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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후기
최근 수정 : 2019년 11월 6일 (수) 00:39


고마츠 사야카 지음.
2019년 7월 5일 지은이의 희망대로 무료배포됨.
출처 : 살롱 (남성의 억울한 성범죄 누명을 해결하기 위한 법률 지원 관련, 클라우드 펀딩 방식)

악플후기 무료배포 안내

시일이 많이 지났음에도
꼭 읽고 싶다는 요청이 많아 무료로 배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구매자여러분께 사과드리며 양해를 구합니다.

부족한 책이지만 읽어보시고 의견도 적어주세요.
비판도 좋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라면 고치면 되니까요.

'나'라는 개인의 기분이 아닌,
사회의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독자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그러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

  1. 처음 읽는 분들께#

한 분, 한 분 감상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무언가 전해지는 것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오늘부터 한 파트씩 공개하고 책에서 못다 한 말도 해보려고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2019년 7월 5일 さやか올림

책에서 다 못한 이야기와
앞으로 책으로 나올 글도 올리고 있으니 읽어주세요.


머리말

책 한 권으로는 도저히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장치들이 대한민국 여성으로 하여금 생각을 멈추게 만들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하여도 비판을 받는 현재의 한국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악플을 받은 것이 억울해서도 아니고 남녀갈등을 부추기자는 것도 아니다.
서로 비방하고 있는 한국의 남녀에게 거울을 비춰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군자는 제 탓을 하고, 소인은 남을 탓한다는 말이 있다.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스스로를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손잡고 함께 나아가야 할 파트너다.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한국이 나는 두렵다.


1장 내 눈으로 본 한국사회

1-1 기는 한국남성, 나는 한국여성

내가 한국에 처음 왔던 때가 2001년이었다.

간판이 한글인 것을 빼면 한국의 첫 인상은 그다지 외국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달랐다.
한국남자들은 상당히 매너가 좋았고 여성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여성을 배려해주는 사회적 분위기에 길을 걸으면 마치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스무 살이던 나에게 자리양보를 해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반면 한국여자들은 무척 활기차 보였는데 부부나 연인을 보면 여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모습이 일본과는 무척 달랐다.
싸울 때도 여자가 큰 목소리로 꾸짖는 경우가 많았고 남자가 잘못을 빌거나 무릎을 꿇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 당시 한국여성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당당한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른 편으로는 두려움이 일어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을 소개하는 책에서 ‘한국은 유교의 나라이기 때문에 남존여비다’ 라는 부분을 읽고 내심 걱정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마침 당시 개봉했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관람하고 나는 너무 놀랐는데 한국사람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영화 하나로 그 사회를 전부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문화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법인데 막무가내인 여자주인공은 물론 그것을 받아주는 남자주인공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서 한국친구들에게 물으면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볼 뿐 여자들도, 남자들도 ‘당연하고 별 이상한 것이 없다’ 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여자가 강한 것이 같은 여성으로서 좋은 일 아니냐고 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외국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목욕탕같이 여자들만 모인 곳에서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한국아줌마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정말 무섭고 한국어를 알아듣게 되면 그 공포는 줄어들기는커녕 몇 배 커진다.

당시 한국생활을 먼저 시작한 일본친구로부터 한국에서는 여자와 시비를 피하고 심지어 교통사고가 나도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나야 한다는 농담까지 들을 정도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젊은 여자에게 자리양보를 해주는 남자들은 분명히 없어졌지만 여전히 한국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작고 여성들 사이에서는 ‘센언니’ 라는 말이 유행하고 호응을 얻고 있어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인천의 한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혼 낸 아저씨와 아이의 엄마가 싸우는 모습을 봤다.
아이의 잘못이니까 먼저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라고 아이와 같이 사과를 했다면 금방 끝날 일이었는데 아이가 다 그렇지 아저씨는 어릴 때 안 그랬냐고 따지는 적반하장 공격에 아저씨는 전투의지가 완전히 꺾여버린 듯 허탈한 표정만 지었고 엄마는 아이와 함께 당당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잠깐, 지금 말이 바뀐 것이 아닌가?’
‘어릴 때 아이가 다 그렇지요’ 라는 말은 아저씨가 사과를 받고 건네는 말인데 오히려 아줌마가 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말을 미리하고 너는 안 그러냐는 피장파장식 공격은 한마디로 말하면 답이 없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인 내가 이런 경험을 말하면 한국여성들은 불쾌해하며 여러 가지 항변하는데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에 억눌렸던 여자들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여자들이 전부 그렇지는 않고 특이한 케이스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같은 느낌을 받은 외국인들이 너무 많다. 나뿐만 아니라 외국인친구들도 하나같이 한국여성들의 모습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물론 모든 한국여성이 그렇지는 않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사회전반에 그 특이한 여성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그런 행동이 허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과거의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은 일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제 30대 초중반인 여성이 어렸을 때 남녀차별을 당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설사 당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적반하장인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 세대부터 차별이 심해서 그렇고 시대가 바뀌었는데 조용한 일본여자들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끝까지 막무가내인 아줌마를 옹호한다.

자기가 당한 것도 아니고 그 전 세대의 차별을 대신 갚아 복수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를 잇는 원한에 대응할만한 논리는 딱히 없기 때문에 나는 질문을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여성도 가정이 아닌 사회에 나왔으니 현대적인 교양과 매너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야 가족이니까 용서되는 부분도 있지만 익명의 사회에서는 그저 민폐일 뿐이다.

1-2 온 나라가 여성모드

한국에 15년째 살고 있는 나에게 누가 한국은 남성중심의 사회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성이 차별당하고 있는 현실이 보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사회의 무게추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기울어져 있다.
현재 내 눈으로 본 한국은 여성우대사회이고 남성냉대사회이다.

개인적인 부분으로는 일본에 다녀온 한국여성들은 일본남자가 가방을 들어주지 않는 등 여성에 대한 사소한 배려가 없다고 역시 한국남자가 더 낫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한국에 다녀온 일본여성들은 하나같이 한국남자들의 끝없는 친절함에 감동받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다.

일본남성들이 매너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남성들이 여성에게 배려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남성들의 행동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자로서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또 가끔은 고마움과 미안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져서 불편할 때도 있다.

분명 타인에게 배려를 받으면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지만 긴 세월 그것이 관습이 되어버리면 당연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비교를 하게 되어 누군가 어떤 여성의 발을 한번 씻겨주었다면 그것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남성들의 부담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다음 사회적인 부분으로는 먼저 한국은 헌법부터 여성우대이다. 헌법34조 3항의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와 헌법 32조 4항을 보면 ‘여성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라고 쓰여져 있다.

이와 비슷한 항목의 일본국헌법을 보자.
헌법 제 3장 제 14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아래 평등하며 인종, 신조, 성별, 사회적 신분, 또는 문벌(가문)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와 제 27조 2항 ‘임금, 근로시간, 휴식 그 외의 근로조건에 관한 기준은 법률로써 정한다.’ 3항 ‘아동은 혹사당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쓰여져 있다.

일본과 다르게 한국은 헌법부터 모든 국민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조항이 따로 존재한다. 또한 경찰학개론을 보면 사회적 약자부분에 ‘장애인, 19세 미만의 자, 여성, 노약자, 외국인, 기타 신체적 경제적 정신적 문화적인 차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자’ 라고 쓰여져 있다고 한다.

경찰인 한국친구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외국인이 왜 모두 약자인가’ 라고 물었다. ‘소수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대답해주었지만 명쾌하게 납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구의 절반 이상인 여성이 전부 약자라면 약자로 만드는 것은 결국 남성이라는 말이 되고 남성은 강자란 말인가?
그렇게 남성은 강자이자 약자를 괴롭히는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이렇게 헌법부터 ‘여성’이라고 확실히 명시되어 있어서 그런지 한국은 여성모드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전용시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전국 각지에 각종 여성전용시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데 이를 바라보는 한국남성들의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다.

‘강자니까 그 정도 호의는 괜찮은 걸까?’

대표적으로 여성전용 주차장과 여성전용칸을 예로 들어보자.
몇 년 전 마트에서 이 분홍색 주차장을 보고 놀라서 남편에게 이것이 뭐냐고 물었다. 남편은 여자들이 주차에 서툴고 마트 주차장에 범죄가 있다고 만든 것으로 뉴스에서 봤다고 대답해주었다.

주차에 서툴면 철저하게 연습하면 되는 것이고 범죄의 위험이 있다면 조명을 밝히고 경비원을 늘리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범죄예방만을 위한 것이라면 왜 휴게소 주차장에도 장애인전용 바로 옆에 여성전용이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한국이 대낮 노상에서 강도가 빈번한 나라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지하철 여성전용칸의 경우 일본에도 존재한다. 물론 많은 비판을 받고 있고 여성들 또한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한 젊은 여성 작가는 인터뷰에서 여성으로서 여성전용차량이 편하지만 한편으로 남성들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고 한다.

또 남성들 또한 치한 원죄를 당할 수 있고 그 피해자 수는 여성보다 적지만 숫자만으로 여성이 피해가 더 크고 남성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므로 남성 전용 차량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명 작가가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한다면 즉각 매장당하고 불매운동으로 생계마저 위협당할 것이다.

한국도 일본처럼 성범죄의 경우 여성의 진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원죄 피해자인 남성 또한 배려해야 하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한국에서 남녀 편가르기로 이런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여성전용의 문제는 일본에서도 남성들이 비판하는 문제로 그 제도를 비판하고 조롱하고 있는데 한국처럼 남녀갈등이 심한 지금 계속 이런 전용시설이 생길 경우 앙심을 품고 그곳에 누군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여성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 할 것이다.

사고가 나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남자는 행동으로 즉각 대응하지만 여성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첫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진화심리학에서는 여성은 본능적으로 남성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또 한국사람들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잘 돕는다.
2001년 도쿄, 한국인 유학생이었던 故 이수현씨가 일본인 취객을 돕다 유명을 달리한 일은 아직도 일본에서 매년 추모행사가 열릴 만큼 대단한 희생정신이었다.

그 정신은 요즘도 이어지고 있는데 블랙박스로 사고현장을 공개하는 프로그램에서도 한국사람들은 하나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길로 나와 구조를 하는데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정말 대단하고 부러운 국민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의로운 국민을 가진 지도자들은 왜 자꾸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같이 여성전용이 자꾸 생기면 남성들은 마음을 닫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되어버릴 것이 자명하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것은 다름아닌 여성이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 위험한 장소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고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에 약간 생각을 비틀어서 여성전용이 아닌 아이를 가진 사람을 위한 주차장, 지하철이었다면 이런 반대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사회구성원 누구나 인정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마트 주차장에서 작은 아이가 교통사고의 위험이 더 높은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은 약자가 아니고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위험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여성들이 먼저 나서서 내가 편해지는 만큼 남성이 불편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대의 입장도 대변해주어야 할 것이다.

제도의 시행에 앞서 약자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3 갈등공화국

한국은 갈등이 심한 나라라고 한다.

OECD내 최상위권이고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비용은 연간 250조가 된다고 하니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갈등은 어느 사회든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인종과 종교적 갈등이 없는데도 한국의 경우 그런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니 상당히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좌우, 빈부, 세대, 지역갈등에 이어 최근에는 남녀갈등까지 생기고 말았다.
문제는 이 남녀갈등을 보는 시각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어떤 갈등에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딪쳐서 생긴 것인데 이것을 오로지 남성의 여성혐오로 돌리고 있다. 여자와의 경쟁에서 뒤쳐진 남자들의 좌절감이 원인이라고 한다. 전문가들도 죄다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문제를 진단하니 해결방법이 나올 리 만무하다.

한국의 갈등을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안타까운 부분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선과 악의 개념으로 문제를 판단하고 외부로의 비판에는 혐오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내부의 성찰에는 인색한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만 접근해서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중점을 두기보다 상대방을 공격하고 자신이 믿는 가치관을 성역으로 만들어 외부로부터의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 게다가 언론은 자극적인 단어로 부추기고 정치인은 특정 집단의 편을 들어 불 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남녀갈등의 경우 여성의 목소리가 큰 한국에서 언론과 정치인이 항상 여성의 편에 서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지난 5월 발생한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에서 추모의 의미는 퇴색된 채 시민들은 둘로 나뉘어 쓸모 없이 힘을 소모해야만 했고 언론은 스피커를 틀고 갈등을 조장했고 정치인들은 인기를 얻기 바빴다.
해결이 되기는커녕 불신의 골만 더 깊어진 느낌이다.

고성이 오고 갔고 약자의 폭력을 추모한다는 사람들이 자신과 입장이 다른 약자를 집단 린치하는 2차 사고까지 생겼다.
한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잘잘못보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소동이 있어야 사회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준다고 믿는 것 같지만 옳지 못한 방법이다.

진정한 해결 방법은 서로에게 배려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반대입장도 한번 정도는 들어줘야 훨씬 더 우아한 방법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 남녀갈등의 경우 집단 간의 불신과 집단 내의 과도한 욕심이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에 인색하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진다. 지역 감정이나 이념 갈등도 문제이지만 그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 바로 배려 부족으로 빚어지는 이런 일상의 갈등이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기적인 선동에 빠지는 것은 무언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착각과 문제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해결을 위한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4 갈등의 뿌리는 불신

십여 년 전 모 대학 교수님께서 한국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라고 하셨다.

당시 나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학업을 마치고 한국 사회에 나온 지금은 이해하고 그런 것을 종종 일상생활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

주말이 되면 한국친구들과 맛집 탐방을 자주 다니는데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국밥집은 큰 가마솥을, 횟집은 큰 수족관을, 족발집은 족발을 삶아 밖에 두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나에게는 정말 어색하다.

가마솥을 전면에 내걸면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비효율적이고 족발을 밖에 두면 위생상 좋지 않고 수족관의 활어보다 숙성시킨 선어가 맛있는데 굳이 수족관을 설치하고 활어를 판다.

게다가 바다에서 도시까지 운반도 살아있는 상태로 해야 하니까 불필요한 비용으로 가격이 올라 소비자에게 부담인데다 맛없는 활어를 먹지만 횟집 주인도 소비자도 수족관을 원한다. 그리고 가끔 얼굴사진에 이름까지 내걸고 정성 들여 만들었다고 일부러 쓰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말까지 붙여 놓는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것인가?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먹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에 좀처럼 수저질에 힘이 붙지 않는다. 이것은 작은 불신으로 빚어진 해프닝이지만 작은 예라서 오히려 불신의 뿌리가 더 깊다고 느낀다.

나는 최근 남녀 사이의 갈등의 뿌리에는 불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갈등의 원인인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저소득 남성의 출현, 물질적인 조건을 따지는 여성의 증가일지 몰라도 그 기저에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본다.

믿지 못하니 결국 물질밖에 믿을 것이 없게 되어 남자가 마치 식당의 수족관이나 가마솥처럼 많은 것을 보여줘야 사랑이 시작되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만나 본 수많은 한국남성들은 진정한 남녀 평등을 원한다고 토로했고 기회의 평등에 대해 반대하는 남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국남성은 이미 가마솥을 치웠으니 한국여성 또한 여성만을 위하는 페미니즘 따위 버린다면 점차 신뢰는 회복될 것이고 남녀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1-5 여성가족부와 군가산점

‘여성가족부’


원래 ‘여성부’ 였는데 ‘여성가족부’ 라고 했다가 다시 여성부 바꾸었고 또 다시 여성가족부로 바뀌어서 명칭이 상당히 혼란스러운 이 기관은 장관급이고 이 정도 규모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영어로는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인데 한국어에는 ‘여성’이 들어가 있는 것이 일단 의문이다. 일본에 비슷한 기관으로 ‘남녀공동참가국’ 이라는 기관이 내각부 산하에 있다.


