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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 조선 총독부 청사 해체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9일 (월)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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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를 보기 전에: 1995년 8월 15일 MBC 뉴스데스크, “오욕의 첨탑 철거”


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 TV, “중앙청 해체의 진실”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김용삼,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대한민국 역사를 지우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84~193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3) 이 문서와 관련, 쇠말뚝 소동 즉 쇠말뚝 발견과 제거의 거짓을 알린 최초의 기사인, 김용삼의 다음 글을 참고하기를 강하게 권한다. “대한민국의 국교는 풍수도참인가?”《월간조선》1995년 10월호 기사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민족 정기 회복, 쇠말뚝 소동, 중앙청, 중앙청 해체, 반달리즘(vandalism), 청와대 구 본관, 조선 총독부 청사, 친일파 청산론

간단한 개요

1995년 8월 15일에 해체되기 전 약 7년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구 조선 총독부 청사'(중앙청)


조선 총독부 청사는 1986년부터 해체 직전인 199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3공화국에서 5공화국까지 정부 청사로, 1공화국에서 3공화국까지 중앙청으로,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출발한 장소이자 해방 이후 미 군정청 청사 등으로 사용된 곳이다. 경복궁 내에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펼친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의 주요 사업으로 철거가 결정되었고, 1995년 8월 15일에 광복 50주년 기념 행사 때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철거 결정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재의 위치인 용산 가족 공원 근처로 이전하였다. 해체 및 철거 행사의 중심이었던 건물의 첨탑 부분은 독립 기념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해체 결정의 정치적 의도

1993년 2월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문민(文民) 정부’임을 표방했다. ‘문민’에 대하여 보통 ‘일반 국민’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지지만, 그 역사 ·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히 전(前) 정권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뒤집는 의도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문민’ 자체가 군(軍) 출신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전 정부(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겨냥한 용어이며, 실제로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 여러분.

저는 14대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새로운 조국건설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중략...) 이제 민족진운의 새 봄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 새로운 출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한국 창조의 꿈을 가슴 깊이 품고 있습니다. 신한국은 보다 자유롭고 성숙한 민주사회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입니다. 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입니다. 문화의 삶, 인간의 품위가 존중되는 나라입니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되어 평화롭게 사는 통일조국입니다. (... 중략...) 우리 모두 이 꿈을 가집시다. 우리는 일찍이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을 이루어 낸 민족입니다. 우리 다시 세계를 향해 힘차게 웅비해나갑시다. (...중략...)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굵은 글씨 등 강조는 편집자)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중앙돔이 해체된 이후 철거 작업 중인 '구 조선 총독부 청사'.


이 때 그가 내세운 ‘새로운 조국 건설’의 세 가지 당면 과제로 ‘부정부패 척결’, ‘경제 살리기’, ‘국가 기강 바로잡기’가 있었다. 의미상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첫 번째와 세 번째 기조를 나누어 반복적으로 강조한 셈이었다. 이 연설문에서 ‘민족’은 15회 반복되었다.

이후 사회적으로 ‘민족’ 중심의 쇄신 분위기가 퍼졌고, 결국 취임 6개월 뒤인 1993년 8월 9일 전격적으로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가 결정되었다.

동시에, 또는 직후에 함께 내려진 여러 가지 지시와 그 결과를 보면, 이는 독재와 시민혁명(사태 등등), 군부 쿠데타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로 대변되는 한국 현대사의 청산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었다.

당시 교문수석비서관이었던 김정남(金正男)은 《월간조선》10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중앙청 건물에서 이루어진 한국 현대사가 우리 정부의 정통성 확립과는 거리가 먼,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그 건물에 대해 애착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강조 표시는 편집자)

바로 이 인터뷰를 통해 김영삼 정부는 한국 현대사 전체를 청산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만 셈이다.


당시 이 건물은 1986년부터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영삼은 이를 ‘구 조선 총독부 건물’로 규정하고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 총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지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1986년이면 바로 전두환 정부 때였다. 일차적으로는 이 부분을 노린 뒤,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처사로 볼 수밖에는 없는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더구나 이 건물의 해체 및 철거를 지시하면서 그 시점을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 맞추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관련 정부 기관에는 일대 소동이 빚어졌다.

결정 직후의 혼란과 소동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와 더불어 청와대 안가 철거와 구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를 '주요 업적'으로 소개하는 (사) 김영삼민주센터의 홈페이지 해당 부분.


계획에도 없던 국립중앙박물관 재이전, 재개관

국립중앙박물관 입장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다. 더구나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쳐 새로 개관한 지 만 7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여기서 다시 새 건물을 세운다는 계획 자체가 없었다. 대통령의 건물 해체 및 철거 명령이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건물 이전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국보와 보물을 보관할 장소였다.

당시 문화부는 급히 임시 박물관을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선정된 곳이, 국립박물관 경내에 있던 식당 건물이었다. 이 곳으로 유물을 임시로 옮기고, 용산 가족공원 안에 새 박물관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청와대 구 본관 건물은 무슨 죄로 없어졌나

김영삼은 총독부 청사 해체 때의 논리와 같은 이유를 대면서 청와대 구 본관 건물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건물은 지상 2층, 지하 1층의 구조, 1735㎡(525평) 규모로 대통령 집무실과 거주 공간이 함께 있었다.

