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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강희남 목사는 1994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범민련 남측 본부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조문을 시도했다 구속되기도 했으며, 1970년대에는 유신반대 투쟁으로 구속되고, 1986년에는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그동안 강희남 목사는 1994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범민련 남측 본부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조문을 시도했다 구속되기도 했으며, 1970년대에는 유신반대 투쟁으로 구속되고, 1986년에는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고 강희남 목사 장례준비위원회는 7일 오후 '통일민주사회장'으로 5일장을 치르고 영결식은 10일 오후 1시쯤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
  '고 강희남 목사 장례준비위원회는 7일 오후 '통일민주사회장'으로 5일장을 치르고 영결식은 10일 오후 1시쯤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
  '공동장례위원장으로는 강희남 목사의 유지에 따라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을 선임할 예정이며, 분향소는 우선 범민련서울사무소에 제 1분향소를 설치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을 비롯해 가능한 대학 및 병원 등에 추가 분향소를 열어 추모객들을 맞기로 했다.'
  '공동장례위원장으로는 강희남 목사의 유지에 따라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을 선임할 예정이며, 분향소는 우선 범민련서울사무소에 제 1분향소를 설치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을 비롯해 가능한 대학 및 병원 등에 추가 분향소를 열어 추모객들을 맞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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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4788 "육신은 떠나지만, 신념은 고스란히"]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4788 "육신은 떠나지만, 신념은 고스란히"]
  ' 범민련 북측본부는 지난 9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혼신을 다 바쳐 투쟁해 온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강희남목사의 사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를 죽음에로 몰아간 리명박역도의 천추에 용납못할 만고죄악을 온 민족의 이름으로 준렬히 단죄규탄한다"고 밝혔다. '
  ' 범민련 북측본부는 지난 9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혼신을 다 바쳐 투쟁해 온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강희남목사의 사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를 죽음에로 몰아간 리명박역도의 천추에 용납못할 만고죄악을 온 민족의 이름으로 준렬히 단죄규탄한다"고 밝혔다. '


==장례식이후==
==장례식이후==

2019년 10월 2일 (수) 22:04 판

문익환이 준비위원장으로 범조국통일범민족연합[1]이 만들어지고 나서 강희남이 이끌었다.

2009년 6월 6일 자살하였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규약 [2]

부고 기사

'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초대 의장이었던 강희남(89) 목사가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긴 채 지난 6일 오후 7시45분경 전북 전주시 삼천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강 목사는 유서를 통해 “지금은 민중주체의 시대다. 4·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주체가 없다. 제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라고 말했다.
한편 강희남 목사는 유서 외에도 유족들에 따르면, 이글과 함게 지난 5월 1일 유서 성격의 마지막 고별사로 '8천만 동포들' 앞으로 편지를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강 목사는 단식에 앞서 쓴 이 글에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 명이 순절했고 송병선 선생이 남긴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내 가슴에 사무쳤다"고 고백하면서,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 처럼 양키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하나로 멍든 가슴에 안고 내집을 내집을 양키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라고 맺었다. 
그동안 강희남 목사는 1994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범민련 남측 본부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조문을 시도했다 구속되기도 했으며, 1970년대에는 유신반대 투쟁으로 구속되고, 1986년에는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고 강희남 목사 장례준비위원회는 7일 오후 '통일민주사회장'으로 5일장을 치르고 영결식은 10일 오후 1시쯤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
'공동장례위원장으로는 강희남 목사의 유지에 따라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을 선임할 예정이며, 분향소는 우선 범민련서울사무소에 제 1분향소를 설치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을 비롯해 가능한 대학 및 병원 등에 추가 분향소를 열어 추모객들을 맞기로 했다.'
마지막 고별사