한국의 여성가족부는 추진하는 활동과는 별개로 많은 비판을 받는데 그 이유는 일단 명칭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일본처럼 남녀를 모두 기재하거나 영문명과 같이 양성평등이라는 단어를 넣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게다가 한국에는 정부지원을 받는 여성단체가 500개가 넘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 단체들이 하루에 하나씩만 불만을 말해도 365일이 모자라니 한국남자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다.


한국정부는 헌법에 쓰여진 사항을 꽤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니까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가히 여존남비의 국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여성부 폐지를 내세웠으나 여성단체와 야당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최초의 여성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여성으로서 설득하여 폐지하면 남성대통령보다 큰 논란 없이 좋은 모습이겠다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전혀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기관을 설립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재정이 투입되고 큰 권력의 자리가 생기면 목표가 달성되어도 쉽게 없애지 못 하기 때문이다.

목표가 달성되면 또 다른 목표를 찾아야 하고 태생부터 여성을 대변하는 기관이니 남성은 배제되거나 남성을 옭아매는 정책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것은 분명히 남성을 차별하게 된다.
게다가 여성부는 장관이라는 큰 자리가 생기는데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을 감히 쉽게 건들지 못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올바름 강요/왜곡(Political Correctness, 퍼온이가 세부적으로 변경함)보다 자기 신념이 강해서 비판도 많이 받고 지지도 많이 받는 미국의 유력한 대선후보인 트럼프 같은 인물이 한국에서 나오기 전에는 없애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여성부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부산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교양 수업으로 ‘여성학’ 이라는 과목을 선택했는데 당시 여성부가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수업이 아니라 마치 여성부 홍보장과 같았다.

수업도 선민사상으로 남학생들을 집중 포화하는 내용으로 죄의식을 부추겨 남학생들은 매시간 고개를 숙여야만 했고 항상 기승전남자탓으로 귀결되는 수업에 나는 전혀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피해의식도 이 정도면 학문을 떠나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했다.

그런 수업에서 한 용감한 남학생이 군가산점 문제를 발표에 들고 온 것이었다. 나는 그 날 처음 알았다.

군대를 다녀와도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을…
단순한 생각으로 징병제니까 당연히 그에 합당한 월급과 제대 후 각종 보상이 주어지는 줄로만 생각했다.

남학생은 폐지된 군가산점의 부활에 대해 여성들도 찬성해줘야 한다고 부드러운 말투로 호소해 나갔다.

발표 후 질문시간에 중년의 여교수를 포함한 여학생들의 반론이 이어졌고 긴 시간 1대 10으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어가 서툴러 모든 수업을 테이프로 녹음해서 수 십 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쇼크를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그 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들의 주요 반론은 ‘한국은 여성차별이 심하다, 군가산점도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다, 군대를 가지 않는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피해를 보고 같은 만점을 받으면 여성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없다’ 였다.
결과는 남학생의 참패였다.

결정적인 패인은 같은 남학생들 또한 여자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생활 초기여서 나는 발표자가 왜 제대로 반박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또 왜 남자들도 여성의 입장만 옹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느낀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남자들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무슨 보상인가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식이었다.

한 남학생은 발표자를 향해 조롱 섞인 말투로 지금이 조선시대냐 21세기에 여성을 차별하냐고 따져 물었고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자리에 앉자 옆의 여자친구 또는 동기로 보이는 여학생은 잘했다고 엄지를 치켜세웠고 그 남학생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스무 살의 나는 당시 웃음 가득한 그 남학생의 모습을 서둘러 노트에 한 문장으로 기록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정육점을 섬기는 돼지’

1-6 나 세금 냈어

서초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국친구는 소위 진상손님에게 자주 시달린다고 한다.
자영업자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그 빈도가 너무 잦아서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라고 한다.

일본에도 없는 현상이 아니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은 일본과 같은 접객 실수로 인한 불만보다 내가 돈을 냈으니 어떠한 요구라도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손님이 왕이다’ 니까 ‘주인은 하인이다’ 라고 곡해하는 것일까?
이 현상의 연장선으로 한국에서는 공무원에게 불만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세금 얼마 내는지 알아? 내 세금으로 너희들이 먹고 사는 것이다.’

확실히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세금을 내니까 타당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듣는 입장에서 유쾌한 말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듯 비슷한 예로 친하게 지내던 한국친구가 분당경찰서로 부임 받아 근처 지구대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만나기로 약속했고 나는 지구대가 궁금해져서 근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지구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예상했던 분위기는 동네를 지키는 작고 조용한 일본의 코방(交番-지구대)를 상상했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초저녁부터 음주운전을 한 아저씨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고 경찰관들은 그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퇴근하려는 친구를 붙잡고 어디로 도망가냐고, 내가 세금 얼마나 내는지 알고 있냐고 마치 하인 대하듯 따졌다.

‘그 놈의 세금'이라는 말이 또 나왔다.
도대체 세금을 얼마나 내길래 저러는 걸까?
내가 알기로 한국은 조세부담이 낮고 근로자의 절반 가까이가 세금을 안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실랑이 끝에 겨우 빠져 나왔지만 친구는 우울해했고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해 보였다.
휴대폰 바탕화면의 ‘국민을 위한 경찰’이라는 메시지를 멍하게 응시하면서 힘없이 말했다.

“그래도 저 정도면 양반이야. 저번엔 한대 맞았어. 좋게 끝내야지 괜히 민원이 들어오면 상당히 골치 아파”

일본에서는 취객이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경찰의 권위가 강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요즘은 예전보다 취객에 대한 대응이 강경해졌지만 여전히 상대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내 돈 또는 세금으로 너희들이 먹고 사니 무엇을 해도 좋다는 의식이 왜 개선되지 않고 개인 식당부터 국가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일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부 개인의 일탈로 겨우 이해를 한다 해도 나에게는 절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대한 비하이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군인들이 식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국민의 세금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한다는 장면이었다.
나에게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말이었지만 같이 시청하는 남편은 웃기만 했다.

“저 말이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물었지만 남편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군인들이 청춘을 희생해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데 박봉인 것도 모자라 밥조차도 세금이니 고마워하면서 눈칫밥같이 먹어야 하는 건지, 국민들이 세금을 더 내서 어떻게 하면 더 질 좋은 밥을 제공할지 생각해도 모자랄 판인데…

내가 예능을 보고 두 번째로 화가 나던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유행어, 두 번째가 바로 그 날이었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예능을 다큐로 보면 어떡하냐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었는데 일본 예능은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기 때문이다.

‘나 혹시 프로불편러? 그래도 군인인데… 방송인데…’ 라며 얼버무렸지만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군인에 대한 비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내가 군인 문제에 민감한 것은 얼굴도 모르는 대학 선배가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다. ‘불쌍하다 또는 개죽음이다’ 라고 별 일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이거야 말로 ‘복불복, 나만 아니면 돼~’ 가 아닌가. 물론 뉴스에도 어디에도 그의 죽음은 실리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다 죽었지만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다. 군대를 다녀 온 남자들조차 이런 반응이 대부분인데 여자 입에서 군인은 집 지키는 개라고 비하하는 말이 나올 만했다.

스시녀와 김치남 만화에서도 예비군 만화에 이어 카페에 예비군과 군인의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는 에피소드 글을 올렸을 때 한 한국여성이 보내온 메일을 잊을 수 가 없다.

‘니가 뭔데 쪽바리 주제에 군인 어쩌고 저쩌고 말하냐’

나는 ‘크게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할 젊은 남성들이 너무 불쌍하고 미안해서 그렇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지만 분명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고 처우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라고 짧게 답변을 보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지랄하고 자빠졌네’ 였다.
나의 허탈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한국남성들도 자신의 희생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험난해 보인다.
나는 한국사람들 모두 군인을 존경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다.

십 년 전쯤부터 해오고 있는 것은 군인에게 자리양보하기인데 군인들이 여자인 나에게 자리양보를 당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만 빼면 꽤 보람 있는 일이다.
사실 맥심이라도 사서 종이가방에 넣어주고 싶지만 성희롱으로 고소당할까 무서워서 못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실천하고 있는 일은 휴가 나온 군인이나 예비군에게 아들과 함께 말을 걸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아주 작은 일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좀처럼 군인을 보기 힘들어서 가끔씩 찾아오는 잠깐의 대화이지만 역시 군인과의 대화는 즐겁다.

나는 그저 군인들이 조롱이 아닌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고 군인들의 이야기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을 뿐이다.
여자이고 외국인인 내가 절대 경험하지 못 할 것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지만 힘든 경험을 이겨내서 그런지 본받을 점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전 전쟁을 했고 현재까지도 휴전 중인 국가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군인의 처우가 좋아야 하고 모든 혜택의 최우선순위에 서야 할 텐데 왜 군인들을 소모품 정도로 보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한국사람들로부터 많이 듣지만 이 말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유효하다.

1-7 정치적인 국민

‘일본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정치후진국이다’

한국에 살면서 참 많이 듣는 이야기다.
일본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정설로 꽤 많이 퍼져있는 한국이지만 일본사람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일본인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깊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나도 위와 같은 경우이다.
10대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철학을, 20대 때는 한국어에 빠져 언어학을, 30대 때는 남편의 이야기에 맞추기 위해 경제를 공부하고 있지만 부끄럽게도 정치에 관한 책은 고전 몇 권밖에 읽지 못해 아직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가끔 질문만 할 뿐 따라가지도 못하고 괜한 핀잔만 받는 경우도 많다.

반면 한국은 세대불문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느낀다.
심지어 중고등학생도 집회에서 대통령 욕을 하며 정치적인 발언을 거리낌없이 하고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일본 총리 이름도 몰랐던 나는 나라를 걱정하는 같은 또래의 한국친구들의 모습에 감탄을 하였다.

사람에 따라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 다툼도 일어났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모습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다만 가끔 곤란한 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대통령 어떻게 생각해?’
지금까지 故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박근혜 현 대통령까지 벌써 네 번의 대통령을 보며 살아왔지만 정말 곤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한국의 대통령은 임기 중에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별로라고 말을 한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공감을 얻을 수 있지만 그래도 타국의 대통령을 비판한다는 것은 외국인주제에 주제 넘는 발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모르겠다고 얼버무린다.
이처럼 정치가 일상으로 다가오니까 곤란하기도 하고 피로하기도 하다.

지난 1월 어느 날 나의 일본어 카페를 통해 ‘보수인 우리를 미워하지 마라’ 는 분들과 ‘쓰레기들을 쫓아내라’ 는 분들의 메일이 쏟아졌다.
나에게는 모두 같은 한국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는 ‘당신도 쓰레기를 강퇴 안 시키니까 같은 쓰레기다’ 라며 일본인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메일을 보내고 탈퇴하는 경우도 하루에 대여섯 명 정도였다. 인터넷을 많이 하지 않아 전후 사정을 모르고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고 탈퇴하는 사람들 생각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책을 만들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책을 만든다는 글을 쓰면서 한 때 남성연대를 이끌고 남성인권운동을 했던 사회운동가인 故 성재기씨를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차분하게 설명을 해준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즉각 수정하고 사과하라고 항의메일을 보내왔다. 이유는 내가 언급한 분이 자신의 정치관과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정치인이라기보다 신념이 목숨보다 커서 단명한 사회운동가였고 육아를 할 때 방송에서 몇 번 봤는데 그의 주장이 공감이 되어 언급한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소용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놈이라서 절대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 결과 인터넷에서는 말이 재생산 되고 와전되어 나는 고 성재기씨를 매우 존경하고 그의 정치관까지 존경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출판 전이었던 이 책은 이미 볼 것도 없는 벌레들을 위한 책이라는 말도 들었다.

항상 친근한 한국사람들이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정치만 연결되면 이렇게 무서워진다.
이 정도면 가히 정치병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직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가 동인과 서인이라는 정치적 입장에 의해 달라졌다는 대학 때 배운 수업내용은 12년 만에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한국 남성들이 파벌로 서로 뭉치기 힘들고 어떤 좋은 의도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길이 막막했다.

1868~1869년 일본에서는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 보신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일어났다.
막부파는 홋카이도까지 밀려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막부파의 수뇌인 에노모토 타케아키는 패배를 예견하고 상대편인 정부군에게 한 권의 책을 보냈다.

그 책은 ‘만국해율전서’ 라는 국제 해상법과 외교에 대한 네덜란드 책을 직접 번역해 단 한 권 밖에 없는 귀한 책으로 자신이 전쟁에서 지면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 마지막 전투 직전에 적군 수장에게 넘긴 것이다.

비록 적이고 정치 신념이 달라서 전쟁까지 치르고 있지만 결국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1-8 선비의 나라

한국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 한다.
스스로 왕의 후손이고 대단한 명문가의 후손의 몇 대 손이라고 하며 나에게 무슨 집안 출신인지 묻기도 한다.

나의 조상은 역사책에도 몇 줄 나오는 유명한 사무라이의 장남인데 전투에서 패배해 현재 살고 있는 나가노 현으로 피신 왔고 현재까지 살고 있다고 대답하면 “양반처럼 학식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무라이라니 천한 출신은 아니네” 라며 급이 맞는다는 식으로 인정해준다.

실제 양반 출신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한국사람들은 양반처럼 체면과 명분 그리고 학식을 상당히 중요한 소양으로 여기고 있으니 양반이라는 타이틀은 21세기 현재까지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양반 중에서도 무반보다는 문반인 선비를 뜻한다.

그런 선비들에게도 단점은 있는데 선비들은 평생의 글공부로 학식이 뛰어나지만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상당히 명분을 중요시하는 단점도 있는데 실제로 한국의 제도나 규범들을 보면 선비식이 많다.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쁜 것도 없앤다.

너무도 아름답고 이상적인 말이지만 이 말을 제도화하기 위해 정책을 내고 법을 만들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생긴다.

한국사람들은 체면 때문인지 나쁜 사람으로 몰리기 싫어서인지 현실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과 명분으로 치장한 아주 높은 기준의 이상적인 법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년 전에 블로그에도 썼던 이야기인데 예를 들어 담배는 나쁜 것이고 피해를 주니까 길거리나 건물 내에서는 금연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흡연자의 권리는?” 이라고 물으면 “사야카 너 담배피지?” 또는 “흡연자 따위에게 권리가 어디 있어?” 라고 감정적으로 나를 몰아세우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도 흡연을 즐길 엄연한 자유가 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당시에는 흡연자들이 금연구역을 피해 온통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고 화장실에서도 몰래 피는 등 비흡연자인 나는 오랫동안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

법을 만들 때 예상 가능한 부작용 정도는 생각해서 곳곳에 흡연실을 확충 한 후에 그쪽으로 유도하는 것은 왜 생각해보지 않는지 모르겠다.

여러 접근법이 있을 텐데 유독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부작용은 각자 양심에 따라 ‘네가 틀리다, 내가 옳다’식으로 해결해야 하니 결국 애매한 법으로 양쪽 모두 고통 받을 뿐이다.

성인 비디오나 매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성인이 성인 동영상을 자유롭게 보는 것을 국가 차원에서 막는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워닝이라는 화면이 나왔을 때 나는 경찰이 방문하는 줄 알고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실토한 적도 있다. 게다가 여성단체에서는 야동을 보면 공격성이 증가하거나 야동을 보는 남성은 더럽다거나 하는 말로 남성들을 희롱한다.