특히 이 곳은 조선 총독부의 관사와 미군정 당시 하지(Hodge) 중장의 관사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가 된 곳이다. 그리하여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등 역대 대통령들이 대한민국의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 처리하였던 역사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영삼이 연설문에서 말한 ‘새로운 조국 건설’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청와대 주변 안가(安家) 없애기

김영삼은 이와 함께, 청와대 주변의 ‘안가’도 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공원을 조성했다.

‘문민 정부’를 표방했던 김영삼 정부와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대중에게 안가는 군부 독재의 상징과 다름없었다.

안가 철거 명령은 국민 정서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 결정으로 인해 김영삼의 인기는 연일 치솟았다.

이런 ‘철거 행진’에 대하여,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제2의 건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해체와 함께 진행된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아닌) 명령

해체된 뒤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 전시된 구 조선 총독부 청사의 중앙돔.


구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이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로 정해지면서, 사회적으로 ‘민족정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바람이 불었다.

바로 이 때, 민간에서 간간이 제기되던 근거 없는 소위 ‘민족 운동’들이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함께 시행되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실제로 (사)김영삼민주센터 등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 사업이다.

- 소위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으로서, 전두환 · 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비롯, 신군부 핵심 세력이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 청와대 주변 안가 허물기
  •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기

- 현재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에서 ‘국민학교’를 치면 ‘초등학교’로 자동 변환될 정도다.

- 황국 신민 양성을 목적으로 만든 명칭이었다는 논리

  •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

- 남산 외국인 아파트 폭파 장면을 공영방송을 통하여 전국에 생중계

  • 임시 정부 청사 복원 계획 발표
  • 공산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의 국가 유공자 지정[1]

역사를 바로세우는 데 동원된 논리 – 풍수가가 된 지식인들

쇠말뚝 제거 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소위 전문가들의 식견과 논리가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서울대학교 교수 최창조가 있다.


백두산의 정기를 차단하기 위하여 일제가 세운 조선 총독부 청사와 관사(청와대 구 본관)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최창조 전 서울대학교 교수의 <경향신문> 기고문.[2]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의 논리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이 사업 전부터 서울 경복궁의 위치가 풍수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민족의 목줄을 죄는 목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최창조의 주장은 김영삼 정부의 이 사업이 결정, 진행될 때에 매우 큰 힘이 되었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북악은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그 출중한 기맥에 뻗어 내려와 경복궁 근정전에서 그 혈장(血臟)을 펼친다. 이로부터 온 나라에 백두산 정기를 나누어 준다는 것이 바로 전통 지리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런데 왜인들이 국토를 강점한 뒤에, 북악의 정기가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자리에 그들의 두령인 조선총독의 숙소를 만들었다. 기맥의 목줄을 죄고 국기(國氣)의 출발점인 경복궁 남쪽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당연히 두 건물(조선 총독부 청사와 관사 즉 청와대 구 본관)을 철거하고 원상 복구해야 하는 것이 풍수의 정도(正道)이다.

이런 주장들은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에게서 반복되었다.

철거 이후

1995년 8월 15일에 거행된 광복 50주년 경축식의 핵심은 바로 이 건물의 중앙 돔 해체였다. 이 장면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이 작업을 시작으로 구 조선 총독부 청사는 본격적인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1996년 11월 13일, 조선 총독부 건물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다.

1998년 8월 8일 독립기념관에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 해체된 중앙 돔과 건축 부재를 일반에 공개했다.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동안, 김영삼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알려주는 사건도 함께 발생하였다.

김영삼은 "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비외교적 발언까지 했다가 외환위기 때에 일본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취임식에서 그가 다짐하였던 세 가지 당면 과제는 이렇게 마감되었다.

참고 자료

  • 김용삼,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대한민국 역사를 지우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84~193쪽
  • “문민정부 주요업적”,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 홈페이지 [1]
  • “일제(日帝)가 흐려놓은 민족(民族)정기 회복 –37개 지명(地名)되찾고 쇠말뚝 16개 제거”, 《국정신문》1995. 8. 14,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홈페이지,

[2]

  • “김영삼(金泳三) 14대(代)대통령 취임 “신한국(新韓國) 창조·더불어 사는 사회(社會)건설””, 《국정신문》 1993. 2. 25,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홈페이지, [3]
  • 최창조, “한국 풍수의 재발견 – 청와대 옮겨야 한다”, 《경향신문》1992. 7. 11

각주

  1. 이는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1910~1948)도 건국포장을 주었던 길을 열고 말았다.
  2. 한국風水(풍수)의 재발견 (1) 경향신문 1992-07-11 21면
  3. 한보비리사건 청문회; 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씨 대선자금제공 시인 후 번복 되풀이 KBS 1997.04.07
  4. 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⑩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김현철 사건 (4) 김현철, 구속! 월간조선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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