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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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870~1924
본명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
국적러시아 제국
러시아 공화국
소련
성별
출생1870년 4월 22일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
사망1924년 1월 21일 (53년 274일)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주 레닌스키 구 고르키
직업직업정치인,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노동운동가, 혁명가, 작가, 변호사
정당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1895년–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898년–1912년)
소련 공산당 (1912년–1924년)
학력카잔 황립대학교 중퇴
상트페테르부르크 황립대학교 법학 학사
종교무신론
신체165cm
배우자나제즈다 크룹스카야
자녀없음


개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1870년 4월 22일 ~ 1924년 1월 21일)은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마르크스사회주의 사상을 정리/발전 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다. 잘 알려진 니콜라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다.

맏형이었던 알렉산드르가 황제암살 음모로 인하여 사형을 당한 이후[1],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가지고 혁명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계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스위스에 망명하여 1916년 《제국주의론》를 저술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 단계에 적응시키려 했다. 2월 혁명이 시작되자 적대국인 독일을 지원을 받아 4월에 귀국하였는데, 그 당시 발표한 소위 ‘4월 테제’로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투쟁 방침으로 제시하여 혁명을 이끌었다.

7월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실패 이후 재차 망명했으나[2],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권력 획득을 이끌며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했다. 1918년 제2회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인민위원회 주석에 선출되고, 끊임없이 내부 권력투쟁을 하며 점차 권위를 확대했다. 적대국인 독일의 조건을 수용하는 휴전조약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네프(NEP)라 불리는 신경제정책을 시행하여 불안정한 러시아의 공산화를 결국은 안정시켰고, 러시아 공산혁명의 주역이 되었다.[3]

중앙집중제, 사실상의 일당 체제, 공포 정치를 앞세우며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 하였으며 마르크스엥겔스의 혁명이론을 이용하여 국영화, 국유화 및 사상적 단결을 통해 국론통일을 지향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호치민, 마오쩌둥, 요시프 브로즈 티토, 피델 카스트로, 김일성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레닌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인간이 되려고 평생 노력했으며, 혁명에 도움이 되는것이라면 도덕적판단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용하였다. 또한 인쇄된 활자와 논리적인 판단에 집착하였던 레닌은, 서적분석, 정리, 토론, 글 쓰기 등의 기본적인 지적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세계 혁명을 위한 중요한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모든 활동을 죽는 날 까지 지속할 수 있었다.

생애

출생부터 청년기 까지

출생 및 유년시절

1879년의 울리야노프 가족. 서 있는 아이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올가, 알렉산드르, 안나 순이고,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막내딸 마리야를 안고 앉아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드미트리가 앉아 있고, 오른쪽으로 옆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앉아 있다.
어릴시절의 레닌

레닌은 1870년 4월 22일(러시아력 4월 10일), 볼가 강 연안의 심비르스크(현 울랴놉스크)에서 6명의 자녀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레닌의 아버지는 볼가강 서안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추바시 인이었고, 할머니는 칼미크 인이였다. 이때문에 레닌의 외모는 백인보다 황인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어머니 마리아 알렉산드라는 기독교로 개종한 아슈케나짐으로 가계의 1/4은 돌궐족, 또 1/4은 몽골족, 1/2는 유대인으로 레닌은 주류 슬라브계와는 완전히 무관한 배경에서 태어났다.[4] 레닌에게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은 레닌 자신이 최소한 1897년 스위스 여행시절 알게 되었으나, 그러한 사실을 레닌 본인이 오픈하지 않고, 사후에는 소련 공산당에 의해 소련붕괴 이전까지 감추어져 있었다.

그의 집안은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이 있었으며,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농노의 아들로 교사이자 장학사를 지냈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루터교의 독일인이자 의사의 딸이었다.

아버지 일리야와 어머니 마리아는 당시의 '러시아 제국' 상황을 감안할때, 상당한 교양을 갖춘 '계몽적 러시아인' 이었으며 자연스레 자식들의 교육에 엄격했다. 6명의 일리야가의 자식들은 모두 학업성취도가 굉장히 우수했으며, 특히 레닌의 형이자 맏아들인 알렉산드르는 가족과 형제들의 모범이자 희망이었다. 가족구성원 모두가 쓸데없는 시간낭비와 게으른 생활을 경계했으며, 맡은바의 공부나 일에 엄청난 집착으로 끝까지 완수하는 레닌의 성향은 이러한 가족분위기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6년 1월에 레닌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후 일리야가의 가족들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주도로 생활하는데, 기존에는 굉장히 힘들고 불우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리야가의 재산은 풍족했으며, 일가 친척들 역시도 모두 귀족적인 생활을 하며 가장이 없는 일리야가를 지원 하였다. 넉넉한 형편과 더불어, 어머니인 마리아의 똑똑한 살림에 의해 일리야가의 아이들은 계속해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맏형 알렉산드르와 셋째인 레닌의 학업성취도는 특히나 우수했는데, 알렉산드르와 레닌은 거의 모든 학과목에서 최고의 점수를 당연스레 받는, 요즘말로 '신동'취급을 받을 정도의 두뇌를 자랑하였다.

학창 시절

일리야가족의 맏아들이자, 레닌의 형이었던 알렉산드르, Alexander Ilyich Ulyanov (1866 - 1887)

대학시절 급진적이고 과격한 농업/농장 중심 혁명단체인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던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제정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 계획 혐의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했다. 똑똑한 과학자 지망생 이었던 알렉산드르는 당대의 차르 체제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억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었다.

가장인 일리야의 죽음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일리야가 형제들과 당시 17세였던 레닌은 형의 죽음에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평정을 찾으려는 가족들과 레닌의 노력으로 모든가족이 정신적으로 무너지거나 자포자기 하는 행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평소에 형을 잘 따랐던 레닌은, 형의 죽음을 계기로 이때부터 반차르 운동, 혁명주의 세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일리야가의 모든 가족들은 알렉산드르의 처형 이후, 러시아 제국의 다른 중산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좋지않은 눈길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일리야가 가족구성원들의 심상에 현 러시아제국에서의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나, 이러한 감정은 레닌이 형이 가담했던 종류의 급진적 혁명단체에 기웃거리는 이유가 된다.

