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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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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1945년9월 15일부터1946년 5월 6일까지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중국군 부대에서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김영주(金英柱, 1920~ )]]와 침식을 같이하며 붙어 살다시피 한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24_1_0032537 이용상(李容相,1924.7.1∼2005.4.11)]<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9037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ref>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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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중국군 부대에서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김영주(金英柱, 1920~ )]]와 침식을 같이하며 붙어 살다시피 한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24_1_0032537 이용상(李容相,1924.7.1∼2005.4.11)]<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9037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ref>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 [https://news.joins.com/article/2541634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16)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 : 이용상(李容相)] 중앙일보 1991.03.09  종합 9면
 
* [https://news.joins.com/article/2541634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16)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 : 이용상(李容相)] 중앙일보 1991.03.09  종합 9면

2019년 6월 14일 (금) 21:24 판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평양의 대중 앞에 나섰다. 그러나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았으므로 그날부터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말은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에도 전해져 그가 가짜인 것은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김일성이 가짜아닌 진짜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 오늘날 학계에서는 그가 진짜로 둔갑해 있다. 그러나 가짜가 진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래는 지금까지 발견된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의 김일성 진위 관련 기록과 증언들을 연대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하는 일부 문헌도 포함시켰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은 그가 평양에 나타난 직후인 1945년말부터 이미 남한에 퍼지고 있었으며, 정부 수립 이전에 이를 기록한 문헌도 상당히 많다. 미군정 문서도 대부분 김일성이 가짜라고 판단하고 있으므로,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근거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심지어는 일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친일파(?) 박정희가 항일 투쟁한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도 터무니 없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진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해방 후 소련군이 데려 온 김성주의 전력을 잘 알 수 없고 불투명한데다, 너무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한 때문에 나온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기록들을 보면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상당기간 보천보 사건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고, 그 사건의 주역이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고 대다수 신문이 보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이는 곧 김일성 이름이 보천보 사건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핵심 쟁점을 다른데로 돌려 논점을 흐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그가 보천보 사건 당사자인지 아닌지와는 무관할 뿐더러, 그는 보천보 사건의 실제 당사자조차 아닌 것이 밝혀진다.

미군정은 물론이고, 한국정부조차 1960년까지도 북한 김일성의 정확한 행적은 거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던 사실에 가까운 정보는 그가 1912년경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에서 출생헸고,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한 전력이 있으며, 이후 소련으로 도주했고,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 지도자로 데려왔다는 정도가 거의 전부이다. 무슨 구체적인 항일투쟁 경력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친일파들이 득세한(?) 남한이 김일성의 항일 경력에 부담을 느껴서라거나, 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일고의 가치라도 있는 말인가?

전후 복구에 바쁘던 1950년대는 물론이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먹고 살기 바쁜 가난한 시절이라 김일성의 전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시작되지도 않았다. 1962년 무렵부터는 보천보 습격 등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 일부를 받아들여 사실인 것처럼 적어 놓기 시작한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일제시대 문헌도 조사해가며 구체적인 연구가 시작되는데,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이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에서 처음 밝힌대로 보천보를 습격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그 직후부터 김일성(金日成) 이름을 쓰며 동명의 선배 지휘관의 공적을 가로챈 것이 맞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에는 생소한 인물이라 가짜라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 지도자 경력이 쌓여 익숙한 인물이 되어가는데다, 일제시대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이름을 듣고 자라 그가 가짜인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세대들이 퇴장하자 김일성이 진짜라는 설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김형직도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중국군 부대에서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와 침식을 같이하며 붙어 살다시피 한 이용상(李容相,1924.7.1∼2005.4.11)[1]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연재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용상 자신도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김형직(金亨稷, 1894~1926)도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해주며,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김영주가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므로, 이 때문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가짜가 맞다고 그의 친동생 김영주가 이미 해방 직후에 증언했던 것이다. 중국군에 있을 당시 김영주는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일성이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백발장군이 어떻게 33세인가" 꼬리문 의문 : 노장군이 물려준 이름이라는 김영주의 변명[2]

김일성의 친동생인 그가 자기 큰 형 이름이 원래는 김성주였는데 지금은 김일성, 즉 오늘(1945년10월14일)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 시민환영을 받은 김일성이라고 분명히 필자에게 말했다. 김성주가 지금은 김일성으로 됐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필자가 10세 전후일 때 우리 아버님은 약주를 드시면 언제나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면」하는 『봄 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끝나면 반드시 『이제 곧 김일성 장군이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김일성 장군은 백발노인으로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백발장군이 지금은 몇살쯤 되셨을까. 나는 김영주에게 물었다.
『김 동지, 형님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길래 김일성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33세라고 대답했다. 33세라면 내 계산과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김영주는
『네, 알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김일성 장군 나이가 왜 33세냐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얘기하셨으니까요.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요.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은 내가 6세때 돌아가시고 모친도 내가 12세때인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성주형을 따라다니며 유격대 노릇을 했습니다. 그 위험한 나날로 보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참 용한 거지요. 철주라는 작은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19세때 남만주 동령현 노흑산에서 전사했지요(노흑산은 산명이 아니라 간도성에 있는 지명이라고 했다).
성주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독립군 사단장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겁니다.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준 김일성 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답니다.』

『네, 그것을 양명이라고 하지요. 이름을 물러 받은 김 동지의 형님은 승명한 것이고. 김 동지, 그런 연유로 형님이 젊은 나이에 김일성 장군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김 동지의 「김일선(金日鮮)」이란 이름은 누구에게서 승명한 겁니까.』
『이것은 내가 적당히 지은 겁네다. 왜「일선」 인지 아십니까.』
『…….』
『아주 간단합네다. 일본 놈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속임수로 떠들던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과 같다고 기만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표어)를 본떠 나는 일선(일본과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내 속셈은 급할 때 일본군경에게 「자 보시오. 나는 내 이름까지도 일선 일체라는 뜻에서 일선이라고 지었지 않느냐」고 둘러대기 좋게 만든 이름입니다. 실제로 일선이라는 이름의 효과도 봤디요.

그러나 일선의 참뜻은 김일성형의 「일」과 조선의 「선」을 딴겁네다.』

김영주는 자신이 형과 같은 부대에 있을 때 보천보 전투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하나, 그는 보천보 사건 발생 이전인 1937년 초에 이도선에게 붙잡혔으므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도선은 1937년 4월 24일 사망하므로 그 이전에 붙잡혔음.] 일본군 통역으로 있은 것을 부끄럽게여겨 자신이 항일투쟁을 한 경력도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이 아닌가 한다.

1945년 ~ 1949년

  1. 독립운동사자료집 12 : 문화투쟁사자료집 - 성명 목야경성(牧野警聲) 당 28세 등 판결 : 소화 20년(1945년) 형공(刑公) 제481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7) : 공훈전자사료관
    [p.1126] (3) 동년 11월 하순 동소(同所)에서 동녀에 대하여, 만주에는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조선독립운동가가 있어서, 동인은 원래 조선에의 민족해방운동에 힘쓰던 중 검거를 피하기 위하여 만주국으로 도망한 자인데,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신인(神人)처럼, 6일 앞의 일을 예지(豫知)하는 영웅이라고 말하고, 또 조선 국기를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고 조선도 전에는 찬연한 독립국가였다고 말하고,...

    이 김일성은 신화화된 인물로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없다.


  2. 주한미군사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조각명단의 국방상 김일성(Kim, II Sawng) : 1945년 9월 17일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Ⅰ > CHAPTERⅢ INTERMEZZO: AUGUST 1945 > The Russian Scare 1945년 9월 17일
    한국현대사 사료총서2 주한미군사 1 > Ⅲ. 간주곡 : 1945년 8월 >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 1945년 9월 17일
    원문 번역
    Congratulations on the Independence of Chosen:

    The Dawn of Democracy in the East
    President -- Kim, Koo
    Premier -- Rhee, Syng Man
    Foreign Minister -- Lyuh, Woon Hyung
    War Minister -- Kim, II Sawng
    Chief of Staff -- Hwang, Wun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며:

    동방 민주주의의 새벽
    대통령 - 김구(金九)
    수상 - 이승만(李承晩)
    외무장관 - 여운형(呂運亨)
    국방장관 - 김일성(金日成)
    총참모장 - 황운(黃雲)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해방 이튿날부터 전국 도처에 뿌려진 출처 불명의 괴문건으로 미군도 이들 중 하나를 얻어보고 위와 같이 기록한 것이다. 여기의 김일성은 물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의 88여단에 있던 북한 김일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국내의 어느 누구도 모를 때이다.

    미군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을 "XXIV Corps G-2 Periodic Report No. 7 (17 Sept. 1945) p. 3"에 실린 조선인민공화국 조각명단과 비교하며, 이승만과 김구를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공산당 계열이 작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3.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평양민보(平壤民報)에 1945년 10월 19일부터 연재

    『문화전선(文化戰線)』(창간호)의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p.80~87
    [p.83] 8.15 해방(八ㆍ一五 解放)이 되자 이 「혁명가(革命家)의 집」에서 나오는 소리는 「일성(日成)」 두 字뿐이었다. 과연(果然) 얼마 지나서 김일성(金日成)이 평양(平壤)에 나와 있다는 소식(消息)이 들려왔다. 그러나 소문(所聞)에 의(依)하면 그 일성(日成)이는 五十이 넘었다느니 장개석(蔣介石)이 친구(親舊)라느니 이런 말 뿐이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그럼 그것은 우리 일성(日成)이는 아닌 가보다」 이런 말을 하며 궁금해 하였다.

    [p.87] 「새로운 개선(凱旋)의 날」

    장군(將軍)이 귀국(歸國)한 후(後) 그 제일성(第一聲)과 용자(勇姿)를 맨처음으로 지상(紙上, 平壤民報)에 취급(取扱)하는 영광(榮光)과 장군(將軍)에게 「장군(將軍)」이라는 칭호(稱號)를 지상(紙上)을 통(通)하여 처음으로 받드는 영광(榮光) – 기자생활(記者生活) 최대(最大)의 영광(榮光)을 지닐 수 있은 필자(筆者)는 또한 장군(將軍)의 만경대(萬景台)에의 개선행(凱旋行)에 수행(遂行)을 하여 그 세기적(世紀的) 감격장면(感激場面)을 몸소 가슴깊이 인상(印象)받을 수 있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섰을 때 가짜라는 말이 나오게 되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집회가 끝난 후 김일성은 여러 사람들과 기자들을 대동하고 만경대로 가서 조부모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인다. 이때 수행기자였던 한재덕이 관련 소식을 전하며 북한 김일성을 찬양하기 위해 쓴 위 글에서조차 당시에 북한 김일성이 아닌, 나이가 50이 넘었고, 장개석(蔣介石, 1887 ~ 1975)과 친구라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소문만 나돌고 있었다고 의도하지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 장개석이 나오는 것은 뜬금없어 보이지만, 아래 이북(李北)『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1950.12.20)나 조선일보 1953년 7월 27일자 기사에도 나오는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장개석과 같이 일본 육사 동창이라 친분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글 마지막의 「새로운 개선(凱旋)의 날」은 한재덕이 1946년 봄 만경대를 재차 방문한 후 쓴 글로 『문화전선(文化戰線)』 간행 때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한재덕은 자신이 처음으로 북한 김일성에게 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여 활자화 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소련군 대위 출신의 북한 김일성이 그 전에는 장군이라 불리지도 않았고, 그는 전설같은 풍문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한재덕은 1959년 귀순 후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3회) (동아일보 1962 년 05 월 16일 2면)에서도 그가 김일성에게 처음 장군이란 칭호를 붙였다고 하였다.

    해방후 평양에서 처음 나온 신문,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 「平壤民報 (평양민보)」창간호는 낡은 윤전기로써는 미처 찍어낼 수가 없으리만큼 날개가 돋혀 뿌려졌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목마른 사람 냉수 마시듯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다브로이드」판의 빈약한 것이었으나 문제의 인물 의문의 인물 金日成 (김일성)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환영군중대회」를 취급한 제一(일)면 「톺」기사에서부터 金日成(김일성)의 말에 의하여 그의 경력, 포부, 그의 고향, 가정일 등을 소개한 「내리다지」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각면 전부가 金日成(김일성)에 관한 것으로 메워져 있었다. 그 선전효과는 가히 짐작할만한 일이다.
    .............
    그 기사와 글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金日成(김일성)을 「장군」으로 부르고 「민족적 영웅」으로 추켜 세웠다. 「凱旋(개선)」이라는 말도 이때 내가 처음 쓴 말이었다. 金日成(김일성)이 처음 공개될 때에 그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 잠시 논의되었다. 공산사회식으로 「동무」나 「동지」라고만 하는 것은 우상화하려는 「영도자」에 대해 너무 위신이 안선다. 「氏(씨)」라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선생」이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남같이 「박사」라고 하기도 안되었다. 그래서 「소련」 사람들도 처음(「다마야」에서의 환영간담회 때만 해도) 그를 우리에게 소개할제 어제까지 자기 군대의 「소좌」로 있던 사람을 갑자기 「장군」 이라고 하는 것이 차마 쑥스러웠든지 아직 그저 「다와리시치· 김일쎈」(김일성 동무)라고 했었다.
    그것을 李周淵(이주연)등이 金日成(김일성)의 본심을 받들어 궁리를 한끝에 「장군」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소련」장군들도 이 땅 공산주의자들의 아첨 기술에 새삼 감탄하고 만족하였다. 「마이용(少佐(소좌))·김일쎈」은 일약 「게네랄 (將軍(장군))·김일쎈」으로 수계급 특진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장군」칭호를 처음으로 활자(活字)화하고 지상으로 처음 「임명」한 것이 내가 된 셈이었다. 이래로 북한에서는 金日成(김일성) 밑에는 반드시 「장군」이란 「렛텔」이 달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金日成(김일성)을 「장군」 으로 「임명」하고 영웅화한 것이 韓載德(한재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부 터 유래한 것이다.

    • 한재덕의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는 해방직후 대중앞에 처음 나선 당시 김일성의 동정을 보도한 기사들을 모아 간행한 단행본으로, pp.65~89에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가 나오며, 문화전선에 수록된 내용에 일부 수정이 가해져 있다.


  4. 1945년 11월 5일 조선노조 전국평의회 결성대회(朝鮮勞組全國評議會結成大會)에서 박헌영, 김일성(金日成), 모택동, 레온치오(LEONCHIO) 4인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함.

    G-2 Periodic Report # 59 (8 Nov. 1945) : 평양에 등장한 김일성이 처음 나오는 미군정청 기록
    G-2 Periodic Reports, Nov-Dec 1945 p.33
    (4) A conference of Korean labor unions, attended by 505 representatives from throughout Korea, was held in SEOUL on 5 Nov. At this meeting, PAK, Hawn Yawn, leader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CHOSUN KONGSAN DANG), was elected an honorary president of the organization. Also the conference passed a resolution to send a message of thanks to him, describing him as "the leader of the movement to unite the working class and a great patriot". Others elected honorary presidents were KIM, Il Sawng, a Korean general who fought with the Chinese, and who is now in N Korea; MO, Tek Ton (MAO, Tze Tung), a leader of Communists in CHINA, now said to be engaged in conference with Generalissimo CHIANG KAI SHEK; and a man named "LEONCHIO", said to be Russian Secretary of Far Eastern Affairs. A resolution was also passed to drive out two alleged "class traitors of the working men", LEE, Yawn (LEE, Yung) and TCH'WAY, Ik Han (CHOI, Ik Han), both previously considered to be among the leaders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This resolution indicates that there is some dissension in the party.


    G-2 Weekly Summary #9 (1945-11-13) : 조선노조 전국평의회 결성대회(朝鮮勞組全國評議會結成大會)에서 김일성을 명예의장으로 추대
    G-2 Weekly Summaries, Sept 9, 1945 - December 30, 1945 p.126

    b. Conference of All-Korea Council of Labor Unions. In SEOUL on 5 and 6 November, a conference was held by representatives of labor unions from cities throughout Korea. This meeting is considered important because of the large number of Koreans who are members of labor unions. The conference turned out to be more of a Communist political meeting than anything else. It resolved to support the Korean Communist Party. It elected as an honorary president Mr. PAK, Hun Yung, President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and adopted a resolution to send a message of thanks to Mr. PAK, who was described as "the leader of the movement to unite the working classes, and a great patriot." It also elected as honorary presidents Mr. MO TEK TON, leader of the Communists in China, Mr. LEONCHIO, who is reported to be the Russian Secretary for Far Eastern Affairs, and Gen KIM, Il Sung, a Korean officer who recently returned to HEIJO (in Russian occupied Korea) from MANCHURIA where he fought with the Chinese against the Japanese. The meeting closed with cheers of "Mansei" for the All--Korea Council of Labor Unions, for International Laborers, for Mr. PAK, for STALIN and for the Korean People's Republic (CHOSUN INMIN KONGHWA KOOK)

    당시 국내 신문은 11월 5일의 조선노조 전국평의회 결성대회(朝鮮勞組全國評議會結成大會)에서 박헌영, 김일성(金日成), 모택동, 레온치오(LEONCHIO) 4인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했다고 보도했으나, 김일성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음.


  5. G-2 Periodic Report # 60 (9 Nov. 1945)
    G-2 Periodic Reports, Nov-Dec 1945 p.39

    5. Summary of Intelligence in Adjacent Areas,

    a. Personalities N of the 38th parallel.
    (1) KIM, Il Sawng .. A Korean general, who fought with the Chinese against the Japanese in MANCHURIA, is reported to have arrived in P'YONGYANG (HEIJO; (880.- 1820) on 17 Oct 45. He is said to have made a speech at a recent meeting attended by 15 representatives of the Nationalist Party and a like number from the Communist Party. As a result of his speech and other business transacted at the meeting, it is alleged that the two parties have been drawn more closely together. KIM, along with three other prominent Communists, was elected an honorary president at a conference of Korean labor unions held in SEOUL on 5 Nov. This conference was attended by 505 representatives from throughout Southern Korea.

    (2) CHO, Man Si -- This man is reported to be the head of the Korean government established N of the 38th parallel, and also to be the Nationalist Party leader for all Korea. It is claimed that he is one of the three most respected men in Korea, and he is referred to as the "figure head" of the government. He is reported to be an elder in the Presbyterian church.


  6. G-2 Periodic Report #63 (1945-11-12) 의 Kim Nichi Sei (金日成) : 1945년 11월 12일
    전주 청년자살동맹의 지도자는 Kim Nichi Sei (金日成)인데, 현재 한국의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 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으나, 러시아로 도주했다고 함.

    3. Counterintelligence.

    (a) Recent activities of the Young Men's Suicidal Alliance (KESSHI SEINEN DOMEI) in CHONJU (1010-1430) indicate that this is an underground organization with terroristic intent. Its members have recently, been beating and robbing Japanese civilians. Koreans have been warned not to deal with the Japanese and those found doing so have been assaulted. The leader of the Alliance is believed to be KIM, Nichi Sei, reported at present to be in Russian occupied Korea. This man formerly attended the Japanese Military Academy but deserted and fled to Russian. Although not reported as being active in CHONJU, the Young Men's Association, an affiliate of the Korean People's Republic, has created similar disturbances in several other towns throughout southern Korea.

    (b) Further interrogation of CHOI, Syung Im, apprehended as the leader of four men who engaged in a gun battle in a cafe in SEOUL on 6 Nov, disclosed that the men were members of a Communistic gang. CHOI stated that the purpose of the gang was to engage in robbery in order to obtain funds with which to buy weapons. These were to be used to assassinate leaders of the Korean Democratic Party and Dr. RHEE, Syng Man. The gang was partially separated on 15 Sep 25 when two Communist members also bearing the name of CHOI, left for the Russian controlled half of Korea. At the time CHOI, Syung Im remained south of the 38th parallel in order to recruit more members for the gang. He expected the two absent members to return to SEOUL from Northern Korea in the early part of December.


  7. 평양에 출현한 32세의 북한 김일성은 유명한 다른 사람 행세를 함. : 1945년 11월 13일
    G-2 Weekly Summary #9 (13 Nov., 1945) : 북한 김일성에 관한 미군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김일성을 가짜로 명기한 최초의 문헌임.
    Politics

    It is the Russian policy to have Korean Communists dominate the government North of the 38° parallel. The Communists have a majority of the members on the Committee of each province. There are more democrats on the Committee in HEIANNANDO Province than in any of the others. The original organization there was composed of 30 members--17 Communists and 13 Democrats. Later, each party added a woman member. Now the Committee is divided 18 to 14. In the other provinces there are only about three Democrats on each committee.
    Because of the actions of the Communists, the people are very much opposed to Communistic organizations. The Russians, realizing they were meeting considerable opposition on Communism, approached Mr. CHO and suggested that he form a democratic party. Mr. CHO, Mr. HAN, and the other Democrats, felt that the Russians would never let them get far with a Democratic party and determined that it was better not to form a party than to form a party with no future. So they did not form a party. In the middle of September, a man had attempted to form a nationalist party, but the Russians ordered it dissolved. Now the Russians have authorized the party to start up again, but it has not done so. In response to the Russians' question as to why only one party (the Communist Party) existed, Mr. HAN's group maintained a passive attitude.

    About 18 October, a person thought to be a subordinate of Gen. KIM, Il Sung, a Korean general who fought with the Chinese, arrived in HEIJO and announced that he was KIM, Il Sung. This man is about 32 years of age. The real KIM, Il Sung, is believed to be about 58 years of age. This young Gen KIM requested an audience with the Committee. It was granted, and he stated that there must be a democratic form of government, even though there were many Communists. On 20 October, the Russians permitted the Democrats to have a public demonstration. The Soviets built Gen KIM up as a great Korean patriot. At this gathering, Gen KIM proposed to form a Democratic Party and not to interfere with the Communist Party which was all set up. Mr. HAN feels that Gen KIM might be a Communist and be professing democratic beliefs just to get into a position of power in the Democratic Party and thereby set up Communist control of the same. Gen KIM proposed to Mr. CHO that they join forces. Gen KIM stated that he was leader of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in MANCHURIA. He said that his Army was composed of many parties but that he wasn't a member of any of them. Although Mr. HAN expressed his suspicions about Gen KIM, Mr. CHO decided to work with the general to unite all organizations in N KOREA except Communistic groups into a Democratic Party. Since 20 October, the Korean Democratic Party (CHOSUN MINCHOO DANG) has been forming. Mr. CHO was to be leader and Gen KIM second-in-command. Shortly after 20 October, an organization meeting of the Democratic Party was held. Gen KIM was sick and sent a representative to the meeting. This representative professed a high regard for Communists and Russians. This caused considerable discussion. Gen KIM's representative proposed that problems be addressed to RUSSIA first, to the US second, and to CHINA. third.

    Mr. CHO proposed that the problems be addressed jointly to all the allies. Gen KIM's representative next proposed that one of the planks of the party platform should be that all Japanese collaborators should be required to resign immediately from official positions. Mr. CHO stated that he felt that this could be effected without being made a part of the platform. Later in the meeting Gen KIM's representative became displeased at the statement that the atomic bomb caused the defeat of JAPAN and he contended that the Russians contributed just as much. These things made Mr. CHO and Mr. HAN suspect Gen KIM to be trying to stir up strife in the Democratic Party; also communists were saying that Mr. CHO would become the tool of Gen KIM. On 26 October another meeting was held, and Mr. CHO and Gen KIM reached an agreement on the things which had previously caused dispute. It was also agreed that Mr. CHO would be leader, and that Gen KIM would not hold office, but would be an adviser and send two representatives. Mr. HAN left HEIJO on 2 November and believes that the Democratic Party was officially organized on 3 November.


  8. 임시정부 선전부 안우생(安偶生) 비서의 1945년 12월 5일 인터뷰 : 동아일보 1945년 12월 6일
    지금 평양에 와 있는 32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문(問): 김일성씨(金日成氏)와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관계(關係)는 어떠하며 최근(最近) 평양(平壤)에 와잇는 삼십이세(三十二歲)의 청년(靑年)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어떤 분인지?
    답(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만주(滿洲)서 활동(活動)하엿슴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와는 아무 연락(連絡)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지금(至今) 상당(相當)한 고령(高齡)인데 평양(平壤)에 와 잇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
    고 답했다. 유명한 김일성은 상당한 고령이고, 평양의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9. 미군정청 "주간정보요약 제14호"(1945.12.18)의 북한 김일성 기록 : XXIV Corps G-2 Weekly Summary No. 14, (18 December 1945), p. 5.
    G-2 Weekly Summaries, Sept 9, 1945 - December 30, 1945 pp.188~189.

    서울의 전국청년연맹 집회에 참석한 평양민보(平壤民報) 편집인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이 김일성에 대해 한 말을 기록했음. 당시 한재덕도 김일성의 정확한 실체는 모른 채 그를 영웅화하여 선전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3) All-Korea Farmers' union. Some 650 representatives of farmers' unions throughout KOREA convened in SEOUL 8-10 December. These men claim to represent unions having a membership of approximately 3,000,000 and to be representative of 17,000,000 Korean farmers. The conference was definitely political in nature. Mr STALIN and Mr PAK, Hun Yung, leader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were elected honorary presidents of the conference. Leaders of the Korean People's Republic, Korean Communist Party, Korean People's Party,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made speeches. The conference passed a resolution that a message of thanks be sent to Mr KIM, Moo Chawng, leader of the Korean Independence Alliance in YENAN, and General KIM, Il Sawng, a Korean patriot who fought with the Chinese against the Japs in MANCHURIA and who is now one of the important Korean political leaders in Russian-occupied KOREA. However,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move of the conference was the decision to support the Korean People's Republic.

    (4) All-Korea Youth's General League: This organization, consisting of representatives of youth groups from throughout KOREA, met in SEOUL 12-13 December. This conference also was political in nature. The following were elected honorary chairmen: Mr PAK, Hun Yung, of the Communist Party, Mr LYUH, Wun Hyung, of the People's Party; Mr KIM, Moo Chawng, of the Korean Independence Alliance of YENAN; General KIM, Il Sawng, of N KOREA; and Mr MITCHELSON, Chairman of the World's Youth Meeting recently held in LONDON. The League pledged full support to the Korean People's Republic.
    On the second day of the meeting, Mr HAN, Chai Dawk, the editor of the People's News of P'YONGANG (880-1820), principal city of N KOREA, and representative of PYONGAN-NAMDO Province, told a story about General KIM, Il Sawng. According to Mr HAN, General KIM, who is 32 years old, fought against the Japs in MANCHURIA. He did many heroic deeds, and is highly respected in KOREA. It is said that Marshal STALIN recognized his distinguished services in the fight to destroy Japanese Imperialism, and called him to MOSCOW to award him a modal for his work. It is reported that upon presenting the medal STALIN said, "There is no country that will reward you for your distinguished service to your country; therefore, on behalf of your country, I honor you and award this 'Red Medal'." General KIM was further described as a man who did not want KOREA to become wholly a left-wing nation and, therefore, was instrumental in establishing the Democratic Party in P'YONGYANG.
    During the war, General KIM organized a Korean Volunteer Army, a guerrilla organization, in MANCHURIA. It is reported that this army was supplied by the Russians, and that General KIM was otherwise closely associated with tho Soviet forces. The activities of General KIM and his followers received considerable publicity throughout KOREA and he has the status of a legendary hero in the minds of most Koreans, though few have actually seen him.

    It appears that he is a Communist. The Russians have made him, or have permitted him to be, a political leader in N KOREA. In S KOREA, several Communistic organizations, including the All-Korea Labor Unions, the All-Korea Farmers' League and the All-Korea Youths' League, all supporters of the Korean People's Republic, have elected him as one of their honorary leaders. The publicity being given General KIM may reasonably be assumed to be for the purpose of building him up as a future potential leader for KOREA.

    The military activities of exiled Koreans were not confined to organizing resistance; they also joined existing forces. Some Koreans served as officers in the Red Army.[註 037] A sizeable contingent of Koreans, perhaps a full division, fought with the Chinese Communists.[註 038] One guerrilla leader, General Kim, Il Sawng, fought against the Japanese in Manchuria during World War II and is said to have been decorated by Marshal Josef Stalin. [註 039]

    [註 037] Ibid., p. 82. (Grajdanzev, Andrew J., Modern Korea, 1944)
    [註 038] Interview with Dr. Har, 29 September 1945. : 하경덕(河敬德, 1897 ~ 1951) ; See also XXIV Corps G-2 Periodic Report No. 13, 23 September 1945., p. 3.

    [註 039] XXIV Corps G-2 Weekly Summary No. 14, 18 December 1945, p. 5.
    XXIV Corps G-2 Periodic Report No. 13, 23 September 1945 pp.60~ .


  10. 미군정청이 맥아더 사령부(SCAP)를 거쳐 국무부 / 애치슨(Dean Acheson)에 보내는 전문 : TFGBI 81 (Dec.21, 1945) p. 5.

