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비틀즈 스키플, 비트 음악과 1950년대 로큰롤에 뿌리를 둔 비틀즈는 이후 팝 발라드와 인도 음악에서 사이키델릭과 하드 록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여러 음악 스타일을 실험했고, 종종 혁명적인 방식으로 클래식적인 요소와 관습에서 벗어난 녹음 기술을 결합하기도 했다. 1963년 이들의 어마어마한 유명세는 "비틀마니아"로 첫 표출되었으나, 그룹의 음악이 향후의 수년에 걸쳐 주된 작곡가인 레논과 폴 매카트니를 구심점으로 세련되게 성장하면서, 이들은 1960년대 반문화가 내세운 사상의 결정체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비틀즈

비틀즈는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클럽을 1960년부터 시작해 3년의 기간 동안 전전하면서 명성을 쌓았고 이 시기에는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베이스 연주를 맡았다. 밴드의 중심축이던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은 피트 베스트를 비롯한 여러 드러머를 기용했고, 이후 1962년 스타에게 가입을 권유했다. 매니저 엡스타인은 이들을 전문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변형시켰고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1962년 말 영국에서 막대한 유명세를 얻게 일조한 이들의 첫 히트 싱글 〈Love Me Do〉부터 녹음물을 지휘 및 개발하였다. 이듬에 영국에서 비틀마니아가 성장함에 따라 "팹 포"라는 별명을 얻은 이들은 1964년 초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여 미국 팝 시장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선도한다. 1965년부터는 《Rubber Sou]》 (1965), 《Revolver》 (1966),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The Beatles》 (1968), 그리고 《Abbey Road》 (1969) 등의 점차 혁신적인 녹음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 비틀즈는 해산되었지만 멤버들은 각자 성공적인 음악 활동을 누리며 제각기 다른 기간 동안 이어나갔다. 현재 생존한 멤버인 매카트니와 스타는 계속해서 음악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레논은 1980년 12월 8일 피살되었고, 해리슨은 2001년 11월 폐암으로 사망했다.

비틀즈는 전 세계에서 6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집계되어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밴드로 기록되었다. 그 누구도 비틀즈의 영국 1위 음반 개수와 싱글의 판매고를 앞지르지 못했다. 또한 미국 음반 산업 협회에 따르면 비틀즈는 1억 7,800만 장의 음반 판매 인증을 받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2008년 《빌보드》에서 선정한 역대 가장 성공한 "핫 100" 아티스트 목록에서 그룹을 정상을 차지했다. 2017년 기준으로 스무 번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올라 가장 많이 오른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룹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88년 헌액되었고, 네 명의 멤버 모두 1994년부터 2015년까지 개별적으로 헌액되었다.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100인에서 집합적으로 포함되었다.

역사

1957–1962: 결성과 함부르크 활동, 영국에서의 유명세

1957년 3월, 쿼리 뱅크 그래머 스쿨을 다니던 16세 존 레논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스키플 음악 그룹을 결성한다. 원래는 블랙잭스라고 밴드 이름을 정했으나, 동명의 밴드가 이미 존재했던 이유도 있고 쿼리뱅크에 다니는 이유로 밴드명을 쿼리맨이라고 변경하게 된다. 그해 7월 존 레논과 만나게 된 15세의 폴 매카트니는 곧 밴드에 리듬 기타로 합류하게 된다. 1958년 2월 6일, 매카트니는 리버풀의 윌슨 홀에서 열린 쿼리맨의 공연에 해리슨을 초대했다. 매카트니와 해리슨은 리버풀 인스티튜트의 학교 버스에서 만나 친해졌다. 14세의 해리슨은 존 앞에서 열성을 다해 오디션을 보았지만, 존은 조지가 밴드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다.

함부르크 시기 비틀즈가 공연한 인드라 클럽의 2007년 모습

그 당시 비틀즈의 비공식 매니저였던 앨런 윌리엄스는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상주 밴드로 비틀즈를 계약시키려고 했으나, 드러머가 없었다. 8월 중순, 그들은 오디션을 통해 피트 베스트를 드러머로 합류시킨다. 이렇게 다섯 명이 된 멤버는 4일 후 클럽의 주인이었던 브루노 코슈미더와 약 3개월의 계약을 맺고 함부르크를 향해 떠났다. 비틀즈 역사학자 마크 루이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그들은 8월 17일 홍등가가 생기를 되찾는 시간대인 해가 질 무렵 함부르크에 발을 내딛었다 ... 네온 불빛이 깜박거리며 다양한 여흥거리를 광고하고 있었고, 맨살을 드러낸 여성들은 가게의 창문에 앉아 사업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스트립 클럽 두 개를 음악 클럽으로 바꾼 코슈미더는 비틀즈를 인드라 클럽에 배정했다. 두어 달이 지나는 동안 인드라에서 나오는 소음 때문에 주변 거주민의 불평이 거세지자 결국 인드라는 문을 닫았고, 그는 10월 비틀즈를 카이저스캘러로 옮겨 연주하게 했다. 자신의 라이벌 클럽인 탑 텐에 출연하려는 낌새를 눈치 챈 브루노 코슈미더는 밴드에게 1개월의 해약통지서를 발급하고 이후로도 2년 동안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일정한 기간동안 머물렀고 그들은 밤을 세우는 공연을 위해 피트 베스트를 재외한 모든 멤버는 프리루딘 같은 각성제를 복용했다. 1961년 두 번째 함부르크 활동 도중 섯클리프의 머리카락을 "exi"(실존주의자) 스타일로 잘라냈다. 커처의 이 헤어스타일은 다른 비틀즈 멤버에게도 채택되었다.

