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최근 수정 : 2020년 12월 8일 (화) 20:37

(프레드리히 하이에크에서 넘어옴)

경제학자
Hayek.JPG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Friedrich August von Hayek
출생일 1899년 5월 8일
출생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학력 1921년 빈 대학(법학/박사)

1923년 빈 대학(정치학/박사)

경력 1931년~1950년 런던정치경제대학 교수

1950년~1962년 시카고 대학교 교수

사망일 1992년 3월 23일
사망지 독일 프라이부르크

개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년 5월 8일 - 1992년 3월 23일)은 영국-오스트리아인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지킨 업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이에크는 "화폐와 경제 변동 이론을 개척한 공로와 경제, 사회, 제도적 현상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분석의 성과"를 인정받아, Gunnar Myrdal와 함께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가격이 개인의 경제적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설명이 경제학의 주요 업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사회 이론가이자 정치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하이에크는 '참전 경험을 통해 그런 실수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독일에 거주하였고, 1938년에는 영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학자로서의 생애의 대부분을 런던경제대학교(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LSE), 시카고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보냈다.

생애

초기

하이에크는 아버지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August von Hayek)와 어머니 펠리시타스 하이에크(Felicitas Hayek)의 자녀로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비엔나 시 보건소 의사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식물학에도 관심이 많아 이 분야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으며 비엔나 대학에서 이 분야의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부유하고 보수적인 지주 집안 출신으로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3형제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의 대학 교수 생활은 나중에 하이에크의 인생 목표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학자였다. 외할아버지인 Franz von Juraschek는 오스트리아-헝거리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였고, 친할아버지인 Gustav Edler von Hayek은 비엔나의 제국 Realobergymnasium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외가쪽 6촌이었다. 이런 관계 때문에, 1921년 비트겐슈타인의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가 독일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하이에크는 그 책을 누구보다도 먼저 읽었다. 비록 몇 번 만나지 않은 사이었지만,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비유대인 쪽과 친척이었으며, 그에게는 유대인 혈통이 없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적인 부분에 대한 소질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에 따르면, 10대에 이미 Hugo de Vries와 August Weismann의 유전과 진화에 관한 서적과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의 철학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대한 강의에 무척 이끌리기도 했다.

191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거리 육군의 포병 연대에 소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다. 대부분의 시간을 비행기에서 탄착 지점을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보냈다. 전쟁 동안 왼쪽 귀의 청력이 손상되었으며, 훈장을 수상했다.

그가 학자로서 생애를 보내기로 결심한 데에는 이 전쟁에서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정말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정치 조직의 문제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교육, 연구, 경력

하이에크는 비엔나 대학에서 1921년에는 법학 박사 학위를, 1923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밖에도 철학, 심리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비엔나 대학 시절 접한 Carl Menger의 책과 Friedrich von Wieser의 수업은 오랫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그는 Wieser의 추천으로 Treaty of Saint Germain의 법률 및 경제 부분을 담당하는 오스트리아 정부 전문가로서 미제스(Ludwig von Mises)에 의해 채용되었다. 1923~1924년에는 뉴욕 대학교 Jeremiah Jenks 교수의 연구 조교로 일하면서, 미국 경제와 연방준비제도의 운영에 관한 거시경제 자료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Wieser의 민주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미제스의 "사회주의"(Socialism)이라는 책을 읽은 후, 그의 경제학적 사고는 사회주의로부터 Carl Menger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그의 대학 친구인 Fritz Machlup, Alfred Schutz, Felix Kaufmann, Gottfried Haberler와 함께 미제스의 개인 세미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 역시 미제스의 "사회주의"를 읽은 후였다. 저명한 정치 철학자인 Eric Voegelin과 친해진 것 역시 이 시기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미제스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경기 순환 연구소(Austrian Institute for Business Cycle Research)를 설립하여 이끌었고, 그후 1931년 Lionel Robbins의 요청으로 런던 경제 대학원(London School of Economics; LSE)의 교수진에 합류했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 마자 곧바로 세계 최고의 경제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시간 과정과 가격의 조정 기능에 관한 경제학을 통해 현대 미시경제학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John Hicks, Abba P. Lerner 등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32년에는 the Times를 통해 케인즈와 공개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정부 지출 프로그램보다 민간의 공공 시장에 대한 투자가 영국의 부와 경제 조정을 위한 더 나은 길이라고 제안했다. 전쟁 이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이전의 금본위 제도(gold standard)로 돌아가기로 한 처칠의 1925년 결정 이후 영국에서 거의 10년 동안 디플레이션 경기침체가 이어진 것이 하이에크가 영국의 화폐 및 재정 정책을 둘러싸고 케인즈와 논쟁을 벌이게 된 배경이었다. 이와 같은 공개적인 충돌을 넘어서서. 두 사람 사이에는 다양한 경제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이 이견은 현실적인 성격의 것이기도 했고, 본질적인 성격의 것이기도 했다. 케인즈는 하이에크의 "가격과 생산"(Prices and Production)이라는 책을 "지금까지 읽어본 책 중 가장 뒤죽박죽인 책"이라고 비판하면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무자비한 논리를 사용하는 사람이 단순한 실수로 시작해서 어떻게 아수라장으로 끝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폴 크루그먼도 "하이에크의 주장은 경제학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정치학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려는 뜻을 접고 영국에 남았다. 그와 그의 자녀들은 1938년에 영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여생 동안 이 지위를 유지했지만, 1950년 이후에는 영국에 거주하지 않았다. 1950~1962년에는 미국에서 살았고, 그 이후에는 대부분 독일에서 살았다.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하이에크는 파시즘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반작용으로 보는 영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우려했고, 노예의 길은 이 우려로부터 탄생했다. 1940~1943년에 집필했으면, 제목은 프랑스 고전 자유주의 사상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굴종의 길"에 대한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1944년 3월에 영국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너무 인기가 많았는데, 전시 중 종이 공급 제한으로 구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출판되었을 때는 오히려 영국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1945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서도 축약판이 나옴으로써, 학계를 훨씬 넘어서는 광범위한 대중들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개인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인기 있는 책이다.

