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후작
(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

개요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천재적인 외교술로 유명하다.

생애

프로이센 쇤하우젠에서 융커의 아들로 태어났다.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후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847년 프로이센 의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1848년 베를린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그는 반(反)혁명파로 활동하였고, 185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석, 이때부터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해야 한다'는 '소(小)독일주의' 통일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주재 대사와 프랑스 주재 대사를 거치면서 국제적 외교감각을 지닌 정치인으로 성장하였다.

1862년 빌헬름 1세의 지명으로 수상(kanzler)에 취임(1873년 퇴임)하였고 이후 1862년 12월 1일에서 1866년 12월 31일까지 빌헬름 1세의 대리청정을 직무 수행하였다. 수상 취임 후 첫연설에서 군비확장을 주장한 철혈정책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철혈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하여 1864년 덴마크를, 1866년 오스트리아를 제압하였고 이후 일으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년-1871년)에서 승리하여 독일 제국을 선포,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1871년-1890년까지 독일제국의 제국수상(Reichskanzler)으로서 유럽 외교무대를 주도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했다. 3제 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3국 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수 많은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였고,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베를린 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국내적으로 1872년부터 남부독일의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문화투쟁을 벌였으며,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를 억제하였다.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과 식민지 획득을 장려하여 아프리카에 독일 식민지를 획득하는 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1890년 빌헬름 2세와의 정책 갈등으로 사직, 정계은퇴를 하였다. 1898년 7월 30일 사망했다.

비스마르크는 일찍이 그의 정치가로서의 경력에 있어 독일 통일의 기회가 있을 것임을 인식했고 하나의 통일국가로서 프로이센을 준비시키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