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jpg 대한민국의 대통령
우파계열 좌파계열
제1-3대 제4대 제5-9대 제10대 제11-12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노태우 김영삼[1]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제18대 제19대 제20대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 탐라 · 발해 · 후삼국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 강점기 · 임시 정부 · 대한민국 · 북한
이승만
李承晩
이승만2.jpg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1948년 7월 24일~1960년 4월 27일

초대

윤보선(제4대)
부총리
이시영 (1948년~1951년)
김성수 (1951년~1952년)
함태영 (1952년~1956년)
장면 (1956년~1960년)
총리
이범석 (1948년~1950년)
장면 (1950년~1952년)
장택상 (1952년)
백두진 (1953년~1954년)
변영태 (195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대통령
1919년 9월 11일~1925년 3월 23일

초대

박은식(제2대)
국무총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1, 22대 주석
1947년 3월 3일~1948년 8월 15일

김구(제20대)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1919년 4월 23일 ~ 1919년 9월 11일)

장도영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제2대 위원장
(1919년 9월 ~ 1920년 4월)

김규식

현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제5대 위원장
(1921년 9월 3일 ~ 1941년 3월 3일)

서재필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제6대 위원장
(1941년 3월 4일 ~ 1948년 5월 10일)

이승만

임병직


출생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사망
1965년 7월 19일(향년 90세)
미국 하와이주 호눌룰루시
본관
전주 이씨 (全州)
정당
자유당
학력
배재학당

조지워싱턴 대학교 철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 철학박사
부모
이경선(아버지), 김말란(어머니)
배우자
박승선,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
이봉수(친자)
이강석(양자)
이인수(양자)
종교
개신교(감리교)
웹사이트

소개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건국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지냈다이다.

본관은 전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대통령이다. 학위 논문 제목은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2] 1960년 4.19혁명에 의해 하야 후 하와이로 요양 갔으나[3], 병세가 나빠져 하와이에서 서거했다.


건국의 아버지, 우남 이승만

이승만을 모르면 인간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 전성천 박사의 가르침, 전광훈목사

이승만은 학사, 석사, 박사를 4년 5개월만에 수행한 유일한 사람이다.
― 전광훈 목사

기독교인은 의무적으로 애국자가 되야하는 것이다.
― 전광훈 목사



'우남'이란?

우남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이다. 대개 당시의 사람들은 이름 대신에 부르는 호를 지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호 우남(雩南)은 서울 남산의 '우수현'이라는 곳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생각해 우수현의 우(雩)와 남산의 남(南)자를 따 우남(雩南)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취임 전의 생애

한성감옥에서 수감자로

1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의 모습, 이승만은 사형수로 가슴과 목을 쇠사슬로 묶여져 있다.

이승만이 태어나서 살던 시대는 조선 왕조였다. 청년 이승만은 개화파 단체인 독립협회의 총대의원으로서 왕정개혁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왕조 시대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용어를 이야기하며 개화 운동을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당시 절대왕권을 옹호하던 고종에게 독립협회와 이승만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고종은 결국 자신을 폐위시키려 했다[4]는 죄목으로 이승만을 잡아들였다. 갓 24살이 된 청년 이승만은 재판도 없이 차디찬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고, 1899년 1월 9일부터 1904년 8월 7일까지[5] 추운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장장 5년 7개월 동안 이어진 수감생활은 전근대 수감시설의 열악함을 생각해보면 지옥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지도자로서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자기 계발에 매진했다.

이승만은 사형선고를 받은 미결수였기에 언제 처형될 지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공포 속에서 배재학당에 다닐 때부터 지니고 있던 성경에 관심이 가게 되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밤에 촛불을 켜놓고 일영사전을 읽으며 영어단어를 모조리 외웠고, 선교사들이 반입해준 각종 책자로 영어 문장을 익혔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국민 계몽의 뜻은 빛을 잃지 않았는데 이승만은 차가운 감옥에서 죄수들을 불러 놓고 신학문과 성경을 가르쳤다.[6]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당대 조선인들을 위해 최초의 조-영사전(지금의 한영사전)을 만들던 이승만은 러일전쟁에 관한 소식을 접한 후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주 내용은 당대 서구열강과 같은 선진국을 모델로 조선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화파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각 개인이 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은 한글로 쓰여졌는데 이는 일반 민중들도 쉽게 읽어 지식인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도 독립정신을 지니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출판의 자유가 없는 전제국가 조선에서는 발행될 수 없었고 지인들이 나서 미국으로 원고를 가져간 후 책으로 발행되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조선 지식인들은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다고 한다.

