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100%
인물 사진을 등록하세요.
국적미국 국기.jpg 미국
성별남성
출생1943년 9월 5일 (80세)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직업역사학자
학력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배우자우정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09.05 ~ )는 미국의 동아시아 역사학자로 한국의 현대사와 외교관계 전공이다. 시카고 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소련측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 주로 미군정 문서와 일부 한국 기록등을 참고하여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한반도 분단6.25 남침 전쟁의 책임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측에 돌렸다. 그러나 공산권 붕괴 후 공개된 소련 문서에 의해 그의 연구는 완전한 엉터리로 판명되었지만, 그는 과거 주장의 오류를 일부 시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 주장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있다. 이런 엉터리 주장이 한국학계에 큰 영향을 주어 학계를 좌파들이 장악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가 수시로 북한에는 친일파가 없는 반면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를 많이 등용한 것이 6.25나 남북 갈등의 원인이 된 것처럼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 뒤늦게 한국에 친일파 마녀사냥이 되살아난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개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 606 pp.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 957 pp.

이 책은 대체로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부가 김일성이 남침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다. 좌파들을 탄압하고 친일 전력자들을 대거 기용한 것도 남침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소련군정이 북한의 우파들을 어떻게 말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조사도 하지 않았고, 언급도 없다. 북한에도 다수의 친일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1] 결국 한국의 내부문제가 김일성이 남침하도록 만든 원인이라는 것으로, 공개된 소련 문서에 의해 전적으로 틀린 주장으로 판명되었다.

남북한의 내부 문제에 대한 판단도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주장들이다. 소련군정과 김일성은 조만식 등 북한의 민족세력과 기독교 세력, 반공세력을 죽이거나 연금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등 철저히 말살했다. 반면에 미군정은 많은 좌파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다만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만 여러 범법 행위를 한 관계로 불법화시켰고, 박헌영은 북한으로 도피했다. 나머지 여운형이나, 허헌, 김원봉, 백남운, 홍명희 등등의 많은 좌파들은 남한서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나 김구등 강력한 반공주의자를 제외하고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 정부를 추진했다. 그러다 여운형이 1947년 7월 암살 당했는데 김일성, 박헌영, 김구 등이 배후로 거론되고 있다.

좌우합작이 무산되고,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자 미군정은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서 UN 감시하의 총선을 통해 국회를 구성한 후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채택한다. 이에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 등이 1948년 봄 남북협상을 한다며 방북할 때 대다수 좌파들도 동행해서 북한으로 가 돌아오지 않고 눌러 앉았다. 이들은 미군정이 탄압해서가 아니라 총선을 통해 집권하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공산화된 북한을 찾아간 것이다.[2]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주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을 강제로 제거하고 해방 전 5년간 88여단에서 훈련시켜 데려와 자신들의 대리인 역할을 할 꼭두각시 지도자로 내세운 인물로, 남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이승만과는 정통성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데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마치 소련군이 김일성을 택한 것처럼 미군이 이승만을 지도자로 만든 것으로 착각하도록 취급하고 있다.

커밍스의 이런 잘못된 엉터리 주장들이 한국 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학계가 좌경화, 종북화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엉터리 주장들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가짜 소련군정 문서 인용

그의 가장 주요한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처음으로 가짜 소련군정 문서 『독립조선의 인민정부수립 요강』을 진짜인 것처럼 잘못 인용하였고, 그 후 다른 연구자들도 오늘날까지 이 가짜 문서를 진짜인 것처럼 잘못 인용하고 있다.

김석원에 대한 원수갚기가 김일성의 남침 목표?

48년 이승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승만은 북한에서 내려온 일본군 출신 한국인 장교들을 군 장성으로 기용했다. 이들 중 한명이 김석원이다. 그리고 미국은 48~50년에 500명의 미군 장교들로 이뤄진 자문단을 구성했다. 이 자문단은 김석원과 같은 (일본군 출신들에게) 38선 방어를 책임지게 했다. 이 점에서 소련과 미국이 30년대 일본강점기에서부터 부딪친 양쪽을 각각 지원한 것은 외국이 (한 나라에) 개입한 경우로는 최악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됐을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군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가장 심한 부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이 아니라, 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쪽에서 김일성을 지지했고, 미국은 남쪽에서 김석원(과 같은 인물들)을 지지했다. 이는 한국으로선 최악이었다. 49~50년 한국 상황에서 이는 거의 피할 수 없었다.

