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柳寬順
유관순.jpg
기본 정보
국적
성별
여성
본관
고흥(高興)
출생
1902년 12월 16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사망
1920년 9월 28일(향년 18세)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사인 고문과 가혹 행위
본관
고흥(高興)
학력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
종교
가족
오빠 유우석 동생 유관석
부모
유중권 이소제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유관순(柳寬順, 1902년 12월 16일 ~1920년 9월 28일)은 독립운동가이다.


하나님이시어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매봉산 자락의 묘비에 적인 유관순 기도문


개요

이화학당 재학생으로 중 고향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손수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3.1 독립만세를 주동하였다. 독립만세운동에서 일본 순사의 총탄에 부모를 잃고, 유관순 자신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도 불의에 항거하다가 1920년 9월 28일 17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은 개신교를 믿는 부모의 밑에서 자랐으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으며 자라났다.

그는 묘비에 새겨진 기도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확고한 믿음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철저한 기독교 신앙교육 아래 다져진 그의 믿음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기도다.

그의 유언장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중[1]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당시 찍은 사진


년보

  •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 1905년, 유관순은 이 전후 시기부터 약 5~6세까지 탑원리에서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해에 감리교 지령리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10년, 유관순나이 9세 때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였다.
  • 1914년 13세 때 사애리시(Alice Hammond Sharp, 史愛理施) 선교사 주선으로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 1915년 14세 때 서울 정동교회에 손정도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 1916년 15세,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 2년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였다.
  • 1918년 17세, 유관순이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그해 8월에 미가 폭등으로 8월 28일 종로소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경성구제회미염매소의 판매소에서 민중소요가 일어났다. 10월에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였으며 한국인은 전체인구의 3명 중 한명꼴인 742만 2,113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
  • 1919년 18세,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 1919년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 1919년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 1919년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마을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 1919년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 1919년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 (2.8 독립선언)
  •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 1919년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 1920년 1920년 19세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


유적

  • 천안시유관순기념관
  • 유관순열사유적
  • 아우내독립만세운동유적
  • 이화여고유관순기념관
  • 서대문형무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