20대의 대부분을 감옥에 바치고 29세인 1904년 8월 7일에 이르러서야 민영환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인권과 법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왕조의 미개함에 대한 환멸과 책으로만 보아았던 선진 미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유학과 박사학위논문

이승만은 1904년부터 1945년까지 42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가장 먼저 다닌 대학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위치한 조지워싱턴 대학이다.[7] 이어서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을 전문 분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프린스턴 대학미국 대통령을 여럿 배출한 학교로 프린스턴 대학 출신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그의 스승이었다. 우드로 윌슨은 사람들에게 이승만을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고 종종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로서 당시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 또한 당시로서도 그 독창성이 두드러진 탁월한 논문이었다. 흔히 우남을 '이박사'라고 세인이 호칭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 대해 이승만을 평가절하하려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에서 악의적 편집을 했으나, 그것은 근거가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독립운동

이승만은 1919년 9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44세의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고, 국무총리는 이동휘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고 이동휘는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이동휘 외에도 임시정부에 여러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이동휘는 임시 정부에 좌익들을 규합하여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고 이어서 1921년 1월에 여운형, 김두봉 등과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공작금 40만 루블을 받아 임시정부 조직을 소련식 '위원회' 편제로 하자며 이승만을 압박했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했다.

이 때 이승만을 압박한 사람들에는 이동휘 말고도 여운형, 안창호, 이동녕 등이 있었다. 결국 이들은 1925년 3월 다수파를 만들어서 이승만에게 구미위원회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씌워 대통령직에서 탄핵하였다. 이승만의 나이 50이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이후에도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활동을 했다. 국제연맹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고 미국에서도 조선에 대한 일제 식민지배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이승만은 3.1 독립운동의 뿌리

3.1 운동의 직접적 동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나중에 제28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접하고 '모든 민족은 스스로 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4개 독립운동 단체를 모두 움직여 '언젠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적인 반응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의 부탁이 3·1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3.1 운동은 민족 독립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현상적으로는 실패했지만 3.1 운동의 뿌리가 된 기독교 정신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화될 위기의 상해임시정부를 지켰다. "해방 전의 백범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보다도 더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상해임시정부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것이다. 기독교인이었던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서 상해임시정부에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3.1 운동 이후에도 하와이 한인학교에 본부를 두고 사탕수수밭에 일하러 온 7000명 되는 조선인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며 해외에서도 3.1 운동을 계승하려 애쓴 것이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백성들을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암울하던 1880년대의 조선에 와서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대표적으로 학교, 병원, 교회를 지어 주었다. 그것이 조선을 살리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한국 교회는 민족을 개화하였고 독립운동에도 큰 기여를 한 것이다.[8] 이 때만 하더라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구, 안창호, 이상재, 조만식과 좌익 핵심이었던 여운형, 김규식 까지도 신앙 공통체로서 함께하였는데 이들이 당시의 기독교인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결혼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와 1934년에 그들은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10월에 뉴욕에서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35세, 이승만의 나이 60세였다.

이승만의 반공사상과 귀국

독립운동가의 상당수가 공산주의자 였고, 나머지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 계열도 공산주의에 대해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던 상황에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고집했다. 이러한 반공 노선은 미국에서도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인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미국이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치는 반공 활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은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미 국무부의 끈질긴 방해로 조기에 귀국할 수 없었다. 결국 그와 친분이 있는 맥아더 장군이 주선해준 수송기를 타고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71세였다. 참고로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했을 때, 맥아더의 나이는 71세, 이승만의 나이는 76세였다.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세계를 뒤흔든 것이다.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9].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10]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11]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정읍 발언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소련 군정은 군대를 창설했고, 이듬해 1946년 2월 8일에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 북한의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고, 3월에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이미 북한의 공산정권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38선 이남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남북협상 등에 기대를 걸며 제대로 된 정부수립이 지지부진했다. 이러던 와중에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항할 단독정부라도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를 정읍 발언이라 한다. 이 발언으로 인해 북한의 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할 대한민국과 정부가 탄생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정읍 발언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남북 분단의 원인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정의 좌우합작 추진과 이승만 배척

미국은 이승만의 강한반소(反蘇) 성향과 반공정신을 부담스러워하여 그를 멀리하고,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 실현을 위해 공을 들였다. 이런 일은 미군정 인사들의 발언이나 기록에도 나와 있다.[12][13][14]

하지 중장의 정치ㆍ경제 고문 번스(Arthur C. Bunce)[15][16]가 1946년 평양을 방문하여 10월 6일 김일성과 회담했는데,[17]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한다.[18]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에는 발라사노프와 그의 부관 샵쉰도 동석했다. 번스는 남조선에서 우익은 좌익을 반대해 투쟁하고 좌익도 좌우합작을 원치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과 김구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며 박헌영도 정당들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한 반면 김규식은 인민에게 영향력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친일파와 투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번스는 김규식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는 박헌영여운형의 합작은 미군정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번스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일부 세력을 용납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 김구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에 기초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를 보아도 미군정은 박헌영 뿐만 아니라 이승만, 김구도 멀리하고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근래에 공개된 미국 CIA 문서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Rhee Syngman, the most ardent exponent of the anti-Soviet and antiCommunist feeling of the Right, had been consistently ignored by the Military Government since his removal from the chairmanship of the 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in March 1946, because of his personal recalcitrance and intense hatred of Soviet Communism. The Democratic Council then replaced Rhee with the moderate Rightist, Kim Kiu Sik, at the instance of US officials who were trying to clear the air for the Joint Commission meeting. After the deposition of Rhee the extreme Right continued to campaign for immediate independence and against trusteeship, but it was not until recently that this campaign turned against the US Military Government.

