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사건(惠山事件)은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 등이 이끄는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 마을을 습격한 소위 보천보 사건(普天堡 事件) 직후, 관련된 지하조직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등이 적발되어 1937~8년간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혜산경찰서가(惠山警察署) 작성한 혜산사건 조서(惠山事件 調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7권 (계승본)에 실린 사진이다. 논란이 많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의 정확한 신원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은 전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공개된 함흥지방법원의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김일성의 신원은 나오지 않는다.
함흥지방법원의 1941년 8월 28일자 혜산사건판결서의 일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이 본명 김성주(金成柱)로 적혀 있다.[1]

사건의 경과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2]

검거자

제1차 1937년 10월 10일 수회
제2차 1938년 7월 수회
검거인원 합계 739명
제1차 송국자 130명 중 103명 기소

제2차 송국자 156명중 85명 기소


당시 일본인들이 붙인 혜산사건(惠山事件)의 공식 명칭은 "중국 공산당의 조선내 항일인민전선 결성 및 지나사변 후방교란 사건(中國 共産黨の 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 竝 支那事變 後方攪亂 事件)"이다.[2] 지나사변(支那事變)은 일지사변(日支事變)이라고도 하며,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 전쟁(中日戰爭)을 말한다.

일본인들은 보천보사건이나 혜산사건을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일본의 중국침략을 방해하려고 후방인 조선 국경을 교란하기 위해 꾸민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동북항일연군에는 비록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코민테른과 중공당 만주성위가 지도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이 이런 일을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행동결정’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서기였던 위증민(魏拯民, Wei Zhengmin, 1909 ~ 1941)이 1936년 2월 9일 북만을 떠나서 안도현 미혼진(安圖縣 迷昏陣)으로 와서 3월 8일경 미혼진 회의를 주재하면서 조국광복회 건립을 논의하고 5월의 동강회의(東崗會議)에서 확정·발표하였다.[3][4] 보천보 사건도 역시 위증민이 받아 온 코민테른의 신방침에 따라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撫松縣 西崗)의 양목정자(楊木頂子) 회의에서 ‘조선국내진공작전’을 논의하는 중에 구상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5][6][7]


재판 기록

혜산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은 1941.08.28, 2심 판결은 1943.12.28, 3심 판결은 1944.10.23 에 있었다. 마동희 (馬東熙, 1912-1938)는 수사 도중에 죽었으며, 권영벽(權永壁, 1909∼1945), 이제순(李悌淳, 1908~1945) 등은 사형 당하고, 박달(朴達, 1910~1960)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고, 박금철(朴金喆, 1911~1967 ?)은 무기형을 받았다. 박달과 박금철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해방과 함께 석방된 후 북한으로 갔다. 박달은 고문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별다른 활동을 못 했으나, 박금철은 북한의 고위직에 올랐다가 1967년 갑산파 숙청 때 쫓겨났는데,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 6권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0) pp.543~840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투데이 2015. 03. 16 :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이미지가 나옴.
박문상(朴文湘) /박달(朴達)현봉길(玄鳳吉)김문천(金文天)이갑수(李甲秀)김일수(金一洙)백록(白祿) 경성복심법원 1943.12.28
박문상(朴文湘) 고등법원 1944.10.23
신정금철(新井金喆) /시성(時星)박금철(朴金喆) : 경성복심법원 판결 1943.12.28
박금철(朴金喆)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런 사람들도 창씨 개명한 이름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의 정치부 기자였던 박갑동(朴甲東, 1919~ )은 감옥에서 풀려난 박달과 박금철에게 평양에 나타난 북한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니,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고 하였다.[8][9][10] 박갑동(朴甲東, 1919~ )은 1973년에 중앙일보에 연재한 박헌영에 관한 글에서 북으로 간 박금철김일성과 서로 모르는 사이라서 강계로 내려가 강계시당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그를 발탁해 올린 사람은 박헌영이라고 하였다.[11]

[6.25 전쟁 중]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안에 총 정치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 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뒤에 박금철이 당 중앙간부부장 시대에「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이 발생되었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가는 남로 당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당부의원장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나 드디어 김일성의 손에 의하여 이효순과 같이 숙청 당하고 말았다. 일반 사람들은 박금철을 김일성의 직계로 알고 있었으나(보천보 사건 관계로) 사실은 평양의 김일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며 박헌영의 덕을 입은 사람이다.

