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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의 설명

해방 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출처 :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10월 14일자 1면

명사(名士)의 편영(片影) (其五) : 김일성씨(金日成氏)

金일성氏는 유명(有名)한 장군(將軍)이다. 그 웅용(雄勇)한 기상(氣像)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추억(追憶)하게 되고 그 지모(知謀)의 종횡(縱橫)은 이충무공(李忠武公)을 연상(聯想)하게 된다.

김장군(金將軍)은 청년(靑年)에 급(笈)을 부(負)하고 병학(兵學)을 수(修)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국주의시대(帝國主義時代)의 장교(將校)되기는 실허하였다. 그는 편신(片身)으로 비주(飛走)하야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갔다. 당시(當時)는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게 합병(合倂)되야 일본인(日本人)의 학염(虐焰)은 三千里 江山을 덮었고 일본군(日本軍)의 견봉(堅鋒)은 두만강북(豆滿江北)까지 진출(進出)하야 당시(當時) 북만(北滿)에 있는 조선(朝鮮)의 독립당(獨立黨)을 초멸(剿滅)하야 그 참혹잔인(慘酷殘忍)이 극(極)하였더니라. 이때이었다. 金일성 장군(將軍)은 의용병(義勇兵)을 모집(募集)하야 일본(日本)과 항전(抗戰)하였다. 그의 과소(寡少)한 병중(兵衆)으로도 일본병(日本兵)의 가슴을 서늘케한 일이 자조 있었다.

당시(當時) 조선(朝鮮) 와있던 일본인(日本人) 총독 모(總督 某)는 조선(朝鮮)의 국경(國境)을 순시(巡視)키 위(爲)하야 혜산진(惠山鎭) 방면(方面)을 향(向)하였다. 일본인(日本人) 총독(總督)이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남안(南岸)으로 내려갈 때에 압록강(鴨綠江) 북편(北便)에서 날아오는 탄환(彈丸)은 총독 모(總督 某)의 심담(心膽)을 놀래기 극(極)하였다. 총독 모(總督 某)는 황겁(惶怯)하야 여행(旅行)을 중지(中止)하고 도라왔다. 그런데 그 탄환(彈丸)은 金일성 장군(將軍) 휘하(麾下) 용사(勇士)의 탄환(彈丸)이라 한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이러나고 세계전쟁(世界戰爭)이 열리매 김장군(金將軍)은 소련대군(蘇聯大軍)과 일치행동(一致行動)하야 다수(多數)한 조선병사(朝鮮兵士)를 거느리고 용감(勇敢)히 전투(戰鬪)하였다. 그는 맛침내 승리(勝利)의 월계관(月桂冠)을 취(取)하고 지금 소련(蘇聯) 연해주(沿海州) 방면(方面)에 있어 조만(早晩)에 귀국(歸國)한다는 말이 전(傳)해 온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10.14》

급(笈)을 부(負)하다 : 책 상자를 짊어지다

압록강을 배타고 내려가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실제로 있었다. 당시 북한 김일성은 12살에 불과했으므로, 이 김일성 장군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이 기사가 보도된 1945년 10월 14일은 해방 후 평양에 온 북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던 날인데, 그날에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을 거론하며 그의 부하가 1924년 사이토 모코토 총독을 저격 사건을 일으켰다고 했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4년에도 유명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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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18년 8월 26일 (일) 07:021,000 × 1,147 (532 KB)JohnDoe (토론 | 기여)해방 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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