............

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3]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은 일본 육사 27기로 졸업후 일본군에서 복무하다 해방 후 국군으로 근무한 것은 맞다. 해방전에 북한 김일성과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그에 대한 비방이 잔뜩 나온다.[4] 보천보사건 직후 벌어진 소위 간삼봉전투라는 일본군과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2군 4사, 6사 연합부대의 전투에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석원인 줄로 잘못 알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간삼봉전투의 일본군 지휘관은 서울의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에 근무하던 김석원이 아니라 그의 일본육사 동기인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에 근무하던 김인욱(金仁旭, 1892 ~ ?) 소좌였다는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온다.[5] 김인욱은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인 평양 인근의 용강에 살다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더 한심한 것은 1937년 6월 30일의 간삼봉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 김인욱 소좌와 맞서 싸운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전사한 선배 지휘관과 같은 이름을 써서 남의 공을 가로챈 사기꾼일 뿐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런 것을 알리도 없으니 실제로 전투를 벌였던 당사자 "김인욱 - 6사장 김일성"을 북한의 엉터리 주장을 따라 "김석원 - 북한 김일성"으로 대치해 놓고 가공의 소설을 쓰고 있다.

커밍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북한 주장만 맹종하여 이승만김석원과 같은 일본군 출신들을 장성으로 기용한 것이 김일성의 남침을 초래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김일성은 이승만이 집권하기도 전인 1946년 연설에서도 남침 적화통일을 공언하고 있었다.[6] 이승만이 누구를 국군 장성으로 기용했든 김일성의 남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김일성 본인도 일본군 조종사 출신을 공군 최고 지휘관들로 기용했으므로[7] 이승만을 탓할 처지도 아니었다.

커밍스는 한 술 더 떠서 김석원김일성김정숙 이전의 처였던 김혜순을 죽였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혜순은 김석원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고,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인 1994년 7월 25일에 찍은 사진도 발굴되었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김일성과 전혀 관계가 없었으니 그 처였던 김혜순과는 어떤 연고도 있을 수가 없었다.

김석원과 관련된 사례들만 봐도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들은 근거없고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석원에 대한 커밍스의 집요하고 근거없는 비방

커밍스는 여러 곳에서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 부대와 일본군이었던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이 맞서 싸우다 해방 후 38선에서도 역시 같은 사람들이 다시 맞서게 된 것이 한국전의 원인인 것처럼 근거없는 주장을 집요하게 내놓는다.

1930년대에 김석원이 일본군인이었던 것은 맞지만, 김일성 부대와 맞서 싸우기는 커녕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않고 제맘대로 떠드는 이런 자를 대단한 학자로 대접하다보니 한국 현대사가 왜곡되고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The Korean War “created a blood debt that is crucial to understanding North Korean behaviour ever since”
The other crucial fact of the 1930s is that the Japanese employed Korean officers to go after the guerrillas, and these same officers populated the upper ranks of the South Korean army in the 1940s. Take Kim Sok-won, for instance: a colonel in the Japanese army who had been given the task of chasing down Kim Il-sung. Kim Sok-won, by then a general, was the commander of the 38th parallel throughout the summer and autumn of 1949. It was this conflict between Koreans who chose opposite sides in the 1930s that made civil war highly likely.
Bruce Cumings and Francis M. Bator, reply by Richard Bernstein
Because the top US commander in Korea had secretly told his superiors that South Korean military forces started the majority of fighting along the 38th parallel in 1949, with attacks from the South beginning in May and ending in December and with a near war in August, it was incumbent upon me to examine Stone’s thesis in any event. The South Korean commander of the parallel in the summer of 1949 was Kim Sok-won, a quisling who had chased after Kim Il Sung and other guerrillas in Manchuria in the 1930s, on behalf of the Japanese Kwantung Army—an army well known for provoking incidents, such as the one resulting in Japan’s invasion of Manchuria in 1931. My main point, though, was that the commanders of the respective Korean armies had chosen different sides in the long anticolonial struggle against Japan, and it should not have been surprising that once they had the means to do so, they would again clash with each other. What is more surprising is the direct American role, during the US occupation of Korea from 1945 to 1948, in putting in power an entire generation of Koreans in the military and the national police who had served Japanese imperialism.