1973년 9월 3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박갑동(朴甲東, 1919~ )의 이 글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는 이듬해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서도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 자"라고 했다.[12]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기록을 재발견하여 공개한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글은 이듬해 1974년 중앙일보에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13][14][15][16]

또 해방 당시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17][18]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언급은 아무 것도 없으나, 다른 일본 기록과 달리 이름을 김일성 아닌 본명 김성주(金成柱)로 적고 있는데,[19]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것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론과 증거도 있으므로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자세한 사항은 "김일성 가짜설"을 참고하라.

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압수 물품

부록 : 조국광복회 10대강령,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과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번역이 나옴.
[附錄] 日帝公文書에 나타난 金日成部隊戰鬪記錄(惠山事件判決書에서)
  •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부록 pp.1~2] 祖國光復會十大綱領

(普天堡市街에 뿌린 것)

一、朝鮮民族의 總動員으로 廣汎한 反日統一戰線을 實現함으로써 強盜日本의 統治들 顚覆하고 眞正한 朝鮮人民政府를 樹立할것이다
二、朝中民族의 親密한 聯合으로써 日本及 그走狗 『滿洲國』을 顚覆하고 中國人民들이 自己가 選擧한 革命政府를 創設하며 中國領土內에 居住하는 朝鮮人의 眞正한 自治를 實行할것이다
三、日本軍隊 憲兵 警察及 走狗의 武裝을 解除하고 우리 愛國同志의 行動을 援助하는 人民의 武裝으로써 朝鮮人의 眞正한 獨立을 爲하여 싸울 수 있는 軍隊를 組織할 것이다
四、日本의 모-든 企業 銀行 鐵道 船舶 農場,修理機關및 賣國的 親日分子의 全財産 土地를 沒收하여 獨立運動의 經濟에 充當하며 一部 貧困한 同志를 救濟할 것이다
五、日本及 그 走狗들의 人民에 對한 債務 各種稅金 專賣制度等을 取消하고 大衆生活을 改善하며 民族的 工農商業을 障碍없이 發展 시킬 것이다
六、言論 出版 思想 集合 結社의 自由를 戰取하고 倭奴의 恐怖政策實現과 封建思想의 獎勵를 反對하며 一切 政治犯을 釋放할 것이다.
七、兩班 常民 其他 不平等을 排除하고 男女 民族 宗敎 等의 差別없는 一律的 平等과 婦女의 社會上 待遇를 提高하고 女子의 人格을 尊重히 할 것이다.
八、奴隷同化敎育의 撒廢 ̊ 强制軍事服務 및 靑少年에 對한 軍事敎育을 反對하여 우리말과 글로써 敎育하며 義務的인 免費教育을 實施할 것이다.
九、八時間勞動制 實施 勞勤條件의改善 賃金의引上 勞動法案의 確定 國家機關으로부터 各種勞助者의保險法을 實施하며 失業하고있는 모-든 勞動大衆을 救濟할것이다.
十、朝鮮民족에 對하여 平等的으로 대우하는 民族及國家와 親密히 聯合하며 우리 民族 解放運動에 對하여 善意의 中立을 表示(하)는 國家及 民族과 同志的 親善을 維持할 것이다.
(一九三六、五、五)
  • 압수된 증거품
[부록 p.6] 押收된 證據品으로는 機關紙 『火田民』 第一號에서부터 七號까지。 秘密出版物 『朝鮮共產主義者의任務』 『同志여 團結하라!』 『日中戰爭과 朝鮮青年의 任務』 『國際뉴-쓰』 『社會主義란 무엇인가』 『社會主義大意』 外에 檄文 數十種이 있고 『拳銃』 數個 彈藥 短刀 謄寫器及 附屬品等이있다.

위의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은 아래 한설야의 글에도 나온다.

  • 한설야(韓雪野, 1900~1976), 《北朝鮮特輯 : 作家가 본 金日成將軍》 : 북한의 한설야가 1947년 2월 남한 잡지에 기고한 글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1-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2.01 (국립중앙도서관) pp.30~31.
p.31에 북한 김일성이 1936년 5월 5일 조직했다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나온다.

