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北宋
(960년 - 1127년)

개요

북송은 중국의 한 왕조이다. 조광윤(趙匡胤)이 후주로부터 선양(禪讓)[1]을 받고 건국했다. 국호는 송이지만 금나라에게 북송의 수도인 카이펑을 점거당하고 남쪽(임안 항저우)으로 천도한 남송과 구분하기 위해 천도 이전을 북송이라 불린다.


당나라 이후 오호십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왕조였다. 경제적으로는 수도 개봉이 다른 왕조들이 성안에 각각 구역을 정해서 통금을 가졌던 것에 비해 통금을 해제하고 불야성이라고 할 정도로 번영했지만, 반대로 군사력은 약해서 허구헌날 요나라, 금나라에게 털리는 신세였다. 금나라에게 수도 개봉 등 하북을 뺏기고 양자강이남으로 후퇴 해서 중국을 양분하다가 몽골이 금나라를 멸할 때 같이 협조를 하고 나중에는 몽골에서 남송까지 멸망 당한다.

군사력이 약했던 것은, 직전시대 당나라가 절도사로 인해 완전히 거의 전국시대 처럼 나라를 쪼개진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물론 당나라도 절도사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당나라도 이민족에 대한 위협이 커지자 어쩔 수 없지 절도사에게 군권 뿐만 아니라 행정력까지 주게 된 것이다. 교통 등이 발전이 안된 전근대 시대에 딜레마인데, 국경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국경 근처를 책임지는 군인에게 행정권 등을 주면서 권한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그렇게 하면 국경방어를 위해 군대는 강해 질지 모르나, 이 지방관들이 군벌화 될 위험성이 있다. 지금도 장교를 주기적으로 순환근무 시키는 것은 군벌화를 막기 위해서다.

송나라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수도의 친위부대인 금군을 수십만명으로 두고 몰빵식으로 하고, 국경 지방에는 권한을 거의 주지 않았다. 송태조 부터 토사구팽 하지 않고 술 자리에서 울면서 구슬려 공신들의 군권을 가져왔다.

근데 이로 인해 지방에 군벌들이 난립하는 것은 막았지만, 송나라 군이 이민족한테 허구헌 날 털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요나라에게 털렸는데, 송의 신하 중 한명은 거의 내재적 접근으로 송이 요나라를 여러가지로 화나게 해서 그렇다는 주장의 상소문을 올렸다. 지금의 좌파들이 북한이 도발하는 건 한국책임으로 한국이 바뀌면 북한이 바뀌고 도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거랑 굉장히 비슷하다. 게다가 세폐 돈을 주고 평화를 사려고 했다. 이것도 지금 좌파들이랑 똑같다. 상비군을 국경에 유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돈을 주고 물러가게 하는 게 싸게 먹히다는 논리도 있었다. 근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식으로 평화가 계속 되지 못하고 결국 송은 요나라에게 털리고 금나라에게 수도와 하북을 뺏겼고 결국 몽골에게 망했다.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베이징 인근 연운 16주를 탈환하는 게 염원이었는데 일부는 잠시동안 탈환 하기도 했만, 결국 모두 탈환하지 못했다. 이건 한족왕조 기준으로 명나라 대에 가서야 탈환을 한다.

그러니까 동시대에 송나라와 고려는 북경을 접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고려가 요나라와 삼각관계에서 조공외교로 송에게 많이 뜯어내자 북송의 문장가 소동파는 고려를 원숭이 같은 놈들이라고 비하한 적도 있다.

고려는 대부분 요나라나 금나라 그리고 원나라의 연호를 썼지 송나라의 연호는 초반 잠깐 정도 이외에는 쓰지 않았다.

수호지와 포청천은 이 북송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 혈연관계가 아닌 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