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高麗人 强制移住)는 1937년 가을 스탈린이 소련의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 중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8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킨 일을 말한다.

개요

1937년 가을 소련이 연해주의 조선인 지도자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가 허허벌판에 내팽개쳐 첫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이 숨졌다.[1][2] 이로인해 연해주에서의 조선독립운동은 완전히 말살되었다. 저명한 홍범도(洪範圖) 장군과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는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도 그 대표적 피해자이다.

김일성이 1940년 10월 만주서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 한 때 머물던 남야영이 있었고, 1941년 2월 16일 김정일이 태어난 출생지인 라즈돌노예 마을의 기차역은 당시 한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나르던 출발지였다.

소련은 일본 못지 않게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하게 탄압한 나라이다.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과 1937년 가을의 연해주 조선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사실상 추방)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용 가치가 높은 김일성 등 만주 빨치산(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은 88여단에 수용하여 교육과 훈련을 시킨 다음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면서 이들을 데려와 꼭두각시로 내세워 최고 권력을 쥐어주었다.

소련이 조선인 강제이주를 단행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그들 중에 일본 스파이 행위를 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시베리아 침공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는데,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소련 아닌 중국 쪽으로 침략의 방향이 확실히 정해지자, 연해주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이 일본을 자극하여 연해주 방향으로 침공해 올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분쟁 소지를 없앴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거의 확실해진 1945년 8월 9일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만주와 조선을 침공하면서 대일전을 개시하였다.


"日本(일본)간첩과 구분 안된다" 중앙아(中央亞)로 추방 / 기차호송 한달…불안한 장래에 한숨만

사진과 동영상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 '빈 깡통의 눈물' YTN NEWS 2017. 8. 26.


강제이주 피해 당사자 정상진(鄭尙進)의 증언

아래는 강제이주 피해 당사자의 한 명인,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副相)을 지낸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이다.[4]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趙明熙)도, 어린 정상진(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카자흐人들의 친절
 
 1937년 9월25일, 연해주 페르바야 레츠카驛(역)에서[5] 조선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연해주 거주 고려인(러시아 시절부터 그곳에 거주하는 韓人들을 일컫던 말)들이 日帝와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사범大,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鄭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鄭尙進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이 대우한 유일한 조선인 그룹은 1940~1941년간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피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빨치산들 뿐이다. 이들은 장차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고 조선을 점령할 경우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용한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참고자료 링크

"3일분 식량휴대…여행가라" : 스탈린 韓民族(한민족) 강제이주 비극 1992.02.28 조선일보 11면
어린이등 2천여명 굶고 凍死(동사) 극비 처리후 "위대한 事業(사업)"선전
18만「고려인」千(천) 8백대 화물열차에 짐승처럼 수송
沿海州(연해주) 일대 생활터전-고유문화공간 모두 파괴
중앙亞로 6천 km 이동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