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6.25 전쟁
최근 수정 : 2021년 6월 3일 (목) 08:15

(한국전쟁에서 넘어옴)

출처 : Google Image

개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선전포고 없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원인

김일성과 박헌영의 동상이몽 적화통일 야욕

1949년 3월 초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 일행.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가 보인다. 3월 5일에 스탈린과 만나는데, 이때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말하며 소련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스탈린은 1950년 초에 남침계획을 승인하고,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50년 3월 31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머물렀는데, 이때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있었다.[1]

김일성은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이미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었다.[2] 이는 그가 인민의 선택과 무관하게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으로 발탁된 시기부터 전쟁으로 남한을 적화통일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후 1948년의 김구김규식 등이 참석한 남북협상 따위는 진심이 결여된 남한 정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지도자가 될만한 경력이나 식견이 없었음에도 스탈린에 의해 꼭두각시 지도자로 발탁된 컴플렉스 때문에 남한 적화 성공으로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고, 부수상 박헌영도 북한에서 김일성의 식객에 지나지 않는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남침시에 '20만 남로당원 봉기'를 호언장담하며 자신의 지지 세력이 많다고 믿은 남한 적화를 간절히 원했다.

소련, 중국과의 결탁

6.25 전쟁(외국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은 북조선의 야욕으로 발발하였으며, 구 소련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남침 개시 이튿날인 6.26일 조직된 북한의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 정령 △위원장 김일성, 위원 박헌영·홍명희·김책·최용건·박일우·정준택.[3] 6.25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건으로,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공식화 하고 있다. 미군의 정보에 의하면 군사위원회는 실제로는 1950년 2월~3월에 구성되었고[4], 6월 26일 대외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라 한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폭파한 대동강 다리를 건너 남하하는 피난민들 : Max Desfor (1913 ~ 2018) AP 통신 기자가 1950년 12월 4일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처럼 북한 주민 다수가 김일성의 공산 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5][6][7]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 요청을 승인한 배경에는 1949년 10월 모택동국공내전 승리로 중국 본토가 적화되고,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 등 유리한 정세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8]

거짓으로 밝혀진 음모론들(남침유도설)

남침 유도설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아래의 두 가지를 소개한다. 남침 유도설은 미국 시카고 대학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그 외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나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순한 의도에서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6·25남침 못믿는 사람들 있다니 안타깝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애치슨 라인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어선이었던 애치슨 라인이 6.25 전쟁의 원인으로 이야기되는 경향이 최근까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은 분단 직후부터 꾸준히 남침을 원했으며 스탈린과 김일성이 공모하여 남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애치슨 라인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전개

북한의 기습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참전

6.25 당시 김일성박헌영이 1950년 10월 1일자로 모택동에게 보낸 중공의 파병을 구걸하는 서신. 중국어와 한국어 두 가지로 보냈다.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1.4 후퇴

교착상태

휴전 성립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남한 적화의 희망이 사라지자 김일성은 휴전을 원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유럽 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도록 한국 전선에 붙잡아두기 위해 휴전을 반대하여 협상이 지리하게 계속되며 지연된다. 그러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돌연 사망하자 휴전협상은 급물살을 타 넉달 후인 7월 27일에 타결된다.

국제법적으로 한국전은 종전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휴전 상태에 있다.

명칭

해외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우리는 그렇다면 독립 전쟁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1차 중동전쟁을 독립전쟁으로 부르듯이