    ...CMA : , (COMMA) ; PD : . (PERIOD) ; PAREN : ( or ) : QUOTE (UNQUOTE) : " ; HEIJO : Pyongyang 의 일본식 발음 ;....
    A STRIKING FIGURE EMERGING IN KOREA LIFE IS KIM IL SAWNG, 32 YEAR OLD GUERRILLA LEADER IN MANCHURIA (MUKDEN[沈阳] CONSULAR POLITICAL REPORTS 1938 TO 1940 MENTION HIM FREQUENTLY AS OUTSTANDING ANTI-JAP "BANDIT" LEADER) AND NOW COMMANDER OF PEACE MAINTENANCE GUARDS IN NORTH KOREA WITH HQRS AT HEIJO. YOUTHS ASSOCIATIONS IN SEOUL ARE PLANNING TO WELCOME HIM HERE BUT IT IS DOUBTED WHETHER SUCH A PERSONAGE WILL BE ALLOWED TO LEAVE RUSSIAN ZONE, ALTHOUGH IT IS NOTABLE THAT EDITOR OF HEIJO'S ONLY DAILY PAPER ATTENDED YOUTHS CONGRESS HERE ON 12TH AS REPRESENTATIVE OF NORTH KOREA YOUTHS ASSNS. ALTHOUGH KIM WAS RECENTLY GIVEN A SOVIET DECORATION BY STALIN WITH THE MESSAGE "THERE IS NO COUNTRY TO REWARD YOU SO I WILL", HE IS SAID TO BE AN INFLUENCE AGAINST RADICALISM IN NORTH KOREA.



  11. 김종범(金鍾範, 1892~1972),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 (朝鮮政經硏究社, 서울, 1945년 12월 25일) - 1, 2집 합집 p.203
    15. 朝鮮革命運動 鬪士와 政界 活躍의 人物 略歷 (無順)

    金日成氏 (當 三十三歲, 祖 平安道人)
    氏는 露領 出生으로 籍은 蘇聯에 있다 하며 蘇聯 士官學校를 卒業하고 現在 陸軍 少佐로 있다 하며, 今次의 獨蘇戰에는 英雄的 功을 세워서 스탈린 勳章을 받았다 하며, 今番 平壤에 來到하여 曺晩植씨와 함께 朝鮮民主黨을 組織하고 蘇聯 進駐軍의 顧問格으로 政治的 工作에 大活動하고 있다.
    * 備考
    同氏에 對한 調査는 連絡不能으로 不充分함을 免치 못하였다. 그런데 年前에 間島 地方에서 大軍을 指揮하야 神出鬼沒的으로 日匪를 侵害ㆍ困難케 하여 時々로 大々的 報道가 되던 金日成氏는 그 父親 金光瑞(第二代金日成)이라 하며, 右는 三代로 그 名義를 相續中이라 한다.

    [복간본]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 제2집 독립운동과 정당 급(及) 인물 (서울, 돌베개, 1983) p.190

    김일성씨 (당 33세, 祖 평안도인)
    씨는 노령 출생으로 적(籍)은 소련에 있다 하며 소련 사관학교을 졸업하고 현재 육군 소좌로 있다 하며, 금차의 독소전에는 ××적 공을 세워서 스탈린 훈장을 받았다 하며, 금번 평양에 내도하여 조만식씨와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하고 소련 진주군의 고문격으로 정치적 공작에 대활동하고 있다.
    * 비고 : 동씨에 대한 조사는 연락불능으로 불충분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런데 연전에 간도 지방에서 대군을 지휘하여 신출귀몰적으로 일비(日匪)를 침해ㆍ곤란케 하여 시시로 대대적 보도가 되던 김일성씨는 그 ×× 김광서(金光瑞)이라 하며, 우(右)는 3대로 그 명의(名義)를 ×× 중이라 한다.

    유명한 김일성(金日成)은 김광서(金光瑞, 1888~1942)라 하고, 북한 김일성은 그 아들로 명의(名義)를 상속중(相續中)이라 하였다. 김광서가 제2대 김일성(金日成)이라 했지만 제1대 김일성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고, 북한 김일성이 김광서의 아들이라는 것은 엉뚱하다. 남한에는 1945년말까지도 북한 김일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전해진 것이 없었지만, 그를 유명한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보지는 않았다는 증거이다. 김광서를 유명한 김일성 장군으로 기록한 최초의 문헌으로 보인다.



  12. TFGBI #142, CG USAFIK to CINCAFPAC ADV, 191254/I Jan. 19, 1946 : Classified Outgoing Radios - Korean Situation, 1 Jan 1946 - 23 Oct 1946] pp.439~440 : 1946년 1월 19일
    PD : . (PERIOD) ; CMA : , (COMMA)
    THIS HEADQUARTERS HAS HAD DIRECT LIAISON WITH MR CHO CMA MAN SIK THROUGH SEVERAL INTERMEDIARIES INCLUDING THE SON OF CHO CMA MAN SIK PD THESE INTERMEDIARIES APPEAR TO BE HIGH TYPE MEN CMA HAVE CREATED FAVORABLE IMPRESSION AND INFORMATION OBTAINED FROM THEM CONSIDERED RELIABLE PD CHO CMA MAN SIK IS LEADER DEMOCRATIC PARTY FOR NORTHERN KOREA AND CLAIMS FOLLOWING HALF A MILLION MEN WHO WILL, IMPLICITLY OBEY HIS ORDERS PD HE IS KOREAN PATRIOT WHO STANDS ABOVE PARTY LEVELS AND NATIONALLY PROBABLY THE MOST CAPABLE AND STRONGEST KOREAN LEADER PD ALTHOUGH COMMUNISTS HAVE CONTROL OF GOVERNMENT UP TO PROVINCIAL LEVEL THE ONLY COMMUNIST LEADER OF IMPORTANCE IS KIM CMA IL SAWNG WHO WAS IMPORTED AND BUILT UP BY THE RUSSIANS PD COMMUNISM IS NOT POPULAR IN NORTHERN KOREA PD IF THE RUSSIANS ARE TO MAINTAIN POLITICAL CONTROL IT IS OF UTMOST IMPORTANCE THAT THEY WIN CHO CMA MAN SIK'S SUPPORT PD THE COMMUNISTS IN KOREA UNDOUBTEDLY ABETED AND SUPPORTED BY THE RUSSIANS HAVE GONE ALL OUT FOR TRUSTEESHIP OR GUARDIANSHIP AS THEY INTERPRET IT PD KNOWING THE RIGHTIST SENTIMENT IN SOUTHERN KOREA IS VIOLENTLY ANTI-TRUSTEESHIP CHO CHA MAN SIK HAS BEEN RELUCTANT TO ACCEDE TO RUSSIAN PRESSURE WHICH WOULD RESULT IN POLITICAL DIVISION OF KOREA AS WELL AS GEOGRAPHICAL DIVISION PD ON 16 JAN EMISSARY CHO CHA MAN SIK ARRIVED HERE REQUESTING GENERAL HODGE SEND INFORMATION MEANING OF TRUSTEESHIP AND ADVICE AS TO ACTION CHO CMA MAN SIK SHOULD TAKE PD EMISSARY DEPARTED 17 JAN FOR HEIJO WITH INFORMATION THAT CHO CMA MAN SIK SHOULD THROW HIS FULL SUPPORT TO ASSISTING JOINT COMISSION IN THE ESTABLISHMENT OF INTERIM GOVERNMENT AND THAT DECISIONS ON SUCH INDEFINITE MATTERS AS TRUSTEESHIP BE HELD IN ABEYANCE UNTIL DETAILS HAVE BEEN WORKED OUT BY JOINT COMMISSION PD

  13.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 김일성은 소련군이 수입해와 키우는 인물. (전설적 항일 영웅이 아니라는 의미)
    RADIOS / KOREAN SITUATION / (Outgoing)

    Rourad CA 55216 dtg 251837/1 more on Russian control Communist Party. At KyongJu (1210-1430) 14 Jan. two known communist agitators beaten after attempted robbery resulting death of one man. Survivor Choe, Hon Ni states he and partner had been sent by Gen. Kim Il Sawng along with 4 others to report to Fak Heun Yung, head of Korean Communist Party in Seoul. Men departed unspecified place in North and arrived Seoul 25 Oct. Gen Kim Il Sawng is principal Korean Communist leader northern Korea and evidence indicates he was imported and built up by the Russian Army. Chow Hon Ni states he was subordinate in party and does not know specific mission assigned. Evidence he belongs to Korean friendly party a relief organization which acts as cover for Communist activities. Further states Pak Heun Yung is head of "29th section2 an intelligence organization and of which Choe appears to be member. Choe states Pak gave him 500 yen for expenses on departure Seoul for Kyongju. This is first definite evidence of actual contact between communists in two sections Korea. Choe will be brought to Seoul for further questioning.

    CG USAFIK TO CINCAFPAC 301638, 30 Jan. 1946

  14.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명단 및 약력

    미군정 문서 G 59, Central Files, The Decimal File, 1910-63, 740.00119, Control(Korea) Series, 1946, Joint Soviet-American Korea Commission
    p.120 :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명단
    p.124 : Members of the Soviet-Sponsored "Government" of North Korea - 12 February, 1946 : 1946년 2월 9일 발족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정부"로 간주하고 있다. 위원회 구성원 모두의 약력이 나옴.
    KIM, Il Sawng, Chairman (金日成)

    Age : About 32
    Location : Руengуeng, Korea
    Education : Reported to have studied in Moscow, but does not speak good Russian.
    Politics : Communist
    Marital Status : Married, has two children

    Remarks : Is not the famous Manchurian guerilla of the same name, although for political reasons, he has been given a large buildup as a Manchurian guerilla by the Russian's, and has been awarded the Stalin medal. It is reported that he has sent his wife and two children away from Pyengyeng and has since married the daughter of Chung Paik, Seoul Communist leader.

    1946년 2월 12일에 작성된 것으로, 미군정이 북한 김일성을 가짜라고 명기한 초기 문헌 중 하나이다. 그는 같은 이름의 유명한 만주 게릴라 지도자가 아니지만, 소련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만주 게릴라 행적을 크게 부풀려 조작했고, 스탈린 메달을 수여했다고 했다. 처자식을 평양에서 멀리 보내고, 서울의 공산당 지도자 정백(鄭栢, Chung Paik, 1899 ~ 1950)의 딸과 결혼했다고 하였다.

    • G-2 Periodic Report : 1946.02.18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소식; 조만식의 구금;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p.215~216 같은 내용  : G-2 Periodic Reports, 18 February 1946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164 임시인민위원회 명단 p.166 정로 02/10 번역문 : G-2 Periodic Reports, 21 February 1946
    p.9 북한 토지개혁 법령
    p.221 임시인민위원 약력


  15. Radio TFGCG #305 ,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231800/I Feb. 23, 1946 : 1946년 2월 23일 기록 - 김일성은 가짜

    Radio TFGCG #305 ,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231800/I Feb. 1946. 1946.02.23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Radio TFGCG #305 ,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231800/I Feb. 23, 1946 : Classified Outgoing Radios - Korean Situation, 1 Jan 1946 - 23 Oct 1946 pp.324~326 (국립중앙도서관)
    4. The Chairman of the new organization is Kim, II Sawng, a Communist and reportedly a former guerilla leader in Manchuria (he is apparently not the almost legendary figure of the same name who operated in Manchuria ten years ago). The Vice Chairman is Kim, Doo Bong, a scholar well known in Pyengyang. He is a nationalist and may have espoused Communism solely as a means toward achieving Korean independence. The General Secretary is Kang, Yang Whang, a Presbyterian elder who once taught Kim, Il Sawng and is apparently an out and out Communist, although at one time he was a member of Cho, Man Sik's Democratic Party.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함.


  16.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은 민족적 영웅(民族的英雄): 박헌영씨(朴憲永氏)의 대답(對答) 광주민보(光州民報) 1946. 03. 31, 1면 1단
    美國 UP通信社 서울 特派員 호이트(Palmer Hoyt, 1923 ~ 2005)氏는 지난 二十二日 朝鮮共産黨書記長 朴憲英氏에게 書式으로 質問을 提出하였는데 이에 對하여 朴憲英氏는 다음과 같이 對答하였다고  二十七日 共産黨本部에서 發表하엿는데 要旨는 다음과 같다.....

    問: 北朝鮮 人民委員會 委員長 金日成氏를 臨時政府大統領으로 推戴한다면 共産黨에서는 이것을 承認하겠는가?

    答: 金日成將軍은 戰爭中에 抗日한 民族的英雄이며 또 그는 北朝鮮人民이 絶對 支持하고 잇으니 따라서 南朝鮮人民도 이러한 民族的英雄을 支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 共産黨으로서도 支持할 것은 勿論이다.

    박헌영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대표로 있던 이 시기에 소련이 북한 지도자로 내세워 권력을 장악해 가고 있는 김일성을 민족적 영웅이라고 치켜 세우고 있다.


    박헌영(朴憲英), 外國記者團과 一問一答 중앙신문 1945.11.29 : 김일성과 같은 의견이라고 함.

    問: 金日成氏는 政府 組織하는데 어떠한 意見을 가지고 잇나? 答: 만나지는 못 했지만 傳聞한 바에 依하면 大衆的基礎를 갓는 民族統一路線을 結成한 다음 여기에 統一 政府를 樹立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意見과 거진 갓다고 생각한다.


  17.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 Ⅰ.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72, 목록 614631, 문서철 12 > 14. 구두 정보 보고 № C-15, 1946년 4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6권
    (다) 여운형과의 회담에서 버치는 4월 5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두 후보자, 즉 조만식과 김일성이 논의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미국대표단은 조만식을 “조선의 가장 훌륭한 애국자”로 규정하며 그를 추천하였다. 소련대표단은 조만식이 친일분자이며 반소분자라고 주장하며 미국 측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만식을 거부한 소련대표단은 김일성을 천거하였다. 미국대표단은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일련의 질문을 쏟아 부으면서 현재의 김일성이 일본인들에 대항해 빨치산 부대를 이끈 진짜 김일성인지에 대해 공공연히 의심을 드러냈다.


    (마)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에서 소련대표단은 이승만과 김구를 절대 반대하고 미국대표단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절대 반대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김두봉을 부통령으로, 여운형을 국무총리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략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보인다.


  18.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 해방일보 (解放日報) 1946년 4월 8일, 9일
    아래는 이종석의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457~458 에 나오는 위 기사의 요약이다. 이종석의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의 논리는 여기서 차용한 것이 많다.
    이렿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수용할 여지가 없는 '가짜 김일성론'이 1946년부터는 광범하게 남한 사회에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응해서 좌익에서도 여러 지면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가짜 김일성'설을 통박하였다. 그중에서도 1946년 4월 8일자, 9일자 『해방일보』에 연속 실린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제하의 권용호의 기고문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기로 하자. 이 글에서 필자 권용호는 김일성에 대해서 가짜니 2세니 하는 등 횡설수설 풍설의 억측이 나오는 이유는 첫째로, 그렇게 유명한 장군이 나이가 어리다는데서 나온 평범한 해석이며, 둘째 친일파 반역분자들이 진보적 민주주의 진영에 일대 타격을 주기 위한 좋은 재료로 이를 이용하려는 야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필자가 만주에 있을 때 김일성 장군의 부대가 일본군을 보기 좋게 격파했다는 기사가 수없이 신문에 특호활자로 기재되었다. 장군의 이름과 연령이 씌어 있는데 공교롭게 나이가 필자와 연갑(年甲)인 까닭으로 언제든지 장군의 기억이 새로웠다”고 김일성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는 권용호는 조선내에서 ‘김일성 장군’을 잘못 해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먼저 “김일성 장군이 국외인 만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동만 동포들은 대개 그의 연소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50여세니 2세니 하는 말은 전혀 없었다. 조선내에서는 조선재래의 관습에 따라 연장자는 무엇이든지 안다는 우월감으로 장군을 잘못 해석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의 정치가들의 나이가 대부분 60, 70세인 까닭에 김일성 장군도 노년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일보 (解放日報)는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남한에 퍼지자 그를 옹호하는 권용호의 기고문을 2회에 걸쳐 실었다. 오늘날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기사의 논리를 그대로 빌어 온 경우가 많이 보인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 이름이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이가 많아야 한다는 점은 감추고, 이름이 유명하니까 나이가 많다고 잘못 생각했다는 등의 말로 논점을 흐리는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권용호는 또한 김일성이 김석원(金錫源, 1893~1978)과 일본육사 동기라는 말도 있지만 잘못된 것이라 했는데,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일본 육사 나왔다는 풍문을 의식해서 한 말로 보인다.


    해방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해방일보와 또 다른 극좌신문 조선인민보는 아래와 같은 북한 김일성 찬양 기사를 싣기도 했지만, 그가 항일 영웅이라는 찬양만 늘어놓았을 뿐 보천보 사건이나 구체적인 항일 전공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못하고 있다. 이들도 북한 김일성이 실제로 어디서 뭘 하다 온 인물인지 전혀 모르면서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과 동일인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방직후 좌파 언론들의 기사만 보아도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19.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 1946년 6월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Ⅰ KOREAN POLITICS AND PEOPLE - THE FIRST SIX MONTHS > The Communist Party
    In addition to this was the lengthening shadow of Kim, Il Sawng, leader of the Communist Party north of 38 degrees, believed to be impersonating the former guerilla leader who had been decorated by Stalin.[註 048]

    [註 048] Radio TFGCG #305 ,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231800/I Feb. 1946. See also TFGBI #142, CG USAFIK to CINCAFPAC ADV, 191254/I Jan. 1946 and TFGBI #176, CG USAFIK to CINCAFPAC, 30I638/I Jan. 1946.
    주한미군사에는 북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훈장을 받은 전임 게릴라 지도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믿어진다고 했다. (이 부분은 제시된 참고문헌으로 보아 1946년 6월에 작성된 것임.)


  20. <임시정부자료>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한국 현황보고 1946년 : 번역문
    <임시정부자료>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한국 현황보고 1946년 : 한문 원문 이미지
    민석린(閔石麟) = 민필호(閔弼鎬, 1898 ~ 1963)
    정. 정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후, 곧 그들이 육성한 김일성(金日成)[주: 김일성(金日成)은 동북에서 활약하던 유격대 지도자의 자손이다]을 지도자로 내세워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각지방에서는 지방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모든 친일분자와 유산계급은 배척당하였으며 태극기 게양을 금지하고 한국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남녀관계를 문란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식분자를 앞잡이로 삼아 가렴주구 하였다. 인민들은 견딜 수가 없어서 반대의 소리가 분분하다. 그러자 그들은 유화책으로 모택동(毛澤東)이 키운 김백연[(金白淵-김두봉)]을 지도자로 내세워서 인민들의 반감을 유화하고 있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자를 여전히 반동분자로 몰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 표면상으로는 북한의 정치권리가 모두 한인들 손에 장악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상 완전히 소련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모스크바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소련의 교육을 받은 자이며 조상의 이름을 이어받은 김일성(金日成)이 최근에 우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주화대표단(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은 임정이 해방을 맞아 환국하면서 1945년 11월 1일 설치한 주중 대표부이다. 민석린은 주화대표단 (駐華代表團)의 부단장과 단장 서리를 지냈으며,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 조상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라고 하고 있다.


  21. 外眼(외안)에 비췬 朝鮮(조선)의 姿態(자태) 1946.07.16 동아일보 3면
    燦然(찬연)! 三一運動(삼일운동)은 朝鮮人(조선인) 能力(능력)을 世界(세계)에 明示(명시) / 外眼(외안)에 비췬 朝鮮(조선)의 姿態(자태)
    美誌(미지)에 揭載(게재)된 國際通信社(국제통신사) 東京特派員(동경특파원) 허워드·핸들먼氏(씨)는 다음과 갈은 朝鮮政局(조선정국) 描寫(묘사)를 紹介(소개)하엿다...(중략)... ..政治的(정치적)으로 朝鮮(조선)은 左右(좌우) 두갈네로 갈려저 있다. 往年(왕년) 反日(반일) "테로"의 英雄的(영웅적) 指導者(지도자)로서 有名(유명)한 金九氏(김구씨)와 三十三年間(삼십삼년간) 華盛頓(화성돈)에서 "亡命政府(망명정부)"를 이끄러온 李承晚博士(이승만박사)가 右翼(우익)의 最高指導者(최고지도자)다. 南朝鮮(남조선)의 左翼(좌익)이라면 共產黨(공산당)과 人民黨(인민당)이 있는데 其指導者(기지도자)는 米國(미국)서도 모르고 朝鮮(조선)서도 잘 알여지지 않은 사람이다. 北朝鮮(북조선)에서는 朝鮮共產黨北朝鮮支部(조선공산당북조선지부)가 行勢(행세)하고 있으며 其首領(기수령)은 朝鮮人(조선인)의 다 잘 아는 金日成將軍(김일성장군)이다. 金將軍(김장군)은 多年(다년) 滿洲山岳地帶(만주산악지대)에서 倭政(왜정)과 싸워서 國民的(국민적) 英雄영웅)이 된 것인데 兒孩(아해)들까지 진치고 놀 때 흔이 將軍(장군)의 일음을 부른다. 右翼(우익)에서 金將軍(김장군)은벌서 죽었으니 蘇軍(소군)과 같이있는 金日成氏(김일성씨)는 "엉터리"라고 말하고 있다. 左翼(좌익)에서 하는 말은 平壤(평양)에 있는 그 人物(인물)은 眞正(진정)한 "게랄라" 首領(수령)인 同時(동시)에 大衆(대중)이 支持(지지)하는 自黨(자당)의 큰 希望(희망)이라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에 대해 우익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벌써 죽었으니 가짜라 하고, 좌익은 진짜가 맞다고 한다며 양측 주장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국제통신사 : International News Service, INS - 1958년 5월 24일 United Press (UP)와 합병하여 United Press International (UPI)이 되었다.

    Howard Marcus Handleman(1914 ~ 1994.08.10) Orbituary Washington Post August 13, 1994


  22. 1946년 8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사령부 사업보고 황해도 경무사령관이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에게 올린 보고서
    8월에 도에서 반동분자들의 활동도 관찰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1946년 8월 15일 명절 준비기간에 특히 강화되었다.

    반동행위 대부분이 남조선의 영향을 받았고, 남조선에 존재하는 다양한 도당들의 첩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례를 들겠다.
    1946년 8월 14일 야간에 안악군에서 반동적인 내용을 담은 격문 40매가 부착되었다. 격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농민들의 해충인 붉은군대와 사실상 사망한 가짜 김일성”, “농촌에서 공산주의자 강도들을 제거하자”, “70%의 세금으로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해충 김일성을 죽여야 한다.”, “김일성, 공산주의자들, 경찰이 곡물 70%를 수탈하는 방법으로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 농민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이들을 죽여야 한다. 이 수매는 붉은군대를 위한 것이다.”, “우리를 약탈하고 38도선의 개방을 방해하는 붉은군대를 보다 빨리 쫓아내자. 조선인들이여! 이 일에 동참하라” 등.
    격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관의 서명이 있었다.
    “민주청년동맹”.
    “테러분자집단”.

    “청년농민”.


  23. 미군정 문서의 "한국 인명록(Who's Who in Korea) : 여러 차례 수정 증보됨 : 1946.10.01 / 1947.03.13 / 1947.10.15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없으나, 일본 육사를 나왔다고 했고,. 해방 전 경력에 대해서는 본명과 만주의 게릴라 지도자였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것은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미군정청조차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등장한지 거의 2년이 지나도록 그의 해방전 경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면, 남북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일반인들은 그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것도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미군 기록에도 그 사건이 언급된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구도 어디서 뭘 하다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항일영웅이 있을 수 있나?

    Revised Who's Who in Korea 1946.10.01 (p.5)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KIM, Il Sung (金日成) – B. 1913; G. Japanese Military Academy, Seoul; original name was Kim, Sung Chu (Ke); “General”; guerilla leader on Manchurian border; decorated by Soviets; General Scty(Secretary), N. Korea Branch, Communist Party; chairman, N. Korea Int(erim) People's Committee, Feb 46; party merged with N. Korea New Dem(ocratic) Party [Yenan Ind(ependence) Alliance], Aug 46; co-chairman (with Kim Doo Bong), N. Korea Labor Party, Aug 46.


    Who's Who in Korea, Second Revision 1947.03.13 (p.8)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KIM, Il Sung (金日成) – B. 1913; G. Japanese Military Academy, Seoul; original name was Kim, Sung Chu (Ke); “General”; guerilla leader on Manchurian border; decorated by Soviets; General Scty(Secretary), N. Korea Branch, Communist Party; chairman, N. Korea Int(erim) People's Committee, Feb 46; party merged with N. Korea New Dem(ocratic) Party [Yenan Ind(ependence) Alliance], Aug 46; vice-chairman, N. Korea Labor Party, Sep 46; elected to Interim People’s Committee, Nov 46; reportedly would be displaced by Kim, Doo Bong were it not for Soviet support; reported to have become a Christian, Dec 46; still chairman of Int(erim) People’s Com(mittee), Jan 47.


    Who's Who in Korea, Third Revision 1947.10.15 (p.17)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KIM, Il Sung (金日成) – B. 1913; G. Japanese Military Academy, Seoul; original name was Kim, Sung Chu (Ke); “General”; guerilla leader on Manchurian border; decorated by Soviets; General Secretary, North Korea Branch, Communist Party; chairman, North Korea Interim People’s Committee, 1946; party merged North Korea New Democratic Party (Yenan Independence Alliance), August 1946; vice-chairman, North Korea Labor Party, 1946; elected to Interim People’s Committee, November 1946; reportedly would be displaced by Kim, Doo Bong were it not for Soviet support; reported to have become a Christian, December 1946; chairman, reorganized 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February 1947; representative of North Korea Labor Party for US-USSR Joint Commission meeting in Pyongyang, July 1947.


    미군정 문서 Miscellaneous Political Information on South Korea : 국립중앙도서관
    아래 두곳에 위의 마지막 판과 동일한 김일성 약력이 나오며, 가짜라는 말은 없으나, 일본 육사(Japanese Military Academy) 출신이라 하였는데, 이는 북한 김일성 아닌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경력이라고 주장되던 것이다.
    8. Biographic Sketches of Prominent Korean Political Leaders, 25 Aug. 1947 : p.102
    9. Who's who in Korea third revision, 1947.10.15 : pp.124~125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 1948년 미군정 자료, 두 가지 說 제기 연합뉴스 2009/08/13 06:45 : 기사에 언급된 1947년 9월 1일자 기록이 이 자료를 말함.


  24. Mark Gayn (1902–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의 1946년 10월 23일자 일기
    October 23, 1946 RUSSIAN ZONE IN NORTH KOREA  : pp. 378~385

    p.381 :
    Another half-mile, and we reached a huge wooden arch, decorated with flags and portraits of Joseph Stalin and Kim Il Sun, the ranking leader of North Korea. Kim is a youngish looking man of about thirty-five, with stubby hair, a determined chin, and, reportedly, the assumed name of a famous guerilla said to be dead.

    김(일성)은 젊어 보이는 사람으로, 35세 가량의 나이에, 짧은 머리에 선이 뚜렷한 뺨을 하고, 죽었다고 알려진 유명한 게릴라의 이름을 가명으로 쓴다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희귀자료도서관(Thomas Fisher Rare Book Library)이 소장한 Mark Gayn이 1950년 무렵 쓴 유고 The Background on North Korea
    Mark Gayn Papers, MS Coll. 215 / Series 5: Subject Files / Folder 10-11: The Background on North Korea, ca 1950 p.4

    I. THE POLITICAL SYSTEM

    A. Maneuvering for Political Power - 1945 to 1949 and the Rise of Kim Ilsong
    ..... The scheme that transformed this conglomerate of political forces into a coherent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began with the dramatic propulsion into major political prominence of a relatively unknown Korean who was given the alias of KIM Ilsong, a renowned hero of Korean resitance against the Japanese.

    On October 3, 1945, the new KIM Ilsong was introduced to the north Korean people by CHO Mansik as an exponent of Korean nationalism. KIM, who had returned in August as a captain in the Soviet Army and had served obscurely for several months in minor posts, was born KIM Sungchu. He had migrated to Manchuria in 1930, become a minor partisan and bandit leader and finally disappeared into the USSR in 1941 or 1942. His sudden public prominence made it quickly apparent he was fulfilling a carefully plotted role in bringing Korea into the Soviet fold.

    Mark Gayn은 Chicago Sun 지의 동경 특파원으로, 1946년 한국에 와서 유력 정치인들도 만나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취재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소련 점령지인 38선 바로 위쪽의 해주 인근까지도 방문하였다. 부인이 헝가리 사람이라 미국 입국이 금지되자 Canada에 정착하였다. 1972년에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보았으며, 북한 체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글들을 썼다.