박헌영의 외신 인터뷰 논란

1945년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방안이 결정되자 국내에는 즉각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박헌영도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 1946년 연초에는 돌연 찬탁으로 돌아선다. 1월 5일에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찬탁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데, 그의 입장변화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므로 국내신문에는 별 문제될만한 보도는 없었다. 하지만 10여일 뒤 전해진 뉴욕타임스보도에는 그가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한국이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져 거센 비판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상당한 논란이 한동안 지속되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권(1981)에서 이 사건을 다시 발굴해내고 마치 미군정 하지 사령관과 문제의 기사를 쓴 뉴욕타임스 기자 존스턴이 박헌영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음모라도 꾸민 것처럼 주장했다.[8]

“우익이 좌익을 매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은 1월 5일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인 죤스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었다. 죤스톤은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이러한 내용이 보도되자 한민당은 즉시 죤스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헌영을 타도하자”라는 팸플릿을 배포하였다.45)

그런데 이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다른 미국인 기자들은, 박헌영은 단지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 a Korea run by Koreans for Koreans 을 원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한국의 신문들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했다.46) 당시의 미군정 보고서 (G-2 Report)에도 박헌영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으며 그의 말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7) 그러나 하지 장군은 죤스톤의 보도내용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 보도내용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48)
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의 명성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는 좌익들 가운데서도 그는 고질적인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49)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초부터 우익집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45) Seoul Times, January 19, 1946. 또한 「한국민주당 특보」, 제5호, 1946년 2월 10일 자의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으로 만들고자 하는 박헌영을 타도하자. 박헌영은 매국적(매國적)이다”라는 내용을 보라.
46) Robert Cornwall (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과 여러 기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the Seoul Times, January 18, 1946을 보라.
47) G-2 'Weekly Report, no. 19, January 13-20, 1946; 그리고 'XXIV Corps Journal,' January 6, 1946 entry.
48) ‘XXIV Corps Journal, January 6 entry. Johnston은 하지가 좋아했던, 몇 안 되는 기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49) 金午星 編, 『指導者群像』, (서울 :大成출판사, 1946), p 20. 많은 미국인들은 박헌영을 첫째가는 음모가로 보게 되었다. 그의 조그만 체구와 어두운 인상은 이런 이미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HUSAFIK, vol.2, ch.1, p. 20은 박헌영을 “음흉하고 교묘하다”고 평가했다. Fabian Essays에서 Edward Bellamy는 보통의 미국인은 “사회주의자를 일종의 신비스런 악한이라고 생각했으며, 어두운 곳에 파고 들려다 거부당하고, 문명 및 문명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항하여 쓸모없는 기괴한 음모에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고 말했다 (Louis Hartz, The Liberal Tradilion in America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1955], p 246).

