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02-21_위증민의_왕윤성앞_서신.jpg(713 × 337 픽셀, 파일 크기: 56 KB, MIME 종류: image/jpeg)

파일의 설명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36년 2월 21일자로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서신. 위민생(魏民生)은 위증민의 다른 이름이다. 방단장(方團長)은 2군 2사 1단(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이다.

나는 액목(額穆)에 무사히 도착하여 방단장(方團長) 등을 만나보았습니다. 3단(三團)의 내부에 상당한 변동이 있었으며,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 2 동지는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게 되었고, 3단 정위(三團 政委)는 왕자균(王紫鈞) 동지가 맡았으며, 각 연장(連長)과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도 역시 변경되었습니다. .......

我安全到额穆和方团长等见了面, 对于三团的内部有相当的变动, 金义[日]成、林水山二同志调西部另有工作担负, 三团政委由王紫钧同志担任, 各连长政治指导员亦有变更。 .......

원래 편지에는 연도가 적혀있지 않았으나 자료집 편집시 1935년으로 추정하여 기재했는데, 위증민이나 방진성이 북만의 액목(額穆)에서 만날 수 있는 시기는 그 해가 아닌 1936년이다. 2군 2사가 북만으로 이동하여 5군과 혼성군을 편성하던 시기임. 1935년 2월에는 2군 제1독립사장 주진(朱鎭)이 민생단 문제로 탈주하여 일본측에 투항하고, 2월 24일~3월 3일 기간에는 위증민이 연길현(延吉縣)에서 민생단 문제 논의를 위해 대황외(大荒崴)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액목에 가 있을 수가 없음.

편지에 북한 김일성을 왜 김의성(金義[义]成)이라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혼성부대 지휘부의 金日成과 구분하기 위해 다르게 적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 출처 : 「魏民生關于三, 四團情況給王潤成信 (1935年 2月 21日)」,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p.336

파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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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2년 2월 27일 (일) 10:07713 × 337 (56 KB)JohnDoe (토론 | 기여)1936-02-21 위증민의 왕윤성앞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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