비틀즈가 두 번째 함부르크 활동을 마친 무렵에는 머지비트 붐으로 리버풀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매일 밤마다 같은 클럽에서의 공연을 하는 단조로운 생활에 곧 염증을 느꼈다. 1961년 11월 빈번히 캐번 클럽에서 공연하던 비틀즈는 인근에서 음반 가게를 운영하면서 음악 칼럼을 쓰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눈에 띄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난 바로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신선하고, 정직했으며, 내가 생각하는 일종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 스타가 될 수준이었다.

마틴이 비틀즈와 가진 첫 녹음 세션은 1962년 6월 6일 EMI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였다. 마틴은 즉시 엡스타인에게 베스트의 형편없는 드럼 연주에 대해 불평하며, 여기선 세션 드러머를 쓰라고 제안했다. 베스트의 해고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틴은 처음에 링고의 〈Love Me Do〉를 비틀즈의 첫 번째 싱글로 선택했으나, 차후 앤디 화이트의 드럼에 링고가 탬버린을 치는 형태로 음반을 다시 발매했다. 10월 초에 출시된 〈Love Me Do〉는 레코드 리테일러 차트에서 17위까지 올랐다. 비틀즈의 첫 텔레비전 출연은 그달 말 지역 뉴스 프로그램인 《피플 앤드 플레이스》에서 한 라이브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Please Please Me〉는 마틴이 더 빠른 박자로 재녹음할 것을 제안하였다.

1962년 12월,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의 그들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생활을 마무리 짓는다. 1963년, 비틀즈는 보컬에 제한이 없잖아 있는 스타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의 보컬이 음반에 들어갈 것을 약속했다. 레논과 매카트니는 작곡 파트너십을 맺어 밴드의 성공에 따른 그들의 주도적인 협업으로 해리슨의 기회는 제한되었다.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상업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공연에서 전문적인 용모와 행동을 취할 것을 요청했다. 레논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애들아, 너희가 정말 큰 무대에 서고 싶다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어. 무대에서는 식사도, 욕도, 담배도 금해야 해 ...

1962–1966: 비틀마니아와 투어 시기

《Please Please Me》와 《With the Beatles》

The words 'The Beatles', rendered with large letters B and T in the second word
비틀즈의 로고는 악기 판매상이자 디자이너인 이보르 아비터의 즉석 스케치에서 비롯되었다.

〈Love Me Do〉의 준수한 성공 뒤 발표된 〈Please Please Me〉는 보다 확실한 반응을 얻었다. 1963년 1월 발매 후 2위에만 머무른 《레코드 리테일러》 차트를 제외하면 런던의 모든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1963년 2월 11일, 비틀즈는 《Please Please Me》의 수록곡을 위해 스튜디오 세션에서 10곡을 녹음했다. 음반에 있던 네 개의 곡은 이미 두 개의 싱글로 발표된 상태였다. 마틴은 처음에 캐번 클럽에서 녹음을 진행하여 LP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건물의 음향조건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최소한의 제작비로 "애비 로드에서 마라톤 세션"을 통해 "라이브" 흉내를 낸 음반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비틀즈가 데뷔 음반을 서둘러 발매한 것에 올뮤직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앨범이 발매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원래의 열정으로 그 앨범은 여전히 신선한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1963년 3월 22일 발표된 첫 정규 1집 《Please Please Me》은 그들이 1970년까지 영국에서 발매한 열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 중 열한 장의 앨범이 1위를 하는 역사적인 기록의 시작이 되었다. 4월 발매된 밴드의 세 번째 싱글 음반인 〈From Me to You〉는 차트 정상에 오르는 히트를 쳤고, 여기서부터 그들이 6년에 걸쳐 발표한 18개의 싱글 중 17개의 영국 싱글이 차트 정상에 연속으로 오르는 기록이 시작되었다. 8월 발표된 비틀즈의 네 번째 싱글 〈She Loves You〉는 영국에서 4일에 걸쳐 75만 장이 팔려나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나간 음반으로 기록되었다. 밴드가 처음으로 백만 장 판매를 돌파한 싱글인 〈She Loves You〉는 멤버인 폴 매카트니가 탈퇴하여 결성한 윙스에서 1978년 발표한 〈Mull of Kintyre〉 이전까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의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업적 성공은 미디어 노출을 증가시켰고, 비틀즈는 당시 대중 음악가에게 가진 기대에 겸손하지 못한 태도로 반응하였는데, 이는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인기가 치솟자 광팬의 수도 급증했다. 비틀즈에게 열광하는 시끄러운 팬들에 대해 언론은 "비틀마니아" 현상이라고 이름붙였다. 비틀즈는 반년에 걸쳐 영국에서 세 번 투어를 돌았다. 2월부터 시작하여 처음 전국에서 4주 동안 공연을 했고, 계속해서 3월과 5월 ~ 6월 동안 3주의 공연을 진행했다. 비록 비틀즈가 투어의 리더가 아니긴 했지만, 그들은 2월 동안 "청중의 수요에 따라" 고용되어 최고의 로열티를 받았고, 같이 동행한 미국의 배우인 토미 로와 크리스 몬테즈를 무색하게 했다. 당시 미국 예술가들과 함께 투어를 돈 영국 예술가 중 이런 성과를 거둔 이는 없었다.} 로이 오비슨과의 5월 ~ 6월 투어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