시카고

그는 1950년에 영국 경제학 대학교(LCE)를 떠났다. 1949~1950년에는 1년 동안 아칸소 대학교에서 방문 교수 활동을 하였고, 그 뒤 시카고 대학교의 초청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Committee on Social Thought(사회 사상 위원회)의 교수가 되었다.

그 이전에 이미 시카고 대학교의 학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의 노예의 길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학자들이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생각을 전환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이에크는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와 함께 신자유주의자를 위한 국제 포럼인 Mont Pèlerin Society을 만들었다. 또, 프리드먼과 함께 '대학 간 자유주의자 협회'(the Intercollegiate Society of Individualists)를 지원했는데, 이 협회는 나중에 '대학 간 연구 협회'(Intercollegiate Studies Institute)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단체는 자유주의 사상(libertarian ideas)을 전파하는 미국 대학생 조직이다.

그는 시카고 대학에 있는 동안 과학 철학, 경제학, 정치 철학, 사상사 등을 연구했다. 1960년 2월에는 자유주의적 질서(liberal order)를 주제로 '자유의 헌법'(The Constitution of Liberty)을 출판하였다.

"우리는 이 책에서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을 강제하는 행위가 최소화된 인간의 조건에 관심을 가진다."

프라이부르크, 로스엔젤레스, 잘츠부르크

1962~1968년에는 서독 프라이브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이곳에서 '법, 입법, 그리고 자유'(Law, Legislation and Liberty)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은퇴한 후,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철학 분야 방문 교수로 있었던 1년 동안에도 이 책의 집필을 계속하면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사회 과학의 철학'에 대해 가르쳤다. 이 책은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1973년, 1976년, 1979년에 출판되었다.

1969~1977년에는 잘츠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고, 그후 프라이브르크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냈다. 잘츠부르크에 있던 1977년에는 그곳에 온 것을 후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경제학과의 규모가 너무 작고 도서관 시설이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노벨상 수상

1974년 10월 9일, 스웨덴 경제학자인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공동 수상의 이유가 반대편 정치 성향을 가진 뮈르달과 공동 수상을 통해 균형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상식에서 소련의 반체제 인사였던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을 만났는데, 뒤에 그에게 '노예의 길' 러시아어 번역본을 보내주었다. 노벨상 수상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논란이 많았던 하이에크의 사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훨씬 더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정치

1972년 마가렛 대처 수상이 영국 보수당 당수로 선출된 직후, 경제 문제 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 Affairs)가 하이에크와 대처의 만남을 주선했다. 1975년, 대처가 '보수 연구소'(Conservative Research Department)를 방문했을 때, 한 강연자가 '보수당은 극단적인 좌파 또는 우파 정책을 피하고 중도 실용 노선을 택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고 있었다. 대처는 발표를 중단시키며 가방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을 꺼내들고 단호하게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This is what we believe).'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7년에는 '자유당-노동당 협약'(Lib-Lab pact)을 통해 영국 노동당 정부를 지원하기로 한 영국 자유당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이에 자유당 정치인이었던 Gladwyn Jebb과 Andrew Phillips은 이 협약의 목적은 사회주의적 입법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하이에크를 비판했다.

Gladwyn 경은 독일 자유민주당 역시 독일 사회민주당과 연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Antony Flew 교수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영국 노동당과 달리 1950년대 이래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 경제를 채택했다고 말하며 하이에크를 옹호하였다.

