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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6일 (수) 07:56 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EAJUA,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은 1932년 3월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되자 만주 각지에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가 만들어지면서, 이들이 연합하여 만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항일 무장 조직으로, 김일성등 다수의 조선인들도 참여하였다. 실제로는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중앙이 아닌 소련 코민테른의 감독과 지시를 받았으며,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말 소련으로 도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편입되었다.

개요

1936년 2월 20일 발표한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1][2] 중공당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이에따라 발표된 선언이다.

1920년대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작림(張作霖, 1873~1928)이 1928년 폭사하였는데, 배후는 일본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3월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후 만주 각지에는 장작림 세력의 군대, 마적단, 공산 유격대 등 잡다한 성격의 각종 항일 무장단체들이 생겨나는데, 이들이 합종연횡하여 1군(軍) ~ 11군(軍)까지 만들어졌다. 이들이 다시 연합하여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되었다가 좀더 많은 세력들을 모으기 위해 공산주의 색채가 배어 있는 이름을 무색무취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바꾸지만, 내용적으로는 중공당 만주성위의 지배 구조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1][2] 중공당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이에따라 1936년 2월 20일 여러 무장단 대표 명의로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을 발표한다.[3] 이어 지휘 편제를 3개 로군(路軍)으로 조직하는데, 11개군 중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제1, 2군이 1로군, 동만주의 제4, 5, 7, 8, 10군이 2로군, 북만주의 3, 6, 9, 11군이 3로군으로 편성된다.[2] 각 로군의 총사령(總司令)은 1로군이 양정우(楊靖宇, 1905~1940), 2로군이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으며, 3로군은 조상지(趙尙志,1908~1942)였으나 나중에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 1910~1946)으로 교체되었다. 북한 김일성은 양정우 휘하의 1로군 소속이었다.

항일연군은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군대이지만 연안(延安)의 중공당 중앙과는 연락이 두절되어 소련의 코민테른(국제당, 國際黨) 극동지부의 지휘를 받았다.[2][4][5] 아래와 같은 당시 신문기사도 항일연군이 소련의 지령과 지원을 받았던 사실을 보여준다.

満洲攪乱の魔手 / 「鉄の指令」をうけて入満 / 密行中の巨魁捕る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1936.8.3 (昭和11)


항일연군은 1930년대 중반에 각지에서 맹렬한 항일전을 벌였으나, 일제와 만주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다수의 전사자, 도망자, 귀순자들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1941~2년 무렵 완전히 소멸한다. 그 잔존 세력이 소련으로 도피하자 소련은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을 만들어 이들을 수용한다.

항일연군과 소련의 이러한 표면적 협력관계와는 달리 항일연군은 반만항일(反滿抗日)을 목표로 한데 비해 소련은 정반대로 만주국(滿洲國, Manchukuo)을 승인한 몇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이고[6][7], 1941년 4월에는 일본과의 충돌을 방지하려고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을 맺기도 했다[8][9]. 소련은 항일연군을 견제해가면서 필요에 따라 적절히 이용하는 방안을 구사했던 것이다. 반만항일을 내세웠던 항일연군 잔존세력이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소련으로 피난처를 찾은 것은 이들의 애초목적이 반만항일 자체보다 공산혁명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항일연군에는 김일성, 최용건, 김책, 최현 등 해방 후 북한 요인이 된 사람들을 위시한 다수의 만주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으나, 중국공산당원이었던 이들의 투쟁을 과연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는 항일연군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2][10][11][12][13]

