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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여인
최근 수정 : 2019년 6월 25일 (화) 21:24

베를린의 여인

베를린의 여인 표지

A Woman in Berlin (독일어 German: Anonyma - Eine Frau in Berlin)는 1945년 독일 제3제국의 패망시기에 소련군 점령 직전부터 약 8주간 동안(1945년 4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한 여인의 생존의 몸부림으로 다른 주변부 여인들의 삶을 기록한 수기이다.

1954년 영어로, 1959년 스위스에서 독일어로 초판 출판 당시 독일에서는 독일 여성들의 명예를 모독한 책이라 하여 비판 받았다. 당시 익명으로 출판 된 책으로 작가 마르타 힐러스(Marta Hillers)는 그 반응에 놀라 생전에 다시 출판되는 것을 거부했다.

2001년 마르타 힐러스의 사망이후 2003년 재출간 되었다. 출간후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건조하고 간결한 어조와 자기 연민의 결여", "작가는 너무 성찰적이고, 너무 솔직하고, 너무 세속적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살아 있으니, 모든 것이 지나갈 것이다."고 하딩은 썼다고 한다.

2008년 감독 막스 파르베르복, 배우 니나 호스, 예브게니 시니킨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한국에는 ' 함락된 도시의 여자 : 1945년 봄의 기록'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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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전쟁으로 베를린시 인구는 270만여명으로 줄어 들었다. (200여만명의 여자와 70여만명의 남자로).

나레이터의 수기는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으로 시작된다. 끊임 없는 포성 속에 그녀는 빈약한 배급 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녀의 모든 생각은 음식과 그녀를 갉아먹는 배고픔에 관한 것이다. 모든 베를린 사람들은 지하 공습 대피소와 아파트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거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식량 재고품을 뒤지는 데 시간을 보낸다. 지하 대피소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화자는 동료 "동굴(대피소) 거주자"와 일종의 동지애를 가지게 된다.

소련군이 그들의 거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소련인들은 캠프를 바깥에 두고 첫 날을 전리품을 비교하는등의 소일거리로 보낸다. 결국 병사들은 건물과 지하 공습 대피소로 들어가 술을 마시고 강간할 여성을 골랐다. 그녀는 일종의 통역사와 중재자로서 병사들에게 여자를 강간하지 말라고 설득하고, 강간을 중단하라고 간청할 사령관을 찾는다. 많은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순결을 지키기 위해 어린 딸들을 숨겼다. 네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그 미망인의 아파트로 돌진했고, 결국 한명은 화자(나레이터,수기 주인공)를 강간한다. 또 다른 소련 병사는 아파트에 들어가 그녀의 입을 열어 침을 뱉고 침대에 반쯤 열어 놓은 담배를 지불 수단으로 던지는 모욕적인 방법으로 강간한다.

이 강간 경험은 그녀에게 일종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는데, 화자는 구토와 눈물 후 결정한다. 매일 다른 병사 남자들로부터 잔인하고 무차별적으로 강간당하지 않도록 고위급 장교를 찾기 위해 바깥으로 향한다. 거리에서 그녀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중위 아나톨을 만난다. 그녀는 잠시 그와 키스를 하고 그들은 저녁 7시에 그녀의 집에서 만나기로 동의했다. 다음날 아나톨은 화자와 섹스를 하게 되고, 병사들에게는 그녀가 아나톨에 의해 선점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그녀에 대한 강간은 하지 않는다는 "금기"가 형성된다. 아나톨과 그의 부하들은 마음대로 오고 가며, 미망인의 아파트는 아나톨의 음식을 가지고 오는 식당으로 여겨 진다. 화자는 안드레이와 같은 교육을 받은 소련 군인들을 만나 정치, 파시즘 등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안드레이와 만나게 되면서 소령과의 섹스가 불가피함을 알게 되고 그것이 강간이 아님으로 인식한다.

결국, 베를린은 완전히 항복하고 소련 군인들은 거리를 떠난다. 그후 돌아온 전쟁전 그녀의 남자는 이 수기의 화자인 그녀가 8주간 소련군에게 강간 당하고 또 음식을 얻으며, 좀더 강간을 안 당하고 좀더 음식을 구하기 위해 소련 장교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성관계를 하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녀를 떠나는 것으로 이 수기는 끝맺는다.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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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터는 <베를린의 여인>을 통해 강간이 그녀의 삶에 미치는 중요성과 영향을 탐구한다. 모든 강간 사건에서 그녀는 고통과 무감각과 분노를 분명히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는 살아 있고 강간이라는 단어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강간당한 후 그녀는 그것이 전형적인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렇게 많은 남자들에 의해 강간당한 후 자신의 피부에 깨끗하지 못함과 혐오감을 드러낸다. 내레이터는 또한 그녀가 Anatol 그리고 그 다음에 소령과 합의된 성적 관계를 숙고한다. 그녀는 "소령이 나를 강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자신을 그에게 자신의 뜻으로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확실히 자신이 사랑을 위해 섹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공허함에 불평한다. 그녀는 주요 공급물인 베이컨, 버터, 설탕, 양초, 통조림 고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자신이 창녀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매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가 없지만 평화로운 상황에서는 절대 이런 상황에 있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합의된 성 관계는 매춘과 비슷하지만, 전쟁 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 용인된다.