1887년 가을, 레닌은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형의 죽음 이후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던 급진 단체의 활동으로 인해 12월에 대학교에서 제적되어 쫓겨난다. 이러한 학교측의 판단에는 레닌의 형이 과거에 '알렉산드르 3세 암살계획에 가담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배경이 되었는데, 이것은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이후 레닌은 같은 뜻을 가진 혁명세력가들과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번역한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탐독하고 어울리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청년 시절

1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에 정식 수강생은 아니나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1891년 11월, 청강생으로 사법시험을 치를 수 있는 허가를 얻은 레닌은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 1891년 12월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는 가족이 살던 사마라에서 1893년까지 변호사로 일했다. 당시 토지 소유권 분쟁에 관한 일을 주로 맡았는데, 실제로 레닌은 소수의 사건만을 경험했으며, 변호사로서의 열정이 높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독서광이기도 했던 레닌은 이론연구를 위해 밤을 새는 일도 잦았고, 당시 마르크스 해석의 1인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우상처럼 떠받들었는데, 해외여행금지가 풀리고 나서 바로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망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1895년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레닌은 파리 시, 제네바, 취리히, 베를린 등을 방문하면서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깊이있게 토론하였다.

혁명 활동과 망명

마르크수주의 혁명 조직이었던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의 지도자들. 레닌은 중앙에 앉아 있고, 그의 옆에 안경과 긴 턱수염이 인상적인 사람이 바로 율리 마르토프 이다. 레닌은 마르토프와 매우 친밀했지만, 훗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서 대립하게 된다.

1차 망명

1895년의 레닌. 사진은 경찰 사진사가 찍은 것으로 보인다. 레닌을 비롯해 '노동계급해방투쟁' 조직원들은 1895년 12월에 차르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류 경험을 가진 레닌은 1895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국한다. 귀국하자마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온건파인 멘셰비키의 리더 율리우스 L. 마르토프 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다. 그는 파업중인 공장노동자들이 읽을 전단을 작성하거나 체포된 노동자들을 적극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 탓에 1895년 12월에 '반차르운동'에 연루되어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1895년 경).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레닌을 만나 함께 활동했으며, 1898년에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했다.

1895년 재판에서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은 레닌은 시베리아 가운데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슈센스케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5년간의 유배생활은 실제 우리가 생각하는 유배생활과는 다르게 매우 귀족적인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레닌은 유배생활중에 오히려 더 많은 독서와 이론적 정리, 사색을 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잔병치레가 많은 레닌은 등산과 사냥, 수영과 같은 레져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같은 동맹 회원이며 약혼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유배지까지 그를 따라왔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그는 '귀족유배생활'을 한층 더 편하게 할 수 있었으며, 1898년 유배지에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했다.[5] 그곳에서 주요 저작이 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발간 당시에 책은 1898년 8월, '블라디미르 일린'이란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1900년 1월, 서른 살이 된 레닌은 5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포돌스크로 갔다. 그는 러시아 내에서 반차르 운동을 하다가 1900년 5월에 서유럽으로 떠나면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망명지 생활중 활동

서유럽으로 망명한 그는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이스크라(Iskra, 불꽃)'를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한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이자 정치선동의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한 '이스크라'는 러시아의 인재들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01년 12월부터는 레나 강에서 이름을 딴 필명인 '레닌'을 사용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레닌은 오랫동안 그를 존경하고 숭배했지만, 1900년에 스위스에서 직접 만나 후에 그의 권위주의적 행동에 다소 실망하게 되었다.
레닌은 중심으로 하여 러시아 망명 혁명가들이 만든 신문 <이스크라> 창간호. 1900년 12월에 발행된 창간호는 라이프치히에서 인쇄되었다.

이 시기에 레닌은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1902년 발표했다. 이 글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해 레닌은 혁명가 그룹에서 문제적 인물로 부각됐다. 그로 인해 '이스크라' 편집진 사이에서도 노선 갈등이 시작됐다.

1902년부터 1903년 사이에 '이스크라' 본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뮌헨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로 수차례 옮겨 다녀야만 했다. 이 기간에 '이스크라'를 통해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 등과 레닌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결국 런던제네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율리우스 마르토프와 논쟁을 벌이는데, 이는 '편집진 선별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와 '당원 자격 및 규약'에 대한 대립 등이 원인이 되었다. 레닌은 '비밀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이 지도하는 당이 필요하다.'(종속적)고 주장했고, 마르토프는 '서유럽의 공산주의 정당처럼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이 필요하다.'(자율적/독립적)고 주장했다. 이러한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거치며 레닌을 자신과 자신의 노선을 '다수'를 뜻하는 '볼세비키'라 칭했고, 대립하고 있던 마르토프는 그에 대항하여 '소수'를 뜻하는 '멘셰비키'라 칭하며 이에 맞섰다.

한편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파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는 산업발전의 추세를 들어 러시아가 이미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그의 이론을 대체로 수긍하면서 여기에 독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1899년 유배지에서 집필한 저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에서 자본주의가 농민공동체를 급속히 와해시켜가고 있으며, 농민계급은 사실상 농촌 부르주아와 중산농민, 그리고 지방의 농노로 계층구조화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농민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농민층을 소수에 불과한 노동자 계층의 제휴세력으로 판단했다.

폭력혁명론

"우리가 스스로 가장 먼저 권력을 장악해야지, '권력'에 대해 떠들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주류는 주로 플레하노프가 초기에 설정했던 대로 부르주아 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의 2단계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다고 전망하였다. 여기에 서구 유학파 출신으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수정주의 및 의회진출론을 신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멘셰비키의 입장이었는데,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넘어가야 되며, 의회 진출을 통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온건론조차 비판하였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혁명의 방법은 무력으로 달성해야 되고 그 주도세력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오직 농민노동자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온건론자들은 그의 과격함을 지적하며. 부르주아 층까지 적으로 돌리면 혁명의 실패를 가져온다고 비판하였다.

