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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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국가수상
1945년 4월 30일 ~ 1945년 5월 1일

아돌프 히틀러

요한 루트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대통령
나치 독일의 대중계몽선전국가장관
1933년 3월 13일 ~ 1945년 4월 30일

신설

베르너 나우만
수상
차관
나치 독일의 베를린 대관구지휘자
1926년 11월 9일 ~ 1945년 5월 1일

에른스트 슐랑게

폐지
개인 정보
출생
1897년 10월 29일
출생지
사망
1945년 05월 01일
사망지
나치 독일 베를린
국적
나치 독일
정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학력
본 대학교
뷔르츠베르크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배우자
자녀
6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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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 ~ 1945년 5월 1일)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침내 반박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

― 나치 정권의 선동전력가
파울 요제프 괴벨스

개요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에서 국가대중계몽선전장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치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히틀러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


괴벨스 어록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된다.

선동은 문장 한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반박하려고 할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주의'이다.

인민 대중이란 작은 거짓말보다는 더 큰 거짓말에 속는다.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

여론조사라는 것은 대상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지.

대중에겐 생각이라는것 자체가 존재치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란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Deutschland Erwache!

독일이여 깨어나라!

선전은 본질상 일종의 예술이다. 그리고 선전원은 엄밀한 단어상 의미에 있어 민중 심리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선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매일 매 시간 민중의 맥박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어떻게 맥박이 뛰는지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박의 박자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선전선동의 달인

  • 괴벨스는 나치당의 뇌라고 불릴만큼 나치당의 지식인이였던 그는 나치당의 제복 대신 양복을 주로 입었고, 선전 방법뿐만 아니라 유창한 말솜씨 또한 가지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선전하다 못해 광신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
  • 특히 그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했었는데, 정기적인 TV방송으로 선전을 한 것은 세계 최초였다. 그의 선전 방송을 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은 패전의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발발하였는데 괴벨스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심어 주기 위해 '폴란드가 자국내 독일소수 민족들에게 잔혹한 행위들을 한다'고 보도하게 하여 독일국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냈다.
  • 독일은 폴란드 점령한 후 서방 강대국들에게 평화를 제안하였지면 영국은 폴란드가 당한 보상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이에 히틀러는 10월 14일 독일 잠수함은 영국 해군의 모항 스캐퍼 플로우에 잠입하여 전함 로열 오크호를 격침시켜 883명을 전사시켰다.
그 즉시 괴벨스는 '처칠이 시한 폭탄을 이용해 배를 침몰시키려 했고 그 안에 있던 수백 명의 미국인들을 익사시키려고 했다'는 등의 거짓 주장을 언론,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선동을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영국 국민과 영국의 지도자들을 분열시키는 선전선동을 하였다.[1]
  • 1940년대 초부터 괴벨스는 국가를 총력전 상태에 돌입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겼으며, 관련 선동의 선봉에 섰다. 특히 1943년 2월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에서 사회 고위층들을 상대로 행한 총력전 연설은 후대에 그의 강렬한 프로파간다의 대표적인 예시로서 들어진다.[2]

생애

요제프 괴벨스는 1897년 10월 29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라이트(Rheydt)에서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와 어머니 카나타리 오덴하우젠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1년 4살 때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평생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괴벨스의 어릴때의 삶은 자신을 내성적이고 열등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을 지식으로 만회하려고 했기 때문에 후에 그가 지식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3]

1904년 요제프 괴벨스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뛰어난 학업능력을 보여주었는데, 1908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상급 학교에서 최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는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한다.[4]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는데 요제프가 16세 때였다. 그는 조국을 위해 자원 복무 하기를 원했으나 대체 복무만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정식 전투원은 아니었지만 비전투원으로 활약함으로써 소속감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1917년 3월 전쟁 중에 괴벨스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합격하고 본·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교에 있던 중 6월에 소집명령을 받고는 라이트의 조국구호사업회의 행정병으로 소집되어 잠시 근무했었으나 그의 허약한 다리와 군인답지 못한 외모로 인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5]

1917년 9월 대학교로 복학하여 지역 신부의 추천으로 가톨릭 재단의 장학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대학생활을 하던 중 괴벨스의 기대와 믿음과는 다르게 전쟁은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는데, 괴벨스는 그 결과로 그의 신앙을 잃게 되었다.[6]

여담으로 괴벨스는 불편한 다리와 잘생기지 못한 외모로 주위에 여자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괴벨스의 삶에서 여자들이 많았다. 그는 피아노를 잘 다루고 패션 감각도 있었으며, 매너도 좋았는데 말 솜씨까지 뛰어났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골 여인을 사귀는등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7]

1945년 독일의 패망을 앞두고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하루 뒤에 포위된 총리 관저의 벙커 안에서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하였다. 



각주

  1. Manvell & Fraenkel (2010), p. 140.
  2. Snell (1959), p. 7.
  3. Manvell & Fraenkel (2010), p. 14.
  4. Manvell & Fraenkel (2010), pp. 19, 26.
  5. Longerich (2015), pp. 72, 88.
  6. Longerich (2015), pp. 28, 33, 34.
  7. 외모는 첫 인상을 좌우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실증을 가져온다. 그런데 탁월한 언변은 첫인상도 바꿔버리는 반전을 일으키는데, 실증을 느끼게 할 뜸을 주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