1963년 10월 30일 스웨덴의 텔레비전 쇼 《드롭인》에 출연한 매카트니, 해리슨, 스웨덴의 팝 가수 릴밥스

10월 말, 비틀즈는 1962년 12월 함부르크 거주 이례로 처음 외국에서 진행한 스웨덴 투어를 떠났다. 그들이 10월 31일 영국으로 돌아오자 비틀즈 역사학자 루이손에 의하면, "수백명의 비명을 지르는 팬들"이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 히스로 공항에 운집했다.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기자와 사진사가 공항에 모였고, 이는 이후 일어날 100건이 넘는 유사한 사건 중 처음에 불과했다. 다음 날 비틀즈는 9개월만에 영국에서의 네 번째 투어를 시작했으며, 6주 동안 진행되었다. 11월 중순,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비틀마니아의 위세에 경찰은 플리머스에서의 콘서트 전 고압의 물 호스로 군중을 통제해야 했다.

《Please Please Me》는 《레코드 리테일러》의 메인스트림 차트에서 정상을 30주 동안 머물렀고, 그들의 다음 음반인 《With the Beatles》가 나오고서야 물러났다. 1963년 11월 30일 EMI는 선주문 270,000장을 기록한 비틀즈의 두 번째 정규 음반 《With the Beatles》를 발표했고, LP는 1주 동안 50만 장이 넘게 팔렸다. 7월과 10월 사이에 녹음된 《With the Beatles》는 전작과 비교하여 더 나은 스튜디오 기술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이 음반은 21주 동안 차트 정상을 차지했으며 차트에는 40주 동안 머물렀다. 얼웨인은 음반을 "오리지널보다 훌륭한 최고의 후속작"이라고 평가했다. EMI는 판매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I Want to Hold Your Hand〉를 2집에서 빼고 발표 이후에 싱글로 발매하는, 당시의 표준적인 관행을 되풀이했다.

음반은 레논과 매카트니를 "걸출한 1963년의 영국 작곡가"라고 평가한 《타임스》의 음악 비평가인 윌리엄 맨의 관심을 끌었다. 신문에서 출판한 일련의 기사에 맨은 이 노래에 존경을 바치면서 상세한 분석을 담았다. 《With the Beatles》는 1958년 사운드트랙 《South Pacific》 이후로 영국 차트 역사에서 백만 장이 넘게 팔린 두 번째 음반이 되었다. 《With the Beatles》의 속지에서 토니 배로우는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노래인 〈Don't Bother Me〉를 소개하면서 기막힌 4인조(The Fabulous Foursome)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후 "the Fab Four"라는 줄임말로 널리 채택되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EMI의 미국 자회사였던 캐피틀 레코드는 비틀즈 음반을 발매하는 것을 꺼렸지만, 결국 조류에 항복하여 비틀즈가 발표한 첫 세 개의 싱글을 비롯한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의 독립 레이블 비-제이 레코드도 협상을 통해 1963년 몇 곡을 추려 발매했으나 전부는 못했다. 비-제이는 팔로폰의 《Please Please Me》에서 몇 개의 곡을 가져와 《Introducing... The Beatles》를 준비했지만 대대적인 경영 개혁으로 인해 출시가 연기되었다. 레이블이 판매 수익의 로열티를 보고하지 않자 EMI와 체결한 비-제이의 라이센스는 무효화되었다. 새 라이센스는 이후 싱글 〈She Loves You〉를 위해 스완 레이블에게 넘어갔지만 로열티와 출판권을 둘러싼 법적 문제로 미국 내 그룹의 성공적인 마케팅에 장애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차트 성공은 엡스타인이 마케팅 캠페인으로 40,000달러를 지불하고 DJ 캐롤 제임스의 도움을 받은 뒤에서야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1963년 중순 DJ로서 처음 비틀즈의 음반을 재생한 사람이었다. 같은 달 말에 비틀즈는 WGH 라디오 방송국의 진 러빙에 의해 버지니아의 티드워터 에리어에 초대받는다. 그는 비틀즈 셔츠 경품 이벤트를 포함한 모든 홍보를 진행했다. 며칠 만에 방송국은 거의 대부분의 비틀즈 곡을 녹음했다. 1964년 1월 1주차가 끝나기 전까지 노래는 뉴욕 시로 송출되었고(비슷한 방송 횟수로 마케팅 캠페인이 이루어졌다), 이후 미국 전역과 다른 나라의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송출되었다. 이로 인해 수요가 늘어나자 캐피틀은 다음달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서둘러 발표했다. 1963년 12월 26일 발표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백만 장이 팔렸고, 미국에서 1월 중순까지 정상을 점했다. 이에 비-제이는 《Introducing... The Beatles》을 발표, 뒤이어 캐피틀에서 《Meet the Beatles!》를 발표했으며, 스완은 〈She Loves You〉를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A black and white image of four men are standing in front of a crowd of people at the bottom of an aeroplane staircase.
1964년 2월 7일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한 비틀즈