하지만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도 최종 결렬되면서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 된다. UN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총선거를 소련이 거부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불가피해지자 김규식김구가 이에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을 고집하는 바람에 미군정에게는 이승만 외의 다른 선택지는 사라진다.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노력[19]

1946년

6월 하지 장군의 좌우합작위원회 참가 권유를 거부.

6.3 전북 정읍에서 남한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

6.29 독립정부 수립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결성.

8.14 미 트루먼 대통령에게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는 전문 발송.

9.10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송.

9.12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을 받음.

10.28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성명.

12.2 독립정부 수립을 UN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처 미국으로 출발.

12.12 소련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남한에서 만이라도 과도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

1947년

3.10 (72세) 미 정부 관계자로서는 유일하게 힐드링 국무차관보가 이승만의 독립정부 수립 안을 지지하는 발언.

4.1 귀국하기 위해 워싱턴디시 출발. 출발 전에 미 국무부로부터 귀국 방해를 당함.

4.13 동경을 거처 상해에 들러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회견.

4.21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는 성대한 국민대회 개최.

5.24 우익 59개 단체가 이승만의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지지.

7.3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하지 중장과의 협조포기 선언. 가택연금을 당함.

9.16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남한 총선거를 주장. 소련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

9.21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

10.18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

11.14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

대통령 재임 기간

초대 대통령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제헌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재적 198석의 국회에서 180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건국 초기의 불안

공산주의자들은 더러웠지만 그들은 언제나 정의와 아름다운 말과 깨끗함으로 위장하여 군중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군중들을 움직여 신생 정부를 공격했다. 당시의 사회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특히 이런 불안은 제주도에서 먼저 발생했는데 제주도에서는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를 제주 4.3사태라 한다.

그런데 이때 제주도로 가서 여수와 순천에 주둔했던 14연대는 제주 4.3사태를 진압하라는 제주도로 가 남로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여순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부터 국가보안법을 시행하여 6.25일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숙군 작업을 실시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을 단행하면서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했을 때에도 국군 내에 간첩의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1952년 부산에서 열린 6.25 남침 2주년 행사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암살하려는 범인 유시태(柳時泰, 1890~1965). 그는 김시현(金始顯, 1883~1966) 등의 사주를 받았다. 권총의 불발로 암살은 실패하며, 범인들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다 4.19 때 풀려났다.[20][21] 김시현이나 유시태는 의열단원 출신이므로 북으로간 의열단장 김원봉이 암살 미수 사건 배후에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반란군들이 산 속으로 도망쳤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 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변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오해가 있었고, 억울한 희생도 많이 생겼다. 이러한 희생을 놓고 소련과 북조선은 남한 정부를 야만 집단인 것으로 선전했고, 지금도 좌익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매도한다. 좌익들은 또 미국과 맥아더를 증오한다. 이승만, 미국, 맥아더 이 세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김일성, 박헌영이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했을 텐데, 이 3개의 존재가 민족의 원수라는 것이다.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 저지

김일성박헌영이 남침한다면 100만 남로당원이 합세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 스탈린모택동의 지원약속 등으로 자신만만해셔 1950년 6월 25일에 6.25전쟁을 일으켰다. 장비, 인력, 우방국의 지원 등 뭐 하나 인민군보다 국군이 나은 것이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휘하의 국군은 그런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고 성공적으로 조국을 수호했다.

6.25 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에 38선을 넘지 말 것을 강요하는 UN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으로라도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는 이승만의 뛰어난 전략적 판단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군사력에서 훨씬 우세하였음에도 수세적으로 대처하다 패망한 것과 대조된다.

한미동맹 체결로 안보 불안 해소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

당시에 한국의 문맹률은 80퍼센트였다.[22][23] 국민 열에 여덟은 글을 모를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발전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공장 노동자를 하더라도 글을 알아야 매뉴얼을 읽고 기계 사용법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2년 부터 국민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했으며 성인 대상의 문맹 퇴치교육 또한 병행하여 실시한 결과 1959년에는 문맹률이 22퍼센트[24]로 급감했다.

경제성장을 위한 기술 도입과 자본 축적에는 고급 인력이 필요하다. 당시에도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이 있긴 있었으나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시급한 실용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의 수는 더욱 부족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갓 설립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백두진 총리에게 명령했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온 돈과 함께 인하공과대학(現 인하대학교)을 설립했다.

  • [김용삼 칼럼] 문명부강한 나라 거부한 김구, 산업사회 건설한 이승만 펜앤마이크 2023.12.20
    • 영암선(영주-철암 간) 철도 건설 - 석탄을 수도권으로 수송하여 가정용 및 산업용 연료로 사용 시작. 이후 박정희 정부의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이 가능케 함.
    •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에 연산 5만 톤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을 건설. 철강공장 운영에 필요한 기술진 양성을 위해 철강 국비유학생을 선발하여 서독으로 유학을 보냄. 이들이 귀국하여 후에 포항제철 설계에 참여함으로써 한국 제철산업을 일으킴.
    • 한국 최초의 계량적 기법에 의한 종합적인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계획 수립. 장면 정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토대가 됨.

