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기부에서 나온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 현황"이라는 문서의 일부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난 기간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이다.

서울의 봄

소위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1980년의 봄에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잦았는데, 5월 중순이 되면서 격화되고, 규모도 커졌다. 배후에는 당시 김대중 세력과 재야세력의 선동이 있었다고 보여지고, 나중에 계엄사도 그렇게 발표했다.[1][2] 김대중은 유신기간 가택연금을 당해 정치활동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도권 야당에서는 김영삼에 비해 입지가 좁았으므로, 개헌 후 정상적 선거를 하게 될 때 자신의 집권 가능성을 낮게 보았을 것이다.

5월 16일

  • 석유 수급문제로 중동을 순방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은 시위가 격화되자 일정을 앞당겨 급거 귀국 : 밤 10시 30분 김포 도착[3]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격화되어 조기 귀국함.[4]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여 전경을 치어 죽임.[5]


◎ 광주 상황

  • 17:00~22:00 도청 등 시가지 일원에 전남대, 조선대생 및 고교생 10,000여 명 연합 횃불 시위
    • 송기숙(전남대 교수)이 시위 주도

◎ 요구사항

  • 불법 비상계엄 해제
  • 반민족, 반민주주의 척결
  • 정치일정 명확 제시
  • 유신잔당 퇴진


5월 17일

◎ 17일 24시 (18일 0시)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제주 추가). 전대학에 휴교령 내림.[6]

  • 79.10.27. 04:00 제주도 제외 선포한 비상 계엄지역을 전국으로 확대.
계엄 확대조치는 서울에서 연일 벌어진 대규모 학생시위에 대한 대응임 :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 사회불안 선동혐의로 연행.[7]


◎ 11 특전 여단 308/1,056 병력 투입

5월 18일

◎ 상황

  • 09:30 전남대생 200여 명 계엄군에 의해 강제 해산조치로 광주사태 발단
  • 충장로 파출소, 산수 파출소 등 경찰지서에 투석 및 경찰차고에 화염병 추척 방화
  • 학생 10,000여 명 참석
  • 한일은행 앞, 도청 앞 등지에서 군경과 대치
  • 시위 가담 학생 615명 검거


◎ 유언비어 유포

  •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개시하였다
  •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
  •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 난동을 일으켰다
  • 투입된 공수부대원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 환각제 등을 복용시켰다
  • 여대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 병력 투입

  • 군 251 / 1,933명
  • 경찰 190 / 3,660명


◎ 피해 상황

  • 경찰 부상 27 (중상 4, 경상 23)
  • 공공시설 유리창 파손 64건
  • 깨스차 1대 방화
  • 책상 5, 싸이카 2, 자전차 4, 전화기 4 파손


5월 19일

◎ 상황

  • 광주은행 앞, 중앙여고 앞, 광주역 앞, 공용터미날, 도청 등 지가지 일원에서 학생, 시민 등 17,000여 명 시위
  • 투석, 승용차 탈취, 방화 및 파출소 점거 등 극렬 시위
  • 시위자 120명 검거


◎ 유언비어 유포

  •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 학생이 많이 죽었다
  • 부녀자의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고 계엄군이 말한다
  •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학살한단다
  • 경상도 군인이 와서 광주를 쑥밭으로 만든다
  •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싣고 시내를 배회하고 있다


◎ 병력 투입

  • 군 34 / 227명
  • 경 109 / 2,192명


◎ 피해 상황

  • 사망 2(민간인), 부상 6(중상 3, 경상 3)
  • 승용차 10대, 트럭 1대 방화
  • 총기 1정 탈취
  • 유리창 1,600건 파손


5월 20일

◎ 상황

  • 충장로, 국민은행, 무등경기장, ??역전, 전남의대 앞 일대
  • 중학생 200, 시민 500여 명 극렬 시위
  • 영업용 택시 250여 대 집단 시위
  • 폭도 150여 명 쇠파이프, 식도, 각목 등 휴대 계엄군과 극렬 대치
  • 시위 군중 50,000여 명이 시가지 전역에서 선회 시위
  • MBC 사옥 점거 방화
  • 광주 소방서 난입, 소방차 방화


