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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 [[이반 코발렌코]]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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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7일 (목) 02:05 판

가브릴 이바노비치 코로트코프(Гавриил Иванович Коротков, Gavril Ivanovich Korotkov, 1925~ )는 소련과 러시아의 군인이자 역사학자이다.

1992년 6월 방한 당시의 가브릴 코로트코프 박사[1]

약력

1993년 국내에 번역, 간행된 그의 저서 《스탈린과 김일성》에 나오는 약력이다.[2]

  • 192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시에서 출생
  • 1943년 보통 중학교 졸업 후 군사학교 입학. 독일과의 전쟁에 참가해 두 차례 부상했으며 20개의 훈장, 포장을 받았다.
  • 1950년 한국전 발발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극동군 사령부 말리노프스키 (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1898 – 1967) 원수[3] 휘하의 특무부에서 근무하며 한국전 진행 과정에 대한 정보를 분석
  • 1957년 노스크바 정치 군사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이후 12년간 이 아카데미에서 전쟁사와 전쟁기술 과목을 강의
  •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과학 아카데미, 미국, 캐나다 연구소에 근무하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군사 정책을 연구
  •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성 전사(戰史) 연구소 근무
  • 현재 역사학 박사로 전사연구소 수석 연구원, 러시아 자연과학 아카데미 부회원, 러시아 저널리스트 연맹 회원
  • 주요 저서로는 《전쟁에 대한 위대한 거짓말》, 《승리를 위한 전투》, 《2차 대전의 결과와 교훈》, 《국지 전쟁》, 《핵시대의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88여단, 김일성 및 한국전 관련 연구

그는 소련군 장교로 6.25 때 하바로프스크 극동군 사령부 말리노프스키 원수 휘하에서 한국전 진행 과정에 대한 정보를 분석했으며, 대령으로 예편한 후 소련 국방성 전사(戰史) 연구소에 근무하며 군사관련 역사를 연구했고, 비밀로 분류된 다수의 문건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구소련 해체과정에서 88여단김일성이나 한국전 관련 문서에 대한 접근이 일부 가능해지면서 이를 토대로한 연구를 했고 저서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을 한국에서 번역 간행했다. (이 책은 소련에서는 간행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는 김일성이 생존해 있었고, 소련도 아직 경직되어 있어 출판허가를 얻지 못한 듯하다.)

진지첸이 김일성으로 이름을 바꾸는 시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 문서에는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혀 있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코로트코프박사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인 지난해 10월 당시 국방장관 샤포슈니코프 원수(현재 독립국가연합 통합군 총사령관)로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진실을 규명, 공식적인 입장을 정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93년 7월까지 작업완료를 목표로 자신을 팀장으로 한 5명의 연구원이 현재 비밀문건들을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화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문서보관소에 가장 가치있는 관련 자료들이 비장돼 있음을 알게 됐으며 여기서 金日成(김일성)의 개인신상과 한국전쟁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 내용들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金日成(김일성)의 이름과 관련, 1945년 10월 1일까지 작성된 모든 문건에는「진지첸」이란 中國(중국) 이름으로 표기됐으나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최종 선택된 10월 2일부터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음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유명한 김일성의 이름을 물려받아 썼다는 88여단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 대위의 증언을 소개하기도 했다.[4] 이런 사실들로부터 북한 김일성은 종래 알려졌던대로 가짜 김일성 장군인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불리한 자료들은 고의로 외면하고 있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발하는 과정

코로트코프는 88여단에서의 김일성 관련 연구도 많이 하였는데, 특히 1945년 9월초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발하는 과정에서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면접시험을 볼 당시 기록물을 소개하고 있다.

러 국방부연구원, 金日成 관련 자료도
특히 金日成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1894~1953)[5] 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1906~1973)[6] 대장 앞으로 제출된 金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 현재 대대장 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金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소련군 통역관은 후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나에게 말했다. 金에게는 질문에 답변만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金-"진지첸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로 시작됐다.)

--귀관은 한국인인가?

▲ 그렇다.

--남평양에서 태어났는가?

▲그렇다.

--공산당원인가?

▲그렇다.

--가족은?

▲결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다.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에 가서 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계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겠다.