    Vintage: North Korea Industries (1972) : Mark Gayn이 1972년 방북 당시 찍은 사진


  25. 隨錄(수록) 両頭朝鮮(양두조선) (下(하)) : 南三八(남삼팔)·北三八(북삼팔) 1946.12.29 동아일보 1면
    隨錄(수록) 両頭朝鮮(양두조선) (上(상)) : 南三八(남삼팔)·北三八(북삼팔) 1946.12.28 동아일보 1면
    隨錄(수록) 両頭朝鮮(양두조선) (下(하)) : 南三八(남삼팔)·北三八(북삼팔)
    ◇一閑齋(일한재)에서 小梧生(소오생)
    (전략).....民衆(민중)이 金日成(김일성) 金日成(김일성)하니 北三八(북삼팔)은 金日成(김일성)을 세웟다. 假(가)ㅅ字(자)거니 眞字(진자)거니 그것은 問題(문제) 아니다."金日成(김일성)"이란 이름미테서 "꿩"만 잡으면 "매"다. 이리하야 北三八(북삼팔)에는 제法(법) 主軸(주축)이 섯다. 不亦是乎(불역시호)아? 重慶(중경)에 있던 "臨時政府(임시정부)"가 還都(환도)하였다. 美軍政(미군정)은 軍用機(군용기)를 動員(동원)하야 方便(방편)을 도왓다. 굉장한 努力(노력)이었고 賢明(현명)한 方針(방침)이었다. 그리하야 伊時(이시)의 光景(광경)은 어떠하엿던고? 上下民心(상하민심)이 壓倒的(압도적)으로 歸一(귀일)되엿었으니 그는 大義(대의)와 名分(명분)이 섯던 까닭이였다. 그러나 南三八(남삼팔)은 이를"去勞(거노)"하였다. 權力(권력)없는 情勢下(정세하)에서 去勢(거세)까지 當(당)하고는 날(飛(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어서 無爲(무위)의 오늘에 이르럿다.....(후략)

    소오(小梧) : 설의식(薛義植, 1900~1954) - 해방 후 동아일보 주필과 부사장을 지냄. 구한말의 선각자 오촌(梧村) 설태희(薛泰熙, 1875∼1940)의 차남. 6.25때 월북한 문인 설정식(薛貞植, 1912~1953)의 형.

    소련군이 데려와 소련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북한 김일성을 마치 민중이 원해서 권력을 잡은 것처럼 말하고, 북한은 제대로 자리가 잡혀가고 있으니 김일성이 가짜든 진짜든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조의 글로, 남한과 미군정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중진 언론인이 당시 북한이 돌아가는 내막과 실정은 모르고, 그들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듯하다. 동생 설정식이 6.25 때 자진 월북한 것도 형의 북한에 대한 이런 호의적인 인식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월북한 설정식은 이용만 당하다 곧 처형되었다.
    설의식은 1948년 4월 18일 총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108 문화인 성명 (文化人 聲明)" 발표를 주도하기도 했다.[3]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갔던 인사들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돌아와서도 대한민국 건국에는 불참하고 비판만 하다 김구는 1년 뒤 암살 당하고, 김규식 외 다른 대다수 요인들은 6.25 때 납북되는 등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108 문화인 성명에 이름이 들어있던 유진오(兪鎭午)이관구(李寬求)는 서명한 일이 없다고 했으며, 그런 사람이 많을 거라고 하였다.[4]


  26. 1947年 조선연감(朝鮮年鑑) : 서울 朝鮮通信社, 1946년 12월 1일 발행
    政界要人錄 p.362 (366/410)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十六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今次 蘇獨戰에 參加
    陸軍少佐로 昇格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 責任者 被任
    北朝鮮共産黨 中央責任秘書 就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任時人民委員長


    1948年 조선연감(朝鮮年鑑) : 서울 朝鮮通信社, 1947년 12월 1일 발행

    政界人名錄 金日成 : p.459 (465/503)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七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後 蘇獨戰 參加
    陸軍少佐 昇進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共北朝鮮分局 責任者 等 歷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人民委員會 委員長
    김일성의 진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가 중국공산당원으로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적군사관학교를 나오고, 소독전(蘇獨戰)에 참가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에 대해 당시 남한에 알려진 정보의 한계를 보여준다.


  27. 言論(언론)의 言論(언론) 1947.03.02 경향신문 2면
    맨 처음 나오는 함상훈(咸尙勳, 1903~1977)의 글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 하진 않았으나 모르는 인물이라 하고, 백두산록에서 게릴라전을 했다는 것만으로 북조선 5도의 영도자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함.
    北朝鮮人民委員會(북조선인민위원회) 委員長(위원장)이란 金日成君(김일성군)이 대체 얼마나한 革命運動(혁명운동)에 貢獻(공헌)이 있었으며 또 政治的(정치적) 力量(역량)이 있관대 北朝鮮五道(북조선오도)를 總指導(총지도)하는 責任者(책임자)가 되었으며 年老(연로)한 金枓奉氏(김두봉씨)가 그의 補助役(보조역)으로 副委員長(부위원장)이 되었는가? 듣건대 金日成君(김일성군)은 當年(당년) 三十三歲(삼십삼세)의 靑年(청년)으로 白頭山麓(백두산록)에서 日本軍隊(일본군대 )와 게릴라戰(전)을 한 勇士(용사)라고도 하고 獨蘇戰線(독소전선)에서 偉功(위공)을 이룬 軍人(군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解放直前(해방직전)까지 三千萬(삼천만) 朝鮮民族(조선민족)의 귀에는 익혀 듣지 못하던 人物(인물)이오 白頭山麓(백두산록)에서 게릴라戰(전)을 했다는것 만으론 아무리 地方人材(지방인재)가 貴(귀)하다 하지만 北朝鮮五道(북조선오도)의 領導者(영도자)로서 自他(자타)가 認定(인정)할 수 없다.


  28. 김일성은 북한에 고등 인물 국민보 1947-06-18
    서울 11일, 국제통신사 리취씨의 보도에 의하면 소련군정의 인민위원장 김일성(金日成)장군은 최고인물이라. 김장군은 해방 이전에 만주국계선(滿洲國界線)에서 일본수비대와 경찰서를 습격하는데 가장 유명하던 그 사람인 듯하나, 그러나 지금 북한인민위원장인 김장군은 30미만의 청년인즉 만주국경을 습격하던 김장군이 될 수 없다고 의심한다. 혹은 의심하기를 현재 인민위원장 김씨는 북한노동당(北韓勞動黨)의 회장인 김두봉(金枓奉)씨가 아닌가한다. 김씨는 본래 신안(연안 : 延安)의 조선인지도자로서 북한에 들어와 작년 8월에 그곳 공산당(共産黨)과 신민주당(新民主黨)을 합동하여 노동당으로 조직하였는데, 북한에서 가장 유력한 정당이라. 김두봉씨는 전쟁시기에 신안에서 조선인지도자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유명한 학자인 즉,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서 장차 북한의 정당들과 문의할 때에 응당 김일성・김두봉 양씨를 청할 것이오, 조만식(曺晩植)씨를 청할 듯 하다. 조씨는 조선의 간디(M. Gandhi)라고 하며, 비폭력항일운동을 계속한 위인이라 소련측에서는 그를 원치 않으나, 미국측에서는 조씨 의견을 들어보기 원한다. 조씨는 장로교인이며 청년회의 간사 중 일인으로 조선종교계의 지도자인고로 신앙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넓게 잡아 말하면 남한 좌익파는 부분이 없고 오직 우익파에서 3파로 나뉘었는데, 이 파는 큰 세력을 가졌으나 제3파는 명칭뿐이다. 남한에 공산당과 기타 좌익 2파를 합하여 남한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조직하였는데, 이 노동당은 좌익 각 사회 단체들과 농민・부녀・노동자・청년단체들을 망라하여 일당을 구성한 단체로 매우 유력하다.

    국제통신사(INS) John Rich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여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유명하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John Rich (August 5, 1917 – April 9, 2014) (war correspondent) : 1947년에는 INS 동경 특파원이었고, 한국전 당시 종군기자였다.
    국제통신사 : INS (International News Service) - 1958년 UP와 합병하여 UPI가 됨.



  29. 평양(平壤)에 반탁(反託) 데모, 소련군 기관총 난사(蘇軍機關銃亂射), 대동강수(大同江水)는 혈해화(血海化): 원성(怨聲)에 싸인 위조장군(僞造將軍) 김일성(金日成) 현대일보(現代日報) 1947년 7월 8일자 2면 1단
    위조장군(僞造將軍) 김일성(金日成)이란 제목으로 그가 가짜임을 드러냄.


  30. George M. McCune(1908~1948), "The Occupation of Korea", Foreign Policy Reports v.23, n.15, (October 15, 1947) p.191.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 인도 국립공문서관(National Archives of India)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pp. 144~150.
    George M. McCune은 평양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으며, 북한 김일성을 항일영웅이라 했는데, 아래 글을 쓸 당시는 그가 미국에 있을 때라 한국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진 자세한 사정은 잘 몰랐을 것이다.
    This indirect method, however, did not mean that the Koreans were not completely subject to Soviet policy, for even though there was no formal military government, the political officers attached to the Russian command exercised final authority on all matters. Under Soviet methods of propaganda and press control, however, the “revolutionary” aspects of Korean liberation were associated with the establishment of people's committees and of the pro-Soviet regime. A former guerrilla leader, Kim Il Sung, called “the hero of the national-liberation movement,” was made head of the state. All those who showed signs of noncooperation were branded collaborators and traitors of the Korean people.

    아래는 그의 사후에 미완의 유고를 보완하여 간행한 것이다.
    George McCune(1908~1948), "Korea Today" (Harvard Univ. Press, 1950) pp.51~52.

    A hierarchy of “People's Committees" composed of Korean laborers, farmers and political organizers was soon set up with top control exercised by the Russian command. On February 9, 1946, a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for North Korea was established in place of the Executive Committee as the central governing organ, and the various political parties (Communist, Democratic, and Independence) were united in a single New People's Party. An all-Korean “cabinet" was formed, beaded by Kim Ilsung, a famous Korean Communist and revolutionist who had been operating in Manchuria for a number of years. No military government administration as such was established by the Russians, although the Soviet command and the political officers attached to it maintained a close watch over their Korean protégés.


  31. 청총담(靑總談), 괴뢰 수령 김일성(傀儡首領金日成) 스타―린 양자(養子)? 현대일보(現代日報) 1948.02.20
    "한국이 모르는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자"라 하여 그가 미지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줌.
    청총담(靑總談), 괴뢰 수령 김일성(傀儡首領金日成) 스타―린 양자(養子)?
    청총(靑總) 선전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북조선민주인민공화국 선포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다지 새삼스럽게 생각할 여지도 없다. 흑통(黑桶) 백통(白桶)을 놓고 총(銃) 들고 선거한 것이 이에 정체이며 한국이 모르는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자는 슬라부족(族)인지 한국으로서 스타린 양자(養子)인지 세계 침약의 마수 공산주의자의 상투적인 만행을 보아 전인류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청총(靑總) = 청년조선총동맹 (靑年朝鮮總同盟)



  32. 고준석(高峻石, 1910 ~ ?) 지음, 정범구 옮김,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pp. 220~221
    고준석이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갔을 때 가까운 옛 동지 임해(林海, 1900~1962)에게 이북 지도자들에 관해 알려달라고 하자 임해가 오기섭(吳琪燮, 1903-?)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서를 당 하부 조직에까지 배포했다가 자아비판을 당했다는 말을 함. 《출처: '가짜 김일성' 설은 박헌영이 원조? 프레시안 2012.02.27》
    "박헌영 파인 오기섭이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였던 당시부터 분파주의 활동을 하여 김일성 동지를 가짜라고 하는 문서를 당 하부조직에까지 유포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요구당했는데, '나는 조선의 트로츠키스트입니다. 이것을 자기비판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오기섭에게 김일성 동지가, '지금의 오기섭 동지의 말은 자기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비판이란 것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쁘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힐책했습니다. 그로부터 황해도 도 당부 책임자(이 동지는 김일성 동지와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가 일어나서, 수첩의 페이지를 뒤적이며 김무정 동지가 모월 모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수많은 구체적 사실을 들어 김의 분파주의 언동을 지적하며 자기비판을 요구했습니다. 김무정이 박헌영 파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구체적인 분파주의 언동이 폭로되었으므로 이 마음이 약한 장군은 시종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고준석은 일제시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해방 전후 한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의 방북 당시 북행에 동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북한으로 가지 않고 6.25 이후 일본으로 밀항하여 거기서 살았다.
    고준석(高峻石, 1910 ~ ?)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
    임해(林海,1900~1962) : (蘇聯서 成長, 蘇聯派) 五六년 十二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連絡部長. 五八년 九월부터 六○년 八월까지 貿易相. 六一년 九월 農業相. 同년 十월 解任休職.



  33. 美군정 문서 Korean Personalities in North Korea : 1948년 8월 1일자 : p.39
    G-2, 1 Aug. 1948, "Who's who of Korean Personalities in NK"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 1948년 미군정 자료, 두 가지 說 제기 연합뉴스 2009/08/13 06:45 : 이 기록을 처음 발굴 소개한 기사. 1947년 9월 1일자 기록은 위의 15번 자료를 말함.
    KIM IL SUNG

    CHAIRMAN OF THE NORTH KOREA PEOPLE'S COMMITTEE : KIM’s real name is KIM, SUNG JOO, born in 1911 in the village of MANKYUNG-DAI, TAIDONG Gun, HAMGYONG NAMDO; in1924, KIM SUNG JOO’s father, the brother of the famous guerilla fighter – KIM IL SUNG, took the boy to China; in 1929 or 1930 the boy joined his uncle’s guerilla band on the Korean-Manchuria border; in 1941 the group entered the USSR; the original KIM, IL SUNG at that time a man of 55 or 60 died from the effects of long exposure; his nephew was either ordered to or himself asked to assume the name of the famous fighter; KIM attended a Soviet Army officers’ school at KHABAROVSK and attained the rank of Captain in the Soviet Army; KIM is reported to be brilliant, calm and self poised; when he deals with business he grasps and settles the point immediately; he is a great leader, having both civil and military virtues -- he wears civilian clothes -- and speaks Russian.
    He took official part in the MAY DAY celebration in PYONGYANG and one of the ten men proposed by the Soviets for the Interim Government,

    Another report is that KIM was one of the Koreans who went to Siberia for Soviet training - when the Soviets sent some of these Koreans to Europe in 1943, KIM may have accompanied them – the prevailing story is that KIM returned to Korea after the war and became leader of the Communist government in North Korea and leader of the Korean Volunteer Army in Manchuria – he has been the leader in name only – KIM, IL AM being the actual leader.


  34. 최태응(崔泰應, 1917-1998), 金日成氏에게 : 國民이 呼訴하는 書翰 『大潮』 1949년 4월호, pp.37~40
    實上 金日成 將軍이라면, 어떻든 그 이름이 떨친 바 武勇談보다도 오래된 歷史性이 노상 우리의 認識 속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勿論 쏘련의 한개 走卒인 同時에 먼저 나이에 있어서 三十을 갓 넘은 애송이 金日成이인 당신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問題는 次置하드라도 처음 當身이 平壤에 나타나서 무었보다도 祖國에 돌아온 人事와 얼러서 그럴뜻이 述懷한 그 歸還者의 心情을 듣고 나는 가장 솔깃했던 사람입니다.

    뒤이어 당신이 城밖에 있는 작은 村落에서 南浦사람 李某의 山直이로 늙은 당신의 祖父母를 찾고, 感激에 넘첬던 情景에서 나는 더욱 당신에 對한 期待와 信望을 두텁게 했던 사람입니다.
    최태응(崔泰應, 1917-1998), (꽁뜨) 어느 날의 김일성 동아일보 1959년 06월21일 6면 1단


  35. 김일성처 병사(金日成妻 病死) 민주중보(民主衆報) 1949-09-25 : 1면 10단
    기사 이미지 보기
    김일성 처(金日成妻) 병사(病死)
    <서울 二十三日發 로이타 合同> 23일(二十三日) 밤 평양방송(平壤放送)에 의(依)하면 북한 괴뢰집단 수상(北韓傀儡集團首相) 김일성(金日成)의 처(妻)가 병사(病死)하였다 한다. 그런데 북한공산당(北韓共産黨) 지도자(指導者) 김일성(金日成)은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 점령(占領) 당(當)하엿을 때 항일전(抗日戰)을 전개(展開)한 위대(偉大)한 한국(韓國)의 애국자(愛國者)의 성명(姓名)을 사칭(詐稱)한 것이다.


  36. Andrew Roth (1919 ~2010), "Communists in North Korea" : Manchester Guardian Weekly 13th Oct. 1949
    FO 371/84076, Political situation in North Korea: supply of arms; military position; trade with communist ports; Russian naval basis in North Korea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
    p.14 좌 하단 ~우 상단 : 김일성이 가짜설이 나돌았으나 진짜가 맞다고 김구가 작년에 확인해 줌.
    Andrew Roth (1919 ~2010), "Communists in North Korea" : Manchester Guardian Weekly 13th Oct. 1949

    Hong-Kong, September :..... The Soviets have also had more effective local allies. Instead of the aged and clique-ridden exiles the United States has imported, the Soviets have had a much younger, more dynamic and more loyal group. Stocky, 37-year-old General Kim Il-sung is the most famous hero of the anti-Japanese resistance. So legendary is his fame that the South Koreans have alleged that he is the spurious substitute for a dead hero. His authenticity was, however, verified by Kim Koo and another veteran revolutionary last year.

    Kim Il-sung has a history like Tito’s up to a point. He formed his first guerilla group in 1932 in Manchuria, when still 19. This grew, under the most ruthless conditions, from thirty to three thousand young Koreans. Their greatest feat was a raid into North Korea in 1936 in which they killed almost 200 Japanese and held a small town for a few hours, parading the Korean flag. Exaggerated stories of this feat spread rapidly over Korea, spurred by mounting Japanese rewards for Kim’s capture. Repeated reports of his death later contradicted, produced the legend that he was immortal. It is uncertain when he became a Communist or whether he visited the Soviet Union before his return to North Korea in 1945. But he is reported to have begun his first public speech with thanks to the Soviet Union and Marshal Stalin.

    위 Andrew Roth 기자의 1949년 9월 홍콩 발 기사는 김구와 또 한 사람이 작년에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확인해 주었다고 하였다. 김구는 남한에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 당시 북한에서 한 말일 가능성이 있다. 공산화에 성공한 중공의 시각이 기사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일성의 항일 전적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어 북한 측 정보를 얻어 쓴 듯하다.

    김구와 같이 북행했던 김규식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金鎭東) 증언 : "金日成(김일성)이는 가짜라는 말도 있고 獨立(독립)운동 당시 만나본 일도 없고. 金枓奉(김두봉)은 잘 알지요. 아버님은 金枓奉(김두봉)과의 協商(협상)이 가능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셨어요."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7>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7) 金奎植(김규식)의 心境(심경) 1971.10.16 동아일보 4면


  37. 미 CIA 문서 : "THE IDENTITY OF KIM IL SUNG" December 12, 1949
    CIA “김일성 추정 인물, 학창시절 살인 저질러”...과거 행적 담은 기밀문서 확인 VOA 2017.11.8
    CIA의 '김일성의 정체' 기밀문서 공개 …"김성주가 이름 바꿔…학창시절엔 친구 살인" 조선닷컴 2017.11.08
    해제된 CIA 기밀 "김일성, 고등학교 때 친구 살해" - 중앙일보 - 조인스 2017.11.08
    "THE IDENTITY OF KIM IL SUNG"

    Who is Kin Sung-ju (Ueda: 12380, 3610, 4871), who presents himself as Kin Il Sung (12380, 4446, 3610)? The top-ranking traitor, Kim Sung-ju, went to Manchuria with his parents at the age of 14. While attending a Chinese high school in Kirin, he lost his parents. Needing money, he stole it from his classmates, but once he was caught by one of them. Fearing possible disclosure, he killed his classmate. He then immediately escaped to Lung-ching in Chien-tao. While there, he decided to go to the Soviet Union, but he needed money. Re succeeded in meeting a man named Choi, who took him to Ha-erh-pin. Kim killed Choi for his money.

    Kim then went to eastern Manchuria where he wandered around until he met Li Li-san, the notorious Chinesse Communist, who was being pursued by Chiang's army. Kim Sung-ju, now 18, became a member of the Chinese Communist Youth Group. Li Li-san discovered him to be extremely reliable in executing drastic measures. Kim was immediately accepted into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ere was actually a General Kim Il Sung (12380, 4446, 3610), a graduate of the Japanese Military Academy, who, in l919, began fighting the Japanese with headquarters somewhere in the Paektu Mountains. This general, known for his brilliant military strategy, suddenly disappeared. In October 1931, Li Li-san had Kim Sung-ju's name changed to Kim Il Sung (Ueda : 12380, 1, 4499) and made him commander of a guerrilla unit. He was sent to the Paektu Mountain region where the real General Kim Il Sung used to operate.

    Kim Sung-ju, now as Kim Il Sung, began his campaign against those who refused to accept the Communist doctrine. His campaign slogan was, "This is a fight for the laboring masses." He extended his area of operations to all of Chien-tao. His actions were brutal and inhuman, but very pleasing to Li. In 1938, Kim was made commander of the Second Army of the CCF to fight the Japanese, and in 1942 he was made a high official of the CCP. Kim was known for his brutality even among his Chinese comrades, and by the late fall of 1942 all but five of his followers left him.

    By this time, Stalin heard of Kim Sung-ju, alias Kim Il Sung. In November 1942, Stalin invited him to come to the Korean, section of the Far East Department of the Communist Headquarters Branch in Khabarovsk, where Kim received his political training under the direct supervision of Shtikov, chief of the Korean section, and later chief of the Soviet Occupation Army, in Pyongyang. Thus, Kim received very intensive training in Communism for 3 years, until the end of World War II. Shtikov's job was not only to teach Kim Soviet history and Leninism-Stalinism, but also to work out plans to place him in a strategic position in postwar Korean politics. In short, Shtikov's main job was to "convert" Kim Il Sung (Ueda: 12380, 1, 4499) to Kim Il Sung (Ueda: 12380, 4446, 3610) in 3 years.

    Kim is neither brilliant nor adequately educated, but he has proven himself highly acceptable to Stalin. The Japanese surrender was a golden opportunity for both Stalin and Kim to Communize Korea. It was at this time that Stalin ordered Kim Sung-ju to assume the identity of the "disappeared“ General Kim Il Sung (Ueda: 12380, 4446, 3610). In November 1945, Stalin appointed Kim Secretary-General of the North Korean Communist Party and finally designated as the head of the North Korea regime, with specific instructions to the leaders of that regime that there should be no questions raised about Kim's identity. Kim must be accepted by all Korean Communists as the famous and patriotic general who for years fought the Japanese from the Paektu Mountains.

    - END -

    Li Li-san : 이립삼 (李立三, 1896 ~ 1967)
    <삶과 추억> 중국 공산당 지도자 리리싼의 부인 리샤 숨져 2015.05.14


1950년 ~ 1954년

  1. 조영암(趙靈巖, 1918~ ?) 著, 북한일기(北韓日記) (서울, 三八社, 1950년 3월 25일) p.56.
    김일성이 長白山부근이나 通化縣 부근을 드나들면서 일본경찰의 국경수비대를 괴롭힌 것은 그것도 훨씬 옛날의 일。지금 겨우 30이 될까 말까하는 김일성의 출현은, 전 북한동포의 疑惑과 注視의 과녁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가짜 金日成이라고 판단한지 오래다. 얕은 이마의 주름, 三白眼, 부자연스러운 코, 오그라든 귀, 그가 어째서 졸지에 영웅이 되어버렸다는 건가? 모두가 수상해하면서도 감히 가짜 김일성이라고 입에 올릴 수가 없다. 어느 벽에 스파이의 눈이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2. 미 국무성 작성 북한 군사위원히 위원 약력 : 1950.06.27 (미 국무성이 영국에 넘겨준 자료)
    Military Committee of North Korea Appointed : DEPARTMENT OF STATE / Division of Biographic Information (맨 뒤에 1950/07/27 일자가 있음)
    FO 371/84054, Report on personalities in Korea for 1949 / <FK 1012/2, Letter from Washington to Foreign Office dated 3rd August 1950: Division of Biographic Information at the State Department on the Military Committee of North Korea Appointed>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 p.11.

    북한의 7인 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는 6.25 남침 개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최고 전쟁지도부임. 남침 개시 후 급조한 것이 아니라 사전 계획에 따른 것.
    위원장 김일성, 위원 : 박헌영, 최용건, 홍명희, 박일우, 김책, 정준택
    Military Committee of North Korea Appointed

    Pyongyang radio (North Korea) announced June 26, 1950 that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has appointed a seven-man Military Committee with absolute power to rule the country during the current emergency. The members of the Committee are :

    KIM Ilsong, Chairman
    PAK Honyong CHOE Yonggun
    HONG Myonghui PAK Ilu
    KIM Chaek CHONG Chuntaek

    Following are summary biographies on the Committee members, all of whom have been holding key positions in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

    KIM Ilsong, Premier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bears the same name as the famous guerilla leader and organizer of Korean troops in Manchuria, who is supposed to have been killed in action. He is the ranking Communist figure in North Korea, and has been built up by Soviet propaganda as the national hero. He was born about 1913 near P’yongyang, and is variously reported as having received military training in Seoul, at the Whampoa Military Academy in China, and at military academies in the USSR. He is supposed to have rendered distinguished service to the Soviet cause during World War II, for which has been decorated by Stalin and hailed by Communists as the leader of North Korea. Although nominally Kim is one of the two Vice-Chairman of the NK Labor Party, he is generally regarded as the senior figure in the Labor Party, which is the key Communist organ in North Korea.

    ...


    HONG Myonghui

    ...According to a January 1950 report Premier KIM Ilsong married HONG’s eldest daughter.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유명한 만주의 게릴라 지도자의 이름을 따다 쓴다고 했음. 1950년 1월 보도에 의하면 홍명희의 장녀와 결혼했다고 함.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김일성(金日成)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金昌順 著, 歷史의 證人 (서울, 韓國亞細亞反共聯盟, 檀紀4289 (1956) : 홍명희의 둘째딸이 김일성과 결혼했다고 함.


  3. Propaganda Leaflet(3) <UN군측 삐라(3)> : Leaflet Exposing Kim Il Sung as an Imposter Masquerading under a Famous Name - 1950년 11월 : 6.25 전쟁 중에 UN군 측이 뿌린 "가짜 김일성" 삐라
    김일성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여러 가지로 한국 사람을 속여 왔고 그 중에도 제일 고약한 것은 이자가 한국의 위대한 한 영웅인 김일성으로 거짓 행사한 것이다. 이자는 절대로 김일성이 아니다. 진정한 김일성은 千八百八十五年에 나서 十五년 전에 만주에서 돌아간 분이다. 이 가짜 김일성은 一천九백十년까지는 나지도 않았다. 이자의 정말 이름은 김성주다. 공산주의자로 一千九百四十五년에 쏘련서 한국으로 보낸 자다. 이자는 김일성이라고 행세하면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으려고 했다. 얼마동안은 성공했으나 지금은 누구나 이자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정한 김일성은 한국의 적과 싸운 위대한 군사적 지도자였다. 이 김성주는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동포끼리 죽이게 만들었다. 이자는 권세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자는 모든 진정한 한국 사람의 적이다.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General Staff
    Psychological Warfare Branch

    LEAFLET : Kim Il Sung an impostor
    LANGUAGE : Korean
    DESIGNATION : Serial No. 1028
    TARGET : Communist-held cities of North Korea.
    REMARKS : Leaflet exposing Kim Il Sung as an impostor masquerading under a famous name.
    ART WORK : Two cartoons.

    TEXT : Page 1.

    The man who calls himself Kim Il Sung has deceived the people of Korea in many ways, but the most dishonorable is his pretense to be Kim Il Sung, the great hero of Korea. He is not Kim Il Sung at all. The real Kim was born in 1885, and died in Manchuria fifteen years ago. The imposter was not born until 1910. He is really Kim Sung Chu, a communist who was sent to Korea from Russia in 1945. He pretend to be Kim Il Sung in order to deceive the people into trusting him. For a time he succeeded, but now everyone can see the truth. The real Kim Il Sung was a great military leader who fought against Korea’s foreign enemies. Kim Sung Chu, however, has forced Koreans to fight against their fellow Koreans. By his selfish desire power and lack of ability, he has brought Korea to ruin. He is the enemy of all true Koreans.

    Page 2.

    Two cartoons. One shows a figure, labelled “The False Kim Il Sung” looking at his faceless reflection in a mirror, and remarking on his loss of face in Korea. The second shows the false Kim with a group of advisors. One is saying, “The people are clamoring for peace.” Kim replies, “Yes, but the Communist Party must have war in order to keep its power in Korea.”


  4. 이북(李北) 저(著), 소련의 괴뢰(蘇聯의 傀儡)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
    서울: 삼팔사(三八社), 1950년 11월 20일 (비매품) / 1952년 서울: 삼팔사(三八社)에서 재간행

    이 책을 발간한 저자 이북(李北)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수복 되자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金日成)에 대해 가계도(家系圖)와 어릴적 행동을 독립운동가 김일성(金一成) 장군의 행적과 비교하면서 진상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도 저자의 이러한 심정을 밝혀두고 있다.

    [pp.42~44] 四. 金一成將軍과 金一星

    우리의 자랑 金一成將軍은 日本 陸軍士官學校를 卒業하시었다. 蔣介石氏도 日本 陸軍士官學校에서 修業을 하였는데 氏의 三年 後輩로서 金一成將軍은 第二位의 成績으로 卒業하시었다. 恒常 民族解放의 高邁한 理想에 獻身할 것을 計劃하던 一成將軍은 銳意 學業에 全力을 다하는 한편 活動하실 때의 萬一을 生覺하시어 人相의 正確한 露顯을 두려워하셔서 記念 寫眞을 撮影할 때마다 外面하시어 卒業寫眞帖에도 正面으로 찍힌 寫眞은 一枚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日 金一成將軍을 逮捕하라는 命令이 日本官憲에게 나렸을 때에도 將軍의 正確한 人相을 알길이 없어서 甚히 苦悶하였다는 것이다. (八ㆍ一五 解放後 日本 宇垣 大將의 告白)
    將軍은 그의 天賦的인 高尙한 人格으로해서 비록 敵일지라도 日本의 有數한 將校들게에도 崇拜를 받었다.
    宇垣 大將과도 그는 個人的으로 書翰交換도 한 일도 있었다 한다.