비틀즈가 영국을 출발하던 날인 1964년 2월 7일에 히스로 공항에는 4,000명으로 추정되는 팬이 운집하여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고성을 질렀다. 뉴욕 시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발을 내디딘 그들은 3,000명의 요란한 군중에게 환영을 받았다. 2일 뒤 2월 9일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 쇼》에서 처음 미국 라이브 공연을 선보였고, 미국 인구의 34%에 가까운 2,300만 가구에서 약 7,300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시청했다. 닐슨 시청률 서비스를 인용한 전기작가 조나단 구드에 의하면, 이는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상 그 어떤 유례도 없는 가장 많은 시청자"다. 다음 날 아침 비틀즈는 대다수의 미국인에게서 자신들이 혹평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 다음 날 카네기 홀에서 진행된 첫 미국 콘서트에서는 폭발적인 비틀마니아를 맞이하게 되었다.

《A Hard Day's Night》

캐피틀 레코드는 1963년을 지나면서 관심이 줄었고, 경쟁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레코드는 이 틈을 타 자신들의 영화 부서를 설득하여 비틀즈와 장편 영화 계약을 맺는다. 이 영화는 사운드트랙 음반을 팔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리처드 레스터가 감독한 《하드 데이즈 나이트》에서 비틀즈는 자신들을 모큐멘터리의 등장인물로 분하여 1964년 3월에서 4월까지 함께 제작했다. 런던과 뉴욕에서 각각 7월과 8월에 초연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마르크스 형제와 견주기도 했다. 얼윈의 글에 의하면 동시에 출시된 사운드트랙 음반 《A Hard Day's Night》는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을 진정으로 밴드로서 우뚝서게" 했으며 "처음 두 음반에서의 영향과는 상이하게 찰랑이는 기타와 매혹적인 멜로디가 합쳐진 밝고, 즐거운 오리지널 사운드가 응축되어 있다.

1964년 4월 4일의 주중에 비틀즈는 1위에서 5위까지를 포함해 총 15개의 곡을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 올려놓는다.

6월에서 7월까지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진행한 비틀즈는 27일간 덴마크, 네덜란드, 홍콩, 호주, 뉴질랜드에서 37개의 쇼에 출연했다.

8월, 저널리스트 알 아르노위츠는 비틀즈와 밥 딜런의 만남을 주선했다.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만남을 가진 딜런은 대마초를 소개시켜 주었다. 구드는 비틀즈가 음악 및 문화적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이 이 만남이었다며, 이전까지는 각각의 음악가들이 지니고 있는 팬들이 "두 개의 분리된 하위문화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지적했다. 딜런을 듣는 "예술적이고 지적이며, 정치와 사회적 이상주의를 거론하며, 가벼운 보헤미안 스타일이었던 대학생"과는 달리 비틀즈의 팬은 "텔레비전, 라디오, 팝 음악, 팬 잡지, 청소년 잡지 등 상업적인 대중매체에 몰두한 '10대 소녀 그 자체'인 고등학생이나 초등학생이었다. 또한 이들은 이상숭배자가 아닌 우상 숭배자였다.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

구드의 말에 의하면, 비틀즈의 네 번째 정규 음반인 《Beatles for Sale》는 비틀즈가 세계적인 성공으로 인한 상업적 압박과 자신들의 창조적인 야망이 서서히 충돌하는 갈등의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비틀즈는 1964년 8월에서 10월까지 녹음한 이 음반이다.

1965년 5월 1일 빌보드에 게재된 비틀즈의 그래미 우승 기념 사진

1965년 초 비틀즈는 레논과 해리슨의 치과 의사의 저녁에 초대받았는데, 이 의사는 그들에게 LSD를 몰래 담은 커피를 권했다. 레논은 이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환상적이었어요. 전 두어달 정도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수상 해럴드 윌슨이 비틀즈를 대영 제국 훈장 구성원 (MBE) 후보로 선정한 뒤, 1965년 6월 그들은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훈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이런 영예는 제대 군인이나 사회 명사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에 항의한 보수적인 서작자들은 자신들의 훈장을 도로 반환하기도 했다.

