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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 기초 자료들 ===
=== 작성 기초 자료들 ===


(1) 이 문서는 김용삼,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94~203쪽을 기반으로 작성으로 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 이 문서는 김용삼,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94~203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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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관파천(日館播遷)과 미관파천(美館播遷) ===
=== 일관파천(日館播遷)과 미관파천(美館播遷) ===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벌어졌을 때, 쿠데타군이 궁궐에 난입하여 민비를 죽이혀 했던 사건이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벌어졌을 때, 쿠데타군이 궁궐에 난입하여 민비를 죽이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겪은 고종은 일본 공사에게 혹시라도 변이 일어나면 조선 왕실을 보호해 달라며 일본 공사관으로의 파천(즉 일관파천)을 요구했다.  
이 일을 겪은 고종은 일본 공사에게 혹시라도 변이 일어나면 조선 왕실을 보호해 달라며 일본 공사관으로의 파천(즉 일관파천)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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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이 되어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때에는 미국 공사관에 피신을 요청하며 이를 추진했다.  
1894년이 되어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때에는 미국 공사관에 피신을 요청하며 이를 추진했다.  


이 두 사건은 현재 위키피디아에서도 표제어로 설정되지 않았다.  
이 두 사건은 현재 위키피디아에서도 표제어로 설정되지 않았다.
 


===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모든 국내외의 중요한 흐름을 놓치다 ===
===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모든 국내외의 중요한 흐름을 놓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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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베베르 공사의 주선을 통해 러시아 요원의 호위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갔고, 여기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민영환은 베베르 공사의 주선을 통해 러시아 요원의 호위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갔고, 여기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민영환은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했고, 러사이의 외무대신인 로바노프 등과 면담하여 러시아 군대가 조선 국왕을 보호할 것과, 러시아 군사고문관 파견 등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민영환은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했고, 러시아의 외무대신인 로바노프 등과 면담하여 러시아 군대가 조선 국왕을 보호할 것과, 러시아 군사고문관 파견 등을 요청했다.  


7월 29일,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군사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가 1897년 5월에 (그 때는 이미 환궁한) 고종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거행했다.  
7월 29일,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군사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가 1897년 5월에 (그 때는 이미 환궁한) 고종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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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군주]]
[[분류: 반일 히스테리]]
[[분류: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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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반일종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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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일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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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약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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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5일 (일) 02:22 판

생각해 보기: YTN 2016년 8월 25일 보도, "덕혜옹주의 실제 삶은?..."나라 잃으면 비참함 그 이상""

이 영화와 보도에서 그린 고종의 모습은 '신화' 아닌가?


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 TV,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김용삼,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94~203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 을사조약(전문), 친일청산, 한일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 다음 표제어의 내용을 참고하고, 내용이 없는 표제어에는 이 문서와 내용상 일관성을 갖추어 설명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을사오적, 러일전쟁, 고종, 아관파천,


문서의 전체 구성과 방향

  • 2000년대 초반부터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고종과 대한제국 황실 구성원들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들을 걷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 확인할 수 없는 인간적 면모를 우선시하면서 여기에 역사적 사실이 뒤따라가는 형국을 취하는 각종 (소위) 예술 작품들의 묘사로 인하여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 흐릿해지고 급기야 사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
  • 따라서 본 문서는 연대기순의 기술보다는, 고종에게 덧씌워진 신화의 허황됨을 밝히는 주요 논거들을 중심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 앞으로 이 문서를 수정, 재편집할 때에도 이 구성을 따르고,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기 작성된 문서의 의도를 해치지 않도록 주의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여기서 길게 서술하지 말고 별도의 표제어로 넘겨주기 기능을 이용하여 작성한다.

외교에 있어서 고종은 ‘만인의 허수아비’

서양식 제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선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

고종과 민비(閔妃)는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전혀 읽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명운이 걸린 국제 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질 때마다 엉뚱한 쪽과 손을 잡으려다 대세를 그르치고 말았다.


일본 공사의 알현 때에 고종은 민비의 조언을 들은 뒤 답했다

특히 1884년 중반부터 민비가 대외 문제를 좌지우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열강(列强)과의 외교 관계는 고종이 나서서 하였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민비의 의중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실제로 일본 지도부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민비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손오공 정도로 보았다. 1895년 9월 주한 일본 공사로 와서 민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 1847~1926)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민비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재능을 갖춘 호걸(豪傑)과 같은 인물이었다. (중략...) 사실상의 조선 국왕은 민비였다.