    日本陸士를 卒業하신 金一成將軍은 서울로 돌아와 學生運動에 從事타가 三ㆍ一運動이 爆發되매 日本官憲의 逮捕網을 벗어나 長白山脈에 飛躍하시어 義兵을 모아 飛虎처럼 神出鬼沒하며 日本軍討伐隊를 무찌르다 哀惜하게도 翌年 – 一九二二年에 甚한 凍傷에 쓰러진바가 되었던 것이다. 그대 나이 四○歲였다. (金一成將軍의 外叔 咸鏡南道 端川 出身 薛麟氏의 解放直後 陳述)

    • 註 上記 薛麟氏는 뜻밖에도 解放後 金一成(實은 金日成) 將軍이 北韓에 돌아오셧다는 말을 듣고 三八線을 넘어 平壤을 찾어 外甥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金日成은 뜻밖에도 三二歲의 철不知 靑年이엇드라는 것이다. 外甥 나이 六八歲를 손곱은 薛麟氏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唐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薛麟氏는 그 後부터 監獄사리 身勢가 되고말어 아직도 消息이 杳然하다.
    長年에 걸처 民族解放運動에 從事치 못한 金一成將軍의 鬪爭史를 奇貨로 金成柱의 金日成僞造史는 꾸며젔던 것이다.

    이북(李北)이 말하는 단천 출신 설린(薛麟)의 생질이라는 김일성 장군은 실존인물이다. 정확히는 설린은 같은 단천 출신인 김일성(金一成, 1888~1926) 장군의 외사촌 형이며, 해방 후 서울에 살았다. 그는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이 자신의 고종 동생인 줄 알고 평양으로 가서 면담을 신청했다 감금되어 곤욕을 치른 후, 겨우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고 한다. 일본육사를 졸업했다는 김일성 장군은 다른 사람으로, 실제로는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한국전 휴전협정 관련 미군 자료 : OB Enemy Information, 8 July 1951 UN Command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Office of the Secretariat
    원래의 김일성은 소련에서 1941년 55~60세로 죽고, 그 조카가 북한 김일성이라 함.
    KIM IL SUNG – Premier of North Korea and Commander-in-Chief

    Born in Taedong Gun, Pyongan Namdo in 1911. His name as a youth was KIM, SONG JU. He completed 5 years of a 6 year grammar school course. He joined Korean Guerillas fighting the Japanese in Manchuria in 1930, and served for the next 10 years, using the name of KIM YONG HWAN, in guerilla units headed by the original KIM IL SUNG. During 1930 to 1940 his highest position was Secretary of the Northeast Party, Manchuria.

    When, in 1941, the original KIM IL SUNG’s guerilla group entered the USSR, the original KIM IL SUNG, at the time a man of 55 or 60, died from the effects of long exposure and his nephew, the present KIM IL SUNG, was either ordered to, or himself asked to assume the name of the famous fighter. This group, which assembled at Yashkino, USSR consisted of about 200 men and was divided into Political and Intelligence Sections and trained by the Soviets. KIM also attended a Soviet Army Officers school at Khabarovsk and attained the rank of Captain in the Soviet Army.

    Shortly after the Japanese surrender in 1945, the Yashkino group was dispatched to North Korea. Soviet Colonel IGNATOFF, Deputy of Romanoko, North Korea, Civil Affairs Headquarters addressed a meeting and stated that it was his pleasure to introduce to the gathered Communist leaders the national hero and outstanding guerilla fighter, KIM IL SUNG. KIM then stepped to the platform dressed in civilian clothes wearing a row of Soviet decorations, and introduced himself as KIM IL SUNG, member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famous guerilla leader.

    In Feb 46, he was named chairman of North Korean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Central Peoples’ Government in North Korea), and in Mar 46, he was general secretary of the North Korean Branch Headquarters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In Aug 46, he was elected co-chairman, along with KIM DOO BONG, of the New Labor Party which formed in North Korea, and in Feb 47, he was chairman of newly organized 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In Jun 47, KIM was named to represent the North Korean Labor Party when the US-USSR Joint Commission met in Pyongyang.

    In Aug 48, he was assistant Chief of North Korean Labor Party at Pyongyang, and also chairman of the North Korean Communist Party. On 10 Sep 48, Radio Pyongyang announced the formation of the new North Korean Government with KIM IL SUNG as Prime Minister.

    With the organization of the North Korean Armed Forces, KIM apparently absorbed the title of Commander-in-Chief; however, in general, he has limited his direction of the war to overall policy and has delegated purely military responsibility to his senior commanders. Recently KIM IL SUNG appears to have become more of a figurehead than actual commander.

    KIM is reported to be brilliant, calm and self-poised and when dealing with business to grasp and settle the point immediately.


  6. 삼촌(三寸)의 이름을 습용(襲用) : 백일하(白日下)에 폭로된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 조선일보 1951.07.31 조간 2 면
    삼촌(三寸)의 이름을 습용(襲用) : 백일하(白日下)에 폭로된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유엔軍 戰線 사令部에서 二十八日發 AP 合同】 「쌤·마린」記 : 현재 한국에서 전투하고 있는 북한괴뢰군과 중공군의 양 사령관은 과거에 있어서 「께리라」의 두목이었는데 그들의 모호한 과거가 二십八일 이곳에서 밝켜젓다. 이 보도는 二십八일 하오 당지에서 발표된 약력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알 수 없었던 과거를 갖이고 있어서 분분한 이론을 이르킨 자는 북한괴뢰군의 총사령관 김일성과 중공군사령관 팽덕회였었다. 이 양명의 공산군 사령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전회담을 마련하느라고 「유엔」군 최고 사령관 「릿쥬웨이」장군과 더부러 방송 「멧세-지」를 교환한 자들이다.
    「황소」와 같이 생긴 김일성은 쏘련에서 훈련을 받은 군인이며 잔인한 얼골을 갖인 팽덕회와 더부러 평생을 전지에서 지낸 자이다. 북한 괴뢰집단의 수상을 겸하고 있는 김은 一九一一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처음 이름은 김성주였다. 그는 十九세 때에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한국인 「께리라」 부대에 참가하였다. 그는 그후 十년 동안을 그의 삼촌이 지휘하는 「께리라」 부대의 일원이였었는데 그의 삼촌이 바로 김일성이였다. 이 기간중 김은 김용환이라는 이름으로서 만주에 있던 동북공산당 서기장에까지 승진하였다. 그의 삼촌은 一九四一년 쏘련에서 사망하였는데 그는 당시 그 휘하 「께리라」 부대를 인솔하고 이곳에 들어가 있었다. 이리하여 그의 젊은 「조카」 는 즉시 김일성의 이름을 습용하였는데 그가 자의로 이 이름을 호칭하였는지 또 소련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일성의 삼촌이 지휘하던 「께리라」 부대는 당시 쏘련령내 「야슈키」 에 있었으며 그것은 소련에서 훈련을 받은 대원 약 二백명으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김은 소련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하바로브스크」 에 있는 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소련군대에서 대위의 계급을 받었다. 一九四五년 일본이 항복 후 동 「께리라」 부대는 북한에 파견되었다. 김일성은 당시 사복을 하고 있었지마는 가슴에는 소련군의 훈장이 달려 있었다. 一九四七년 九월 십일 김은 북한괴뢰집단의 최고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날의 평양 방송은 그가 새로 조직된 북한괴뢰정권의 수상으로 임명되었다고 방송하였다.

    팽덕회에 관하여서는 상세한 보도는 없었으며 단지 재한 중공(의용)군 사령관이라는 직명이 붙어 있다. 그는 중공군 제一야전군 사령관 중공혁명군사리사회부의장 및 중공군 부사령관 등의 요직을 겸하고 있다. 팽은 一九○○년 호남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十二세때 지방군벌에 참가하여 당시부터 악한 혹은 변절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는 二十七세시 호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국부군의 련대장으로 임명되었다. 一년후 그는 련대를 이끌고 국민당 정부를 배반하여 중공측에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그는 제 十八군의 사령관이었으며 그후 서북인민련방군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는데 이것이 중공 제一야전군의 전신이다.


  7. 오영진(吳泳鎭, 1916-1974) 저(著),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서울 : 國民思想指導院, 1952. 06. 10) : (하나의 證言 - 作家의 手記)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서울 : 中央文化社, 1983, 1952년 초판의 재발간)
    [초간본 pp.142~143 / 재간본 pp.90~91]

    第六章 小遊擊隊長의 歸國
    - [金日成 「將軍」]의 印象 -

    一九四五年 十月十四日. 맑게 개인 날 午前, 金日成은 『將軍』의 稱號를 띠우고 처음으로 公開的으로 群衆 앞에 나타났다.
    高句麗의 古都이었고 日政 三十六年을 通하여 難攻不落의 民族主義의 牙城이었던 平壤, 市內 北方 箕林里 公設運動場에는 學生과 各 社會團體와 그리고 고려의 半傳說的인 英雄 『金日成』을 보려는 一般 市民이 立錐의 餘地없이 모였고 平壤放送局은 解放後 처음으로 金日成將軍歡迎大會의 實況을 中繼放送 하려고 모든 준비를 하였다.....(중략)....

    .....運動場에 모인 群衆은 그가 登場하는 燦爛한 瞬間을 마음을 조리며 기다렸다.
    그러나 이윽고 『東海물과 白頭山』으로 始作되는 愛國歌 演奏와 함께 金日成 將軍이 登壇하자 群衆의 입은 그들 눈 앞에 展開되는 意外의 事件에 한결 같이 버러지고 그들의 눈은 疑心스러히 빛났다. 白髮이 성성한 老將軍 대신에 確實히 三十代 (當時 三十三歲)로 밖에 안 보이는 젊은 靑年이 原稿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닥아선다. 身長은 一米突六十六 七 (1미터 66~7 센티) 가량, 重肉의 몸에 紺色의 洋服이 좀 작아 맞고 얼굴은 볕에 걸어 검었고 머리는 中國人 料理店의 웨이터처럼 벗쩍 치켜 깎고 앞 머리털은 한 치 程道 恰似히도 『라이트』級의 拳鬪 選手를 彷彿케 한다.

    가짜다!

    넓은 場內에 모인 群衆 사이에는 순식간에 不信과 失望과 不滿과 忿怒의 感情이 電流처럼 傳播되었다. 짧은 時間이나마 뒤숭숭한 騷音이 場內를 휩쓸었다. 우리들이 金日成의 이름을 最後로 韓人系 新聞 (『東亞日報』 『朝鮮日報』) 紙上에서 發見한 것은 적어도 一九三六年 以前의 일이다. 왜 그러냐하면 同年 伯林 올림픽 大會에서 『마라톤』에 優勝한 孫基楨選手의 가슴에 그려진 日章旗를 抹殺하고 新聞寫眞을 揭載한 罪로 總督府는 두 新聞을 廢刊해 버렸고 혼자 남은 總督府朝鮮語機關紙 『每日申報』는 民族運動은 물론 그것을 暗示하는 記事조차 揭載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韓人은 金日成은 물론, 그 밖의 海外의 志士들의 消息과는 完全히 遮斷되었고 無知하였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確實히 一九三六年 以前에 紙上에서 最後로 본 金日成 將軍을 韓人은 가장 짧게 잡아도 그보다 十年 앞선 一九二○年代부터 알고 있다. 그러면 自己自身의 입으로 十四歲 되는 해 卽 一九二六年에 鴨綠江을 넘어 吉林으로 갔다고 말하는 이 靑年, 現在 우리들 평양 市民 앞에서 歡呼를 받고저 서있는 이 靑年은 대체 누구냐. 群衆은, 運動場에서 加減의 算術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判定은 무엇이라고 說明할 수 없는 하나의 直感이다.
    신복룡,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일성은 가짜” vs “가짜가 아니다” [주간조선 2367호] 2015.07.27

    김일성 가짜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은 극작가 오영진(吳泳鎭)이었다. 평양 출신으로서 김일성 환영대회를 직접 목격한 그는 회고록 ‘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 증언’(142~143쪽·1952)에서 그날 군중이 기대했던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대신에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자 “가짜다”라고 군중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젊음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8. (PDF)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1952/ Hichey, Doyle 국회도서관
    코리안아메리칸리포트/김성주와 김일성 장군 한국일보 (미주판 ny.koreatimes) 2010-04-21
    미군이 파악한 진짜 김일성 장군 (1885-1935) : 일본 육사 출신,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
    (원문 p.90, pdf p.144)

    2. Biographical Sketches of Key Personalities

    a. KIM Il Sung, Premier of North Korea and Commander-in-Chief of the North Korean Armed Forces, is North Korea's top Communist and an imposter. His real name is KIM Sung Chu. The following condensed biography has been prepared from all available sources; however, reliable information about a person who has made a deliberate attempt to conceal his origins and indeed his whole life before 1945 is understandingly difficult to obtain. The situation is further complicated by a long and almost completely fabricated official biography of KIM issued by the Communist Government of North Korea.
    The real KIM II Sung, who is revered by all Koreans, was born in 1885 and, had he lived, he would be 67 years old today. He was the second son of KIM Chun Han," whose home was in South Kyongsan Province, Korea. When quite young he went to Japan, eventually entering the Military Academy. Before graduating, he returned to Korea and became a guerrilla leader. His classmates in the Military Academy, stll of whom were colonels or generals at the time of the Japanese Surrender, say that he showed great ability as a tactician. His raids against the Japanese forces in Korea became legendary. Eventually, he was forced to flee to Manchuria, where he continued his successes being known to the Japanese as "The Tiger of Chang Pek San" (a mountain where he made his headquarters). He died in Manchuria in the spring of 1935.
    KIM Sung Chu, now known as KIM II Sung, was born in April 1910, the eldest son of a farmer named KIM Hung Jin. He had two younger brothers. His father took part in the 1918 uprising against the Japanese in Seoul, was caught and placed in jail, where he eventually died. KIM and his two brothers fled to Manchuria, where he attended a middle school in Kirin, but did not graduate. He left school in 1929 and joined the Communist Party and was local secretary in Kirin of the Communist Young Man's League in East Manchuria. At this time he started his career as a guerrilla leader, and for some time was in the army of WU I-Cheng during the early 1930's. Korean guerrillas were then very active in eastern Manchuria. He was undoubtedly a very able guerrilla, and thus came to the attention of the real KIM II Sung. The younger KIM was active in arranging an alliance with the North Manchurian forces, and in 1936 an allied anti-Japanese force was established. The Second and Sixth Corps of this guerrilla army appear to have been composed of Koreans. He became commander of the Sixth Corps in 1938 and was very active in guerrilla operations until 1939, when he was driven out by the Japanese and fled to Soviet territory. Definite information about his actions during his stay in the USSR is lacking; there are unconfirmed stories that he attended a Soviet military academy, was commissioned a captain, and actually took part in the defense of Stalingrad, being decorated for his services there.
    In August 1945, KIM Sung Chu returned to North Korea with the Russians as a captain in the Russian Army. He cultivated CHO Man Sik, an able Korean Nationalist and the most respected non-Communist leader in North Korea, telling him privately that he, KIM, was a fervent nationalist and did not believe in some of the Communist plans for Korea. Taken in, CHO introduced KIM at a liberation celebration in Pyongyang on 3 October 1945, as KIM II Sung, describing him as an ardent Korean patriot and nationalist. CHO's reputation assured KIM of an enthusiastic reception from the general public, which did not stop to consider that the real KIM II Sung must have been a much older man.

    KIM became immediately popular, and later the same month, with full Soviet support, obtained leadership of the party from the local North Korean Communists and from the titular head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PAK Hon Yong. The latter returned to South Korea. The old Korean revolutionaries and nationalists soon found themselves out in the cold, and they were used and discarded at will. With KIM Il Sung as head of the party and the North Korean state apparatus, Soviet-Koreans and Soviet-trained fellow partisans of KIM infiltrated the Communist Party organization and the national and provincial state administration. Thus, the Soviets maintained control without using many Russian advisers. When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was set up in February 1946. he announced the 20-point political program as its chairman. In July, KIM II Sung was elected Chairman of the North Korean Democratic and Racial Unity Front.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was reorganized into the People's Committee in 1947. and he retained the chairmanship, later publishing the people's economic program for the fiscal year 1947. When the members of the Korean Committee of the United Nations came to Korea in January 1948, he was chosen as one of the nine political leaders to be consulted, but he did not meet them.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on 8 September 1948, he was elected to the post of Premier of the Cabinet, the head of the executive organ. In February-March 1949, he went to Moscow, and concluded agreements for increased economic and cultural aid. In January 1950» he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On 4 July 1950, he was appointed Commander in Chief, North Korean Armed Forces, by the Presidium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Non-Communists who know KIM personally describe him as a roughneck, poorly-educated, poor at languages, with little administrative ability.

    He is , however, an able and ruthless guerrilla leader.


  9. 주요섭(朱耀燮,1902~1972), 동아일보 연재소설: 길 (3) 1953.02.22 동아일보 2면
    길 (3) 1953.02.22 동아일보 2면

    朱耀燮(주요섭) 李靑田(이청전) 畵(화)
    一(일), 박쥐는 기어들다 ③

    더구나 바로 요 며칠전만 하여도 미국의 외교계나 군사계의 □위자인 "덜레스"가 한국에 와서 몸소 三八(삼팔)선까지 시찰하고 나서 三八(삼팔)선 방어쯤은 자신만만하다고 감격하고 가지 않았는가! 그뿐아니라 정훈이 여석(정훈이는 정학이의 셋째 동생으로 육군 소위이었다)도 집에 들리기만하면 의레히 그까짓 가짜 김일성이 군대쯤 문제도 되지않는 것이라고 이북 진격 명령이 좀체로 내리지 않아 클클해 죽을 지경인데 일조 북진명령만 내리면 한나질이면 평양가서 점심참하고 이튼날 아침이면 압녹강물로 양추질을 할 수 있노라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정학이의 이러한 생각을 보증하는 듯이...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


  10. 조영암(趙靈巖, 1918~ ?) 著,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부산(釜山), 정치신문사(政治新聞社) 檀記4286년 (1953년) 07.12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독립기념관)의 원문 서비스
    김일성 가짜 관련 부분 : 이미지 서비스 pp.56~61 (도서 원본 pp.60~65)


  11. 정체탄로(正體綻露) 우려(憂慮)? 김일성(金日成)의 판문점(板門店) 여행(旅行) 거부 이유(拒否 理由) : 조선일보 1953.07.27 조간 1 면
    김일성의 판문점행 거부로 휴전협정이 동경과 평양 두 곳에서 조인된다는 보도. 북한 김일성이 판문점에 못 오는 이유는 가짜인 정체가 탄로날까보아 두려워서라고 함.
    東京 平壤 兩地서 個別的 調印乎 / 金日成의 板門店 旅行 拒否로正體綻露 憂慮?

    金日成의 板門店 旅行 拒否 理由
    【서울 二十五日發 UP-東洋】
    信憑할만한 消息通에 依하면 北韓叛逆集團軍司令官 金日成이 板門店에서 「크라크」 將軍 및 彭德懷와 더불어 擧行되는 公開된 休戰調印式에 參席하기를 拒否한 理由로 休戰調印은 東京 및 平壤에서 個別的으로 實施될 것이라 하는데 金日成이 板門店에 나타나기를 願치 않는 理由에 對해서 推測이 區區하다. 一說에 依하면 金日成은 그의 出現으로 말미암아 北韓內部에서 騷動이 爆發할 것을 憂慮하며 또한 公開席上에서 西方側 記者 및 其他 「옵써버」들에 依해서 撮影됨을 願치 않을 것이라 하는데 一部 消息通에 依하면 金日成이 公開席上에 나타남을 두려워 하는 理由는 그가 詐欺漢임이 判明될가 憂慮하는데 있는 것이라 한다.

    本來의 金日成은 이미 死亡하였다는 報道가 있는데 金日成과 金錫源 및 蔣介石 等은 한때 日本 陸軍士官學校 學生이었던 것이며 追後 그들은 各自의 行路를 取擇하여 모다 有名하여진 것이다. 現在 蔣介石은 臺灣에 있고 金錫源은 現在 韓國軍에 있다. 本來의 金日成은 이미 오래 前 死亡하였다고 報道되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하나의 抱負있는 共産靑年이 그의 이름을 따른 것이라 한다.

1955년 ~ 1969년

  1. 김창순(金昌順, 1920~2007) 著, 역사의 증인 (歷史의 證人) (서울 : 韓國亞細亞反共聯盟, 檀紀4289 [1956])

    여기에서는 一九二○年代의 滿洲에 있어서의 民族主義 抗日團體였던 正義府時代에 活動한 사람들의 證言을 통하여 당시에 獨立團에 出衆한 軍事幹部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東에 번쩍, 西에 번쩍, 글자 그대로의 神出鬼沒의 名將이었던바 그 이름이 「金日成」이었다고 되어 있다. 이 「金日成」은 자기와 더불어 生死를 같이하는 몇 사람과 항상 동작을 같이하고 타인 앞에서는 누가누구인지를 몰라보게끔 서로 「金日成」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 「金日成」이 世上을 떠날 때에 自己 이름을 繼承할 사람을 指名했는데 이 二代 「金日成」의 本名은 金陽寧이었다고 한다. 이 二代 「金日成」은 海外의 어느 士官學校 출신이었다고 하며 그 역시 神出鬼沒의 力將이어서 倭敵과 맞싸워 크게 활약을 했는데 一九三二年 가을에 있었던 日帝의 關東軍의 「金日成部隊討伐作戰」으로 치열한 攻防戰 끝에 自決했다는 것이다. 그 後의 「金日成」이라는 것은 모두 이 兩代에 걸쳤던 「金日成」의 勇名에 편승한 者들이라는 것이 이 著者의 主張이다.

    후일 김창순은 이 김양녕(金陽寧)을 김양녕(金楊寧)이라고 이름 한자를 고쳐쓰며, 양녕(楊寧)이라고도 했던 본명이 김훈(金勛)으로 알려진양림(楊林, 1901~1936)이라고 말한다.
    김창순, 한민족독립운동사 6권 열강과 한국독립운동 > Ⅱ. 중국과 한국독립운동 > 3. 중국공산당과 좌파 한국독립운동 > 3) 중공당 동만특별위와 한인당원 (국사편찬위원회, 1989년 12월 26일)
    1945년 8·15 광복이 되고 평양에 김일성 장군이 환국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평양을 비롯한 북한지역의 도시들에서는 거리의 역사가들이 저마다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일가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 여러설 가운데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① 김일성 장군의 나이는 적어도 김구·이승만 나이는 될 것이다. ②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글자 그대로 신출귀돌의 명장이었는데, 항상 생사를 같이하는 몇 사람과 동작을 같이 하면서 개인 앞에서는 누가 누구인지를 몰라 보게끔 서로 김일성으로 불렀다. ③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이름을 어느 한 사란에게 계승시켰는데, 그가 김양녕(金陽寧)이며 그는 해외의 모 사관하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32년 가을 김양녕부대 곧 김일성부대는 통화현(通化縣) 대관령(大關嶺)에서 일제 관동군 토벌대에 포위되어 혈전 끝에 옥쇠했다는 것이다.註 023

    중공당에서 발행한 『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제1집)』에 수록된 「양림열사전략(楊林列士傳略)」에 보면 그는 평북 출신으로서 본명은 김훈(金勛)이며 만주에서는 양녕 또는 양림으로 통했다. 중국명은 필사제(畢士第)였다.註 024 8·15해방직후 주로 압록강 국경지대에서 제2대 김일성 장군이 김양녕 장군이라고 전해진 것은 아마도 중공당만주성위의 군사위원회 서기이며 동만특위의 군사책임자로서 이 지역의 반일유격부대를 조직하고 지휘했던 김훈 곧 양녕(楊寧)장군일 가능성이 크다.

    중공당 문헌註 025에 김훈이 1932년 가을 중국관내로 전임되었다고 한 사실과 8·15광복직후 압록강·두만강 국경지대에서 “김일성 장군 곧 김양녕 장군이 1932년 가을에 옥쇠하고 말았다”고 전해진 사실이 그가 만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시간상 상황으로는 엇비슷하게 맞아 들어 가는 것이 된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실재했던 생활의 반영일지 모른다.


  2. 소련의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김종훈 증언 :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편지 써 보내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유학생 허웅배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소련으로의 망명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다른 유학생들도 1958년 1월 겨울방학을 맞으며 러시아인 친구의 집에 모여 ‘8월 종파’사건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숙청에 대한 비판 등 논쟁을 치열하게 벌리던 끝에 집단적인 망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숭배는 헌법과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다. 진짜 김일성은 전설적인 독립활동가이며 1930년대 사망하였으나 해방 후 소련이 김성주를 가짜 김일성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지금 북한은 종파처형 바람이 불고 있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를 동조한 우리도 북한에 돌아가면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망명 입장을 밝혔습니다.

    (심층취재)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4

    [녹취: 김종훈 씨] “나는 거기(북한) 가면 제일 먼저 잡혀서 죽어요. ‘아직도’ 가 아니라 영원하죠. 김일성을 건드린 놈인데. 김일성을 살인방조자, 전쟁을 일으켰다고. 가짜 김일성이란 것을 중앙당에 편지를 쓴 게 다 남아 있는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왜 그런 놈인가 하는 것을 다 적어서 거기 보냈어요.”


  3. 民主黨(민주당)서 反駁(반박) 1960.08.15 경향신문 1면
    民主黨(민주당)서 反駁(반박)

    北韓傀儡政權(북한괴뢰정권)의 金日成(김일성)이 十四日(십사일) 南北交流(남북교류)를 提案(제안)한데 對(대)하여 民主黨代辯人(민주당대변인) 曺在千氏(조재천씨)는 “以北(이북) 가짜 政權(정권)의 解體(해체)만이 모든 問題(문제)의 始發點(시발점)"이라고 다음과 같은 論評(논평)을 加(가)하였다.
    "金日成(김일성)은 南北(남북)의 政治制度(정치제도) 및 活動(활동)를 維持(유 지)하면서 經濟文化(경제문화)에 關관하여 兩方代表(양방대표)로 聯盟(연맹) 을 創設(창설)하거나 兩方實業家代表(양방실업가대표)로 委員會(위원회)를 構成(구성)하자고 提案(제안)했다하는 바 金日成(김일성)은 모든 問題(문제)의 基本的 始發點(기본적시발점)은 共産獨裁(공산독재)의 가짜 政權(정권)을 解體 (해체)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며 또 各國(각국)에서 聯盟(연맹)이니 委

    員會(위원회)니 하는 假面(가면)를 쓰고 民主主義國家(민주주의국가)의 破壞工作(파괴공작)을 하려는 常套的手法(상투적수법)을 버려야할 것이다"
    4.19 이후 집권한 민주당의 대변인조차 "이북 가짜 정권(政權)"이라 하였는데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4. 김창순 (金昌順, 1920 ~ 2007), 『북한 15년사(北韓 15年史) : 1945年8月 - 1961年1月』 지문각(知文閣), 1961.
    "五. 김일성 부대(金日成 部隊)" (pp.54 ~ 59)에 진짜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이 어떤 사람인지와, 북한 김일성의 가계, 약력, 가짜 김일성 장군 행세하는 과정이 나옴.
    [pp.55 ~ 56]

    원래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은 우리 민족의 구전상(口傳上)의 영웅으로 그것은 一九一○年 한일합병의 국치(國恥)가 있은 지 수년 후부터의 일이다.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간도(間島)와 기타(其他)의 만주(滿洲) 지역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 독립운동에 나선 애국자들은 一九二○年代에 환인(桓仁) [고구려 회인현성(高句麗 懷仁縣城)]에 「정의부(正義府)」를 두고 독립군 양성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展開)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정의부(正義府)」 계통의 독립군 가운데 특출한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이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평소에 자기의 정체를 위장하는 방법으로 연령, 용모, 신장(身長), 풍채에 있어서 늘 자기와 비슷한 사람 五, 六人과 같이 행동을 취(取)하였기 때문에 누가 정말 김일성(金日成)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이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은 一九三一年 일본(日本)의 만주(滿洲) 침략 얼마 후에 병사(病死)하고 그 대(代)를 물려받은 사람이 김양녕(金陽寧)이란 설(說)이 현지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는 유력하였다. 동변도(東邊道)란 신의주(新義州) 대안(對岸) 안동현(安東縣)으로부터 장백산(長白山)에 이르는 산악지대를 말하는 것인데 관전(寬甸), 환인(桓仁), 통화(通化) 등지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지대의 한국인들은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이라고 하면 신출귀몰의 명장(名將)으로 알았고 또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부대가 왔다고 하면 끼니를 굶으면서도 군자금(軍資金)과 군량(軍糧)을 바치곤 했다.
    그런데 초대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은 노쇠하여 병사(病死)하고 그 다음 대(代)를 이어받은 제2대(第二代)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 김양녕(金陽寧)은 一九三七年 관동군(關東軍)의 포위작전으로 통화(通化) 대관령(大關嶺)에서 부대 전원(全員)과 함께 옥쇄(玉碎)해버렸다는 것이 동변도(東邊道)에 살던 사람들의 구전(口傳)이다.
    그 후(後)부터는 도처에서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을 참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곳 동포들은 이런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이름을 도용(盜用)해서 사리(私利)를 꾀하는 엉큼한 무리로 본 것이다. 관동군(關東軍)에서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고 토벌작전을 하였을 때 김일성(金日成)의 머리가 수십개나 사령부(司令部)에 쇄도하였다는 웃지 못할 사실도 있다.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용명(勇名)과 명예를 도용(盜用)한 사람들이 그 당시 많았다는 사실의 반증(反證)이다.