원자력연구소 설립과 최초의 원자로 도입

1958년에 원자력기본법을 제정하고 1959년 2월 3일 원자력연구소(原子力硏究所) 설립하고, 국내 최초의 원자로(TRIGA Mark-Ⅱ)를 연구용으로 도입하였다. 20년 후인 1978년 한국은 세계 21번째로 원자력 발전국이 된다.

4.19 혁명으로 하야

4.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1960년 부통령 선거에서 자행된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고령과 통신 수단의 미비로 4월 26일에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태에 대해 인지하게 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로 인해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25]

라고 이야기하며 학생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보며 조선왕조라는 봉건사회의 부정에 맞서 싸웠던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27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하겠다.

라는 내용을 포함한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서거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서거하였다.

대한뉴스 제 530호-이승만 박사 장례

평가

주요업적


대한민국을 자유진영 국가로 지켜냄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하고 공산화로부터 지켜낸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를 보여주는 지도

스탈린은 2차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15개국을 합병했고, 20개국을 위성 국가로 만들었으며 일본으로부터 북방 4개 섬인 쿠릴 열도를 획득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든 후, 그 다음 날인 2월 9일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했다.

이처럼 소련이 영토 욕에 사로잡혀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을 때 어이없게도 미국은 한반도 자체가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조선을 포기했고, 이어서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이것이 북한과 소련의 오판을 불러 6.25전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다. 사실 베트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했지만 패했다. 그 이유는 베트남에는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다. 단지 영국은 강대국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이다.”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손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전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사 최초로 민주주의 체제 도입과 운영

당시 남한 인구는 북한의 2배로 많았지만, 1인당 GNP는 북한의 반도 안 되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한에 갔던 김구김규식 등의 눈에 북한은 선진국처럼 보였고, 남한은 후진국이었다. 전력의 96%, 석탄의 95%가 북한의 소유였다. 그래서 그들은 김일성에 아부하는 발언들을 했다.

이승만은 김구김규식이 벌이는 온갖 방해를 받아가면서 북한에 비해 1인당 GNP가 반도 안 되는 경제력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해 싸웠다. 1949년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특사로 미국을 방문했지만 미국 관리들은 ‘민주주의만 잘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원론만 들려주고 돌려보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71세인 노구를 이끌고 1945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74세였던 1948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그 후 12년 동안 문맹률 80%인 국민에게 주권이라는 것을 선물해주었으며 문맹 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남이야 전봇대를 뽑아 이쑤시개를 하든 말든, 남이야 절간 변소에서 낚시질을 하든 말든 웬 상관이야~” 이런 말들이 당시의 민주주의를 상징했다. 자유 방임이 곧 민주주의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선진국들은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피를 많이 흘렸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하늘(미국)이 준 선물이었고,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도 하늘(미국, 이승만)이 준 선물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국들처럼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잘 모른다. 그래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방해하는 무책임한 행태들이 아직도 고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어지러웠다. 일반 국민들은 연료 및 식량 부족에 허덕였고, 일부 부유층들에서는 부정부패, 양주, 양담배로 표현되는 사회악이 난무했다. 이는 깨끗함과 풍요를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대상이 되었다.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

당시 한국에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물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은 더 드물었다. 전근대 조선왕조는 유교적 통제경제체제를 운용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를 지배한 일본도 완전한 시장경제를 운용하지 못했다. 특히 1930년 이후로 중일전쟁태평양전쟁등으로 지배체제 존립이 위태롭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전체주의적 계획경제 시스템을 시행했기에 한국인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이해도가 결여되어 있었다.

제헌헌법만 보더라도 좌익 성향의 일부 의원들을 제외한 대다수 의원들이 공산주의에 극렬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이익분배균점권 등 사회주의적 통제경제를 상당부분 차용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부는 사회 일반의 이러한 인식 속에서도 적산공장 등을 국영으로 하지 않고 민간에 불하해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다. 물론 적산 불하로 일부 사람들이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차후에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기업은 망하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흥하는 과정 속에서 정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헌법의 통제경제조항들은 2차 개헌과 3차 개헌을 거치면서 차차 개선된다.

이승만의 기독교 건국 리더십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건국 리더십은 새 문서에서 다룹니다.

이승만 연보

역대 대통령관련 구술채록 사업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 PDF 파일 원문 - 국립중앙도서관
pp. 60~85 : 이승만 건국 대통령 연보


