램, 강연 등이 포함되고, 그 주제도 경제적 주제와 공공 정책 이슈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그의 책과 논문은 이전의 공산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프리드먼은 두 번째로 인기있는 20세기 경제학자로 뽑혔으며(첫 번째는 케인즈이다), 《The Economist》 지는 그를 "20세기 후반... 어쩌면 20세기 전 기간 동안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경제학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생애

어린시절과 가족관계

프리드먼은 1912년 7월 31일 뉴욕 주(New York State)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부모(Sára Ethel와 Jenő Saul Friedman)은 헝거리 왕국 Carpathian Ruthenia의 Beregszász(지금은 우크라이나의 Berehove)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였다. 그들은 둘 다 dry goods(섬유, 의류, 위생용품, 화장품 등) 상인이었다. 그가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뉴저지주의 Rahway로 이주했다. 10대 초반에는 윗 입술이 찢어지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재능이 많았던 프리드먼은 1928년 16세가 되기 직전에 Rahway High School을 졸업하였다.

학부 및 대학원

그는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에 상당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프리드먼은 1932년에 럿거스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곳에서 수학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처음에는 보험계리사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영향을 준 Arthur F. Burns 교수와 Homer Jones 교수는 경제학 연구를 통해 대공황 종식에 기여해보자고 설득하였다.

럿거스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리드먼은 두 곳으로부터 장학금을 제안받는다. 하나는 브라운대학교의 수학과였고, 다른 하나는 시카고대학교경제학과였다. 시카고대학교를 선택한 프리드먼은 1933년에 석사 학위를 획득한다. 시카고대학교에서는 제이콥 바이너(Jacob Viner),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헨리 사이몬스(Henry Simons)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리드먼이 그의 아내가 될 경제학자 로즈 디렉터(Rose Director)를 만난 곳도 바로 시카고대학교였다. 1933~1934년 한 학년 동안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저명한 통계학자이자 경제학자인 Harold Hotelling과 통계학을 연구했다. 1934~1935년 한 학년 동안은, 시카고대학교로 돌아와서 당시 '수요의 이론과 측정'(Theory and Measurement of Demand)을 집필하고 있던 헨리 슐츠(Henry Schultz)의 연구 조교 역할을 했다. 그 해에 평생 가까이 지내게 될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와 앨런 월리스(W. Allen Wallis)와의 관계도 시작된다.

공직

프리드먼은 처음에는 대학교 내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35년에 친구인 앨런 월리스를 따라 워싱턴 D.C.로 간다. 이곳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덕분에 많은 경제학자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때 프리드먼은 그와 그의 아내가 WPA, CCC, PWA와 같은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을 이 위급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판단했지만, "국가 회복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과 농업 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의 가격 동결 및 임금 동결 정책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격 통제가 자원이 적재적소에 이용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신호 메커니즘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앞으로 그가 갖게 될 사상을 암시했다. 실제로, 프리드먼은 나중에 화폐 공급이 축소되는 대신 확대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며, 뉴딜 정책과 관련된 정부의 모든 간섭이 "잘못된 질병에 대한 잘못된 치료법"이었다고 결론맺었다. 나중에 프리드먼는 동료 학자인 안나 슈워츠(Anna Schwartz)와 함께 '미국의 화폐 역사, 1886~1960년'(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를 집필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대공황이 은행의 위기와 연방준비제도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심각한 화폐 축소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리드먼은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지만, 경제학과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인해 다시 정부 공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41~1943년에는 미 재무부 고위 관료의 자문위원으로서 연방 정부의 전시 세금 정책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1942년에는 재무부 대변인으로서, 케인즈주의 조세 정책을 옹호했다.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이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원천징수 제도를 만드는 것을 도왔다. 프리드먼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필요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도 원천징수 제도를 폐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학자로서의 경력

초기

1940년, 프리드먼은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의 자리를 받아들였지만, 2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다른 교직원들과의 이견으로 그 대학을 떠났다. 프리드먼은 미국이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3년에는 앨런 월리스와 해럴드 호텔링이 이끌던 컬럼비아대학교 전쟁연구소에 합류하여,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수학 통계학자로서 무기 설계, 군사 전술, 금속 실험의 문제에 집중했다.