1978년에 하이에크는 자유당 당수였던 David Steel가 충돌했다. 스틸은 자유는 "사회 정의와 부와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조건하에서 가능하고, 이를 위해 어느 정도 적극적인 정부의 간섭이 필요하며, 보수당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관계보다 자유와 민간 기업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어떤 특정한 제한적인 민주주의가 다른 형태의 제한적인 민주주의보다 자유를 지키는 데 있어서 더 나을 수는 있지만,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의 무제한적 정부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무제한적으로 민주주의가 허용된다면, 지지 세력이 반대하는 경우에 정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이에크는 만약 보수당 지도자가 "자유로운 선택은 투표함에서보다 시장에서 더 발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면 이는 시장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반면 투표의 자유는 그렇지 않다는 당연한 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는 독재하에서는 최소한 선택의 자유가 존재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제한할 수 없는 무제한의 민주주의의 정부하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부 유럽 정치에 대한 영향력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두세 명의 사람 중 한 사람으로 하이에크를 꼽으면서, 그를 특별 손님으로 백악관에 초대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구 소련이 붕괴하는 기간 동안 하이에크의 저작이 중앙 유럽의 "벨빗' 혁명의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철의 장막 뒤의 지식인들에게 하이에크보다 더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그의 책은 지하에서 블랙마켓 판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어서, 널리 읽혔고 궁극적으로 소련의 붕괴를 초래한 여론의 기류에 영향을 주었다. - 밀턴 프리드먼 (후버 연구소)
1980년대의 용기있는 반대자들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들은 하이에크의 제자라 할 수 있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하이에크로부터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과 가끔 태만히 다루어지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적 차이에 관해서 배웠다. - Andrzej Walicki (역사학, 노트르담 대학교)
에스토니아의 Mart Laar 수상이 어느날 내 사무실에 와서 그 나라의 놀라운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더 부지런해지고, 더 좋은 품성을 갖게 되었고 - 그렇다. 시장이 부도덕함을 벌하는데 품성이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미래에 대해 더 많은 희망을 갖게 된 국민들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개혁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는 밀튼 프리드먼과 F. A. 하이에크를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Dick Armey (미국 국회의원)
나는 25살 때 경제학 박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경제학 교과서와 하이에크 같은 사람들이 쓴 더 일반적인 서적을 읽었다. 내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돌아왔을 때 쯤에는 이미 시장의 원칙을 이해한 상태였다. 1968년에, 나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기뻐했지만, 그들이 경제에 있어서 추구한 제3의 길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 Václav Klaus (전 체코 공화국 대통령)

연구

경기 변동 주기(business cycle)

하이에크의 주요한 경제학적 연구는 자본, 화폐, 경기 변동 주기에 관한 것이었다. 미제스는 Theory of Money and Credit(1912년)에서 한계 효용의 개념을 화폐의 가치에 적용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산업 변동"을 옛날 영국 통화 학파(British Currency School)와 스웨덴 경제학자 Knut Wicksell에 근거해서 설명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하이에크는 이 내용을 경기 변동 주기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아서 소위 '오스트리아 경기 변동 이론'(Austrian theory of the business cycle)을 만들었다. 그는 1929년에 출판된 Monetary Theory and the Trade Cycle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접근법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여기에서 하이에크는 화폐로부터 변동 주기의 원인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격과 생산'(Prices and Production)에서 경기 변동은 중앙은행의 통화 팽창적 신용 확대와 그 여파에 의해 초래되며, 이를 통해 인위적인 저금리로 인한 자본의 잘못 배치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에 시장 경제가 불안정했던 것은 시장 매커니즘의 가장 중요한 조절 장치인 화폐 자체도 시장의 프로세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배제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의 분석은 Eugen Böhm von Bawerk의 "평균 생산 기간"이라는 개념과 금융 정책이 그것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기초하였다. '사회에서 지식의 사용'(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1945년)에서, 하이에크는 중앙은행과 같은 독점적인 정부 기관은 화폐의 공급을 지배하는 관련 정보를 구할 수도 없고 정확하게 사용할 능력도 없다고 주장했다.

1929년에 Lionel Robbins가 런던 경제 대학교의 키를 잡았다. 그는 당시 영어권 국가의 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에 본거지를 둔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의 이론에서 유래한 편협한 접근법에 대한 대안을 탐구하려는 의도에서 1931년에 하이에크를 초빙하였다.

1931년에도 'Reflections on the pure theory of Mr. J. M. Keynes'에서 케인즈의 '화폐론'(Treatise on Mondy)을 비판하는 한편, LCE에서의 강연을 모아 '가격과 생산'(Prices and Production)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케인즈에게 실업과 미개발 자원은 효과적인 수요의 결여에 의한 것이었지만, 하이에크에게 그것들은 그 이전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손쉬운 신용과 인위적인 저금리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에 케인즈는 Piero Sraffa에게 대응해 줄 것을 부탁했다. Sraffa는 인플레이션에 의해 발생하는 자본 부문에서의 저축의 증가로 인한 효과와 신흥 경제에서의 "자연스러운" 금리의 정의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Sraffa-Hayek 논쟁).