여기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사상휘보 1938년 3월호에 나오는 오성륜 등이 작성한 10대강령[20]과는 대개의 취지는 비슷하나 문장 표현이 다르다. 날짜도 1936년 5월 5일과 6월 10일로 차이가 난다. 위의 10대강령은 보천보 사건 당시에 뿌려진 것이라 하는데, 1947년이면 북한에서 아직 이런 문건까지 조작해낼 단계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사실일 것같다. 이 문건은 오늘날 북한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작성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임이 명백하므로 이런 주장은 날조된 것이다.

아래는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이 작성했다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다.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1-2호에 실린 위의 한설야(韓雪野, 1900~1976)의 글에 나오는 것과 몇몇 단어만 차이날 뿐 거의 동일하다.

당시 24세였던 중학 중퇴의 북한 김일성의 학력 수준을 고려할 때 이런 강령을 그가 작성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상당한 지적 수준의 사람이 작성한 글로 보이므로 모스크바 공산대학 졸업자인 오성륜 등이 작성한 것이 맞을 것이다.

갑산파(甲山派)

혜산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살아남아 해방 후 북한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을 갑산파(甲山派)라 부른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협력한 전력 때문에 빨치산파와 상당히 가까운 사람들이었지만, 김일성 유일체제와 김정일 후계구도 확립 과정에서 1967년 모두 숙청 당했다. 갑산파 요인 이효순(李孝淳, 1907~?)은 사형당한 이제순(李悌淳, 1908~1945)의 형이다.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 美윌슨센터 공개 외교문서…`장성택 처형'과 유사점 연합뉴스 2013/12/17
북한 부수상 박금철의 숙청(2) RFA 2018-07-24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북한의 역사 날조

당시 일본 기록에 나오는 혜산사건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정식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이며,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吳成崙, 1900~1947 ?)·이상준(李相俊, 李東光, 1904~1937)·엄수명(嚴洙明)[21] 등이 주도한 단체이다.[22][23] 혜산사건 판결서 등 관련 기록에 의하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도 단체의 조직에 상당히 간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 부대가 이주동포를 습격한 것을 처음으로 보도한 조선중앙일보(鮮中央日報) 1936년 8월 19일 기사.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여운형이다. 그가 불과 3개월전인 5월에 김일성과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면 이런 기사가 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단체 이름을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고 하면서, 김동명, 이동백(리동백), 여운형(려운형)이 주도했는데, 김동명은 김일성(金日成)의 가명이라고 주장한다.[24][25] 하지만 북한이 말하는 이런 단체는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실존한 적이 없다. 혜산사건과 관련한 일본측 기록에도 대부분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로 나오며, 줄여서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 한 경우도 있지만,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그런 단체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북한이 조국광복회가 결성된 날이라 주장하는 1936년 5월 5일에 여운형은 서울에서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바쁜 사람이 언제 만주로 가서 김일성과 조국광복회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인데, 어떻게 항일연군 인물도 중국공산당원도 아닌 여운형이 주도할 수 있겠으며, 그 조직에 여운형 측근 인물들이 단 한명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혜산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 중에 여운형 본인이나 측근은 물론, 당시 그가 알았을만한 인물도 없다.

여운형과 같은 저명 인물이 만주로 가서 동북항일연군이나 김일성 같은 인물을 접촉했다면 일제에 포착되지 않았을 리도 없고 어딘가 기록에 나와야 한다. 여운형이 해방전 북한 김일성을 알았다는 증거는 없고, 해방 후에 처음 알게된 것이 틀림없다. 조국광복회와 관련이 있는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일 뿐더러, 그 이름이 국내 신문에 처음 보도되는 것도 1936년 8월 이후의 일이다.[26] 서울의 여운형이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는 1936년 5월에 6사장 김일성이나 북한 김일성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더구나 여운형이 사장이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19일자로 김일성 부대가 이주동포 부락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폭행을 했다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데,[27] 이것이 6사장 김일성에 관한 국내 첫보도이다. 여운형이 5월에 김일성을 만나 함께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면 불과 석달 뒤 이런 기사가 나갈 수 있었겠는가?

북한의 영화 중에는 해방 후 김일성이 여운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일성이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고 한다.[28] 스스로 날조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조국광복회는 보천보 사건 이후 연루자들을 검거 수사하는 혜산사건의 와중에서 드러났다고 말하지만, 보천보 사건 직전에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행사기사(偕行社記事)』 1937년 6월호 (5월 25일 간행)에 보인다.

