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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이승만 TV, “조선의 기생, 또 한 범주의 위안부” 강연.


함께 보기 2: 이승만 TV, “공창제의 시행 - 신분적 성 지배에서 상업적 성매춘으로” 강연.


(1) 이 문서는 이영훈,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72~~299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 대일 민간 청구권, 역사왜곡,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친일파 청산론,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김태규 판사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소신 발언

조선의 기생제

조선의 신분 구조

현재 전하는 호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호적은 1606년에 만들어진 경상도 산음현과 단성현의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계산해 보면, 17세기 중엽 조선왕조의 인구는 대략 1,200만인데, 그 중의 30~40% 정도인 360~480만 명의 신분이 노비였다.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정보들을 종합하여 보면 15세기 말의 총인구 900만 중 적어도 40%는 노비였다.

참고로, 성별을 기준으로 본다면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뒤 노비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노비가 소를 제기하면 모두 사형으로 다스리자는 주장에 세종 역시 동의하였다. 이른바 1422년에 제정된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이 그것이다. 이후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변하였고, 노비를 함부로 죽인다 해도 큰 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동시에, ‘비(婢)’가 양인(良人) 신분의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양인 신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그저 놔두었을 뿐이고, 비(婢)와 양인 남자의 자식은 노비 신분으로 돌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노비 인구가 급증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조치가 한 몫을 하였다.


기생제의 확립

세종 대에는 기생의 신분이나 처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건의와 의견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기생의 신분은 사실상 ‘비(婢)’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교방(敎坊)의 기생은 정원을 230명으로 정하고, 각 군현에 속한 관비(官婢)를 3년간 뽑아올려서 충당한다고 규정했다.

세종 10년에 이르면 아무리 고급 관료가 데리고 있는 기생 첩이라고 해도, 그 자식이 천역(賤役)을 면하지 못하는 현상이 만연해졌다. 그러다가 1431년 초에 조선의 기생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치가 내려졌다. 세종은 각 고을의 기생이 낳은 자식은 천인(賤人)으로 삼자는 건의를 수락하였다. 이로써 기생의 딸은 기생으로, 기생의 아들은 관노(官奴)로 삼는 법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말이 되면, 세종은 관비가 양인 신분의 남자와 낳은 자식도 모두 천인으로 돌리자는 건의에 찬성하였다. 물론 예외적인 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예외였을 뿐이다.

고려시대만 해도 기생은 관비가 아니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치 이후 기생은 관비와 같은 신분이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설치하였다.

1436년(세종 18년) 말에, 세종은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옛날부터 변방 고을에 창기(娼妓)를 두어 아내 없이 지내는 군사들을 접대하도록 한 지는 오래되었다. (...중략...) 북방 지역의 경원 · 회령 · 경성 등의 읍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군사 지역인데, 이곳에서 근무하는 군사들이 멀리 가정을 떠나 추위와 더위로 고생하므로(... 중략...), 기녀를 두어 사졸들을 접대하게 하는 것이 합당한 이치일 것이다.” -《세종실록》75권, 12월 17일 기사: 재번역 및 정리는 편집자.


이와 같은 조치 이후, 전국의 각 군현마다 수십 명씩의 기생이 배치되었다. 세종대에 성립된 기생제는 20세기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원류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성윤리 – 정조(貞操)는 특정 신분의 여성만이 누리는 권리

조선시대의 이중적인 성도덕률

흔히 조선시대의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정절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어떤 도덕률이 요구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즉 조선시대의 엄격한 정조 관념은 양반가의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기생이나 민간의 계집종인 ‘사비(私婢)’에게는 정조를 요구할 필요도 없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기관인 감영이나 군현에는 관비(官婢)가 존재했다. 관비란 관(官)에 소속된 계집종이란 뜻으로서, 크게 급수비(汲水婢)와 기생으로 나뉜다. 전자는 말 그대로 물을 긷고 밥을 짓는 일을 담당했고, 후자는 관(官), 또는 양반이 벌이는 잔치나 연회에 나가 춤을 추는 일을 담당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수령이나 빈객의 침실에서 성적인 위안을 제공하였다. 이를 ‘방직(房直)’ 또는 ‘수청(守廳)’이라고 하였다.

수청은 기생 같은 관비에게만 요구했던 것이 아니다. 민간에 속한 계집종 즉 사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은 계집종을 시켜서 수청을 들게 했다.


