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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최근 수정 : 2019년 7월 9일 (화) 06:45

(한국전쟁에서 넘어옴)

6.25 전쟁은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예고 없이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출처 : Google Image
1949년 3월 초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 일행.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가 보인다. 3월 5일에 스탈린과 만나는데, 이때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말하며 소련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스탈린은 1950년 초에 남침계획을 승인하고,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50년 3월 31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머물렀는데, 이때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있었다.[1]

원인

북한의 남침

6.25 전쟁(외국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은 북조선의 야욕으로 발발하였으며, 구 소련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폭파한 대동강 다리를 건너 남하하는 피난민들 : Max Desfor (1913 ~ 2018) AP 통신 기자가 1950년 12월 4일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처럼 북한 주민 다수가 김일성의 공산 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2][3][4]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거짓으로 밝혀진 음모론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명칭

해외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우리는 그렇다면 독립 전쟁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1차 중동전쟁을 독립전쟁으로 부르듯이

전쟁의 피해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기습 공격, 남침(南侵)전쟁을 일으켰다. 1953년 7월 27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국군 62만여명(전사 17만8569명, 부상 55만5022명, 실종·포로 4만2769명), 유엔군 16만명(전사 4만670명, 부상 10만4280명), 북한군 60만~80여만명(전사 약 52만명, 실종·포로 약 9만8000~12만명, 비전투 손실 17만7000명 등), 중공군 36만~100만명(전사 11만~15만명, 부상 22만~80만명, 실종·포로 2만5000~2만9000명), 남한 민간인 피해 99만명(사망·학살 37만3599명, 부상 22만9625명, 납치·행방불명 38만7744명 등), 북한 민간인 피해 15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등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명의 절반이 넘는 1800여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아시아·태평양전쟁사의 권위자 존 다우어(John W. Dower)가 추정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 사망자(징병·징용 사망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등) 수가 약 7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韓國戰爭被害統計集) (國防軍史硏究所, 1996) 국립중앙도서관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수는 12만 9천명

김일성은 6·25전쟁 기간 중 남북한 지역에서 계획적인 숙청 및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전쟁 전후 북한군 등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연구보고서: 민간인 학살을 중심으로》에 의하면 북한 정권 및 인민군, 빨치산 등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12만8936명에 달한다.

외부 링크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김영호,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2] 자유세계 지켜낸 트루먼과 맥아더 조선일보 2010. 6. 22
오규열,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3] 전쟁을 부추기고 이용한 모택동 조선일보 2010. 6. 23
김기철 기자,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중공軍, 휴전후에도 北 잔류… "점령군처럼 행동" 비판받아 조선일보 2010. 6. 23
이지수,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4]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조선일보 2010. 6. 24 종합 A08면
차상철,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5] "유엔군 철수하면 北進" 압박하자 美, '비상시 이승만 감금' 검토 조선일보 2010. 6. 25

6.25 관련 참고 서적

6∙25전쟁이란?
6∙25전쟁 통계
존 톨랜드의 6·25전쟁 (전 2권) 존 톨랜드 지음 | 김익희 옮김 | (바움, 2010.06.10) | 1권 436쪽, 2권 468쪽
토르쿠노프 저, 구종서 역,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서울 : 에디터, 2003) 중앙일보 2003.06.27 5면
  •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

6.25 관련 원천 사료

  1. KOREAN WAR ORIGINS, 1945-1950 This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sheds light on the question of "who started the Korean War?"
  2. KOREAN WAR, 1950-1953 A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related to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3. KOREAN WAR ARMISTICE On July 27, 1953,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ceasing hostilities and bringing an end to the Korean War.
  4. KOREAN WAR BIOLOGICAL WARFARE ALLEGATIONS In 1951 and again in 1952, China,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alleged that the United States conducted biological warfare (BW) in areas of the PRC and in the DPRK.
  5. CHINA AND THE KOREAN WAR A collection of materials documenting China's involvement in all stages of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사진 자료

각주

  1.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2.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3.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4.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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