혜산사건 관련 일제 기록

조국광복회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1차문헌이다. 창립선언문 (1936년 6월 10일, p.15), 발기인, 10대 강령 (p.19) 등이 나옴.
《제5절 혜산 사건(중국 공산당 지도의 항일 인민 전선 결성과 지나 사변의 후방 교란)의 상황》, 『日帝植民統治秘史: 일제하 조선의 치안상황』 조선총독부경무국편, 김봉우 역 (서울 : 청아출판사, 1989) pp.339 ~ 355.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수록처 : 社會問題資料硏究會 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 第5卷 영인판 (서울 : 高麗圖書貿易) : 국사편찬위원회
[三木今二, 古橋浦四郎]. 満州国に於ける最近の共産主義運動に就いて / [井本臺吉]. 最近に於ける朝鮮の邪敎 / [芹川定, 野村文吉, 長尾操]. 上海に於ける抗日テロ分子の活動状況 / [隈本孝道, 南出一雄, 山根隆二] ; 社会問題資料研究会編.

참고 자료

혜산사건 관련자 지인환(35세), 김삼손(41세), 조병희(42세) 체포, 한초남(23세) 사살 기록
p.11 : (3항) 1937년 10월 1일 ~ 1938년 2월 간에 권영벽, 천봉순, 김윤덕, 마옥준(마동희) 체포
(5항) 1937년 12월 22일 갑산군 동인면 종포리 남흥동에서 마옥준(마동희)과 장증렬 체포.

함께 보기

각주

  1. 김일성 가짜설#혜산사건 판결서의 6사장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기록 (1941년 8월) : 우남위키
  2. 2.0 2.1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8/31
  3.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5장 중기(1919~1931)의 독립운동 - 3. 재만독립전쟁의 전개와 특징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기념관
  4.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81
  5. [광복60년 특집④] '北 정통성' 부여, 보천보 전투는 과장됐다 : 보천보엔 경찰 5명뿐, '무혈전투' DailyNK - 2005.08.12
  6. “보천보전투, 조작된 항일무장투쟁 신화” RFA 2017-06-07
  7.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52
  8.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50)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5 종합 5면
  9. 박갑동(朴甲東, 1919~ ),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
  10. 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 : 박갑동 <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1974.03.28 종합 3면 :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前代)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자이며 ....
  1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12. 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 : 박갑동<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1974.03.28 종합 3면
  1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7) - 6사장 김일성의 성분 중앙일보 1974.07.05 종합 3면
  1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8) -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15.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9) 6사장 김일성의 죽음(하) 중앙일보 1974.07.10 종합 3면
  16.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261~292.
  17.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18.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 앞의 이기건의 증언이 나옴.
  19.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투데이 2015. 03. 16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이미지가 나옴.
    보천보 사건 총사령 김일성의 죽음 아시아 투데이 2015. 03. 19 : 6사장이 김성주(金成柱)로 적힌 판결문 이미지가 나옴.
  20.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五. 滿黨の鮮內抗日戰線統一運動竝支那事變後方撹亂企畫事件 사상휘보(思想彙報) 제14호 1938-03-01 p.64
  21. 엄수명(嚴洙明)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수처장이었던 엄필순(嚴弼順, ? ~ 1936)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22.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사상휘보 제14호 1938-03-01
  23. ≪中國 共産黨の 朝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および日支事變 後方攪亂 事件≫ :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 : 朝鮮 6』(東京, みすず書房, 1976) p.265
  24.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 제12장 광복의 새 봄을 앞당겨 (1936년 3월 ~ 1936년 5월) / 5. 조국광복회』
  25.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 제18장 중일 전쟁의 불길 속에서 (1937년 7월 ~ 1937년 11월) / 6. 《혜산 사건》을 겪으면서』
  26. 對岸襲來(대안습래)한 共軍(공군) 極度(극도)의 食糧難(식량난) 1936.09.14 조선일보 2면
  27. 騷然한 鴨綠江對岸!: 三百餘名의 土兵團 同胞村襲擊코 衝火 五十餘戶部落民의 生死不明 東邊道撫松縣에서 : 조선중앙일보(鮮中央日報) 1936년 8월 19일 4면
  28. 수령의 역사는 모두 왜곡된 역사 : 조국광복회 날조 RFA 201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