양반 관료가 기생의 성을 지배한 대표적인 사례 – 박취문의 경우

《부북일기》는 박계숙(朴繼叔, 1569〜1646)과 박취문(朴就文, 1617〜1690) 부자가 남긴 것이다. 이 일기를 보면, 양반 계층이 기생의 성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울산광역시 중요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은 국가문화유산포털[1]에서 가져왔다.

17세기 중엽에 활약한 박취문이라는 양반이 남긴,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보면, 양반 계층이 기생의 성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부북일기》는 박계숙(朴繼叔, 1569〜1646)과 박취문(朴就文, 1617〜1690) 부자가 남긴 것이다. 아버지 박계숙은 1605년에, 박취문은 1644년에 함경도로 파견되어 약 1년간 군관(軍官)으로 복무하였는데, 이 때 근무지로 가는 여정이라든가 근무지에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여기서 박취문이 남긴 일기는 1644년 12월부터 1년 5개월간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는 자신이 동침한 기생들에 대한 기록도 남겨져 있다. 현재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박물관의 학술총서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박취문은 울산에서 함경도로 올라가는 동안 머무르는 곳마다 민간의 계집종과 기생을 제공받았다.

예를 들어 그는 집을 떠난 지 이틀 뒤인 1644년 12월 11일에 어느 지방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座首)의 집에서 숙박하였는데, 이날 그 집의 계집종인 통진아와 동침했다. 닷새 뒤인 어성현에서는 기생 춘일아와, 그 해 말에는 강릉부에서 기생 연향과 잤다는 식으로 일기가 이어진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자신과 동행한 하급 군관들이 어떤 기생들과 잤는지에 대해서도 써놓았다.

여기저기를 거쳐 근무지인 함경도 회령에 도착해 기생 월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월매는 바로 박취문의 아버지 박계숙이 이 곳 회령에서 근무할 때 관계를 맺었던 배종이란 기생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쓴 일기에 배종이라는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므로, 박취문은 그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월매라는 기생을 만나 새삼 그 내력을 들으니, 비감에 젖어 눈물을 무수히 흘렸다는 내용을 일기에 썼다. 그리고는 동침했다는 기사가 이어진다. 양반 군관인 부자(父子)가 변방 기생을 대를 이어 관계한 것이다.

《부북일기(赴北日記)》의 내지 부분. 출처는 국가문화유산포털[2].


그 뒤에 박취문은 경성부로 근무지를 옮기데 되는데, 거기서 향촌이라는 방직(앞서 설명한 대로 군현에 속한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 방지기, 방직기라고도 한다.)을 배정받았다. 그런데 기생이 모자라는 바람에 다른 군관이 방직을 배정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경성부사가 ‘태양’이라는 이름의 민간 계집종 즉 사비를 불러서 방직 구실(수청)을 하라고 명령한다. 이 때 경성부사가 하는 말은, “네가 남편 죽은 지 몇 년 동안 수절한다고 하던데, 참 가상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수청 들 사람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다. 군관을 모시고 가서 수청을 들어라.”

하지만 태양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경성부사가 그녀의 태양의 어머니와 오빠를 잡아와 곤장을 쳤고, 그제서야 태양은 할 수 없이 군관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기생이나 민간의 계집종, 천한 여성의 성은 그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남편의 것도 아니었다. 양반 관료의 소유나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박취문의 사례는, 우리 역사 안에 또 하나의 군 위안부라는 범주가 있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기생제의 쇠퇴와 유지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기생제는 노비제와 함께 점차 쇠퇴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조선왕조 말까지 기생제는 철폐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평안도 영변부(寧邊府)에는 19세기 전반까지 기생이 30명이 있었다. 그 외의 주요 감영(監營,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곳)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될 때에도 기생은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노비제와 기생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조선시대는 신분을 강제하면서, 동시에 천민에 속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인 폭력과 강제가 정당화되었던 사회이기도 했다.