    이 책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해방 당시부터 1960년 이전의 남한 문헌에는 보천보 사건이 나오지 않으며, 저자도 당시 보천보 사건은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5.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金日成(김일성)을告発(고발)한다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년 동아일보 연재 : 총 82회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04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82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8.13 동아일보 2면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6회] : 술잔이 돌기 시작하고 주로 공산당측 위원들이 일어서서 벌써부터 아첨에 가득찬 환영사를 경연(競演)하였다. 민족진영 위원들도 몇 사람 일어서서「테불·스피취」를 하였는데 그것은 은연중 비꼬는 말 꼬집는 말이 섞여있는 것이었다. 예를들면 李宗鉉(이종현)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벌써 십여년 전에 金日成(김일성) 장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몇몇 동지끼리 몰래 모여서 추도제사까지 지냈는데 이제 살아 돌아온 金(김)장군을 눈앞에 보게되니 그때 올렸던 제주(祭酒)는 이 자리에서 도로 찾아야겠소" 이것은 분명히 해방 전까지 싸우다 왔다는 金日成(김일성)에게는 가슴이 찔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어서 술잔과 함께 金日成(김일성)에게 질문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이 당시는 본시 좀 촌뜨기같은데가 있던 그는 더욱 어리둥절해 쩔쩔매는 꼴이었다.


    [13회] : 해방후 평양에서 처음 나온 신문,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 「平壤民報 (평양민보)」창간호는 낡은 윤전기로써는 미처 찍어낼 수가 없으리만큼 날개가 돋혀 뿌려졌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목마른 사람 냉수 마시듯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다브로이드」판의 빈약한 것이었으나 문제의 인물 의문의 인물 金日成 (김일성)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환영군중대회」를 취급한 제一(일)면 「톺」기사에서부터 金日成(김일성)의 말에 의하여 그의 경력, 포부, 그의 고향, 가정일 등을 소개한 「내리다지」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각면 전부가 金日成(김일성)에 관한 것으로 메워져 있었다. 그 선전효과는 가히 짐작할만한 일이다.
    .............
    그 기사와 글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金日成(김일성)을 「장군」으로 부르고 「민족적 영웅」으로 추켜 세웠다. 「凱旋(개선)」이라는 말도 이때 내가 처음 쓴 말이었다. 金日成(김일성)이 처음 공개될 때에 그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 잠시 논의되었다. 공산사회식으로 「동무」나 「동지」라고만 하는 것은 우상화하려는 「영도자」에 대해 너무 위신이 안선다. 「氏(씨)」라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선생」이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남같이 「박사」라고 하기도 안되었다. 그래서 「소련」 사람들도 처음(「다마야」에서의 환영간담회 때만 해도) 그를 우리에게 소개할제 어제까지 자기 군대의 「소좌」로 있던 사람을 갑자기 「장군」 이라고 하는 것이 차마 쑥스러웠든지 아직 그저 「다와리시치· 김일쎈」(김일성 동무)라고 했었다.
    그것을 李周淵(이주연)등이 金日成(김일성)의 본심을 받들어 궁리를 한끝에 「장군」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소련」장군들도 이 땅 공산주의자들의 아첨 기술에 새삼 감탄하고 만족하였다. 「마이용(少佐(소좌))·김일쎈」은 일약 「게네랄 (將軍(장군))·김일쎈」으로 수계급 특진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장군」칭호를 처음으로 활자(活字)화하고 지상으로 처음 「임명」한 것이 내가 된 셈이었다. 이래로 북한에서는 金日成(김일성) 밑에는 반드시 「장군」이란 「렛텔」이 달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金日成(김일성)을 「장군」 으로 「임명」하고 영웅화한 것이 韓載德(한재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부 터 유래한 것이다.


    [23회] : 무어니 무어니 해도 金日成(김일성)이 가장 자랑으로 내세우는 것은 역시 그의 소위 항일유격투쟁이라는 것이다. 날조와 과장과 요컨대 거짓이 가장 많은 것도 또한 이 부분이다. ......... 二十(이십)세에 六千(육천)명의 대원을 결합하여 十五(십오)년 동안 十萬(십만)여 回(회)의 전투로 한번도 패전한 일이 없고 五萬(오만) 여 명의 日軍(일군)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가 변변치 못한 전투나마 참가하여 대수롭지 못한 전과나마 거두었다 치더라도 그것은 중국공산당 지방당원으로서 중국공산혁명을 위한 항일연합군의 한 전투원으로 참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4회] : 그런대로 金日成(김일성)의 가장 활발한 활동기라고 할 수 있는 一九三七(일구삼칠)년「보천보」사건 당시의 그의 직책은 이른바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제六(육)사 사장(師長)이었다.「항일연군」이란 앞서도 잠간 말한 바와 같이 중국 공산당이 滿洲(만주)에서 반일세력이라 하여 중국계통의 마적과 비적까지를 규합하여 꾸민 연합적인 무장부대였는데 그것을 지도하고 움직인 것은 周保中(주보중) 등 중국공산당 간부들이었다. 金日成(김일성)은 그 밑의 한국인 중심의 제六(육)사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師(사)」란 지금의 師團(사단)이 아니라 百(백)명 내지 二百(이백)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 무렵부터 金成柱(김성주)는 金日成(김일성)이라는 널리 알려진 이름을 도용(盜用)하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우리 민족의 민족적 영웅으로서 모두가 우러러 받드는 진짜 金日成 將軍(김일성장군)은 洪範圖(홍범도), 金佐鎭 將軍(김좌진장군) 같은 이들의 전우로서 모두 다 상당한 연배이었다.

    그런데 그가 一九三一(일구삼일)년쯤에 큰 뜻을 이루지 못한채 이국 땅에서 한많은 일생을 끝마친 후 滿洲(만주) 지방 도처에 이「金日成(김일성)」의 영명을 도용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金成柱(김성주)가 언제부터 그 이름을 도용하게 되었는지는 자기들 스스로도 밝히지 못하던 것인데 우리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으로서인지 이번 그의 50주년 생일 기념 문헌에는 그것이 그가「유격대」를 조직하는 초기부터 있었던듯이 모호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어느 때부터 이었던간에 그는 金成柱(김성주)요,金日成(김일성)은 도용한 이름이요,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한 지방무장대원이요, 말단 당부조직의 一(일)개 간부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金日成(김일성)은 어디까지나「민족적영웅」으로 행세해보려는 흉심으로서 이것들을 왜곡하여 마치 자기가 독자적으로 우리민족 해방을 위한 무장대오를 조직, 지도하고 또 그것에서 무슨 큰 성과나 거둔 듯이 꾸며 보려고 엉뚱하고도 엄청난 노력을 하고있다.

    金日成(김일성) 일당은 지난4月(월)25日(일)을 소위 항일유격대 창건30주년 기념일이라하여(이것을4月(월)25日(일)이라고 한것은 금년 비로소 꺼낸 수작이다) 전에 없던 대규모의 시위와 행사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일부러 中共(중공)으로부터 彭眞(팽진)을 단장으로하는 대표단까지 초청해다놓고미리 짜고든 말을주고받았다. 그러나 능구렁이 中共(중공)측은 金日成(김일성)의 요청에 의하여 옛날 그가 中共(중공)의 졸개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감추어 주는 듯하면서도 슬쩍 자기 할 소리는 한 마디하고야 말 것을 잊지 않았다. 즉 이보다 바로 一○(10)일 앞선 4월 15일 金日成(김일성)의 50주년 생일에 제하여 毛澤東(모택동)은 金日成(김일성)에게 보낸 축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중국 인민에게 있어 곤란했던 一九三○(일구삼○)년대에 당신은 조선 인민의 우수한 아들 딸을 인솔하여 피로써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원조하였읍니다" 이것은 金日成(김일성)이 一九三一(일구삼일)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그 충실한 당원으로서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박한「조선 아들 딸」을 꾀여서「인솔」해 가지고 중국 공산혁명에 헌신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며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다짐한 것이다.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6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09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3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16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3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26 동아일보 2면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4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1962.05.28 동아일보 2면
    《참고 :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5>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埸(등장) (4) 서울 오라는 密書(밀서)거절 1972.01.22 동아일보 4면 기사》

    이 한재덕의 연재기사에서 해방 후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보천보 사건이 거론되며, 이후부터 북한 김일성이 주도한 사건으로 남한 문헌에도 나오기 시작한다. 북한의 선전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또한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주장이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보천보 사건이 그렇게 유명했다면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서도 당연히 거론되었어야 한다.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1962년까지도 남한 사람들은 보천보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주도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북한 김일성이 막연히 만주에서 게릴라 투쟁을 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가 박정희 정권 들어서 비로소 김일성의 구체적 항일 경력으로 보천보 사건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친일파(?) 박정희가 항일 투쟁한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선전했다는 식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마타도어임을 알 수 있다.

    한재덕도 김창순처럼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보지만, 그가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고 파악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의 진위 문제는 그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 여부와는 관계없다. 나아가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 6사장 김일성도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또 한재덕은 진짜 김일성 장군은 조국 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31년경 사망했다고 하였다.

    이종현(李宗鉉, 1903.03.05~1959.01.07)

    이종현(李宗鉉, 1904~1959)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산업부장이었다. [참고 :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주간조선 2006/08/25 또는 북한연표 (국사편찬위)] 그 후 월남하여 2대 농림장관을 지냈다.
    △農林長官(농림장관) 1. 曹奉岩(조봉암)(獨戰(독전) 2. 李宗鉉(이종현)(朝民黨(조민당))[5]
    이종현(李宗鉉, 1903.03.05~1959.01.07)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農林長官後任(농림장관후임)에 李宗鉉氏(이종현씨)를 任命(임명) 1949.02.24 동아일보 1면
    曺奉岩農林長官(조봉암농림장관)의 罷免以後(파면이후) 그 補充人選... 李宗鉉氏(이종현씨)로 正式發令(정식발령)되었다 略歷(약력) = 崇置中學...
    李宗鉉氏(이종현씨) 別世(별세) 輪禍(윤화)로 夫人(부인)도危篤(위독) 1959.01.07 경향신문 3면
    속보=五(오)일하오 시내동자동(東子洞(동자동))서 교통사고로 중상을입고"수도의대부속병원"에입원가료중이던 전 농림부장관 이종현(...

  6. 미국(US) CIA Document 《The Korean Labor Party and the Kim Ii-Song Regime -- History of Party from 1925 to Date》 (October 5, 1962) p.30~
    3. Overseas Factions

    A part of the workers for Korean independence fled to Manchuria, Shanghai in China; and the USSR from the strong suppression in Korea. Many of the refugees gathered in the Chien-tao district in Manchuria, where immigrants from Korea had settled long ago, and made that the base of their independence movement.

    At first, the Chien-tao district was the base of Yi Si-yong, a former vassal of the old Korean monarchy, and Kim Chwa-jin, a military man.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Communist regime in the Primorskiy Kray, however, the strength of the Communists in Chien-tao increased rapidly. Yi Si-yong (vice president at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48) was pursued by Communists and finally fled to Shanghai. General Kim Chwa-jin (military officer during the Korean monarchy) was assassinated by Kim Il-song (a different person from the present North Korean Premier Kim Il-song, who was Kim Song-ju). The strength of racialism, thus, was greatly weakened.

    Manchuria up to the Manchurian Incident was compared to Korea, relatively free country for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orkers. Small armed organizations, thus were found scattered in various places.

    Taking advantage of the Manchurian Incident, organizers of the Japanese Army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rushed into Manchuria. The Chinese Communist Party strove to strengthen their anti-Japan front in Manchuria through the formation of a united front with Korea. Communist China, thus, took note of the Korean Independence Groups in Manchuria and tried to reorganize them. The members of the already existing organizations for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owever, although Communists, were so strong in their racial feelings that they did not agree with Communist China's policy which placed first emphasis on liberation of China.

    Communist China, thus, tried to find from among Koreans in Manchuria, those internationalists of the Communist line who thought more of the Chinese revolution than of the Korean Independence. The man who filled this requirement was Kim Song-ju (present, Kim Il-song), secretary of the Kirin District, Chinese Communist Youth League.

    a. Kim Il-song -- Ch'oe Hyon Group (South Manchuria)

    Kim Il-song (real name Kim Song-ju) was born 1912 at Mangyongdae, a suburbs of P'yongyang, as a son of a private elementary school teacher. His mother, Kang Ssi, came from a Christian family. his mother's brother, Kang Yang-guk (presently, member and vice chairman of the Presidium of the North Korean Supreme People's Assembly) was a pastor.

    When Kim Il-song (Kim Song-ju) was attending the Ch'u-lin Middle School, Kim Il-song (the real one) slew General Kim Chwa-jin, who was the most powerful Korean in Manchuria, and his name became known all over the Chien-tao area.
    Kim Il-song (Kim Song-ju) was expelled from the Yu-lin Middle School and served several months in prison. After his release, he joine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When Kim Song-ju was trying to evade the police after being involved in partisan activities, after the 1931 Manchurian Incident, he used for the first time the name of Kim Il-song, who was dead by then.

    From around 1935, Kim Il-song (Kim Song-ju) devoted himself to partisan struggles under orders from the Chinese Communist Party. When the Sino-Japanese incident broke out in 1937, Communist China immediately reorganized Chinese-Korean combined armed units. The armed units, organized by Communist China was headed by Yang Ching-yu of Communist China. The Korean units were assembled under the 6th Division, and a Korean was decided to be appointed as the division commander. The first choice was Ch'oe Hyon, who was long active in the partisan movement in Manchuria, but since he was totally illiterate and simple-minded, Kim Song-ju (present Kim Il-song), who attended school up to the second grade in middle school was appointed commander of the 6th Division. Kim Song-ju formally became Kim Il-Song from this time.

    In 1940, however, the Chinese-Korean partisan units in Manchuria faced destruction by the Japanese Kwantung Army, and police. Since Kim would have been completely wipe out if he stayed in Manchuria, he managed to cross over the Soviet-Manchurian border in 1940 and fled to the vicinity of Khabarovsk. He billeted his small number of units which fled with him in nearby private homes. He received political and special education under the command of Major General. Suchkov, who was the commander of the military administration in 1945 when, the Soviet Army occupied North Korea. After the North Korean government was established in 1948, Suchkov continued to guide Kim Il-song as the Soviet ambassador in P'yongyang. Suchkov was charged with the responsibility for failure of the Korean conflict and recalled to the Soviet Union.

    Kim Il-song, in his self-advertisement in north Korea at present, uses the standard line that when the North Korean people were faced with the most difficult days, he alone bravely engaged in armed struggles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m, Actually, however, Kim, Il-song was leading a peaceful life in the Soviet Union during the critical years between 1940 and 1945, when the oppression was most severe.

    When Kim Il-song was brought to P'yongyang in August 1945 by the Soviet Armry, he could not use the name of Kim Il-song and came as Kim Song-ju. He formally took the name of Kim Il-song in Korea in mid October when he appeared for the first time before the masses at the P'yongyang Municipal People's Assembly.

    A characteristic of the Kim Il-song unit is that it has many illiterate persons and lacks experienced ones.

    At the time of the establishiment of the People's Republic in 1948, not many could appear in the limelight, but presently, men of the Kim Il-song line are in the key positions.

    The cadres of the Kim Il-song Unit in 1939 were as follows:

    Kim Il-song (Division commander)
    An Kil (Chief of Staff)
    Kang Kong (Commander) Kim Il (Company commander)
    Pak Song-ch'ol (Platoon commander)
    Ch'oe Hyon (Independent unit commander)
    Pak Tal (internal agent)
    Pak Kum-ch'ol (Internal agent)

    The cadres of the Kim Il-song line as of October 1959 are as follows:

    Kim, Il-song (Premier)
    An Kil (Died in 1947)
    Kang Kong (Chief of the Staff, People's Army in 1950; .killed by a bomb while inspecting the Korean front)
    Kim Il (First Deputy Premier)
    Pak Song-ch'ol (Foreign minister)
    Ch'oe Hyon (Minister of Communications)
    Pak Tal [Died spring 1960]
    Pak Kum-ch'ol (Vice chairman, Central Committee, Korean Labor Party)

    In the government, Kim Il-song's deputy is Kim Il, who was a company commander during the partisan days. In the Korean Labor s Party, Kim's deputy is Pak Kum-ch'ol, who was an internal agent during the partisan days. Among those of the Kim Il-song 1ine, Kim Il is the only one who finished middle school.

    b. Ch'oe Yong-gon Faction (North Manchuria)

    Ch'oe Yong-gon was born as a son of a landowner in Namsi...

  7. 北傀(북괴)는 『二重衛星(이중위성)』 1963.02.21 경향신문 3면
    George S. Benson (1898-1991)
    北傀(북괴)는 "二重衛星(이중위성)"

    -엄청난 軍事力(군사력) 完全(완전)히 蘇聯化(소련화)-
    侵略道具(침략도구)로 組織(조직). 訓練(훈련)
    印(인)·中共(중공) 紛糾(분규) 터지자 中共(중공)에 秋波(추파)
    經濟困境(경제곤경) 때문에 蘇(소) 離脫(이탈) 못하면서

    【編輯者註(편집자주)】筆者(필자) 「조지·벤슨」氏(씨)는 「포린·어페어스」誌(지)에 定期的(정기적)으로 寄稿(기고)하는 美國(미국)의 共産圈問題專門家(공산권문제전문가)인데 最近(최근) "偉大(위대)한 詐欺(사기)"라는 題下(제하)에 共産國家(공산국가)들의 過去(과거)와 現在(현재)를 파헤치는 一聯(일련)의 글을 USIS에 提供(제공)했다. 다음은 그 中(중)에서 "北韓(북한) - 二重的 衞星國家(이중적 위성국가)"라는 題目(제목)으로 된 글을 譯載(역재)한 것이다.

    【워싱턴發(발)USIS合同(합동)】1945年(연) 8月(월) 帝國主義(제국주의) 日本(일본)이 降伏(항복)하자...

    가짜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蘇聯占領軍(소련점령군) 當局(당국)은 새로 組織(조직)된 "朝鮮勞動黨(조선노동당)"이 大衆(대중)의 支持(지지)를 끌게 만들기 위해 有名(유명)한 韓國人(한국인) 對日(대일) 「게릴라」戰(전) 指導者(지도자)였던 金日成(김일성)의 이름을 盜用(도용)한 政治的人物(정치적인물)을 造作(조작)하여 그의 指導者(지도자)로 내세웠다. 金日成(김일성)이라는 이름을 盜用(도용)한 이 政治的人物(정치적인물)은 事實(사실)에 있어서는 滿洲東部(만주동부)에서 日本軍(일본군)에 對抗(대항)해서 小規模的(소규모적)인 「게릴라」戰(전)을 한 일이 있고 1945年(연) 蘇聯占領軍(소련점령군)과 더불이 北韓(북한)에 들어온 無名(무명)의 人士(인사)였던 것이다. 그 後(후) 北韓(북한)에서 唯一(유일)한 非共産主義政黨(비공산주의정당)을 組織(조직)했던 曺晩植氏(조만식씨)는 逮捕監禁(체포감금)되었다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曺晩植氏(조만식씨)가 사라진 後(후) 그의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은 所謂(소위) "人民聯合戰線(인민연합전선)"의 一部(일부)로서 하잘것 없는 存在(존재)를 維持(유지)하고 있다가 1950年(연) 北韓共産軍(북한공산군)의 南韓侵攻(남한침공)과 때를 같이하여 完全(완전)히 解體(해체)되고 말았다. 延安派(연안파)가 組織(조직)한 新民黨(신민당)은 蘇聯占領當局(소련점령당국)의 不信(불신)을 샀으며 마침내 金日成(김일성)을 下手人(하수인)으로 하여 斷行(단행)된 肅清對象(숙청대상)이 되었다. 延安派韓國人(연안파한국인) .....


  8. 解放(해방)18년 北韓(북한)은 어떻게變(변)했나? : 「平壤 金日成(평양 김일성)」의 正體(정체) 1963.08.15 경향신문 3면
    「平壤 金日成(평양 김일성)」의 正體(정체)

    도대체 金日成(김일성)이가 어떤 者(자)인데 그렇게 굉장한 듯 神格化(신격화)하려고 드는가? 北韓(북한)에서 독판을 치며 北韓(북한)의 歷史(역사)와 現實(현실)을 주름잡는 金日成(김일성)이란 大體(대체) 어떤 者(자)인가? 이제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1912年(년) 4月(월)에 平壤近郊(평양근교) 萬景臺(만경대)에서 태어난 金成柱(김성주)라는 者(자)이다. 14 歲時(세시) 父母(부모)를 뒤쫓아 滿洲(만주)로 들어가 中學時節(중학시절)에 이미 中共共靑(중공공청)에 加盟(가맹)하고, 1931年(연)에 中國共産黨(중국공산당)에 入黨(입당)하였다.

    (可笑(가소)로운 것은 그들의 文獻(문헌)에 依(의)하면 이때 다만 「共産黨(공산당)에 入黨(입당)하였다」 로 되어있다. 그러나 國名(국명)없는 共産黨(공산당)이 어디 있겠는가? 當時(당시) 朝鮮共産黨(조선공산당)은 解體當(해체당)하고 없었다. 金日成 (김일성) 아니 金成柱(김성주)가 入黨(입당)한 共産黨(공산당)은 勿論(물론) 中國共産黨(중국공산당)이었다. 그런데 그를 民族的(민족적) 人物(인물)로 내세우기 위해 그가 처음 入黨 (입당)한 것이 中國共産黨(중국공산당)이라는 것을 숨기려 든다. 얼마나 어리석은 잔꾀인가!)

    그런데 當時 (당시) 中國共産黨 (중국공산당)은 滿洲(만주)에서도 遊擊戰(유격전)을 爲主(위주)로 하였다. 그래서 金日成(김일성)도 中共遊擊隊(중공유격대)에 加擔(가담)하게 되었다. 그것이 1931 年頃(연경)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當時中共(당시중공)의 東滿遊擊隊長(동만유격대장)이던 周保中(주보중)의 末端部下(말단부하)이었다. (周保中(주보중)은 現在(현재) 中共國防委員會委員(중공국방위원회위원)으로 지난번 崔庸健(최용건)이 中共訪問時(중공방문시)에도 "金日成同志(김일성동지)와 같이 싸우던 軍人(군인)"이라고 歡迎參加者名單(환영참가자명단)에 紹介(소개)되었었다) 다음해 1932年(연) 4月(월) 中共(중공)은 戰略上(전략상) 韓國人(한국인)들만으로 한 部隊(부대)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中共(중공)의 東滿遊擊隊(동만유격대)의 한 麾下部隊(휘하부대)에 不過(불과)하였다. 그러기에 金日成(김일성)이가 가장 굉장히 내세우는 所謂(소위) 普天堡事件(보천보사건) 때에도 金日成(김일성)은 前記(전기) 周保中(주보중)이 領率(영솔)하는 部隊(부대)의 한 帥長(수장)(한 「帥(수)」란 百名程度(백명정도)로 構成(구성))에 不過(불과)하였다. 더 具體的(구체적)으로 말하면 金日成(김일성)은 第(제) 6帥長(수장)이었다, 이것이 그의 黃金時代(황금시대)였다.

    그러나 日本軍警(일본군경)의 討伐作戰(토벌작전)이 尤甚(우심)해지자 金(김)은 1941年(연)에 蘇聯(소련)으로 달려들어갔다, 蘇聯(소련)서는 勿論(물론) 歡迎(환영)이었다. 이번에는 蘇聯共産黨員(소련공산당원)이되고 蘇聯軍隊訓練(소련군대훈련) 特(특)히 特務訓練(특무훈련)을 받았다. 日的(목적)은 뻔하다.

    果然(과연) 蘇聯軍(소련군)이 北韓(북한)에 進駐(진주)하자 그는 將校服(장교복)으로 따라 들어와서 몇날이 안가서 軍服(군복)을 벗고 金日成(김일성) 「將軍( 장군)」 行勢(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이 金成柱(김성주)가 언제부터 金日成(김일성)의 이름을 盜用(도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滿洲時代(만주시대)부터 미미 金日成(김일성)의 이름으로 行勢(행세)한 것은 事實(사실)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우리 民族(민족)의 傳說的英雄(전설적영웅)인 年老(연로)한 金日成將軍(김일성장군)과는 全然(전연) 別人(별인)이라는 것은 年齡問題(연령문제)로도 그렇지만 特(특)히 다음의 點(점)에서 問題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 즉 우리 民族(민족)의 仰慕(앙모)하는 金日成將軍(김일성장군)은 徹底(철저)한 民族主義志士(민족주의지사)였는데 이 金日成(김일성)은 어려서부터의 徹底(철저)한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라는 點(점)인 것이다.

    이것이 平壤金日成(평양김일성)의 正體(정체)이다, 日帝時代(일제시대) 中共遊擊隊(중공유격대)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多少(다소) 싸우다가 다급해지자 蘇聯(소련)의 품안으로 쫓겨 들어간 것이 무엇이 그리 特別(특별)하고 대단하다고 그것을 絶世(절세)의 英雄(영웅) 아니 神人(신인)이나 되는 듯이 떠받들어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도 보천보 사건을 거론하며, 북한 김일성이 제6사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한재덕의 수기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9. 유석인(劉錫仁), 『김일성의 정체에 대한 고증 (金日成의 正體에 對한 考證) : 이북(以北)의 金日成은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이 아니다』 신사조(新思潮) 제2권 제7호 통권18호 (1963년 9월) pp.165-169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가짜이고,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된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출신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본명 김창희[金昌希]) 장군이 진짜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며, 그의 내력에 대해 설명한 글.
    단천 출신 월남민인 필자 유석인(劉錫仁)은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장군의 지인이다.

    위 글은 『단천군지(端川郡誌) (단천군지 증보편찬위원회, 1971)』 p.151(원문 p.155)에도 실려 있고, 온라인 열람도 가능하나, 제목과 필자가 『민족의 별들 (柳麟 著) 중』으로 되어 있다.

  10. "김일성(金日成)은 가짜다" 판문점(板門店)서, 유엔側(측) 代表(대표) 지적 1965.03.30. 경향신문 3면
    .... 괴뢰 대표 朴(朴重國)이 남한을 비난하자 「야보로」 소장은 『김일성(金日成)이는 가짜다. 그에게 물어보라』고 대들었고, 이에 박(朴)은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

  11.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 서울, 1966
    [pp.170~171]

    평양 천지에서는 八월 二十五·六일 경까지의 해방 十일간이 자유의 황금시대(황금시대)였다. 그러나 열흘 동안을 「시대」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짧고, 허무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평온한 거리에도 때때로 정체불명의 정치적 벽보가 나붙어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혼란된 정치정세를 의미하는 오보(誤報)였다.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한다」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내각 명단
    그런 종류의 오보가 흥분된 민심을 자극했다.

    p.214 : 김일성 출현

    한근조,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現代韓國人物全集; 6), 서울 : 태극출판사, 1970.


  12. 북한인명록(北韓 人名錄) (492명) 세대(卋代/世代) 1966년 9월호
    金日成 (本名 金成柱 五五歲)
    三○년부터 四○년까지 東滿의 中國共産黨에서 匪賊으로 있다가 四一년 쏘련에 入國 八·一五 이후 쏘련 少領으로 入北, 四六년 一월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 責任者, 四八년 九월 北傀內閣首相。四九년 六월 北傀노동당 中央委員長。

  13. 『韓國戰爭史 第1卷 解放과 建軍 : 1945-1950.6』 서울,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1967

    《참고 :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5>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埸(등장) (4) 서울 오라는 密書(밀서)거절 1972.01.22 동아일보 4면 기사》
    國防部(국방부) 戰史(전사)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韓國戰爭史(한국전쟁사)에는 소련군 정치사령관 「로마넹코」 少將(소장)에 의해 소개된 金日成(김일성)은 一九一(일구일) ○年(연) 韓日合邦(한일합방) 이후부터 민족의 영웅으로 전해오는 金一成(김일성) 장군의 이름 音(음)을 도용한 金日成(김일성)이었다며 그의 正體(정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一九一二(일구일이)년 平南(평남) 대동郡(군) 고평面(면) 남里(이)에서 金輔鉉(김보현)의 장남 金炯(김형)(亨(형))稷(직)의 아들로 本名(본명)은 金成柱(김성주)며 그의 生母(생모)는 康班錫(강반석)이다. 生母(생모)의 아버지는 康敦煜(강돈욱). 그는 彰德(창덕)학교 설립자로서 기독교 장로였다.당시 三四(삼사)세 의 金日成(김일성)은 金日成(김일성) 부대라는 이름으로 「로마넹코」 司令部(사령부)의 政治的目的(정치적목적)에서 민중에게 소개되었고 실은 一九三一(일구삼일)년에 中國共産黨(중국공산당)에 入黨(입당)하여 北滿洲(북만주)에서 유격대장을 지낸 바 있으며 日軍(일군)에 쫓겨 수명의 동료와 함께 一九四(일구사)○년代初期(대초기) 蘇領(소령)으로 도망하여 그때부터 蘇滿國境(소만국경)에 주둔하고 있던 「치스차코프」 軍團(군단)에서 軍事訓鍊(군사훈련)을 받다가 四五(사오)년 소련군과 함께 入北(입북)했다.이러한 젊은 金日成(김일성)을 본 군중들 속에서 가짜라는 얘기가 튀어나오게 되어 환영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운집하였던 군중들은 흩어지게 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올라 있는 『한국전쟁사 제1권 - 북괴남침과 서전기 (개정판) (50. 6. 25 - 50. 7. 4)』는 온라인 열람이 가능하나, 1977의 개정판으로 초판과 달리 해방 직후 역사는 빼고 6.25 남침 발발부터 시작하므로, 1967년 초판에 나와 있는 김일성의 경력에 대한 위와 같은 내용은 없다.