1945년에는 컬럼비아대학교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Incomes from Independent Professional Practice'(쿠즈네츠(Kuznets)와 공저)를 제출하여 그 이듬해에 박사 학위를 받는다. 1945~1946년 한 학년 동안은 친구인 스티글러가 근무하던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시카고대학교

1946년, 프리드먼은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 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자리는 그를 가르쳤던 제이콥 바이너 교수가 프린스턴 대학교로 떠나면서 생긴 자리였다. 프리드먼은 이후 30년 동안 시카고대학교에 머물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수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지적 공동체인 시카고 경제 학파가 형성되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국립 경제 연구소(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소장이었던 아서 F. 번스는 그에게 연구소에 재합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경기 변동에 있어서 화폐의 역할을 연구하는 책임을 맡는다. 이에 따라, 그는 "화폐와 은행에 관한 워크숍"("시카고 워크숍")을 시작하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연구소의 경제 역사학자인 안나 슈와츠와 협력하여, 1963년에 그녀와 함께 '미국의 화폐 역사, 1867~1960'을 발표했다.

1954~1955년 학년 동안은 방문 교수로 캠브리지의 곤빌 앤드 케이어스 칼리지(Gonville and Caius College)에 있었다.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교경제학과는 다수파인 케인즈주의자(조안 로빈슨(Joan Robinson), 리차드 칸(Richard Kahn)) 그룹과 소수파인 반케이즈주의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프리드먼은 양쪽 파벌 모두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 케임브리지에 초대된 이유라고 생각했다. 1966~1984년에 뉴스위크지(Newsweek)에 실린 주간 칼럼이 널리 읽히면서 정치계와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영향력이 커져갔다. 1968~1978년에는,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과 함께 격주로 나오는 경제학 카세트 시리즈(Economics Cassette Series)의 제작에 참여했다. 이 시리즈물은 한 경제학자가 한번에 30분 동안 그때의 이슈에 대해 논의하는 형식이었다.

1964년에는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공화당 대선 후보의 경제 보좌관을 했다.

자본주의와 자유

'자본주의와 자유'는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학계 외부의 관심을 불어일으켰다. 이 책은 1962년에 시카고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으며, 공공 정책 문제를 비수학적인 경제 모델을 이용하여 탐구하는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판 후 18년 동안 40만 권이 넘게 판매되었고, 지금까지 총판매량은 50만 권이 넘는다. 이 책은 1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리드먼은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자유 시장이 궁극적으로 국가와 개인에게 도움이 되며,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과 기타 주요 국가들이 직면한 효율성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부의 역할과 화폐의 공급부터 사회 복지 프로그램까지 구체적인 이슈를 각각 별도의 장으로 분류하여 다루었고, 스페셜 챕터에서는 직업 면허 제도를 다루었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 더 정확하게는 libertarian) 입장을 밝히며 '자본주의와 자유'를 마무리한다: 정부는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고, 국민과 국가의 생존을 위핸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만 개입할 수 있다. 그는 최선의 국가 능력이 자유 시장으로부터 나오는 과정과, 실패가 정부의 개입으로부터 나오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은퇴

1977년 65세의 나이에, 프리드먼은 30년 동안 근무한 시카고대학에서 은퇴하였다. 프리드먼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의 방문 학자가 되었다. 1977년 이후에는 스탠포드대학교의 후버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같은 해에, Free To Choose Network(선택할 자유를 위한 네트워크)로부터 그의 경제 사회 철학을 설명하는 TV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는다.

3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1980년에는 Free to Choose(선택할 자유)라는 10부작 시리즈가 PBS에서 방영되었다. 이와 함께 발표된 아내와 함께 쓴 같은 제목(Free To Choose)의 책은 1980년도에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후 14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80년 대선 기간 동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비공식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그후 레이건 행정부의 통치 기간 동안 대통령 경제 정책 자문 위원회에서 활약했다. 에벤스타인(Ebenstein)은 프리드먼이 레이건 행정부의 '정신적 지주'라고 말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경제학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프리드먼은 신문 사설 집필과 TV에 출연을 계속하였다. 동유럽과 중국을 몇 차례 방문하여 그 나라의 정부에게 조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필라델리아 협회(Philadelphia Society)의 이사를 지냈다.