특히 야동이 남성의 공격성을 증가시키는 말은 너무 터무니 없다. 평범한 남성이 야동으로 망상이 생겨 범죄를 저지른다? 백 번 양보해서 만약 그 명제가 참이라면 오버워치 게임을 하면 테러리스트가 되고 스타크래프트를 하면 우주전쟁이라도 일으킨다는 말인가? 못 보게 하면 더 집착하고 욕구불만이 생겨서 공격성이 증가하지 않을까?

야동의 남녀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면 올바른 남녀관계를 캠페인하면 되는 것이고 과도한 게임시간이 문제라면 건강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유도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부모와 같은 왕정국가도 아닌데 아직까지도 국민을 통제하고 계몽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인가.

성매매라 불리는 매춘의 경우도 그렇다.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인데 옳고 그름과 불법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여성의 성이 상품화 되었다는 것은 여성의 신체가 상품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남성의 신체는 어떤가?

여성보다 힘이 세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하고 있고 산업재해 사망자의 90%이상이 남성이다.
남성도 자신의 육체가 상품화되어 희생당하고 있는데 이런 것에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여성의 성상품화에만 도덕을 씌어서 성역화하여 터부 시 하는 것은 여성에게 히잡을 강제하는 이슬람국가와 다를 바 없다.

여성을 숭배하자는 건지, 상품화(공급)을 제한해 떨어진 가치를 억지로 높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순결을 강요하는 것이 훨씬 유용한 방법이다.

대부분의 남녀가 이성에 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적절한 수준에서 상품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마케팅의 하나로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에도 선과 악 개념을 대입해 갈등을 부르고 있다.

이러니 창녀조차 성을 구매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하고 성을 구매한 남자는 처벌하고 성을 파는 여자는 피해자니까 재활훈련까지 시켜주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까지 일어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여성은 피해자, 피해자는 선하다’ 라는 이상한 명제를 깔고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 대단히 여성친화적이고 도덕적인 나라로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나라이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하겠다고 나서는 여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데 무작정 불법으로 규정하니까 미국, 일본, 호주로 수십만 명의 창녀들이 원정 매춘을 간다.
국민소득이 3만불에 가까워지는 나라에서 창녀를 수출한다니 국가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돕는 것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일을 하는 청년들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보통 여성들은 단순히 상품화라는 단어의 거부감으로 야동이나 매춘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순기능도 있고 여성들에게 좋은 점도 있다.
일단 공격성이 증가하기는커녕 성범죄가 줄어 들기 때문에 더 안전해진다.
합법인 나라와 불법인 나라의 성범죄율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무엇보다 창녀와 일반여성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
창녀는 몸을 팔지 사랑을 나누지 않는 반면 보통 여성은 사랑을 하고 인생의 파트너를 원한다.
그러므로 성을 쉽고 사고 파는 사회일 수록 허무한 매춘보다 순수한 사랑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스스로가 남성과 연애하고 결혼할 때 창녀와 같은 물질적인 가치로 남성을 고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랑, 이해, 배려라는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이 사회에 사랑이 실종되었다면 기를 쓰고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창녀와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는 개인이나 한 쪽 집단의 호불호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불법으로 억누르기만 하니까 욕구가 더욱 왜곡되어 올바른 성의 가치는 퇴색되었고 오직 배설의 기능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런 성문제를 이야기하면 ‘성’진국 여성이라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사람들이 조금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한국남성들에게 군인들은 2년 넘게 갇혀서 사는데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군대에는 그것을 어떻게 배려해주는지 물은 적이 있다.

다들 내 질문에 황당해했고 그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남성들의 욕구는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군인은 인간이자 남성이지 가두리 양식장의 생선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본능과 욕구가 있다.
그 마음을 무시한 법은 반드시 왜곡을 낳게 된다.
흔히들 성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요즘 유행하는 먹방도 어떤 의미에서는 야동이 되는 것이니 금지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 그만 갓을 벗어 던져도 좋다.

1-9 눈치 보는 전문가

현재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고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전문가들은 흔히 486세대라고 불리는 기성세대이다.
나는 이들 중 대다수가 소심한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격동의 시대를 슬기롭게 거쳐왔다면 2030세대에게 전문가 또는 인생선배로서 가치 있는 조언을 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도 모자라 집,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세대가 나오고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나 때는 말이야’ 라는 말로 젊은이들을 병약함을 탓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위로나 주고 자신의 자식에게는 자신처럼 고생하고 살지 말라고 가르쳐 왔으면서 익명의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처럼 노력해보라고 하는 모순을 보여 안 그래도 힘든 젊은이들을 더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세대격차가 심한데 사토리세대라고 득도한 세대라는 의미이다.
이미 모든 것을 깨달아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신조어를 보면 지금은 한일 양국 모두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들은 한가지 더 나쁜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남녀갈등에 대한 그들의 포지셔닝이다.
언론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남성에게는 안중도 없고 오직 여성의 입장만을 대변한다.

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각계각층의 한국 기성세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수, 임원, 사업가, 관료, 작가, 기자 등 50대가 넘어 높은 지위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 보았다.
굉장히 괜찮은 생각을 가진 분도 있었지만 다수가 별일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아들을 둔 여성들이 젊은 남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고 남성의 경우에는 실망스러운 대답을 많이 들었다.

남녀갈등의 원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경제력이 없는 남자의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이 분노로 표출 되었다는 둥의 딱딱하고 명사적인 표현으로 전문가의 티를 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굳이 뭐 하러 여자와 싸우냐고 하거나 더치페이 몇 푼 가지고 쩨쩨하게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도 있었다.
내가 여성이라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심각할 정도로 여성의 입장에 치우쳐 남성 비하적인 발언을 많이 쏟아냈다.

나는 ‘여자하고 뭐 하러 싸워? 져주는 것이 이기는 거다’ 라고 말하는 그 아저씨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여유 있는 그들이 여유 없는 남성들의 열등감 따위로 미리 전제하고 짜맞춰 풀어내니까 올바른 해석이 나올 리 만무하다.
답답해서 내가 이 책의 의도를 설명하자 깜짝 놀라면서 속마음을 실토해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만난 모두에게 하나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이나 코멘트가 쓰여지길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욕을 먹더라도 공개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 줄 소신과 용기는 없는 것일까?’
참으로 겁쟁이들의 천국이다.

권위는 넘쳐나지만 가짜 권위만 있고 진정한 리더도, 경청할 만한 원로도 드물다.
그저 더 크게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던져주고 명성만 얻으면 된다는 식이다.

나는 한국에서 겪은 재미있는 경험을 글로 쓰고 싶지 비판하는 글은 정말이지 쓰고 싶지 않다. 일본어를 가르칠 때도 한국인의 뛰어난 리듬감을 칭찬하여 장점을 살려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비판이라는 것이 사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외국인 아내이고 노동자이자 주부인 내가 한국문화에 대한 좋은 점을 쓰지 못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이런 비판적인 글을 써야 하는지 매우 유감이다.

한국남성들이 역차별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군대, 더치페이, 결혼비용인데 한국여성들은 ‘관습이다’ 또는 ‘남자가 정한 기준을 왜 우리한테 그러냐’ ‘아쉬운 쪽이 내라’ 라고 항변한다.

이에 남자들의 입장은 과거부터 내려온 부당한 관습은 같이 사회진출을 하는 상황에서 고쳐야 하고 그런 관습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짊어진다고 해서 남자는 어떤 특권도 없다는 입장이니 내가 볼 때도 불만을 가질 만도 하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남자 위주의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진보적으로 외치는데 정작 불편한 사실에는 관습대로 하자면서 갑자기 얼굴을 바꿔 보수적으로 되어버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어느 누가 이해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제의 특권을 받고 누구보다 남성우월적으로 살아온 기성세대가 여성의 편에만 선다는 사실이다.

‘자신 때문에 대학도 못 간 누나, 공장에서 일해 등록금을 준 누나에 대한 죄책감일까?’
각자 사정은 다르지만 과거에 대한 참회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남성성이 잃은 것인지 몰라도 남성의 입장은 전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니 여성들은 기성세대들의 권위를 내세워 ‘역시 여유 있는 남자는 안 그렇다, 열등감에 가득 찬 남자만 저런다, 남자가 치사하게 그런 걸 가지고’ 라며 마구 조롱한다. ‘개저씨’ 라는 신조어로 기성세대 남성의 권위적인 모습을 그렇게 미워하면서 자신의 입장만 대변해주면 누구보다 먼저 그 권위에 탑승하는 모습이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 ‘개저씨가 허락한 페미니즘’ 에는 열광하는 모습이 마치 젊은 남성들을 채찍질하는 늙은 기수가 이끄는 호박마차에 우르르 타고 있는 모습이다.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갈등을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나타나 한쪽 편을 들어 갈등을 부추겨 사회적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길거리로 내몰면서 자신의 자식은 편하게 해외유학 시키면 안 되는 것이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해서 자식을 곤란하게 하는 부모와 똑같이 닮아있다. 올바른 부모라면 자식에게 사랑의 크기를 확인할 필요가 없듯이 젊은이들에게 충성이나 신뢰의 크기를 묻기보다 스스로 자식 같은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 신뢰를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사회적 신뢰는 곧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이 있다.
남녀를 편애하지 말고 과거가 아닌 현재의 눈으로 사회를 보고 젊은이들을 이끌어줘야 할 것이다.


1-10 여성전용 TV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오랜만에 일찍 왔는데 씻고 쉬라고 했지만 기어코 하겠다며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엌에 섰다.
두 시간쯤 지나자 단품요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요리에만 집중해서 부엌은 엉망이 되었고 반찬도 없었지만 참 맛있었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니 옛날이 떠올랐다.
소학교(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 해당, 퍼온이) 때 나에게는 편식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우습게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가족을 위해 해외근무에 전근을 다니며 평생 일에 파묻혀 사셨지만 가끔씩 요리를 해주었는데 다양한 요리는 못 했지만 주력 메뉴 몇 가지는 그 맛이 일품이어서 그만 편식이 생겨버린 것이다.

철이 없던 늦둥이 막내딸인 나는 밥 먹기를 거부했고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를 붙잡고 일 그만두고 매일 해달라고 울면서 졸랐던 기억이 났다.

그런 추억에 젖어 “어디서 배웠어요? 진짜 맛있어요. 고마워요” 라고 하자 “요즘 주위 보니까 다 이렇게 하더라고. 안 하면 이혼당한대~” 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나에게도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TV만 틀면 남자들이 온통 육아에 요리를 하더니 결국 나의 남편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압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남자들을 괴롭혀야 속이 풀리는지 알 수 없다.
한국은 노동시간이 세계최고 수준인데 평균 정도인 일본에 비해 오히려 한국의 남편들이 가사를 많이 부담한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군대를 경험해서인지 한국 남자들은 어지간해서는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데 이런 사회적인 압박에도 말 못하고 속으로는 얼마나 힘들어할지 생각하면 요리를 순수한 마음으로 맛있게만 먹을 수 없고 TV 또한 마냥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한국 방송은 참 볼 것이 없다.
만족하는 사람들은 아마 여성일 것이다. 드라마는 아침은 막장, 밤은 죄다 사춘기 소녀취향의 신데렐라 스토리이고 예능은 남자연예인들이 음식을 먹고 만들고 육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수사나 의학 같은 전문적인 드라마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어떤 장르에도 사랑타령이 들어가고 평범하고 가난하거나 기가 센 여자가 재벌이나 부자인 남자 여러 명에게 관심을 받는 내용이 많다.

소녀들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고 하지만 방송을 보면 누구보다 왕자님이 필요해 보인다(Girls Do need a prince).
나의 말이 틀렸다면 남성들에게 그런 말을 어필하는 것보다 먼저 방송국에 항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여성 취향의 방송이 있다면 남성 취향의 방송도 있으면 좋은데 남성 시청자가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남자가 이상형만 말해도 곤장을 맞아야 하고 비키니 입은 여자만 나와도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면서 시청자게시판이 난리 나서 그런지 오직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만 나온다.
차라리 강남역에 붙은 성형광고에 항의하지 왜 저런 것들이 불편한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0년 초반에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다는 위기감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방송이 꽤 많았는데 한 10년 전쯤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거의 없다.

남편에게 우리는 우리만의 인생을 가니까 남의 말이나 방송에 신경 쓰지 말라고 부탁했고 그때부터 시간이 나면 남편과 미국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있고 한국방송은 뉴스와 한국인의 밥상 외에는 거의 보지 않고 있다.

2장 페미니즘

2-1 한국형 페미니즘

서양의 1세대 페미니즘 운동과 달리 한국과 일본의 여성인권은 자동으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패전, 한국은 독립 후 GHQ(연합국최고사령부)에 의해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
그 후 80년대 말 양국은 비슷한 시기에 여성의 사회참여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이 역시 여성운동의 결과물이라기보다 UN의 여성차별철폐협약과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의 산업구조 변화로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적 흐름 때문이었다.

흔히 일본이 먼저, 한국은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사회현상이 생긴다고 하지만 여성인권에 있어서 시작점과 과정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말부터 여성이 가정에서 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사회적응력이나 여성의 경제력 상승에 따른 여러 부작용이 생겨 비판이 여기저기에서 나왔지만 일본남성들도 가장의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사는 등 긍정적인 면도 생겨났다.

초식계 남자 현상이나 저출산이 문제지만 문학, 학술,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남성을 옹호하는 전문가와 여성을 옹호하는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주장을 펴고 있어 비교적 큰 갈등 없이 긴 시간을 두고 해결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보장이 되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시간이고 자유경쟁이 힘들고 뒤쳐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하면 되는 것이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한국은 일본과 다른 길을 걷는다.

여성의 권리가 주어졌으니 여성의 능력과 시대의 흐름에 맡겼어야 했는데 헌법에 ‘여성’을 명문화하고 페미니즘이 정치권력화되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아마 70~80년대 정부주도형으로 단시간에 큰 경제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여성인권에 대해서도 빠르게 결과를 얻기 위해 정부주도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것은 완승 아니면 완패의 도박과 같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다른 나라와 조금 다른 한국만의 폐해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웃나라에 같은 유교권 문화이지만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고 이중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한국형 페미니즘 즉, 여성 이기주의다.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페어플레이 정신이 없을뿐더러 사상을 공유하는 한 쪽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때문에 한국이 페미니즘을 권력화한 것은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좌우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여성단체는 권력에 힘입어 우후죽순 수백 개가 생겨났지만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남성을 대변하는 집단은 전무하니 그들은 군가산점 폐지를 시작으로 지난 20년간 링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나라 만드는데 총력을 다했다.

그래도 만약 여성단체에게 과거로부터의 피해의식이 아닌 동반자로서 남성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오직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주 높은 기준의 잣대를 남성에게 들이대면서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우위에 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우위’ 와 ‘상대를 몰아내 만들어내는 우위’

전자의 경우 올바른 방법으로 부작용은 크지 않은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후자의 경우 힘이 필요하고 간단하지만 많은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여성계는 주어진 힘을 좋은 방향으로 쓰지 못하고 후자를 선택하였다.

여성을 성역화해서 입막음을 시키고 여성의 기준에서 남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억압하고 사회로 진출할 여성들의 의식을 개선하기보다 아예 사고수준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려 모순된 주장들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게 되어버렸다.