8천만 동포들에게

더는 그만두고 왜놈들과 강제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명이 순절했는데 그중에도 민영환 선생을 모시던 일력거꾼이 뒤를 따라 자살했고 송병선 선생댁 소녀 식모 공림이 식도로 목 찔러 죽었다. 송병선 선생은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않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이 항상 식민지 백성된 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돌아 보건데 1945년 종전 공간에서 양키 제국주의자들이 제 맘대로 38선을 그어 쏘련 측의 동의를 얻어 국토를 량단해 놓고 마땅히 전승국 대우를 받아야 할(북에서 쏘련군은 그렇게 했음) 이 땅의 주인이 자기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군정에서 북의 쏘련군과는 정반대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함과 동시에 상해 림정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완전 배제해 버림으로 이 땅의 역사를 개판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 등 애국지사들을 차례로 제거해 버리고 저들의 똘마니 리승만을 세운 뒤 소위 비밀주권을 움켜쥐어 오늘날까지 무불간섭이요 무불착취다 포츠담선언에 의해 48년 북에서 쏘련군이 철수하자 양키군들도 49년 7월에 일단 철수했으나 저들은 곧 이를 후회해서 이땅에 재상륙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함으로 에치슨 라인을 설정하여 일본까지만 자기들 방위선 안에 두어 지키고 한반도는 방위선 밖에 버려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북측에 보여줌으로 북을 유인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 땅을 재점령한 뒤에 전쟁끝나고 북에서는 중공군이 완전 철수했느나 저들의 군대는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이땅 식민지화에 200%쯤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또 방위동맹의 차원에서 우리 령토 령해 령공 할 것 없이 완전히 자기들 임의에 맡겨있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방위동맹은 허울뿐이고 완전히 례속동맹인 것이다. 력사와 민족위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분로하고 통탄하지 않겠는가? 실로 해저믄 날 따옥이 소리에 한숨?고 북으로 날아가는 기럭이 울음에 눈물?던 새월이 얼마이던가? 외세 척결과 민족통일을 바라 쓸모없이 늙은 이 한 마리 학은 목이 길어서 더욱 서럽다. 통일운동은 바로 양키추방 운동과 직결된다는 신념으로 오랫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이 땅의 괴리정권과 보수주의 매국로들의 세상에서 이란격석이 아니었던가? 이 치욕스러운 력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엣 어른들은 "가이생어사(可以生於生)이오 가이사아사(可以死於死)라 가히 살만한때에 살고 가히 죽을만 한때에 죽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살아도 애국이요 죽어도 애국이 있을 뿐이다. 나는 민족적으로 못하면 개인적으로라도 그들에대한 노례신분 청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 있음을 어찌하랴? 내가 대전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절식(단식)으로 운명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는데 내가 선생을 부액해 모시고 가면서 춘추를 물으니 73세시란다. 그렇다면 나는 선생보다 17개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이것도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는다.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오자서가 목숨을 피해 오나라 망명길에 올으면서 피떵이 같은 어린 왕손 승을 안고 그 천신만고 9사1생의 길을 간 것은 오직 그 어린애만이 장차 초나라 왕통을 이을 존재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 처럼 양키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하나로 멍든 가슴에 안고 내집을 내집을 양키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

단기 4342(2009)년 5월 1일.


' 이수금전농의장은 추모사에서 "목사님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됐고 언제나 올곧은 그 분을 뵐 때면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며 "목사님이 못다 하고 가신 일들을 마저 하기 위해 더 잘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
' 빈소가 마련된 전북대병원에는 7일 임재복 범민련 상임의장 등 진보진영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정치권에서도 민주당 천정배 장세환 의원, 무소속 정동영 의원, 이부영 김희선 이광철 전 의원 등이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 올해로 89세인 강희남 목사는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창설하는 등 평생 통일운동에 힘써 왔습니다.'
' 강 목사의 장남 강익현씨는"최근 들어 범민련 탄압 등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보며 ‘이명박 정부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놓고 있다’며 한탄하셨다"고 전했다.'
'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전북본부 방용승 공동대표는 "5월 1일 단식에 들어가실 때도 ‘민중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다’는 내용의 서예를 쓴 적이 있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관계와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며 '늙은이가 죽을 때가 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 7일 빈소가 마련된 전북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민주당 장세환 의원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삭발 투쟁을 시작으로 의원직 사퇴도 불사할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독재를 분쇄하고 고인의 희생을 헛되지 않도록 민주체제를 지켜내겠다"고 밝혔다.'