노년

Commentary 매거진의 2007년 기사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는 온건한 유대교인 부모 밑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설명했다. 1998년에는 아내와 함께 'Two Lucky People'(두 명의 행운아)이라는 회고록을 썼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인생과 경험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죽음

프리드먼은 2006년 11월 16일 9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여전히 독창적인 경제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현역 경제학자였다. 그의 마지막 칼럼은 별세 다음날에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아내는 2009년 8월 18일에 별세하였다.

학문적 업적

프리드먼은 생산의 명목 가치로서의 화폐 공급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 화폐주의(monetarism)는 현대 화폐수량설과 연관된 견해의 집합체이다. 이 사상의 기원은 16세기 살라망카 학파 또는 그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이 사상이 현대에 다시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프리드먼의 공이 컸다. 그는 안나 슈와츠와 함께 쓴 '미국의 화폐 역사, 1867~1960'(1963년)에서 미국 역사에서의 화폐 공급의 역할과 경제 활동을 탐구하였다. 이 연구의 파격적인 결론은 화폐 공급의 변동이 경제적 변동을 초래하는 방식에 집중하였다. 1960년대에 데이비드 마이셀먼(David Meiselman)과 함께 진행한 몇 가지 회귀 분석 연구(regression studies)에서, 프리드먼은 소비와 생산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투자와 정부 지출보다 화폐 공급이 더 우선적인 요소임을 밝힌다. 이것은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증명 과정이 거의 없었던 그 요소들 간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견해에 대한 도전이었다. 프리드먼의 경험론적인 연구와 이론은 화폐 공급의 변화가 단기적으로는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장기적으로는 가격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지지했다.

프리드먼은 통화주의 학파의 주요한 옹호자였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화폐의 공급 사이에 밀접하고 지속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본원 통화의 증가율을 적절히 규제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린다"는 유명한 비유를 들었는데, 이는 다양한 화폐 공급 메커니즘과 그밖의 요소로 인해 자신의 모델이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주장은 특정 시점의 전반적인 물가 수준의 증가가 석유 가격의 증가나 급여의 증가에서 온다는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라는 널리 유포되어 있는 개념에 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다.
- 밀턴 프리드먼, 1963.

프리드먼은 수요 관리의 도구로써 재정 정책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서 정부의 역할은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대공황에 대해 아주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1929~1933년을 '대수축'(Great Contractio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평범한 금융 쇼크에 의해 촉발된 대공황이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한 것은 연방준비제도 이사들의 잘못된 정책에 의한 화폐 공급의 수축에 주된 원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꽤 심각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불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을 대재앙으로 만든 데에는 연방준비은행의 책임이 컸다. 침체를 상쇄하기 위해 권한을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1929~1933년에 화폐량의 1/3을 감소시켰다 ... 대공황은 자유 기업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정부의 실패였다.
-밀턴 프리드먼, Two Lucky People

이 이론은 '미국의 화폐 역사'에서 제시되었고, 이 책의 '대공황'을 다룬 챕터는 'The Great Contraction, 1929-1933'(대수축, 1929-1933)이라는 별도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두 책 모두 아직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인쇄되고 있으며, 몇 가지 판에는 시카고대학교의 프리드먼 기념 행사에 참석한 버냉키(전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의 연설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연방준비위원회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저의 지위에 약간 손상이 갈만한 말을 하면서 이 연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밀턴과 안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공황과 관련해서는, 당신들이 옳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덕분에, 우리는 그런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프리드먼은 정부의 환율 시장 개입의 중단을 주장하면서, 자유 변동 환율 제도를 지지하는 한편 이 주제에 관해서 많은 글을 썼다. 그와 가까웠던 조지 스티글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계에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역시 시카고대학교에 근무하던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가 새로운 접근법인 '합리적 기대 이론'을 개발함에 따라, 연구가 다양한 라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프리드먼과 루카스, 즉 신 고전주의 거시경제학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이 루카스에게 흥미로운 출발점이 되었지만, 그는 이 해결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루카스는 프리드먼의 적응적 기대(adaptive expectations) 대신에 합리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s)를 가정한 새로운 접근법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재설정 과정을 통해 신 고전적 필립스 곡선 이론이 적용됨으로써 그 내용이 급격히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리드먼의 접근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 이론도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1960~1963년에는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새고전학파(New classicals) 닐 월리스(Neil Wallace)가 프리드먼의 이론적 과정을 무질서하다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프리드만의 통화주의와 새고전학파 거시경제학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리드먼은 '영구적 수입 가설'(permanent income hypothesis, 1957)이라는 소비 기능에 관한 연구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리드먼 자신은 이것을 자신의 최고 성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성적 소비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영구적인 수입에 비례해서 지출을 실행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뜻밖의 소득이 발생하는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저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금이 인하되는 경우에도, 이성적 소비자들은 나중에 공공 재정의 균형을 위해 세금이 다시 오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밖의 주요한 업적으로는 필립스 곡선에 대한 비평과 '자연적인 실업율'(1968년)의 개념이 포함된다. 이 이론에 있어서는 그와 함께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Phelps)가 주로 거론되는데, 그들은 정부가 더 큰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방법으로는 영원히 실업을 감소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플레이션이 갑자기 일어날 때는 일시적으로 실업율이 낮아질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노동 시장의 마찰과 불완전성이 실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플러스 경제학의 방법론'(The Methodology of Positive Economics; 1953년)이라는 논문은 그의 후속 연구는 물론 어느 정도는 시카고 학파의 후속 연구에도 인식론적 틀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그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유용한 경제 이론은 설명의 사실성이 아니라 예측을 위한 엔진으로서의 간결성과 성과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학자들은 '이론의 가정이 얼마나 튼튼한지'가 아니라 예측의 정확성을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계학