(여기서 소련장군들은 "좋아. 대답 잘했어"라고 칭찬)

두 장군은 이어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金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 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 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金日成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張時雨, 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 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 金日成 등 만주그룹, 그리고 조만식 선생 등 非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의 공산활동가들은 어미없는 새끼고양이에 불과해 적이 처들어오면 흩어질 수 밖에 없다. 한반도 해방은 이를테면 아버지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버지(지도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위의 인물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특히 "현재 그들에게 군사업무를 가르치기에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하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한다"고 소련 극동군사령부에 지시,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金日成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위와 같은 면접 시험을 볼 때의 시험관인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1894~1953) 대장은 김일성이 소속된 88여단의 직속 상관이고, NKVD 비밀요원으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정찰국장 소르킨(1899~1980) 소장에게 보고하던 김일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후한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7] 이후 김일성은 1945년 9월초 모스크바로 불려가서 스탈린 앞에서 다시 면접 시험을 본 후 북한 지도자로 최종 낙점을 받는다.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선택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의 저서 《스탈린과 김일성》에 좀더 자세히 나온다. 극동군 사령부나 NKVD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검토하고 김일성을 스탈린에게 강력하게 추천해 올린 사람은 내무인민위원장(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였다.[8]

저서 《스탈린과 김일성》 발췌 소개

그는 6.25 전쟁스탈린이 주도하여 일어났으며, 김일성은 그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가졌다.

코로트코프著書`스탈린과 金日成'발췌 소개

6.25南侵(남침) 작전계획 蘇軍(소군)도 참여
러 軍史硏(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주장
戰況(전황) 불리하자 金日成(김일성)교체 거론
공개된 北韓(북한)「선제타격계획」
초기 치명타「速戰(속전)전략」
스탈린도"완전한 승리"믿어

방한 인터뷰

그는 1992년 6월 학회 참석차 방한했는데, 동아일보의 인터뷰에 응했다.

"「6.25」7개월前(전) 蘇(소)|中(중) 南侵(남침) 합의"
스탈린 - 毛澤東(모택동) 각본까지 검토
지난 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 직후 소련의 극동군 병력 50만명이 한국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북한-소련 국경에 배치됐으나 수일뒤 스탈린의 명령으로 철수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역사학아카데미 회원인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67)는 20일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주최로 경희대 본관 2층 회의실에서 열린 `현 상황에서 한국전쟁의 재조명'이란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 이같이 증언했다.

한국전쟁 당시 말리노프스키 소 극동군사령관의 정치담당보좌관으로 근무했던 코로트코프박사는 이날 `한국정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지난 50년 9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 스탈린의 지시로 소극동군 50만명이 한국전 투입을 위해 국경에 배치됐었으나 며칠 뒤 스탈린이 다시 내린 명령에 따라 철수했다"고 말했다.

코로트코박사는 "당시 국경으로부터의 소극동군 철수는 휴가중이었던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이 급파한 주은래의 논의결과에 따른 것"이라면서 "스탈린은 당시 미국과 전쟁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극동군을 한국전에 투입해 미국과 전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고 밝혔다.

코로트코프박사는 또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주도하에 김일성이 대리전을 치른것"이라고 단언했다.

기타 증언

남북한을 모두 방문한바 있는 러시아의 한반도전문가 가브릴 코로트코프는 북한주민들의 집단적인 통곡장면이 진짜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인민들의 슬픔과 눈물은 스탈린이 죽었을때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아주 순수하고 진실된것』이라며 『북한당국이 김일성을 계속 신이라고 주장, 사람들은 마침내 세뇌되고 말았다. 스탈린하에서는 선전조작이 30년간 지속됐지만 북한에서는 50년간이나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루지야태생인 스탈린은 확실한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반면에 김은 아들을 후계자로 길러 놓았고 김정일은 아버지의 길에서 이탈할 어떤 조짐도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김정일의 능력에 대한 의문은 있다. 아스몰로프는 『개인을 우상화해 통치해온 모든 정권은 「위대한 지도자」가 죽으면 더욱 쉽게 붕괴됐다』며 『김일성은 이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의도는 망나니이며 플레이보이인 김정일의 괴팍한 성격과 통치력부족으로 빗나갈 수 있다』고 전망한다.

 몇몇 나이많은 러시아인과 그루지야인들은 아직도 스탈린을 존경, 그의 사진을 벽에 걸어 놓기도 하고 크렘린벽에 헌화하기도 한다. 그들은 스탈린이 구축했던 강제적인 사회질서가 오늘날의 사회혼란보다 나았다고 주장한다.