이는 곧 계집종과 같은 천민 여성들이 정조 관념이 약하다는 편견이 만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성적 강제와 폭력에 시달리며 어쩔 수 없이 정조를 지킬 수 없었던 여성들이, 바로 그 이유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인식되는 악순환을 낳은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박취문의 사례에 등장하는 ‘태양’이라는 여성처럼, 천민 여성에게 수절과 같은 개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도덕률은 인정되지 않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신소설에도 계집종에 대한 묘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계집종들은 대부분 정조 관념도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 역시 그 당시까지도 이어지던 조선의 신분제가 조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지배를 받고 그 문화가 이식되면서 성윤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인식은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에 기반한 성 윤리나 성 관념을 다각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조선총독부의 공창제 시행과 상업적 매춘으로의 변화

근대 공창제의 기본 요건 – 등록, 의무적 성병 검진, 집창(集娼)

근대 서유럽에서 시작된 공창제는, 병사(兵士)들의 성병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그 직접적인 계기였다. 병사들이 성병에 감염되면 군의 전투력과 사기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공창제를 통해 매춘업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에 들어갔다. 이 때 공창제의 성립에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성매매 종사자 등록제. 둘째, 성병 검진 의무제. 셋째, 영업 구역 집중제(즉 집창제). 여기서 등록제는 인신매매와 부당한 금전상의 계약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고, 성병 검진 의무제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집창제는 풍기문란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는 매춘업으로 인한 풍기문란으로부터 일반 사회를 보호기 위하여, 매춘업을 한곳으로 모아 집창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행정적인 통제도 편리해지고, 성병 검진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은 1870년대에 걸쳐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공창제를 도입하였다.

일본 메이지(明治) 5년(1872년) 요시와라(吉原遊廓)유곽. 출처는 위키백과이다.

그 이전인 17~19세기 에도(江戶)시대에는 ‘유녀옥(遊女屋)’이라는 상업적인 매춘업이 있었다. 유녀옥 업주들은 가난한 집의 딸을 인신매매의 형태로 구입해 매춘에 종사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풍습이 개항 이후 외국인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자, 일본은 유녀의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유녀를 ‘창기(娼妓)로, 유녀옥을 ‘대좌부(貸座敷)’로 명칭을 변경하여 대좌부를 일정한 구역으로 모았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일본의 공창제의 시작이었다.

이영훈에 따르면, 19세기까지 조선에는 유녀옥과 같이 성매매만 전적으로 담당하는 상업적 시설이나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의 경제 자체가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룬 것도 아니었고, 딸을 팔 수 있는 가부장권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성이나 지방의 감영과 같이 인구가 밀집하고 유통이나 교통이 어느 정도 발달한 곳에는 상업적 매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상업성의 수준이 매우 낮고, 기본적으로 조선 자체가 천민 여인의 성을 쉽게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본의 공창제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은 평민 아버지가 딸을 팔 수 있는 형태의 ‘가부장권’이 성립된 사회가 아니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상업적으로 대놓고 성을 매매하는 것은 국가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났기 때문에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호주제 가족의 성립

여기서 일본식의 가족 제도가 조선에 이식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조선은 평민 아버지가 딸을 팔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조선의 성 윤리가 일본의 공창제 이식과 어떤 식으로 맞물리게 되는지를 살펴보려면 호주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호주제 가족은 1909년의 민적법과 1911년의 호적법, 1912년의 민법을 통해서 생겨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식의 가족 제도가 조선에 이식된 것이다.

호주제는 가족 성원을 양육, 보호할 권리를 국가로부터 부여 받은 권력자로서의 가부장을 전제로 한 제도이다. 이는 마치 말단 분대를 기초로 하는 군대의 편제와도 같이, 가족을 기초 단위로 하는 군대식 편제의 국가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분대원을 통솔하는 분대장과도 같이 호주는 가족 성원을 보호할 뿐 아니라 지배하는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 그리하여 가족 구성원의 지위가 변동할 때에는 호주의 승인과 신고를 통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가족 구성원은 호주에 대해서는 권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성원의 소득은 별도의 규정이 없으면 호주의 소득이다. 그러니 아내의 사회 활동도 호주의 승인이 있어야 법적이 효력을 갖는 것이다. 출생과 사망, 결혼, 이혼, 상속 모두가 호주의 승인과 신고를 통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가 확대된 것이 국가다. 국가는 이런 점에서 가부장들의 권리가 모인 결정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호주제 가족의 성립은, 당장의 생계 문제가 생존 문제로 직결되는 최하층의 가족들에게는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족 생활이 이루어지는 역설을 낳는다. 아버지의 승인만 있으면 딸은 어디든 ‘취업’이라는 이름으로 팔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매춘) 주선업자가 와서 좋은 말로 설득하고 약간의 전차금(前借金, 미리 당겨서 쓰는 돈. 빚.)을 주면 딸의 취업이 이루어진다. 이럴 때 딸은 거부할 권리가 없다.