' 홍세화 기획의원은 '지금 여기'라는 칼럼을 통해 "허공에 몸을 던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땅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증언했다면, 일생을 통일운동에 바친 강희남 목사는 자살을 택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총체적 난국을 증언했다"고 평했다(한겨레 23면). '


' 전북지역 민주화운동은 70년대 이래 재야, 종교지도자의 역할이 컸다. 강희남, 조용술(2004년 작고), 은명기 목사(1996년 작고)를 비롯한 기독교계 원로와 문정현, 박창신, 문규현 신부를 필두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주로 참여한 천주교회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70년대 반유신투쟁 이후 전북지역 재야운동의 산파역이자 강력한 후견자 역할을 했다.'


' 고 강희남 목사 아내 주정수 사모(61)는 "이미 지난해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생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같았다"면서 "용산참사와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지켜보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걱정하고 마음 아파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 목사는 지난 5월 1일 단식을 시작하면서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라는 붓글씨를 남겼다. 이 글에 자신의 낙관을 남겨 목숨을 던질 것을 미리 예고했다는 것이 주위 설명이다.'
'  7일 임재복 범민련 상임의장 등 진보 인사들과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천정배 의원을 비롯 무소속 정동영 의원, 이부영·이광철 전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았다. 교계에서는 강 목사가 소속된 기장 전북지역노회 소속 목사들이 장례식장에 모여들었고 오랜 동지였던 한상렬 목사와 이강실 목사도 장례식장을 지켰다. 이날 한상렬 목사는 심정을 묻는 질문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며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 범민련 북측본부는 지난 9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혼신을 다 바쳐 투쟁해 온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강희남목사의 사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를 죽음에로 몰아간 리명박역도의 천추에 용납못할 만고죄악을 온 민족의 이름으로 준렬히 단죄규탄한다"고 밝혔다. '

장례식이후

반 이명박 집회 시위가 강력해졌다.

'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항쟁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에 나서자 경찰이 강제 해산에 나섰다. 경찰은 밤 11시10분 쯤 경찰력을 투입해 태평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던 집회 참가자들을 인도 위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이명박 하수인을 자청하며 시민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에 강력히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경찰에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앞서 참가자들은 밤 10시30분 쯤 6.10 항쟁 범국민대회가 끝나자 태평로를 점거하고 기습 시위에 들어갔다. 경찰은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과도한 폭력을 휘두르며 강제해산에 나섰다.

우파 언론들의 연관 기사

  • [이적단체 찬양하는 민주당-통진당, ‘범죄단체 해산법’ 입법 발의 ‘적신호’]
' 심재철 새누리당 최고의원은 6일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 판결을 받고도 버젓이 활동하는 이적단체들을 강제 해산시킬 수 있는 법안인 범죄단체 해산법을 발의했다.
현재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6.15남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범민련) 등 단체가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적단체 범민련에 대해 민주당과 통진당은 ‘통일운동’, ‘그 뜻을 이어나가자’며 찬양하고 있어 범죄단체 해산법 입법 발의 가능성을 어둡게 하고 있다.'
' 김일성 영생론자, 골수 종북주의자 강희남의 자살, 야당의 ‘찬양 퍼레이드’'
'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고(故) 강 목사는 긴장뿐인 어두운 남북관계와 정권의 비민주적 통치에 대해 마지막 남은 당신의 육신마저 저항과 희생의 뜻을 담아 스스로 던져버렸다”며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평화공존, 통일의 중요성을 몸소 가르쳤다”고 미화했다. 이어 “조국의 평화통일과 이 땅의 완성된 민주주의에 대한 몫은 살아있는 죄스런 우리들의 몫이 됐다”면서 “생전 당신이 몸소 실천함으로 깨우쳤던 그 가르침대로 우리는 당신이 못다 이룬 뜻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우리 사회의 어른이자 원로인 강 목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간곡하고도 처절한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 의원은 “강 목사께서 평생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분”이라며 “강 목사의 죽음의 의미는 이명박 정권의 철권통치에 대항하고 제2의 6월 항쟁을 일으키자는 고인의 말씀처럼 민중을 위한 숭고한 것”이라고 찬양했다.'