  14. Chong-Sik Lee [이정식 (李庭植, 1931~ )], 『Kim Il-Song of North Korea』, Asian Survey, Vol. 7 No. 6, Jun., 1967; (pp. 374-382)
    Charismatic Leadership in Asia: A Symposium,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p.376] The North Korean historians of today, intent on establishing Kim Il-sõng as the leader of the Korean revolutionary movement as early as possible, however, resort to absurd extremities. One prominent Communist historian, Yi Na-yöng, for instance, asserts that the “Anti-Japanese guerrilla unit led by Marshall Kim Il-sõng's distinguished strategies and tactics became the most advanced and strongest armed unit. .....

    The actual accomplishments of Kim Il-sõng, however, were much more modest. The KPRA, for instance, would seem to be a figment of the imagination of Communist historians. Yim Ch'un-ch'u, one of Kim's followers during the guerrilla days, revealed that the KPRA was in fact an informal designation for the Second Army of the Northeastern (i.e., Manchurian) People's Revolutionary Army. If this is the case, it is certain that Kim never served as its commander.
    Although a majority of the Second Army (which in fact never consisted of more than 2,000 men) were indeed Koreans,5 the Chinese leaders and troops would not have accepted the unofficial KPRA title, particularly

    [p.377] after the so-called "Min-sêng-t'uan incident” between 1934 and 1936 when most of the Korean Communists in Manchuria were purged by the Chinese on the suspicion that the Korean Communists were in fact the agents of Japanese imperialists.6 At his peak of power and glory in June 1937, when he led a contingent (150 men according to North Korean Communists) to a border town near Hyesanjin and attacked the Japanese local government facilities there (known as the “Hesan Incident" among the Japanese), Kim Il-sõng was the Commander of the “Sixth Division of the Second Army." In spite of the impressive title, however, the total number of troops in his “division” never exceeded 300. Kim also sent, at the instruction of Chinese superiors, a number of agents into various north Korean industrial centers, such as Hungnam, Hamhung, and Wonsan, between 1936 and 1937 to organize branches of the Fatherland Restoration Society (Choguk Kwangbok-hoe), but the arrest of some 800 followers between October 1937 and late 1938 crushed the incipient movement.7 The Manchukuo security police assigned a special task force unit to pursue Kim Il-sõng's group into the Manchurian hinterland as one of several measures taken to crush the last vestiges of the anti-Japanese guerrillas in Manchuria. Kim was forced to withdraw to Siberia in 1941 with a small number of survivors.

    KIM AS A POLITICAL LEADER IN NORTH KOREA
    Kim's accomplishments during the nine years of guerrilla operations certainly would have earned him a place of honor along with the multitude of other guerrilla leaders and revolutionaries Korea had produced since 1905. The 1937 Hesan Incident appears to have earned Kim wide publicity in Korea. A legend was even beginning to develop around his name, although Kim was generally depicted as an old, bearded patriot whose revolutionary career had begun before 1910.

    To possess a record as a revolutionary was one thing, but it was quite another to attain political hegemony over North Korea after 1945. In terms of age, the length of his revolutionary career, actual accomplishments, and reknown, Kim would have faced a stiff competition from the numerous other Korean revolutionary leaders who emerged from underground in 1945. Even if due credit were given to his accomplishments as a revolutionary, Kim Il-sõng could not have been regarded as more than a minor figure in the political arena.

    In North Korea, however, all these ex-revolutionaries had to operate in

    [p.378] the milieu of Soviet occupation, and the support or at least the acquiescence of the Soviet authorities was essential for success. In this respect, Kim Il-sõng was an undisputed winner, for he arrived in Pyongyang already anointed by the Soviet command. There are grounds for doubting that the Soviet forces entered Korea with a premeditated plan; it is more likely that the Soviet command possessed no more detailed instruction than to establish a "friendly regime" in Korea. But it is also clear that Kim was to serve as the Soviet's man in this regime. In this sense, the contest for power in North Korea was concluded even before it began.

  15. FCO 21/307: Kim Il Sung Foreign Office and 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 Far Eastern Department: Korea, 1968
    [pp.14 ~ 15.]
    RECEIVED IN ARCHIVES No.31 / 10 JUL, 1968

    FK 1/9
    Mr. Shamland F .E.D.
    Mr. Pickles

    KIM IL-SUNG: EARLY LIFE

    The June issue of the Asian Analyst repeats some details from the accepted account of Kim Il-sung's life from 1912 to 1945. This account, which can be found in various South Korean and United States sources, is basically as follows:-
    Born 1912; named Kim Song-chu;
    Took a minor part in anti-Japanese activities in Manchuria and Korea before 1940;
    Crossed into the U.S.S.R. in 1941 and went to an army school;
    Adopted the name "Kim Il-sung" previously borne by an older, "almost legendary", anti-Japanese guerrilla hero;
    Entered Korea with Soviet forces in 1945, holding the rank of Captain or Major in the Soviet army.

    2. I have never discovered the origins of the above account and I notice that a Japanese "Who's Who in Korea" (現代朝鮮 人名 辞典) edited in 1962 by the "Kasumigaseki-kai"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Asia Bureau of the Foreign Ministry gives a version more in accord with current North Korean propaganda, viz. :-

    1912, Born Pyong-an Namdo; Moved to Manchuria at the age of 14 and was educated there;
    1929, Graduated from the 毓文 Middle School in Kirin;
    1930, Secretary of the East Manchuria Special Area Communist Youth Committee;
    1931, Entered the Korean Communist Party;
    1932, Set up a guerrilla base or bases in the Ch'angpai (長白) range and the basin of the Sungari;
    1934, Organised a "Korean Revolutionary Army"(軍) combining South and East Manchuria anti-Japanese guerrilla units; 1936, Organised, the Fatherland Resurrection (光復) Society and became its President;
    1937, With part of the "Revolutionary Army" engaged in guerrilla warfare in the area of the upper Yalu of North Korea.

    The Japanese appear to have more evidence than we have of Kim's activities before 1940. They do not mention the adoption of the earlier hero's name. The Japanese might be willing to let us know the sources of their information and it would be interesting to have their view on the alleged adoption of the name Kim Il-sung. Would you agree to propose this to our Mission in Tokyo and copying the letter, perhaps, to Seoul?.

    (R.S. Milward).
    China and Korea Section, Research Department.

    26 June, 1968.
    [pp.2 ~ 3.]
    (To P. J. D. Whitehead, Esq., Tokyo)

    FOREIGN OFFICE, S.W.I.
    15 October, 1968

    Thank you for your letter 10/14 of 24 September about Kim Il-Sung's early life, I have read the short piece in the June 1967 issue of the "Asian Survey" which confirms one or two impressions I had formed and adds one or two details to our knowledge. However it would be pleasant to know more.

    2. If therefore you have time before the end of your present tour to read the relevant parts of Tamaki Motoi's book we should be most grateful for either a translation or a summary of the more interesting facts,
    3. One particular point of interest to us is the origin of the Kim Il-Sung legend. According to Kim Ch'ang-Sun's "Fifteen Year History of North Korea", translated by the JPRS (No. 18,925 of 26 April, 1963, pages 26 to 29) which you will remember as one of the books in JRD dating from your incumbency, the legend originated with an earlier "General Kim Il-Sung" active in the 1920s, who was succeeded by a second Kim Il-sung (né Kim Yang-yong) killed in 1937, who was succeeded by a number of spurious Kim Il-sungs, some tens of whom were decapitated in order to claim the reward set on the leader's head by the Kwangtung Army, and one of whom survived, to establish himself under Russian protection, in 1945, at the head of North Korea, where he still is.
    né : 형용사. [남성의 본명·구명(舊名) 앞에 붙여서] 원래의 이름은, 구성(舊姓)은(cf. NÉE)

    4. Two Japanese "Who's Whos" of Korea, now in our cupboards, make no mention at all of any such legend; and the Asian Survey article to which you referred me says that in the late 1930s or early 1940s "a legend was ...beginning to grow round" the name of the present Kim Il-Sung, "although Kim was generally depicted as an old, bearded patriot whose career had begun before 1910". In this article Chong-sik Lee, who appears to rely directly or indirectly in part on "Japanese police records", thus implicitly denies the existence of the earlier legend and the earlier Kim Il-sungs described with considerable corroborative detail on page 27 of the "Fifteen Year History". We imagine that the Japanese police records of the colonial period, and perhaps also the records of the Kwangtung army, must reveal when and where, and with reference to whom, the legend really did originate.

    5. If your reading of "Kim Nissei no shisō to kōdō (金日成の思想と行動)" fails to clear up the point, would it be possible to tackle the Gaimustio Research Division again to ask whether they can clear it up for us?

    (R. S. Milward)

    P. S. Since drafting the above I have read pages 253 to 293 of Dae-sook Suh's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P., 1967). It seems that he has done the kind of research of which I had been thinking; but if you have time to read the relevant 100 pages of Motoi it would be most valuable to know whether he confirms Suh's conclusions.



  16. 『북한총감(北韓總鑑): 1945-68』, 서울 共産圈問題硏究所 1968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특집논문(特輯論文) 《김일성론(金日成論) - 그 정체(正體)와 노선(路線)과 행적(行跡)》, 『北韓總鑑 : 1945-68』 pp.780~803.
    옛「김일성장군」에 관한 또 하나의 主張은 一九六八年에 출판된 「北韓總鑑」 속에 실린 韓載德의 글이다. 그는 이 속에서 옛 「金日成將軍」은 舊韓國軍 參領出身으로서 一九○七年에 있었던 日帝의 韓國軍 强制解散에 격분하여 滿洲 露領 等地로 亡命, 獨立運動을 계속하다가 一九三○年代에 異國荒野에서 世上을 떠난 愛國鬪士라고 主張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인 것은 연령 문제도 있지만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인데 반해 진짜 김일성 장군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인 것도 있다.


    부록(附錄) 《북괴인명록(北傀人名錄)》의 金日成(김일성), 『北韓總鑑 : 1945-68』 pp.1026 ~ 1027

    지난六八(육팔)년 당시의 中央情報部長(중앙정보부장)이 추천하고 共産圈問題研究所(공산권문제연구소)가 발행한 北韓總鑑(북한총감)에 쓰여있는 金日成(김일성) 즉 金成柱(김성주)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平南(평남)대동郡(군)만경대에서출생
    本名(본명) 金成柱(김성주)
    ▲二九(이구)년滿州(만주) 吉林毓文中學(길림육문중학)졸업
    ▲三(삼)○년 東滿特別區地區(동만특별구지구) 青年(청년) 共産黨(공산당)위원회 書記(서기)
    ▲三二(삼이)년 長白山(장백산) 松花江(송화강)을 근거지로 수십명의 부하와같이 共匪(공비)활동을 하였다함
    ▲三四(삼사)년 東滿州(동만주)유격대 책임자인 金策(김책),北滿(북만)의 崔庸健(최용건),東滿(동만)의 金日成(김일성)이 통합하여 人民革命軍(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함
    ▲三七(삼칠)년 咸南(함남)보천보 日警(일경) 습격
    ▲三六(삼육)년 祖國光復會(조국광복회) 회장
    ▲四一(사일)년 七(칠)월경 소련으로 도피, 그후 소련군 장교가 됨
    ▲四五(사오)년 八(팔)월 소련軍(군) 少佐소좌)의 명목으로 소련군과같이 入北(입북)
    ▲1945년 十(십)월 北朝鮮(북조선) 五道 共産黨(5도 공산당) 責任者(책임자) 및 熱誠者(열성자) 대회에 소련군 사령관의 主宰(주재)로 등장
    ▲1945년 10월 14일 소련 점령군 사령관에 의하여 김일성 환영대회 개최됨.
    ▲1945년 12월 朝鮮共産黨(조선공산당) 北朝鮮組織委員會(북조선조직위원회) 責任祕書(책임비서)

    ..............

    『북한총감(北韓總鑑)』의 서두에 나오는 추천문(推薦文)을 쓴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金炯旭, 1925 ~ 1979)이다. 이 책에는 김일성의 경력으로 보천보 사건을 기록하는 등 북한이 주장하는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대체로 인정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후일 김형욱이 박정희 정권에서 밀려나 미국으로 망명한 후, 김경재(金景梓)가 그의 증언을 토대로 박사월(朴思越)이라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썼다. 후일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 회고록에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면서 박정희 정권이 그의 항일 경력을 인정하기 부담스러워 가짜로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므로 이 책이 그가 진짜가 맞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 본인이 추천한 도서에 위와 같이 김일성 항일 경력에 대한 북한 주장을 대체로 인정하여 그대로 쓰고 있으므로, 김형욱 회고록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일찍부터 이름이 알려졌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나온 것이지, 그가 진짜로 항일투쟁을 했는지 아닌지와는 무관하다. 북한총감의 특집논문 《김일성론(金日成論)》을 쓴 한재덕은 해방직후 김일성의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남한에 귀순한 사람으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것으로 인정하나, 그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고 말한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북한 김일성은 위 내용과 달라 보천보 사건의 주역도 아니고, 조국광복회 회장도 아니며, 전사한 동명의 선배 지휘관의 경력을 도용하였다.

    《참고 :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5>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埸(등장) (4) 서울 오라는 密書(밀서)거절 1972.01.22 동아일보 4면 기사》

  17.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김일성(金日成)과 북괴(北傀)의 실상(實相)』, 서울, 공산권문제연구소(共産圈問題硏究所), 1969
    목차
    김일성의 정체와 정책 ... - 33
    우선 김일성부터 알아보자 ... - 34
    김일성의 내력(來歷) ... - 36
    김일성 우상화를 벗긴다 ... - 38
    민족의 반역자요, 가짜다 ... - 48

1970년 ~ 1989년

  1. 음산한 北韓(북한) : 歸還漁夫(귀환어부) 座談會(좌담회) 1970.07.29 동아일보 6면
    平壤(평양)거리 쓸쓸 ┉ 住民(주민)들 핏기없고, 國校生(국교생)도시락엔 쌀한톨 안 보여

    參席者(참석자) 명단 ▲崔海鎭(최해진)(二四)·慶北(경북) 영일郡(군) 용포邑(읍) : 六八(육팔)년 十一(십일)월 七(칠)일 피납 ...
    ▲崔海(최해) : 하루 四시간씩 思想教育(사상교육)을 받았읍니다. 주로 金日成(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투쟁사라는 것인데 그런 영화까지 보여주더군요. 저는 金日成(김일성)이가 나이가 많은 줄로 아는데 현재의 金日成(김일성)이는 가짜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지도원이 진짜라고 마구 우겨대더군요.

    ▲禹在(우재) : 교양시간이 끝나면 술좌석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

  2. 귀환 漁夫(어부) 기자 회견 / "金日成(김일성) 가짜 아니냐" 물은 船員(선원) / 끌려간 후 行方不明(행방불명) 1971.03.24. 동아일보 7면
    【仁川(인천)】지난 二十(이십)일 자유의 품으로 돌아온 귀환어부들은 피납 당시 북괴 경비정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만복二(이)호 선원 崔(최)상일 씨(三九(삼구))는 얼굴에 二(이)발의 총탄을 맞고 피살됐으며 다른 四(사)명이 익사했고 북괴의 세뇌교육에 항거하던 제七(칠) 남일호 선원 金(김)일영씨(三六(삼육))가 행방불명됐다고 폭로했다.
    ………
    납북어부들은 몽금포 앞바다에 도착, 선실안에 감금된채 하루를 지내고 돌아올 때까지 金日成(김일성)의 우상화 교육등 세뇌교육을 받았는데 제七(칠) 남일호 선원 金(김)일영씨는 "金日成(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냐"고 물었다가 그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 됐다. ………

  3. 조연명(曺然明, 1914 ~ 1989), ≪부전자평(父傳子評)④ 나의 아버지 조만식(曺晩植)≫ 『세대』 제9권 통권90호 (1971년 1월) pp.343-351 : 국회도서관 온라인 열람 가능
    조연명(曺然明, 1914 ~ 1989), ≪아버지(曺晩植)를 생각한다≫ 『북한(北韓)』 창간호 (북한연구소, 1972년) pp.78-81

    조연명(曺然明, 1914 ~ 1989), ≪민족해방과 아버님≫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편,『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회상록』 (서울: 조광출판, 1995.10.01) p.197
    10월 어느날로 기억된다 하루는 고려호텔에 누런 군복을 입고 가죽장화를 신은 청년 5,6명이 찾아왔다 그 중의 하나가 송효경(宋孝璟) 비서실장에게 "김일성 장군이 환국하셨습니다. 조 위원장을 만나 뵈러 왔으니 안내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송 실장이 "김 장군이 지금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자기가 김일성 이라는 것이다. 김일성 하면 머리가 허연 노장군을 연상해왔던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머리만을 조금 기르고 뒷머리는 바짝 치켜 깍은 모습이 나처럼 30대 초반밖에 안 되 보이지 않는가. 그는 아버님 방에 들어가 한 30분 이야기한 후 돌아갔다. 내가 방에 들어가니 아버님께서는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서 적어도 내 나이쯤은 된 줄 알았는데 연령이 네 나이 또래밖에 안 되더구나. 그렇다고 당신은 가짜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난처했다."고 하셨다. 그후 그는 고려호텔에 자주 나타나 가끔 나와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도 많았다. 나는 그를 '김형'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조형'이라고 불렀다.
    해외에서 돌아온 김두봉(金枓奉), 무정(武亭) 최용건(崔鏞健)도 귀국 인사 차 고려호텔에 온 적이 있다.

    아버님께서 오산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이 학교를 다녔다는 최용건은 아버님께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었다. 접견실에 아버님이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최는 얼른 내려서 무릎을 꿇고 넙죽 큰절을 했다. "선생님의 명성은 잘 들어왔습니다. 해외로 도피하시지 않고 국내에서 끝까지 무저항 불복종하신 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고 인사를 올리더니 최는 "앞으로 선생님의 수족이 되어 무엇이든지 하겠으니 하명만 해주십시오"라고도 했다.

  4. 김재순(金在淳, 1923 ~ 2016.5.17) 전 국회의장의 '김일성 가짜' 증언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상) 1971.10.30 동아일보 4면
    ▲金在淳(김재순)씨 (四九(사구)·당시 以北學聯(이북학련) 총무부장 현國會議員(국회의원) 共和(공화))

    - 金九(김구) 선생이 北行(북행) 길에 오르시던 十九日(십구일) 우리 以北學聯(이북학련) 소속 청년 二十(이십)여 명은 이른 새벽부터 京橋莊(경교장)에 나가 정문 앞에 연좌하며 金九(김구) 선생이 가시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말렸다. 우리 일행 가운데 鄭松模(정송모)(以北學聯(이북학련) 부위원장 六(육)·二五(이오) 사변시 戰死(전사))는 金九(김구) 선생의 北行(북행)에 항의,삭발까지 해가며 적극적으로 시위했다. 나도 金九(김구)선생이 새벽에......

    내 개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내가 해방후 平壤(평양)에 잠시 있을 때 金日成(김일성) 入北(입북) 환영식이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있었다. 그때 소련군 사령관「스티코프「는 여러분의 金日成(김일성)을 소개한다면서 金日成(김일성)을 平壤(평양) 시민에게 소개했다. 平壤(평양) 시민이나 나는 金日成(김일성)이 日帝時(일제시) 獨立(독립)운동을 하던 진짜 金日成(김일성)인 줄 알고 그가 白髮老人(백발노인)일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새파란 젊은 金日成(김일성)이 나타나자 모두 가짜라고 실망했다. 金日成(김일성)은 처음에는 韓國(한국) 말도 제대로 못했다. 金日成(김일성)의 정체를 아는 우리는 金九(김구) 선생이 共産黨(공산당)과 협상을 벌여 봐야 성공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다.

    平壤(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던 환영대회에 나오신 曺晩植(조만식) 선생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오셔서 환영사가 아닌 애국연설을 하셨다. 내용은"백두산 천지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어제까지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눈물이었으나 이제 지금의 눈물은 해방과 환회,기쁨의 눈물이 되었다. 일제하에서 유언하기를 나는 내가 죽더라도 내비석에 아무런 글을 쓰지말고 두 눈만을 그려달라 했다. 왜냐하면 죽어서라도 해방되는 우리나라를 보기 위해서다.그러나 지금 살아서 해방을 맞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의 以北學聯(이북학련)은 어떤 政黨團體(정당단체)와 직접적인 유대를 맺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金九(김구) 선생을 따랐다. 그러나 共産主義(공산주의)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協商(협상)과 北行(북행)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 출생. 어릴 때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 옆집에 살며, 많은 감화를 받았다. 해방 후 평양에 온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선 집회의 현장에 있었으며, 김일성은 당시 한국 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 말에 능할 뿐, 한국어는 잘 못했다고 많은 사람이 증언했다.

    <어느 老 정객과의 시간여행> (김재순 · 안병훈 대담) : 友巖 김재순(金在淳)이 말하는 한국 근현대사 (도서출판 기파랑, 2016년 6월20일)

  5. 횡설수설 1972.04.14 동아일보 3면
    김일성(金日成)이 가짜이며, 본명도 金成柱인지 金聖柱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지적
    ◆도대체 金日成(김일성)은 八·一五(팔일오) 解放(해방) 후 처음으로 國民(국민)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어두운 그늘을 지니고 있었다. 가짜 金日成(김일성)이라는 衆論(중론)에 대해 진짜라고 줄곧 우겨대왔었는데 마침내 감출 길이 없었는지 本名(본명)이「金成柱(김성주)」라는 것은 是認(시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도 造作(조작)이고 實名(실명)은「金聖柱(김성주)」라는 異論(이론)도 一部(일부)에는 있다고 한다. 하여간 자기 이름 석字(자)부터 分明(분명)치가 못한 爲人(위인)이다. ...

  6. 문화공보부, 《김일성(金日成)의 회갑(回甲)을 둘러싼 북괴(北傀)의 광태(狂態)》 (문화공보부, 1972.04) pp.29 ~ 39.
    북한 김일성을 가짜라 하고,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의 말을 다수 인용함.

  7. 박갑동(朴甲東, 1919~ )의 김일성 가짜 증언
    박갑동은 그가 쓴 여러 글에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하면서, 자신이 겪은 3가지 사례를 들었다. 보천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출소한 박달(朴達, 1910~1960)박금철(朴金喆, 1912~1967 ?)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보였더니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한 것,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부하였던 사람이 북한 김일성의 부하가 아니라서 인민군에서 진급이 안 되어 매일 술만 마시고 있었다는 것, 남로당 숙청 당시 산골로 추방된 박갑동에게 밥해주는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6사장 김일성의 부대에 있다 1937년 전사했는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있다고 한 것 등이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朴憲永)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 안에 총 정치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朴金喆)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朴達, 1910~1960)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 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뒤에 박금철이 당 중앙간부부장 시대에「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이 발생되었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가는 남로당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당 부위원장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나 드디어 김일성의 손에 의하여 이효순과 같이 숙청 당하고 말았다. 일반 사람들은 박금철을 김일성의 직계로 알고 있었으나(보천보 사건 관계로) 사실은 평양의 김일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며 박헌영의 덕을 입은 사람이다.

      6.25 당시 박헌영이 군 총정치국장, 박금철(朴金喆, 1912~1967 ?)이 부국장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6][7]

      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 : 박갑동<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1974.03.28 종합 3면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前代)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자이며 ...

    •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50)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5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p.137~138
      ​우리는 서울의 각 신문사가 평양에 파견하는 기자들에게 각종 편의와 지원을 해주고 각 방향에서 소위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김성주의 사진을 많이 찍어 오도록 부탁했다. 그들이 찍어 온 사진이 1백장을 넘었다.

      이 사진을 박달(朴達)과 박금철(朴金喆)에게 보였다. 박달과 박금철은 1937년 6월 김일성이 보천보 시가지를 습격했을 때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협조했으며 특히 보천보 시가지 지도를 그려 지형을 김일성에게 보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8.15에 석방되어 공산당이 조직한 혁명가구원회(革命家救援會)에서 병 치료와 휴양을 하고 있었다. 특히 정태식은 그들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같이 수감되어 있어 친했다. 10월 14일 평양운동장에 나타났던 자칭 '김일성 장군'이라는 자의 사진을 박달과 박금철에게 갖다 보이니 두 사람은 펄쩍 뛰며 전혀 다른 사람이며 나이도 전혀 틀린다고 했다.그들은 그때까지 서울의 공산당이 중앙이니 서울에서 일하려고 병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곧 평양에 가서 사실을 알아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달은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고, 박금철은 전신이 퉁퉁부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화물자동차로 개성까지 태워 주었을 뿐 아니라 안내원을 시켜 박달을 등에 업혀 38선 입구까지 보내주었다.

      두 사람은 평양에 도착하여 곧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에게 면회를 신청했으나 분리당하여 각각 감금당하고 만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한 것이 11월인데 해가 바뀌고 다음 해 1월말에야 그들은 김일성이란 자에게 호출당했다.그들이 면회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보다 열 살이나 젊어 보이며 키가 커 보이는 젊은 자가 "이 새끼! 전향하여 왜놈들한테 잘 얻어먹어 살이 쪘구나. 변절한 놈들은 보기도 싫어! 빨리 싹 없어져!"라고 호통을 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박금철은 앉은뱅이 박달을 평양에 남기고 혼자 강계로 떠나면서 서울의 박헌영에게 자칭 김일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왔다. 박헌영이 박금철의 보고를 권오직과 조두원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듣게 된 것이다.
      박갑동, 『북조선 악마의 조국 : 남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경악의 사실』 (서울출판사, 1997) pp.227~236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59 중앙일보 1990.11.10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p.395~396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 전사한 김일성의 부하가 북한군에 들어갔으나 북한 김일성이 자신의 상관이 아니기 때문에 진급도 안 되어 하릴없이 술만 마신다고 함.
      이남에서 평양에 간 친구들중 군복을 입은 자는 인민군 총정치국 제4부장(민청관계) 이환기(대령)이고 제7부(적진와해공작)의 설정식ㆍ김동석(이들은 소령군복)과 최고사령부 정찰국의 최상린(소령군복)이 있었다. 최상린은 경주사람으로 유진오의 처질서이며 와세다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

      나의 1년 후배로 나와 친했었던 그는 평양시내에 나오면 같이 한잔 하자고 종종 나를 찾아왔었다. 그 관계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제7부소령)도 알게 되었고 그외 몇몇 군인들도 알게되어 술도 같이 마시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40세쯤 된 만년 소령 두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1937년 함남 보천보를 습격한 진짜 김일성의 부하이고 한사람은 최용건의 만주시대 부하였었다. 이들 두 소령은 매일 아무일도 하지 않고 소주만 마시고 있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순진해 나는 흥미를 느껴 그들을 만나면 소주를 사주고 같이 놀게 되었다. 하루는 셋이서 술을 마시는데 김일성의 부하가 최용건 부하를 보고 술이 취해 『동무는 상부동무가 살아 있어서 좋겠소』라는 말을 했다.
      나는 즉석에서 이 말을 받아 『동무는 직속상부인 김일성 동지가 있는데 더 좋지 않소?』하고 물었다. 그는 슬픈 상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눈치를 알아챘다. 그후 나는 일부러 그 소령과 단둘이서 술을 마시며 보천보 습격사건의 진상을 물어봤다.