뒤에 1917년 출간된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에서 레닌은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개량주의자(지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원했으며, 왜 폭력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역설하였다.

레닌은 자신만이 유일하고 정확하게 마르크스를 발전/정리 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혁명운동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새로운 학문을 적용시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새롭게 적용되는 학문들이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입각하는지를 철저히 따져보지 않고 적용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레닌도, 혁명이후 정치적노선과 판단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상충되는 모습일 자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지적능력을 이용해서 이러한 모순을 합리화 시켜 혁명지도부의 통일노선을 만들고는 했다.

귀국과 2차 망명

귀국과 혁명 활동
러시아의 정교회 사제이자 혁명가였던 게오르기 가폰.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외로 망명했다.

서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과 분쟁 동안 러시아에서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열기가 일기 시작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란 1905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교회 성직자가폰 신부가 주도한 노동자들의 평화적인 길거리 시위를 했는데 러시아 제국 당국이 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잔혹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은 전국에 걸쳐 커다란 항의사태를 불러 일으켰는데, 모스크바, 리가, 바르샤바, 티플리스 등 주요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하기 시작했다.

이때 레닌은 1차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귀국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러시아 제국에서 레닌은 '즉각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어 감과 동시에 온건파 멘셰비키파와 격렬한 분쟁과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그러나 1907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누그러들 즈음 러시아에서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 시작된다. 이에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파 세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숨어야 했고, 레닌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오른다.

2차 망명

이로써 레닌의 두 번째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레닌은 망명기간 내내 멘셰비키와의 대립과 볼셰비키 내부 진영의 싸움에 시달리고,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의심에 빠지곤 했다. 레닌은 이러한 정치노선 싸움의 고점을 차지하기위해 '유물론과 경험론'(1908)을 발표하였다.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 대회를 소집하면서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볼셰비키당을 독립된 당으로 만들었다.

이 무렵 레닌은 1912년 폴란드 지방의 크라코프로 이주했고, 거기서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작업을 지도했다.

1914년 이전부터 일체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레닌은 제1차세계대전 전시 동안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유럽의 공산주의 정당들이 전쟁전의 결의사항을 무시한 채 제각기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한 자국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서 레닌은 국제인터내셔널 대신 혁명적인 공산주의 정당들이 모여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스위스에서 전쟁과 평화, 그리고 혁명의 문제에 대한 당의 이론과 전술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각국의 공산주의 정당들이 봉기를 일으켜 제국주의 전쟁을 각국의 내전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했다. 1915년 치머발트, 1916년, 키엔탈에서 열린 국제 공산주의자 총회에서 레닌은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을 치머발트 좌익으로 한데 모았다. 이 시기의 제국주의 연구는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년)로 결실을 보였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원했으며, 왜 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2월혁명과 10월혁명, 볼셰비키 정권 수립

1917년 3월, 이른바 '봉인열차'를 타고 독일을 가로질러 스웨던의 스톡홀름에 도착한 레닌과 동료들.

2월혁명이후 귀국과 핀란드 망명

1917년 2월, 굶주림과 추위와 전쟁에 지친 러시아 민중은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곧이어 노동자와 군인들이 시위대 편으로 합류하여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몰아냈는데, 이를 2월 혁명이라 부른다.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면서 케렌스키를 내각수반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임시 정부가 재편되었다. 반면, 당시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생활 중이던 레닌은 이때만 해도 혁명이 일어났으리라는 사실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닌을 비롯한 32명의 러시아 혁명 망명자들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봉인 열차'를 타고 1917년 4월 3일 늦은 밤에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 위원회와 멘셰비키, 사회 혁명당(SR) 등이 중심이 되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볼셰비키 당사에 들어갔다. 그는 멘셰비키사회혁명당(SR),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는 이때만 해도 여전히 소수파에 불과했다. 이에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한다. 그가 말하는 '4월 테제'의 주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혁명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두 번째 단계로 도약할 때가 왔습니다. 2월혁명으로 수립된 공화국은 우리의 공화국이 아닙니다. 이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국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이외에 그 어떤 정부도 필요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프롤레타리아(무산층)독재'뿐입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인 것들은 일체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막중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필코 국제 혁명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4월 테제' 주장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심지어 볼셰비키 내부에서조차 '정신나간 아나키스트적인 헛소리'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닌이 갑자기 나타나 '곧바로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멘셰비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과 대립한 것이다.

수염을 깎고 가발을 써서 변장한 레닌.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체포를 피해 핀란드로 탈출하던 중에 위조 신분증용으로 찍은 사진이다.

이어서 레닌의 ‘4월 테제’는 ‘임시 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무산층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슬로건 기치를 내걸게 된다. 그는 '전쟁 중단과 평화, 토지 분배를 원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은 반(反)혁명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케렌스키 임시 정부가 아닌 오직 소비에트 정부 즉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프롤레타리아(무산층 계층)들의 직접 독재 지배뿐'이라고 주장하며 케렌스키 정부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무산층)혁명 운동을 선동했다. 처음에는 비현실적으로 들리던 그의 '4월 테제'는 5월이 되면서 차츰 볼셰비키 당원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내부의 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많은 공장주들이 공장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파업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1917년 7월 3일에 있었던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케렌스키 임시 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레닌은 '독일 제국의 스파이'로 수배범으로 몰린다. 이에 레닌은 변장을 하고 'Vilén'이라는 가명으로 잠시 핀란드로 도피 망명한다. 그리고 망명 은신처인 핀란드에서 '국가와 혁명'을 집필하면서 망명 생활 동안 마르크스 이론을 러시아의 현실에 맞추어 이론화하고자 했는데, 그는 '자본주의의 발달이 더딘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인 전위당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레닌은 핀란드에서 망명 생활하는 동시에 치밀하게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 수립

레닌의 동상이 세워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몰니 학교. 볼셰비키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1917년 10월 권력 장악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파격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는 등 급진적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당시 민중들은 전쟁에 진저리가 쳐졌기에 우선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열망이 무척 컸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이러한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6월에 대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자멸적인 패배와 실패로 곧 한계를 드러낸다. 동시에 국내의 경제사정이 파탄으로 치달으면서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 갔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갔다.