보통 한국여성들은 나의 인생은 힘들고 혜택을 받은 것도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느꼈다면 조금 더 나아가 왜 힘든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나는 대다수의 한국여성들이 페미니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대다수의 여성이 힘들어 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혜택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집중되고 보통 여성에게는 마약과 같은 정신적 위안만을 준다.

엉터리 통계나 설문조사로 유리천장과 임금차별 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성찰보다 사회나 남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만약 여성의 인생이 살기 힘들면 군대를 가고 연애와 결혼에 비용이 많이 드는 한국남성의 삶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같은 사회 구성원이자 동반자로서 단 한 번이라도 남성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지 묻고 싶다.

실제 페미니스트들을 만나서 남성에 대한 배려나 현실적인 문제를 논하면 의미 불분명하고 소위 좀 있어 보이는 말만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만난 한 한국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30대 초등학교 교사이고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녀에게 페미니스트들은 군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군대라는 프레임을 티피컬(typical)한 시각이 아닌 다층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고 단선적인 관점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제가 존경하는 페미니스트 중에 누가누가있는데… 국가라는 시스템 속에서 현 상태의 정부에 모두의 노동력을 다 같이 공동체로서의 믿을 수 없는 정부시스템 속에서…”

그녀는 이해하기 힘든 말로 약 10분에 걸쳐서 대답했다.
쉬운 질문에 왜 이렇게 현학적으로 답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을 정립하지 못한 듯 보였다.
나는 이해하기 힘들어서 미안하지만 쉽게 대답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더 어려워질 뿐 전혀 소용없었다.

그녀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대는 부조리가 많아 여성이 갈만한 곳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정부는 내가 가서 의무를 할 만큼 믿을 수 있는 정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부조리가 많은 곳에 가는 남성은 괜찮은지, 또 믿을 수 없는 정부에서 어떻게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참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만약 군대의 부조리가 해결되고 믿을 수 있는 정부가 되면 여성의 군입대를 주장할 수 있는가 물었다.
그녀는 ‘그것이 해결 되고 한국 여성의 인권이 남성만큼 높아진다면 고려해 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아니 그 말은 승진을 시켜주면 실적을 올리겠다는 말이 아닌가?’
앞뒤가 안 맞는 대답을 한번 더 참고 마지막으로 부조리가 많고 믿을 수 없는 정부에 강제 징집되어 희생하고 있는 한국남성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지 물었는데 대답이 대단히 인상 깊었다.

“남자가 전쟁하고 남자가 군대 만들었고 남자만 군대 가라고 남자가 결정했는데 왜 나에게 군대얘기를 하나요? 여성 차별 문제 물어보세요”

나는 순간 할말을 잃었고 속으로 대답했다.
‘이봐요. 지금 이렇게 안전하게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수십만 젊은 남자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야’

자존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한국사람 중에는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 라는 기본적인 인사를 승패 관계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녀는 남성에게 고맙다고 무릎을 꿇지 않았으니 페미니스트로서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실체 없는 정신적 위안을 위해 한국남성들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가고 허탈감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보는 여성 중에 ‘외국인인 네가 말 안 해도 나도 알아. 가르치려 들지마’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군대 가서 철들어서 돌아오라는 성희롱 말고 부디 남성들에게 적극적으로 고마움을 표현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있으면 100가지 페미니즘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라고 은근히 자랑스러운 투로 이야기한다.

나에게 이 말은 결국 자신들의 기분을 맞춰달라는 것을 페미니즘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있어 보이게 포장하여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사람은 평등주의라 하고 비판하는 입장인 사람은 여성주의 또는 조금 더 나아가 여성우월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제 3자인 내 눈으로 봤을 때 자신의 안녕에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권리 앞에서는 눈이 멀고 의무 앞에서는 약자를 외치고 고마움조차 모르는 기가 센 응석받이 페미니스트를 양산하는 한국형 페미니즘은 분명 여성이기주의이다.


2-2 여성은 약자

2차 대전 미국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자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전쟁 후 남자들이 돌아오자 대량해고 되고 말았다.

이 때 미국여성들은 좌절 하지 않고 '우리도 할 수 있다' 라는 슬로건과 이두박근이 보이는 포스터를 만들어 여성의 인식을 스스로 개선해나간 일이 있다.
그 후 미국의 페미니즘 캠페인에 여성이 이두박근을 내세우는 포스터가 상징처럼 등장했다고 한다.

70여 년 전 미국여성과 같은 좌절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진다면 과연 한국여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은 자유지만 확실한 것은 남성만큼 일 할 수 있다는 여성 스스로의 인식 개선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상황에 따라 여성이 약자임을 강조하기 때문이고 그런 사회 분위기에 보통 여성들조차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제 3자인 내가 보기에는 왠지 한국에서는 페미니즘과 남성들의 지나친 보호 아래에서 여성들을 약자로 키우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일본에서도 2000년 초반에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은 사회적 약자' 라는 말을 해서 아주 잠깐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남성들은 물론 여성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고 금방 사라졌다.
무슨 생각으로 약자의 정의를 성별로 정해서 인구의 절반을 약자로 몰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약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약자의 정의는 '사회에 나올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살기 힘든 사람' 이다.
대표적으로 아동, 장애인, 노인 등이 여기에 속하고 현대 사회는 법이라는 최소한의 틀이 있어 무력 행위를 처벌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약자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여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힘이 약하다 해서 사회에서 모든 여성에게 반드시 배려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일상에서 예를 들어보면 서울 잠실역 부근 버스정류장에 가면 강촌으로 MT를 가는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만히 그들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짐은 모두 남자가 들고 옮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스가 오자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수많은 소주박스와 음식들을 신경 쓰지 않고 '아이고 더워죽겠네' 라며 버스에 냉큼 올라타버렸고 단 한 명의 여학생이 짐을 들려고 했다. 그러자 남학생들은 ‘됐어!’ 라며 버스에 태웠고 결국 남학생끼리 짐을 넣었다.
심지어 문과였는지 남자가 더 적은 상황이었다.
한국남자는 당연히 짐을 들고 한국여자는 당연히 짐을 들지 않는 모습이다.
그들은 친구 사이고 아직 학생이니 트러블이 없지만 당연하고 익숙해진 저 행동은 사회에서는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예로 일본에서 집 근처 공원에 꽃놀이 겸 고기구이를 하러 온 근처 전문학교 학생들과 우연히 마주쳤다.
공원 입구부터 차량진입을 막아뒀는데 공원까지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약 100미터 정도 올라가야 했다.
남녀 할 것 없이 각자 자기 능력에 맞는 짐을 들었고 모두 자신이 가진 힘에 맞는 짐을 골라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 체격이 큰 여학생이 호리호리한 남학생에게 아이스박스를 달라고 했다.
나는 순간 조금 동요했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나도 모르게 한국에 익숙해져 있었네.'

부족해도 자기 힘만큼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고 더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여성들은 1인분의 노력은 하고 있고 고마움은 표시하고 있는가?

한국남성들이 가르치면 또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신조어를 들이대며 비난할 테고 같은 여성인 내가 말하면 '여왕벌, 명예xx(남성의 성기), 나빼쌍(나빼고쌍년)'라고 하니 과연 누가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의 배려를 받는 것은 자신의 약한 몸이 상품화 되었다는 의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상품화를 쌍심지 켜고 반대하는데 실제로 나는 한 페미니스트에게 여성 성상품화가 핵전쟁보다 나쁘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배려 받는 성상품화는 괜찮은 것인가?
도대체 일관성이라는 것이 없는 위선자들이다.

이제 5살인 나의 아들도 마트에서 장보고 자신이 먹을 것을 들겠다고 해서 계란 두 알, 양파 하나 등 먹을 양을 따로 봉투에 담아준다. 또 집에서는 스스로 스티커를 붙여가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한국여성들은 가사일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니 이것이 아동학대라고 보여지는가?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약자라고 하면 중환자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어 남편과 가끔 육아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를 너무 무능력하게 보고 다 해주려고 하는 점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약자에 대한 무시이자 스스로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는 행동이 아닌가?
약자도 약자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인구 절반이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진짜 약자들에 대한 무시니까 대신에 한국 페미니스트들을 위해 ‘사회적 응석받이’이라는 등급을 하나 만들어 따로 관리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페미니즘이 판치면 좋은 여성은 점점 사라진다.

2-3 가정은 착취의 공간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을 여성이 착취당하는 공간으로 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여성이 많다.
페미니스트의 피해의식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이라면 이해하기 쉽지만 일반여성들까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좋은 시대에 태어나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롭게 성장한 세대의 여성들이 왜 이런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페미니즘이 일반여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일까?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원인이 혹시 가정교육에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한국과 일본을 오고 가며 조사를 시작했다.

대상은 양국의 50~60대 어머니들로 질문은 간단했다.
1. 당신이 젊었을 때 여성으로서 살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까?
2. 당신과 당신의 남편 중 어느 쪽이 더 힘들었다고 생각합니까?
3. (딸이 있을 경우) 딸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까?

1번 질문에 양국의 어머니들 대다수가 힘들었다고 대답하였다.
과거에는 분명 여성의 인권이 지금보다 낮았다. 사회진출의 기회도 교육의 기회도 남성에 비해 적었으니 현재와 비교하면 힘들었다는 대답에 쉽게 납득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번 질문부터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2번 질문에 일본어머니들은 남편보다 자신이 더 힘들었다 13%, 둘 다 힘들었다 24%, 사회 생활하는 남편이 더 힘들었다 63%였고 한국어머니들은 남편보다 자신이 더 힘들었다 53%, 둘 다 힘들었다 30%, 사회 생활하는 남편이 더 힘들었다 17%로 대답이 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번 질문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대답이 갈렸다.
한국어머니들은 해본 적이 있다는 대답이 과반수를 넘었으나 일본어머니들의 대부분은 질문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여 되묻거나 "나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분수에 맞게 열심히 살아왔고 내 인생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아이도 생각이 있는데 내가 조금 힘든 점이 있었다고 그것을 자식에게 말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나?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뭐가 되나?" 라고 흥분하며 말하는 어머니도 있었다.
조사대상 중 단 1명만이 딸에게 그런 푸념을 한번 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 조사로 양국의 여성은 가부장제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같지만 일본여성은 그로 인해 남성 또한 가정에 대한 책임감 등으로 힘든 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과 한국여성은 사회생활보다 가정이 더 힘들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페미니스트가 아닌 젊은 여성들까지 가정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원인이 어머니들의 가정교육으로 학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페미니즘 사상이 한국에서 쉽게 퍼지는 이유도 이와 같은 학습된 피해의식이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남성은 가부장제로 인해 이득만 보고 여성을 착취하는 가해자일까?
‘남성이 더 힘들다’ ‘아니다. 여성이 더 힘들다’ 는 사람마다 다르니 객관적인 자료인 남녀수명으로 알아보자. 현대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남성보다 여성의 수명이 더 짧거나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남성보다 여성이 오래 산다. 착취를 하는 쪽보다 착취를 당하는 쪽이 오래 산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학계를 뒤엎을 새로운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역사상 피지배층이 지배층보다 오래 산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노비가 양반보다 오래 살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이에 대해 여성의 몸이 더 오래 살도록 설계되었다고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남성들이 사회생활로 인해 수명이 단축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래 산다고 스트레스가 적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여성들은 남성이 사랑하는 처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잔업에 야근하고 위험한 일을 하고 머리를 숙여가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가부장제라고 해서 남자가 마냥 편한 것이 아니다.
불합리한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세대보다 훨씬 더 전인 조선시대에도 부부가 나눈 한글편지를 읽어보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구구절절 적혀있고 또 19세기 일본에 여행 온 영국작가는 일본의 평범한 가정을 둘러보고 남자가 집안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여자가 우아한 모습으로 집안을 이끌고 있다고 책에 적고 있다.
왜 그 영국작가가 많은 단어 중에 '우아한'이라는 단어를 넣었는지 한국여성들에게 한번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가정이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만 있다면 그 옛날도, 지금도 착취를 하거나 당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늘날 여성의 인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여성의 행복도는 오히려 과거에 비해 낮다" 라는 조사결과가 있다.
당연한 결과이다. 스스로 만든 피해의식이 행복으로 이어질 리가 없다.
인류 역사에서 왜 가부장제가 생겨났는지 객관적으로 탐구해보고 현대사회에 맞게 분석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귀찮은 것은 하기 싫고 편한 것만 추구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미 가부장제의 장남상속이나 호주제 등 법적 제도가 사라졌음에도 아직도 그것을 들먹이며 호들갑을 떨며 남성들이 아직도 여성을 착취하고 탄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구의 1%가 되는 소수를 탄압해도 폭동이 일어날 텐데 가부장제로 인구의 절반을 수천 년 동안 탄압을 했고 더 나아가 인류가 진화하고 190만년 동안 남녀분업을 취해왔는데 폭동은커녕 왜 문명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까?

많은 페미니즘 이론을 적은 책들에서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사회적 또는 문화적으로 접근해서 비판하고 유전적 또는 생물학적으로 접근해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이 제도를 통해 여성을 착취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성도 바보가 아니다. 진화학자들에 의하면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적 문화는 남성보다 오히려 여성이 원해서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고 한다.
즉, 여성들도 분업체제인 가부장제의 적극적 동참자로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고 그 결과 더 나은 제도를 갖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작든 크든 집단에는 반드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는 권한이 있지만 다모클래스의 칼처럼 막중한 책임도 져야 하는 불편한 자리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무지 또는 열등감에 의한 거부감으로 리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의 왕은 백성을, 현재의 대통령은 국민을, 회사의 사장은 직원을 착취를 하는 가해자인가?
아니다. 각자의 지위와 역할이 있는 것이지 장(長)은 악, 졸(卒)은 선이 아니다.
아무리 밝은 별이라도 어둠이 없으면 빛날 수 없듯이 장이 없는 졸은 오합지졸이고 졸이 없는 장은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여성이 리더가 되거나 상하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해진다고 아름다운 세상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회의 기본 시스템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현상을 이분법적으로만 단순하게 해석하는데 가정을 벗어나 사회진출을 해서 과연 관리직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만약 여성할당제라는 명분하에 올라서게 되면 해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은 눈에 보듯 뻔하다.

남성에게 착취당할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여성이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라, 착취당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여성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인류의 발전과정이나 사회 시스템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달콤하게 포장된 자극적인 말로 피해의식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남성은 물론 보통 여성들의 노력까지 무시하고 모두를 불행으로 몰아가고 있다.

2-4 남성성은 나쁘다?

“If men do not have to be aggressive in order to be accepted women will not feel compelled to be submissive. If men do not have to control, women will not have to be controlled.”

페미니스트인 엠마 왓슨의 UN연설 중 일부분이다.
남자들도 고정관념으로 힘든 부분이 있으니 남성성을 버리라는 부분이다. 또 어떤 의미로는 남성의 공격성 때문에 남성 스스로는 물론 여성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말이다.