바로 여기서부터 공창제를 둘러싼 인신매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의 인신매매는 없었다. 사람을 사고판다면 그 대상은 노비들이었다. 노비는 법적으로 주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호주제처럼 어떤 계층이든 아버지가 권리를 가지는 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가족의 일부만 똑 떼어 파는 현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호주제가 들어오고 정착이 되자, 여기에 조선사회가 남긴 여러 가지 모순들이 뒤섞이게 된다. 아버지가 딸을 주선업자에게 팔아 기생으로 넘기는 것은 단순히 빈곤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부장의 의무는 생겨났지만, 이 의무가 가정 윤리로 성숙해질 만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윤리 자체가 높은 신분에게만 허용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신분 지배와 차별의 유산이, 어느 날 개별 가정의 가장의 절대적 권한으로 이어지면서 모순이 점차 깊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조선의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에도, 기생제라든가 첩제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보면 전에는 상민 신분이었던 사람이 사회적 성공을 이루어 양반 신분을 차지하게 되면 오히려 더 첩제를 공고히 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변화 역시 가난한 신분의 하층민이 딸을 팔게 되는 추세를 부추기는 데 한 몫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공창제 시행

공창제 즉 '대좌부창기취체규칙' 시행을 알리는 조선총독부의 관보 1095호(1916. 3. 31.) 여기서 '대좌부'는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영업장소로, '유곽'을 말한다. '창기'는 조선시대에서의 의미와 달리, 성매매 여성을 가리킨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3월 31일, 관보를 통해 ‘대좌부창기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을 공포한다.

여기서 ‘창기’는 노래와 춤을 추는 일도 하면서 수청을 들던 종래의 기생과는 의미가 다르다. 즉 성매매를 전업(專業)으로 삼는 여성을 가리킨다. ‘대좌부(貸座敷)’는 창기를 맞은 포주인 대좌부업자가 제공한 영업장소를 말한다. 흔히 ‘유곽(遊廓)’이라고 부르는 장소이다.

총독부의 공포 내용을 살펴보면, 창기가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행정적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창기는 그의 부와 모, 호주 등이 인감을 찍은 취업승낙서와 창기와 포주 사이에 맺은 전차금 계약서, 건강진단서, 창기업 사유서 등을 첨부한 신청서를 관할 경찰서나 헌병대에 제출해야 했다.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걸쳐 영업허가를 받더라도 창기는 까다로운 규제를 받았다. 우선 창기는 경찰로부터 받은 ‘허가증’을 자신의 방 즉 영업장소에 게시해야 했다. 매달 두 번씩 정기적인 성병 검진도 있었다. 거주지도 제한되었고 입출도 자유롭지 못했다. 창기업을 그만둘 때에는 허가증을 경찰서장에게 반납한 뒤에 폐업 허가도 받아야 했다.

세칭 포주인 대좌부영업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업소에 찾아온 유객의 신상이 담긴 명부를 작성해야 했다. 또 매달 창기의 영업 소득과 전차금을 갚은 실적도 관할 경찰서장에게 보고해야 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공창제 시행으로, 조선시대의 신분적 성 지배로부터 상업적 매춘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변화는 매우 점진적이고 단계적이었다. 공창제의 초기에는 소수 일본인만의 특권적인 상업적 매춘이었지만, 점차 조선인도 참가하는 대중적 매춘으로 흘러가는 과정이 포착된다.

공창제의 시행과 함께 전국 주요 도시 25곳에 유곽 구역이 설정된다. 그 뒤에 이루어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1929년을 기준으로 창기는 총 3,285명(일본인 1,900명, 조선인 1,385명)이었다. 이들의 월 평균 소득은 31엔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업한 여공들의 월 임금이 18엔 정도였던 데 비하면 창기들의 소득은 낮은 게 아니었다.

또한 이영훈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한 달에 1인당 약 14명의 손님을 맞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략 이틀에 한 번꼴이다.