어록

60px-Information icon4.svg.png 본 어록은 자유경제원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한구절』을 출처로 합니다.
"새 국가를 만년반석 위에 세우자"
제1대 대통령 취임사(1948년 7월 24일)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정부의 권력은 시민으로 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그 위에 한 국가의 구조가 세워지는 기반이 된다. 국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 이념과 달리,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권리는 정부에 의한 그 어떤 침해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권리만 주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다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권리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이승만, 『독립정신』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한다."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에게 의존한다면 오늘의 세계에서 자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민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한때는 자유를 알았으나 당분간 그 자유를 상실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도 분리될 수 없다."
-이승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경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겨룬다는 뜻으로, 한 걸음이라도 남보다 앞서고자 하며 남보다 먼저 얻으려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거나 장사를 할 때도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든 그러한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 이승만, 『독립정신』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낡은 관습에 빠져있으면서 몸만 자유롭기 원한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이승만, 『독립정신』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우리 모두가 지구 표면으로부터 전쟁을 소멸시키기 위해 힘이 닿는 한 모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중한 무엇이 있습니다. 자유 없이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누리는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방미일기』
“전쟁은 악(惡)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나라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며, 죽음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 LA 시의회 연설(1954.8.6.)
“오늘 민주건설 첫돌 되는 날에 내가 기왕에도 여러 번 선언한 바를 다시 선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건설하는 이 사회는 안에서도 자유요 밖으로도 자유로만 될 것입니다. 모든 개인은 언어와 사상과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가질 것이나 오직 한 가지 금하는 바는 누구나 자기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허명으로 남의 자유를 침손하는 것만을 막는 것입니다.”
- 1949.08.15. 정부수립 1주년 기념
“정부의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그 위에 한 국가의 구조가 세워지는 기반이 된다.”
- 이승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민주국가 국민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처럼 적에 결사항전하기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연합을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개인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한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적에게 패배할 가능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중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고의 권위는 개개 시민이 가진 특권입니다."


"각 신문은 한국 국민이 자신의 새로운 자유를 향해 내딛는 출발에 대한 찬가를 합창하고 있습니다."

- 로버트 T. 올리버,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친애하는 대한의 동지들이여, 여러분은 나이나 성별 또는 직위와 관계없이 모두 대한제국에 속하고 이 나라 백성의 일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어깨 위에는 나라를 세워야 할 책임이 지워져 있습니다. 국민이 함께 협력하지 않은 주된 원인은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 이승만, 『독립정신』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조직된 사회로 여러 사람이 모여 의논하는 회의체에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은 큰 건물에 모여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자유롭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토론도 한다. 토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난장판이 되어 싸우다가 사람까지 죽이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같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공정한 법과 규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핸 적절한 사람을 선정하여 그로 하여금 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몸의 각 부분을 바로 쓰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있다.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자면 자신의 문제들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능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지금 세계 사람들이 자주권을 보호하는 것을 그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개명한 나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다."
-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마땅히 자유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사람들을 오랜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낡은 관습에 묶여있으며 몸만 자유를 얻으려 한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교육을 하는 근본 목적은 사람이 가진 지혜와 본성을 거울처럼 맑게 닦아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게 하여 잘잘못과 우열을 가리게 하려는 것이다."
-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나라를 도와서 나라가 잘되는 일만을 하며, 민중의 복이 되도록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것이 또한 민주정치의 큰 근본이 되는 것이다.”
- 1956년 9월 11일 경기도의회 의원일동에게 주는 치사

연설

1954년 7월 28일 미 의회 연설

저서 및 논문

미국에서 이승만의 저서 《독립정신(獨立精神)》이 출간된 것을 보도한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 4월 2일자 기사.
雜 報 ◎獨立精神의 出現 美國프린스톤 大學校에셔 修業 李承晚氏가 年前滯獄中에 著述든 獨立精神이란 冊子가 近日쓰쓰에셔 出版되야 一般內外同胞의 閱覽을 酬應기로다더라
'이승만전집발간위원회' 발족, 우남(雩南) 저작물 묶어 2026년까지


  • 이승만(李承晩), 《독립정신(獨立精神)》 :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저술. 국내에서 간행되지 못 하고,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26][27]
독립정신 원본 다운로드 (이승만 기념관)
독립정신의 출현(獨立精神의 出現) 황성신문(皇城新聞) 大韓隆熙四年四月二日土曜 (1910.04.02) : 독립정신 발간 소식 보도
리승만, 《독립정신(獨立精神)》, 서울 : 태평양출판사, 1954 : 최초의 국내출판본으로 보임.
Syngman Rhee (Author), Han-Kyo Kim (Translator), 《The Spirit of Independence: A Primer of Korean Modernization and Reform》 Paperback – October 1, 2000
독립정신 (이승만 지음 | 박기봉 교정 | 비봉출판사 펴냄, 2018-05-05)
전문 PDF 또는 Full text 다운로드 받기 archive.org
번역판 : 이승만 지음, 정인섭 옮김, 《이승만의 전시중립론》, (나남, 2000년 04월 15일)


이승만 지음 ; 김용삼, 김효선, 류석춘 (번역 해제) 옮김, 《쉽게 풀어 쓴 청일전기》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번역총서 4, (북앤피플, 2015년 03월 26일)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원문 PDF 스캔본 보기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원문 텍스트 사단법인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번역 : 만주의 한국인들(193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8권 구미위원부 Ⅱ > Ⅱ. 선전문건류 > 4. 1930년대 전반기 선전문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영문 1941년판 PDF 스캔본.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일본 내막기》 등의 제목으로 다수의 번역판 있음.