전쟁의 피해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기습 공격, 남침(南侵)전쟁을 일으켰다. 1953년 7월 27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국군 62만여명(전사 17만8569명, 부상 55만5022명, 실종·포로 4만2769명), 유엔군 16만명(전사 4만670명, 부상 10만4280명), 북한군 60만~80여만명(전사 약 52만명, 실종·포로 약 9만8000~12만명, 비전투 손실 17만7000명 등), 중공군 36만~100만명(전사 11만~15만명, 부상 22만~80만명, 실종·포로 2만5000~2만9000명), 남한 민간인 피해 99만명(사망·학살 37만3599명, 부상 22만9625명, 납치·행방불명 38만7744명 등), 북한 민간인 피해 15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등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명의 절반이 넘는 1800여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아시아·태평양전쟁사의 권위자 존 다우어(John W. Dower)가 추정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 사망자(징병·징용 사망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등) 수가 약 7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韓國戰爭被害統計集) (國防軍史硏究所, 1996) 국립중앙도서관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수는 12만 9천명

김일성은 6·25전쟁 기간 중 남북한 지역에서 계획적인 숙청 및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전쟁 전후 북한군 등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연구보고서: 민간인 학살을 중심으로》에 의하면 북한 정권 및 인민군, 빨치산 등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12만8936명에 달한다.

잊혀진 국군포로 6만명

  •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국군포로 자녀들은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 특히 분개한다. "국군 포로 자식으로 딸로 살아내느라고 수고했다고 와서 잔등이라도 한번 쓸어주면 덧나나요." 최 씨는 말했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탈북민만 보면… 온 대한민국이 어쩔 줄 모르는데, 북한에서 자기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그 불쌍한 병사의 딸은 들여다도 안본다는…." 이때부터 최 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 여기 군인들 보면 말해요. 너희 군대 절대 가지마라고… 전쟁 일어나면, 포로되면, 우리 아버지처럼 또 아오지 탄광 간다고. 너희 젊은 사람들은 도망치라고, 전쟁나면." 최 씨는 최근 다시 논란이 된 위안부 문제에 빗대 이렇게 덧붙였다. "종군위안부 문제요, 나라가 없을 때 가장 연약한 여인들이 겪은 문제에요… 그 상처에는 지금 다치면 피고름이 나오고, 나라가 있으면서 북한 땅에 가서 이 나라 젊은이들(국군포로)이 당한 그 상처에는 지금도 다치면 선지피가 콸콸 쏟아진다고."[9][10][11]
올해도 국군포로에 관심 없이 6·25 행사

미국의 세균전 논란

[일부 反美측 주장 반박… 6·25 연구의 대가 웨더스비 교수]
한국전 교착상태 빠진 中이 反美여론 만들려고 기획하고 北이 동조해서 만든 선전전
스탈린 死後 새 지도부 '세균전 관련 거짓주장이 소련 위상에 해 끼쳐' 판단
천젠 , 캐스린 웨더스비 , 션즈화 , 밀턴 라이텐버그 지음
오일환 , 이연식 , 방일권 (편역) 옮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세균무기를 실제로 사용했을까?
4장에서는 전술핵무기와 생화학 무기 통제에 관한 전문가 밀턴 라이텐버그의 글과 함께 부록으로 소련공산당 내부 문서와 중국 측 공문서를 포함해 30건이 넘는 기밀문서와 기록을 소개하였다. 그 중에 압권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던 헝가리의 티버 머레이(Tibor Meray) 기자의 회고와 분석이다. 과연 이 기자는 세균전설이 왜 날조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까. 또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위생부장으로서 이 사건 날조의 주역이었던 우쯔리(吳之理)의 회고와 뒤늦은 고백은 그 내막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소련과 북한의 ‘6·25 북침설’ 조작 책자 간행 유포

6·25전쟁 와중에 북한과 구소련이 전쟁 발발 책임을 남한과 미국 측에 떠넘기기 위해 ‘북침(北侵)설’의 근거를 모아 국제사회에 배포한 자료집이 발견됐다. 북한 문화선전성 대외문화연락부 산하 신조선출판사가 1951년 12월 출간한 ‘조선 동란을 일으킨 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자료’라는 제목의 259쪽 분량의 책이다. 발간사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수로 북한 정권 수립 직후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을 맡았던 박헌영이 썼고, 책은 러시아어와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체코어로까지 번역 출간돼 국제사회에 배포된 것으로 확인됐다.
책의 내용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내어준 이승만 정부와 국군이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경무대와 용산 육군본부 등에 남기고 간 외교전문과 군사문서 등 문서 29편을 취합해 ‘6·25전쟁은 북침’이란 논리를 알리는 데 집중돼 있다.