유명한 그녀가 큰 자리의 연설에서 비판을 무릅쓰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소신을 밝힌 사실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제안한 해결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본능에 대한 무지와 남성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여성특유의 부드러운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내면을 이해하고 나면 사실 매우 무섭고 잔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먼저 인간은 동물의 일원으로 성별에 따라 타고난 강한 본능적 욕구가 있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면 알 수 있지만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남자아기와 여자아기의 차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딸이 있는 친구 집에 가면 나의 아들은 인형으로 로봇놀이를 하고 친구의 딸은 아들의 장난감인 자동차를 인형처럼 침대 위에 눕혀 재운다. 간혹 남자 같은 여자아이, 여자 같은 남자아이가 있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결국 후천적인 학습으로 선천적인 본능을 버려야 남녀 모두에게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말인데 본능이란 저런 말 한마디나 후천적인 학습으로 쉽게 바뀌는 성질이 아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인형의 머리를 빗겨 주는 남자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저 남자 내가 평생 지켜줘야지' 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전업주부를 희망하는 남성을 보거나, 미소녀 애니메이션에 심취한 오타쿠를 보고 ‘와! 너무 멋져! 나랑 사귀자’라고 말해주는 여성 또한 극히 드물다.

남성은 오타쿠가 되어 남성성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여성들이 상대 남성으로 오타쿠를 선택하기보다 남성성의 진취성으로 발현된 능력 있고 멋진 남성을 바라는 것을 보면 여성이 먼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니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지 알 수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대면하지 않고 간접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고 이것이 더 나아가 미래에 모든 인간의 욕구가 가상으로 가능해지는 시기가 온다면 저런 주장을 하지 않아도 남녀 모두 중성적으로 자연스럽게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무리가 있다.

결국 저 말을 현재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태어나는 남자아이들을 거세하고 모든 성인 남성들을 상대로 여성호르몬을 주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인류는 발전하지 않을 것이며 아메바 같은 하등생물이 될 것이다.
지구상의 생물체를 보면 하등생물인 암수 분화가 없는 무성생식생물, 암수가 한 몸인 자웅동체, 그리고 고등생물은 자웅이체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고등생물의 수컷과 암컷은 각 성별차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져왔다.
고등생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그런 진화가 극명하여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수억 년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왔는데 “자, 오늘부터 아메바로 돌아갑시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 공격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은 사실 인류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 남성의 공격적인 모험심과 호기심이 없었다면 콜럼버스가 대양으로 나아가 신대륙을 발견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성이 중요하듯이 남성성 또한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성성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 장면이 영화 타이타닉에 잘 나타나있는데 만약 엠마 왓슨이 가라앉는 타이타닉에 타고 있어도 저런 말을 했을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남성은 비상시에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여자와 어린이를 지킨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Women and children first"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실제 타이타닉의 사망자 비율을 보면 일등급 남자승객보다 삼등급 여자승객이 더 많은 비율로 살아 남았다.
페미니스트들은 1분 1초가 다급한 상황에 처해도 "Women and children first"는 남녀불평등이므로 "children only" 라며 남녀평등을 외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만약 남성성이 없다면 영화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자.
먼저 힘이 센 순서대로 구명보트에 올랐을 것이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은 대부분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잭은 로즈를 차가운 바다에 밀어 넣고 자신이 나무 위에 올랐을 것이다.

자, 어떤가 남녀평등이 실현되어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는가?
아마 그랬다면 한국에서는 여성혐오영화로 낙인 찍혀 개봉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형사고가 났을 때 남성사망자보다 여성사망자가 많으면 여성이 재난에 취약하다고 떠들고 그 반대면 조용하게 있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남성성의 거친 부분이 있다면 본능의 테두리 안에서 욕구를 인정하고 고쳐나가야 하지 여성의 잣대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여론을 선동하는 남성성의 부작용인 범죄의 경우는 극히 일부의 문제이고 대다수의 남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사회안정과 사법제도이지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오히려 그런 범죄를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이용해 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사상으로 풍선의 한 쪽을 누르면 예상치 못한 다른 쪽이 부풀어 올라 발생하는 여성피해자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을 뿐더러 관심조차 없다.

모든 것을 남자 탓만 하고 남성성을 그저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페미니즘은 인간의 본성을 인위적으로 폐지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기초하는데 인간이 동물인 이상 ‘~다움’을 버리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이다.

2-5 여성이 약자라고?

페미니스트는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취업이 힘들다는 뉴스가 나오면 보통사람의 경우 '서울대학생도 취업이 어렵다니 도대체 얼마나 경제 상황이 안 좋은 것인가?' 라며 걱정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페미니스트의 경우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 봐라, 여자는 서울대학교 나와도 취업을 못 한다. 여성차별이 심각하다.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를 뜯어 고쳐야 한다. 여성들이여 깨어나라'

전 세계 모든 페미니스트들의 공통점이 여성 위주로 사실을 왜곡하고 통계를 조작해서 여성들에게 심각한 피해의식을 심고 사회 갈등을 초래하는 것이니 놀라울 것도 없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피해자인 여성과 가해자인 남성만 보일 뿐 다른 것은 없다.

아무튼 그들의 주장은 여성은 남성보다 취업이 힘들고 임금이 적고 유리천장이 있다.
그래서 여성할당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들이 주장하는 할당제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부터 알아보자.
미국의 사회철학자인 존 롤스는 자신의 저서인 정의론에서 차등적 정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롤스의 이론에서 말하는 최소 수혜자를 여성으로 보고 여성할당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최소 수혜자는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역차별적인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즉, 롤스는 선천적이나 운으로 얻은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을 사회의 자산으로 보고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결과의 평등을 최소화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다.

공산주의의 평등과는 다른 자유주의적 평등을 주장한 존 롤스는 내가 존경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그의 저서를 접하고 자유와 평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그의 말 그대로 실현된다면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어원은 '실현될 수 없다' 라는 뜻으로 그 어원에서부터 허점이 있듯이 롤스의 이론에도 허점은 있다. 바로 인간의 욕심을 간과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먼저 두 가지 질문을 하고 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자.
1. 여성할당제를 해야 할까?
2. 당신이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에 학벌도 능력도 떨어지는 외국인 여성인 내가 쉽게 들어가고 신입인데 당신보다 연봉도 높게 받으면 어떤가?

페미니스트라면 1번에는 대부분 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2번은 조금 애매하다.
왜냐하면 외국인은 한국에서 사회적 약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납득해도 아마도 속으로는 기분이 나쁠 것이다.

지난 2012년 나는 각종 다문화 혜택과 지원금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그 이유는 내가 부자라서가 아니다.
최소 수혜자에게 돌아가야 할 분배가 왜 나에게 오는지 납득이 안 되었기 때문이고 표면적으로는 지원금을 거절한 것이지만 나의 본래의 의도는 이기적인 전업주부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어린이집이 공짜라서 임신하자마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들어가기가 치열했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아들은 순번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어린이집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아들이 들어가면 어딘가에서 워킹맘은 아이 맡길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할 것이 분명하다. 안 그래도 전업주부들까지 사회성을 키운다는 어이없는 명분으로 대부분 0세부터 보내는데 차마 나까지 거기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사회 흐름에 반하는 나의 지원 거절은 신문 1면에 실려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항의전화도 몇 번 받았지만 내가 한 행동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모두가 빨간 신호등에 건넌다고 나도 따라 건널 수는 없었고 나는 아직 한국에 아무런 기여한 바가 없는 일개 외국인으로 정부정책이라고 해서 무작정 무임승차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회는 없었지만 조금 슬펐던 일은 공식적인 항의가 아닌 주변의 한국 여성들로부터 들은 핀잔이었다.
공짜로 잘 보내고 있는데 네가 들쑤시는 바람에 정책이 바뀌면 책임질 거냐는 것이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한국 엄마들은 공짜를 최대한 누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워킹맘들은 비싼 보모를 쓰거나 부모님에게 맡겨야 했고 연로한 부모님은 육아로 건강을 해치게 되어 막대한 사회적 손실이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임은 위선적인 정치인과 이기적인 전업주부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태 조사나 반성은커녕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정도의 도덕과 양심 수준에서 부자들에게 분배를 요구하거나 여성할당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일이다.

타락한 도덕 수준을 이용해 손쉽게 인기를 얻으려는 정치인과 본업을 태만하고 커피숍에 모여 하하 호호 이야기 꽃을 피우는 고학력 전업주부들과의 환상의 콤비로 이미 모든 엄마들이 꿀맛을 봤으니 여성할당제 같은 황당한 말에 점점 더 힘이 실려 당당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는 가까운 미래에 정부에서 설거지도 해줘야 할 판이다.

그리고 롤스는 존재에 대한 우월성을 인정해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했는데 백 번 양보해서 여성이 최소 수혜자라면 시혜자인 남성들의 우월성이라도 인정하고 고마워하면서 주장을 해야 한다.

인간은 유능하고 따뜻한 집단에는 ‘존경’, 유능하지만 차가운 집단에는 ‘질투’ 가 나타나고 무능하지만 따뜻한 집단에는 ‘연민’, 무능하고 차가운 집단에는 ‘경멸’을 느낀다. ‘경멸’ 보다는 차라리 ‘연민’이 낫지 않을까?
남성의 우월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적으로 삼으면서 여성할당제를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이론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최소수혜자라고 생각한다면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인데 우월한 남성과 평등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성립조차 불가능하다.
페미니스트는 롤스의 사상을 왜곡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외국인 여성이 최소 수혜자가 아니듯 한국인 여성도 최소 수혜자가 아니다.

만약 내가 거절하지 않고 혜택과 지원금을 받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다고 가정하고 서두에 했던 두 가지 질문에 다시 대답해보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남성들이 여성할당제에 느끼는 기분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할당제를 요구하기 이전에 과한 피해의식과 자의식 과잉상태인 한국 여성 전반에 대한 인식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해주었으면 한다.
그래도 여성이 각 분야에서 활약을 못 한다면 그때가 남성 위주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할 시점으로 여성할당제를 요구해도 늦지 않다.

마트에 세일 안내가 나오면 체면불고하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어깨를 밀쳐가며 뛰어가는 상황에서 여성할당제는 사회의 민폐가 될 뿐이다.

2-6 남녀임금차이

한국과 일본은 남녀임금 격차가 큰 편이다.

각 나라에서 이런 통계를 내는 이유는 페미니스트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성이 어느 직종에서, 어느 형태로,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는지를 보고 여성이 더 다양한 분야로 사회진출을 하도록 돕기 위해 통계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명백한 남녀차별이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실상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결과의 원인을 파악하기보다 결과를 놓고 자신들의 입장으로 제멋대로 해석하니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남녀 소득의 평균을 단순 비교한다면 여성이기 때문에 월급이 낮은지 아니면 다른 요소가 있어서 낮은지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비교를 하려면 직종, 학력, 경력, 연령, 실적까지 모든 것이 동일한 남녀를 찾아 비교해서 임금 차이가 있는지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조사는 아주 어려운 일이라서 정확한 데이터가 없다.

미국의 한 구직사이트가 매우 유사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수천 명이 신고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건이 매우 동일한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임금차이를 알아봤다고 한다.그 결과 여성은 남성의 95%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오차범위 내에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서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이 남녀차별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에게 있다고 본다.

20대 구직자의 취업 스트레스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취직을 하지 않아도 결혼으로 가정주부가 될 수도 있고 무직이라도 그다지 흠이 되지 않고 사회적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한마디로 남성은 취직 이외의 다른 선택권이 없고 여성은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다.

차별 때문에 취업이 힘들어 억지로 전업주부를 한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여대생들에게 조사를 해보면 취업 대신 결혼, 일명 취집을 하고 싶다는 비율이 과반수를 넘고 있으니 이는 차별 때문이라기보다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결혼 전후 여성의 과반수가 별다른 이유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있고 여성의 70%가 배우자에게 직장을 그만두라고 하는 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여자들끼리 예비신랑이 일 그만 두라고 한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일이 빈번하니 여성차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이 자아실현이라는 허울 좋은 이상과는 다르고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성향이거나 사회생활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것이지 여성차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좋은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 중에서 화학, 철강, 제조, 전자, 선박, 기계 등 이공계열의 산업이 고도로 발전되어 있다.
이런 분야에 남성이 많이 종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임금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다.
한국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제한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이 또한 여성차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전공 선택에 있어서 남녀가치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고 남녀가 자유롭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한 결과이다.
결국 남녀임금차이는 남녀차별이 아닌 여성 스스로의 해결할 문제인 것이다.

일본 게이오대학의 한 여교수도 일본여성의 낮은 사회참여와 남녀임금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열쇠는 여성이 쥐고 있고 여성들 자신이 기존에 가진 규칙을 깨야 할 때라고 말하며 여성의 이공계 권장을 우회적으로 말했다.

그럼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성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무시하고 돈이 잘 벌리는 전공으로 선택해야 할까?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결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의외로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을 반대로 하면 된다. 자신의 직장에서 여성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남성성과 다른 포지셔닝을 잡으면 된다.

나는 이런 멋진 한국여성친구가 여러 명 있다.
꼼꼼하게 건축설계를 잘 하는 친구, 독특한 디자인 감각으로 팀장 자리에 오른 친구도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존경하는 친구는 소아과 의사인 친구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원을 놀이방처럼 꾸미고 청진기에 인형을 꼽고 "몸에 뭐가 들어가 있을까? 어머! 감기가 들어있네. 내가 고쳐줘야지." 라며 인형을 의인화해서 말한다.
주사를 놓을 때도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을 살려 부드럽게 격려해주고 아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진찰을 한다. 그 병원에서 우는 아이는 없고 엄마들의 만족도도 매우 높다.

여성이 남성을 따라 할 수 없는 것이 있듯이 남성이 못하는 것을 여성이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여성이 사회진출을 하면서 생긴 혜택이 아닐까?
어느 직장, 어느 직종에서든지 이런 일은 가능하다.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은 같은 거울이지만 용도에 따라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그런데 분명 같지 않은데 거울이니까 다 같다고 말하면서 억지주장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표본 수가 많지 않아 전체를 단언할 수 없지만 그들은 남녀임금차이에 대해 전혀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내가 유리천장에 대해 설명하자 한 한국여성친구는 웃으면서 오히려 여자라서 더 인정해주니 유리해서 좋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여러 여성친구들을 상대로 조사를 했는데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간호사인 언니, 유치원교사인 친구, 트럭운전수인 친구, 호텔에서 일하는 친구, 엔지니어인 친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친구들도 일하는 시간이나 경력에 따라 달라지는 건 있어도 동일한 조건이라면 그런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특히 유치원교사인 친구는 요즘은 이혼으로 모자가정이 많기 때문에 남자선생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낮은 월급으로 자꾸 전직을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이들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해 남자에게 월급을 올려서라도 남자선생님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구의 전문가다운 말에 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에 대한 지원은 남성근로자의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에 앞서 전업주부들이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면 상당 부분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통계를 왜곡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이렇게 길게 설명해야 한다.

만약 이 글을 읽고도 이해가 안 간다면 나에게 제갈공명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주 간단하게 남녀 임금격차를 줄이는 묘책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반드시 주장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지하경제의 한 축을 차지하는 창녀들의 소득을 통계에 넣을 것을 광화문 앞에서 주장하면 된다.

단 하루아침에 남녀 임금격차가 줄어들 것이다.

2-7 달콤한 페미니즘

'한국은 취직이 힘들고 살기 힘들다'

한국에 살고 있으면 이런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나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하는 저 말이 엄살이 아니고 실제로 힘들다는 것에 동의한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일자리가 부족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차이도 커서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지 약 10년 전쯤부터 한국에서 최대 이슈는 복지다.
북유럽식 보편적 복지를 통해 경제 성장을 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모두 살기 좋게 한다?
북유럽의 국가들이 과연 복지를 통해 성장을 이뤘을까?
한국 대기업이 지난 10년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때 북유럽의 기업은 어떻게 되었는가?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지만 볼보는 중국에 팔렸고 노키아는 몰락했다.