자료

1954년 방미시 8월 2일 뉴욕 카퍼레이드 영상
1954년 이승만 美국빈 방문… 뉴욕 카퍼레이드 영상 70년 만에 첫 공개 조선일보 2024/01/12
내달 1일 극장 개봉 앞둔 이승만 다큐 ‘건국전쟁’
  • Information on Korean Leftist, US-USSR 미군정 문서
    • p.18 : A few thumbnail sketches:기록자료 : 여운형 / p.21 이승만 약력
    • p.24 : Dr. Syng Man Rhee's political background - causes and reasons for his present status:기록자료, 1947.09.23

이승만 관련 저서

2001년 8월부터 12년 동안 111회에 걸쳐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연재 했던 것으로, 월간조선 홈페이지 지난 호 기사에서 검색 열람할 수 있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孫世一의 비교 評傳 (7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美軍進駐와 兩分되는 政局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1 하라출판 2013년 12월 05일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2 자유인의숲 2018년 11월 19일

이승만에 대한 오해

독립운동가 시절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했는가?

이승만은 왜 반민특위를 해산했는가?

6.25때 국민들을 속이고 혼자 도망갔는가?

보통 좌익들이 죽어라 물고 늘어지는 이승만 비판이, 바로 '런승만'이라며 조롱하는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다. 우남 이승만이 '직접'서울을 사수하란 방송을 틀어 시민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고, 그러면서 대통령 자신만 몰래 빠져나가려 한강다리를 폭파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건 결코 사실이 아니다. 우남 이승만은 결코 한강인도교 폭파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 그건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결정에 의한 폭파인 것이었다.

  • 한강교 폭파 타임라인
한강교 폭파.png

방송 내용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비판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이승만 정부이승만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를 재구성하고 각색한 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틀은 방송. 정작 이 방송이 들릴 시점에서 이미 이승만은 국군과 피난민들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 다리마저 끊고 서울에서 도망친 후였다. >------->그러나 이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무고한 시민들을 서울에 가둔채, '자신만 살려고' 일부러 방송했다는 것은 황당한 주장이다. 27일 당시 이승만 동정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 동정.png

보면 알겠지만, 참모진들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겨우 서울을 탈출시킬 정도로 이승만 자신은 서울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의 본심.png
외부링크

법원의 판결

한강인도교 폭파는 "정부와 국군, 의회가 서울 사수에 대해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며 "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 해도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 데에 대해서도 "서울 시민의동요를 방지하기 위한것"이라고 봤다.[33]

진실은? 6.25전쟁 개전 타임라인

1950년 6월 25일
  • 04:00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
  • 09:30 아직 북한의 공격을 몰랐던 이승만은 식사 후 경회루로 낚시를 하러 감
  • 09:30 같은 시각 프란체스카 여사는 치과에 치료를 받으로 감
  • 09:40 이승만이 남침에 대한 보고를 받음
  • 10:30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와 개성이 함락되었고 춘천 근교에 인민군이 도달했다고 보고
  • 10:30 이승만은 '국가수호를 위한 전쟁목표 4원칙' 설정
    1.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2.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친다.
    3. 북한의 불법 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해방 후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없어졌다
    4.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1950년 6월 26일
  • 03:00 서울 상공에 인민군 공습경보가 울리는 등 전황이 악회되는 것을 확인한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을 구하라고' 항의. 맥아더는 긴급지원을 약속함
  • 03:00 이승만은 워싱턴에 있던 장면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에게 무기지원 약속을 이행할것을 전하라고 지시
  • 14:00 이승만은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가 상황을 보고받음. 이때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고받음
  • 14:40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함
  • 오후 서울 상공에 인민군의 야크기가 계속 돌아다녔고 이때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방공호에 들어갈 정도로 상황이 긴박해짐
  •  각료들이 이승만의 피난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
  • 21:00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경무대로 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임으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 전반을 지도해야 된다"고 보고
1950년 6월 27일
  • 02:00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찾아와 피난을 간곡하게 건의하지만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주장하며 거절. 프란체스카 여사도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 존속이 어려워진다"고 피난을 설득하지만 이승만은 거절
  • 02:00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에 피난을 결정함. 이때 이 보고는 피난을 위한 참모들의 거짓말이라고 밝혀짐
  • 03:30 이승만은 열차에 탑승하여 남하하기 시작
  • 11:40 대구에 도착하지만 이승만은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을 명령
  • 12:30 기차는 서울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감
  • 오후   기차가 대전에 도착했으니 신성모 국방장관이 서울이 함락되었다고 전화함. 이는 이후 대통령이 서울에 오지 못하게 할 의도로 한 신성모 국방장관의 거짓말로 밝혀짐
  • 오후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 결의와 트루먼의 무기원조 명령 결의를 전달함.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기로 결정
  •   무초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와 미국의 참전을 전함. 이 말을 듣고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방송을 해야겠다고 상의
  • 22:00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해 "유엔과 미국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방송을 하기로 함

류석춘 교수의 해설

독재자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승만에게는 독재자란 프레임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헌헌법에 따라 1948년 국회 간선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2차 개헌이후 계속해서 국민의 보통·직접·평등·비밀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의 지지라는 민주주의적 정당성에서는 문제를 찾기 힘들다. 또 이승만이 집권하던 동안 행정·입법·사법부는 상당한 수준의 독립을 유지했다. 독재체제라면 보기힘든 권력분립과 민주주의적 제도 운영의 모습이다.

