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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최근 수정 : 2019년 8월 9일 (금) 15:33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신상정보
원어이름 Horace Grant Underwood
직책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후임자 겔손 엥겔 G.Engel(왕길지)
한국이름 원두우
출생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
사망 1916년 10월 12일 (57세),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국적 미국
교파 장로교
배우자 릴리어스 호턴
학력 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
사목표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성 바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개요

"가족보다 이 조선청년들을 챙겨주시오.."

호러스 그랜트 한국 장로회의 아버지이자,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미국의 선교사 이다. 한반도에 장로회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 선교사이며, 비 개신교 인들에게는 현 연세대학교의 설립자로 꽤 알려진 인물이다.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기여하면서 좋은 인연을 유지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빠르게 발음한 말로, 당시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커피가 아니다.

명암이 분명한 호러스 뉴턴 알렌과는 달리, 헨리 아펜젤러,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후세 다쓰지, 메리 스크랜튼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 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생애

젊은시절, 선교사로 파송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부터 1884년까지 뉴브런스위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1년간 인도 선교를 위해서 의학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으며, 1884년 7월 28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었다. 당시 조선을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약혼녀와 실랑이가 있었는데 그 대화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 곳에서는 무얼 먹고 살고 있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 뿐이오."

허나 이에 약혼녀는 동의하지 못했고, 결국 언더우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나서 홀로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조선으로 들어오려던 언더우드는 개화파들이 일으킨 정변인 갑신정변으로 사회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조선기독교인으로서 마가 복음서를 번역한 문서선교사인 이수정(李樹廷)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준비하였다.


조선입국과 선교활동

그가 한국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에 입국한 그는 아직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예수교학당, 서울 구세학당,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일을 남겼다.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업적은 교회 설립과 전도 여행이었다. 1887년에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1900년도 초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도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북한 지역에서의 전도 여행을 3차례나 하였다. 학생 시절에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인연으로 후에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재 평택대학교)에서 교장을 1912년 부터 1916년 까지 역임하였다. 성서 번역에도 공헌하였는데 1887년에 상임성서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 복음서의 한글판을 번역·출간하였다. 또한 원두우는 뛰어난 복음주의 설교가이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에 연재되는 원두우 설교집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알기 쉽게 말했다.

2014년 기독교사상에 연재된 이야기에 따르면, 원두우는 일제에 의해 반일인사로 여겨질만큼 한국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써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연설하기도 했으며, 친일 성향의 선교사, 일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망 & 사후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1916년 10월 12일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서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은 1980년에 광주사태를 해외에 알려 5공화국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다.

후대의 평가

같은 조선에서 활동했지만 언더우드는 알렌과 달리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잇속 챙기기 급급했던 알렌과는 달리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겸 교회 건물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선교 방식과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일제에 의한 압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로회에서는 최초의 장로회 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언더우드가문과 한국의 인연

언더우드는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역시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공헌하며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가문의 구성원 전원이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각 세대의 장남이며, 이게 이 집안의 업적 전부가 아니다.


  • 2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언더우드 집안의 2대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에 알렸다. 대학 인가를 받고 취임하게 된 연희전문학교 교장 시절에는, 자신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손에서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보호하면서 한국어 연구에 힘쓰게 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교원 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윤재 박사와 한징 박사는 옥사한다. 원한경 박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태평양 전쟁 직전에 일제를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1년 부산에서 한국전쟁 구호 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병사한다.


  • 3대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

언더우드 집안의 3대가 되는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군으로 참전했으며, 정전 협정 당시에는 통역관을 맡았다. 전역 후에는 장로회 목사가 되었으며 장로회 계열 미션스쿨인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이바지한다. 1980년에는 광주사태로 인한 5공화국과의 마찰로 해외에 거주하게 되었다. 5공이 막을 내린 후 복권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연세대 이사를 역임하고 한국 땅에서 삶을 마쳤다. 연세대 대학 교회 루스채플에 이 분의 이름을 딴 원일한홀이 있다.


  • 4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의 영어 교육론에 대해 연구했으며, 한미 교육 위원단장을 역임했다. 2004년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작고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모든 고서 보관본과 근대사 자료를 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3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대부분은 2005년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 고문의 영향으로 이사회가 교단 파송 이사에 대한 조항을 삭제[20]하게 되자, 조선일보가 연세대 법인의 지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또는 법인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져나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2012년 현재까지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언더우드 박사의 3대손 피터 언더우드(Peter F. Underwood, 한국명 원한석) 씨와 4대손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A. Underwood, 한국명 원특한) 씨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연세대 사유화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연세대학교 관련

교내에 언더우드 동상이 있다. 그리고 언더우드 일가 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해외 벽지나 오지 등 선교 활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15년 이상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 1회 언더우드 선교상을 시상한다.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이 하나의 단과 대학으로 존재한다. 줄여서 UIC라 부른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기숙사는 12개의 하우스(House)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언더우드 하우스가 있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중앙 도서관 이름은 '언더우드 기념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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