9월로 들어서자 평화와 토지와 빵을 요구하는 볼셰비키가 호응을 얻기 시작했는데, 수도 페트로그라드는 물론이고 전국 주요도시별로 각 시내에서는 소비에트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볼셰비키 세력이 다수파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해 10월, 핀란드에서 망명생활중이던 레닌은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 잠입하여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할 시기'라고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에게 주장하고, 나아가 '당장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비에트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무모한 전략에 완강히 저항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을 설득하고,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붉은군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1917년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10시 볼셰비키 1,000여명의 붉은군대의 급습으로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한다. 여기에서 당시 민심은 볼셰비키를 향한 지지도는 어느 정도 있었어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좌파, 우파 등 그 누구도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았고, 정부는 공허 속에 있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볼셰비키의 붉은군대가 주도한 혁명은 충돌없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레닌은 '모든 권세가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함으로써 10월 혁명이 이루어진다.

1917년 11월 8일(러시아력 10월 26일),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인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 평의회의 갈채 속에 탄생하면서 10월 혁명 직후 열린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를 열었다. 거기서 레닌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동지들! 볼셰비키가 줄곧 그 필요성을 역설해 왔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완수되었습니다. 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특히 이 격변의 의의는, 우리가 부르주아의 참여 없이 소비에트 정부를 우리 자신의 권력 기관으로 갖게 되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피억압 대중이 스스로 그들의 권력을 창출할 것입니다. 옛 국가 기구는 철저히 파괴될 것이며, 새로운 행정기구가 소비에트 조직의 형태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각종 포고령을 읽어 나갔다. 레닌의 포고령에 대한 투표는 군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레닌은 새로운 정부인 인민위원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918년,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소비에트 연방 정부수반

1차 세계대전 종전

1918년 3월 3일, 러시아와 독일의 대표단이 단독 강화 협정인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레닌은 독일의 침공을 막고 10월 혁명을 지키려면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비에트가 탄생하자, 연합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살리기 위해 1918년 3월, 레닌은 주위에 반대여론을 물리치고 독일제국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을 끝낸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의 주요 내용은 우크라이나, 발트3국, 핀란드 등을 독일제국에게 양도하고 독일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가 벗어나고 연합국에서 탈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 내용의 지역들은 당시 러시아 주요 산업지역들이어서 이 지역들을 넘기는 것은 곧 러시아(소비에트)에게 있어 치명적이었다.

레닌은 밖으로 우환을 없애고자 내부적으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완전한 민주 선거를 통하여 자신이 집권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민중은 레닌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여 레닌의 볼셰비키는 선거에 참패하였다. 이에 레닌은 두마(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숙청 작업

1918 7월18일 새벽, 볼셰비키당은 가택연금 중인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을 당시 그들이 사용하던 이파티예프의 저택의 지하실로 끌고간 뒤 벽에 일렬로 세워 총살했다. 이 사건은 혁명에서 가장 끔찍한 대학살이었다. 니콜라이의 부인과 함께 네 딸, 그리고 혈우병을 앓던 아들, 심지어는 일부 하인들까지도 그날의 새벽에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처사에는, 자신의 친형의 처형에 대한 깊은 복수심과 증오를 가지고 있던 레닌의 감정이 작용한 것이었다. 일부 황족들은 레닌의 탄압을 피해 인접국으로 피신했다. 인접국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였고, 망명객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무역 중단과 제재까지도 그들에게 요청하였다. 기독교 교회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여 선교, 포교가 중지되고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으며 성직자들은 강제로 환속당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까지 완전히 박멸할 수 없었다.

은행의 금리를 동결하고 부유층과 부르주아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도로와 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선포하였다.

러시아 내전

1918년 10월, 레닌이 모스크바 크렘린 집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에서는 1918년에 구체제 출신 장군들과 귀족들 세력으로 구성된 백군트로츠키가 지휘하는 볼셰비키 적군간의 내전이 벌어져 소비에트 연방 정권은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부유층과 왕족 외에 일부 지식인들까지 이들의 움직임에 동조했다. 특히 체코 군단(의용군)의 공세와 시베리아 지역의 콜차크제독이 이끄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고 서구 열강세력들은 구체제 중심으로 이루어진 백군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 내 볼셰비키 정권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때에 레닌의 폭력적이고 잔혹한 성격이 들어나는 편지가 하나 있다. 1918년 8월 11일 볼셰비키 요원에게 보낸 편지.

"동지들!! 쿨라크 지구 다섯 곳에서 일어난 반란은 가차 없이 진압되어야 합니다. 혁명 전체의 이해가 이것을 요구합니다. 쿨라크들과 '최후의 결전'이 지금 모든 곳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례를 하나 들어야 하겠습니다.
1. 쿨라크, 부자, 흡혈귀라고 알려진 적어도 100명의 사람들의 목을 매달 것.(그리고 사람들이 충분히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매달도록 할 것.)
2. 그들의 이름을 공개할 것.
3. 그들로부터 모든 곡물을 압수할 것.
4. 어제 보낸 전보에 따라 인질들을 선정할 것.
피를 빨아먹는 쿨라크들을 볼셰비키가 목 졸라 죽이고 있고, 앞으로도 목 졸라 죽이리라는 것을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놀라 부들부들 떨고 소리치도록, 그렇게 하시오. 이러한 명령의 수령과 실행 여부를 전신으로 알릴 것. 레닌. 
추신 : 진짜 의지가 굳은 사람들을 찾으시오!

그러나 당시의 일반 농민과 노동자들의 인식에는 "백군은 뚜렷한 제도나 정책 등 없이 단순히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있는것 처럼 보였고, 이 때문에 그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적군에 가담하였다. 이 틈을 타서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를 실행하여 토지개혁과 공장, 은행, 철도의 국유화 등 공산주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내전기에 볼셰비키 세력들은 레닌의 지도하에 백군에 맞서 싸워 가까스로 소비에트 연방을 지켜냈다.