      그 당시 만주에는 의복감이 아주 귀해 조선에서 무명베를 많이 구해갔는데 김일성 부대에서는 군복감을 충당하기 위해 보천보를 습격하게 되었다.
      압록강 뗏목을 타고 건너와 밤중에 보천보 시오리 지점에 도착해 박달ㆍ박금철의 상세한 보고를 듣고 자기는 습격조가 아니고 약탈한 옷감의 운반조로서 등에다 옷감을 지고 달아나는데 일본인들의 추격이 심해 압록강을 겨우 건너 보니 등에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드디어 일본군에 포위되어 양목정자(楊木頂子)라는 곳에서 싸웠으나 자기는 달아나다 보니 김일성 사장(師長)은 피를 흘리며 밀림속으로 기어들어 갔는데 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들 남은 대원들은 41년에 소련땅으로 넘어갔는데 자기는 글을 전혀 몰라 소련 군인 집에 있다가 8ㆍ15가 되어서 평양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지금 평양의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진짜 김일성 부하들은 한사람도 군관학교에 보내주지도 않고 밥만 먹이고 놀리고 있어 답답해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박갑동(朴甲東, 1919~ ), 평양의 '金日成'이 '普天堡 습격'의 주인공일까,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大邱 : 螢雪出版社, 1991) p.183

      1951년 평양에서 보천보를 김일성과 같이 습격한 군인과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이던 김일성은 전사하고 없어 출세도 못하고 만년 소령으로 있다."고 했다.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66 중앙일보 1990.11.26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411
      남로당 숙청시 박갑동이 직책에서 쫓겨나 산골로 추방되어 밥해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아들이 만주서 김일성 장군의 대원이었다가 1937년 전사했는데, 지금의 김일성은 그 김일성이 아니라서 자신은 아무 혜택도 못받고 있다고 함.
      1년이나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단 둘이 사니 밥해주는 할머니와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 할머니는 46년까지 만주 간도에서 살았는데 아들은 김일성 장군의 대원이었다. 37년에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대원으로 전사했다면 훈장도 받았을 것이요,할머니는 혁명가 유가족으로 연금도 받아 편안히 잘 살 것인데 왜 이런 산골에 와서 식모짓을 하며 고생스럽게 삽니까?』하니 『아니오. 사람이 달라요.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 아들이 죽은 곳도 아는데 무덤하나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하며 말을 더 하려 하지 않았다.

    • 『내가 아는 박헌영』(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
      박갑동,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1983, 서울, 인간사. p.190

      해방 직후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이었던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은 전력을 잘 알 수 없는 김일성에 대해 가장 직설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했다. 그는 1947년 여름 소련 유학을 간다면서 평양에 들렀다가,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현상이 했다는 발언을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증언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느냐. 그러나 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찌기 말이다. 박헌영은 25년에 조선 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의 경력이야말로 한점의 흐린데도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지리산특보(제5호) - 오호! 박헌영 선생 1953년 8월 20일 발행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했다는 평양 방송을 듣고 지리산 빨치산들이 김일성에게 분노하는 소식지이다. 이현상은 이보다 한달 뒤인 9월 17일 사살되었다.

  8. "金日成(김일성) 개인숭배 北傀(북괴), 極(극)에 달해" 노르웨이紙(지) 보도 1974.05.31 경향신문 1면
    진짜 김일성은 "生存(생존)해 있다면 89내지 90세인 진정한 抗日鬪士(항일투사)
    “金日成(김일성) 개인숭배 北傀(북괴), 極(극)에 달해" 노르웨이紙(지) 보도

    「노르웨이」의 유력한 朝紙紙(조간지)인 「모르겐·블라레트」紙(지)가 지난 16 일 韓國(한국) 관계 기사를 싣고 "北傀(북괴)의 독재자 金日成(김일성)에 대한 個人(개인) 숭배는 極(극)에 달해 이제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父母(부모)들까지도 神格化(신격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駐(주)「노르웨이」韓國公報官(한국공보관)이 31일 文公部(문공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 신문은「잉게게르트·갈퉁」기자의 서울發(발) 기사에서 "生存(생존)해 있다면 89 내지 90세인 진정한 抗日鬪士(항일투사) 金日成(김일성) 장군의 이름를 도용한 62세의 가짜 金日成(김일성)의 正體(정체에 관한 얘기는 洪水(홍수)같이 밀려든 북괴로부터의 선전 간행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어 "가짜 金日成(김일성)의 實弟(실제)이며 남북조절위 平壤(평양)측 공동위원장인 金英柱(김영주)는 단 한 번도 회담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金日成(김일성)의 아들은 후계자로서 기반을 닦고 있다"면서 總兵力(총병력) 2백67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공공연히 對南赤化(대남적화) 통일을 부르짖고 있는 북괴에 대해 韓國(한국)은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9. 북한도 김일성 장군 전설이 1910년대부터 있었다고 인정
    金日成(김일성)「傳說的 英雄(전설적 영웅)」 北傀(북괴), 造作(조작)에 混線(혼선) 1974.07.31. 경향신문 1면
    北傀(북괴)는 金日成(김일성)을「傳說的(전설적)인 英雄(영웅)」으로 조작하는데 혼선을 빚고 있다. 그동안 北傀(북괴)는 각종 선전수단을 동원,金日成(김일성)이 白頭山(백두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느니,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 다니는「전설적 영웅」이라고 선전해왔는데 27일 노동신문 論說(논설)은 이같은 전설은 사실이 아니라 "首領(수령)에 대한 신뢰와 존경과 欽慕(흠모)를 전설적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이 論說(논설)은 또한 "1910 년대의 抗日武裝(항일무장) 투쟁시기부터 우리들 속에 전해오는 전설 속에는 위대한 首領(수령)을 해와 달과 별에 비기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하고 北傀 金日成 (북괴 김일성)이 「金一星(김일성)」으로 불려지다가「金日成(김일성)」으로 불려졌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金日成(김일성)이 1912年生(년생)이므로 1910年代(연대)에 이미 떠돌고 있던 전설들이 抗日英雄 金一成 將軍(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것이지 北傀 金日成(북괴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임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内外通信(내외통신)】
    북괴 중앙방송은 26일金日成(김일성)이"축지법을 비롯한전신술 장신술 영신술을 마음대로 쓰고 솔방울로 착탄을 만들고 모래알로 쌀을만들며 가랑잎한장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간다"고보도했다고 27일 내외통신이 보도했다. 허무맹랑한 이같은 내용의 보도가 북괴의 정규방송을 통해 한낮에 방송됐다고 내외통신은 전했다.
    ◇┉北傀(북괴) 방송은 10일 金日成(김일성)의 東歐(동구)와 「아프리카」巡訪(순방) 행각에 관한 보도에서 “수령이 지날 때마다 사시장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히말라야」 산줄기와 「알프스」영봉들도 머리를 숙이고 地中海(지중해)와 大西洋(대서양)도 숨을 죽여 거울같은 길을 따라 꽃물결이 일고 대륙을 뒤흔드는 환호성이 올랐다"고 했다고 12일 內外通信(내외통신)이 보도.

    金日成(김일성)에 대한 個人(개인) 숭배와 神格化(신격화)에 더 열을 올린 北傀 (북괴) 방송은 또 "수령을 끝없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로서 수령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보여주는 현시대의 장엄한 潮流(조류)이며 영원한 서사시"라면서 수령을 모시었기에 20세기는 榮光(영광)의 세기로 빛나고 있다" 고 허황한 美辭麗句(미사여구)를 총동원했다는 것.

    이 방송은 이어 "수령께서 떠나던 날밤 갑자기 번개가 울려 소나기가 쏟아지는 데 한 할머니는 온밤을 잠들지 못하면서 수령의 심려를 덜어드리지 못하는 人民(인민)의 죄송함을 금치 못하고 人民(인민)의 가장 큰 행복인 수령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고 보도.


  10.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김일성 장군 전설 채록 정리.

    단천 김일성, 김광서 발굴
    6사장 김일성의 전사 문헌 발굴, 관계자 증언 채록
    김성주의 유격대 투신 이전 행적 증언 발굴

    [p.32] 더욱 흥미로운 證言은 以北의 金聖柱와 平南 大同郡 龍山面 下里 七谷의 彰德學校라는 普通學校에서 같이 공부했던 東國大學校의 趙義俊博士로부터 들을 수가 있었으니 그는 彰德學校 五學年 때 (1924년) 「김일성장군」이란 분이 滿洲에서 獨立運動을 위해서 活躍하고 있는데 日軍들이 붙잡으려고 해도 못 붙잡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以北의 金聖柱도 어릴 때부터 「김일성장군」이란 名聲 높은 獨立鬪士의 이름을 듣고 자랐음이 틀림없다.

    옛 「김일성장군」의 實在와 또 以北의 金聖柱가 어릴 때부터 옛 「김일성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는 것을 證言해 주는 사람으로 玄應洙(1892년생. 市內 금호동 거주)씨가 있다. 玄씨는 “1919년 2월 15일에 平南 大同郡 龍山面 下里 七谷에 있는 彰德學校에 敎員으로 부임했다. 當時 校長은 金聖柱의 外祖父인 康敦煜長老였으며 金聖柱는 아직 學校에도 가기 前이었는데 그 때는 外家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以北의 金聖柱傳에도 그때 外家에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滿洲에서 活躍하고 있는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자주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 장군의 活躍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에 찬 마음으로 주고 받고 있을 때 金聖柱는 외할아버지인 康長老 곁에 앉아 있곤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라고 玄翁은 筆者에게 증언해 주었던 것이다.

    [pp.122 ~ 124] 어느날 三成학교 선생 崔衡宇(당시 三三,四세, 定州사람)가 金聖柱에게 『만주에서는 中國사람식으로 堂號(別號)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堂號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金聖柱는 좋은 堂號 하나를 지어달라고 崔衡宇에게 부탁했다. 崔衡宇는 堂號 몇 개를 지어 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金聖柱는 여러 개의 堂號 가운데서 「一星」 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崔衡宇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 하며 「一星」 이란 堂號를 써 주었다. 이때 金聖柱가 여러 개의 別號 가운데서 하필이면 「一星」을 골라잡은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金佐鎭장군을 죽인 金一星, 間島폭동 사건의 金一星 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면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金聖柱가 「一星」이 마음에 든다고 골라잡으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는 그 心理狀態에는 다음의 두가지 사연이 영향했다고 분석할 수가 있다. 1919년 2월 15일에 大同郡 龍山面 下里에 있던 彰德學校에 선생으로 부임했던 玄應洙(八二세, 서울 金湖洞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창덕학교에 부임한지 꼬박 10여일만에 三一운동이 터졌다. 창덕학교에서는 三월 四일에 만세를 불렀다. 당시 교장은 康敦煜장로였고 四년제 학교에 학생은 50명 정도였다. 그때 金聖柱는 外祖父인 康長老한테 와 있었는데 학교에 다니기 전이었다. 三一운동 직후부터 露滿 국경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용감히 싸우고 있는 김일성 장군 (일본 육사출신 金日成 장군에 해당)의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글자는 어떻게 쓰는지 몰라도 김일성 장군이라 했다. 나는 교장 康장로집 안방에서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때 金聖柱는 康장로 무릎 앞에 앉아서 우리 어른들 이야기를 듣곤 했다.』

    金聖柱는 어릴 때 들은 「김일성」 장군 이름에 영향되어 「一星」이란 별호를 골랐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래서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한가지 사연은 金聖柱가 五家子에 있을 때 같은 패의 한 사람인 邊達煥의 아버지 邊大宇로부터 또 한번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邊大宇는 鐵馬團이란 獨立團의 단장이었던 사람인데 鐵馬團은 후에 正義府에 흡수되었다. 이 邊大宇가 韓日合倂 직후부터 「김일성」 이란 獨立軍 隊長이 咸鏡道와 間島 사이에서 용감하게 싸웠는데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端川출신 金一成장군에 해당)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李善一씨는 金聖柱와 같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金聖柱가 「一星」을 고른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도 있음직하다.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 1974.03.23 ~ 1974.09.03의 기간에 중앙일보에 연재 (총 53회)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회) 서장 - 5인의 「김일성」 중앙일보 1974.03.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53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중앙일보 1974.09.03 종합 3면

  11.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북한학보 제1집 (북한연구소 1977년) pp.51-81.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1939.09.01)에 실린 6사장 김일성의 신원 기록을 처음 발굴하여 번역, 소개함. : p.79

    『....咸鏡南道 國境地帶 鴨綠江 對岸에 蟠踞하는 소위 金日成 一派라 稱하는 武裝團은 同軍(東北抗日聯軍 – 筆者) 第1路軍 第2軍 第6師로서 金日成을 師長, 魏民生을 政治委員으로 하는 韓人 中國人 混合의 武裝團이다. (金日成의 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說이 있으나 本名 金成柱, 當 29歲 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의 出身으로서 幼時에 實父母를 따라 間島方面으로 移住하여 그 지방에서 成人이 되어 武裝團에 投身한 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며, 그의 實母는 생존하고 있는 모양이다.)』

    출처 :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9.09.01) pp.8~9》

    김창순은 이 기록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을 동일인으로 보았으나, 북한 김일성이 구전상의 김일성 장군은 될 수 없으므로 가짜라 판단함.

    진짜 김일성 장군은 김양녕이라는 견해를 만년까지 유지 : 압록강 의주 일대의 풍문을 근거로 함. 기록적 근거는 없다. 양림이 만주에서 활동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이므로, 1920년대 초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은 아닌 것으로 판단됨.

  12. 남북자료 뒤범벅…북한이해 어려움 1989.01.25 한겨레 5면

    김일성 진위에 대한 각 연구자들의 의견 소개

  13. 거진읍 거주 월남민 김청구씨와 부산 거주 월남민의 아들 이용섭씨의 '가짜 김일성' 증언

    월남前 듣고본 바 金日成은 가짜다. <조선일보 1989년 4월 13일자 독자 의견>

    지난 4월6일의 MBC [주체 사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라는 프로에서 모 대학생이 질문에서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는 학자도 있다고 하며 의혹을 불러 일으킨데 대해 1.4후퇴때 월남한 산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피력코자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12월까지 북한 독재정권하에서, 화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노동계급의 상징인 공도 흥남 비료공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그후 함흥 교원간부학교를 나와 중학교 교편을 잡으면서 북한의 정치-경제-사회의 실정을 속속들이 체험하였다.
    어느날 신문에서[현 김일성장군의 본명은 김성주인데, 옛 항일투사 김일성의 이름을 딴 것은 그 공로와 명예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라고 쓴 것을 분명히 보았다. 월남후 고향지식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그들도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그 기사를 보고 자뭇 어리둥절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2~3일후 당 간부들이 직접 다니면서 그 날짜의 신문을 회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김일성의 약력은 서서히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오히려 [백두산]이란 장편서사시가 발간되어 신출귀몰, 축지법을 쓰던 애국지사로 부각시키고, 보천보 전투의 주동자라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역사를 왜곡-조작한 것이다. 그당시 노인들은 새파란 사람이 어찌 그 이름도 드높은 노장 김일성으로 둔갑했느냐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확실히 가짜임을 자신있게 입증한다. 그것도 모르고 우상화 놀음에 속고 있는 북한동포가 억울하고 가련하기만 하다.
    <김청구.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이용섭, 나의 부친에게 들었던 얘기 둘 당당뉴스 2006년 12월 06일
    위 조선일보 김청구씨의 독자투고를 보고 자신의 부친이 생전에 한 말과 똑같아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함. 생면부지의 월남민들이 같은 증언을 하고 있으므로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돌아가신 내 부친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었다. 부친은 1976년 1월 초 괴로운 인생살이를 불신자로 끝마쳤다. 들었던 얘기들 중 두 가지가 젊은 시절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는 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친이 젊은 시절 북한의 어느 바닷가에서 용(dragon)을 봤다라는 것이다. 당시 혼자만 본 게 아니고 여럿이서 봤다고 했다. 함경도 어디라고 했던 것 같다.

    환시(환상)가 아니고 실제로 봤다고 했다. 살아 오면서 김일성이 문제는 어떤 실향민이 조선일보 독자투고를 통해 부친과 똑 같은 주장을 하여 사실 확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과거 부친과 함께 피난온 이들로부터도 여러 번 들었으나 전혀 모르는 이가 신문에서 그런 주장을 할 때 적잖이 놀랐다.

    당시 나는 김일성이를 진짜 김일성이로 알고 있었다. 나중에 실제로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해 보니 가짜였다.
    이용섭 : 54년 부산 생, 프리랜서, 전 월간 <시사정경> 객원기자, 전 월간<월드 코리아> 객원기자(차장대우), 전 월간<선택> 객원기자(차장)

  14. 김형욱(金炯旭, 1925 ~ 1979), 박사월(朴思越), 『김형욱 회고록 (제1 ~ 3부)』 (아침, 1985) : 제II부 pp.262~263
    박사월(朴思越)은 김경재(金景梓) 전 국회의원의 필명이다.
    [p.262] ... 김일성(金日成)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전직 대한민국의 중 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으나 장구한 민족사의 체계로 보아서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면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抗日)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

    [p.263] 역의 동북항일군(東北抗日軍)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 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적기는 하였으나 그가 함남(咸南)의 길주(吉州), 명천(明川) 등지의 남삼군(南三郡)에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普天堡) 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김일성은 완전한 〈가짜〉라는 대목이 이승만정권 이래 한국의 반공전선교육의 가운데 토막이 돼 오고 있었다. 이것은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도 친일(親日)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는 김일성의 그만한 경력도 묵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재직중에 김일성의 경력을 인정해 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식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공교육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일성이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 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反共文化)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容共)이란 딱지는 천형(天刑)만큼 잔인한 저주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일성의 해방 전 경력이 오늘의 김일성의 모든 것 을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6·25를 시작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초함으로써 그가 동쪽에게마저 폭력적인 공산주의자이며 국제공산주의의 세계적화전략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다.

    김형욱은 비록 중앙정보부장을 지냈지만, 김일성 가짜설의 유래도 모르고 남한에서 조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남한에서도 김일성이 막연히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한 정도로 기술해 오다가 박정희 집권 후인 1962년경부터 북한의 주장을 따라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김형욱 자신이 중앙정보부장 재임 때 추천문을 쓴 『북한총감(北韓總鑑): 1945-68』 (서울, 공산권문제연구소, 1968)의 부록 《북괴인명록(北傀人名錄)》의 김일성 경력에도 그의 항일 게릴라 활동과 보천보 사건, 조국광복회 조직 등이 버젓이 나와 있다.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라 만주군 소위를 1년 하다 중위 진급 1달만에 해방을 맞았으며, 독립군을 때려 잡았던 일도 없다. 김형욱의 말은 대부분 사실 관계도 틀렸고, 권력에서 쫓겨난 화풀이로 박정희를 중상비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제목부터 오류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지, 그의 독립운동 여부와는 무관하다.)

  15.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27)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0.25 종합 5면
    박갑동도 일제시대에 북한 김일성이 아닌 만주에서 활동한다는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의 활약에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역시 조선독립투쟁의 중심은 조선국내며 그 주체세력은 국내 인민대중이다. 그 인민대중의 핵심은 노동자·농민·진보적 지식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의 조직이 조선공산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의 독립을 해주며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 것은 완전한 환상이라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게되니 상해임시정부라는 것은 조그마한 망명자 집단에 불과하며 만주에서 싸운다는 김일성 장군(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동명이인의 항일투사)도 일개 만주교민의 한 파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까지는 만주의 김일성 장군이 백마를 타고 조선에 쳐들어와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박갑동은 자신이 공산주의자 출신이라 박헌영 등 국내의 공산주의자들만 진짜 항일투쟁을 한 것으로 보려는 것 같다. 국내에서 투쟁한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만식, 송진우등 우파도 많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국내서 하건 국외에서 하건 그런 것을 통해 실제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세계대전 등으로 정세가 급변하여 일본이 패망하는 경우에나 독립이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승국에 한국민의 의사를 반영시킬 수 있는 이승만과 같은 외교노선이 더 중요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1. 김창숙(金昌淑, 1879 ~ 1962)의 북한 김일성에 대한 견해 : 박갑동(朴甲東, 1919~ )의 증언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61 | 전 남노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중앙일보 1990.01.26 종합 3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p.164~165
    경북 성주 출신인 김창숙은 이북의 김일성에 대해서는 「부지소종래(不知所從來)」(어디서 온지도 모른다)라 하여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은 하나이며 서울이 수도이니 서울에 수립되는 정부가 유일한 중앙정부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김일성이 정말로 독립운동을 했다면 왜 서울에 와서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고 평양의 소련군 밑에 숨어 평양에서 딴전을 피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창숙은 북한 김일성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자라하여, 유명한 김일성 장군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김일성(金日成)」 : 한승조(韓昇助) 외 공저 『해방전후사(解放前後史)의 쟁점과 평가 1. 독립 건국운동의 주도세력은 누구인가』 (螢雪出版社, 1990) 제5장 pp.152 ~ 167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북한연구소, 2004.06) pp. 157-170

    저자가 1950년대부터 연구해 온 북한 김일성의 진위문제에 대한 만년의 견해가 잘 정리되어 있는 문헌임.
    저자는 1950년대부터 진짜 김일성 장군은 김양녕(金陽寧) 장군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중국에서 항일투쟁한 조선인들의 행적이 알려지면서부터는 김양녕(金楊寧)으로 한자를 바꾸어 적고, 이 사람은 평안북도 출신의 김훈(金勛)으로 동만주 반석현에서 최초로 항일 공산 유격대를 만들었으며, 양림(楊林, 1901 ~ 1936) 또는 양녕(楊寧)의 이름을 쓰기도 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근거는 국경지방이나 동만주의 한인들 사이에 그런 말이 퍼져 있었다는 정도이고, 기록상으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또 양림이 동만주에서 활동한 기간은 1930년대 초반 2년 가량뿐이므로 1920년대 초부터 유명했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그가 양녕(楊寧)이란 변명(變名)을 쓴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 앞에 또 김(金)씨 성을 덧붙여 김양녕(金楊寧)이라 하는 것도 이상하다.
    또한 사상휘보의 기록을 근거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입장에도 변화가 없다. 다만, 보천보 사건 당사자 여부로 북한 김일성이 진짜다 아니다를 가리려는 것은 잘못이고, 그는 명백히 전설상의 김일성 장군은 아니라 하였다.
    [① p.167 / ② p.170] 근래 '김일성 연구가'로 자처하는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북한 김일성이 普天堡 습격사건의 주인공이다 아니다'로써 진짜 金日成이다 아니다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金日成은 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 사상휘보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며 그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창순이 처음 찾아낸 문헌을 근거로 김창순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3. 이용상(李容相.1924∼2005), 『나의 친구 김영주 (48)』 : 중앙일보 1991.06.28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63)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48) -「국사」이충모 선생 중앙일보 1991.06.28 종합 20면
    『....
    김일성은 벌써 작년에 평양에 왔다는데 도깨비가 대낮에 활개치는 격이오. 새파란 애숭이가 백발이 성성해 돌아가신 노장군의 이름을 도둑질해 달고 나서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저 우리나라 애국자는 안중근·윤봉길 두분 뿐이고 다른 자들은 다 가짜요, 도깨비들입니다.』 이충모 선생은 점심을 먹다말고 흥분한 나머지 연신 언성을 높였다. 김영주는 성의껏, 그리고 차근차근 자기 형 김일성이 양명 받게된 내력을 설명했으나 이충모 선생은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다.

  4. 망명 북한 고위 관료와 소련군정 장교들의 김일성 환영대회 가짜 소동에 대한 증언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8~89.

    가짜 소동이 일고, 총소리까지 들렸다고 증언한 서용규(徐容奎)의 본명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다.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59년말 소련파로 몰려 자진귀국형식으로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는 박길용 박사(73·모스크바시)의 증언.
    『북한정권에 참여,김일성을 도우라는 소련정부의 지시를 받고 평양에 도착하니 「김일성 장군」이 소련군에 의해 인민들에게 애국투사로 부상되어 있더군요.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민족민주진영·기독계 인사·젊은층 등의 소비예트화 거부와 가짜 김일성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만만치 않더군요. 도착과 동시에 나는 소련 25군 정치사령부에서 통역 및 내근요원을 맡았기 때문에 당시 북한정세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지요. 소련군 수뇌부는 조만식 선생을 끌어들이는데 안간힘을 쏟았지요.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자신의 민족·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지주·청년층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소련군 지도부는 소련정부에 공산당 조직과 정치·행정경험이 있는 소련의 한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요. 이 그룹이 바로 소련파 제3진에 해당됩니다.』
    박길용(朴吉用, 1920~1997.07.12) 전 북한 외무성 부상 숙환 별세 중앙일보 1997.07.14 종합 21면

  5. 김허남(金許男, 1920~ ) 전 함경북도 도민회장의 '가짜 김일성' 증언 : 15대 국회의원(자유민주연합) 지냄.

    내가 본 金日成 / 동호 김허남 수상집(桐湖 金許男 隨想集) ; Ⅲ) 부산 만덕사(萬德社), 1991; pp.17~28
    전 함경북도 도민회장인 월남민 김허남(金許男, 1920~ )씨는 자신이 소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졌는데, 처음에는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소문이 나더니, 나중에는 주민을 괴롭히는 비적으로 소문이 바뀌더라고 증언하였다. 처음 이야기들은 김일성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것일테고, 나중에 신문에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이 주로 약탈을 일삼으며 주민을 괴롭히는 공비로 보도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한 말로 보인다. 항일연군의 김일성에 대한 신문보도는 1936년 8월 ~ 1937년말 기간에는 6사장 김일성(전사한 보천보 사건 주역)에 대해한 것이고 1939년 초 ~ 1940년 여름 기간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에 대한 것인데, 양민에 대한 약탈 기사가 대다수였다. 김허남은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하던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 집회에도 참석했다가, 아무래도 말로 듣던 김일성 장군이 아닌 것이 분명하여 주변 알만한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물었으나 아무에게도 그런 말 하지 말라는 협박만 받았다고 하였다.

    “전범자(戰犯者)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아니다” 미래한국 2005.07.14
    항일 전사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대회를 10월 14일 10시에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한다는 벽보가 나붙고 선전 삐라가 산골 동네까지 흩날렸다. 나는 만사를 뒤로 미루고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하기로 작정했다. 함경북도에서 평양까지 교통과 숙식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하기로 작정한 것은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내 나이 또래의 아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에 관심을 가졌고 또 갖가지 풍문을 들으면서 자랐다. 특히 김일성 장군에 대한 것은 좀 남달랐다. 소학교 때는 김일성 장군이 백전 백승의 영웅적 인물로 부각되었고 때로는 도술마저 자유자재로 부리는 초능력자로 믿었고 또 흠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어린 우리들에게 존경받는 독립군 장군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김일성 장군, 김구 선생이었다.

    그 당시 내가 4학년을 담임했는데 학생의 학부형 중 한 분이 여자 몸으로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부대가 해체되니 이상하게도 일본군에 투항하여 협조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나와 동성동본이면서도 항렬도 같아 누님 아우로 호칭하면서 인간적인 정분과 교분을 쌓고 흉허물 없이 지냈다. 그녀가 김일성 부대의 실체에 관해 속 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거의 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 김일성 부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게 된 동기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그의 오빠가 김일성 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 부대에 오빠의 심부름으로 몇 차례 오고 가다가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 했다.

    “누님, 김일성 장군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봤어.” “연세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정확히는 몰라, 아마 60은 조금 넘었을 거야. 그런데 김일성 장군이 어디 한 두 사람이어야지…” 그녀는 내 물음에 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나로선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김일성 장군이 또 있단 말입니까?”

    환영시민대회의 사회자가 긴장된 쇳소리를 내며 빠른 어조로 말했으나 군중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어정쩡한 박수 속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나로선 김일성 장군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란 사실이 의외였다. 내 학부형의 말로는 60세가 넘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기대했는데 아주 새파란 젊은이가 나와서 내가 김일성이요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 우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세상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백발이 성성한 백전노장을 기대했는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나섰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람은 30대 초반에 165cm가 조금 넘게 보이는 키에 살집이 약간 붙었고 좀 작아 보이는 듯한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지 검게 보였는데 감색 양복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뒷머리를 버쩍 치켜 그 사람은 몸 어느 구석에서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의 티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미리 써 가지고 나온 원고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층 더 실망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나보다 10여세 연장이고 9촌 숙부가 되는 김동철이라는 사람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령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1920년생이고 모란봉 운동장에 나타난 김일성은 1912년생이다. 그렇다면 나보다 8살이 더 많은 김일성이 그런 큰 독립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소학교 1학년 땐 7~8세 정도였는데 그 때 당시의 김일성 나이가 15~16세 정도이다.

    그런 어린 나이에 과연 독립운동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었던 김일성 장군과는 연령차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내가 그 분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물은 것은 그 분이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나중에 최고재판소 소장까지 지낼 만큼 김일성 일파의 골수분자였기 때문이다. 대답은 짤막했다.

    “살고 싶으면 입을 꽉 다물고 있어. 쓸데없이 지껄이고 다니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없어져.”
    그 분의 강압적인 어조와 중압감을 주는 낯빛 때문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평양시 모란봉 운동장에서 거행된 환영대회 이후아주 앳된 김일성 장군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1945년 10월 14일부터 33세의 애숭이 소련군 소좌가 항일전에서 백전백승한 위대한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고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으로 변모한 것이다.

  6.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작가의 '전설의 김일성 장군' 증언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을 들은 것도 방공 연습이나 진짜 공습 경보로 일찌거니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을 때 엄마가 옛날 애기처럼 해 준 비현실적인 정보를 통해서였다. 김일성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하는 장순데 기운이 장사일 뿐 아니라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험준한 산길도 천릿길을 간다고 했고, 이승만은 미국서 독립운동하는 학식 높은 선빈데 조선 땅은 절대로 폭격을 안 할 테니 안심하라고 방송도 하고 비행기에서 삐라도 뿌린다고 했다.