이 사안과 관련한 커밍스의 주장 이후 한국인 좌파학자들의 후속 연구에서도 다시 박헌영에 대한 미군정과 우익인사들의 탄압론을 주장하게 된다. 미군정청 인사들이 남긴 기록에 커밍스처럼 사안을 오해할만한 것들이 다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논란에 대해서는 지금은 전모가 밝혀졌고, db화된 과거의 관련 자료들을 모두 모아놓고 검토해 보면 박헌영은 외신회견에서 실제로 문제의 발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내신과 외신회견은 구분해서 따로 열렸고, 문제의 발언은 내신 아닌 외신회견에서 한 것으로 당연히 국내신문에는 보도되지 않고 뉴욕타임스에 났던 것이다. 당시 뉴욕타임스 외에도 UP 통신도 같은 내용의 보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커밍스의 주장과 달리 뉴욕타임스는 조작보도를 하지 않았고, 하지 사령관이나 존스턴 기자가 박헌영을 탄압하기 위해 어떤 음모도 꾸민 적이 없으며, 당시 우익인사들의 박헌영에 대한 공격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아래 항목을 참고하라.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에 나타난 33세의 그가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인물이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나온 것이고 한국에서 한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좌파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그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가 맞다며 가짜를 진짜로 뒤집어 놓았다. 이들이 온갖 궤변들을 다 동원하였기에 이것들을 일일이 다 반박하자면 몹시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소련군이 데려온 김일성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항일투쟁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는지 아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동북항일연군이나 거기서의 김일성의 활동은 1970년대 들어 그에 대해 연구가 시작된 이후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논란이 무성하다. 이런 형편이니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고, 그가 일찍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짜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실존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가짜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북한 김일성 때문에 유명해진 이름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그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자신이 그 유명한 실제 인물인 것처럼 행세했으니 가짜인 것은 변함없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지만, 그 연구도 엉터리인 것이 밝혀졌고,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직접 연구한 것은 아니고,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면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묘사한 커밍스의 한국전쟁 연구는 더욱더 실패작이 될 수 밖에 없다.

  •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The New Press, New York, 2004)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김정일 코드 :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 (따뜻한손, 2005) pp.25~26.
[번역본 pp.25~26] 2002년 나는 일본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내 연배의 저명한 학자로부터 메모 한 장을 받았다. 그가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한 한 대학원생이, 김일성은 만주국에서 일본에 대항해 싸웠던 유명한 게릴라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주장하더라는 내용이었다. 만주국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구를 점령한 뒤 세운 괴뢰정부다. 일본의 만주 공격은 태평양전쟁 발발의 계기가 된 침략이었다.

그 학자는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나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아마도 그 학생이 한국 출신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신화는 1945년 이래 주로 - 만주국에서 - 일본군에 복무하다 남한 군대를 지휘하던 국군 장교들에 의해 널리 퍼졌다. 한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교육부에서 검열한 교과서를 통해 이 "엄청난 거짓말"을 배웠다. 그 결과 1998년까지도 한 학자는 스탈린이 사기꾼 김일성을 선발한 뒤 1950년 남한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는 전설이 거의 모든 한국인들에게 의문의 여지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기술했다.[1] 아마도 진실은 남한 교육부의 폄하와 북한 교육부의 끊임없는 미화 사이에서 생긴 균열을 따라가다 보면 그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1] Grinker (1998) 128쪽.
Roy Andrew(Richard의 착오) Grinker, Korea and Its Futures: Unification and the Unfinished War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8)


브루스 커밍스는 아래 책에서 김일성이 단독으로 일본을 물리쳤다는 북한의 주장이나, 그가 남의 이름을 사칭한 사기꾼(imposter)이라는 남한의 주장이 모두 우스꽝스런 것이라고 주장하여 김일성이 진짜인 것처럼 말한다.

There are ridiculous myths about this guerrilla resistance in both Koreas today: the North claims that Kim single-handedly defeated the Japanese, and the South claims that Kim is an imposter who stole the name of a revered patriot. Nonetheless, this experience is important for an understanding of postwar Korea. The resistance to the Japanese is the main legitimating doctrine of the DPRK; the North Koreans trace the origin of the army, the leadership, and their ideology back to this founding moment. Today the top North Korean leadership still includes core leaders who fought the Japanese in Manchuria, even if most of the others have died by now.

The mythology about Kim and his allies can be sorted out through the lenses of unimpeachable documentation, of which there is a growing amount. There is a rare study by two Japanese Kwantung Army colonels in 1951, for example, men who tracked Kim in Manchuria and who provided Americans with their experience and their judgments on how to fight Korean guerrillas during the Korean War. They depicted Kim Il Sung as "the most famous" of Korean guerrilla leaders in the late 1930s: "Kim Il Sung was particularly popular among the Koreans in Manchuria. It is said that there were many Koreans who praised him as a Korean hero and gave him, secretly, both spiritual and material support."