◎ 유언비어 유포

  • 광주은행 앞, 시위 군중 신발 30족을 전시
  • 차 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하차토록 하고 불응 시 귀를 잘라버렸다


◎ 병력 투입

  • 군 265 / 1,212명
  • 경찰 163 / 2,395명


◎ 피해 상황

  • 사망 9명 (경찰 4, 군인 1, 학생 1, 민간인 3)
  • 부상 57명 (중상 8, 경상 49)
  • 차량 41대 (파손 36, 방화 5)


5월 21일

◎ 상황

  • 폭도 2,000여 명이 광주 세무서, 도청, 광주 교도소, 아세아자동차, 파출소, 각 기관 무기고 등 난입 점거, 습격, 방화 및 무기, 차량 등 탈취
  • 폭도 교도소 3회 습격
  • 시위 군중 4만 여 명, 시가지 전역에서 시위, 계엄군과 충돌
  • 도청 완전 점거, 광주 지역 행정기관 마비


◎ 유언비어 유포

  • 고교생 중심으로 특공대 조직
  • 화염병 투척, 군 장갑차를 피습하고 있다


◎ 병력 투입

  • 군 265 / 1,212명
  • 경 163 / 2,385명


◎ 피해 상황

  • 사망: 54명 (군인 2, 학생 8, 민간인 44)
  • 부상: 343명 (중상 62, 경상 281)
  • 무기고 피탈
  • 총기: 4종 3,938정
  • 실탄: 268,450발
  • 수류탄: 382발
  • 차량탈취: 468대


5월 22일

◎ 상황

  • 전남지역에 무장폭도 난동, 방위산업체, 민가 침입, 강도 약탈 행위 자행
  • 군부대, 경찰지서 습격, 차량 무기 탈취
  • 광주교도소 습격, 계엄군과 교전 (2회)
  • 국무총리서리(박충훈) 헬리콥타로 광주 상공에서 시민 자제 호소
  • 무장 폭도 300명 투항, 무기 회수


◎ 병력 투입

  • 군 265 / 1,212명
  • 경찰 163 / 2,395명


◎ 피해 상황

  • 사망 17명 (군인 3, 학생 1, 민간인 13)
  • 부상 157명 (중상 20, 경상 137)
  • 무기 및 장비 피탈
  • 총기 870정 (칼빈 750 M1 120)
  • 실탄 20,590발
  • 차량 6대


◎ 무기, 장비 회수

  • 총기 274정
  • 실탄 532발
  • 수류탄 12발
  • 차량 5대


5월 23일

◎ 상황

  • 무장 폭도, 민가 침입, 강도, 약탈 행위 자행 (현급 40만원, 다이어 1개, 녹음기 1대, 로렉스 시계 1개 등)
  • 무장 폭도, 군무대 기습 기도 및 아세아자동차 기습 장갑차 1대 탈취
  • 계엄분소 선무 활동 및 계엄사령관 경고문 발표
  • 무장 폭도 458명 군에 투항, 무기 회수
  • 광주시 당국 자체 수습책 강구 (동단위 자위대 편성)


◎ 유언비어 유포

  • 광주 봉기에 호응, 전국 각지에서 소요사태 발생
  • 외국 우방들이 광주 봉기를 지원


◎ 군 병력 투입

  • 군 265 / 1,212명
  • 경찰 163 / 2,395명


◎ 피해 상황

  • 사망 11명 (학생 3, 민간인 8)
  • 부상 73명 (중상 12, 경상 61)