    박완서 산문집,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작가정신, 2002. 4. 25)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희망과 용기가 생긴 탓도 있었지만, 그무렵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방송수신기는 비로소 외국에 있는 독립운동세력의 존재를 확신시켜 주었고, 그건 유언 비어의 형식으로 조선사람 사이에 널리 유포됐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을가봐 쉬쉬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근수근 이승만, 김구, 김일성 이름이 오르내렸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보고 오로지 노예처럼 기기만 하던 백성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기 시작했고, 그 아득한 미래의 지평에 영웅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들은 영웅들의 일화 중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게 김일성에 관한 거다.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몇 백 리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발치산 활동이 그렇게 과장되고 신비화된 거였다.
    드디어 일본이 망하고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다준 선물일 뿐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건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로 안 망할 줄 안 신국(神國)을 무너뜨린 눈부신 강자들이 우리의 조국 한허리를 직선으로 두부모 자르듯이 잘라놓아도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와 독립이란 당하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여야 하거늘, 우리는 한 게 너무 없었다.

    귀국한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그나마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줬지만, 그들의 세력다툼도 보기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박완서는 해방 당시 14세 밖에 되지 않아, 어릴 때 들은 김일성 장군의 전설이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모르고, 만주서 게릴라 활동을 한 북한 김일성 때문에 나온 말인 줄로 알고 있다.

  7. 안병무(安炳茂, 1922 ~ 1996), 《민중신학을 말한다》 (서울: 한길사, 1993년 01월 31일) p.16

    [p.16] 지금 회상해보면, 간도는 나의 삶의 본향이었어요. 거기서 내 잔뼈 가 굵어진 것만큼이나 나의 정서와 사상의 기본 바탕이 형성된 것 같아요.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낮에는 일본군 천하이고 밤에는 우리 독립군 천하인 그런 분위기에서, 아마 다섯 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전설을 들으면서 자랐지요. 축지법을 쓰고 일본군의 습격을 당하면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달아난다는 얘기 등등. 내 나이 5, 6 세 때 이미 그는 신화적 존재였고, ‘김일성’ 하면 어린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 이름이었지요. 나는 현재의 김일성을 의심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나와 불과 열 살 남짓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녹두장군 노래도 늘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특별히 민족의식 때문에 간도로 간 것은 아니었고, 국내에서 생활이 어려우니까 한의사가 되어 가지고 간도로 건너간 것 입니다.
    어린 시절 간도에서 자란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북한 김일성이 당시 자신이 이야기 들은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8. 최정호(崔禎鎬, 1933 ~ )의 '가짜 김일성' 증언

    최정호,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35)1946년, 가짜 김일성과 北단독정권 문화일보 1998년 10월 03일(土)
    최정호, 우리가 살아온 20세기(1), (미래M&B, 1999)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국민(초등)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에게 1945년의 해방이전에 알려진 독립투사의 이름은 거의 없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등의 이름은 8.15이전에는 우리들 어린이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일제시대에도 우리들 식민지 아이들이 알고있던 독립운동의 ‘영웅’이 있었다면 오직 한 사람, ‘긴이치세이(金一成·김일성)’또는 ‘긴니치세이(金日成·김일성)’장군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4∼5학년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공책에 필사해서 친한 친구끼리 돌려본 최초의 포르노그라피 ‘천국의 꿈’을 읽고 가슴이 빠개질 듯이 흥분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어디에서 얻어들은 전설적 영웅 김일성 장군의 얘기를 친한 친구끼리 부풀려 가며 귀엣말로 주고 받으면서 숨막히는 감동을 나눠 갖곤 했었다.

    백마를 타고 신출귀몰하며 만주벌판을 누비는 김일성 장군 앞에서는 천하의 일본 관동군도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 앞산에 나타나서 관동군이 몰려가 포위망을 좁혀 가면 백마의 김일성 장군은 어느새 그 뒷산에 표연히 나타난다는 것,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김일성 장군은 縮地法(축지법)을 마음대로 쓰는 도사이기 때문이라는 것… 등이 우리 철없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비밀 유통되고 있던 김일성 장군의 ‘신화’였다.

    태평양 저쪽의 이승만 박사나 중국대륙 깊숙이 망명한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땅을 잃고 땅을 찾아간, 땅으로 이어지는 만주 간도지방에서 나돈 얘기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빈번했던 내왕을 통해서 식민시대의 ‘유비통신’‘카더라통신’에 의해서 어린이들의 세계에까지 퍼져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럴수록, 8.15해방 이후 거의 두달이나 지난뒤, 마침내 평양에서 ‘조선해방 축하’를 위한 민중대회를 개최한 45년 10월14일, 전설의 영웅 김일성 장군이 구름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듯 ‘데뷔’했을때, 그를 본 사람들의 충격은 엄청나게 컸다. 남한에서는 그 현장의 상황은 알 수도 없고 다만 보도된 기사와 사진을 통해서, 만주벌판에서 축지법을 써가면서 일본 관동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이제 겨우 서른세살의 젊은이란 사실에 놀라버렸다. 白髮(백발)의 노장이 나타날 줄 알았는 데 紅顔(홍안)의 청년이 나타났으니 되게 실망할 수밖에….

    저게 진짜 김일성 장군이란 말이야? 저거 가짜 아니냐! 하는, 죽끓듯한 여론의 의문 제기에 남북한의 좌파세력은 곤욕을 치르게 되었고, 그 곤경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6.25전쟁이 터졌고, 전쟁이 끝나자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가짜의 김일성을 진짜로 꾸며대기 위한 조직적이요 체계적이며 본격적인 ‘김일성 신화’의 날조 공작을 제1의적인 국가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북한의 현대사 조작, 역사 위조가 그 소산이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군사적 영웅 ‘김일성’은 물론 소련군 대위 金聖柱(김성주)가 뒤집어쓴 가면이요, 그 실체는 김일성이 김성주가 아닌 것처럼 김성주도 김일성은 아니다.

    최정호崔禎鎬는 1933년 전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생 언론과 학계의 두 세계를 살아온 그는, 『한국일보』 기자․특파원․논설위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설위원, 『동아일보』 대기자를 역임하는 한편, 성균관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울산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하였고, 한국언론학회 회장, 한국미래학회 회장, 한독포럼 공동의장도 지냈다.

  9.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1986)의 '김일성 진짜' 증언

    현대사연구소 자료총서 제4집 『지운(遲雲) 김철수(金綴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 온라인 열람가능

    [pp.117 ~ 118] : 내가 먼저 얘기했을 것이여. 김일성이는 가짠가 진짠가 별 이야기가 많은데. 시방도 가짜라고 말안허는 사람이 많이 있어. 그건 그때 그 지도자, 지도층에서 모르고 그렇게 그냥 부화뇌동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개는 인제 이승만박사에 의해서 위에서 대강 다 알면서 억지로 그런 것이여. 일부러. 장택상이 같은 사람은, 그 전에 수도청장 장택상이 같은 사람, 귀가 밝어서. 그 사람, 다 알어. 그 시방 세상이. 내가 있는 가를 알아. 지폐위조, 그런 모도 사건도 않거든. 그건 또 딴 방면이 있어. 그때에 미국 사람들이 만들어 가지고 사건. 그것은 지 당 위해서 헌거여.

    김일성이는 본래 김성주여. 그런디 우리도 김일성이만 알았지. 김성주는 몰랐는데, 해방후에 알았구만. 그라고 내 생각에도 아 내가 그 김일성이 빨치산 운동. 밀림속에서 한다는 거 아주 군대에. 근데 연령이 맞지 않거든. 서른 네살에 입성했거든. 평양. 우리는 ‘어린 것이 어떻게 된게야?’ 그랬는디. 저기서 그 요만한 책자, 김일성이 傳記가 해방 직후에 막 나와. 그래서 여기서 여기도 많이 오는데. 본게.
    그 전에 다. 김일성이가 19살때에 무장을 하고 나왔던 가비여. 14살 먹어서부텀 저 어머니 보고 아버지 쓰던 것 피스톨 달라고. 그래서 네가 어린 것이 뭣 할라고, 내가 잘 가져놓을게, 너 이제 커서 배우고 커서 써라. 16살때 또 달라고 그랬어. 16살때엔 저 간도로 갔거던. 저그 평양 옆에 살다가 간도로 갔는디, 16살때에 저그 어머니 보고 달라니께, 아 가만 있어. 중국 중학교 마치고 ... 간도서. 그러고서 인제 주마.
    그 중학교 졸업증서 탈 날이 며칠 아니여. 근데 만주사건이 생긴게, 이제는 다했다. ‘총 주시오’. ‘그래라. 그래가지고 19살때에 나왔어. 저 피스톨 하나 가지고 그저 지서를 습격을 해. 거기서 무기를 많이 얻었다고. 김일성이 부하에 중국 사람이나 소련사람이나 거의 같은 수여. 그런데 지서 하나 털으면 그 그게 그 사람의 원수가 좋다고 그랬어. 가서 치면은 성공이라네. 두만강변이라 지서에 무기는 많이 두거든? 근디 그 놈 가지고 털어가지고 나와서는 일하고. 그러게 나중에는 인제 일본놈 포병 기병을 당헐만한 그런 무장을 하고 댕긴다.

    그만치, 아 그런게 왜놈들이 칠라니게 김일성이 한테. 또 그러고 독립적으로, 중국부대의 댕기는 사람은 최무정(김무정*) 같은 사람. 그랬는디. 김일성이는 자기 독립부대로 댕겼거든. 그렇게.

    만년의 증언이라서 그런지 말에 조리가 없다. 또 북한에서 보내온 김일성 전기를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이므로 북한 주장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신복룡,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일성은 가짜” vs “가짜가 아니다” 주간조선 2367호 2015.07.27

    [김일성] 가짜설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선 인물은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錣洙)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남한에서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한 독촉(獨促) 회의 당시에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 그토록 나이 어린 그를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가짜 김일성 논의는 결국 이승만의 조작극이었다고 반박했다.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 117쪽)

    김일성이 가짜라는 수많은 증언이나 기록들에 이승만과의 관련성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도 왜 이승만의 조작극이라고 했을까?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안타까워서인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화풀이하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10. 보천보(普天堡) 습격 현지 안내자(소년 연락병) 이선호(李善鎬)씨 생존·증언(證言)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보천보(普天堡) 습격 당시 현장에 없었다』 월간조선 2004년 12월호

  11. 김병기 (金秉騏, 1916~ ) 화백의 '가짜 김일성' 증언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 김병기씨의 '해방 전후 미술계' : "김일성이 초상화 그려달라 부탁… 그림 그릴 자유 찾아 월남했지" 조선일보 2005. 08. 23
    ―김일성도 만나보셨나요?
    “김일성이 미술에서 셋, 문학에서 셋, 음악에서 셋, 이렇게 부르더라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기 그림(초상화)도 좀 그려주고 ‘드라마(이미지)’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다’, ‘일정 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항일 투쟁하던 그 김일성이 아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거든.”

    한세기를 그리다 - 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 「길을 찾아서」 (4회) ‘김일성 장군’을 처음 만나다 한겨레 2017. 02. 02

    ‘장군’의 곁에 경호책임자 임춘추가 서 있었다. 젊은 김일성이 다소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짧은 상고머리에, 호탕한 성품임을 보여주면서, 지식인 풍모까지 연상시켰다. 그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평양 사람들은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예술인들에게 요구했다. “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예술인 여러분께서 나를 선전해 주시오.” 《한겨레 2017. 02. 02》

  12. 강인덕 (康仁德, 1932~) 전 통일부 장관의 '가짜 김일성' 증언

    NHK 스페셜 북한관련특집 : 다큐멘터리 북한 ≫제1집 「개인숭배에의 길」 (2006/4/2 방송) / ≫제2집 「숨겨진“세습”」 (2006/4/3 방송) / ≫제3집 「핵을 둘러싼 전율」 (2006/4/4 방송)
    제1집 「개인숭배에의 길」 (2006/4/2 방송) : 김일성 환영대회는 15분 경부터, 강인덕 증언은 15분 30초부터 나옴.
    - 김일성 장군 환영집회에 참가했던 강인덕씨 -

    소란스러워지기 시작. 김일성 장군이라는 이름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꽤 나이를 먹은 사람이 나올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온건 생각외의 젊은사람.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 저건 누구지? 가짜 아냐?.

    평양 소련군정 요인중 한 명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도 증언자로 같이 나온다. (13분 30초 경부터)

  13. 장지량(張志良, 1924~ 2015) 전 공군참모총장의 증언

    장지량 구술; 이계홍 정리,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서울: 이미지북, 2006.06.15) pp.20~24.
    제1부 나의 성장기―소년 시절과 결혼 - “나도 김일성 장군처럼 될 거다”

    [p.21] 통학길은 언제나 즐겁고 신명이 났다. 가슴을 달아오르게 하는 얘기들을 무궁무진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바로 2년 위인 강제원과 4년 위인 강계원 형제는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얘깃거리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놓았다.
    이처럼 짧지 않은 통학 거리는 강씨 형제의 얘기를 듣는 데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그들의 삼촌이 영어와 러시아 어를 할 줄 알아서 외국 신문과 잡지를 보고 얘기해 준 것을 나에게 전해 준 것이었지만,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함께 꿈에 부풀었다.
    "만주 김일성 장군은 말여, 일본 놈들을 주먹 한 방에 대여섯 놈을 조자 버리는디 그 힘이 장사라고 하더랑께, 포수보다 총을 잘 쏘고......”
    "근디, 김일성 장군이 누구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신출귀몰하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군인디, 말을 잘 타는 기병이라. 우리나라를 찾기 위해 만주로 탈출해서 독립군을 길러 갖고 왜놈 군을 보는 족족 한 방으로 보내 버린댜.”
    "그 장군이 말을 잘 탄다고? 얼마나 잘 타는디?"
    무엇보다 말을 잘 탄다는 사실이 내 호기심을 한없이 자극했다.
    “기병 출신잉께 허벌나게 잘 타지, 백두산에서 아침 먹고 말을 달리면 지리산, 무등산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는겨, 한나절밖에 안 걸린당께.”
    [p.22] 금방 본 것처럼 말해 주는 데는 나도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 따르면 김일성 장군은 그대로 신화이자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제원이 성(형) 나도 일본 육사 가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니가 육사 간다고야? 쬐그만한디 될 것인가 모르것다."
    강제원이 말하자 그의 형 강계원이 나섰다.
    "니가 보통학교 2학년이제...... 그려, 어른이 되면 클 것잉께 갈 수 있을 것이여.... 넌 영리헝께 말이여. 암 가고도 남을 것이여."
    ....보수적이었지만 기품 있는 양반의 고을이자 자부심 강한 고을로 통하는 나주 사람들은 일본 놈들에게 조선 민족이 당한다는 것이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저항 의식은 타 지역민보다 훨씬 강했다.
    어린이들도 이 영향을 받아 등하굣길에는 늘 이런 얘기들이 주요 화제가 되었으며, 만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김일성 장군 얘기만 나오면 어린 소년의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p.23] ...조부님 형제는 구한말(1888년) 똑같이 무과에 급제했고 그 중 작은 할아버지가 수군만호(水軍萬戶, 해군 준장과 소장 사이) 계급으로 복무하다 동학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장군이었다....

    [p.24] 두분 조부 형제의 경력에서 보듯 현실 중심의 무과적(武科的) 기질을 가지셨다. 이런 가풍 속에서 자란 나는 상급생 강제원의 얘기를 듣고 일본 육사를 꿈꾸게 되었다. 무엇보다 김일성 장군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강제원 형에게 물었다.
    “형, 김일성 장군이 정말 허벌나게 잘 싸우는 장군이여?"
    “그려, 독립군 대장이랑께, 축지법을 쓰는 장군이여,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을 폴짝폴짝 뛰어 댕기면서 일본 놈들을 조자부러.”

    자꾸 듣는 얘기였지만 언제 들어도 통쾌했다. 그의 존재가 현실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영웅담은 더 확대되고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부푼 꿈과 기개를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큰 기대치만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당장의 현실로 인식되 었던 셈이다. 그러나 강제원 형도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식이 그 정도 수 준에 머물러 있었다. 똑같은 말이 되풀이 될 뿐 새로운 사실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일성 장군은 본명이 김광서로 일본 육사 23기 출신이며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8.15 해방과 더불어 북한을 지배한 김일성(본명 김성주)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14. 김형석 (金亨錫, 1920~ ) 연세대 명예교수의 '가짜 김일성' 증언

    인촌 기념회 / 인촌 선생 관련 증언 녹취록 2008년 11월 18일
    - 다 아는 얘기인데요. 김일성이 되기 전에 김성주였다 하는 사람도 있고, 좌파에서는 김일성은 김일성이지 김성주가 뭐냐 하는 사람도 있고. 같은 고향사람인데, 사실은 초등학교의 선후배예요. 내가 갔을 때는 김일성은 졸업하고 떠났기 때문에 같이는 못 다녔고. 같은 고향이고 그랬는데 김일성이 김성주 때 그러니까 해방되고 얼마 안돼 고향에 왔어요. 동네어른들이 “김성주가 왔는데 내일 아침 환영잔치가 있을 테니까 한번 가자.”고 했어요. 김일성과 함께 조반을 먹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성주야, 해방됐으니 이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친일파 숙청, 두 번째는 토지개혁이라고 5가지를 얘기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구나, 공산당 강령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공산당은 조직이 있으니 어떻게 접수한다는 것이 다 있었어요. 한국은 조직이 없어 이승만 박사가 정권잡고 반공하자니까 일제시대 경찰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반공이 서서히 될 수밖에 없고. 공산주의자들은 흑백이니까 중간이 없고 미국은 민주주의니까 중간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물우물했거든요. 그때부터 시작해 좌파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폄하할 때 친일파 숙청을 못해 정통성이 없어졌다하는데요. 과거사 정리한다는 친일파 문제가 지난 정부가 한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역사의 무대를 차지해야한다, 친일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껴왔지요.

    [TV 회고록 울림 3회 - 젊은 삶을 사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 1부] : KBS 1TV 2015. 07. 26 (일) - 김일성 이야기는 3회(1부)의 46분 경부터 나옴.
    [TV 회고록 울림 4회 - 젊은 삶을 사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 2부] : KBS 1TV 2015. 08. 02 (일)

    [김일성 관련 증언 대강의 내용] : 그런데 이제 공산주의 사회가 되고 난 다음에는...

    “김일성을 만나 봤다. 김일성의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해 줬다. 내가 김일성의 사촌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평양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가 열리던 날 고향 사람들이 환영식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다녀와서 이야기나 해 달라고 했다.
    동네 어른들이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갔는데 조만식 선생이 있었고, 김일성 장군을 소개하는데 새파랗게 젊은이를 내세웠다.
    보았더니 김성주더라. 어른들이 돌아와서 김일성이 우리 동네 성주야 하더라. 소련의 스티코프 장군의 계획 하에 만들어진 김일성인 것이다.

    나의 사촌동생들이 반공단체에 들어갔다가 붙잡혀서 평양 구치소에 갇혔다. 김 교수 할머니가 김일성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김일성이가 어려서 내가 젓을 먹여 키웠는데 내 손자를 잡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풀어주지 않으면 이 집에서 못나간다고 했더니, 김일성 할아버지가 그래서는 안 된다면서 구치소에 연락해서 손자를 석방시켜 주었다."

    김형석 : 광복 70주년 특집, '재도약' 상생의 길 YTN 2015-08-15

    지성과 산책 -『100년을 살아보니』 쓴 김형석 교수) 97세 교수님의 장수 키워드, 조심조심·미리미리 중앙일보 2016.12.28

  15. 윤응렬 (尹應烈,1927 ~ ) 예비역 공군 소장의 '가짜 김일성' 증언

    “잠자리 비행기에 폭탄 싣고 107회 출격 … 죽을 고비 수십 차례” 중앙SUNDAY 제 163 호 6면 2010.04.25
    가미카제→인민군→국군 … 자유의 길은 너무나 멀었다 중앙SUNDAY 제 163 호 6면 2010.04.25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부모뿐이었다. 형제들은 이미 공산 정권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월남한 뒤였다. 그때 일본군 동기생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동기생은 “나랑 함께 가면 비행기를 다시 탈 수 있다”며 북한군 입대를 권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에 그는 1947년 북한군 공군 장교(중위)에 임용된다. 일본군 비행사 경력을 인정받았은 덕분이었다.

    공산 정권의 구호와 선전에 회의적이었던 윤응렬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틈날 때마다 ‘김일성은 가짜’라느니 ‘공산당은 마적단’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투서를 통해 (북한의) 민족보위부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어느새 요주의 인물로 찍혔던 거지요. 어느 날 민족보위부의 사상담당관이 날 부르더군요. 당시 심사과장이 소련군 소속 소좌(소령)였는데 나이가 아버지뻘은 돼 보여요. 나를 척 보더니 ‘동무 앉으라우’ 그래요. 그러더니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니 모든 걸 사실대로 이야기 하라우’ 그러더군요. 가슴이 철렁했어요. 당시엔 인민 사상을 심사받은 뒤 인민재판에 회부되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곤 했거든요.”

    윤응렬옹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심사과장이 나를 가련하게 여겼나봐요. 당시 이가 아파서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였는데 심사과장은 나를 인민 재판에 회부하는 대신에 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박탈하고 인민군 군복을 벗겼지요.”

  16. 인민군 위생병 출신 이광섭(李光燮, 1933 ~ )의 '가짜 김일성' 증언

    (현대사 증언) 인민군 출신 李光燮씨 : “인민군, 北派공작원, 국군으로 3번 군대 생활했다”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그해 10월,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金日成) 장군 환영대회’가 열렸다. 마침 집 근처라 그도 환영대회에 나갔다.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나와 김일성 장군을 소개했어요.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등장했는데, ‘저거 가짜 아냐?’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럴 만도 한 게, 나도 일제(日帝)시대에 친척 형님들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거든. 보천보 전투? 그런 얘긴 못 들어봤고, 그냥 ‘만주벌판에 김일성 장군이란 분이 있는데, 하늘을 붕붕 날아다닌다’ 그런 얘기였어요.

    이승만(李承晩) 박사? 못 들어봤어요. 상해(上海)에 김구 선생이란 분이 계시다는 얘기는 들어봤고…. 얼마 지나고 난 후부터 ‘소련군 대위였다더라’ ‘본명이 김성주라더라’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17. Kim Il-sung's secret history SCMP (South China Morning Post) 17 October, 2010
    On October 14, 1945, over 100,000 people gathered in downtown Pyongyang to celebrate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by the Soviet army. 'Now is the moment to introduce you to the new leader of your country, comrade Kim Il-sung,' said the Russian general on the podium.

    A ripple of excitement spread through the crowd, delighted to be rid of 35 years of Japanese secret police, rationing and wartime controls. For the first time, they would see the legendary guerilla leader who had fought the Japanese army for more than 20 years in Korea and Manchuria.

    Up to the podium stepped a handsome man in his 30s, with a plump face and a full head of hair. People in the crowd looked in disbelief at one another: this young man could not be the real Kim, who would be in his 50s, with fading hair and skin hardened by years of living in the mountains and caves of northeastern China.

    This is the extraordinary story of how Josef Stalin picked an obscure officer in the Red Army to be the ruler of the new country his army had occupied and grafted onto him the life of its most famous guerilla leader, to give him an authority and credibility he did not possess.

    This story only came to light after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in 1991, when the Russians involved in establishing the new state of North Korea could speak to foreign scholars and journalists.


  18. 채명신(蔡命新, 1926-2013)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의 '가짜 김일성' 증언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上> 조선일보 2011.07.19 / 특집 A27 면
    김일성, 내 어깨 두드리며 "동무가 필요하오, 함께 평양 갑시다"
    공산당의 허구를 처음 안 날은 1945년 10월 14일이었다. 그날 평양 기림리 운동장에선 '김일성 장군 환영군중대회'가 열렸다. "위대한 조선 독립 투쟁의 영웅인 김일성 장군이 이 자리에 서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5만 인파가 환호했다. 그런데 연단(演壇)에 선 이는 백발 성성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청년이었다. 운동장이 일순 침묵했다.
    곳곳에서 탄식 소리도 들렸다. 돌아오는 길에 신문 호외(號外)가 나돌고 있었다. 기사 내용은 '가짜 김일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 내가 김일성 정권에 참여할 뻔한 일이 생겼다. 소련군은 '평양학원'이란 걸 만들었다. 청년 엘리트를 5~6개월 훈련시켜 군의 초급 지휘관으로 양성하는 사관학교 격이었다. 김일성의 최측근 김책(金策)이 그 중책을 맡았다. 김책은 청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평양에서 국민학교 교사 30명을 동원했다.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中) 조선일보 2011.07.26 / 특집 A20 면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下·끝) 조선일보 2011.08.02 / 특집 A21 면

    (6ㆍ25 60주년) (나와 6·25) (41)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上> 조선일보 2010.05.24 / 종합 A10 면
    (6ㆍ25 60주년) (나와 6·25) (42)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下> 조선일보 2010.05.26 / 종합 A6 면


  19. 정치학자 두산(斗山) 이동화(李東華, 1907-1995)의 '김일성 진짜' 증언

    김학준, 『두산(斗山) 이동화(李東華) 평전』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03.10)
    4장 2절 북행과 <민주노선> 주필 취임

    두산은 남동생인 이동서를 데리고 평양에 도착했다. 당분간 평양에 머물면서 일했다.

    소련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14일 마침내 김일성을 등장시키는 대회를 열었다. 두산은 편집국장인 한재덕, 논설위원인 김광순, 총무국장인 주호석 등과 함께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평양의 공성운동장에 나타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두산은 우선 “김일성은 거대한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연설을 계속했다. 대회장에 운집했던 군중의 대다수가 김일성을 용감한 항일투사, 빛나는 ‘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평양 시민들이 김일성은 가짜라고 웅성댔다는 건 두산이 보기에 사실이 아니었다.

    두산 같은 공산주의 이론가조차 잠시 희망적인 기대를 걸었다. 두산은 뒷날 김일성의 연설이 “민중적 인기를 겨냥한 일시방편적 발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 중에 이동화와 같이 김일성 환영 집회에 갔다는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은 남한으로 귀순한 후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기사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에서 당시 가짜 소동이 있었다고 상반된 말을 하였고, 또한 김일성은 가짜가 맞다고 했다. 같이 현장에 있었던 두 사람의 말이 왜 이렇게 정반대인가?

    한재덕(韓載德)은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3회) (동아일보 1962.05.16)에서 서울서 내려온 이동화(李東華)가 자신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평양민보(平壤民報)의 주필이 되었다고 하였다.

  20. 김동길 (金東吉, 1928 ~ ) 교수의 '가짜 김일성' 증언

    (김동길) 사람이 살다가 어쩌면 이 꼴이 코나스넷 2012-05-20
    평양에 살다가 해방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소련군의 행패를 목격하였습니다. 일제하에 독립투사로 명성이 자자하던 김일성(金一成)장군의 이름을 도용한 김성주(金成柱)라는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내가 김일성(金日成)장군이요”라며, 스탈린의 주구가 되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적위대를 만들어 인민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뿌리에서 생겨나 수백 년 동안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조상들의 아들?딸인 부모 밑에 태어나 또한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이놈들이 만드는 이 큰 감옥에 살 생각을 하니 기가 차서, 어느 날 어머님을 모시고 평양을 탈출하여,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38선을 넘어 월남하였습니다.

    (김동길 박사 '이게 뭡니까') '북한임금님' 정상인가 경제풍월 : 2014.03.14

    북의 ‘인민공화국’ 지도자 세 사람(두 사람은 이미 저세상에 갔지만)은 한결같이 불가사의 인물이다. 해방되고 김일성이라는 30대의 젊은이가 소련군의 등에 업혀 평양에 나타났을 때 명성이 자자했던 김일성(金一成) 장군이 아니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같은 김일성이지만 일성(日成)과 일성(一成)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김성주(金成柱)라는 강반석 어머니의 아들이 왜 김일성이 되어 돌아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21. 백선엽(白善燁, 1920 ~ ) 장군의 '가짜 김일성' 증언

    (백선엽의 6·25 징비록 - 38) 내가 있던 조만식 선생 사무실에 느닷없이 나타난 김일성 premium.chosun 2014.04.03
    평양에서는 당시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해방 뒤 2개월이 지난 10월 14일 무렵이었다. 소련 군정이 개최하는 김일성 환영 군중행사가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여 들었다. 그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당시 북녘의 정국(政局)은 어디로 흐를지 몰랐다.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서는 나도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꽤 소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였다. 시간은 몇 시였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 밝은 대낮임에는 분명했다. 가운데에는 무대가 차려져 있었고, 연단에는 소련 군정 장성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소련군 장성 하나가 무대에 서더니 통역을 통해 “여러분이 이제는 김일성 장군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어 나타난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예상보다는 아주 젊은 사람이 무대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군중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연단 아래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허탈하다는 듯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에이~뭐 저래” “야, 좀 이상하다”는 말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대개가 웃음기가 담긴 말들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으나, 당시 평양 사람들 사이에는 ‘독립투사 김일성’에 관한 이미지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 당시 평양 사람들이 생각하던 김일성 장군은 적어도 나이가 70은 넘었어야 했다. 그런 대중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아주 젊은 김일성이 무대에 등장하자 사람들이 일종의 야유를 보낸 것이다.

  22. 김집(金鏶, 1927~ ) 기자의 '가짜 김일성' 증언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 金鏶 (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 2015.11.12
    노기자(老記者)’의 치열했던 현대사(現代史) 김진한(金珍漢) 외 18명, 『숙명(宿命)을 거부하다’ :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생애』 [광복 70주년 기념 現代史, 현대사 체험수기 수상작 모음] (조갑제닷컴, 2016) p.129~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이수근(李穗根)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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