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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릴 코로트코프]]
* [[가브릴 코로트코프]]
* [[니콜라이 레베데프]]
* [[니콜라이 레베데프]]
* [[이반 코발렌코]]


==각주==
==각주==

2020년 2월 27일 (목) 02:05 판

게오르기 쿠즈미치 플로트니코프 (Георгий Кузьмич Плотников, Georgy Kuzmich Plotnikov, 1924~ )[1]는 소련과 러시아의 군인이자 역사학자이다.

그는 6.25 때 소련군사고문관으로 참전한 사람으로 7년간 북한에 있었으며, 소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을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92년을 전후하여 러시아의 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을 지냈다.

플로트니코프 대령이 넘겨준 소련군 문서에 의해 소련군의 북한 점령 당시 김일성과 빨치산들은 참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처음으로 명백히 밝혀졌다.

88여단 관련 소련군 문서 한국에 처음 제공

그는 1992년 88여단 관련 중요한 소련군 문서 필사본을 한국에 처음 제공하여 그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소련군 시절 김일성과 북한 권력 핵심 빨치산파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구소련 국방부 극비문서인 구소련 극동군 제88 특별저격 경찰여단 파일입수로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북한의 김일성이 1942년 6월부터 1945년 9월까지 3년 3개월동안 구소군 대위로 복무했던 이 여단의 정체 등이 50년만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북한 현대사의 주장과는 달리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권력의 핵심층을 형성하고 있는 오진우(원수·인민무력부장) 등 빨찌산 출신들이 대일 해방전에서 총 한반도 쏘아보지 못했음이 공식 문건으로 명쾌하게 밝혔졌다.

아울러 김일성 등 빨찌산 출신들 모두가 중졸 또는 국민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1931년부터 1942년사이 중국 공산당과 공산주의 청년동맹(공청)에 가입,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중국군과 함께 항일 유격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이 간잡적으로나마 확인됐다. 이로써 그동안 여러 이설과 논란이 있던 ▲김일성 부대의 대일전 참전여부 ▲빨찌산 출신들의 항일 유격활동 ▲김일성 부대원들의 성분 등이 공식 문건으로 결론을 지은 셈이다.

때문에 북한 현대사 전문가들은 『이 문건은 김일성과 88정찰여단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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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정찰여단의 고문서 파일 필사본을 중앙일보에 제공한 플라토니코프(Plotnikov)씨는 『내가 소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수석 연구위원(계급 대좌) 시절 군사연구를 위해 국방부 중앙고문서 보관소에서 88정찰여단 파일 원본을 보고 그대로 필사한 것』이라며 『이들 문서는 「극비」로 분류돼 누구나 열람할 수 없고 특수비밀취급인가자에 한해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아 열람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때문에 소련내에서도 현재 88정찰여단에 대한 공개 연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고 『처음 공개되는 이들 6개의 고문서는 88정찰여단과 김일성,그리고 그 부대의 조선인 빨찌산대원 연구에 귀중한 사료』라고 강조했다.


해방 직후 북한에 대한 증언

김일성은 해방 직후 평양에 온 초기에 한때 다른 사람에 비해 학력이나 경력이 초라한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과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에게 자신은 지도자 자리를 못 맡겠다고 했다가 그들로부터 억지로 맡으라며 권총으로 위협까지 받았다고 한다.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1]치스차코프 (레베데프)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라면서 당시 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2][3]

조선일보(1997/06/29)[2] : 한국전쟁 당시 북한 군사고문이었던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73) 소련군 퇴역대령은 29일 모스크바 중앙TV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붉은 왕조'에출연, "김일성은 처음 조직활동을 두렵다는 이유로 북한정부를 맡는 것을 거부했으나, 치스차코프 장군(제25군 사령관)과 레베제프 장군(군사회의 위원)이 권총을 들이대며 '해 봐, 통치해 보라구'라고 강권했다"고 증언했다.

플로트니코프 전북한 군사고문은 조선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이야기는 90년경 조-소우호협회의 한 모임에서 고(故) 레베제프 장군에게 직접 들었으며,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에도 실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1997/06/30)[3] : 해방이후 소련 점령군의 치스차코프 장군은 김일성을 호출, 정부를 맡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김은 조직사업과 정부지도자 직책에 대해 겁을 내며 이틀 동안 이를 거절했다. 일이 지지부진해지자 치스차코프 장군은 권총으로 김을 위협, 중책을 맡도록 강요했다. 치스차코프는 이같은 사실을 플로토니코프에게 털어 놓았다.

소련군의 6.25 참전 관련 증언

소련군의 6.25 참전 사실은 당시 미국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확전 여론이 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에 부쳤고, 소련도 참전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참전했던 소련 군인들은 2차 대전 참전 용사들과는 달리 퇴역 후 참전 용사 대접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英國(영국)에 韓國戰(한국전) 재조명 붐
著書(저서) ㆍ TV다큐멘터리서「證言(증언)」쏟아져
蘇聯(소련) 공군 參戰(참전) 사실등 확인
安保理(안보리) 불참은 스탈린 指示(지시)
英紙(영지) 당시 蘇(소) 참전군인 증언 토대 밝혀
擴戰(확전) 피하려 中國軍(중국군) 복장…美(미)도 모른체
美-蘇機(미-소기) 공중전 兩國(양국) 1,700명 희생 추정
스탈린 “조종사 교신 露語(노어) 쓰지말라” 지시도
노보스티誌(지) 참전군인 증언공개
참가사실 숨기려 민간복장┉2百(백)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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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