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천(최형우) - 승소옥 부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에 나오는 사진.

최형우(崔衡宇, 1905.10.11 ~ 1950.11.05)는 본명이 최일천(崔日泉)이며, 해방전 만주에서 교사 겸 문필가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기자와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 1, 2집을 간행했다. 1930년말 ~ 1931년 초 기간에 만주 회덕현(懷德縣, 怀德县)[1][2] 오가자(五家子)[3] 시절의 김일성과도 교류가 있었다. 6.25 때 인민군에 끌려가 처형 당했다.[4]

북한에서는 그를 최일천으로, 남한에서는 최형우로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에서는 최형우란 이름은 해방 후 서울에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를 간행할 때 쓴 필명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만주 시절의 기록에도 최형우로 나온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오가자(五家子)에 가 있을 때 최형우의 집에서도 몇 주일씩 유숙했으며, 최형우가 최천, 최찬선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했다.[5]

약력

그의 대체적인 약력은 아래와 같다.[6][7][8]

  • 1905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정주시 출생
  • 중국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서 성장하고 소학교 다님
  • 1927년 길림성 회덕현((懷德縣)[1][2] 오가자(五家子)[3]의 삼성학교에서 교원 생활
  • 1930년 가을 이후 오가자 반제청년동맹 위원장, 잡지 <농우> 주필로 사업
  • 1931년 12월-1945년 장춘과 베이징, 심양 등지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및 기자로 일함
  • 1945년 해방 후 서울에서 <동방문화사> 기자로 일함
  • 남한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신진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일성장군환영위원회 위원, 민족자주연맹 집행위원 등 중요 직책 역임
  • 1950년 11월 05일 : 6.25 전쟁 중 인민군에 납북되어 가다 처형 당함.[4]
  • 1989년 4월 3일자 노동신문에 「태양과 일생­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인 최일천 선생께 베풀어 주신 은정에 대한 이야기」란 기사가 실림.[9]
거기에는 최형우(일천은 별호)의 「소사」가 66년쯤에 비로소 북한에서 주목받게 되었고 그의 문장이 68년에 나온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 반영되었다고 씌어 있는 모양이다<주④>.
<주④>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 항일무장투쟁」 53면
  • 1993년 4월 20일 북한에서 제4회 「조국통일상」을 수여 ※ 수여내역 : 최일천(「해외조선혁명운동 소사」 작가)[10]
  •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11]
  • 그의 활동상황이 로동신문 2006년 12월 1일자 2면 ‘소중한 추억’에 게재됨.[6]
  • 승소옥과의 사이에 난 아들은 북한에 있고, 후처에서 난 아들이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했다고 함.[4]


김일성6.25 때 그를 처형시키고서, 자신이 사망하기 직전 뒤늦게 복권시키고, 1993년 4월 20일 제4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10] 제1회 수상자는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김규식, 여운형, 월북자 홍명희, 홍기문 등 112명이며, 밀입북자 문익환, 임수경과 남한내 반정부 투쟁인사들에게도 같은 상이 수여된 바 있다.

북한이 처형한 최형우를 뒤늦게 복권시킨 것은 그의 저서들이 김일성 우상화에 유용하다고 판단해서일 것이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1992년)》에도 최일천의 이름으로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12]

동아일보 사령(辭令)

동아일보나 동아일보 사사(社史)에 나온 최형우(崔衡宇)의 인사 발령 사항은 아래와 같다.[6] 1927년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이름이 최일천 아닌 최형우로 나온다. 신경(新京)은 장춘(長春)이 1932년부터 만주국의 수도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동아일보 사사 1권 부록과 당시 보도를 보면 ‘최형우’는 기간은 명확하지 않지만 신경(新京, 길림성 장춘) 지국장과 신경지국 기자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경(新京)……김이삼(金利三, 1928. 3~) 최형우(崔衡宇, ?~) 송명배(宋明培, 1938. 2~) 김병권(金秉權, 1939. 4~) 김경규(金景圭, 1939. 9~) 최경가(崔景加, 1940. 2~) 유시용(劉時鎔, 1940. 5~)
  • 1927년 4월 11일자 4면 : 장춘지국 변경 지국장 咸錫殷 기자 金玉斌 金利三 崔衡宇 고문 崔德潤 李春基 임명
  • 1931년 12월 3일자 3면 : 장춘지국 ; 장춘통신원 崔衡宇 任 장춘지국장
  • 1937년 6월 13일자 6면 : 新京 소개판 ; 신경과 재류동포(신경지국장 崔衡宇)
  • 1938년 2월 4일자 8면 : 신경지국 ; 宋明培 任 지국장 崔衡宇 지국장 의원해직
  • 1938년 2월 4일자 8면 : 신경지국 ; 고문 李鴻周 李鍾元 朴泰晉 崔衡宇 기자 洪揆植 집금원(集金員) 宋英培 임명
  • 신동아 1935년 10월호 119~122쪽 최형우, 재만동포의 근황(新京 崔衡宇)

저서

아래 저서의 내용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ㅌ·ㄷ> (타도제국주의동맹)를 김일성이 주도하여 결성한 것처럼 말했으나 사실이 아니다.[13][14][15] 그는 김일성이 1931년 초 오가자(五家子)에서 벌인 살인사건[16]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나 책에는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김일성과 관련된 부분은 북한의 실력자로 막 등장한 그에게 잘 보일 의도에서인지 상당히 미화하여 기술했다. 하지만 그는 북한으로 가지는 않고 서울에서 활동했다.


참고 자료

최형우와 김일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6) 서울신문 1993.03.30

각주

  1. 1.0 1.1 오늘날의 궁주링시 (公主岭市)
  2. 2.0 2.1 怀德县 (吉林省四平市东部怀德县) 百度百科
  3. 3.0 3.1 Wujiazi (五家子) 궁주링시 쓰핑시 지린성(公主岭市 四平市 吉林省) 중국 구글 지도 : 장춘(신경)에 가까이 있다.
  4. 4.0 4.1 4.2 북한이 따라 배우라는 소설의 주인공들 RFA 2020-02-14
  5.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1930.5~1933. 2월의 기록) pp.188~190.
  6. 6.0 6.1 6.2 D-Story 60 : 김일성 회고록 속 동아일보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11월 - 30 - 2010
  7. 최일천 - 북한지역정보넷
  8. 최일천 (崔日泉, 1905.10.11 ~ 1950.11.05) 조선향토대백과
  9. 허동찬(許東粲, 1932 ~ ),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4) 서울신문 1993-02-04
  10. 10.0 10.1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조국통일상] 수여 정령 발표 주간북한동향 제586호 2002-04-04 :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11. [최재영 목사 방북기17-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③] 평양 신미리애국열사릉 편 NK투데이 2015-03-09
  1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1992년) 제4장 10. 잊을수 없는 사람들
  13. [북한알기 키워드] 타도제국주의동맹 (ㅌ·ㄷ) NK 조선 2001.10.09
  14. 김일성#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는 김일성 아닌 이종락이 조직
  15. 종북386의 롤모델 ‘26년<ㅌ·ㄷ>’ 아시아투데이" 2015. 05. 08.
  16. 김일성#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
  17.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18.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