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레닌은 트로츠키처럼 단번에 청중을 사로잡는 타고난 연설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부정확한 발음과 어색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보여주는 열정과 강한 의지에 설득당했다. 사진은 1919년 5월에 모스크바에서 행한 연설 장면이다.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신생 독립국가인 폴란드소비에트간에 벌어진 전쟁인데, 레닌이 밀어 부쳐서 시작된 전쟁이다. 레닌은 기본적으로 러시아를 본보기 삼아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자생적인 공산혁명정부가 등장할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이후 발생한 폴란드와의 국경시비를 보며 레닌은, "만약 소비에트의 붉은군대가 폴란드 바르샤바로 입성하다면, 대부분의 폴란드 시민들 및 여러 사회주의계열의 조직들이 붉은군대를 도와줄 것이며, 이는 서유럽의 혁명확장의 시발점이 될 것" 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많은 동료 볼셰비키는 물론, 심지어 '붉은군대'를 이끌던 트로츠키 조차도 반대하였던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붉은군대는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결국 이 전쟁으로 리가에서 평화조약을 맺었고, 리가 조약을 통해 소련은 영토가 줄어들고 폴란드는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얻었다.

신경제정책 추진

폴란드 전쟁의 완벽한 패배 및 강제적인 곡물 징발이 포함된 전시 경제체제로 인하여 소비에트 정권 내부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레닌은 자신이 야기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위하여 국가지도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나온것이 이른바 네프(NEP)라 불리우는 신경제정책 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민들이 할당된 국가 세입 기여분을 내고 나면, 잉여 수확물을 지역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허용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레닌의 통찰력이라기보다는, 이미 1918년 이후 부터 트로츠키나 멘셰비키, 사회주의자-혁명가당 등에 의해 주장된 것이었다. 결국 자유거래를 허용한다는것인데, 이것만이 기근과 질병, 산업 황폐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동시에 신경제정책에는 외국의 투자를 허용하는 등의 자유시장, 자본주의적의 요소들을 허용하는것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이 차차 자리잡아 감에따라, 결국은 붕괴 직전의 혁명국가의 수명은 늘어날 수 있었다.

체카

체카(비상위원회)는 공안기관으로 1917년 12월 20일, 레닌의 명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체카의 설립목적은 볼셰비키 정권의 체제수호와 공안을 책임지는 비밀경찰이자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무력경찰 이었다. 1921년 체카의 산하부대인 "공화국 국내 수비대"는 20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체카는 '국가정치부'(GPU)로 이름을 바꾸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산하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체카창설은 레닌의 혁명론의 뿌리가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공포정치'에 있다는것을 결정적으로 알려주는 일이다. 처음에는 '10월 혁명'을 효과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창설되었지만 '반혁명과 사보타주에 맞선 투쟁' 이라는 체카의 권한을 일부러 모호하게 설정하여, 모든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코민테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때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자국의 전쟁을 지지함에 따라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다. 그러자 레닌은 '전쟁을 혁명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 창설을 목표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레닌은 30여 국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인 자리에서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허나 실제로 1919년 3월, 크렘린에서 개최된 제3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의 1차 당대회는 사실상 '국제적인 회의'라고 할 수 없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당은 다소 뻔뻔하고 교묘한 수법을 써서 이 대회를 마치 범 세계적인 행사로 포장하였는데, 투표권이 있는 34명의 대표 중에서 4명을 제외한 모든 대표가 실제로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었고, 참석여부와는 상관없이 프랑스 혁명가들을 대표한 집단의 명단은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12명에 불과했다.

레닌은 이때 '영국 미들랜드 지방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서 발신했다'라는 편지를 낭독함으로써 더욱 뻔뻔한 행동을 하였는데, 조작된 편지든 아니든 소비에트 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현실성 없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대회의 실제 규모와 권위, 체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매우 열광적인 현장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 대표 '후고 에버라인(Hugo Eberlein)'과 같은 사람은 대회의 여러 '조작' 행태에 항의를 했지만, 이내 그럭저럭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코민테른 대회 참가자들은 여러 '조작'정보들에 많은 갈채를 보냈고,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의 서쪽으로 점차 확산되기를 모두 기대했다.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는 새 조직의 창설과 동의를 구하고, 동시에 조직의 모든 통제권을 확보하는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1회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창립 선언과 조직의 명분을 공고히 하는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1년 후의 제2회 코민테른 대회(1920년 7월)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농촌·노동자 조직, 의회에서의 활동, 식민지 독립, 민주적 집권주의 확립, 각당의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할 것 따위의 구체적 가입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으며, 향후 20년간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코민테른은 뒷날, 1943년스탈린에 의해 해산된다.

두번의 암살시도와 말년

암살시도

레닌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2번이 있었다. 첫번재는 1918년 1월1일 미하일롭스키 승마 연습장에서 일어났다. 그는 승마 연습장에 격려 연설을 한 후, 저녁 7시경 일행과 함께 숙소로 돌아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레닌과 일행이 탄 리무진이 승마 연습장을 떠나 시메온 다리에 도착하자마자, 남자 2명이 나타나 리무진을 향해 총을 쐈다. 다소 어설픈 시도이기도 했고, 레닌의 일행이던 '플라텐'의 용감한 행동으로 레닌에게는 특별한 부상 없이 무사히 탈출 할 수 있었다.[6] 암살미수범들은 결국 체포되었는데, 제국의 부활을 원했던 군주주의자들임이 드러났다. 여기서도 볼셰비키 지도부는 암살미수범들이 볼셰비키에 속하지 않은 '사회주의 정당' 세력이었다고 선동하며, 국가의 통제권의 강화에 이용하는 모습 보였다.