 코로트코프는 김정일이 부분적인 개혁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북한의 젊은 세대들이 쉽게 동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에는 이러한 억압구조를 걷어치우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며 『이러한 새로운 흐름이 앞으로 1년내에 분명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 포로의 일부가 소련과 북한의 긴밀한 협조하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된 사실이 있다고 러시아의 한 저명한 한국전 전문가가 주장했다. 러시아 국방부 산하 전쟁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인 가브릴 코로트코프 박사는 최근 연합통신과의 회견에서 한국전 당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한국군 일부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됐으며 이러한 내용의 비밀문서가 舊KGB(비밀경찰) 비밀문서고에 깊숙히 간직돼 있다고 주장했다.

6.25 전쟁에도 직접 참여

그는 6.25 전쟁에도 전투요원 아닌 정보요원으로 직접 참전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었다고 한다. 아래 글의 필자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은 1992년 당시 연합뉴스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코로트코프 박사를 자주 만났다. 위의 연합뉴스 기사 필자이기도 하다.

전쟁발발시 극동군총사령관 직속 특별정보팀장 코로트코프 박사
소련·북한군 공동작성 '선제타격작전계획' 모사본 전격 공개 파문
전투명령서-부대 이동계획-침공방향-서울일대 부대 섬멸계획 등 담겨
코로트코프는 소련군 정보장교였던 자신이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 과정과 낙동강 전선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해 필자에게 증언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대위 계급의 코로트코프는 하바로프스크 소재 극동군 총사령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한국전쟁 기간 내내 중국, 북한과 전쟁수행에 관해 긴밀히 협의한 인물로. 후일 지상군총사령관, 제1국방차관을 거쳐 1957년 흐루시초프에 의해 국방장관이 되었다) 직속의 특별정보팀장으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쟁진행과정에 대한 정보분석이 기본 업무였다.

말리노프스키 원수는 특별정보팀에게 한국전쟁과 관련한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을 말했다. 북한군의 급속한 진격이 큰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조기에 최종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북한군 전력이 두 동강이 나게 돼 결국에는 패퇴할 수밖에 없다고 한 지적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원수는 그 이유로 한반도 중간 지점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될 수 있으며 그 지점은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일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병참보급이 어려운 북한군이 퇴로가 막혀 지리멸렬될 수 밖에 없다는 게 말리노프스키 원수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가 전황보고...유엔군 인천상륙후 3.8선 이북 복귀

코로트코프는 종군명령에 따라 북한군 전선사령부에서 활동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낙동강 전선까지 가서 전선상황을 직접 체크해 전황을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소련의 전쟁개입 증거가 노출되지 않도록 절대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상부의 엄명을 받았고 그래서 군복이 아닌 편의복장으로 전선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군을 지원하던 일본인 몇 명이 포로(그는 군인신분이라고 표현했다)로 잡혀와 자신이 직접 심문한 바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군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미군 영내에서만 체류하면서 미군지원 근무를 했다고 주장했다.(당시 일본에서 자위대 전신인 경찰예비대 소속 대원들이 한반도 근해 기뢰제거를 위해 미군 지휘하에 동원됐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심문이 끝난 이들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끌려갔다.

말리노프스키 원수의 예측은 적중했다. 미군의 기습적인 인천상륙으로 북한군은 지리멸렬 상태가 되었다. 코로트코프는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급히 3.8선 이북으로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국전쟁 북침설 잠재운 볼코고노프 장군...남침입증 비밀문건 공개
"한국전쟁은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 3인이 공모한 해방전쟁" 단언
스탈린 남친전쟁 승인-중공군 참전문건 등 극비전문 첫 공개 '충격'

참고 자료

  • G. I. Korotkov On the Captain's bridge 러시아어 원문의 구글 영역
  •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함께 보기

각주

  1. 인터뷰 訪韓(방한)한 러시아 軍史研(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1992.06.27 동아일보 5면
  2.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3. 말리노프스키 (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1898 – 1967)
  4.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5
  5. 막심 푸르카예프 (1894~1953) 위키백과
  6. 이오시프 시킨 (1906~1973) - 위키백과
  7. 김일성#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다. 우남위키
  8.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