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미 국무부가 5·18 광주사태 40주년을 맞아 5.18과 관련한 문서 43건 140쪽 분량을 한국 정부에 제공하였다.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0년 12월 13일까지 사이에 작성된 문서이다.

43건, 140쪽 분량…발포 행위 관련 자료 포함 안 돼
"삭제된 자료 전문 공개…美전향적으로 협조 의미"
외교부 "추가 자료 공개할 수 있도록 적극 요청할 것"


5.18진실-2023.3.1 광화문 전광훈.png


현재까지 공개된 문서

2020년 5월 공개된 것 외에도 2002년 비밀이 해제되어 공개된 광주사태 관련 미국무성 문건이 있는 것 같다. 이 문건들도 위 검색 자료에 같이 나온다.

“과격분자들 무기 탈취… 인민재판 열어 시민 처형" 美 국무장관, 주한대사 보고서


아래는 주한 미대사관에 올라있는 5.18 관련 자료이다. 국무부와 서울의 대사관이 주고받은 문건으로 보인다.

주요 내용

문서들을 대강 훑어보면 논란의 핵심인 북한군 참가 여부에 대해 당시 미국 측도 알려지지 않은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광주 시위대는 극렬 분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인민재판으로 몇 명을 처형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아래에서 STATE는 미 국무부(State Department)를 지칭한다.

William Gleysteen (1926~2002)[1][2] 당시 주한 미대사가 5월 31일 계엄사가 발표한 광주사태 종합 발표[3] 내용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이에 대한 미대사관의 견해를 덧붙였다.
아래는 위 보고서 3, 4, 6 항에 대한 번역이다.[4]

3. THF RIOT WAS THE WORK OF COMMUNIST AGENTS AND THE FOLLOWERS OF KIM DAE-JUNG (M-R: KIM TAE CHUNG), ACCORDING TO THE MLC ACCOUNT. TWO REINSTATED STUDENTS (I.E. FORMER POLITICAL OFFENDERS PERMITTED TO RETURN TO COLLEGE THE BEGINNING OF THE PRESENT SEMESTER), ONE EACH FROM CHOSUN AND CHONNAM UNIVERSITIES AND BOTH PAID KDJ LOYALISTS, ARE NAMED AS THE PRINCIPAL AGITATORS BEHIND THE ORIGINAL STUDENT PROTESTS.


계엄사(MLC, Martial Law Command) 발표에 따르면 폭동은 공산주의 첩자들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이 일으켰다 함. 이번 학생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반체제 선동가로서 징계를 받았다가 이번 학기에 복학이 허용된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의 복학생 2명으로서 모두 김대중의 열성 지지자들이었다.


4. THE FIRST ACT OF THESE AND OTHER "INSTIGATORS" WAS TO FAN THESE STUDENT PROTESTS INTO A GENERAL INSURRECTION.


이 두복학생과 여타 "선동자"들이 가장 먼저 행한 행동은 학생소요를 총체적 반란으로 부추기는 일이었다.


THIS THEY DID BY FABRICATING AND SPREADING RUMORS. THE OFFICIAL ACCOUNT ADMITS THAT "YOUNG SOLDIERS... DEALT ROUGHLY WITH SOME STUDENTS," BUT SAYS THAT THE ATROCITY RUMORS WHICH THEN QUICKLY SPREAD WERE "INCOMPREHENSIBLE TO MEN OF REASON. "


반란은 유언비어를 조작하고 확산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공식발표에서는 젊은 병사들이 몇몇 학생들을 거칠게 다뤘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확산된 계엄군의 잔혹행위에 대한 유언비어는 이성적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발표했다.


NEVERTHELESS THE RUMORS APPARENTLY CARRIED ENOUGH FORCE TO DRAW IN THE MASS OF CITIZENS. AND, WITHIN 24 HOURS, "MASS HYSTERIA PREVAILED" IN KWANGJU.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언비어들은 군중들에게 급속하게 전파되어, 24시간 내에 광주는 집단 히스테리로 뒤덮였다.


6. CREDIT FOR CASUALTIES BEING NO HIGHER THAN THEY WERE IN KWANGJU IS GIVEN ENTIRELY TO THE TROOPS, WHO "RESTRAINED THEMSELVES FROM USING THEIR RIGHT OF SELF DEFENSE." THEIR RESOURCEFULNESS IS PRAISED AS WELL: AWARE THAT RIOTERS HAD MINED THE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MARTIAL LAW TROOPS INFILTRATED... THE BUILDING AND DEFUSED THE CHARGES, "THUS PREVENTING A MASSIVE BLAST WITH MANY CASUALTIES WHEN KWANGJU WAS RETAKEN. FINALLY, SECURITY FORCES ARE CREDITED WITH GREAT GENEROSITY OF SPIRIT IN R'ELEASING WITH ADMONITIONS 1,010 OF THE 1,740 PERSONS TAKEN INTO CUSTODY DURING AND AFTER THE INSURRECTION.


광주에서의 희생자수가 예상보다 적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자위권을 발동하지 않고 끝까지 자제한 계엄군의 덕분이었다. 진압과정에서 계엄군이 발휘한 출중한 계략도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계엄군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청 건물에 잡입하여 폭도들이 설치한 폭약의 신관을 제거함으로써 광주시를 재 탈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대참사를 미연에 방지시켰다. 이 점은 매우 칭찬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끝으로 계엄사가 폭동 과정과 상황 종료 후에 검거된 폭도들 총 1,740명중 1,010명을 훈방하여 관용을 베푼 것도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비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 ‘발포명령 없었다’ 시스템클럽 20-05-26
미국 국무부 문서 007089 원문 text와 해설 시스템클럽
미문서 암시,‘발포명령 없었다’ 시스템클럽

과격분자들에 의한 인민재판과 처형

"온건파 시민위원회(시민학생수습위원회)는 광주의 폭동상황을 제어할 능력을 상실했고 극렬분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었고 몇건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학생 데모대는 대부분 신원불명의 무장 극렬분자들로 대체되었는데, 이들은 혁명정부를 세울 것에 대한 논의를 하던 무리들이었다. "
광주사태 보고서-1980-05-25.png
시위대의 극렬분자들이 인민재판을 벌여 무고한 시민 몇 명을 처형했다는 것은 광주사태가 평화적인 민주화 시위였는데 참여자가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학살 당했다는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실제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인민재판을 위해 시민을 강제 연행해가는 장면으로 보이는 사진도 몇 장 남아 있다.[5][6][7]


Gleysteen 대사의 아래 5월 26일자 보고 전문 006660 의 2번 항목에도 과격분자들의 인민재판과 처형에 대한 말이 나온다. (확인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