다만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된 이승만의 마지막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는 점은 과오로 평가된다. 부정선거가 자행된 이유는 고령인 이승만 서거 시 대통령이 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부정선거에 이기붕자유당 인사들이 가담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승만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위낙 고령이라 몰랐을 수도 있고[34] 중요한 일이었으니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4.19 혁명이 터져나오자 병원에 찾아가 시위로 인해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문하고, 이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나는 모습 등을 보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독재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이승만을 비방하기 위해 ‘팩트’를 지어내는 역사가들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를 좌파들이 장악해 가면서 학계에서 이승만에 대해 사료조작까지 해가며 비방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이승만이 해방 후 대통령이 된 것을 시기한 탓인지,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그를 비방하는 글을 남긴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이런 글들이 충분한 사실 검증없이 인용되어 이승만을 비방하는 원천 사료로 이용되고 있는 문제점도 있다. 기독교 목사이자 1963년에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은 현순(玄楯, 1880 ~ 1968)은 해방 후 미국에 살면서 6.25 남침을 임진미란(壬辰美亂)이라 부르며 김일성을 찬양하고, 이승만과 맥아더 장군 및 참전한 미군을 비난하고 있다. 임진미란(壬辰美亂)은 1952년이 임진년이므로 임진왜란(1592)에 빗대어 미국이 일으킨 난으로 부른 것이다.

좌파들은 김일성이나 박헌영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업적을 남긴 이승만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사료조작까지 해가면서 어떻게든 그를 폄하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李承晩)이 상항공동회에 보낸 서한(1908.3.25.) 독립기념관 이승만 편지 링크
[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임.]

서울대 교수 박태균의 경우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 유명 교수(역사학자)가 2년 전 어느 대중 강연에서 1952년 최초의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에 문맹률이 높은데 누가 기호 1번 차지하느냐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이승만 대통령이 기호 1번이에요. 당연히 (당선)되는 겁니다. 이건 뭐,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거고요······.”

...........

1952년 8월 5일 전쟁 와중에 치러진 제2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이 아니라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이었다. 이승만은 기호 2번이었다. 또한 전쟁 상황이었음에도 전국 투표율은 88.09%에 달했다. 사상 처음 치러지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국민 다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수치다. 그 결과 74.61%라는 실로 무서운 득표율을 과시하며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 관련 자료를 조금만 들춰보면 누구나 위의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번을 달고 출마한 조봉암의 선거 포스터도 수없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대중 앞에서 왼손 검지로 1자까지 만들어 보이면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와 문맹의 유권자들은 무조건 1번을 찍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저 역사학자는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가당찮은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가? 직접 확인도 하지 않고 지레짐작을 객관적 사실처럼 꾸며서 말했다면 용서받기 힘든 학문적 부정직(academic dishonesty)이다. 이승만을 폄훼하기 위해 고의로 그런 거짓을 말했다면 이념적 인격 살해이며 정치적 역사 날조이다.

위에서 말하는 서울대 유명교수는 박태균이고, 문제의 날조된 내용은 아래 강연 유튜브 영상에도 나온다. (문제의 내용은 38분부터)

TBC 방송에서 2020. 8. 6. 방송한 내용으로 보인다.[35]

박태균의 이승만 관련 사료 조작은 더 있다. 박태균은 미군정 기록을 근거로 이승만이 여운형 암살의 배후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박종인 기자가 아래 유튜브에서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자료를 잘 제시하고 있다.

역사강사 황현필의 경우

여담

  • 좌익의 주요 프레임에 걸리기 힘든 인물이다. 런승만이라는 프레임이 대표적이지만 일반적으로 좌익은 친일파, 독재자 프레임을 쓰는데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고 독재자 또한 유신체제를 이용한 박정희와 달리 4.19 이후 스스로 물러났기때문에 프레임이 성립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장개석 대통령과 반공을 매개체로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고한다.

아이비리그 출신이고, 미국에서 유명한 학자였기에, 미국 정재계에 학맥 인맥이 엄청났다.

(일 예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승만이 대학을 다닐 때 총장이었다. 한국전쟁 때 미국무부 장관도 이승만과 학맥으로 연결된 사람. 석유대재벌인 록펠러와 창업을 같이 했던 세브란스 병원으로 유명한 세브란스도 이승만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실제로 이승만 때 록펠러 3세가 방한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구명운동 까지 할 정도로 아끼던 인재였고, 이게 미국에 오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미국에서의 인맥도 선교사들이 소개해줘서 대단한 사람과 만나게 된 적이 많다. )

이게 신생독립국인 한국에도 엄청나게 작용했다.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던 것은 대한민국의 축복이었던 것.

학력으로 보면 어떤면에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였던 인물.