The Beatles performing music in a field. In the foreground, the drums are played by Starr (only the top of his head is visible). Beyond him, the other three stand in a column with their guitars. In the rear, Harrison, head down, strikes a chord. In the front, Lennon smiles and gives a little wave toward camera, holding his pick. Between them, McCartney is jocularly about to choke Lennon.
영화 《헬프!》 트레일러에서의 비틀즈

7월, 전작과 마찬가지로 레스터가 감독한 비틀즈의 두 번째 영화 《헬프!》가 개봉했다. "제임스 본드 패러디로 점철된

1965년 8월 미네소타주 블루밍턴에서 기자회견을 가지는 비틀즈

비틀즈의 세 번째 미국 투어는 1965년 8월 15일 55,600여 명이 운집한 셰이 스타디움 공연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 이 공연을 루이손은 "아마도 비틀즈 콘서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할 것"이라고 썼다.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아홉 번의 성공적인 투어를 돌았다. 아틀랜타에 있을 때 비틀즈는 최초로 폴드백 시스템을 라이브 무대 공연에 적용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투어가 끝날 무렵에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기반을 다지게 해 준 엘비스 프레슬리의 초대를 받아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1965년 10월 중순 비틀즈는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가 처음으로 아무런 간섭이나 약속없이 긴 기간동안 음반 제작에 몰두했다. 조지 마틴을 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음반을 싱글 모음집처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음반을 자신 스스로의 예술로서 생각하며 만들었던 겁니다. 12월 발표된 《Rubber Soul》은 비틀즈 음악의 성숙함과 복잡함을 진일보시켜 비평가의 극찬을 받았다. 음반의 주제에서는 사랑과 철학의 깊은 측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기작가 피터 브라운과 스티브 게인스는 비틀즈가 새로운 음악적 진로를 결정한 것은 대마초 상용의 결과라고 분석한다.[1] 레논은 이 음반을 "대마초 음반(the pot album)"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대마초(Grass)는 우리의 변모, 특히 작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때문에 노래의 소재도, 연주법도 달라졌어요.

《Rubber Soul》의 대부분 곡은 레논과 매카트니의 작곡 파트너십이 빚어낸 작업물이었다. 계속해서 동등한 작곡가 표기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서로의 곡은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 보였다. 그들이 서로 자신의 주도로 쓰인 곡이라고 주장하는 〈In My Life〉는 레논-매카트니의 곡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로 간주되고 있다. 해리슨은 《Rubber Soul》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반"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논란과 마지막 투어, 《Revolver》

1960년대 중반 EMI 스튜디오에서 조지 마틴과 함께

《Yesterday and Today》 논란 한 달 뒤의 필리핀 투어에서 비틀즈는 필리핀의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초대한 점심 환영 연회를 의도치 않게 무시한다. 초대장이 왔을 때 엡스타인은 이러한 정식 초대를 수락하는 정책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틀즈를 대표하여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들은 이내 마스코스 정권이 답장을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과적으로 폭도들이 이들을 위협했고, 그들은 필리핀에서 어렵사리 탈출한다. 이 직후 비틀즈는 인도에 처음 방문했다.

그들이 영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쿠 클럭스 클랜같은 미국의 종교 및 사회 보수주의 단체가 레논이 3월 영국 리포터 모린 클리브에게 한 인터뷰를 두고 비틀즈를 맹렬한 비난한다. 레논은 클리브에게 "기독교는 없어질 겁니다. 점점 줄어들어서 소멸할 거예요.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맞아요. 언젠가 맞다는게 증명될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보다 인기가 있어요. 어느 것이 먼저 없어질지는 모르겠어요. 로큰롤일지 기독교일지. 예수는 괜찮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우둔하고 평범했죠. 제 생각엔 그들이 기독교를 망쳐놨어요."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영국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미국의 틴에이저 팬 잡지 《데이트북》이 5달 뒤(8월 비틀즈 미국 투어 전날) 기사를 게재하면서 미국의 "바이블 벨트"를 중심으로 논란이 촉발되었다. 바티칸은 성명을 통해 항의하고 나섰으며 비틀즈의 음반은 스페인 및 네덜란드 방송국과 남아프리카 국립 방송국에서 금지되었다. 엡스타인은 《데이트북》이 레논의 발언을 아무런 맥락없이 가져다 썼다며 비판했다. 논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 기자회견에서 레논은 "만일 '텔레비전이 예수보다 더 인기가 많다'고 했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었겠죠."라고 말했으며

《Rubber Soul》으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은 그들은 마지막 투어 이후인 1966년 8월 출시된 《Revolver》으로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피치포크의 스콧 프래켄호프는 이 음반이 "밴드의 사운드를 절대적인 신뢰로 성장시켰"으며 "대중음악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재정립했다"고 썼다. 《Revolver》는 세련된 작곡, 스튜디오 실험, 혁신적인 클래식 현악기에서부터 사이키델릭 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 스타일의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관례적인 그룹 사진에서 탈피한 – 함부르크 시기부터 친구 사이였던 클라우스 부어만이 디자인한 – 커버는 구드의 설명에 의하면 "삭막하고 예술 흉내를 내고 흑백인, 오브리 비어즐리를 등에 업은 펜 그림 스타일의 비틀즈 캐리커처 콜라주다.