그 이후에도 화폐 및 자본 이론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이익, 이자,투자'(Profits, Interest and Investment; 1939년)와 '자본에 대한 순수 이론'(Pure Theory on Capital; 1941년)을 발표했지만, 경제 이론가로서의 평판이 추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니콜라스 칼도(NIcholas Kaldor)의 준열한 비판을 제외하고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자본에 대한 순수 이론'에서 "자본의 역학"을 다룬 책을 펴내기로 약속한 바 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1941년 이후에는, 정보의 경제학, 정치 철학, 법률 이론과 심리학에 대한 다수의 책을 출판했지만, 거시경제학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있었던 신고전 이론(시카고 경제 학파)의 탄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74년에 그와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뮈르달도 그와같은 이념론자와 함께 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스스로 하이에크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선언했던 밀턴 프리드먼도, 경제학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가와 생산'은 오류가 매우 많은 책이다. '자본에 대한 순수 이론'은 읽을 수도 없을 정도이다. 반면, '노예의 길'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이다."

경제적 계산의 문제

이전의 미제스 등의 주장을 계승하여, 하이에크는 기획경제에서 개인이나 선택된 집단이 자원의 배분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책 입안자들은 그 행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가장 먼저 제시했던 이 주장은 자원의 효율적인 교환과 사용은 자유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935년에는 미제스에 의해 시작된 논쟁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놓은 '집단주의적 경제 계획'(Collectivist Economic Planning)을 출판했다. 여기에는 미제스의 논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미제스는 사회주의하에서는 이성적인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자인 H. D. Dickinson와 Oskar Lange은 '일반 균형 이론'을 들먹이며 미제스의 주장에 반박했다. 그들은 계획 체제와 자유시장 체제의 차이는 누가 그 방정식을 풀어낼 책임을 지느냐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만약 사회주의 체제의 관리자들이 선택한 가격 중 일부에 문제가 있다면, 과잉 공급이나 공급 부족이 나타날 것이고, 이를 통해 그들은 자유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도 자유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러한 견해를 반박했다. '경제와 지식'(Economics and Knowledge; 1937년)에서는 표준 균형 이론은 모든 주체가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는, 그들이 서로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 중 일부는 잘못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서 지식의 사용'(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1945년)에서 가격 메커니즘이 지역과 개인의 지식을 공유하고 동조화시킴으로써, 자생적인 '자기 조직'의 원칙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격 메커니즘의 활용을 통해 특정한 시간적, 장소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변화에 대해 계획 경제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자발적인 협조를 통한 자기 조직의 체제'를 의미하는 말로 catallaxy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논의에 대한 하이에크의 연구는 노벨상 위원회의 발표문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집단주의에 대한 비판

하이에크는 집단주의를 비판한 가장 대표적인 20세기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론상으로 자발적인 협동에 기초한 집단주의까지 포함한)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는 어떤 종류의 중앙집중화된 권위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중심적인 역할은 자의적 개입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법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노예의 길'(1944년)과 그 이후의 저술을 통해 사회주의는 중앙집중적 경제 계획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전체주의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예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사회주의자들의 더 큰 자유에 대한 약속 자체는 진지하고 진실된 것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주의의 예상치 못한 결과에 많은 학자들이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많은 측면에서 "공산주의" 또는 "파시즘"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는 당국이 사회에 충격을 주게 되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제할 권력까지 부여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계획을 위해 필요한 지식이 본질적으로 탈중앙적인 것이라서 그것을 통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가 경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특히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이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반적인 부의 수준에 이른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첫 번째 종류의 안전이 보장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건강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의식주을 말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대비할 수 없는 불운한 상황에 대비하여 포괄적인 사회 보험 제도를 만드는 것을 국가가 돕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투자와 선택

하이에크는 투자 선택 이론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시간이 덜 걸리는 프로세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더 걸리는 프로세스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선택 이론적 통찰에 근거하여, 비영구적 생산 제품과 잠재적으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영구적인 자원의 상호 관계를 연구했다.

투자, 비영구적 제품, 잠재적인 영구적 자원, 경제적으로 적용된 영구적 자원에 관한 선택 이론에 관한 그의 미시경제학적 연구는 그의 거시경제학 분야의 연구와 그 분야에서의 거의 모든 다른 경제학자의 연구를 구분하는 지점이 된다. 중앙 계획, 경기 순환 이론, 특히 지식과 창업가적 적용의 차이라는 거시경제학적 주제에 관한 그의 연구는 케인즈의 전통을 따르는 "마샬주의" 거시경제학자들이나 Abba Lerner의 전통을 따르는 "왈라스주의" 미시경제학자들의 의견과 크게 다르다.

과학 철학

2차 세계대전 이후, 하이에크는 '이성의 남용'(Abuse of Reason)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당시 인기를 끌고 있었던 수많은 사상과 믿음이 사회 과학에 대한 공통적인 근본적 오해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친구였던 칼 포퍼(Karl Popper)의 과학 철학과 공통점이 많은 그의 과학 철학에서, 하이에크는 그가 이름 붙인 소위 "과학주의"(scientism)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과학주의란 '사회 과학에 그릇되게 강요되고 있지만 진정한 과학의 행태와 반대되는 과학 방법론에 대한 오해'를 말한다. 대개, 과학주의는 증명을 통한 정당화를 요구하는 철학자들의 오랜 요구와 모든 과학적 설명이 두 개의 변수에 의해 움직이는 단순한 직선적 관계일 거라는 연합주의자들의 잘못된 견해를 결합함으로써 발생한다.

