鎖國政策
통상 수교 거부 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

개요

쇄국정책은 말뜻은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을 말하며, 정치·외교·통상에서는 이윤의 확보나 자기 방위 및 국제적 고립 상태의 유지가 불가피할 때 외국인의 입국이나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을 일컫는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사상을 쇄국주의(鎖國主義)라고 부른다.

어떤 면에서 원조는 명나라라고도 볼 수 있다. 명나라는 영락제 때 정화의 대원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외국에서 쓸떼 없이 돈을 쓰는 뻘짓 비슷한 것이라고 후대의 평가를 받았고 (오죽하면 정화의 기록들을 돈을 낭비한 뻘짓이라고 상당수를 불태웠다)

대양으로 통상을 하거나 하는 것을 금지 시켰다. 해금정책. 이전 왕조인 원나라에 비해 중화 폐쇄적으로 전환 한 것인데.

물론 마카오를 포르투갈에 할양해 제한적으로 서양과 통상을 하기는 했다. 대부분은 마카오 같은 매우 제한 적인 곳에 한했다. 그외에는 무역이라는 것이 없고, 그냥 중화주의로 다른 나라와 조공무역 정도만 했다. 이건 청나라도 마찬가지.

청나라도 정말 제한 적인 항구만 개방했다. 서양인들은 청나라의 엄청난 통제하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서양 나라들은 청과 무역을 하기 위해 청나라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어야했다.

서양에서는 차와 도자기 등을 청나라에서 사고, 대신 은으로 결제했다. 반대로 청나라에서는 거의 일방적으로 은을 받았지 서양에서 물건을 거의 사지도 않아서 완전히 영국 등 유럽의 은이 일방적으로 청나라로 유출되는 실정이었다.

건륭제 때 이런 은유출 무역역조 사태를 보다못한 영국의 외교사절단인 매카트니는 자유로운 무역확대와 기독교 선교 허용, 또 베이징에 대사관 설치, 홍콩 등등의 무역창구 확대 및 무역을 위한 섬 등의 영토 할양 등등을 요구 했지만, 천조라 자칭하던 청나라는 하나같이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것들만 요구한 것이다.

(영토 할양도 그렇지만 영토할양은 마카오 등에서 제한 적으로 했으니 그렇다 쳐도. 베이징에 대사관 설치도 중화주의 중국만이 유일한 천자국으로 자칭했던 중국입장에서는 서양오랑캐와 동등한 관계로 수도에 대사관을 설치한다? 이것도 절대 중국 천자 세계관에서는 절대 허용하기 힘든 요구였다.)

건륭제는 중국은 땅이 넓고 모든 게 다 있다. 너희들의 조잡한 물건 따위는 필요없다. 우리들이 차와 도자기를 파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지 뭐를 더 무역을 더 하겠다는 건가? 라며 거부한다.

영국은 여러번 까였고 매카트니는 청나라를 돌면서 청나라가 실상이 어떤지 파악하는 것도 임무였기에, 청나라는 당시 이미 과학혁명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영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가난하고

(은이 일방적으로 유럽에서 청으로 유출되는 데 왜 가난하냐 할 수 있겠지만 청 자체는 나라는 컸지만, 청나라의 일반민중들은 매우 말랐고 생활수준도 영국에 비할바가 못 되었으며, 인권 같은 것도 영국에 비해 형편없었다. 영국은 당시 근대국가였고 청나라는 전근대국가였으니) 낙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국은 무력이 아니면 청나라의 문을 열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이 영프 등의 무력으로 강제로 열리게 된 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당시에는 영국에서 청나라에 팔게 아편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자랑하던 면직물 같은 것도 청나라에서는 수요가 없었다. 근데 아편전쟁 이후에는 그 아편조차 중국에서 자체 생산한다.

아편전쟁 이후에는 중국의 중화주의 외교는 막을 내리고, 중국은 서양식 외교에 편입된다. 중국은 거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사례

일본 에도막부의 쇄국정책

사실 일본은 쇄국 정책을 했다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 상인과 무역을 했고,

(네덜란드는 장사꾼 기질이 있어서 기독교 선교랑 상관없이 통상을 했기 때문. 사실 그전에는 포르투갈 등과도 무역을 했지만, 기독교가 전파되고 특정지역에서는 기독교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에도 막부에서는 기독교가 일본의 신분질서 등을 무너뜨리고 서양의 침략을 야기한다고 판단 아주 강력한 기독교 박해를 했다. 사실 이건 네덜란드에서 일부러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일본인들에게 포르투갈 재네는 기독교를 선교해서 일본을 먹을려고 한다고 막 소문을 퍼뜨린 것도 작용했다.

한때 네덜란드는 본토가 식민지가 되서 나가사키의 데지마가 유일한 네덜란드의 영토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일본이 전후에 네덜란드와의 외교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니 데지마의 네덜란드 공관을 복원해 달라고 한 적도 있다. 국권이 넘어간 네덜란드의 한 때 유일한 영토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

유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해부서가 들어와, 실제로 해부를 하니 서양의 해부서가 정확했고, 중의학의 오장육부는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이 몇년간 맨땅에서 해석한 게 해체신서다. 이후 네덜란드 학문 붐이 일어난다. 이것을 난학이라고 한다.(네덜란드= 홀란드를 화란이라고 음차했다.)

조선과 일본의 세계관이 완전히 달랐다. 조선은 그때까지도 소중화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했지만, 일본은 유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건 조선통신사와 일본인 지식인과의 대화에서도 들어난다.

조선 통신사: 일본도 소중화의 싹이 있고, 명나라를 섬겨야

일본인 지식인 : (왜 망한 명나라를 섬겨야 돼....-_-) 귀공들은 구라파(유럽)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대해서 아시오?

조선 통신사: 이탈리아 등이 어디에 있는 나라요?

일본인 지식인: 귀국에는 세계지도도 없소?

거짓말 같은데 실제 필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기록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13/2019031300027.html

일본의 문을 연 것은 미국의 페리제독의 흑선 쿠로후네다. 쿠로후네의 개항이후 약 100년 이후 일본은 연합국 미국에게 항복한다.

일본은 미국의 힘으로 문이 열렸고, 또 미국의 막대한 힘으로 패전하여 항복한 것이다.

미국은 상징적으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되는 도쿄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함에 100여년전 페리제독에 전함에 걸렸있던 성조기를 공수해 와 걸어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조선의 문을 연 것은 강화도 조약이다. 운용호 사건이다. 페리제독에 의해 문을 연 것과 똑같이 한 것인데.

일국사 역사를 가르치는 한국의 역사 교육에는 일본이 그냥 페리제독의 방식 그대로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의 문을 열었다 이게 침략의 시작이었다. 이렇게만 가르치는데, 사실 이건 영국이 일본에 시킨거다. 영국은 당시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를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가 호심탐탐 노릴 것 같은데, 일본에 시켜서 조선에 제발 러시아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도 전혀 알아 듣지를 못하니,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에게 사주해서 조선을 연 것. 이후 영국의 거문도 조차, 러일전쟁, 한일합방 등의 일련의 사태도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는 영국과 미국 등에 지원과 의중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등등 있었지만, 전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던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프랑스 입장에서는 조선은 뜯어 먹을 게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그래서 러시아가 먹게만 안하면 일본이 먹던지 말던지 신경도 안 쓴 것 차라리 러시아가 먹을 바에는 일본 니네가 먹어라 한 것. 러시아는 부동항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원했기에 서구열강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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