두번째 암살시도는 같은 해 8월 30일에 일어났다. 두번의 짧은 옥외 연설 스케쥴을 수행하던 레닌은, 첫 번째 연설장소인 '옥수수 거래소'에서 청중의 환호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연설을 마무리 한다. 레닌이 미헬손 공장 마당 옆에 주차된 차로 돌아올 때, 여자 두명이 그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곡물 거래를 하려는 농민들이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것을 막은 식량 암거래 단속반인 공식 '저지부대'(zagraditelnyi otryad 또는 zagradotryad)에 대해 불평했다. 레닌은 그들의 주장에 어느정도 동의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차를 향해 걸어가던 레닌에게 몇 발의 총격이 가해졌고,결국 2번의 피격을 당하게 된다.

총탄 한 발은 왼쪽 어깨뼈를 뚫고 오른쪽 쇄골 가까이까지 갔다. 다른 한 발은 목 아래편 왼쪽에 박혔다.[7] 이후 레닌의 수행원인 '길'은 병원이 아닌, 크렘린으로 갔고, 이것은 추가적인 암살시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레닌은 한 달이상 치료를 받고 장기요양을 위해서 '고르키'로 가게 된다.[8]


말년

1922년 9월, 고르키를 찾아온 스탈린과 레닌. 사진은 레닌의 여동생 마리야가 찍었다.

저격당하여 크게 중상을 입은 레닌은 기존에 있던 병 치레에 더하여 부상 후유증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때즈음 부터 아내 나데즈다와 레닌의 여동생들은 자신들의 남편과 오빠의 간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나데즈다는 지도부의 일을 접고 레닌의 곁에 있게 되는데, 병든 몸으로 인하여 열정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는 레닌의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크렘린의 최신 소식을 요약하여 전달해주었다.[9]

왼쪽부터 스탈린, 리코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레닌은 죽음이 가까워지자 스탈린의 야심을 우려해 그를 서기장에서 축출하고자 했으나, 당 지도자들인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트로츠키의 집권을 막기 위해 스탈린과 손을 잡았다.

몸이 조금 괜찮아지자 정치적 통제권과 정책에 대한 불안감으로 곧장 크렘린으로 향하기도 했던 레닌은, 결국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수시로 경련을 동반하며 의식을 잃었으며, 점점 크렘린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겹쳐 병상에 지냈는데, 이때즈음 스탈린을 서기장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0] 그는 서둘러서 '오랜시간 대립'하던 '트로츠키'를 내세워 스탈린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사후

스탈린은 레닌의 사후 '레닌 신격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서 레닌은 '반신반인'의 '정의로운 천재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스탈린 자신이 레닌의 인정을 받은 '직계 후계자'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그 자신의 공산전체주의 통치에 많은 부분을 기여했다. 또한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레닌주의와 어긋난다는 주장을 펼쳐서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이후 당에서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나중에는 결국 멕시코에서 그를 암살하였다. 레닌의 시체는 보존처리가 되었고, 현재도 붉은광장에서 극히 제한된 시간 동안 전시된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매년 4월 22일, 레닌의 생일날에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레닌을 기리는 대규모 집회를 하곤 한다. 그의 저서는 《제국주의론》,《국가와 혁명》등이 있다.

1924년 1월에 나무로 만들어진 레닌의 영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과 당 지도부는 '레닌 숭배'를 위한 영묘 건설을 강행했다. 레닌을 신격화 하여 결국은 자신들의 통치기반으로서 삼으려는 것이었다.

저서


가족

평가

기타

1921년1922년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1921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자 한형권, 김립 등을 면담하였는데, 레닌은 그들에게 조선인들은 공산주의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민족주의 운동부터 한 다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레닌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금지원을 약속했고 필요한 자금의 액수를 묻자,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40만 달러라고 말했다. 적은 액수라며 호쾌하게 웃던 그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200만 루블(당시 기준으로 약 80만 달러, 지금 기준으로 약 1000만 달러)을 지불했다. 이 돈은 상하이 공산당의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김립에 의해 30만 루블씩 분할 운송되었는데, 자금의 분배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게는 지불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간의 자금 갈등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입수되었고, 임시정부의 김구는 이들이 레닌에게 지원받은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면직·노종균을 보내 김립을 사살하였다.