하이에크는 과학의 많은 부분이 복잡한 다변수, 비직선적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을 포함하며, 경제와 계획되지 않은 질서에 관한 사회 과학도 다윈의 생물학같은 복합 과학에 못지 않게 복잡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개념은 '과학의 반혁명'(The Counter-Revolution of Science; 1952년), 'Degrees of Explanation(1955년)', '복합 현상의 이론'(1964년) 등에서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반혁명'에서 하이에크는 '딱딱한' 과학이 객관적이고 엄격하게 통제된 결과를 얻기 위해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고 보았다:

현대 과학은 "객관적인 사실"까지 내려가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생각을 연구하거나 실제 세계의 진정한 이미지로서 주어진 개념을 고려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정신까지 현상에 귀속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설명하는 척하는' 모든 이론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렇게 하는 대신, 특정한 사건을 일반적인 규칙의 한 사례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에 근거하여 평범한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개념들을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현대 과학의 주요한 작업이 되었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과학의 반혁명

반면 '부드러운' 과학은 인간의 행동 그 자체를 계량하려고 시도한다:

전에는 도덕 과학으로 묘사되었던 좁은 의미의 사회 과학은 인간의 의식적인 또는 반성된 행동과 관계가 있다. 이 행동은 사람이 그에게 열린 다양한 과정 중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이 경우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그러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외부적 자극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관점에서 정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그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작은 범위로 제한하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과학의 반혁명

그는 이것들이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에, 사회 과학은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을 강요하거나, 객관적인 또는 분명한 결과를 요구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심리학

'감각의 질서: 이론 심리학의 기초에 대한 연구'(The Sensory Order: An Inquiry into the Foundations of Theoretical Psychology; 1952년)에서, 하이에크는 학습과 기억에 관한 '헤비안 학습'(Hebbian learning) 모델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이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는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기 이전인 1920년부터 갖기 시작했다. 하이에크의 '헤비안 시냅스'(Hebbian synapse)로부터 '전체 뇌 이론'(global brain theory)로의 확대는 신경과학, 인지 과학, 컴퓨터 과학, 행동 과학, 진화 심리학 분야 학자들로부터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감각의 질서'는 과학주의에 대한 공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두 개의 질서, 즉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적 질서와 자연 과학이 보여주는 자연적 질서를 상정하였다. 하이에크는 감각적 질서가 뇌의 실제적인 질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뇌를 거대한 연결 네트워크로 구성된 매우 복잡하지만 자기지향적인 위계적 분류 체계로 묘사했다. 이러한 분류 시스템 때문에, 감각적 경험의 풍부함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감각적 질서를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던 행동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사회 정치 철학

경력의 후반부 동안, 하이에크는 사회 정치 철학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의 사회 정치 철학은 인간 지식의 한계에 대한 개념과 사회 제도 속에서의 자생적 질서의 개념에 근거하였다. 그는 시장 질서에 의해 조직된 사회를 선호하였다. 이 사회 속에서 국가는, 거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된 시장이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명령이 아니라 추상적인 규칙으로 구성된) 법률 질서를 집행하는 일을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인간 지식의 본질적인 한계에 관한 인식론적 우려에서 나온 도덕 철학에 근거를 두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개인주의적 자유 시장 체제가 자기 조절 능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 정의"의 개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시장을 결과의 정당성이나 비정당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일종의 게임에 비유하고, "사회 정의는 뚜렷한 내용이 없는 공허한 문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노력이 가져올 결과도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뒤에 결과할 수입의 배분이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도 의미가 없다". 그는 정부의 수입 또는 자본의 재배분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용인할 수 없는 침해로 간주했다: "분배의 정의라는 원칙은 한번 도입되면 전체 사회가 그것에 따라서 조직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중요한 측면에 있어서 자유 사회와는 반대되는 종류의 사회가 초래될 것이다."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s)

하이에크는 자유 가격 제도가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의식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자생적인 질서, 또는 스코틀랜드 철학자인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이 말한 "인간의 의도가 아니라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하이에크는 가격 메커니즘을 언어와 같은 수준에서 다루었다.

