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본 남조선 력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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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현대사 연구소 지음, 백년동안 출판사, 2019년 2월 20일 출간

책 소개

북한의 시각에서 본 남한의 역사를 소설적 창작 기법으로 정리한 전대미문의 역사책.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해냈다는데 어째서 귀하의 운명은 우리 공화국의 손바닥에 놓이게 됐는가? “보수패당의 역적 박근혜는 우리 공화국에게 있어서는 골치 중의 골칫거리였다. 남조선의 공화국 역량들이 아무리 패대기를 쳐도 남조선 인민들은 괴뢰도당 새누리당의 박근혜를 선택했다. 박근혜는 미친 개 박정희의 딸이라 당초 우리 공화국을 향해 전쟁을 도발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팽배했다.

KBS의 중상모략을 동원하여 반주체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귀신 들린 문창극도 도려냈지만 박근혜는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2015년 8월 4일 목함지뢰를 통해 간을 떠봤는데 공화국을 향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자세로 나왔다.”

남조선 현대사 연구소

남한의 역사를 입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역사, 정치철학, 문화, 사법 등 다양한 분야의 인력들이 참여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을 갈 경우 북한에 억류될 확률이 100퍼센트라는 공통점 말고는 보수주의에서 극단적 자유주의까지 이념의 스펙트럼이 조금씩 전부 다르며, 이것이 같아지는 순간 전체주의로 간다고 믿어 연구소 해체를 명문화해놓고 있다. 연구소 위치는 비밀이다.

책 속으로

-대구폭동… 그 전개 과정과 시사점

1946년 9월, 남로당이 지휘한 철도 파업으로 대구 일원에 식량사정이 나빠졌다. 이에 앞서 남로당 대구시당은 4월 26일 ‘남로당 노동자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파업을 지휘하면서 6개월 가까이 각종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민심을 선동해오고 있었다. 10월 1일에는 장난삼아 “시청에서 쌀 배급을 준다더라”라는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 이로 인해 부녀자 1,000여 명이 대구시청 앞으로 그릇을 들고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 “배급이 일절 없다”는 사실을 퍼뜨리자 화가 난 부녀자들이 대구 시청에 난입, 난동극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에는 대구시 태평로 일대에 운수·금속·화학 노조원으로 구성된 5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관공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밤이 오자 허헌, 김원봉 등이 이끌던 지휘부는 시위대를 더욱 공격적으로 지휘했다. 그러자 무장경찰도 150명으로 증강 배치됐는데 밤 11시쯤 드디어 지휘부가 그토록 바라던 사건이 터졌다. 경찰의 위협사격이 촉발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파업 운동원 한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져버린 것이다. 이 순간을 기다리던 황태성 동지가 연단에 올라와 군중들을 흩어지지 않게 열정적인 선동을 해가기 시작했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라는 적기가가 노래로 불러지자 군중은 광분한 전사로 변해갔다. 다음날 새벽, 대구 남로당 본부에는 평양에 주둔 중이던 MGB 정치장교들의 지령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MGB 정치장교들은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가공할 힘을 발휘하게 하는 데는 시체만 한 것이 없다는 점을 동유럽에서 이미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고 그 방법을 상세히 전수해 주었다. 10월 2일 아침이 밝아오자 황태성이 이끌던 조직원들이 경북대 의대에 있던 해부용 시체를 살해당한 노동자의 주검이라며 메고 장례행진을 시작했다. 장례 행렬이 태평로를 거쳐 대구경찰서까지 가는 동안 군중은 1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후 1시쯤에 경찰서 무기고를 급습하면서 동지들은 무기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일제 때 독립운동조차 이렇게는 하지 못했던 남조선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려는 무장투쟁이 최초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이 10월 2일 오후 6시를 기해 대구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폭동 사태는 수습된다. 우리는 대구폭동에서 남로당의 조직적인 시위와 북한의 지령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반 시민만으로는 이런 폭동이 일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67쪽)

-북한은 이승만을 어떻게 보았나 1945년 해방정국 당시 북쪽 당국은 이승만에 대해 전투 경험과 조직·선동 분야에 경험이 없으며, 유교 가부장적 인물로 보았다. 반면에 미국 유학을 바탕으로 한 외교에 능숙하다고 평가 했다.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리승만과 정면 대결을 피할 것. 그는 교활한 여우로 보아야 할 것임. ▶강점: 영어를 매우 잘하고 미국에서 고학력자로 활동해 와 미국 정치인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의 외교적 역량이 강함. 남조선 인민들에게 이름이 예상외로 많이 알려져 있음. ▶약점: 국제정치에 경험이 많은 데 비해 국내정치에는 주목할 만한 업적이나 경험 및 탄탄한 조직이 전혀 없음. 김일성 동지처럼 유격전이나 군사적 경험이 전무함. 정치공작을 위한 조직과 운용법도 체득한 바 없음. 태생이 왕족이어서 충효 같은 봉건적 계급사상이 몸에 배어 있을 것임.(49쪽)

북쪽의 소련 점령군은 남한을 남로당을 이용하여 북한의 공산정권 영향아래 두고자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승만을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되자 집중적인 견제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구 폭동 등 북쪽의 끈질긴 방해 공작 속에서 미국 정계와 유엔 외교를 통해 5·10 총선거를 치르고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정부 수립을 이루어낸다.