연보

  • 1861년 알렉산드르 2세, '농노해방령' 선포.
  • 1870년 4월 10일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러시아 동남부 심비르스크시에서 초등학교 장학관 일리야 울리야노프의 셋째 아이로 태어남.
  • 1874년 7월 일리야 울리야노프, 장학관에서 감독관으로 승진하면서 세습귀족이 됨.
  • 1878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그루지야의 고리에서 출생.
  • 1879년 가을 심비르스크 고전 김나지야에 입학.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한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림.
  • 1879년 10월 레프 트로츠키 우크라이나의 야노프카에서 출생.
  •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 '인민의 의지'에 의해 암살당함. 알렉산드르 3세 즉위.
  • 1883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베라 자술리치, 파벨 악셀로트, 레프 데이치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 결성.
  • 1886년 1월 아버지 일리야 울리야노프 사망(55세).
  • 1887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다니던 형 알렉산드르, 황제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오흐라나에게 체포 후 교수형.
  • 1887년 8월 카잔 제국 대학 법학과에 입학. 이 시기에 레닌은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큰 영향을 받음.
  • 1887년 12월 카잔 제국 대학 학생들이 대학 당국의 엄격한 규제를 비판하며 항의 시위. 레닌은 퇴학 처분을 받고 카잔을 떠나 코쿠시키노로 이주.
  • 1888년 9월 다시 거주 허가를 받아 카잔으로 돌아온 레닌은 니콜라이 페도세예프의 비밀 혁명 조직에 가담. 이 시기에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 다윈 등의 저술을 읽으며 자신만의 혁명적 세계관을 쌓아 갔으며, 스테판 할루린 같은 농업사회주의 테러리스트들에게 매료되었다.
  • 1889년 5월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아들과 함께 사마라주 외곽의 가족 영지로 이사. 레닌에게 영지 운영을 맡겼으나 레닌은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었다. 레닌이 몰두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는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정도로 마르크스에게 빠져 있었다.
  • 1889년 9월 사마라 중심가로 이사. 레닌은 반체제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농업사회주의자 알렉세이 스클랴렌코가 이끌던 토론 모임에 참여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철학의 빈곤>, 엥겔스의 <반뒤링론>과 <영국 노동 계급의 상황>, 플레하노프의 <우리의 의견 차> 등을 공부하며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 1891년 5월 동생 올가 일리니치나,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
  • 1891년 9월 학외 학생으로 법률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시험을 보게 됨. 전 과목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1급 학위를 받고 법률가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음.
  • 1892년 1월 사마라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보로 일을 시작함.
  • 1893년 8월 혁명 운동의 중심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간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 비밀 모임에서 활동하며, 표트르 스트루베와 미하일 투간-바라놉스키 같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 토론을 벌임.
  • 1894년 알렉산드르 3세 사망.
  • 1895년 4월 외국 여행이 허용되어 스위스, 프랑스, 독일을 여행. 이 여행에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비롯해 파벨 악셀로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같은 사회주의자들을 만남.
  • 1895년 9월 빌뉴스에서 온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율리 마르토프와 의기투합하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 조직의 활동이 토론과 논쟁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노동자들에게 확산하는 활동으로 옮겨 갔다.
  • 1895년 12월 '노동계급해방투장동맹' 회원들이 체포됨. 레닌은 구치소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 강령 초안을 작성함.
  • 1897년 1월 레닌과 동료들이 3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음. 레닌은 예니세이주의 슈셴스코예로 유형을 떠남.
  •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립대회가 열림. 그러나 표트르 스트루베를 포함한 대회 참가자의 대부분이 몇 주 안에 체포됨.
  • 1898년 7월 동료 마르크수주의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망명지에서 결혼.
  • 1898년 8월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원고 오나성. 이 원고는 1899년에 브라디미르 일린이라는 가명으로 출간된다. 레닌은 이미 자본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는 낡은 것이며, 로마노프 군주정을 제거해야만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두 번째 혁명을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1900년 1월 망명지에서 풀려남. 유형 기간을 채우지 못한 아내와 헤어짐.
  • 1900년 5월 여행 허가를 받아 취리히로 떠나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합류.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를 개최하고 당내에서 플레하노프 노선이 승리하려면 당 기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함. 그러나 편집진 구성과 신문의 지배 권한 등을 두고 플레하노프와 의견이 충돌함.
  • 1900년 12월 독일 뮌헨에서 당 기고나지 성격의 신문 <이스크라> 창간.
  • 1902년 3월 '레닌'이라는 가명으로 마르크스주의 조직 문제를 다룬 논쟁작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발간.
  • 1902년 4월 <이스크라> 근거지를 런던으로 옮김.
  • 1902년 10월 레프 트로츠키, 런던으로 레닌을 방문. 레닌을 문학적 재능이 있는 트로츠키를 <이스크라>의 일곱 번째 편집인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으나 플레하노프가 반대했다.
  • 1903년 7~8월 브뤼셀과 런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가 열림. 1차 대회는 아홉 명만 모인 회의였고 2차 대회가 실질적인 창립 대회였다. 당원자격 문제와 <이스크라>편집진 구성을 놓고 레닌과 마르토프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당이 분열되었다. 레닌과 그 지지자들이 스스로 '볼셰비키(다수파)'라 칭하자 마르토프 일파는 스스로 '멘셰비키(소수파)'라 칭했다.
  • 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발.
  • 1904년 5월 당내 갈등이 심해지자 레닌은 <이스크라> 편집진과 당 회의에서 사직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당내 분쟁의 역사를 정리한 책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발간함.
  •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
  • 1905년 늦여름~초가을 러시아 전역에서 총파업 발생. 지역 정부의 권력을 차지한, 선출된 하층 사회 계급 기구인 소비에트가 노동자들에게 의해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짐.
  • 1905년 9월 러일 전쟁 종전. 포츠머스 조약 조인. 패전국이 된 러시아는 조선과 남만주에 대한 일본의 패권을 인정하고 사할린섬의 절반을 포기했다.
  • 1905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창설되고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의장이 됨. 니콜라이 2세가 국가 두마(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는 조서('10월 선언')를 발표함.
  • 1905년 12월 트로츠키를 비롯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무너짐. 봉기를 시도했던 모스크바 소비에트 역시 진압당함.
  • 1906년 4월 제1차 두마 선거 실시. 입헌민주당(카데트)이 다수당이 됨.
  • 1907년 5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5차 당 대회가 런던에서 열림.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논쟁은 격렬했다. 레닌에게 대회는 성공적이었으나 자신은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지 않음.
  • 1912년 1월 볼셰비키가 프라하에서 자신들만의 당 협의회를 열어 단독으로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이 회의에서 레닌은 볼셰비키 분파가 곧 당이라고 선언했다.
  • 1912년 4월 볼셰비키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당 기관지 <프라우다> 발행. 스탈린이 편집인으로 참여함.
  •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1915년 3월 스위스 베른에서 망명 중인 볼셰비키들이 회의를 개최하고 반전 운동을 논의.
  • 1915년 9월 치머발트 회의.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이 참여하여 제국주의 전쟁 종결을 결의하는 치머발트 선언 발표. 레닌은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킬 것을 주장함.
  • 1917년 2~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2월 혁명' 발발. 해산된 두마의 지도자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후,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자유주의자인 게오르기 리보프가 총리가 되었고, 입헌민주당이 내각을 지배했다. 사회주의자 가운데 장관이 된 살마은 '케렌스키'뿐이었다.
  • 1917년 4월 러시아로 귀국한 레닌은 임시정부가 물러나고 혁명적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4월 테제> 발표.
  • 1917년 6월 제1차 전러시아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회 개최.
  • 1917년 7월 '7월 봉기' 발발. 임시정부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 병사들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무장 시위를 일으킴. 임시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레닌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고, 트로츠키와 콜론타이를 비롯한 볼셰비키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레닌은 핀란드로 탈출했다.
  • 1917년 8월 말 코르닐로프 사건. 쿠데타를 우려한 케렌스키 총리의 요청을 받은 볼셰비키가 코르닐로프 반란군 병사들을 설득해 쿠데타 시도를 무산시킴.
  • 1917년 9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다수파가 됨.
  • 1917년 10월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투표를 거쳐 레닌이 주장한 무장 봉기를 채택.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트로츠키가 봉기를 이끌었다. 임시정부를 타도한 뒤 '스몰니 학교'에서 열린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가 다수의석을 차지했고, 새로운 정부 내각인 '인민위원회의(소브나로콤)'가 수립되었다. 레닌은 인민위원회의 의장,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 1917년 11월 제헌의회 선거 실시.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이 최다 의석을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전체 표의 4분의 1밖에 얻지 못했다. 같은 달, 독일과 브레스트리톱스크에서 단독 강화 협상 시작.
  • 1917년 12월 비밀 정치 경찰 조직인 '전러시아 비상위원회(체카Cheka)' 설립
  • 1918년 1월 제헌회의가 개최되었으나 볼셰비키와 사회주의자-혁명가당 좌파의 연합세력에 의해 해산됨.
  • 1918년 2월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전쟁 지속과 강화 조약 체결을 두고 표결을 벌인 결과, 독일이 내건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레닌이 승리함.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을 사임.
  •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체결. 인민위원회의가 폴란드와 발트 주들, 우크라이나를 독일 군대에 넘겨주자 독일의 러시아 침공이 끝남. 같은 달, 트로츠키, 군사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붉은 군대' 창설
  • 1918년 5월 러시아 내전 발발.
  • 1918년 8월 백군이 카잔을 점령하고 남부 러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함. 같은 달 30일, 모스크바에서 암살 기도 사건이 일어나 레닌이 심각한 총상을 입음.
  • 1918년 11월 전 해군 제독 콜차크가 시베리아 반혁명 정부의 수반이 됨. 제1차 세계대전 종전
  • 1918년 12월 콜차크가 페름 점령.
  • 1919년 1월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이 베를린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던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당함.
  • 1919년 3월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창립 대회.
  • 1919년 4월 콜차크가 대공세를 펴 모스크바를 위협.
  • 1919년 6월 붉은 군대가 콜차크 저지.
  • 1919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 체결. 러시아는 이 조약에서 제외되었다.
  • 1919년 10월 데니킨의 백군이 모스크바 위협.
  • 1919년 11월 유데니치의 백군이 페트로그라드 위협.
  • 1919년 12월 데니킨과 유데니치의 백군이 패배하면서 실질적으로 내전 종식.
  • 1920년 3월 제9차 당 대회. '민주집중파'와 '노동자반대파' 등장. 트로츠키가 곡물 징발조치의 부분적 철폐를 요구했으나 레닌은 공식 경제 정책에서 국가 독점을 선호했고, 식량을 비축한 '쿨라크'들이 문제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단언했다.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이 11대 4로 승리.
  • 1920년 4월 폴란드군의 러시아 침공으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발발.
  • 1920년 6월 폴란드군을 격퇴한 여세를 몰아 붉은 군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음.
  •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차 대회 개최.
  • 1920년 8월 '붉은군대'가 폴란드에서 패퇴.
  • 1920년 11월 노동조합 논쟁. 트로츠키는 파업을 금지하고 모든 노동조합을 국가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레닌은 노동조합이 여전히 유용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반박함. 찬반투표 결과, 레닌이 또다시 승리.
  • 1921년 1921~1922년 광범위한 기근 발생.
  • 1921년 2월 붉은군대가 그루지야를 침공해 소비에트 통치 확립,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창설.
  •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같은 달, 제10차 당 대회에서 전시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당내 분파 투쟁이 금지됨.
  • 1921년 6월 코민테른 제3차 대회 개최.
  • 1922년 4월 스탈린이 당 서기장이 됨.
  • 1922년 5월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모스크바 외곽 '고르키' 마을로 요양을 떠남. 스탈린이 요양중인 레닌을 자주 찾아와 크렘린의 정치 소식을 알려주었다.
  • 1922년 12월 정치적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회에 보내는 편지>를 구술로 작성.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경계하는 내용이 담겼다.
  • 1923~1925년 스탈린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이른바 '트로이카 체제'로 당과 국가를 운영.
  • 1923년 1월 레닌,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문건 작성.
  • 1923년 3월 심각한 발작을 일으켜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남.
  • 1923년 4월 트로츠키가 제12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 해임에 관한 레닌의 제안을 이용하지 못하고 스탈린을 끌어내릴 기회를 놓침.
  • 1924년 1월 제13차 당 협의회에서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 비판. 1923~1924년 겨울에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를 공개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 1월 21일 레닌 사망.