동북인민혁명군은 1935년 11월 코민테른에서 채택한 “인민전선·전술”과 이에 따른 중공당의 “8·1지시”에 의거하여[1][2] 다른 계열의 항일 무력과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민혁명군의 강령이나 항일연군의 조직 조례에는 “항일반만(抗日反滿), 동북실지의 회복(東北失地의 回復), 중화조국의 옹호(中華祖國의 擁護)”가 기본 목표로 제시되어 있을 뿐 한국독립이나 한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었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88여단에 있을 때인 1942년에 여단장 주보중의 지시로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항일연군 1로군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14] 김일성은 당시 중공당원으로 중국을 위한 투쟁을 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이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만주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인의 정체성도 희박했고,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 권력을 쥐어준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조선인 여자대원들도 대부분 중국인과 결혼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아도 항일연군 조선인들의 투쟁사는 중국인인 조선족의 역사이지 한국인들의 역사로 보기는 힘들다.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15]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또한 해방 당시 김일성은 중국어엔 능하나 조선말은 더듬거리며 잘 하지도 못했다.[16][17][18] 이런 사례로 보면 해방 전의 김일성은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됐던 조선인들이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과 소련군의 덕분이다. 소련은 자신들이 교육시킨 이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권력을 잡도록 만들어 한동안 북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항일연군 1로군의 편성

항일연군의 부대 단위는 10명으로 된 반(班)이 있고, 3개 반이 배(排), 이런 식으로 차례로 련(連), 단(團), 사(師), 군(軍)이 구성되었다. 각 단위 부대의 지휘관을 반장, 배장, 련장, 단장, 사장(師長), 군장(軍長)으로 칭했다. 통상적인 편성상의 인원 수와는 관계없이 항일연군 1개 사(師)는 대략 100 ~ 200명 정도 병력으로 구성되었는데, 100명 이하로 되거나 300명 가량 되는 때도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와 지휘관들은 아래 표와 같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19][20]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21]

전기 편제에서 2군의 4, 5, 6사(師)는 원래 1, 2, 3사(師)였으나 1군과 함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1887~1981) 소장이 지휘하는 노조에 토벌대가 토벌작전을 완료한 1941년 3월에 작성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22]. 이름에 X 표시가 된 사람은 사살, 체포 또는 투항한 사람이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 이름에는 X 표시가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성격

동북인민혁명군이나 동북항일연군은 중앙 보급이 없는 군대였으므로, 식량, 의복, 무기 등 필요한 군수품을 부대 단위로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이들이 생업에 종사해서 수입이 있는 집단도 아니니 군수품이나 병력 조달은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사실상 다른 마적단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항일과 공산혁명을 목표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숭고한(?) 목적을 내세운다고 비적의 근본 성격이 달라질 수는 없다. 일제나 만주국은 이들을 공비(共匪)라 불렀다.

혹자는 일본측이 이들의 항일투쟁을 고의적으로 나쁘게 평하여 비적행위로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 되려면 특별한 생업에 종사하지도 않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식량과 군수품을 조달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내놓은 바 없다.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

많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는 기록은 엄청나게 많다.[23] 그들이 생업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몰래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봐야 턱없이 부족한데다 보급품을 조달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 군부대나 관공서를 쳐서 물자를 빼앗기에는 치러야할 희생이 너무 크고, 만만한 대상이 양민일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나올 것이 많은 돈많은 부잣집을 털고는 적당히 친일파를 응징했다고 구실을 붙여주면 되는 것이다. 납치해온 사람들 중 나이든 사람은 인질대금을 받고 풀어주고, 젊은 사람은 손실된 병력과 인력을 충당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자 대원들도 납치되어 온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들만의 논리야 있겠지만 사실상 마적단이나 다를바가 별로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韓民)』 1936년 11월 30일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24]

김일성의 비적(匪賊) 행위를 보도한 1936년 11월 30일자 『한민(韓民)』 기사. 『한민(韓民)』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이다.[25]
여기의 김일성은 1937년 6월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공군(共軍)의 화해(禍害) 장백현을 근거로 하여 공산당으로 조직한 소위 동북 인민혁명군은 이주 동포의 재물을 약탈하며 사람을 붙잡아가며 인명을 살해함으로 해 지방이 거의 적지가 되어 사람이 붙어 살수가 없다는데 그중에도 김일성이 영솔한 부하가 명수도 사오백 명에 달하고 또 활동이 그중 제일 많다 한다. 그들은 촌리로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은 있는 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금만 불만하면 집을 불사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데 금년 일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사백이십팔회요 피해자의 수효는 이천이백사 명이며 十月 한달 동안에만 잡혀가서 인명의 손해 받은 것이 이백사 명이라 한다. 일본 군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적극 행동을 취한다 하니 손해 받는 자는 가련한 한인뿐이다."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야'(Новое Время, The New Times, 新時代)는 1993년 4월 구 소련 군인 시절때 金日成을 잘 알고 있던 게오르규 트마노프의 증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26]