◎ 무기 회수

  • 총기 2,545정
  • 실탄 57,225발
  • 수류탄 4발


5월 24일

◎ 상황

  • 시민 및 학생 수습 대책위 공동명의 사제 호소 등 내용 유인물 제작 살포
  • 계엄 당국, 무기 자진 반납 시한 12:00로 재연장 조치
  • 송암동에서 계엄군 간 상호 오인 교전
    • 사망 9명, 부상 43명, 민간이 중상 2명
  • 도청 민원실에 비치한 총기 3,000정, TNT 등 회수
  • 12:30~21:00 간 폭도 15,000여 명 집결 시위
  • 시민대표, 폭도들로부터 무기 회수
  • 무장 폭도, 계엄부대 이동 시 난사
  • 제1 군사령관 윤성민(중장) 자제 호소 선무 활동


◎ 피해 상황

  • 사망 19명 (군 14, 학생 2, 민간인 3)
  • 부상 31명 (중상 9, 경상 22)


5월 25일

◎ 상황

  • 종교인, 교수 등 9명 수습대책위 구성, 종교인 중심 무기 회수 결의, 사태를 수습코져 하였으나, 재야 강경 저항세력의 배후 조종 등으로 사태 다시 극렬화
  • 홍남순 변호사 등 저항 세력, 남동성당 회합, 시위 배후 선동
  • 목포 거주 기독교인 600명, 학살 군경 처단 요구 등 시위 선동
  • 14:00~22:30 간 도청 앞 시민 학생 5만여 명 민족수호 권기 대회, 목포역 시민 학생 5천여 명 가두 시위
  • 민가 침입 1가구 3명 사상, 병원 등 침입, 현금 300만원 탈취


  • 최규하 대통령 광주 방문, 현장 상황 파악 후 귀경, 특별 담화문 발표


◎ 유언비어 유포

  • 미 7함대가 시위 가담 학생 지원 차 부산항에 정박했다
  • 외곽 지대 강취 행위는 계엄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 대세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5일만 견디면 된다


◎ 피해 상황

  • 사망 1명 (군)
  • 부상 8명 (경상)


5월 26일

◎ 상황

  • 폭도, 민간인 사살, 금품 탈취 등 극렬 시위 (2회)
  • 선무 활동 강화 및 외곽지대 배치병력의 시가지 압축으로 무장 폭도 대부분 도피
  • 폭도 찝차로 시가지 순회, 시민 도창 앞으로 집결하라고 선동
  • 도청 앞으로 2회에 걸쳐 2만여 명 시위
  • 폭도, 민가 침입 2가구 7명 사살 및 황금동 청자여관, 영향약국, 해동식당 등 3개 소 침입 총기난사 후 금품 약탈
  • 정부는 최규하 대통령 “특별담화문” 100만 장 및 “호소문” 15만 장 살포, 광주사태 진정 협력 호소
  • 전남지사, 수습 위원 이종기 등과 대책회의 개최 후 사망자 가족 면담 및 기자 회견


◎ 피해 상황

  • 사망: 1명 (학생)
  • 부상: 6명 (경상)


5월 27일

◎ 상황

  • 계엄군 작전 5호 발령, 병력 시가지 대거 투입, 수색 작전으로 광주 전역 탈환, 완전 평정


◎ 평정 상황

  • 04:00 작전 개시 후, 도청에서 폭도 17명이 TNT 폭약 3,000 상자를 깔고 앉다 자폭 태세를 취한 채 마지막까지 극렬 저항하므로 사살
  • 04:45~05:28 간 폭도들이 점거하고 있던 도청, 광주공원, 공설운동장, 종합병원, 전남대의대, 관광호텔, 정일빌딩 등을 탈환 후, 도청 앞에서 무장 폭도 295명 체포
  • 08:00 광주 전역 탈환, 완전 평정


◎ 병력 투입

  • 11 공수부대, 31사단, 20사단 등 병력 382 / 6,067 투입


◎ 시민 반응

  • 6.25 수복 기분이다
  • 기관장, 유지로서 피신자는 용서할 수 없다
  • 이제 살 것 같다


◎ 피해 상황

  • 사망: 10명 (군 1, 학생 4, 민간인 5)
  • 부상: 9명 (중상 3, 경상 6)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