38. National Archives, Army Chief of Military History manuscripts, box 601, "Military Studies on Manchuria," bk. 4, chap. 9. "Bandits and Inhabitants" (Tokyo: FEC, 1952).

여기서 커밍스가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만주에서 김일성을 쫓던 관동군 대령 출신 두 사람이 1951년 한국전쟁 기간에 미국인들에게 김일성이 1930년대말의 한국인 게릴라 지도자 중에 가장 유명했고,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특별히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한국의 영웅이라 칭찬하며 몰래 그에게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했다고 말한다. 커밍스는 두 관동군 대령의 말이 나오는 문헌을 밝히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그 다음에 제시한 참고문헌(38)에도 그런 말이 나오기는 한다.

참고문헌(38)의 원본은 아래의 것이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10013500、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 昭和27年11月(防衛省防衛研究所)」[9]
ソ聯に糸をひく匪賊には 鮮人を匪首とするものが多くその尤もなるものを金日成(当時二十九才)とし 朴得範、崔賢、全光などの幹部が居る。 これら匪首の年齢を一瞥すると、 どれもこれも三十才以下の若者であることは 特に注意する必要がある。

就中 金日成(写真㐧一参照)は 在満朝鮮人間に多大の人気があり、 彼を目して朝鮮の英雄と賞賛し、 物心両面から密かに援助する者が多い との噂が多かつた。

金日成がソ聯邦と密接な関係がありと断定した理由は 彼が関東軍の討伐に会ひ、 滿洲内に潜むことができなくなると 必ず暉春北方地区からソ領に逃走し 討伐部隊が引き揚げると再び入満した 歷然たる証拠があつたからである。

위 문헌에 1939~1940년 무렵 김일성을 쫓던 일본군들이 김일성이 만주의 조선인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끌며 영웅이라 칭송을 듣는다고 한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빨치산 김일성이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 그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던 만주의 조선인들 사이에서의 일이고, 그 김일성이 당시 조선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같은 인물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은 1920년 경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북한 김일성과는 나이가 전혀 맞지 않는다.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이 나타나기 직전에 많이 거론되던 김일성 장군 기록을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북한 김일성이 아닌 것은 충분히 입증된다.

해방전의 북한 김일성은 만주에서 일본군에 쫓겨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하여 88여단에 근무하며 해방 때까지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을 한 적도 없고,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 대위였다.

소련군이 진지첸 대위를 유명한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킨 것은 국내 사람들 누구도 그가 어디서 뭘하다 온 인물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국내에 아무 정치적 기반도 지지세력도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 직전 5년간 소련군에서 복무한 진지첸 대위였다는 사실을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철저히 숨기고 있고, 남한 사람들도 대부분 이 사실을 잘 모른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증거는 그의 동생 김영주가 해방 직후 친구 이용상(李容相,1924∼2005)에게 [부친 김형직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곤 했다고 말한 것이다.[10] 김성주가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고 자라 자신이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를 하여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반박은 아래를 참고하라.

김일성의 항일 게릴라 경력이 북한 지도자로서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가?

커밍스는 김일성이 해방 직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 88여단에서 소련이 시키는 훈련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소련이 그를 자신들의 대리인 꼭두각시 지도자로 선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가 아니고 소련군이 조만식을 제거하고 강제로 만들어준 지도자일 뿐이다. 소련군이 아니었으면 국내에 아무 기반도 지지세력도 없는 그가 해방 후 평양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방법도 없었다. 자기 입으로 아무리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라 한들 믿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만주 항일 게릴라 지도자 경력이 북한 지도자로서 충분한 자격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동북항일연군이 과연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부대였는지도 의문이고, 항일을 명분으로 수많은 양민에 대한 약탈, 살인, 방화, 납치를 자행한 것도 문제이다. 더구나 그는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해서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5년간이나 소련군에서 보냈으니 해방 당시 그의 신분은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 대위이지 항일 게릴라 지도자 김일성도 아니다. 그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도 철저히 은폐하고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했다.