마르타 힐러

마르타 힐러는 1959년 베를린의 아이네 프라우(2003년 6월 16일 바젤, 2001년 6월 16일)의 언론인이자 저자다. 이 일기는 베를린 전투 1945년 4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독일 여성의 일기이다. 이 책은 점령군에 의한 집단 성폭행이라는 맥락에서 저자의 성폭행, 그리고 그녀와 다른 많은 독일 여성들이 소련 장교를 보호자로 선택한 방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녀의 책의 새로운 판은 2003년 독일에서 사후에 다시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비평가들의 폭넓은 찬사를 받았고 몇주 동안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녀는 1911년 5월 26일 독일의 Krefeld에서 태어났다. 지역 학교에 다닌 후에 그녀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나중에 소련을 포함한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불어와 러시아어를 조금 했다. 베를린에서 잡지와 신문 기자로 일했다. 그녀는 또한 나치 정권을 위해 몇가지 작은 일을 했지만 당원이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1945년 소련이 점령했을 때 그녀는 베를린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그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하는 일기를 썼다. 그녀는 자신과 모든 연령대의 여성들이 계속해서 붉은 군대 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은 소련 병사들을 보호자로 삼았다. 베를린에서 알려진 바로는 약 10만명의 여성들이 그 점령 기간 동안 강간당했다.(당시 베를린 인구 270만, 여성 70만 어린이와 노약자 제외)

전쟁 후 친구의 격려를 받아 1954년, 미국에서 그녀의 회고록을 익명으로 영어로 출판했다. 1950년대에 결혼하여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하고 언론인을 포기하였다. 1959년, 그녀는 그녀의 회고록을 스위스 독일어로 다시 익명으로 출판했다. 독일에서 받은 부정적 평가와 그녀가 독일 여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난으로, 그녀는 생전에 어떠한 새로운 판이 출간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2001년 6월 16일 Basle에서 죽었다.


우리 한국인의 역사상에서 있었던 비극의 사건들

일제시대 생존했던 것이 친일파인가?

일제시대 말기 태평양전쟁으로 또 일제의 패전으로 치닫는 기간에 이름을 빌려줘 대동아 공영권을 선전하는 데 쓰여졌다고 친일파라고 불리고 낙인 찍고 역사에 기록하고 평가하는 것이 정의인가?

김구는 국내에 생존한 모든 이들을 친일파라고 평가했었다. 일제시대 조선에 양심과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는가? 자기 생명은 물론이고 가족이 있는 이들에게? 과연 조선시대 소중화의 존왕앵이, 위정척사파들의 '난신적자는 공자의 춘추필법으로 기록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닌지 묻고싶다.[1]

최근 사례

  • 인촌 김성수는 2018년 건국 훈장의 서훈이 취소되었다.[2][3][4][5]
  • 서정주, 최남선등의 시비를 땅에 파묻는 문인들.

춘천에서 서정주, 최남선등의 문인을 기리는 시비가 공원에 있었는데, 친일파라 단죄하여 그 시비를 땅에 묻었다.

평가

인촌 김성수 그가 친일파라면 그의 유산인 동아일보와 고려대는 민족 정기를 살리기 위해 폐간, 폐교함이 옳지 않은가? 유산상속에서 자산과 부채를 분리해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인가?

서정주의 자화상이란 시는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해서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 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끝난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서정주는 경성에 유학하며 조선의 유학이 아닌 당시로서는 신학문을 배웠었다. 1945년 해방후 장교 모집에 양반이 조건으로 내걸렸을 정도로, 일제시대 또한 조선의 기풍이 살아 있는 신분제 질서의 사회속에서, 배운 것은 신학문인데 양반이 대접 받는 사회속에, 같은 신학문을 배운 주인집 아들인 인촌 김성수의 활동을 보면서, 젊은 서정주는 자화상으로 심정을 토해낸 것이 아니엇던가.

하늘에서 인촌 김성수에게, 둘다 같이 친일파로 낙인 찍히는 모습을 보면서, 서정주는 '주인집 아들이 친일파니 종놈도 친일파가 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하며 웃으시진 않을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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