《Revolver》의 실험적인 곡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Tomorrow Never Knows〉의 가사는 레논이 티모시 리어리의 저서 《더 사이키델릭 익스페리언스: 어 매뉴얼 베이스드 온 더 티베탄 북 오브 더 데드》에서 따온 것이다. 음반의 창작은 EMI의 건물에 널리 설치되어 있던 8테이프 덱으로부터 성장했다. 각각의 직원들은 엔지니어와 밴드 구성원에 의해 테이프 루프에 다양한 무작위의 움직임을 더했고, 조지 마틴은 들어오는 데이터를 샘플링을 통해 합성물을 제작했다. 매카트니의 〈Eleanor Rigby〉는 현악 8중주 사용이 두드러진다. 구드는 이 곡을 "스타일 및 장르를 알아볼 수 없는 진정한 합성체"라고 묘사한다. 작곡가로서 성장한 해리슨은 음반에 자신의 세 곡을 넣을 자리를 획득한다. 2003년 《롤링 스톤》지는 《Revolver》를 역사상 세 번째로 위대한 음반에 선정했다. 음반 발표 뒤인 다음해 그들은 미국 투어를 떠났지만 《Revolver》의 수록곡은 단 한 곡도 부르지 않았다. 크리스 잉엄의 글에 의하면, 그 곡들은 너무나 "스튜디오 착장품이었으며, 3곡은 4인조 록 그룹으로서 팬의 고함이 만들어낸 둔감의 벽을 통해 연주할 방법이 없었다. '라이브 비틀즈'와 '스튜디오 비틀즈'는 이제 완전히 다른 짐승이 되었다.

1966–1970: 스튜디오 시기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년 7월 25일, 비틀즈는 최초의 글로벌 텔레비전 링크인 《아워 월드》에서 자신들의 발표 예정 싱글 〈All You Need Is Love〉를 3억 5,000만 시청자 앞에서 공연한다. 발표 1주일 뒤인 서머 오브 러브 시기에 노래는 플라워 파워의 앤섬으로 채택되었다. 두 달 뒤 비틀즈는 자신들의 커리어를 혼란으로 몰아간 손실을 입는다. 런던에서 마하라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은 그들은 다음날 8월 25일 뱅고어에서 진행되는 초월 명상에 참여하기 위해 인도로 여행을 떠난다. 2일 뒤 매니저의 비서 피터 브라운은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32세의 나이에 별세했다고 전했다. 검시관은 죽음의 원인을 카르비톨 과다 복용으로 판명했지만, 그가 자살을 했다는 뜬소문이 널리 퍼졌다. 엡스타인은 당시 유리같은 불안정한 감정 상태였고 개인적인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의 죽음으로 비틀즈는 방향키를 잃고 우왕좌왕했으며 미래를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다. 레논이 회고하기를, "우리는 붕괴되었습니다. 우리가 당시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은 자명했지요. 저는 우리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겁을 먹었어요. 생각했죠, '우린 끝났구나'

《Magical Mystery Tour》, 《the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영화 속 〈I Am the Walrus〉 장면

비틀즈의 텔레비전 영화의 사운드트랙 《Magical Mystery Tour》이 영국에서 6트랙 더블 EP 형식으로 1967년 12월 초 출시되었다.

1968년 1월 비틀즈는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 《옐로우 섬머린》에 카메오로서 출연했다. 이 영화에는 만화 버전의 밴드 멤버가 등장하고, 스튜디오에 녹음했지만 발표되지 않은 네 곡이 영화에서 데뷔 이후 동명의 사운드트랙에 담겨 출시된다. 1968년 6월 발표된 영화는 음악, 유머, 진보적인 시각 스타일로부터 평론가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반은 영화 공개 7달 후 발표되었다.

화이트 앨범으로도 알려진 《The Beatles》의 미니멀리즘한 커버는 팝 아티스트 리처즈 해밀튼으로부터 "《Sgt. Pepper》와 직접적으로 대비된다"며 "깨끗한 점판암"이 연상된다고 했다.

이 와중, 특색없는 커버로 이른바 화이트 앨범으로 잘 알려진 더블 LP 《The Beatles》가 출시되었다. 음반의 창조적 영감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지시가 없는 새로운 방향에서 비롯되었다. 비틀즈는 잠시 그들의 구루, 마하라시 마헤쉬 요기에게 의지했다. 인도의 리시케쉬에 있는 그의 아쉬람에 방문하여 세 달 동안 "지도 강의" 계획을 수료하던 그들은 이 시기에 음반에 수록된 30곡의 대부분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써내렸다. 스타는 이곳을 버틀린에 비유하며 10일이 되어 떠났고, 매카트니는 커지는 무료함에 그만 한 달이 되어 떠났다. 창작열에 물이 오른 레논과 해리슨은 전기 기술자 매직 알렉스의 마하라시가 자신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말에 의문을 느낀다. 여성 참여자에게 마하라시가 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말에 설득된 레논은 두 달이 되어 강의에서 이탈했고 아울러 해리슨과 그룹의 수행원을 불신하게 되었다. 마하라시에 대한 분노로 레논은 〈Maharishi〉라고 이름붙인 준영한 곡을 썼고, 이후 소송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Sexy Sadie〉로 이름을 고쳤다. 매카트니는 "우리는 실수했던 거예요. 우리는 그가 거기 원래 있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했죠.