“리승만은 우리 김일성 동지처럼 역사조작을 통해 신격화하는 고난도의 심리전 작업도 하지 않았는데도, 소련군 MGB 같은 정보·정치공작대의 지원을 받은 바 없는데도 남조선 인민의 신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참 희한했다. 결국 리승만의 의도대로 이때부터 불과 여덟 달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99쪽)

북한 정권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남조선 적화의 호기로 삼았다. 그동안 남한 공작으로 권력 붕괴를 이뤄냈다고 평가를 했지만, 혁명이 국가 붕괴로 이어지지 않아 그들은 이를 ‘미완의 혁명’이라 명명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통일혁명 세력을 짓밟은 박정희의 5·16 북한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남한보다 우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 시기에 남한은 북한을 앞섰다. 많은 반대에도 추진한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세계시장경제에 편입하면서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성공을 거둔 덕분이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무렵 남조선은 1인당 GNP가 70~80달러 수준으로 유엔 가맹국 125개국 가운데 105위였다. 당시 우리 공화국은 GNP가 약 300달러 수준의 50위권으로 말하자면 중진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조선의 피폐상은 그 수치가 말해주는 것 이상이었다.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지 8년이었다. 원래도 변변찮았던 남조선의 산업현장은 전쟁의 여파로 다 무너진 상태였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후유증을 극복하고 혁명무력을 재건하여 다시 남조선을 겨누고 있었지만 남조선은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줄 돈이 없었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없었고 농촌에는 보릿고개의 굶주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는 박정희 패당의 재건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어설픈 놀음도 결국 모조리 실패로 돌아갈 것으로 판단했다.(184쪽)

북한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경제성장이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남전략에 차질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4·19 이후 남조선의 정정(政情)혼란을 틈타 통일혁명세력의 활동 공간이 만들어졌다. 온 사회가 데모 천국으로 변한 가운데 학생들의 관심은 민주가 아니라 통일로 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으로서는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5·16 군사혁명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혁명공약 1호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는다”였다.

박정희의 5·16을 단죄할 수는 없다. 5·16의 진짜 문제는 그 수구 정권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4·19 이후 마침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기 시작한 남조선 인민의 통일열망과 움직임을 짓밟았다는 데 있다.(196쪽)

-서독의 ‘방어적 민주주의’와 유신체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고 서독에는 소위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서독은 바이마르 체제 실패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적극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우선 ‘연방헌법재판소’를 만들었다. 서독 기본법(제21조 제2항)은 ‘정당의 자유를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하면서도 “그 목적이나 추종자가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침해 또는 폐지하려 하거나 독일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려하는 정당은 위헌”이라고 규정하고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하면 정당은 ‘해산’되며 ‘대체정당’의 설립은 허용될 수 없다. 서독은 이 기본법에 의거하여 1952년 나치의 부활을 꿈꾸는 ‘사회주의제국당’을 그리고 1956년에는 ‘서독공산당’을 해산시켰다. 한편 서독은 ‘민주주의를 방어’할 목적으로 ‘헌법보호청’이라는 이름의 정보기관을 운영했다. 이 정보기관의 임무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반하는 단체나 개인의 활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남조선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한 아니 그보다 더 강력했던 예전의 ‘안기부’에 가까운 기능의 ‘헌법보호청’은 “개인, 단체, 정당의 위헌행위를 적발하여 연방 및 주 정부의 내무부장관들과 ‘연방헌법재판소’에 조치를 의뢰”할 뿐만 아니라 “독일 내의 모든 공직자와 공공기관 종사자 임용 때 신원조사를 실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헌법보호청’은 업무의 중점을 ‘조기경보’에 두고 있어서 “정치적 극단주의(좌우를 막론하고)에 대해서는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가 발생하기 전에 이에 대한 사찰(査察) 실시가 허용”되었다. 서독은 “형법을 위반하거나 헌법질서와 국제적 합의에 반하는 결사를 금지”한 ‘기본법’의 결사금지 조항(제9조 제2항)에 기초하여 제정된 ‘결사법’에 의거, 연방과 주 정부의 내무부 장관들에게 ‘단체 해산 명령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1964년 ‘결사법’이 공표 시행된 이후 서독에서는 1993년까지 모두 971개의 단체가 ‘반국가 위헌 단체’ 혐의로 해산되었다.

유신시대를 ‘야만적 폭압의 시대’라 하지만 서독의 방어적 민주주의 체제가 유신체제보다 민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독의 방어적 민주주의 체제와 달리 남조선의 유신체제가 정치적으로 야만과 폭압의 인상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전선동이 주효한 덕분이었다. 거기에는 우리 공화국의 집요한 공작도 있었으며 남조선 변혁세력의 끈질긴 투쟁이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251쪽) 닫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