단지 복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복지와 성장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북유럽의 국가들이 복지를 하면서 일정 수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구가 적고 자원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인구밀도가 높고 자원이 없는 한국에서 이 모델이 성공할 수 있을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한눈에 보기에도 비관적이지만 한국의 각 정당에서는 좌우할 것 없이 복지를 들고 나오며 누가 더 착한 정당인지 대결했고 한국국민들은 공짜에 취해갔다.

나는 이런 지도자들이 똑똑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똑똑한 거짓말쟁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생긴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쓰디쓴 진실이 아닌 달콤한 거짓을 원하는 것은 바로 피재배층인 대중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는 대중의 지적 수준의 기준에 맞춰 공략을 내세워 선출되는 자리이므로 기준설정에는 오히려 수동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고 대중이야말로 능동적인 집단으로 복지는 한국사람들이 스스로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지난 10년간 너도나도 무차별 복지를 들고 나오니 정당의 차이점이 사라졌다.
그래서 다음 전략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왜냐하면 세금을 받아 운영되는 수많은 여성단체가 막강한 기반이 되어주고 유권자의 절반인 여성들에게 쉽게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또 좌우할 것 없이 페미니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무차별 복지도 그렇지만 이 페미니즘도 의심해봐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을 획기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특히 여성이라면 더더욱 이런 상황을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왜 페미니즘 편을 드는 사람뿐일까?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성이 이와 같은 합리적 의심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여성단체들이 그 동안 응축된 힘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도 페미니즘이 있지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일본여성들이 우매하고 남성에게 너무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주로 학문으로써 남성학과 여성학이 연구되고 있고 옹호와 비판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페미니즘이 자신의 행복과 관계없다고 알아챈 대다수의 일본 여성들은 동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여성이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이 매우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이익집단인 수많은 여성단체가 버티고 있어 여성들의 올바른 사고를 방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지가 공짜에 대한 환상을 자극했다면 페미니즘은 저기 멀리 북유럽에 여성들의 유토피아가 있다는 환상을 심는 동시에 남성에 대한 공포를 심는 참담한 짓까지 저지르고 있다. 또 여성은 역사의 피해자이고 여성이 힘든 것은 남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달콤한 말로 자신의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살기 힘든 젊은 여성들은 이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60년대 한국에서는 고무신선거를 했는데 50년 후인 현재는 그런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정신적인 페미니즘이 물질적인 고무신을 대체하고 있을 뿐 기본 맥락은 매우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이렇게 여성은 무지하고 단지 표를 얻기 쉬운 존재로 무시당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여성은 많지 않은 것 같아 같은 여성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잘 새겨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북유럽식의 남녀평등이 혹시 환상은 아닌지, 그리고 과연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그 국가들은 남녀 임금차이를 줄이기 위해 공공분야의 일자리를 늘려 여성들의 70%가 의료, 개호, 복지, 교육, 공무 등 공공분야에 일하고 있고 이는 전체 노동시장의 무려 30%나 차지한다. 현재 7%정도인 한국과는 다르며 이것을 강제로 북유럽수준으로 비율을 맞추려면 단순 계산으로도 지금 예산의 4배 이상 소요된다.

또한 남녀 평등이라는 북유럽도 산업재해 사망자의 95%는 남성으로 여느 나라와 다르지 않다. 즉, 여성들에게는 안전한 공공분야의 일자리를 주고 있고 남성들은 사기업에서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정부를 추구해 제도적으로 기업이 혁신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데 써야 할 세금을 단지 여성을 위해 공공 분야의 일자리를 억지로 늘리는데 쓰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기업의 발전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항변할 수 있으나 시장에 한계란 없고 게다가 그것은 기업가들이 판단할 문제이지 정치인들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또한 여성임원을 강제로 늘리는 할당제도 있고 무거운 조세제도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기업들은 북유럽국가들의 기업들처럼 해외에 팔리거나 해외 이전을 추진하고 상장 폐지 되는 기업도 속출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민간분야에서 남성들이 낸 세금으로 여성을 위해 편하고 안전한 공공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해 먹여 살리는 구조이고 무거운 세금으로 경쟁이 줄어 기업들은 혁신에 뒤쳐지게 되어 그나마 있던 일자리도 더 없어지고 생활은 남녀 모두 더 힘들게 된다.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만큼 이제는 여성의 의식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차례인데 단순히 기계적 남녀 평등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오류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북유럽은 특이한 케이스이고 보통 국가에서 이런 정책을 쓰면 부작용이 발생 할 수 밖에 없다. 포르투갈이나 그리스 같은 국가들이 그랬고 국가재정이 바닥났다.

이 때 필연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이 양극화와 남녀 임금의 하향평준화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들은 당연히 남성들을 값싼 임금으로 고용할 것이고 여성의 고용은 더욱 불안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 발생한다면 힘이 막강한 여성단체는 다시 여성 고용의 차별이라 들고 일어날 것이며 이 악순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될 것이다.

일본속담에 ‘옆 집 잔디가 푸르다’ 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과 같다.
북유럽식 모델은 한국에는 적용하기 힘든 모델인 것을 인정하고 남의 잔디나 떡을 부러워하기보다 남녀가 합심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현실에 기초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여성인 자신이 살기 어렵다면 당연히 남성 또한 살기 어려운 시대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 당연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

2-8 일상이 불안하다?

지난 5월 강남역에서 벌어진 살인은 여성혐오 범죄일까?

이것을 판단하려면 일단 ‘신경증’과 ‘정신증’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상행동은 신경증과 정신증으로 구분된다.
먼저 신경증은 노이로제로 일상 생활에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심리적 장애이다. 문제가 있음을 자각할 수 있고 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다음 정신증은 정도가 매우 심각한 장애로 사회에 적응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스스로 자각할 수도 없어 제 3자에 의해 병원에 오게 된다.
또한 환각, 망상 등의 증상이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있다.

경찰은 공식적으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발표했다.
범인은 신경증이 아닌 정신증을 앓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 여성들은 아니라고 주장했고 이에 정치인, 의사, 심리학자 등 여러 전문가들도 여성혐오범죄라고 했다.

전문가라는 그들이 주장하는 말을 들어보면 범인이 정신병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구조의 병폐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한다. 정치인이 인기를 위해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전문가라고 나온 의사나 심리학자이다.
의사라면 정신의학적 근거로, 심리학자면 심리학적 근거를 가지고 얘기해야 하는데 철학, 사회, 도덕에서 근거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폴리페서(polifessor)에 이어 폴리닥터(polidoctor)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후 약 한달 뒤 일본에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쇼핑몰에서 정신분열증인 남자가 여성 4명을 칼로 찔러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같은 정신병, 여성만을 노린 점이 강남역 사건과 매우 유사했다.

일본에서도 여성혐오 범죄 논란이 일어났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전문가, 일반국민 어느 누구도 여성혐오 범죄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두렵다' 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끔찍한 사건을 봤을 때 인간이 최초로 가질 수 있는 1차적인 반응은 공포와 공황으로 두렵다는 감정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에서는 크게 소란이 일어 주목 받지 못했지만 강남역 사건의 최초 보도 때는 두렵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1차 감정은 양국이 동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 다르게 막강한 페미니즘 조직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사건을 아주 교묘하게 잘 이용한다. 두렵다는 감정이 끝나고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불확실하거나 정보가 없는 공백상태를 어떤 식으로든 채우려고 하는데 이것은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 위안을 받아 안정을 찾으려는 심리이다. 1차 감정이 끝나고 2차 감정이 일어나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쏟아졌고 전문가들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극적인 제목으로 수백 개의 기사를 쏟아낸 언론도 한 몫을 담당했다.

이것은 원래 ‘공감과 수용’ 이라는 심리치료의 한 방법인데 페미니스트들이 악용한 것이다.
공감과 수용은 기본적인 방법으로 심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하는 말에 지속적으로 공감을 해주면 경계를 풀게 되고 그 때 심리치료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페미니스트들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감정에 공감, 동조하고 경계를 푼 사이 범죄자와 피해자가 아닌 남자(범죄자)와 여자(피해자)를 끼워 넣었다. 누구나 멋있다고 느끼는 강남역이라는 타이틀과 공감에 약한 여성의 특징에 공포까지 더해지니 여성들은 이성이 상실되어 프레임만 넣으면 무조건 믿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쉽게 페미니즘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은 이성을 상실한 집단 분노로 바뀌었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범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엄청난 남녀 갈등이 생겼고 페미니즘은 그것을 이용해 향후 수년간 막대한 이득을 챙겨갈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일상이 불안하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살면서 골목길에서 성추행을 당해봤지만 일상이 불안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
그만큼 한국의 치안은 세계 톱클래스이다.
성범죄의 적용 범위를 넓혀 강간이 늘고 있다고 하면 안되고 여성 살인 피해자의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고 일상이 불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마다 사정이 다르나 한국은 총기가 불법이고 거대한 범죄조직도 없는 매우 안전한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 살인피해자도 적고 상대적으로 여성 피해자의 절대 숫자가 아닌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높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에 따라 전체 살인피해자에서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는 말은 한국은 매우 안전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한국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공격했지만 범인과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라고 하면 여성은 잠재적 아동학대 가해자인가?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로 성립되려면 그 범인이 저지른 죄를 옹호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남성들 중 누구도 그 범인를 옹호하지 않았다.

잠재적 이라는 말에 담긴 폭력성을 생각해보면 절대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말이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 여성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공격하기보다 남성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자존심 따지지 말고 반드시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남성, 특히 한국남성들은 보통 익명의 여성들도 우리 엄마, 우리 누나, 우리 딸로 바라보는 매우 이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 위험에 처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일상이 불안해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규정짓고 길에서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쓴다고 일상이 안전해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나오고 수십 년 동안 현실적으로 여성의 삶이 개선된 것이 있는가? 페미니즘은 해결의지도 없고 해결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 라고 기름만 부었지만 오히려 '현재적 가해자' 는 페미니즘이다.

한국여성들은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이나 남녀평등을 말한다고 착각해서 섣불리 페미니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순진한 당신은 남녀평등을 원할지도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상층부에 있는 자는 절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

한 부패한 목사가 있다고 하면 그는 매일 입으로 예수부활을 외치지만 과연 실제 예수가 부활하여 살아 돌아오길 바랄까?


2-9 나는 페미니즘을 싫어한다.

내가 여성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좋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단어의 느낌만으로 ‘여성이 살아갈 자세, 가져야 할 의식, 갖춰야 할 교양 등을 연구하여 여성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학문인 페미니즘이 유행하고 있구나’ 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일본도 그렇지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여성인 사회생활 선배는 드물어 사회는 어떤 곳이고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하기 어려웠고 학교에서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직후부터 나는 스스로 사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느꼈고 한국 유학 중에 페미니즘을 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수업을 통해 내가 여성으로서 앞으로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무엇이 제일 부족한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정반대로 페미니즘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우 실망한 나는 리포트에서 수업과 페미니즘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고 대학 4년 동안 유일하게 C학점을 받은 과목이 되어 수석 졸업도 놓쳤다. 학점을 박하게 받아 억울해서 페미니즘이 싫은 것이 아니다.
사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학문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빈약한 페미니즘에 본능적인 저항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스무 살의 나의 일기장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래는 스무 살 때 일기장의 일부이다.

1
오늘 수업은 가부장제였다 ...(중략)... 과거의 여성이 힘들게 산 것을 현재의 여성에게 그대로 세뇌시켰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피해망상을 주입시키고 있어서 거부감이 든다. ...(중략)... 피해의식은 직접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아 생기는 것이지만, 피해망상은 피해를 받지도 않았는데 생기는 망상으로 정신병의 일종이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2
노동으로 여성이 해방된다고 했다.
돈이 생기면 힘이 생기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 쉬는 시간에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여성의 사회진출로 노동자의 공급이 두 배가 되면 임금이 하락한다. 값싼 노동력을 조달할 수 있는 자본가에게만 좋은 일이 되고 노동자들에게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지만 교수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여성이 사회 진출하면 경제도 살아나고 임금도 오르고 살기 좋아진다고 했다. “노동자 공급이 늘어났는데 왜 임금이 오르죠?” 라고 질문했지만 "다같이 일하니까요" 라고 의미 불분명한 말을 했다. 분명 이상하다.
어떤 투쟁도 하지 않고 페미니즘의 힘이 강해지는 것에는 분명 국가, 자본가 그리고 페미니즘 사이에 이익의 교집합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3
이 수업을 듣고 있으면,
아빠도, 남자도 싫어하게 될 것 같다.
결혼을 하면 나에게 피해가 생길 것 같다.
페미니즘으로 여성이 행복해진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
나는 여성이 아닐까?


같이 수업을 듣는 대다수의 학생들의 발표내용을 들어보면 수업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페미니즘으로 마치 알에서 깨어나 새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스승에 대한 권위가 막강한 한국에서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렇게 별다른 고찰 없이 한 두 시간의 수업으로 생각을 쉽게 바꾸는 것에 놀랐다.

페미니즘의 옳고 그름에 대해 묻는다면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도 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개인으로 당장 판단할 수 있는 가치는 좋고 싫음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싫다.’
이 생각은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접했던 초기도 페미니즘 광풍이 불고 있는 현재도 변함이 없다.

다음은 단순히 의문을 가졌던 스무 살 때와는 다른 현재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1. 역사의 존중
페미니즘은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여 여성만이 착취당해왔다고 조작해 인류의 역사를 부정하고 나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류는 남성과 여성이 합심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현재가 그 결과이다. 여성이 과거에 사회진출을 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이 사회는 전부 남성이 만들었으며 폐해도 전부 남성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발전과정에서 생긴 부작용과 여성에 대한 편견은 물론, 남성에 대한 편견도 같이 바꾸어 나가는 것이지 페미니즘의 법정에 세워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로 판결하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한국의 발전 과정을 존중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전 세대의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 모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싫다.

2. 본성의 존중
사회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인간의 본성을 배제하고 분석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은 성역화하여 매춘, 성상품화를 반대하지만 남성의 성에 대해서는 범죄나 일으키는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매춘을 하는 여성은 사회구조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으로 불쌍하게 여겨 지원까지 해주는데 남성들은 성인비디오만 봐도 공격성이 높아져 범죄를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성의 성을 100% 알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봐야 한다.
군대에 2년 가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젊은 군인들의 당연한 성욕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한국에 15년 살면서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남성의 성에 대한 토론은커녕 담론조차 못하게 틀어막고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싫다.

3. 여성의 존중
페미니즘은 피해의 범위를 아주 작은 것까지로 늘려 여성에게 정신병인 피해망상을 주입시키고 있다. 피해범위를 늘리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그것으로 남성이 더욱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 된 것이다.
피해망상이 생긴 여성들은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사회, 국가에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게 된다. 또한 결혼은 물론, 여성만이 가진 고유의 가치인 출산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피해망상을 가진 여성이 행복할 수 없고 통계만 봐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아무리 사회생활로 자아실현을 해도 파트너가 없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존중하기는커녕 사랑을 폄훼하여 여성의 행복을 빼앗고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싫다

4. 남성의 존중
페미니즘은 여성이 해방되면 남성도 짐을 덜게 된다고 거짓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은 젊은 한국 남성들에게 특권을 내려놓고 가해자임을 인정하라고 하는데 젊은 남성들 입장에서는 이미 특권이 없고 누려 본 적도 없다.
젊은 한국 남성들은 누릴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유리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의무는 줄지 않고 늘어만 간다. 징병제는 여전하고 데이트나 결혼비용도 여전히 남성이 많이 부담한다. 가정경제도 남성의 부담 비율이 높은데 가사 압박도 심하다. 퇴사 당하면 이혼당할 위험도 크고 업무에 의한 사망률도 높다.
여성은 이미 해방되었는데 남성은 사회에서도 모자라 가정에서도 압박을 당하면서 살고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싫다.