기념 사업

  • 2024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세계 속의 독립운동” 보훈부, 202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8명 선정·발표 국가보훈부(국문) - 보도자료 2023-12-26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제 와서야 선정된 초대 대통령 이승만 조선일보 2023.12.26
이승만,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처음 선정됐다 동아일보 2023.12.26
[사설] ‘이달의 독립운동가’ 시행 32년 만에 이승만 이름 올렸다니 조선일보 2023.12.26.
원로 배우 신영균씨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동향이다.
  • 4.19 이후 최초로 그의 동상이 휴전협정 체결 기념일인 2023년 7월 27일에 6.25 전적지 경북 칠곡의 다부동에서 제막되었다.
경북도,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자유진영 승리 재선포" 뉴시스 2023.07.27
칠곡 다부동에 세워진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뉴시스Pic] 뉴시스 2023.07.27

영화

근래에 2편의 이승만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 개봉되었다.

권순도 감독, 2023년 10월 27일 개봉
김덕영 감독, 2024년 2월 1일 개봉

역대 대통령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대수 성명 재임
제1공화국
1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2 이승만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3 이승만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제2공화국
4 윤보선 1960년 8월 12일 ~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
4 윤보선 1961년 5월 16일 ~ 1962년 3월 23일
5 박정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6 박정희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7 박정희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제4공화국
8 박정희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9 박정희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10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11 전두환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5공화국
12 전두환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제6공화국
13 노태우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4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5 김대중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16 노무현 2003년 2월 25일 ~ 2004년 3월 12일
2004년 5월 14일 ~ 2008년 2월 24일
17 이명박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18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19 문재인 2017년 5월 10일 ~ 2022년 5월 9일
20 윤석열 2022년 5월 10일 ~ 2027년 5월 9일 [36]

참고 자료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
임정·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재미동포 청년들을 미군 특수부대에 파견하기도

관련 사이트

함께 보기

각주

  1.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우파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참조 김영삼#김영삼 정권에 대한 평가
  2.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 전문 PDF 또는 Full text 다운로드 받기 archive.org ; 번역판 : 이승만 지음, 정인섭 옮김, 《이승만의 전시중립론》, (나남, 2000년 04월 15일)
  3. 건국 대통령 이승만 망명의 허구, 어디서 시작됐나?뉴데일리, 2016.06.27
  4. 이승만의 한국 최초의 시위에 해당된다.
  5.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09/08/13/2009081300052.html
  6.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09/08/13/2009081300052.html
  7.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5.이승만의 留學1.조지워싱턴大 중앙일보 1995.02.22
  8. 사실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독립운동 당시가 135년 한국 기독교 역사 중에 교회가 가장 부흥했을 때이다.
  9.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10.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11.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12. 좌우합작은 共委를 촉진, 탁치론보다 임정 수립이 선결, 지금은 왈가왈부를 논쟁할 때 아니다, 아놀드소장 담화 자유신문 1946년 07월 03일 1면 1단
  13.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26의 Hodge가 김규식에게 보낸 1946년 9월 18일자 편지부터 나오는 문건들
  14.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肖]"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
  15. 황윤희, 번스(Arthur C. Bunce)의 내한활동과 한국문제인식 숭실사학 2009, vol., no.23, 통권 23호 pp. 151-208
  16. 안종철, 해방 전후 아더 번스(Arthur C. Bunce)의 활동과 미국의 대한정책 미국사연구 제31집 2010.05 pp.139 - 167
  17. 번스(Arthur C. Bunce)와 김일성 대화록 : Беседы Банса с Ким Ир-Сеном 국사편찬위원회 :1946년 10월 6일 진행된 김일성과 번스의 회담 내용
  18.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 이승만 연보 이승만 학당
  20. ‘이승만 암살 시도’ 사진 미국서 공개 경향신문 2015년 04월 22일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순간 포착한 사진 공개 연합뉴스TV 2015. 4. 21.
  21. 당시 관련 신문 기사: 李大統領狙擊事件遂求刑(이대통령저격사건수구형) 金始顯柳時泰(김시현유시태)에 死刑(사형) 1952.09.04 동아일보 2면 / 金始顯(김시현)·柳時泰(유시태)에死刑(사형)! 1953.04.08 경향신문 2면
  22.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2/03/2014020300054.html
  23. [공화국 대한민국] 3.까막눈 조선이 문화를 창조하게 된 대서사극: 문맹률 90% 나라에서 문화강국 대한민국으로 박종인의 땅의 역사 2023년 6월
  24.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2/03/2014020300054.html
  25.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4/14/2014041400072.html
  26. 독립정신 위키백과
  27.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1) 미국서 출간된 이승만의 '독립정신' 조선일보 2009.12.19
  28. 이승만 90년전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 뉴데일리 2012.01.13
  29. 趙甲濟, 1923년에 공산주의 비판한 李承晩 조갑제닷컴 2008-07-25
  30.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Hardcover – September 15, 2017
  31. 「로버트·올리버」 중앙일보 1982.05.19 종합 9면
  32. <삶과 추억> 이승만 대통령 수석고문 로버트 올리버 중앙일보 2000.06.03 종합 21면
  33. 법원 "6.25 한강인도교 폭파 '위법행위' 아니다"
  34. 실제로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때문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업무 상당부분을 대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35.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ㅣ사회학자 박태균 [최강1교시] YouTube · TBC 2020. 8. 6.
  36.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