같이 보기


참고 자료

각주

  1. 똑똑한 과학자 지망생 이었던 알렉산드르는 당대의 차르 체제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억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었다.
  2. '핀란드 농부 변장' 사진을 찍은것도 이때즈음 이다.
  3. 사실은 많은 운도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독일의 지원, 노동자 반란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레닌의 혁명을 도와주었다.
  4. 어머니 마리아의 아버지, 즉 레닌의 외할아버지는 유대인이다.
  5. 레닌은 여복이 많은 남자였다. 아내인 나데즈다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마리야와 여자형제들은 평생동안 레닌을 정성스럽게 보필하였다.
  6. 플라텐이 많이 다쳤는데 특히 손의 부상이 심했다.
  7. 이후 의사였던 '블라디미르 로자노프'와 '블라미디르 민츠'는 레닌의 몸에 박힌 총알을 빼지 않고 그냥 놔두는것이 좋다는 결정을 했다.
  8. '고르키'는 레닌을 비롯한 많은 볼셰비키 지도부들이 자주 찾는 요양지였다.
  9. 고르키 요양 초기에는 스탈린이 크렘린의 상황전달과 논의를 위하여 레닌을 만나러 고르키로 오곤 했다.
  10. 이러한 생각의 이유는 1. 대외 무역에 대한 통제, 2. 소비에트 국가의 공화국 간 헌정 구조에 관련된 대립 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