5. 사회의 존중
현재는 제도적으로 여성차별을 찾아 볼 수 없으므로 여성운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를 견제할 집단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고 페미니즘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통계를 속여 남성의 죄의식과 여성의 피해망상을 불러오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성격차지수 2015년 기준 한국 115위(일본 101위)라는 자료로 갈등을 야기시켜 엄청난 사회비용을 소모케 했다. 어린이가 봐도 이상하다고 한 눈에 알아차릴 자료를 가지고 온 나라가 뒤흔들리다니 그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원인을 제공한 한국의 여성계는 책임지고 반성해야 한다. 또한 제도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여성들에게 과도한 피해망상을 주입시켜 남성, 가정, 결혼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시켜 건강한 사회를 해치고 있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의 분열을 의도적으로 야기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고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싫다.


3장 한국여성

3-1 악플

지난 1월 나는 한국인 남편과의 일상 생활을 담은 만화 '스시녀와 김치남'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평범하지만 조금 엉뚱하고 재미있는 나의 일상을 공개하고 한국사람들의 리플을 읽으면서 소통하는 것은 한국에서 사는 데에 큰 힘이 되기 때문에 블로그에 이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리플에 조금 이상한 점이 보였다. '재미있다' 또는 '재미없다' 라는 리플이 아니라 '역시 일본여자가 최고다' 가 주를 이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그려나갔고 독자들도 차츰 늘어났다. 그러자 역시 악플도 받게 되었다.

악플은 한국생활 블로그를 할 때도 많이 받아봐서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악플도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내가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단순하게 '쪽바리 꺼져라' 같은 한국 남성들의 단순한 악플이 많았지만 만화에 악플을 보낸 사람은 한국 여성들로 나의 행동에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한국 여성들이 나에게 왜?'

한국 여성들에게는 이제껏 악플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다.
처음 겪은 상황에 나는 단순하게 여자연예인들이 같은 여자들에게 받는 악플과 유사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질투에 기반해 젊고 예뻐서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여성에게는 악플을 하지만 남성들에게 인기가 시들해지면 선플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나의 만화도 한국 남성들이 좋아해주니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블로그 때와 비슷하게 재미있는 일상 이야기라서 모두 즐거워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아서 못내 아쉬웠다.

내가 내린 악플의 이유와는 별개로 혹시 나에게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서 한국친구들을 만나 만화를 보여주며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한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화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데 지금은 남녀갈등이 심하니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도 인터넷에서 남자가 여자를 비하하거나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조롱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일본과 비슷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만화를 계속 그려나갔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이제는 메일과 쪽지로 악플이 쏟아졌다. 만화에 나타난 나의 행동을 비하하며 만화를 그만 그릴 것을 요구하거나 일본으로 떠나라고 하는 악플이었다.

한국 여성들 눈에는 나의 만화가 한국 남성을 위해 그리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만화는 나의 일상을 우스꽝스럽게 담았을 뿐 한국남성을 위해서가 아니고 한국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도 없다. 존경 받는 행동과 비난 받는 행동 사이에는 존경도 비난도 없는 평범한 행동이라는 것이 있다.
만화 속의 나의 행동은 한국남성에게 존경 받을 만한 행동도 아니고 한국 여성에게 비난 받을 만한 행동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행동을 존경하거나 비난하는 한국 사회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과 페미니스트가 아닌 한국여성들의 악플에 대답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 여자의 공격성

“남성과 여성 중 누구의 공격성이 높을까?”

남성들에게 물으면 즉각 거의 100% 남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은 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떨까?
통계가 없지만 100% 남성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아마 많은 여성들은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에게 무슨 공격성이 있냐고 되묻겠지만 여성도 남성만큼의 공격성이 내재되어 있다. 다만 사회 또는 남성의 시선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여성의 공격성은 남성이 눈치채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아주 은밀하게 진행된다. 남자들의 신체적 폭력보다 훨씬 지독하고 파괴적이며 폭력에 의한 상처는 며칠이면 낫지만 여자들의 공격으로 생긴 상처는 평생을 간다. 또, 남자들은 화해도 금방 하지만 여자들은 한번 배제되면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 남성들의 공격성은 격투 스포츠가 될 수 있지만 여성의 공격성이 스포츠가 된다면 선수 중의 대다수가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여자들의 모임은 소규모로 자세히 살펴보면 리더 하나에 구성원이 맹목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각각의 가치관. 학식, 환경, 등에 따른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없고 언제나 공감대가 넘쳐흘러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발전은 있을 수도 없고 모두가 비슷해야 하고 누군가 발전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면 그룹으로부터 점점 배제되기 시작한다.

학교나 사회생활에서는 제한적인 그룹핑으로 그 폐해가 적고 여성들도 성인이 되면 단체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이런 성향에서 벗어나지만 한국에서는 온라인에 여성전용 커뮤니티가 생기면서 수십만으로 군집을 형성해 벗어나기는커녕 사춘기 소녀보다 더 심한 폐해가 발생하고 있고 이는 페미니즘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고 있다.

1. 그룹핑과 생떼
남자들은 친구가 머리를 이상하게 자르고 오면 “머리 그게 뭐냐?ㅋㅋㅋ” 라고 하겠지만 여자끼리 그런 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해도 예쁘지 않아도 모두 옹호하고 예쁘다고 해야 한다. SNS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이 때문에 싸이월드를 시작하자마자 그만두었다.
온라인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아닌 자신이 속한 그룹의 뜻에 맞으면 ‘222’, ‘사이다’ 라고 한다.
스스로의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생각은 다르지만 반대 의견을 쓰면 배제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의견 개진을 할 수 없다.

다음은 생떼로 이들이 다른 공간에 나갔을 때 주로 발생한다.
커뮤니티 내에서는 논리가 있는 글이든 아니든 막강한 추종자들이 자신의 말에 무조건 동의해주기 때문에 대단한 지식인으로 불린다. 그러나 다른 여성의 그룹이나 아니면 남녀 모두 섞인 커뮤니티에 가면 반대의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것에 기분이 나쁘고 대응 논리가 없어지면 말꼬투리를 잡고 물타기를 하거나 그것마저 안되면 생떼를 부리고 정신승리를 한다.

그 정신승리는 졌다는 의미가 아니고 너희들 같은 수준 떨어지는 것들하고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본거지로 돌아와 위로를 받거나 같이 싸워줄 동료를 구한다.
오프라인에서는 남성들의 이목 때문에 젊은 여성이 '빼애액~' 하는 생떼부리기를 보기 힘들지만 문제는 온라인이다. 오프라인에서는 개인의 일탈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온라인에서는 그룹의 힘이 커지고 익명이 보장되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들에게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엄청난 소비력과 단합력까지 갖추고 있고 점조직같은 남성들의 그룹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방송국 게시판에 가면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2. 따돌림
누군가 구성원보다 잘 나가거나 또, 누군가 그룹의 의견에 반하는 말을 하면 공격이 시작된다.
전자의 경우는 평범한 한 여자가 의사와 결혼했다고 가정해보자.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지만 나머지 친구끼리 하나 둘씩 불만을 드러낼 것이고 의사와 결혼한 여자는 이 사실을 듣지 않고도 안다. 그 그룹은 더 이상 유지가 힘들며 의사와 결혼한 여자는 그룹에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자신을 따르게 된 몇몇 구성원을 데리고 리더가 된다. 수준이 달라져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그룹이 지속된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다. 그렇게 발생한 열등감은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비교해 싸우기도 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마음이 식어간다.
보통 성인 여성의 경우 이런 경향이 드물지만 한국에서는 성인 여성에게도 많이 나타난다.
이런 큰 사건이 아니라도 그룹에 따라 단순히 책을 좋아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도 공격이 시작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내가 받은 악플이다.
내 만화는 온라인의 한국 여성들이 공유하는 가치관에 반하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오프라인에서 보면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룹에 속한 이상 숨길 수 밖에 없고 다수의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도 할 수 없다.
실제로 한 여성이 나도 사야카 당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나를 옹호하는 리플을 쓰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오기도 했다.

3. 창녀, 걸레
한국 여성들은 대부분 매춘을 성상품화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보지만 창녀에는 감정이입을 해서인지 옹호하는 편이다. 마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성들은 남성보다 창녀를 더 경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룹에 반하여 배제되면 철저하게 따돌린다. 그리고 소문을 퍼트린다.

여기서 주로 이용하는 소문이 바로 '창녀' 또는 '걸레' 이다.
배제된 여성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남자에게 선택 받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은밀하게 공격하는 이유도, 창녀, 걸레라는 소문을 내는 이유도 모두 남성을 의식해서이다.
한국여자들은 언어가 남성위주로 만들어졌다면서 바꾸길 원한다. 그렇다면 이런 은밀한 단어의 정의부터 바뀌어야 한다. 창녀나 걸레의 정의에 추가로 여성이 여성을 따돌림 할 때 내는 소문이라고 적어야 한다.

위 내용은 나에게 일어난 한 사례를 축약한 것으로 모든 공격 형태를 기술하려면 책을 따로 만들어야 할 정도가 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여자들의 공격성은 남성과 방법이 다를 뿐 크기는 동일하다.
외상이 없고 감정은 수량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지만 남성에 의한 그것보다 피해도, 후유증도 크다. 또한 여성들만의 은밀한 싸움으로 남성이 눈치채기 힘들고 눈치를 채더라도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여자들'만'의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식적이고 발전이 없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여자선생님조차 여학생 반을 맡기 싫어하고 남자 부하직원이나 상사를 더 선호하는 여성들도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여성에 의한 여성혐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혐오가 아니라 단지 피곤해서이다.

커뮤니티에서 살면 ‘나’는 없어진다.
여성만의 커뮤니티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나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3-3 일본여자는 노예

온라인상의 한국여성들은 내가 남편에게 하는 행동이 노예나 다름없다고 한다.
마트에 가서 피곤한 남편 대신 짐을 들거나 남편이 퇴근하고 목욕 준비를 하고 옷을 챙기는 것에 특히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대표적인 반응은 아래와 같았다.

'같은 여자로서 창피하다. 자존심도 없나?'
'주체성 있는 삶을 살아라'
'마인드 자체가 남자의 노예다'
'남자한테 그렇게 잘 보이고 싶나? 결혼도 했으면서 창녀 같은 짓 하지 마라'
'얼마나 돈 많은 남자를 만났길래 그러나?'
'개념녀 코스프레 하지 마라'

그들 말로는 일본은 여성인권이 바닥이라 일본인인 나도 남자한테 빌붙어 비굴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반면 중국만 봐도 남자가 다 해준다고 그쪽 남자를 만나지 왜 하필 한국남자를 만나 결혼했냐고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 빌붙어 산다고 말하다가 중국남자한테 빌붙으라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어찌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지 말문이 막혔다.

주부가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여자가 짐을 들면 남자의 노예이고 남자가 짐을 들면 여자의 노예가 아니라 주체성 있는 삶이 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평범한 월급을 받는 남자에게는 못 하겠다는 말이다.

저들은 남자를 경제적, 육체적 도구로 보고 노(奴) 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왕자님은 필요 없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권위에는 누구보다 위축되기 때문에 짐도 들어야 하고 막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을 위한 몸종인 노(奴)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은 당당한 공주처럼 살고 싶어하지만 내가 볼 때는 ‘비(婢)’일 뿐이다.

한마디로 부자 남편이라면 그나마 할 수 있는 행동이고 부자 남편이 아니라면 자신의 노예로 삼아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여성 4명 중 3명이 대학교육을 받는 한국에서 이 따위 교양이 난무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여성들은 자성해야 한다.

일본에는 한국 여성처럼 여성인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특권이 거의 없다.
어떤 고귀한 가치를 가진 여성들이라 저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1인분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비단 온라인에서뿐만 아니다.
남편 말에 의하면 주변의 기혼 남성 동료들 중에서 아내가 전업주부인데도 아침밥을 먹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고 한다.
심지어는 출근할 때 아이와 잠을 자고 있는 주부도 있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상식이 한국에서는 점점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아침밥을 먹고 다니는 정상인 나의 남편은 비정상이 되어 필요 없는 부러움을 받거나 가부장적인 사람으로 오해까지 받는다고 한다. 아침밥만 먹고 다녀도 가부장적이라니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여자보다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남자가 짐을 드는 것이 당연할까?' 이다.
페미니즘을 닮아 한국 여성들도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꿔 강자와 약자를 오고 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제 그만 일관성이 보였으면 좋겠다. 강한 여성을 표방해도, 약한 여성을 표방하더라도 일관성만 있다면 한국남성들은 너그럽게 이해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힘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짐을 '당연히' 남자가 들어야 하는 것은 절대 당연하게 생각할 현상이 아니다.
강자가 베푸는 배려를 약자라고 해서 당연하게 받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약자라면 당연히 배려 받고 소수라면 당연히 옹호 받는 일방통행인 관계는 틀어지기 마련이다. 강자에게 아량이 필요하듯이 약자에게도 예의가 필요하고 품격이 필요하다.
소수, 약자, 피해자 등이 특권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주부의 역할이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이름없는 보병으로 싸우고 돌아온 남편이 잠깐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가짐이다. 온라인에서는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주부의 역할은 한국에서도 같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 자신을 속이고 정반대로 퇴근하는 남편에게 "신발을 벗기 전에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와" 라고 그렸다면 어땠을까? 또, 무거운 짐을 다 들어주는 "한국남편 편하다" 라고 그렸다면 어땠을까?

‘언니! 사이다’와 ‘2222’를 받고 이 시대의 걸크러쉬가 되었을까?
마음 속의 양심은행이 파산 나있는 상태이다.

3-4 김치녀

된장녀, 김치녀, 맘충, 김여사.....

여성 모두를 비하하는 단어가 아니라 개념이 없는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이다. 이런 단어가 쓰인다고 해서 여성은 혐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여성 혐오가 아니라 조롱이다.

혐오라는 단어는 엄격하게 제한해서 쓰여야 하는 단어로 위와 같은 가벼운 비하에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런 단어를 쓰는 남성들을 옹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분명 올바른 언사는 아니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는 단어의 이미지로만 해석하지 말고 속 뜻까지 꼭 한번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김치녀’ 는 여러 설명이 많지만 대표적인 정의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여자’ 이라고 한다. 아마 대부분 ‘의존’ 의 느낌이 나쁘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홀로 선다는 ‘독립’ 은 좋은 것인가?
아래의 문장을 읽어 보자.

"오랫동안 '홀로 서있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마음을 기대어 존재하니' 무척 행복하다"

아마 ‘의존’ 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조금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은 한자교육이 사라져 많은 사람들이 한자 단어를 이미지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구축함', '순양함' 이라는 단어를 듣고 대충 ‘전투하는 큰 군함’ 이라고 이미지로 이해할 뿐 실제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런 이유와 더불어 한가지 더 이유가 있다. 여성에 대한 특징으로 많이 거론되는 ‘비논리’, ‘감성적’ 이라는 단어는 ‘논리’, ‘이성적’ 에 비해 열등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 ‘비논리’, ‘감성적’ 은 ‘논리’, ‘이성적’보다 우월할 수도 있고 열등할 수도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한 쪽이 우위에 있는 개념이 아니다.