커밍스가 이런 김일성을 마치 항일투쟁의 대표 인물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며, 남한은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해서 정통성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넌센스다.


조선은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이나 항일투쟁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미국과 소련과의 전쟁에 패하여 해방된 것이다. 조선이 이런 식으로 해방되었으면 누가 항일투쟁을 더 많이 했느냐 보다는 누가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 능력을 갖추었느냐가 지도자 자격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국민들은 되찾은 나라를 자유롭고 풍요롭게 이끌어 갈 지도자가 필요하지,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항일투쟁 경력이나 자랑하는 지도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김일성은 비교 대상도 되지 못하지만, 커밍스는 엉뚱하게도 정반대로 평가하고 있다.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오늘의 북한의 참상은 전혀 보지도 않고 볼 생각도 없이 자신만의 이념에 함몰된 균형감각을 상실한 학자이다. 이런 사람을 대단한 학자인 것처럼 여기고 추종한 한국의 학자들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한국에 대한 근거없는 비방이 넘쳐나는 컬럼

그의 저서들을 읽지 않더라도 아래 컬럼에서 한국과 북한에 대한 그의 사고 구조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북한과 김일성 및 소련 군정은 정의이고, 남한과 이승만, 미군정은 악이라는 유치한 구도로 한국현대사 전반을 재단하고 있다.

북한은 영웅적인 게릴라 활동을 한 김일성의 나라, 한국은 친일파들이 세우고 무자비한 살륙을 저지른 나라....
오늘날 남한 종북 좌파들은 그가 한 말 그대로를 복창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김일성의 게릴라 투쟁 찬양 부분
Kim’s reputation was inadvertently enhanced by the Japanese, whose newspapers made a splash of the battle between him and the Korean quislings whom the Japanese employed to track down and kill him, all operating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Nozoe Shotoku, who ran the Imperial Army’s ‘Special Kim Division’. In April 1940 Nozoe’s forces captured Kim Hye-sun, thought to be Kim’s first wife; the Japanese tried in vain to use her to lure Kim out of hiding, and then murdered her. Maeda Takashi headed another Japanese Special Police unit, with many Koreans in it; in March 1940 his forces came under attack from Kim’s guerrillas, with both sides suffering heavy casualties. Maeda pursued Kim for nearly two weeks, before stumbling into a trap. Kim threw 250 guerrillas at 150 soldiers in Maeda’s unit, killing Maeda, 58 Japanese, 17 others attached to the force, and taking 13 prisoners and large quantities of weapons and ammunition.
일본군이 김일성의 처 김혜순을 체포해서 이용하려다 실패하고 죽였다고 했지만, 김일성이 죽은 직후인 1994년 7월에 찍은 김혜순 사진도 있다. 커밍스의 책 ‘North Korea’ 115페이지에도 김혜순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죽었다 썼지만 사실이 아니다.[11]
  • 한국전 발발 원인
그는 소련 문서 공개 후 한국전 원인이 다 밝혀졌음에도 엉터리로 판명된 종전 자신의 주장을 전혀 바꾸지 않고 있다.
It lasted three years. To shore up their occupation, the Americans employed every last hireling of the Japanese they could find, including former officers in the Japanese military like Park Chung Hee and Kim Chae-gyu, both of whom graduated from the American military academy in Seoul in 1946. (After a military takeover in 1961 Park became president of South Korea, lasting a decade and a half until his ex-classmate Kim, by then head of 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shot him dead over dinner one night.) After the Americans left in 1948 the border area around the 38th parallel was under the command of Kim Sok-won, another ex-officer of the Imperial Army, and it was no surprise that after a series of South Korean incursions into the North, full-scale civil war broke out on 25 June 1950. Inside the South itself – whose leaders felt insecure and conscious of the threat from what they called ‘the north wind’ – there was an orgy of state violence against anyone who might somehow be associated with the left or with communism. The historian Hun Joon Kim found that at least 300,000 people were detained and executed or simply disappeared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in the first few months after conventional war began. My own work and that of John Merrill indicates that somewhere between 100,000 and 200,000 people died as a result of political violence before June 1950, at the hands either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r the US occupation forces. In her recent book Korea’s Grievous War, which combines archival research, records of mass graves and interviews with relatives of the dead and escapees who fled to Osaka, Su-kyoung Hwang documents the mass killings in villages around the southern coast.​* In short, the Republic of Korea was one of the bloodiest dictatorships of the early Cold War period; many of the perpetrators of the massacres had served the Japanese in their dirty work – and were then put back into power by the Americans.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의 커밍스 비판

