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01-17-동아일보-_UP가_傳한_박헌영_발언.jpg(744 × 335 픽셀, 파일 크기: 119 KB, MIME 종류: image/jpeg)

파일의 설명

동아일보 1946-01-17 1면 "유·피가 傳(전)한 問題(문제)의 電文(전문) : 朴憲永氏談要旨(박헌영씨담요지)"

朝鮮共産黨秘書 朴憲永 (조선공산당비서 박헌영)은 新聞記者會談(신문기자회담)에서 알·하-지 (중장)은 眞實(진실)한 民主主義原則(민주주의원칙)에 依(의)한 團體(단체)는 彈壓(탄압)하고, 反動團體(반동단체)에 對(대)하야는 寬大(관대)한 態度(태도)를 取(취)하고 있다고 말하는 同時(동시)에 民主主義的 獨立朝鮮(민주주의적 독립조선)은 二十年內(이십년내)에 소聯(소련)에 包含(포함)될 것을 主張(주장)하얏다. 그는 또 朝鮮(조선)의 소聯單獨信託統治(소련단독신탁통치)를 贊成(찬성) 하나 朝鮮(조선) 사람 一般(일반)이 卽時(즉시) 소聯聯邦(연연방)이 되는 것을 願(원)치 안는다고 말하였다.

박헌영의 외신 기자회견이 1월 5일에 있었음에도 UP의 기사가 국내에는 뒤늦게 1월 17일에 보도된 이유는 UP가 계약한 국내의 『조선통신(朝鮮通信)』이 좌파계열이라 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내보내지 않고 보류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1][2]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월 15일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소동이 벌어진 후, UP의 해당 기사를 내보내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통신』은 1945년 12월 20일 『합동통신』이 AP통신사와 수신계약을 할 때까지 UP통신이 제공하는 외신을 독점, 공급하였다.

각주

  1. 우승규, 「나절로 만필」 (탐구당, 1978년) 212, 216, 220쪽 : 적색화한 「조선통신」
  2.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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