' 강 목사는 지난 1990년 11월 결성된 범민련의 남측본부(95년 출범) 의장직을 약 10년간 맡았다. 범민련은 연방제 통일 지지,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내세우고 있어, 1997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
그는 전북대 강연사건(호치민 고무·찬양)과 '김일성 사망시 조문 방북시도 사건' 등으로 3차례 구속됐다. 2000년대에도 '이라크 파병 저지 목포~서울 천리도보행진(2003년 10월)', '청와대 앞 단식투쟁(2003년 11월)' 등을 벌이기도 했다.'


' 노수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68·구속)은 104일간 북한에 체류하면서 김일성 일가(一家)를 찬양하다 7월 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북쪽의 환송자들은 “리명박 역적 패당을 타도하라!”고 외쳤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이튿날 “역적 패당은 노 씨가 판문점 중앙분리선을 넘어서기 바쁘게 야수적으로 달려들어 짐짝처럼 끌고 갔고, 경기도 파주경찰서로 연행해 취조놀음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노 부의장은 7월 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
' 노점상연합서 출발한 노수희
공안당국에 따르면 노수희는 30대 후반인 1980년대 초부터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서 노점상을 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간부를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93년부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산하 서울연합에서도 활동했다. 각종 시위 현장에서 물불 안 가리는 활약으로 유명했다.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출범 때 참여하기 시작해 부의장까지 맡았고 남한에서도 친북 발언을 서슴지 않아 대표적인 종북세력이란 지적을 받아왔다. 
' 노수희가 3월 24일 중국을 통해 북한에 도착한 사실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공안당국도 까맣게 몰랐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평양 만수대창작사 광장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참배·헌화했다. 이튿날엔 김일성광장의 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헌화한 화환의 댕기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3월 26일엔 만경대·주체사상탑·개선문을 방문해 “(김정일) 국상 중에도 반(反)인륜적 만행을 자행한 이명박 정권을 대신해 조국 인민의 사과를 만경대에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개선문은) 하나하나가 과학적이고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역사적 의미까지 모든 게 얼마나 탁월하신 철학이십니까”라고 말했다. 김일성종합대를 방문해서는 전자칠판에 “주석님의 혼과 인민 사랑의 결정체 김일성대 민족의 산 교육장임을 영광으로 받아 안읍시다”라고 판서했다. 3월 29일 백두산 밀영(북한이 김정일 출생지로 선전하는 곳)에선 “인민을 위해 헌신하시던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야전열차에서 순직하셨습니다. 그이와 같으신 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추모 기사들

' 고 강희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초대의장의 6주기를 맞아 ‘강희남범민련의장정신계승 및 이명박근혜정권퇴진투쟁 결의대회’가 각계인사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6일 오후 5시 서울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
' 송무호 공안탄압저지시민사회대책위원회(준) 공동대표는 “100kg만 있어도 300만명을 죽일 수 있다는 탄저균을 들여온 미군에 대해 통탄을 금할 수 없는데 그보다 더 통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미군이 탄저균을 마음대로 들여와 실험을 하는데도 정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박근혜 정권은 탄저균에 대해 말 한마디 없었다. 이게 주권을 가진 나라인가”라고 비판했다.   

이적 민통선평화교회 목사의 시 <식민의 노래9-점령군> 낭송과 공주대노래패 <타는목마름으로>의 노래공연이 이어졌다.'


' 먼저 자주통일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강희남의장을 비롯해 선배열사들과 미국과 박근혜<정부>의 폭압정치에 항의하며 목숨건 무기한 옥중단식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김혜영양심수를 비롯한 모든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며 묵상한 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
' 약력, 추모글, 추모시 '

기타

  • [발해를 찾아, 발해뗏목탐사 더이상 꿈이 아니다]
' 이날 김원웅(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발해뗏목탐사추진위원장,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발해뗏목탐사대 단장, 강희남(전 범민련 초대의장)목사, 한상렬(통일연대 상임대표)목사, 장두석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장, 오한흥 옥천신문 발행인, 박해전 한겨레언론문화연구소장, 박병완 언론노조 부위원장 등 50여명의 각계 인사 및 내외빈이 참석해 축원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