하이에크는 '치명적인 자만'(The Fatal Conceit; 1988년)이라는 책에서 문명이 탄생한 이유를 사적 재산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가격이라는 신호만이 각각의 경제적 의사 결정자들이 무언의 지식(tacit knowledge) 또는 산개된 지식(dispersed knowledge)을 서로에게 보냄으로써 '경제적 계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을 자생적 질서로 보는 하이에크의 개념은 최근에는 비개입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생태계에 적용되어 왔다. 시장과 마찬가지로 생태계도 복잡한 정보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고, 역동적인 과정이 지속되고 있으며, 다중적인 질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 시스템은 의식적인 정신에 의해 지휘되지 않고 작동된다. 이러한 분석 속에서, 종(species)은 대체적으로 알 수 없는 요소로 구성된 복잡한 집합체에 의해 형성된 시스템의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요소로서 가격을 대신한다. 생태계 속 유기체 사이의 수많은 상호작용에 대한 인간의 무지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생태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그 시스템을 교란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지닌다. 생태계를 자생적 질서로 보는 분석 방법은 자생적 질서로서의 시장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생적 질서로서의 생태계라는 개념에 동의하기 위해 하이에크의 시장 분석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사회 안전망에 대한 견해

사회 안전망과 관련해서, 하이에크는 "통제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극단적인 궁핍이나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런 사람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부터 보호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산업 국가에서 그런 종류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1944년,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사회가 도달한 일반적인 부의 수준을 가진 사회에서, 전반적인 자유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물리적인 궁핍으로부터의 안전, 모든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생계 보장, 최소 수입이라는 안전망을 보장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보장의 정확한 기준을 세우는 데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건강과 일할 능력의 유지를 위해 충분한 정도의 최소한의 의식주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영국 인구의 상당 부분은 이미 이런 종류의 안전망을 누려 왔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대비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삶의 위험 요소들을 대비함에 있어서 국가가 개인을 돕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질병이나 사고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재난을 피하거나 그 결과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국가의 도움에 의해 약화되지 않을 상황이라면, 간단히 말해, 보장을 제공해야 할 진짜 위기에 관계된 것이라면, 포괄적인 사회적 보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가 더 큰 안전을 제공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거나 그 결과에 대비할 수 없는 재난을 공동체적 조치를 통해 완화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그런 공동체적 조치는 당연히 취해져야 한다.

1973년에는 '법, 입법 그리고 자유'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자유 사회의 정부가 누구도 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막아 줄 최소 수입의 보장이라는 형태로 모든 사람들에게 심각한 가난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극단적인 불행에 대한 그러한 보장을 시행하는 것이 충분히 모든 사람의 이익에도 부합할 수 있다. 또는 조직화된 사회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명료한 도덕적 의무라고 느껴질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시장에서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장 바깥에서 일정한 최소 수입을 제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가 제한되거나 법치와 충돌하거나 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회의주의

Arthur M. Diamond는 경제 과학 안에서 평가될 수 있는 주장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하이에크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아이에크는 인간의 정신이 엄청난 양의 구체적인 사실을 종합하는 능력에 있어서만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관련된 튼튼한 연역 논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한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모순이 생긴다. 그가 이성적 논리에 따라 자유 시장을 도덕적으로 옹호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 철학에 안정적인 지적 기초를 제공하기를 원하는 지적 회의론자이다. 그 결과가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Chandran Kukathas 역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에 대한 방어가 양립 불가능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제한적인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방어를 시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하이에크 정치 철학의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Norman P. Barry도 하이에크의 저작 속의 "비판적 이성주의"라는 것이 진화적 과정을 통해 스스로 판결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일종의 운명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밀튼 프리드먼과 Anna Schwartz도 하이에크의 견해 속에는 역설의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프리드먼은 이성적 계획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더 나은 경제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에 대해 언급히며, 하이에크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화폐 제도를 자신이 설계한 인위적인 구조로 바꿀 것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재에 대한 견해

1962년, 하이에크는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932~1968년 포르투갈 총리 역임)에게 '자유의 헌법(1960)'을 보냈다. '새로운 헌법의 원칙에 대한 개략'이라 할만한 이 책이 과잉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예방할 헌법 체계를 구상하고 있던 살라자르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피노체트 장군(Augusto Pinochet)의 군사 정부 통치기였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칠레를 방문하여, 칠레를 자유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한 경제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싱크탱크인 Centro de Estudios Públicos의 명예 의장 임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칠레의 비민주적인 자유주의 지배 체제에 대한 질문에, 하이에크는 이렇게 답하였다:

장기간 지속되는 독재 체제에는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전환기에는 독재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주의를 결여한 민주 정부보다 자유주의 독재 체제를 선호합니다. 제 느낌에는, 칠레의 경우, 독재 정부에서 자유주의 정부로 전환될 것입니다.

'런던 타임즈'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비난을 많이 받고 있는 칠레에도 아옌데(Allende) 치하에서보다 피노체트 치하에서 개인의 자유가 훨씬 더 신장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며, 피노체트를 방어했다. 그는 "특정한 시점에는 그것이 유일한 희망일 수 있을지라도, 성공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개인의 선의에 의존하는데, 믿을 수 있는 개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기회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그 독재 정부가 제한된 민주주의를 향해서 나가고 있는 경우 또는 그런 때만 그러하다."라고 설명하였다.