1968년 3월 말에서 10월 중순으로 늘어진 화이트 앨범의 녹음 세션에서 비틀즈의 관계는 뚜렷하게 분열되고 있었다. 스타는 2주 동안 그만두었고, 매카트니가 드럼 키트를 맡아 〈Back in the U.S.S.R.〉 (해리슨과 레논도 드럼에 참여했다), 〈Dear Prudence〉를 녹음한다. 레논은 매카트니와 협업하는데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11월 출시된 화이트 앨범은 처음으로 애플 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것이었다. 하지만 EMI가 그들의 음반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새로운 레이블은 엡스타인이 효율적 세무 구조를 세우기 위해 브라이언 엡스타인 계획했던 애플 코어의 자회사였다. 음반은 2백만 장의 선주문을 받아 미국에서 한 달이 되어 4백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수록곡은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의 플레이리스트를 점령했다. 엄청난 음반의 인기에도 당시에 호평은 들려오지 않았다. 구드가 적기로는,


평론가의 시각은 해가 지날수록 호평으로 반전되었고, 2003년에는 《롤링 스톤》에서 10번째로 가장 위대한 음반으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피치포크의 마크 리처드슨은 이 음반을 "크고 제멋대로이며, 넘실거리는 아이디어와 막무가내가 거대하고 변동심한 재료의 집합체를 이루었다 ... 이 실패는 대성공한 특색과 더불어 필수적이었다.

영화에서 데뷔한 미공개 곡들이 네 개, 《Revolver》에 담겨 이미 출시되었던 타이틀 트랙, 싱글과 미국판 《Magical Mystery Tour》 LP에 담겨 출시되었던 〈All You Need Is Love〉, 그리고 마틴이 작곡한 기악곡 6개가 담긴 《Yellow Submarine》 LP가 1969년 1월 출시되었다. 새로운 비틀즈 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올뮤직의 언터버그와 브루스 에드거는 음반이 "꼭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해리슨의 〈It's All Too Much〉에 대해서는 "새 곡들 중에서도 보석이다 ... 소용돌이치는 멜로트론은 눈부시고, 삶보다 웅장한 퍼커선, 그리고 피드백 기타가 해일이 된다 ... 흐릿한 사이키델릭 연무로 진입하는 명연주"라고 평가했다.

비틀즈는 꾸준히 불화 상태에 있었으며 관계는 개선되려 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매카트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이 담긴 싱글 〈Get Back〉을 발표하여 1위를 차지하는 기쁨을 맞이 했다. 그리고 레논은 〈The Ballad of John And Yoko〉를 발표해 1위를 하였다.

《Abbey Road》, 《Let It Be》, 해체

그 후 비틀즈는 《Get Back》 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발매하려 했지만 매카트니는 이 앨범이 마음에 들지않았고 발매가 보류되었다. 《Get Back》 앨범이 보류되자 비틀즈는 사실상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의 녹음에 들어갔고 서로 화합된 모습으로 녹음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리고 애비로드 스튜디오 앞에서의 자켓촬영을 마친 후 1969년 8월 18일에 《Abbey Road》가 발매됐고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모그 신시사이저를 폭넓게 사용한 이 앨범은 비틀즈 앨범 중 가장 세련된 앨범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앨범의 백미인 일련의 짧은 곡들로 이어지는 메들리(트랙 9번 부터 16번까지, 일명 '애비로드 메들리')는 록 음악에 드라마틱한 오페라적 요소를 결합시켜 많은 음악팬들을 매료시켰다. 앨범의 마지막 곡인 〈Her Majesty〉는 최초의 히든트랙이라 여겨진다. 1번 트랙과 2번 트랙인 〈Come Together〉와 〈Something〉은 따로 싱글로 발매, 두 곡 모두 1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Something〉은 해리슨이 작곡한 노래 중 최초의 1위곡이다. 해리슨은 이 앨범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을 통해 자신의 커다란 음악적 성장을 보여줬다. 그리고 링고 스타 또한 〈Octopus's Garden〉으로 나름대로의 음악적 성장을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성공 속에도 비틀즈의 결속력은 계속 떨어져 불화로 이어졌고, 레논은 비틀즈보다는 오노 요코와 활동하기를 원했다. 비틀즈는 사실상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미 멤버들은 각자의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놓지 않았고 보류되었던 앨범인 《Get Back》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프로듀싱을 맡기며 결국에는 《Let It Be》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1970년 5월 8일에 발매 하였다. 싱글로 〈Let It Be〉를 발표, 1위를 차지하였고 후에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싱글로 발매하여 마지막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유명한 애플 레코드의 옥상 공연이 포함된 영화 《Let It Be》가 개봉하였다.

《Let It Be》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도 여전히 멤버들 간에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멤버들은 이미 각자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다. 언론에서도 비틀즈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리고 결국 매카트니가 1970년 4월 10일 데일리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해체를 공식발표하며 비틀즈는 공식 해체되었다.