문학이나 예술을 보면 비논리나 감성이, 수학, 과학을 보면 논리, 이성이 더 유리하다. 마찬가지로 ‘의존’ 도 ‘독립’ 에 비해 나쁜 개념이 아니다.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때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했다. 동시에 남성도 여성에게 의존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의지)한 것이지 어느 한 쪽이 등골을 빼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현재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동등하게 독립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 후 의존, 비논리, 감성적 등의 단어는 남녀갈등의 구덩이에 갇혀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동등하게 사회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여성이 의존과 독립을 마음대로 오고 가며 이중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십 년 전 된장녀가 유행할 때는 사치를 하지 않으니 쉽게 벗어날 수 있어 그다지 반발이 크지 않았는데 김치녀의 경우는 의존성을 내세워 많은 여성이 스스로 여기에 속하기 때문에 크게 반발한다고 보는데 한국 여성들이 의존과 독립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일관성만 보인다면 김치녀 현상도 쉽게 벗어 날 수 있다.

만약 한국 남성들이 여성의 의존성을 이용해 여성을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한다. 반대로 한국 여성들이 남성의 독립성을 이용해 자신의 행복과 편함만을 추구한다면 한국남성들로의 비판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예비신랑이 일 그만둬' 라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여성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비판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아래는 한국 여성에게 받은 메일 내용 중 일부분이다.

"한국에서 여자가 얼마나 살기 힘든지 알아? 너는 쪽바리라는 소리 들으면 기분 좋냐? 맘충된장녀김치녀김여사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 받아. 아무것도 모르면 좀 닥쳐. 여남갈등 일으키지 말고"

일본인 여자로 한국에 사는 것은 물론 힘들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일 교류가 적어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 가득했다. 특히 일본여자는 아무한테나 대주는 걸레다, 몸가짐이 헤프다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다. 15년 전에는 오프라인에서 창녀소리를 들었고 지금은 평범한 주부인데 온라인에서 창녀소리를 듣는다.

당시에 나는 저 말을 듣고 안타까웠을 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에게 내가 처녀라고 설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따로 항변하지도 않고 그냥 나답게 살았고 시대는 변하고 편견은 사라졌다. 교류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다. 내가 만약 당시에 저 메일처럼 한국사람들에게 항의했어도 한국 사람들이 순순히 일본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유행어가 생긴 것이 유감이지만 사회현상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한 순간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국 여성들도 일관성을 가지고 갈등이 아닌 교류를 한다면 비판이나 조롱은 이내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로 현재는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나도 맘충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지만 맘충의 의미에는 공감한다.
의외로 많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한국 친구들은 아기를 낳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의 육아방법에 놀라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 때 한국 친구들이 나에게 한 변명은 현재 온라인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어느 날 패스트푸드 점에서 친구가 테이블 위에 딸을 올려놓고 똥기저귀를 갈았다. 주위 사람들도, 말 못하는 아이의 수치심도 고려대상도 아닌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화장실에 가라고 했지만 이미 갈고 있는 중이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너도 애 낳아봐라 안그러나ㅎㅎ" 였다.

"(나는 부모이고 애 키우기 힘들어 죽겠으니 비판하지 마라)너도 애 낳아봐라 안 그러나"
전체 마음을 대변하면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에게 문제를 지적하면 '니 가족이라면~' 과 '니도 ~해봐라' 라는 감정적 대응이 돌아올 때가 많다. 아이가 내 가족일 수 없고 당장 아이를 낳아볼 수도 없으니 할 말이 없어지는 동시에 어이도 없어진다.

몇 년 후 나도 아이를 낳았고 식당에서 기저귀를 갈아야 했는데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가 없었다. 차 키를 받아 차에서 갈고 왔더니 아들이고 소변 기저귀인데 아무데서나 갈지 뭘 그렇게 유세를 떠냐는 말이 나왔다. “너도 애 낳아봐라 안 그러나” 에 대응하기 위해 출산을 한 것도 아니고 기저귀를 차에서 갈고 온 것도 아니지만 대답이 고작 유세 떠는 엄마라니 무척이나 실망이었다.

또 식당에서 애가 땡깡 피워 힘들다고 미운 한살, 미운 두살, 미운 세살, 미운 네살, 미운 다섯살.... 이라고 SNS나 커뮤니티 할 시간에 육아일기로 아이의 행동과 말을 기록하고 예절 교육에 신경을 써야 한다.
0살부터 사회성을 키워야 한다는 핑계로 어린이집에 보내는데 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부모가 하고 있는가?이것 저것 비판해도 결국은 "그래, 니 똥 굵다" 라는 정신승리로 끝난다. 당신 아이의 똥도 굵으니 부디 화장실에서 기저귀를 갈아줬으면 좋겠다.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역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감정적이거나 인정에 호소하는 답변과 정신승리는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맘충은 남성들과 미혼여성들에게 비판 받고 맘충이 아닌 엄마는 맘충에게 비판을 받는다.
부모들의 비상식이 불러온 물고 물리는 맘충의 먹이사슬이다.

여러 대화에서 봤듯이 한국 여성들의 생각은 외부의 비판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비판을 하는 입장이 되어도, 받는 입장이 되어도 똑같다. 그러니 사서 스트레스 받으며 저런 비하 표현을 하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미러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다.
가상의 집단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면 신경 쓸 여유도 없게 된다.

언어는 공감을 받으면 유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어가 된다.
만화를 그리고 처음 ‘김치녀’ 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마침 나는 옆 집 한국아줌마에게 반찬을 선물 받았는데 그래서인지 '김치녀' 가 '나눔을 좋아하는 한국 여성'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한국 여성들에게 달렸다.
온라인에서 백날 ‘나는 아니다’ ‘일부다’ ‘여성혐오다’ 라고 해도 소용없다.
현실에서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고 여성들이 직접 나서 비정상인 여성을 소수로 만들어야 한다.

3-5 더치페이

대학 1학년 때 나는 복학생 선배가 5인분 밥값을 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학생인데 돈이 어디 있어?
나의 식사비용은 내겠다고 했지만 다른 여자동기들도 괜찮다고 이게 한국문화라고 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야만 했고 너무 불편해서 결국 다음 날 따로 찾아가 "어제 밥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돈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동기들은 바보 아니냐고 놀래댔고 점심시간만 다가오면 계속 복학생을 돌려가며 고르는 바람에 이래저래 불편해서 일부러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만 했다.

이 더치페이가 한국에서는 참 힘들다.
남편과 연애를 할 때도 몇 년에 걸쳐 설득을 해야 했다. 돈 내고 도망도 가보고, 우리 집 재벌이라고 거짓말도 해보고, 지갑 구경하는 척하고 돈을 넣어도 보고, 협박도 해보고... 생각나는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이해를 해주지 않으니 가히 돈 내는 것에 타고났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러다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화로 그렸다.
한국 여성들은 더치페이에도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하기만 하면 불편하게 느끼는 자들이 몰려왔다. 만화로 고속도로에서 더치페이를 하려다 실패한 일을 재미있게 그렸는데 나로 인해 더치페이 논란에 불이 붙었다고 마음대로 기사를 내보냈다.

만화를 그린 후 올린 더치페이 에필로그에서 나는 '더치페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 문제가 아니라 더치페이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져 감사하다는 표현이 없어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적었다.
더치페이 자체의 문제보다 한국 남성이 섭섭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당연함 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더치페이가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으면 최소 두 번 이상은 고마움을 표시한다. 받았을 때 한 번, 다음에 만났을 때 한 번이다. 한국도 두 번 까지는 아니라도 그런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예의지만 유독 남녀관계에는 이심전심이라 생각하는지 표현에 인색하다.

더치페이 만화로 쏟아진 반응은 정말 여러 가지였다.
'나도 낸다'
'지들이 내겠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여자는 꾸미는데 돈이 많이 든다'
'남자가 더 많이 먹는데 왜 반반 내야 하나'
'더치페이 해가면서 한국남자를 왜 만나'
'남자가 돈 더 번다'

나도 낸다는 반응에 비해 안 내는 여성들의 변명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변명만 있을 뿐 자신이 나쁘다는 반응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변명보다 내가 주목한 답변은 두 번째 '지들이 다 내겠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이다. 더치페이나 남녀평등을 가장 가로막고 있는 존재는 바로 이런 남성우월주의자들이다. 한국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의 안전, 정신의 행복 그리고 남은 인생을 위해 가장 피해야 할 경계 남성 1호이다.

반대로 한국 남성들이 경계해야 할 여성은 변명을 하는 자들이다. 남자보다 꾸밈비가 든다, 남자가 더 많이 먹는다, 더치페이 할거면 안 만난다, 남자가 돈 더 많이 번다. 모두 읽을 가치도 없는 비겁한 변명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이다.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헌신적으로 변하는지 남성 아이돌 그룹의 소녀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평소 어떤 성격이든 종속적인 자세를 취한다.
더치페이가 아니라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은행을 털어서라도 집값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에 빠진 여자이다. 몇 만원인 데이트비용으로 이렇게 논란이 큰 것을 보면 대한민국에 사랑이라는 관념이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남성은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여성에 비해 취업시기가 3년 정도 여성보다 느리다. 20대 취업률도 남성과 비슷하고 임금도 비슷하다. 결혼비용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어 일로 고생한 자신을 위해 고가의 선물을 사거나 해외여행도 많이 간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더치페이는 싫다?

돈을 내고 안 내고는 개인의 선택이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더치페이'가 안되면 '염치페이'라도 해야 한다. 염치라도 있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감사함을 표시하면 그나마 양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핑계로 돈도 낼 수 없고 마음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더치페이와 비슷한 문제로 결혼비용이 있다.
내가 사는 일본 중부지방은 관동(도쿄)과 관서(오사카)사이에 있는데 대표도시로 나고야가 있다. 나고야는 혼인을 성대하게 하는 문화 때문에 딸 셋이 있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한국은 반대로 아들 하나만 있어도 집안이 휘청거리고 노후 준비는 물거품이 된다.

아직도 신랑의 61.5%, 신부의 64.5%가 집은 신랑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혀 그렇지 않다는 대답은 불과 5%이다. 여성에게 결혼적령기가 있다면 남성에게는 결혼적령액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흐름상 같이 부담하는 쪽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논란 없이 자리가 잡히려면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다.
집안 대 집안이 결합하는 한국의 결혼문화이다.
개인 대 개인으로 변한다면 큰 논란은 없을 것이다. 여성들도 어머니처럼 살기 싫은데 남성에게 아버지처럼 해오라는 것은 부당하고 남성들도 아버지와 같은 책임을 내려놓고 여성에게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바래서는 안 된다.

시대 흐름에 남녀의 의식이 지체되지 않고 따라가는 동시에 처음부터 전부 갖춰서 시작하는 결혼이 아닌 허세를 버리고 작은 것부터 시작해 같이 만들어 나가는 문화가 자리 잡히길 바란다.
아쉬운 부분은 애초에 한국 여성들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작은 성의를 보였다면 이런 논란 없이 한국만의 좋은 문화로 남을 수 있었는데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몇 해 전부터 ‘가성비’ 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남성들이 여성들처럼 연애와 결혼에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하였다. 아무쪼록 3대 불량채권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남성에게 3대 불량채권은 집대출금, 아내, 자식이다.


3-6 군대와 출산

한국에 15년 째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군대와 출산이다. 출산은 자유지만 군대는 의무이다. 처음부터 서로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군가산점이 없어졌고 군인에 대한 고마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성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주장은 나의 학생으로부터 처음 들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들과 취업경쟁을 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군가산점을 부활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여성징병제인데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불만이 상당히 심하다 느껴졌다.

이와 같은 문제를 페미니스트에게 군대를 물으면 남자가 군대 만들고 남자만 군대 가라고 남자가 정했으니 여자한테 따지지 말라고 하고 보통 여성들에게 물으면 보통 출산을 얘기하며 방어를 하고 일부 여성들은 "우리는 애 낳아주잖아요"라고 한다.

나는 실제로 한국 여성들이 "애를 낳아준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낳는다"가 아니고 "낳아준다" 이다 대응할 말이 없으니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낳아준다 라니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꼴이다. 이렇게 서로 할 수 없는 것을 내세워 감정적으로 싸우니 비난만 오고 갈 뿐 답이 나오지 않는다.

비교하기 힘든 문제지만 남녀문제를 빼고 현상에 대해서만 비교를 해보자.
먼저 군대는 의무이고,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다.
즉, 군대는 안 가면 처벌받지만 출산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군대는 거의 대부분의 남성이 가고 출산은 그렇지 않고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게다가 군대는 기쁜 마음으로 가는 곳이 아니지만 출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이에 남성에게 쟁점은 군대로 인한 학력단절, 여성에게 쟁점은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리함을 한국정부는 어떻게 보상하고 있는지 봐야 한다.
먼저 학력단절로 생기는 공백 약 3년(남녀 취업연령 기준), 급여10~20만원, 군가산점은 없다. 그리고 출산은 출산휴가로 생기는 공백 약 90일(쌍둥이 120일), 급여보장 그러나 제도는 갖춰졌지만 쓸 수 없는 여성들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출산의 경우 사회문제로 인식되어 지속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고 보완하고 있지만 군대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가끔 몇 년마다 한번씩 토론 프로그램에 나올 뿐 제대로 공론화 된 적이 없다.

여기서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두 가지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군대의 보상이 미진한 것을 아는데 가만히 있는 것일까? 다른 하나는 왜 한국 여성들은 자신들의 안전이 걸린 문제에 소극적일까?

내가 만난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은 한국은 애국하면 바보가 되는 나라라고 하면서 나의 아들은 꼭 일본국적을 얻어 군대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예전에는 아이도 없는데 만약 한국남자랑 결혼해서 아들 낳으면 군대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조금만 난처해해도 비판을 받았는데 이제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온 것을 보면 곪아서 터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보면 된다.

500여년 전 일본과 조선과의 전쟁인 임진왜란에서 의병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왕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의병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아서였다. 한국은 과거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국가에서부터 군인의 대우를 하찮게 하니까 군인이 우습게 여겨지는 것이다.

월급으로 10만원 받는 군인을 어느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하루빨리 군인의 처우개선에 노력해 군인들에게 최소한 최저임금을 적용한 월급이라도 주도록 하고 희생된 시간에 대한 보상책도 마련하여 최소한 명예라도 지켜줘야 한다.

나는 한국남성들이 여자들도 군대 가라는 말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
더치페이도 1원까지 나눠서 반반 내자는 말이 아니라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싶은 것처럼 군대문제도 자신들의 처지를 알아주지 않아서 나오는 푸념이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합당한 보상과 명예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만약 휴가나온 군인들을 누구나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고 어디를 가나 대우해주고 지하철에서 군인을 보면 자리양보해주고 군대 이야기하면 잘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했다면 지금 남자들이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센언니가 되어 군대에서 강함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면 분단국가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라도 하고 최소한 남성들을 존경하고 공감하고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4장 한국남성

4-1 호구와 찌질이

4-2 남성 수난사회

4-3 우월의식을 버려라

4-4 딸바보

4-5 울지 않는 한국남자

4-6 남성보호법의 필요성

4-7 한국남성은 어디로

5장 일본과 비교

5-1 마케이누(負け犬)와 상폐녀

5-2 남성학이 필요할 때

5-3 한국여성의 미래

6장 나가는 글

여성혐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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