하이에크는 권위주의전체주의의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방어하는 전환기적 독재의 개념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라고 언급하며, 전체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1981년 5월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남미에 만연하고 있는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의견을 요청받은 적이 있다. 하이에크는 "전체주의를 권위주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며, "남미에는 전체주의 정부가 없으며. 유일한 전체주의 정부는 아옌데 치하의 칠레였다"고 답했다. 하이에크에게, 전체주의라는 말은 매우 구체적인 어떤 것을 의미했다. 즉,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완전히 반대되는 "분명한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전체 사회를 조직하려는 의도"를 의미했다.

하이에크의 영향과 공적

하이에크가 경제학 발전에 미친 영향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의 노벨상 수락 강연은 경제학 분야의 수상자들의 연설 중 Kenneth Arrow의 강연에 이어 두 번째로 자주 인용될 정도로 인기가 있다. 거기에서 하이에크는 정통 경제학 분야와 신고전주의적 모형을 비판했다. Vernon Smith, Herbert A. Simon 등 많은 수의 노벨 경제학 수상자들은 하이에크를 가장 위대한 현대 경제학자로 인정한다. 또 한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인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은 하이에크가 노벨상을 받을만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 후반의 주류 경제학자 집단 안에서 하이에크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 것에는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1931년, 하이에크의 '가격과 생산'은 아주 짧은 낭만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이제 생산 기간에 대한 그의 허튼소리가 1927~1931년과 그후 1931~2007년의 역사적인 현장에 대한 거시경제를 매우 잘못 진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새뮤얼슨은 여생의 나머지 50년 동안 하이에크와 Böhm-Bawerk가 지적한 자본 이론의 문제점에 집중하였고, 생산 제품이 지배하는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라는 20세기의 가장 중심적인 경제학적 문제에 있어서 하이에크가 옳았고 자신의 스승인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틀렸다고 단호하게 판단했다.

하이에크는 균형 구조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도입한 점과 성장 이론, 정보 경제학 분야와 자생적 질서 이론에 영감을 불어넣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널리 인정받는다. 엄청난 인기와 영향력을 발휘한 밀튼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에 제시된 "비공식적" 경제학은 가격 체제를 지식을 전달하고 조정하는 체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하이에크적이다. 이것은 프리드먼이 자신의 대학원 수업에서 하이에크의 유명 논문인 '사회에서 지식의 사용'(1945년)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경제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 총장을 지낸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는 현대 경제학에 있어서 하이에크의 위치에 대해 설명한다: "오늘날 경제학 강좌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학생들에게 남기려고 한 것은 보이는 손보다 보이지 않은 손이 더 강력하다는 생각입니다. 일은 잘 조직된 노력 속에서 방향, 통제, 계획 없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이것이 하이에크의 유산입니다."

1947년까지,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 단체인 Mont Pelerin Society의 결성에 참여했다. 그는 대처리즘(Thatcherism)에 영감을 준 우파 자유주의 및 자유 시장 경제 싱크 탱그인 경제 문제 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 Affairs)의 설립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필라델피아 협회(Philadelphia Society)의 회원이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역시 비안나 출신으로 과학 철학자인 칼 포퍼와 오랫동안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1944년, 하이에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포퍼는 "나는 Alfred Tarski"를 제외하고 그 어떤 살아 있는 사상가보다 선생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포퍼는 '추측과 반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을 하이에크에게 헌정하였다. 하이에크도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연구'라는 논문 모음집을 포퍼에게 헌정하였고, 1982년에는 "1934년에 그의 'Logik der Forschung'이 처음 나온 후 지금까지, 나는 그의 전반적인 방법론을 전적으로 지지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그들의 생각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하이에크는 밀턴 프리드먼의 지적 발전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시카고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공 정책과 정치 철학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동료나 친구들과의 비공식적인 토론을 통해 관심이 더 커졌는데, 이것은 '노예의 길'이라는 하이에크의 강력한 책과 1947년 Mont Pelerin Society의 첫 번째 회의에 참석했던 일, 그리고 하이에크가 1950년에 시카고 대학교에 합류한 이후 그와의 토론을 통해 강화되었다. 게다가, 하이에크는 자유주의(libertarian) 이념에 헌신한 매우 유능한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뛰어난 자유주의(libertarian) 언론이었던 'The New Individualist Review'라는 학생 출판사를 시작했고, 나는 그 저널의 고문으로서 거기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이에크는 칼 멩거(Carl Menger)에 가장 큰 지적 부채를 지고 있다. 멩거는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도덕 철학자들이에 의해 개발된 접근법과 유사한 '사회적 설명에 대한 접근법'을 개척한 사람이다. 하이에크는 현대 경제학, 정치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노예의 길(1944년)'에서의 진실, 거짓, 언어의 사용에 관한 논의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반대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이에크와 보수주의

하이에크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보수주의 정권이 부상하면서 새롭게 주목받았다. 1979년에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대처는 의회의 경제 전략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하이에크 정책 연구 센터' 소장인 Keith Joseph를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마찬가지로, 1981년, 미국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재정 관료였던 데이비드 스톡맨(David Stockman)도 모두 인정하는 하이에크의 추종자였다.

