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혁명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제2공화국 장면 정부를 전복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한 일을 말한다. 엄밀하게는 군사 쿠데타이나, 당시 주도 세력은 군사혁명이라 자칭했고, 그 이후 18년간 집권한 박정희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루어 내어 한국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의 집권기간에 통용되던 명칭도 5.16 군사혁명이었다. 처음에는 표면적으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리더로 내세웠으나 곧 물러나고 이후 박정희가 주도하게 된다.

개요

5.16은 군부가 물리력으로 합헌(合憲)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점에서 쿠데타이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뒤 박정희 세력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은 근대화 혁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런 혁명의 결과이다. 쿠데타는 수단이고 결과는 혁명이었다. 전자(前者)는 법률적 평가, 후자(後者)는 전자(前者)를 포괄한 더 넓은 의미의 역사적 평가이다.

이 과정에서 2공화국 장면 총리는 진압 노력도 하지 않고 일찌감치 피신해버려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무혈혁명이 되었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守舊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 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盲信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 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 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守舊的)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 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혁명 공약

군사혁명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부터 시작되어 4시 30분경 수도 서울을 장악하고, 동원된 병력들이 국가 주요 기간 시설을 장악했다. 그와 동시에 방송국을 장악한 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면서 혁명공약도 같이 발표되었다.[1][2]

혁명공약(革命公約)
  1. 반공(反共)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6항의 (민간) 조항은 혁명에 참여한 민간인들의 공약이다. 이후 일반에 배포된 혁명 공약에는 주로 (군인) 아닌 (민간) 조항이 들어 있었다.

5.16 당일 서울시민 여론조사 결과

4.19 이후 시위에 맛을 들인 사람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같은 유치하면서도 위험한 구호도 등장하고, 더 이상 데모하지 말자는 데모까지 일어났다. 혼란을 틈탄 불순분자의 개입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시기에 일어난 5.16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여론은 대체로 지지가 다수였다.

이런 일에는 당시 사람들의 여론이 중요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5.16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치 일제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독립운동도 한 적도 없는 후세 사람들이 당시 사람들 아무나 친일파로 몰아 마녀 사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당한 막대한 피해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고 외면하며, 틈만나면 오히려 찬양한다는 것이다.

쿠데타에 반대하던 미군측의 조사결과 60%가 지지, 사후(事後) 조사 결과 약 70%가 지지.
군사쿠데타 배후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 는 듯하다. 미 8군의 방첩대(CIC)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을 상대로 조사해본바 열 명에 네 명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고, 두 명꼴로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네 명꼴로 반대하고 있었다.
1998년 월간조선 8월호 [편집장의 편지] : 조갑제
<저는 지난 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는 가운데 진 K.로버츠슨이란 분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은 서진규인데 미 육군에서 소령으로 전역하여 하버드에서 박사과정 연구를 하고 있는 50세의 교포 여성이었습니다. 이분은 1991년에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아주 재미있는 여론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40세 이상의 어른들 4백67명을 상대로 「1961년에 5.16이 났을 때 지지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46%가 「지지했다」고 응답했고 19%는 「반대했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찬반 의견을 표시한 사람들 중 약 70%가 「혁명을 지지했다」는 뜻입니다. 로버츠슨씨는 연령층을 확대하여 8백8명을 상대로 「5.16 혁명의 한국 발전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물었다고 합니다. 응답자의 62%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5.16혁명은 필요했다」고 답했고 17%는 「방해가 되었다」고 했으며 21%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69%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11%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으며 20%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로버츠슨씨가 이런 조사를 한 이유는 당시 중학생으로 맞았던 5.16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군사혁명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을 뚜렷히 기억하는데 학자들의 논문에는 이런 여론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게 이상하여 그런 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참고 자료

3.15 부정선거 혐의로 수감된 1공화국 국무위원들, 서대문형무소에서 간첩·살인범과 한 방에 수감. 간첩들로터 남한 적화 공작 이야기 듣고 망연자실. 5.16혁명 소식 듣고 “이제 대한민국 살았다.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만세 불러
한국 장교단을 격분시킨 ‘콜론 보고서’가 「사상계」에 게재된 것은 우발적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당시 「사상계」 잡지의 출판 및 운영비용은 미국 공보원이 부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은 「사상계」에 각종 정보와 자료까지 충분히 제공했다. 한 달 후 5·16이 터지자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는 「사상계」 잡지에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권두언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의하며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면서 적극 환영했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