또한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조선의 궁중 법도(사실은 민간 역시 마찬가지로, 여성은 외부 손님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는 매우 엄하여 민비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고종을 알현하여 대화를 나눌 때 국왕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잘 들어 보면 그 소리가 바로 민비의 목소리였다는 것이다.

민비는 국왕 의자 뒤에 발을 치고 그 안에서 외국 공사와의 접견 내용을 듣고 있다가 국왕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고종은 그 말을 듣고 외국 공사에게 답변을 하였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1904년에 나온 프랑스의 한 잡지에서 찾아냈다고 한 민비의 사진. 민비의 사진으로 '주장'되는 것들이 매우 많아, 검색하여 찾을 때 주의가 요구된다. 이 기사 역시 그 이후에 검증 과정 등을 찾기는 어려웠다. <동아일보> 2001년 10월 7일 기사 참고.

이는 미우라의 악의적인 회고일까?

미우라 공사의 전임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역시 같은 사실을 전한다. 이노우에는 고종을 항상 내알현(內謁見)하였는데, 이는 신하 즉 배석자(陪席者) 없이 국왕과 직접 대화했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그 시간이 5시간 이상 될 때도 있었다. 그러니 그의 경험은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

이노우에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고종을 알현할 때에는 언제나 국왕의 뒤나 옆쪽으로 발이 내려져 있었다. 그 안쪽에 민비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민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고종에게 주의를 주거나 조언을 하며 소곤댔다.

그러고도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민비가 발을 두 세 치 연 뒤 얼굴을 절반 정도 내밀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대세를 모르고 몰래 엉뚱한 곳에 밀약을 추진하다

1880년대가 되면, 러시아의 남진(南進)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유럽(특히 영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위기가 닥친다. 이 때 바로 영국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본이 러시아와 대립하는 구도가 성립된다.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 되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는 때였다.

이 때 고종과 민비는 전혀 세계사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러시아와 수교를 맺고, 제1차 조러 밀약, 제2차 조러 밀약을 추진하였고, 이로 인해 청(淸)나라에 의해 국왕에서 폐위될 뻔한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국운을 건 모험을 감행하였고, 가까스로 성공하였다.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격돌하면서 한국 역시 세계적 패권 전쟁의 당사자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함께 맞물려 벌어진 사건들이 갑오경장동학난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 또는 馬關條約)을 통해 승리를 명문화하기는 했지만, 바로 그 뒤에 이어진 삼국간섭에서 러시아에 꼼짝 못하고 청나라로부터 이양 받은 요동(遼東) 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는 외교적 개입을 통해 요동 반도에서의 일본 제국이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 요구가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는 후에 러일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요동 반환이라는 사실 하나만 본 민비와 고종은 러시아를 한국의 외교 문제를 해결할 창구로 오판했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이며 거대한 흐름이 명백했음에도 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민비는 또다시 러시아를 한국으로 끌어들여 일본을 내치는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파천(播遷), 파천, 파천... 계속되는 고종의 책임 회피

‘파천(播遷)’이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 아관파천(俄館播遷)만 알려져 있지만, 고종은 그 외에도 여러 번 외국 공사관에 피신을 요청한 바 있다.


일관파천(日館播遷)과 미관파천(美館播遷)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벌어졌을 때, 쿠데타군이 궁궐에 난입하여 민비를 죽이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겪은 고종은 일본 공사에게 혹시라도 변이 일어나면 조선 왕실을 보호해 달라며 일본 공사관으로의 파천(즉 일관파천)을 요구했다.

1894년이 되어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때에는 미국 공사관에 피신을 요청하며 이를 추진했다.

이 두 사건은 현재 위키피디아에서도 표제어로 설정되지 않았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모든 국내외의 중요한 흐름을 놓치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궁녀 복장을 한 채 궁궐을 탈출하여, 서울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바로 전 해 10월 8일에 벌어진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연일 소란이었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Carl Friedrich Theodor von Waeber, 1941~1910)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백 명의 수병(水兵)을 서울로 데려왔다. 또한 당시 친러파인 이범진 등이 베베르와 공모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거쳐 국왕의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서울의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 문화재청은 2016년, 러시아 공사관을 2021년까지 복원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건물은 6.25 당시 크게 훼손되어 현재 탑과 지하 밀실만 남아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은 이 복원 작업과 근처의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이의 길을 '고종의 길'로 조성한다는 계획도 밝힌 바 있다. (현재 일부 개방 관람)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이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이 바로 일본과 가깝게 지내던 관리들의 처단이었다.