그의 통계학 분야에 있어서의 가장 큰 공로 중 하나는 연속 표본추출(sequential sampling)이다. 프리드먼은 컬럼비아 전쟁연구소에서 통계학적 작업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기술을 고안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신 필그래이브 경제학 사전'에는, 이것이 "품질 검사 표준 분석법"(the standard analysis of quality control inspection)이라고 되어 있다.

공공 정책에 대한 입장

연방준비제도와 화폐 정책

비록 그는 정부가 화폐 제도에 있어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결론지었지만, 무능력한 연방준비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폐주의적'이라고 여겨졌던 소위 '볼커 쇼크'(Volcker shock) 동안에도 연방준비제도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연방준비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화폐 공급의 변화에 따라 채권을 자동으로 사고 팔 시스템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그는 해마다 미리 결정된 양만큼 꾸준하게 화폐 공급을 증가시킬 것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소위 프리드만 k퍼센트 규칙(Friedman k-percent rule)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화폐 공급의 목표를 설정하는 제도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1978~1982년에 연방준비제도가 목표 화폐 공급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이 제도가 인플레이션과 금리의 목표를 설정하는 구식 제도의 실행 가능한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상에 있어서는, 프리드만은 1930년대의 시카고 플랜(Chicago plan)의 원칙을 선호했다. 이것은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를 없앰으로써 이를 통한 민간의 화폐 생성기능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들은 100%의 준비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화폐를 생성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화폐를 목표량만큼 확대하는 것이 더 가능해지고,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에 의해 발생하는 내생화폐(endogenous money)가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환율

프리드먼은 브레튼우즈 전 기간 동안 변동환율제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유연한 환율제도를 통해 외부 조정이 가능해지고, 국가들이 국제 수지의 위기를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정 환율을 정부 개입의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953년의 '유연한 환율을 위한 논거'(The Case of Flexible Exchange Rates)라는 유명 논문을 통해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변동환율제의 가능성을 환상이라고 여기던 때였다.

학교 선택

'교육에서의 정부의 역할'(The Role of Government of Education)이라는 1955년 논문에서, 프리드먼은 바우처 제도를 통해 공공의 지원을 받는 사립 학교로 공립 학교를 보완할 것을 제안했다. 이 논문에서 제안한 것과 비슷한 개혁인 1981년에는 칠레에서, 1992년에는 스웨덴에서 실시되었다. 1996년, 프리드먼은 아내와 함께 학교 선택과 바우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교육 선택을 위한 프리드먼 재단'(the Friedman Foundation for Educational Choice)을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2016년에 프리드먼의 생전의 뜻에 따라 EdChoice로 개명하였다.

