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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도모르
최근 수정 : 2022년 3월 30일 (수) 15:32
1933년 우크라이나 행정수도 하리코프[1]의 길거리에서 아사한 농부들의 시체 옆으로 무심하게 지나가는 행인들.
우크라이나 키에프에 있는 추모상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어: Голодомор)는 1932년-1933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250만명에서 350만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기아로 인한 치사(致死)"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오스트레일리아·헝가리·리투아니아·미국·바티칸 시국의 정부·국회는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집단살해(genocide)로 인정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년 11월 네 번째 주 토요일은 대기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기념일로 지정했다.

개요

스탈린의 대숙청(1936-38)이 시작되기 3-4년 전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에선 7백만에서 1천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아사(餓死)했다. 소련공산당의 강제이주와 과도한 집산화 정책이 빚은 참상이었다.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명명된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참상은 그러나 소련연방이 해체되기 1년 전인 1990년에야 세상에야 알려졌다. 그때서야 우크라이나 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는 350장의 생생한 현장의 이미지들이 사진첩으로 묶여 대중에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 이후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15개국에서 소련공산당의 제노사이드(genocide)로 규정하고 있다. 단지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스탈린이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의도적 학살이라는 의미다.


만약 그 사진들이 없었다면, 홀로도모르의 참상은 잊혔을까? 아마도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옛날이야기로 구전되거나 근거가 희박한 신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었으리라. 기록이 소멸된 대부분의 과거사가 그러하듯. 사진기의 발명은 인류 기록의 역사에서 문자의 발명을 넘어서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과거의 사진 앞에선 누구도 쉽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영어속담에 “그림은 천개 단어를 그린다(a picture paints a thousand words)”란 말이 있다. 사진은 아마도 최소한 만 개의 단어를 찍고도 남음이 있다.
러시아정부가 지난 1930년대초, 당시 소련의 광범위한 대기근 사태에 관한 문서들을 기밀해재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기근사태는 크렘린 당국의 잘못된 정책의 결과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특히 아사자수가 가장 많았던 우크리이나의 기근은 집단 인종학살 행위에 해당된다고 우크라이나의 전문가들은 주장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원한의 뿌리

사태의 발단은 농업의 강제 집단화다.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한 소련 당국은 낙후한 농촌 지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며 1929년부터 집단농장(콜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콜호스프) 혹은 국영농장(솝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라도호스프) 속에 대다수 농민들을 강제로 편입시켰다.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은 생산 수단의 ‘공유’냐 ‘국유’냐의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같은 성격이다. 농민들은 이 체제를 ‘새로운 농노제’라고 부르며 저항했다. 이전의 지주 자리를 국가가 꿰차고 농민을 착취한다는 의미다.

스탈린은 대다수 농민들의 저항을 힘으로 눌러버리고 2년 내에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화했다. 그는 ‘봉건적인’ 농촌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진보’시키면 생산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곡물 생산이 15~20% 감소했고, 가축 수도 40% 감소했다. 애초에 집단농장 방식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것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법, 농민들은 논밭에서 설렁설렁 일했고,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닌 가축들을 애써 돌보려 하지 않았으며, 처음 사용해 보는 트랙터들은 대개 고장 나기 마련이었다.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자 당연히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크게 줄었다. 집단화 이전에는 일 년에 1인당 평균 300㎏을 수확했었는데, 이제는 많은 가구가 100㎏이 안 되는 배급을 받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량 공출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도시와 산업 부문, 군대를 먹여 살리고 수출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단화 이전인 1920년대만 해도 정부는 시장가격으로 곡물을 수매하여 1000만 톤 정도를 조달했으나, 1931년에는 거의 무상으로 2300만 톤을 공출했고, 그중 500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다. 1932년의 경우 정부는 수확량을 9000만 톤으로 예상하고 2900만 톤을 공출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수확량이 6700만 톤에 불과했지만 공출은 크게 줄지 않은 2200만 톤으로, 수확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참고 자료

각주

  1. Kharkiv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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