(참고로, 1964년 군산 사창가의 매춘 여성이 하루 평균 4~5명, 서울 성동구의 매춘녀가 하루 2~3명을 맞이했다는 기록을 보면, 1920년대의 창기 노동 수준이 1960년대 한국의 매춘 여성보다 낮았던 것이다. )

또한 창기를 찾은 유객의 수는 연간 약 56만 명이었고, 이 중 약 45만 명이 일본인이었다. 유곽별로 차이가 있지만, 전국에서 제일 큰 서울 중구의 신마치(新町) 유곽의 경우 유객의 95%가 일본인이었다.

이 조사에서 1인당 유흥비는 일본인의 경우 8엔, 조선인은 4엔이었다. 이로 미루어보다 당시까지는 조선에 시행된 공창제가 전반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일본풍의 상업적 매춘’이라는 것이 이영훈의 결론이다.

조선에 시행된 공창제의 특징

조선인 중심의 공창제로

“공창과 사창”, 《동아일보》1927. 8. 7.

1930년대 중반부터는 위와 같은 상황에 역전이 일어난다. 즉 조선인이 공창제의 운영과 이용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영훈은 그 근거로 1924년과 1937년 인천 부도(敷島) 부근 유곽의 추이를 비교하고 있다.

그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1924년 이 지역 일본인 유곽은 조선인 유곽보다 번창했다. 그 때 일본인 유곽은 창기가 115명, 유객이 2만 2972명이었던 데 비하여, 조선인 유곽은 창기가 95명, 유객이 1만 84명이었다.

그러다가 1937년이 되면 상황이 역전된다. 이때 일본인 유곽은 창기 수가 83명으로 줄고, 유객 수도 2만 2913명 정도로 정체되었다. 반면 조선인 유곽은 창기가 149명, 유객이 2만 4974명으로 그 수가 모두 증가하면서 일본인 유곽을 넘어섰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시된다.

1934년 대규모 공사가 착공되고, 1936년 경인 산업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토목업자, 노무자들이 인천으로 몰려왔다. 이 때문에 인천 부도 지역에 조선인 유곽이 번창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게 이영훈의 설명이다.

그는 식민지적 개발과 더불어 소득 수준이 높아진 조선인이 점차 일본인 전용의 상업적 매춘에 참가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면서 대중적 매춘사회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조선 공창제의 또 다른 특징 – 군부대와의 관련

조선에서 시행된 공창제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대좌부 영업구역이 일본군이 주둔한 곳과 밀접한 연관 아래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 조선선의 공창제는 1916년 도입되었다. 이 때는 바로 조선군 제도가 시행된 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공창제는 처음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련 아래 설치되었고, 병사들의 성병 통제를 위한다는 공창제의 목적이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가운데 시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서울에서 최초로 건설된 신마치 유곽은 조선주차군(조선주둔군) 본부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후 마포에 건설된 유곽도 사실상 일본군을 위한 시설이었다. 함경북도 나남은 조선주차군의 중요 주둔지였던 곳으로, 후에는 조선군 19사단 사령부가 설치된 대표적인 군사도시다. 그곳에는 1908년 유곽이 설치되었다.

함경북도 회령 역시 군사도시로서, 1912년 덕천루(德天樓)라는 유곽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 지역은 앞서 언급한 박취문의 《부북일기》에서도 확인했듯, 유래가 깊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즉 최소한 17세기 이래로 이곳의 기생촌은 일본 공창제 시행 이후에 ‘매매’로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지 군 위안 시설로서 그 명맥이 이어졌던 곳이다.

이영훈이 소개하는 사례 하나를 더 보자. 어떤 일본인 유곽 업주가 유곽을 지으면서 조선인 묘지를 침범해 소송이 발생했다. 유곽 주인은 재판에서 ‘유곽을 옮기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고집을 부렸다. ‘이 유곽지는 경성에 주둔한 군졸의 위생에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전할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사례는 유곽이 처음부터 군사를 위안할 시설로 설립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 이영훈,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72~~299쪽
  •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백년동안, 2018
  • 《세종실록》
  • “기생의 삶과 생활 – 천역의 대물림과 기생으로 살아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박계숙 · 박취문, 《부북일기》, 울산박물관 학술총서, 2012
  • “대좌부창기취체규칙”, 《조선총독부관보》1095호, 1916. 3. 31.
  • “창기문제대강연회”, 《동아일보》1934. 6. 3.
  • “공창과 사창”, 《동아일보》1927.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