「제 2차 대전중 소련군 대위로서 극동 군관구 저격여단 소속 조선인 대대 대대장을 역임하며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김일성은 1944년 7월에 열린 同여단 공산당 회의에서 중국인 대대(大隊) 정치위원으로부터 " 조선인 대대는 중국 길림성에서 현지 도둑과 짜고 민중에 대한 약탈행위를 반복했으며 중국 공산당원도 살해했다"고 고발당했다. 중국 정치위원은 "이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공산당을 죽이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의에서"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스트"라고 변명했다.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최현(崔賢)이 소황구(小荒溝)의 각 가장(家長) 앞으로 보낸 협박장이 나온다.[27][28][29]

소황구 (강연부터 최십가장 집까지) 각 가장 앞 : 小荒溝 (自江沿 至崔十家長家) 各家長 앞

너희 가장(家長)들은 내일 모레 이틀간에 옥수수, 콩, 팥등 계(計) 3석 5두(三石五斗)와 소금 10 (一○)근을 한 알도 덜하지 말고 완전 징수하여 소유천(小楡川)으로 송부하라. 이틀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 당할 것이다.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第二軍 第一師 第一團 軍需處長)

최현(崔賢) (印)

이들이 양민들을 무차별로 협박하여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는 점에서 그냥 마적이나 산적일 뿐이다.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을 1980년대 중반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녀도 당시 마적질을 한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한다.[30]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많은 시일이 지나서야 나는 끝내 여 투사의 입을 열수 있었다.

“임자들은 항일 무장투쟁이다 하면 그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늘 왜놈토벌대들에게 쫓겨 다니고 굶고 떨고 그런 줄만 알겠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영화에서 본 것도 다 그런 것들뿐인데요”

“물론 그렇긴 했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늘 그렇게 굶고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협에 시달린다면 누가 그 짓을 하겠나. 아무리 명분이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말일세. 사실대로 말하면 집단부락이나 왜놈 목재소 같은 걸 하나 제대로 치면 며칠은 정말이지 배를 두드리며 잘 먹는 때도 있었어. 그 멋이 없다면 십여 년씩 산에서 싸우기가 힘들었을 거야.”

잡지 《삼천리(三千里)》에도 아래와 같은 항일연군의 비적질 관련 기사가 3건이 실렸다.

일만군(日満軍)의 항일연군 토벌

일본 관동군(関東軍)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국 치안숙정 3개년 계획(満洲国治安粛正三箇年計画)'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31] 위 표에서와 같이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왕덕태와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렸다. 보천보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도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자 김성주가 전사한 김일성의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으로 판단된다. 자세한 것은 김일성 가짜설을 참고하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년 2월 25일자는 1937년 1년간 일만군(日満軍)이 항일연군을 포함한 만주 무장단체들과 벌인 전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32]