브라이언 마이어스 (Brian Reynolds Myers, 1963 ~ )는 북한 전문가로 부산 동서대 교수이다.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북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일성 치하의 문화에 대한 개척적인 연구라 할 만한 『한설야와 북한문학(Han Sorya and North Korean Literature)』을 출간했다.

그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북한에는 친일파가 없고 남한이 친일파를 많이 등용한 것이 마치 6.25나 남북 갈등의 원인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북한에 친일파가 없었다고 남한 좌파와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해방 후 평양으로 이주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일제와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김사량(金史良, 1914~1950)처럼 특히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몇몇 인물들은 사실상 서울에서 쫓겨났고,[12] 북쪽은 그런 협력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1981년에 북한에서 발행된 한 역사책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 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오랜 인테리들의 혁명성과 애국적 열의를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새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13] (김일성 형제도 중국에서 일본군의 통역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4]
“북한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중국이나 동유럽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 더 가깝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은 친일정권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문화를 연구하면서 확인했다. 김일성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보다 친일 인텔리를 환영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김일성은 친일 인텔리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화작업을 하게 했다. 일제가 해왔던 것처럼 히로히토와 같은 우상화 작업을 해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상화에 동원한 수사(修辭)를 그대로 빌려왔다.”[15]


참고 자료

커밍스가 미국 학계의 한국사 연구분야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어떠한 짓을 벌였는지 폭로가 나온다.
신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새로운 책의 내용도 대부분 견강부회식의 근거없는 자기 주장이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자신의 시각을 이 책에서도 유지하면서 내전을 초래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힘의 기원을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까지 확장한다.
"특히 불평등한 토지 보유, 한국인 중 일부는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 다른 일부는 일본에 협력했던 것, 그리고 수많은 한국인이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일본의 방대한 산업화와 전시 동원 노력에 복무해야 했던 1935∼45년의 10년 동안 평범한 한국인이 겪은 경악스러운 혼란에 그 뿌리가 있다."(163쪽)

함께 보기

각주

  1. 북한의 친일파 청산
  2. 남북협상#방북 후 북한에 잔류한 사람들
  3. Kathryn Weathersby ICAS (Institute for Corean-American Studies)
  4.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c6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5. 『金仁旭 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매일신보 1937년 7월 3일
  6.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김일성의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남한 적화통일 의지 표명
  7. 북한의 친일파 청산#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이 북한공군 창설에 대거 참여
  8.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Vol.1 pp.224~225.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1986) 하권 pp.34~35. (원저 Vol.1을 상, 하 2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
  9. 標題:第9章・第1節 昭和14年頃の匪勢概観/第1款 匪賊と環境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10244700、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 第9章 匪族及住民 第10章 気象 昭和9~20年(防衛省防衛研究所)」 p.5에도 같은 내용이 나옴.
  10. 김영주#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11.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New Press, 2004.
  12. '김사량은 ... 친일작가이기도 했다'-가와무라 미나토, 문학평론가
  13. 『조선전사』 현대편(23편) '민주건설사 1'
  14. B. R. 마이어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Part 1 북한의 문화사 : 소련 점령, 1945~1948년
  15. (저자 인터뷰) “북한은 인종론에 기초한 극우정권 친일파 우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했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저자 B.R. 마이어스 [주간조선 2186호] 2011.12.19
    <김관후의 4·3칼럼> (51) 계엄선포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제주의 소리 2015년 0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