징병

지원병 제도의 경제학적 기초를 확립한 사람은 월터 오이(Walter Oi)였다. 프리드먼은 이 제도의 지지자로서 징병 제도가 "자유 사회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먼은 징병이 평등하지도 않고 자의적이며, 젊은이들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닉슨 행정부 집권기에 유급/지원병 제도로의 전환을 연구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는 나중에 미국 징병 제도를 없애는 데 기여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에 대비해 예비군 훈련은 강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외교 정책

전기 작가인 래니 에벤슈타인(Lanny Ebenstein)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리드먼의 생각이 개입주의에서 더 조심스러운 외교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기록하였다. 그는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했다. 또, 처음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한 강경 노선을 지지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소 누그러졌다. 1995년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반개입주의자라고 말하였고, 걸프전이라크전쟁에도 반대했다. 2006년 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의 위상이 손상되었지만, 이라크가 평화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된다면 그것이 개선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유주의(Libertarianism)와 공화당

1962년, 프리드먼은 케네디의 뒤를 이은 린든 존슨(Lyndon Johnson)에 대항하여 출마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지지자였다. 1981년부터는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철학적으로 자유주의자이지만, 편의주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공공재와 독점

프리드먼은 민간 기업이 제공할 수 없는 공공재를 국가가 제공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 중 많은 것들은 민간 부문이 더 잘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서, 만약 어떤 공공재를 국가가 제공하는 경우, 그것을 국가가 독점해서 민간 부문의 경쟁을 금지하는 것은 안 된다고 믿었다:

우체국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다. 우편 수송이 기술적으로 독점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분야이거나, 정부의 독점이 적어도 악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근거에서 정부가 운영하는 우체국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우편 수송을 금지하는 현행 법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만약 우편 배달이 기술적인 독점이라면, 다른 누구도 정부와의 경쟁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부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밀턴 프리드먼, '자본주의와 자유'

사회 보장, 복지 프로그램, 마이너스 소득세

1962년,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복지에 대한 의존성을 만들어낸다는 이유로 사회 보장 제도(Social Security)를 비판했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자본주의가 가난의 정도를 엄청나게 감소시켰지만, "가난이란 상대적인 문제이고, 부유한 서양 국가에 있어서도 빈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빈곤을 줄이는 데 있어서 민간 자선단체도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부를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이 쌓이기 때문에 민간의 자선만으로는 충분히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 소위 이웃 효과(neighborhood effect) 때문이다. 나는 빈곤함을 보고 고통을 느낀다. 따라서 나는 빈곤함이 줄어드는 것에 의해 혜택을 본다. 그러나 빈곤함을 줄이기 위해 내가 돈을 내든 다른 사람이 돈을 내든 나는 똑같은 혜택을 입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자선의 혜택도 부분적으로 나에게 쌓인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빈곤의 구제를 위해 기부한다면, 우리도 기꺼히 기부할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같은 금액을 기부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은 공통체에서는, 공공의 압력이 민간의 자선에 있어서까지 그런 조건을 실현시기기에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점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큰 규모의 익명적 공동체에서는 공공의 압력으로 그렇게 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어떤 사람이 빈곤을 줄이는 정부의 조치를 정당화하는 이런 종류의 추론을 나처럼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보자; 말하자면,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 수준 아래 한 개의 층을 깔아두는 것이다. 얼마의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지만, 순수하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도출된 해결 방안이 마이너스 소득세이다. ... 이러한 해결 방안의 장점은 명료하다. 이것은 빈곤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대응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현금이라는 가장 유용한 형태의 도움을 제공한다. 이것은 보편적이며, 지금 시행되고 있는 특별한 조치들을 대체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의해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도 명확하다. 이것은 시장 밖에서 작동한다. 빈곤을 줄이는 다른 조치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도움받는 사람들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를 감소시키지만, 고정된 최소 금액까지 수입을 보충하는 제도처럼 그 동기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는다. 추가로 버는 돈은 항상 지출할 수 있는 돈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프리드먼은 마이너스 소득세의 장점으로 그것이 조세제도에 직접 들어맞을 수 있다는 점, 비용이 덜 든다는 점, 사회 안전망을 실행하는 데 소요되는 행정적인 부담을 줄여 준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18년 뒤에 '선택할 자유'에서 이 주장을 다시 반복하는데, 이번에는 현재의 복지 시스템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때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 것이라는 새로운 조건을 달았다. 경제학자인 로버트 H. 프랭크(Robert H. Frank)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프리드먼의 이런 견해가 "시장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는 하지만, 모든 시민이 기본적인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입의 분배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말했다.

마약 정책

프리드먼은 마약과 매춘의 합법화와 같은 자유주의(libertarian) 정책도 지지했다. 2005년에는, 프리드만과 500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이 마리화나의 합법화의 경제적 장점에 관한 논의를 옹호하기도 했다.