비적 9천으로 격감(匪賊九千に激減) / 만주국 치안 완성(満洲国治安完成へ) / 来月一日・建国六周年[32]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3월 1일이 만주국 건국 6주년임)
 しかして日満軍は昨年中戦闘を交えること一千七百四十一回、匪首を仆すこと金日成以下五十九、逮捕した匪首王鳳閣以下二十八名、匪の遺棄死体一万千八百八十一、捕虜二千十六、獲得した小銃五千二百十七という著しい成果を挙げた、これに対し日満側は戦死日軍二百八十九名、満軍二百九十八名、計五百八十七名、負傷者日軍四百七十一名満軍五百二十八名、計九百九十九名の貴い犠牲を払った
일만군(日満軍)이 작년중에 벌인 전투회수가 1,741회이고, 비수(匪首)를 죽인 것이 김일성(金日成) 이하 59명, 체포한 비수가 왕봉각(王鳳閣, 1897-1937) 이하 28명, 비적들의 유기 사체(遺棄 死体)가 11,881 구, 포로 2,016명, 획득한 소총이 5,217정이다. 일만군 전사자는 일본군 289명, 만주군 298명으로 계 587명, 부상자는 일본군 471명, 만주군 528명 계 999명이다. 이러한 토벌 결과로 항일연군을 포함한 비적(항일 무장단체) 인원은 9,000 여명으로 급감하였다.

일제의 집중적 토벌로 대다수 지휘관과 수많은 병력을 잃은 1로군은 1938년 7월에 위의 후기 편제표와 같이 편제를 축소 개편한다. 이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도 일만군경이 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벌인 동남3성 (東南3省 = 吉林 通化 間島) 치안숙정공작 (治安肅正工作)으로[33] 간신히 살아남았던 총사령 양정우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만 결사 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항일연군은 일만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다수의 전사자, 도망자, 귀순자들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1941~2년 무렵 완전히 소멸하고, 잔존 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여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에 수용되었다가 일본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김일성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들을 최고 권력집단으로 만들어 준다.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조선인 항일운동 말살 책동

중국 공산당과 소련은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을 일본에 못지 않게 잔인하게 탄압했다. 김일성은 이런 집단에 빌붙어 살아남아 이들의 도움으로 북한의 집권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

초기의 만주 공산 유격대에는 조선인이 많이 참여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반공친일단체인 민생단원으로 몰아 무자비한 살륙을 자행하여 무고한 조선인들이 수백명이나 처형 당하고, 유격대의 주도권은 중국인들로 넘어갔다. 김일성도 한때 민생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일본의 침략에 감사를 표시한 모택동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운 군대는 장개석 휘하의 국민당군이고, 모택동의 중공군은 일본과의 전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대한 돈을 받고 국민당군의 정보를 일본측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모택동은 일본의 침략에 감사한다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이 없었으면 중공군은 일찌감치 토벌되어 중국의 공산화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자들도 일본의 침략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자유시 참변과 스탈린의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1921년에 발생한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나 연해주에서의 민족주의 계열 무장항일 투쟁은 거의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또 1937년 가을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2000여명을 처형하고, 20여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하여 연해주에 조선인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은 받아들여서 88여단에 수용하였는데 이들이 중공당 당원이고 중국인들 밑에서 활동하다 왔고, 소련의 목적에 맞는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일 조선인들만으로 된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이었다면 받지 않았거나, 받았더라도 강제노동이나 시키는 인력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의 정체성

동북인민혁명군 또는 동북항일연군에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가하였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수백명이 희생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이들 대다수는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조선말보다는 중국말에 더 익숙했고, 조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선인이라기 보다는 중국에 동화된 오늘날의 조선족과 같은 의식구조를 가졌다.

같은 중국에서 활동했음에도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발음하고 표기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외교문서에 한자 이름의 영어 표기를 우리말 발음으로 적어서 조선인 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예를들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34],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34][35][36]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반면에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자신들 이름의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했고, 러시아어 문서에 이름이 조선발음 아닌 중국발음으로 적혀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소련군 문서에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며, 다른 조선인들도 러시아어로 표기된 이름이 중국발음이다[37]. 이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38][39]. 따라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박약한 항일연군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기 보다는 중국공산당원으로 중국인들 틈에서 중국을 위해 싸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14]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그냥 중국인들과 같이 중국을 위해 싸운 것으로 나온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 동흥사건
* 보천보사건
* 황순희
* 혜산사건
* 간삼봉 전투
* 김혜순
* 제88독립보병여단
* 김일성
* 최현
* 김정숙 (김일성처)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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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anchukuo - Wikipedia
  8. 소련-일본 중립 조약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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