하이에크는 "자유의 헌법"의 부록으로 포함된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논문에서, 보수주의를 변화하는 인간의 현실에 적응하거나 긍정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상으로 비판했다: "보수주의는 그것이 보수하는(지키는) 것만큼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비록 보수주의가 (특히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을 비롯해) 경제적 견해의 많은 부분을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공유하지만, 보수주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고 믿었다. 반면, 자유주의는 "어디론가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을 껴안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라고 생각했지만, 미국에서는 "liberal"라는 말을 본래의 의미대로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대신 "libertarian"이라는 말이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논문에서 하이에크는 보수주의가 빈번하게 제국주의와 결합하면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를 적대하고 준엄한 국가주의로 기울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다.

하이에크는 libertarianism이라는 아주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 대신에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차용하여 "Old Whig"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나중에 그는 "나는 버크주의 휘그가 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신조로서의 휘그주의는 고전적 정치 경제, 맨체스터 학파,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과는 관련성이 거의 없다. 이 논문은 보수주의 사상가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던 다른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부캐넌(James M. Buchanan)의 "왜 나도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규범적 전망"도 그 예이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홍보자로 공격한다. 영국의 언론인인 새뮤얼 브리튼(Samuel Brittan)은 2010년에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이라는 책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중도적 자유 시장 철학의 아래 깔려 있는 개념의 가장 포괄적인 서술이다"라고 결론내렸다. 브리튼은 드디어 레이몬드 플랜트(Raymond Plant)가 나와서 하이에크의 사상에 대해 반대 논리를 전개했지만, "하이에크의 공개적인 지지자들보다 '자유의 헌법'에 대해 더 철저하고 공정한 분석"을 제공하였다고 덧붙였다.

영국 정책 분석가인 Madsen Pirie는 '왜 F A 하이에크는 보수주의자인가'에서 하이에크가 보수적인 관점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수주의자는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에크처럼 사회의 운영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회 질서에 강요되는 변화를 매우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시장에게 변화하고 발전할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시장이 원활하게 기능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Pirie는 이것은 하이에크와 보수주의자들의 공통적인 관점이라고 말한다.

하이에크와 정책 토론

자생적 질서와 지식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가격의 중요성에 대한 하이에크의 생각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의 경제 개발과 이행 경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Peter Boettke는 개혁적 사회주의와 소련이 실패한 이유를 상세히 파고들었다. Ronald McKinnon은 하이에크주의적 개념을 이용해서 중앙집중적 국가와 계획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의 이행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전 세계은행 수석 이코너미스트인 William Easterly는 'The White Man's Burden' 등의 책에서 외국 원조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경향이 있는 이유를 강조했다.

2007~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호황과 불황의 주기에 관한 하이에크의 핵심적인 설명에 다시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것은 버냉키가 주장한 저축의 과잉이라는 설명에 대한 대안적 설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William White 등 국제결제은행(Bank of International Settlements) 이코노미스트들은 하이에크주의적 통찰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화폐 정책과 신용 확대의 영향을 금융 사이클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A. Hoffmann과 G. Schnabl은 국제적인 관점에서, 세계 경제의 반복적인 금융 사이클을 1980년대 이래 대규모 선진국 경제의 중앙 은행이 이끌어 온 점진적인 금리 인하의 결과로 설명했다. 또, N. Cachanosky는 미국 화폐 정책이 남미의 생산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요약했다.

하이에크와 궤를 같이하여, 점점 많은 수의 연구자들이 팽창적인 화폐 정책과 너무 낮은 금리를 전반적인 금융 위기와 특히 서프라임 시장의 위기의 부정적인 촉발 원인이자 주요 요인으로 본다. 화폐 정책과 규제의 강화가 시장 경제의 혁신적 요인들을 약화한다는 주장이다. 금융 위기 이후의 양적 완화는 경제의 구조적 왜곡을 유지시킴으로써 추세적 성장의 추락을 초래할 뿐 아니라, 새로운 왜곡과 분배에 관한 갈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생활

1926년 8월, 평소에 좋아하던 사촌의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고 다소 충동적으로 자신이 근무하던 사무실의 비서인 Helen Berta Maria von Fritsch(1901–1960)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두 자녀가 태어났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지 못했던 하이에크와 사촌(Helene Bitterlich; 1900–1996)은 어느 시점부터 은밀한 만남을 이어간다. 결국 1950년 7월, 하이에크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Bitterlich와 결혼하였다. 하이에크는 이 이혼-재혼 스캔들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비종교적 환경에서 자랐으며, 15세부터 자신이 불가지론자라고 판단했다. 그는 1961년 시카고를 떠난 후 거주했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1992년에 별세하였다.

대표작

  • 노예의 길, 1944년
  • 개인주의와 경제적 질서, 1948년
  • 자유의 헌법, 1960년
  • 법, 입법 그리고 자유
    • 1권. 규칙과 질서, 1973년
    • 2권. 사회 정의라는 신기루, 1976년
    • 3권. 자유로운 국민의 정치 질서, 1979년
  • 치명적인 자만: 사회주의의 오류, 1988년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