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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의 설명

보천보사건을 처음 보도한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1

咸南 普天堡를 襲擊
郵便所, 面所에 衝火
昨夜 共軍 二百餘名이 突然 來襲
普校, 消防署에도 放火
..........
咸南 警察部에서 出動[1]
金一成 一派로 判明

참고 :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2

종북화된 학계에서는 이 호외 때문에 보천보사건과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고, 속임수이다. 일제시대에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는 일은 흔했고,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문맹률이 80%를 상회하고 신문독자 수도 얼마되지 않던 시절에 호외에 난 사건이라고 특별히 유명해지고 오래 기억될 형편도 아니었다. 보천보사건과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였던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습격사건 때도 여러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독 잊혀졌던 보천보사건만 다시 유명해진 것은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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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호외는 발행되었다는 사실조차 곧 잊혀지고, 보천보 사건도 이내 잊혀졌다. 보천보 사건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한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나중에 유명해지게 된다. 그 호외 때문에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지면서 그 사건을 보도한 호외가 1990년대에야 발굴되어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1998년 10월 방북하여 이 순금판을 비밀리에 김정일에게 전달했지만 그 사실은 2000년대에 들어와 알려진다. 이 무렵부터 대중들이 호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같다.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때문에 김일성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왜 호외가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뒤늦게야 알게 되었겠는가?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방북하기 직전 북한을 방문했던 동아일보 대표단이 보천보 현지에서 동아일보 호외 기사 2건을 전시한 것을 사진에 담아왔다. 북한에서 이 호외를 언제부터 전시하기 시작했는지는 미상이다.

각주

파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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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19년 1월 12일 (토) 09:261,215 × 965 (331 KB)JohnDoe (토론 | 기여)보천보사건을 처음 보도한 동아일보 1937-06-05 일자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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