1970–현재: 해체 이후

해체 이후 공연이나 신곡을 녹음하는 등의 활동은 없었으나 1980년 존 레논은 뉴욕의 집 근처에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라는 정신병자에게 암살 당해 세상을 떠났다. 1995년 시작된 《비틀즈 앤솔로지》 기획에 맞춰 존 레논이 1977년 녹음한 미완성곡 〈Free As A Bird〉의 데모 테이프에 남은 세 멤버가 연주와 코러스를 덧입혀 비틀즈의 신곡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유일한 재결성이 되었으며, 다음해 레논의 솔로 곡인 〈Real Love〉도 1996년에 같은 형식으로 제작하여 비틀즈 버전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2001년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사망해서 더 이상의 재결성은 불가능해졌다.

2000년에는 영국 및 미국에서 음악 차트 1위를 한 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1》을 발매, 1주일만에 360만장을 판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30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3년에는 《Let It Be》 음반을 리믹스하고 보너스 디스크 〈Fly on the Wall〉을 추가한 《Let It Be... Naked》를 발매했다.

2006년에는 《태양의 서커스》 배경곡으로 사용된 악곡을 모은 《LOVE》를 발매했다. 태양의 서커스는 비틀즈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매체의 배경 음악으로 비틀즈의 원곡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 마틴과 그의 아들 가일스 마틴이 공동 제작했다.

음악

작곡자

레논과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요 곡들을 작곡했으며, 초창기에는 작곡면에서 큰 활약은 없었던 해리슨은 후기 비틀즈에서 큰 공헌을 했다. 비틀즈의 멤버는 단 한명도 악보를 볼 수 없어서, 새로운 악상이 떠오르면 데모 테이프에 기타로 주 선율이나 리프를 일단 녹음 한 뒤에 그걸 바탕으로 멤버들이 연주해가며 다듬어서 완성,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곡을 만들었고 악보에는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이렇게 악보를 보거나 쓰지 못하고 데모 테이프 녹음 방식으로 작곡을 하는 방식은 비틀즈 뿐 아니라 당시 6,70년대의 다른 주요 록뮤지션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영향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는 주로 다음 가수(그룹)에게 영향을 받았다.

  • 밥 딜런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였다. 밥 딜런은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아서 기존의 포크에 락캔롤을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눈을 떴고, 비틀즈는 딜런의 영향을 받아서 가사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Help!),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Rubber Soul)과 같은 곡에서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딜런은 뉴욕의 호텔방에서 비틀즈에게 마리화나를 처음 소개시켜 준 사람이기도 하다.
  • 엘비스 프레슬리 - 비틀즈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많은 수의 엘비스 커버를 녹음했다. 또한 다큐멘터리 앤솔리지에서 비틀즈의 멤버 4명은 프레슬리를 스승(guru)라 칭한 바 있다.
  • 척 베리 - 비틀즈는 〈Roll Over Beethoven〉이나 〈Rock and Roll Music〉과 같은 척 베리의 노래를 그들의 초기 앨범에 수록했었고, 라이브로 공연한 적도있다. 레논이 처음 베리를 만났을 때, 레논은 "척 베리!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도 있다.
  • 비비 킹 - 킹은 비틀즈에 블루스적인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은 〈Get Back〉이나 〈I Me Mine〉에서의 기타 연주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버디 홀리 -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비틀즈는 〈Words of Love〉를 녹음한 적 있다. 또한 비틀즈라는 이름이 홀리의 배킹 그룹 크리켓츠(The Crickets)에서 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Beetles를 제안했고, 레논은 이를 Beatles로 살짝 변형했다.
  • 에벌리 브라더스 -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돈 에벌리와 필 에벌리의 독특한 이중창을 모방했다. 〈Love Me Do〉나 〈Please Please Me〉는 에벌리의 〈Cathy's Clown〉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Two of Us〉는 완벽한 에벌리 스타일 노래였다.
  • 리틀 리처드 - 초기의 몇몇 곡들은 리처드의 〈Long Tall Sally〉에서와 같은 가성 스크림이 등장한다. 1962년, 리처드는 함부르크에서 비틀즈와 교제한 적 있으며, 〈Long Tall Sally〉는 초기 비틀즈 콘서트에서 꾸준히 등장했던 곡이다.
  • 초기 모타운 음악 - 비틀즈는 초기에 배럿 스트롱의 모타운 레코딩인 〈Money (That's Wat I Want)〉나 마블릿츠의 히트곡 〈Please Mr. Postman〉을 카피한 곡을 앨범에 수록한 적이 있다.

구성원

  • 존 레논 – 보컬, 기타, 키보드, 하모니카 (1960–1970)
  • 폴 매카트니 –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키보드, 드럼 (1960–1970)
  • 조지 해리슨 – 기타, 보컬, 시타르 (1960–1970)
  • 링고 스타 – 드럼, 타악기, 보컬 (1962–1970)

음반 목록

  • 《Please Please Me》 (1963)
  • 《With the Beatles》 (1963)
  • 《A Hard Day's Night》 (1964)
  • 《Beatles for Sale》 (1964)
  • 《Help!》 (1965)
  • 《Rubber Soul》 (1965)
  • 《Revolver》 (1966)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 《The Beatles》(1968)
  • 《Yellow Submarine》 (1969)
  • 《Abbey Road》 (1969)
  • 《Let It Be》 (1970)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