동성애자의 권리

프리드먼은 동성연애자의 권리를 지지했다: "나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경제적 자유

프레이저 연구소(Fraser Institute)의 마이클 워커(Michael Walker)와 프리드먼이 1986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된 일련의 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의 목적은 경제적 자유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세우고 그것을 측정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결과, 전세계의 경제적 자유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인 Economic Freedom in the World가 나왔다. 그때부터 나온 연례 보고서는 수많은 상호 심사 연구(peer-reviewed studies)를 위한 자료를 제공해 왔으며, 몇몇 나라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른 16명의 저명한 경제학자와 함께, 저작권 연장법(Copyright Term Extension Act)에 반대하여, Eldred v. Ashcroft 사건에서 법정 의견서(amicus brief)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는 산업과 상업의 성장과 번영을 촉진시키고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사회 전반의 법치를 지키기 위해, 경제적 권리와 자유에 대한 더 강력한 헌법적 보호를 주장했다.

명예, 공적, 영향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역사학자인 조지 H. 내쉬(George H. Nash)는 "1960년대 말까지 프리드먼은 미국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주의 학자였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몇 명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었다"고 말하였다. 프리드먼은 카토연구소(Cato Institute)가 2001년부터 시작한 Milton Friedman Prize for Advancing Liberty 상에 자신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허용했다. 프리드먼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3년, 월스트리트저널의 스테펀 무어(Stephen Moor)는 "애덤 스미스 이래 가장 존경받는 자유시장 경제의 투사(프리드먼)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을 인용하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노벨 경제학상

프리드먼은 소비 분석, 화폐의 역사와 이론 분야에서의 업적과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대한 증명으로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홍콩

프리드먼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홍콩으로 가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90년에는 홍콩의 경제가 자유시장 경제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별세하기 한 달 전에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홍콩이 잘못하고 있다 - Cowperthwaite(1961~1971년의 홍콩 재무장관)가 뭐라 하겠나?"(Hong Kong Wrong - What would Cowperthwaite say?)라는 글에서 "비개입주의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홍콩의 행정장관이었던 도날드 창(Donald Tsang)을 비판하기도 했다.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 살바도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지 2년이 지난 1975년에, 칠레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프리드먼과 아놀드 하버거(Arnold Harberger)는 칠레를 방문해서 경제적 자유의 원칙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칠레의 한 민간 재단의 초청을 수락했다. 그는 칠레에 7일 동안 머물며 칠레가톨릭대학교(Universidad Católica de Chile)와 국립 칠레대학교에서 여러 차례의 강연을 진행했다. 그 강연 중 하나였던 "자유의 연약함(The Fragility of Freedom)"이라는 강연은 중앙집권 군사정부에 의한 자유의 위협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1975년에는 Sergio de Castro라는 시카고 대학교 출신 칠레인이 칠레의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의 6년의 재임 기간 동안 외국 자본의 투자가 증가하였고, 파업과 노동조합을 제한했으며, GDP는 해마다 올라갔다. 칠레가톨릭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 사이에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다수의 다른 시카고대학 출신 인사들도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또는 그 이후에 정부 직위에 임명되었다. 또, 칠레의 대학교에서 시카고 학파의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시카고 아이들(Chicago Boys)이라고 불렸다.

프리드먼은 칠레가 자유시장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칠레의 상황이 더 좋아졌을 뿐 아니라, 피노체트의 지배의 개선과 궁극적으로 1990년의 민주 정부로의 전환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근거에서 자신의 활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자본주의와 자유'에도 나와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경제적 자유는 그 자체로도 바람직하지만 또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필요 조건도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1980의 다큐멘터리 '선택할 자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칠레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체제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칠레 사람들은 공산정권하에서보다 더 자유롭다. ... 과거 몇 년 동안 사람들의 생활 여건이 개선되어 왔다. ... 칠레에서는 경제적인 자유와 그것에 의해 결과한 경제적인 성공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인 자유에 대한 열망이 궁극적으로 국민투표로 연결되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오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칠레는 3가지를 모두 갖게 되었다: 정치적 자유, 인간의 자유, 경제적 자유. 이제 칠레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지킬 수 있을지, 아니면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자유를 파괴하거나 축소시킬지 지켜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실험대가 될 것이다."