이 어명을 받은 고종의 친위부대는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을 살해하여 그 시체를 청계천에 버렸다.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정병하(鄭秉夏, 1849~1896),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또한 10여 명의 다른 대신들은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약 1년간의 아관파천 기간 동안 고종이 한 일을 살펴보자.

1896년 5월, 그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대표로 파견했다.

민영환은 베베르 공사의 주선을 통해 러시아 요원의 호위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갔고, 여기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민영환은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했고, 러시아의 외무대신인 로바노프 등과 면담하여 러시아 군대가 조선 국왕을 보호할 것과, 러시아 군사고문관 파견 등을 요청했다.

7월 29일,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군사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가 1897년 5월에 (그 때는 이미 환궁한) 고종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거행했다.

러시아 군사 교관단은 그 뒤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는 6천여 명의 조러 연합군 결성을 시도했다.

영관파천(英館播遷) 시도와 영국의 거절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 역시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격돌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이렇게까지 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은 잘 맞지 않는다.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를 이해해야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이었고, 그 가운데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에 정확한 내용이 기술되기를 바란다.

어쨌든 이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바로 이 당시 고종이 내린 결정이 바로 영국 공사관으로의 피신 요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고종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결정 장애 고종 때문에 조선 군대는 이리저리 휩쓸리고

조선 말기의 조선의 군대는 일본 교관을 초청하여 별기군을 창설해서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가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의 군대 편제로 바꾸고 청나라 교관의 조련을 받았다.

또한 미국의 퇴역 장군을 초빙해 미국식으로 훈련하다가, 또 다시 일본군의 훈을 받아 훈련군을 양성했다.

그런데 이 훈련대가 민비 시해에 동원되어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러시아식으로 훈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친러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 때 이완용은 1897년 러시아 군사교관의 초청을 반대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나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1904년11월에 다시 궁궐로 돌아왔고 그 다음 해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그러다 얼마 안 된 시점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과 함께 보기를 권한다.


계속되는 ‘고종 신화’

역사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이에 입각한 정당한 평가 없이 이루어지는 국가 주도의 각종 문화 사업들은 ‘신화 만들기’를 통한 이념, 문화, 지성의 마비를 가져온다.

이와 관련, ‘고종 신화’ 사업들을 간단히 정리, 소개하려고 한다. 자료가 발견되는 대로 업데이트가 되기를 바란다.

2016년 문화재청의 ‘고종의 길’ 조성 계획 발표

문화재청은 2016년에 러시아 공사관을 2021년까지 복원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건물은 6.25 당시 크게 훼손되어 현재 탑과 지하 밀실만 남아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은 이 복원 작업과 근처의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이의 길을 '고종의 길'로 조성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덕수궁 사무소에 따르면, 2018년 11월부터 이 길이 일반인에게 제한적으로 공개되었다.

덕수궁 관리소가 '고종의 길'을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제한적으로나마 공개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시물.


러시아공사관 복원 중 발견된 밀실이 고종의 피신 장소?

각종 ‘설’이 난무한다는 기사 전체의 요지와 달리, 밀실이 발견되었다며 이 곳이 피신 장소가 아니겠느냐는 결론부터 내리고 있다. 사실 이 밀실은 6. 25 때 파괴된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 관련기사: “37년 전 오늘, 아픈 역사의 현장 ‘아관’ 지하 비밀통로가 공개됐다”, 《한겨레》2018년 10월 16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66000.html#csidxcafcf3a3306250ab0b1d0fcafd68b3e


참고 자료

  • 김용삼,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94~203쪽
  • 《고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1]
  • “고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 황실문화재단 홈페이지 [3]
  • “조선 왕실: 황손 이석, '할아버지 고종 황제, 제대로 평가되길'”, 《BBC 코리아》2018년 11월 2일 [4]
  • “37년 전 오늘, 아픈 역사의 현장 ‘아관’ 지하 비밀통로가 공개됐다”, 《한겨레》2018년 10월 16일 [5]
  • “'아관파천의 현장' 옛 러시아공사관 복원된다”, 《연합뉴스》2016년 7월 20일 [6]
  • “1904년 프랑스 잡지에 실린 명성황후”, 《동아일보》2001년 10월 7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