외부 링크

“6·25 전쟁은 북한 남침” 구소련 기밀문서 공개 조선일보 2020.06.28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김영호,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2] 자유세계 지켜낸 트루먼과 맥아더 조선일보 2010. 6. 22
오규열,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3] 전쟁을 부추기고 이용한 모택동 조선일보 2010. 6. 23
김기철 기자,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중공軍, 휴전후에도 北 잔류… "점령군처럼 행동" 비판받아 조선일보 2010. 6. 23
이지수,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4]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조선일보 2010. 6. 24 종합 A08면
차상철,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5] "유엔군 철수하면 北進" 압박하자 美, '비상시 이승만 감금' 검토 조선일보 2010. 6. 25

6.25 관련 참고 서적

6∙25전쟁이란?
6∙25전쟁 통계
존 톨랜드의 6·25전쟁 (전 2권) 존 톨랜드 지음 | 김익희 옮김 | (바움, 2010.06.10) | 1권 436쪽, 2권 468쪽
토르쿠노프 저, 구종서 역,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서울 : 에디터, 2003) 중앙일보 2003.06.27 5면
  •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

6.25 관련 원천 사료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2. 김일성 전쟁준비 보고 중앙일보 1994.07.22 종합 35면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3. 蘇.中비밀방문,병력배치 중앙일보 1994.07.23 종합 30면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4. 끝 중앙일보 1994.07.24 종합 30면
마오쩌둥에게 “우리 자체 힘으로 (패전) 위기 극복 가능성 없다”고 매달려
마오쩌둥의 파병 초안, 형식은 지원군이지만 정규군 파견 드러나
정전협정에 “중국 인민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 주장
6·25전쟁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중국, 미국에 함께 맞선 북-중 혈맹 강조
  1. KOREAN WAR ORIGINS, 1945-1950 This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sheds light on the question of "who started the Korean War?"
  2. KOREAN WAR, 1950-1953 A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related to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3. KOREAN WAR ARMISTICE On July 27, 1953,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ceasing hostilities and bringing an end to the Korean War.
  4. KOREAN WAR BIOLOGICAL WARFARE ALLEGATIONS In 1951 and again in 1952, China,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alleged that the United States conducted biological warfare (BW) in areas of the PRC and in the DPRK.
  5. CHINA AND THE KOREAN WAR A collection of materials documenting China's involvement in all stages of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사진 자료

한국전쟁 지도자와 주요 군사령관

각주

  1.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2. 민주조선 자주독립의 길, 김일성 장군 중요 논문집, (북조선로동당중앙본부 선전선동부, 1947)  :八.一五 一週年을 記念하면서 朝鮮同胞에게 告함 : p.28
  3. Regarding the organization of the military committee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자료센터)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4. RG 319,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Intelligence Document File Publication 1947-62, Entry # 1004H (UD), ID 950054 : ATIS-FEC Interrogation Report, Box No. 334, 950054 KG 1121, etc. (NARA문서,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p.79
  5.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6.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7.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8. [뉴스 속의 한국사] 김일성, 스탈린과 회담서 "3일내 전쟁 끝날 것" 장담했대요 조선미디어 / 신문은 선생님 2020.06.23
  9. https://www.bbc.com/korean/features-53174047 6.25: 잊혀진 국군포로의 잊혀진 딸들… 그들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10.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1&aid=0000544599 6·25 참전용사 기리는 묵념하는 통합당
  11. 2020년 총선후, 여당 민주당의 518 기념식과 노무현 기념식에는 상갓집 개처럼 참석을 하였다. 6.25 기념일에는 국회 회의에 앞서 묵념으로 갈음하였다.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