아이슬란드

프리드먼은 1984년 가을에 아이슬란드를 방문하여,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현상유지의 폭거"라는 주제로 아이슬란드대학교에서 강연했다. 1984년 8월 31일에는 사회주의자들과의 TV 생방송 토론에 참여하였다. 이 토론에는 나중에 아이슬란드 대통령이 된 Ólafur Ragnar Grímsson도 참여하였다.

에스토니아

프리드먼이 에스토니아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 그의 '선택할 자유'라는 책은 당시 32세의 마르트 라르(Mart Laar) 총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라르 총리의 개혁 정책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연방에 속한 가난한 공화국"에서 "발틱해의 호랑이"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라르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는 일률과세(flat tax; 개인이나 기업이 벌어들인 금액과 관계 없이 일정한 세율을 적용하는 과세 방법)였다. 라르 총리는 카토연구소에서 수여하는 2006년 밀턴 프리드먼상을 받았다.

영국

1950년 이후 프리드먼은 강연을 위해 자주 영국으로 초대되었다. 1970년에는 이미 그의 사상이 영국의 보수 진영에서 광범위하게 주목받고 있었다. 보수주의 싱크탱크인 경제문제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IEA)의 정규 연사였다는 것을 보면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도 IEA의 프로그램과 사상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고, 1978년에는 그곳에서 프리드먼을 만나기도 했다. 대처 수상의 대표적인 경제 보좌관(Keith Joseph, Alan Walters, Patrick Minford)들도 프리드먼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The Daily Telegraph, The Times, The Financial Times 등 영국의 대표적인 언론들 역시 프리드먼의 화폐주의 사상을 영국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

미국

프리드먼이 별세하자, 그를 기리는 수많은 부고와 기사들이 보도되었다. 그들은 그를 전후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컸던,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비판

새케인즈학파로 분류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프리드먼이 사망한 후 그를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치켜세웠지만, 그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프리드먼의 대표적인 비판자이다. 크루그먼은 "그는 너무 쉽게 '시장은 항상 옳고, 단지 시장만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이 시장이 잘못되거나 정부의 개입이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을 인정한 경우를 거의 찾기 힘들다."고 역설해왔다.

정치학자인 C.B. 맥퍼슨(C.B. Macpherson)은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로 연결된다는 프리드먼의 역사적 평가에 반대했다. 그는 프리드먼의 입장과 반대로 정치적 자유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엘리트 집단의 경제적 자유를 위한 길을 열어준다고 생각했다.

작가이자 사회 활동가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자신의 '충격 독트린'(The Shock Doctrine)이라는 책에서 프리드먼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그녀는 프리드먼의 사상을 칠레아르헨티나와 같은 국가의 군사 쿠데타 뒤에 일어나는 경제 재건 과정을 이끌어갈 원칙 정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클라인과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신자유주의 정책이 소득의 불균형과 불평등에 끼친 영향의 정도를 평가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역할은 다국적기업의 자본 축적의 과정을 이념적으로 숨겨주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칠레 방문

피노체트 정부와의 관련성 때문에, 1976년의 노벨상 수상 때 여러 나라에서 항의가 있었다.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자들의 피노체트와의 관계'와 '논란이 있었던 1975년 3월의 7일 간의 방문' 때문에, 칠레의 군사 독재를 지지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프리드먼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은 피노체트의 경제 자문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사실 관계를 바로잡았다. 또, 시카고 대학교 학자들이 참여한 칠레의 경제 개혁으로 높은 경제 성장과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

대표 저서

  • 소비 함수론 (1957)
  • 화폐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 (Fordham University Press, 1960)
  • 자본주의와 자유, 1962, highly influential series of essays that established Friedman's position on major issues of public policy
  • 미국의 화폐 역사, 1867-1960, with Anna J. Schwartz, 1963
  • "화폐 정책의 역할"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58, No. 1 (Mar. 1968), pp. 1–17
  • "인플레이션과 실업: 노벨 강연", 1977,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85, pp. 451–72
  • 선택할 자유: A Personal Statement, with Rose Friedman, (1980)
  • 프리드먼의 핵심 사상, essays edited by Kurt R. Leube, (1987)
  • 두 명의 행운아: 회고록 (로즈 프리드먼과 공저; 1998년)
  •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에 관하여: 밀턴 프리드먼 논문 모음, edited by Gary S. Becker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